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의 천지, 승리섬⑧ 58 ~ 81p(完)중에서
낙도본부총회ㅡ광포의 스승 슬하로! (하)
이케다(池田) 선생님은 낙도본부총회에서 이렇게 격려했다.
"저는 지금 당장이라도 각 섬으로 날아가고 싶은 심정입니다.
늘 낙도의 벗이 행복하기를 바라며 기원하고 있습니다."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없는' 광포 스승의 진심이다.
승리섬부의 동지는, 이런 스승의 진심을 가슴에 품고 오늘도 분투하고 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명의 천지에서!
니치렌대성인(日蓮大聖人)은 "마음의 일법(一法)에서 국토세간도 출래하는
것이니라." (어서 563쪽) 하고 말씀하셨다. 마음이 바뀌면, 주위환경도
변혁할 수 있다. 일념이 바뀌면, 자신이 사는 지역을 발전시킬 수 있다.
승리섬부의 존귀한 동지는, 이 성훈을 몸으로 읽었다. 혹독한 환경에도
지지 않고, 착실하게 실증을 나타냈다. 몰이해로 중상하고 박해해도 참고
견디며 지역에 공헌하고, 사이 좋은 선(善)의 연대를 넓혔다.
"숱한 악조건 속에서도 낙도의 동지는, 창가의 깃발을 긍지 드높이 내걸고
끝까지 분발했다. 나는 누구보다도 그 불굴의 신심을 믿었다." ('수필
인간세기의 빛') 다기진 동지를 신뢰하고, 행복을 염원하면서 격려를 거듭
하는 이케다 선생님. 광포 스승의 진심에 부응하고자, 어떤 일이 있어도
명랑하게 나아가는 낙도의 벗. 이 '사제(師弟)의 마음'이 법화경(法華經)
에서 설한 '삼변토전(三變土田)'의 장대한 드라마처럼 지역을 변혁하는
길을 열었다. 이것이 승리섬부의 긍지다.
법화경 견보탑품 제11에는 거대한 보탑이 대지에서 출현한다.
보탑 안에는, 석존이 설한 법화경의 가르침이 진실이라고 보증하기 위해
다보여래가 있다. 그러나 보탑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다보여래의 음성은
들리지만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석존은, 그 부처의 모습을 보고 싶어하는
보살들에게 '다보여래는 전부터 자신이 출현할 때 제불(諸佛)이 모이기 바랐
다'고 밝히고, 전 우주에서 석존 분신의 제불을 불러모았다. 그러려면
국토를 정화하여 부처가 모이기에 적합한 불국토(佛國土)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석존은 세차례에 걸쳐 사바세계를 비롯한 무수한 국토를 정화
하고 하나로 연결해, 광대무변한 불국토로 만들었다. 이것이 '삼변토전'이다.
그 뒤, 드디어 '허공회(虛空會) 의식'이 시작된다. 승리섬부는 이 '삼변토전'
을 실현하고자, 몇번이고 성실하게 대화를 거듭하면서 끝까지 지역을 위해
힘썼다. 이케다 선생님은 '삼변토전'의 법리(法理)를 들어 이렇게 썼다.
"국토의 차이도 자신의 일념에서 일어나고, 자신의 일념 속에 국토도 들어
갑니다. 마음이 지닌 힘은 위대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지지 않는'
강하디 강한 신심의 일념이 있으면 모든 환경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한 법리가 '삼변토전'입니다." (소설《신 인간혁명》제24권 '등대')
1978년 10월 7일, 제1회 낙도본부총회를 개최했다. 전국 120여개 섬에서
모인 대표 멤버는 이케다 선생님의 격려를 받고 새롭게 서원(誓願)을 불태
웠다. 니치렌대성인은 지역의 기둥인 문하에게 "그 지방의 불법(佛法)은
귀하에게 맡기겠소. 불종(佛種)은 연(緣)에 따라서 일어남이니." (어서
1467쪽) 하고 말씀하셨다. 이 성훈을 가슴에 품고, 낙도의 동지는 사랑하는
섬의 번영을 기원하고, 성실하게 대화를 거듭하며 지역공헌에 힘썼다.
그리고 힘찬 기세로 낙도총회에 참석해 '섬의 제2기 광선유포를 목표로
나아가자'는 이케다 선생님의 제안에 더욱더 결의를 다졌다.
참석자들은 저마다 기쁨과 결의를 말했다. "오늘은 제 인생 최고의 날입니
다. '건강하게 오래 사세요'라는 이케다 선생님의 격려를, 섬의 모든 멤버
에게도 전하겠습니다. 제2기를 열기 위해 더욱 움직이겠습니다."
"선생님께서 여러모로 마음을 써주셔서 감개무량합니다. 저력을 발휘해
더욱 열심히 하겠습니다." "기쁨과 용기가 솟아오른 총회였습니다.
