참회록을 쓰고 싶은 날 1 (외 2편) 이영춘 우울이 청동거울로 밀려온다 거울 뒤편이 보이지 않는다 거울 뒤편에 숨은 얼굴이 눈물을 흘린다 제대로 살지 못했다고 제대로 살고 있지 못하다고 성자 같은 도량도 아량도 없이 남의 등 뒤에 숨어 꼬리만 드러낸 채 꼬리 감춘 채 그 얼굴 보이지 않는다 창밖 나무이파리들이 흔들린다 소리 없이 흔들린다 갈 곳 몰라 흐느끼는 바람같이 고요를 물고 들새 한 마리 날아간다 내 부끄러운 얼굴은 어느 유목민의 후예인가 툰드라의 골짜기를 떠도는 바람인가 아득한 그 길 물어 내 발자국 지운다 소리의 데몬스, 벌레들의 방
1 고요가 흐르는 소리, 고요의 빗소리와 어둠과 적막과 정령들의 숨소리와 숨소리들이 공간을 끌고 다니는 소리, 공간이 어둠을 채우는 소리 데몬Demon, 나의 데몬스, 절망의 끝에 이르는 데몬스, 배신의 끝에 이르는 데몬스, 머릿속에 입력된 이름을 하나씩 삭제한다 삭제는 죽음이다 죽음은 정지다 머릿속에서 바퀴 속에서 정령을 끌어안고 고요가 흐르는 소리를 끌어안고 나는 나를 장사지낸다 빗소리 속에서, 문지방 위에서 내가 묻히는 방, 마침표가 점철되는 방 2 어제는 자장면을 배달 시켜 먹고 오늘은 ‘백종원의 역전우동’을 배달 시켜 먹고 내일은 오징어 덮밥을 배달 시켜 먹고 비스듬히 정말로 비스듬히 아무것도 없는 무형에 기대어 하루하루를 하루살이처럼 살고 있다 어제 하루살이는 죽음의 웅덩이로 돌아가고 오늘 하루살이는 미생물의 웅덩이에서, 오래 묵은 벽장 속에서, 벽장 속 곰팡이처럼 아픈 세상이다 카오스다 집단으로 공동으로 날개 잘린 벌레들의 방, 침대 모서리, 책상 모서리, 컴퓨터 모서리에 붙어 겨우 기생하는 21세기 동족의 방, 공존의 방! 더듬더듬 먹을 것을 찾아 기어가는 그레고르 잠자Gregor Samsa 같은 벌레들이 간헐적으로 숨 고르는 소리, 눈 감고 입 막은 세상이 구름처럼 떠 간다 안산에 와서 강물처럼 울었다 안산 벌에서 오지 않는 아이들의 이름을 불렀다 금방 대문을 열고 들어설 것만 같은 교실 문에 달덩이 같이 환한 얼굴 비칠 것 같은 키가 훌쩍 큰 아들, 눈이 해맑게 반짝이는 딸, 그 얼굴 그 발자국 소리들 멀리 사라지고 나는 빈 공원, 빈 그늘, 빈 의자, 빈 강가에 앉아 강물처럼 울었다 거리엔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현수막과 노란 리본이 너희들의 숨결인 양 나부끼고 있는데 너희들 얼굴은 보이지 않고 빈 그림자만 허공을 맴돌고 있구나 너희들 영혼은 지금 어느 하늘을 떠돌고 있을까? 바람소리, 파도 소리, 통곡의 소리, 뒤에 남은 자들의 심장을 훑고 가는데 나는 돌아오지 못한, 돌아올 수 없는, 아이들의 이름을 부른다 목 놓아 불러본다 살아 있는 내 발자국, 내 얼굴이 부끄러워 자꾸 허공을 향해 헛기침을 한다 아이야, 아이들아! 이 불행의 나라에는 한여름에도 눈이 내리고 어른들은 아직도 갈 곳 몰라 눈발처럼 휘청거리고 있다 저 아득한 하늘을 향하여, 너희들의 넋을 향하여, 슬픈 역사의 한 페이지를 넘기고 있다 ―시집 『참회록을 쓰고 싶은 날』 2024.11 ------------------------- 이영춘 / 봉평 출생. 경희대 국문과 및 교육대학원 졸업. 1976년 《월간문학》 등단. 시집 『시시포스의 돌』 『시간의 옆구리』 『봉평 장날』 『노자의 무덤을 가다』 『따뜻한 편지』 『오늘은 같은 길을 세 번 건넜다』 『그 뼈가 아파서 울었다』 『참회록을 쓰고 싶은 날』 외. 시선집 『들풀』 『오줌발, 별꽃무늬』, 번역시집 『해, 저 붉은 얼굴』 외. 시 해설집 『시와 함께, 독자와 함께』. 원주여고 교장 역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