다른 낙도 여러분의 모습을 보고 매우 감동했습니다. 생애 구도하는 마음
으로 섬의 발전에 힘쓰겠습니다." "총회에서 받은 격려를 잊지 않고, 다함께
힘을 모아 '광포는 낙도에서'를 구호로 하여 앞으로도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이튿날인 8일 오전, 낙도 멤버들은 섬으로 돌아가기 전에 도쿄 시나노마치에
있는 세이쿄신문 본사에 들렀다.
우리 히로시마현 인노섬에서는 여덟명이 총회에 참석했습니다.
총회 이튿날 아침 최고의 추억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세이쿄신문 판매
점을 운영하고 있어서, 모처럼 학회본부까지 왔기에 세이쿄신문 본사를 견학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다 함께 방문했습니다. 다른 섬에서 온 분들도
모두 같은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본사에는 이미 낙도본부의 벗이 많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그 자리에 이케다 선생님이 오셨습니다.
전날 총회에 이어서 총회에 참석한 벗을 격려하고자 일부러 찾아와주셨습
니다. 선생님의 제안으로 본사를 배경으로 하여 세그룹으로 나눠 기념촬영
을 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날아오를 듯한 기분이었는데, 선생님은 인노섬
에서 온 우리 쪽으로 다가와 다정하게 말을 걸어주셨습니다.
"잘 주무셨습니까? 도쿄는, 섬과 날씨도 다르고 시끄럽지요. 감기는
걸리지 않았습니까?" 선생님의 다정하고 자상하고 성실한 모습에,
낙도총회에서 말씀하신 '인간성의 빛'을 몸으로 배웠습니다.
인노섬의 벗에게 1978년은 잊지 못할 소중한 해다.
3월 27일, 이케다 선생님이 인노섬 본부의 동지에게 직접 메시지를 써서
보냈다. "인노섬의 동지 여러분, 부디 제목을 근본으로 즐겁고 힘차게
인생을 살아가기 바랍니다." 그리고 제1회 낙도본부총회에 참석하고
세이쿄신문 본사 앞에서 벗을 격려했다. 벗은 그뒤에도 광포 스승과 새긴
원점을 가슴에 품고, 인노섬의 광포를 위해 달리고 또 달렸다. 인노섬에서
'총(總)히로시마 낙도 서밋'을 23회, 주고쿠 낙도 서밋도 7회나 개최했다.
'제목 근본으로 모두 사이좋게 스승과 함께'라는 마음이 인노섬의 '승리와
행복의 인(因)'이 되었다.
'세토우치의 하와이'라고 불리는 야마구치현 스오오시마섬에도 벗이
활기차게 모였다. 스오오시마섬의 멤버가 총회에 참석한다는 소식을 들은
이케다 선생님은 총회를 앞두고 전보를 보냈다. "진심으로 소중한 스오오시
마섬의 여러분, 언제까지나 사이좋게 대복운으로 넘치는 인생을 살기 바랍
니다." 이 전언은 스오오시마섬의 영원한 지침이 되었다. 벗은 이체동심
(異體同心)의 단결로 광포에 힘쓰면서, 총회에 참석한 뒤에도 지역에 우호의
꽃을 피웠다. 1984년 10월 24일, 스오오시마섬은 환희로 들끓었다.
닷새 동안 개최한 야마구치 지도 마지막 날, 스오오시마섬의 벗이 기다린다는
이야기를 들은 이케다 선생님이 야나이회관에서 이와쿠니로 향하던 도중에
일부러 시간을 내어 방문했다. 그날은 벗의 마음을 나타내기라도 하듯
멋진 가을하늘이 펼쳐졌다.
스오오시마섬 동지에게 그토록 기다리던 날이 찾아왔습니다.
오후에 섬에 도착한 이케다 선생님은 곧바로 우리 곁으로 오셨습니다.
커다란 환영 간판을 만들어 기다리던 청년들에게 "스오오시마섬의 광선유포
를 부탁합니다." 하고 격려하셨습니다. 제게는 '수고한다'고 말하면서
제 손을 잡아주셨습니다. 감동으로 가슴이 벅차 올랐습니다. 멤버가
운영하는 음식점에서 간담을 하고, 선생님이 '함께 사진을 찍자'고 제안하셨
습니다. 회합장소 밖에서 혼슈와 섬을 연결하는 오시마대교를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했습니다. 그 밖에도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 달려온 멤버들을
격려하셨습니다. 그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섬의 유력인사가 '이렇게
훌륭한 분은 본 적이 없다'며 바로 입회했습니다.
스오오시마섬을 방문한 이케다 선생님은, 섬의 공로자 부부를 불러 가정상황
등을 듣고 격려하셨습니다. 그 부부는 소카대학교 야구부 기시 감독의 부모
님입니다. '인생 최고의 날'이라고 하면서 기뻐했습니다.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선생님의 따뜻한 마음에 감동했습니다.
제가 인사를 했더니 "열심히 하세요." 하고 따뜻한 손으로 감싸듯 악수해
주셨습니다.
우리 집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 홀로 다섯 남매를 키우면서
힘들게 살던 1959년 3월에 입회했습니다. 몰이해로 억울할 때도 많았지만,
착실하게 홍교하며 세이쿄신문이 일간지가 되기 전부터 오토바이를 타고
섬을 달리면서 신문을 배달했습니다. 힘은 들었지만 최고의 추억이 되었습
니다. 이케다 선생님이 섬에 오셨을 때, 저는 지부부인부장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악수하면서 "잘 부탁합니다." 하고 다정하게 말을 건네셨습니다.
숙명에 운 적도 있었지만, 어머니부터 시작한 우리 가족의 광포 진열이
지금은 50명이 넘습니다. 복운(福運)에 감싸여 섬의 광포를 위해 힘쓸 수
있어 감사한 마음이 가득합니다.
1997년, 스오오시마섬 동지가 바라던 야마구치오시마회관이 준공했다.
국도변에 있어 회합에 참석하는 동지의 생기발랄한 모습에 신뢰가 넓혀졌다.
또 큰 태풍이 불었을 때는 침수할 위험이 있는 지역주민이 피난하기도 했다.
회관을 개방해 이웃들도 '지역의 보배'라고 기뻐한다. 또 확대에도 훌륭하게
실증을 나타냈다. '학회를 알리려면 세이쿄신문을 보게 하는 것이 최고'라고
한 장년이 일어서자, 잇따라 구독을 확대했다. 시라키지구(현재는 반)에서는
학회 세대수의 두배나 되는 세이쿄신문 구독이 130개월 이상 지속됐다.
70개월 째 되던 때, 섬 동남부 연안에 세계 최대의 니혼아와산호 군락지가
발견됐다. 2013년 2월에는 세토내해 첫 '해양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지난 3월 16일에는 육지부분도 세토내해 국립공원에 편입해 현재 시라키반의
활동무대는 국립공원이 되었다.
지타반도 남부에 있는 아이치현 시노섬은 만요슈(萬葉集)에도 아름다운 경치
를 묘사한 곳으로 미카와만국립공원으로도 지정됐다. 시노섬 광포의 길은
험난했다. 이곳에 사는 대부분은, 집안에 내려온 신앙이 있어 학회를 이해
시키는 데 여러모로 어려웠다. 그러나 시노섬의 벗은 지역공헌에 힘쓰면서
조금씩 우호의 유대를 넓혔다. 또 벗은, 바다를 건너 본부간부회 등 여러
회합에 참석해 광포의 스승과 소중한 원점을 구축했다. 이케다 선생님은
그런 다기진 동지들을 거듭 격려하고, 본부간부회 음성중계가 시작된 때에는
시노섬의 이름을 거론하며 격려를 보냈다.
낙도부(당시) 대표로서 본부간부회에서 이케다 선생님을 만난 것은, 잊지
못할 보배로운 추억입니다. "내 주변부터 신뢰의 뿌리를 내려 총명하게
활약하기 바랍니다."라고 말씀하신 선생님의 진심 어린 격려에 힘입어 나아
갔습니다. 저는 결혼한 뒤, 신심을 하지 않는 시댁식구와 함께 살았습니다.
학회에 대한 편견을 없애고자 며느리로서 착실하게 신뢰를 쌓았습니다.
그러나 생각처럼 학회활동에 참석하지 못해, 때로는 시어머니와 부딪힐 때도
있었습니다. 그동안 쌓인 불만을 친정아버지에게 터뜨리자 "푸념을 하면
그동안 쌓은 복운이 사라진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가화락(一家和
樂)을 기원하면서 가족을 위해 힘썼습니다. 무엇보다 괴로울 때는 가슴속에
늘 선생님의 존재가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격려를 가슴에 품고 마을 부녀
회장, 어업여성부, 갱생보호여성회 책임자 등 다양하게 지역공헌을 추진
했습니다. 이런 활동이 우정과 신뢰를 한층 더 다지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시노섬은 옛날과 변함없이 정이 넘칩니다. 누군가 감기에 걸리면 섬 사람들이
걱정하며 잇따라 찾아가고, 지역의 아이를 내 자식처럼 소중히 여깁니다.
그런 오래된 섬의 유대를 소중히 여기면서 '홀로 서는 현자(賢者)'로써
시노섬 광포의 미래를 열겠습니다.
도쿄에 있는 낙도 이즈제도에도 광포의 스승과 맺은 빛나는 원점이 있다.
가장 큰 섬인 이즈오섬은 도쿄에서 남쪽으로 약 12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고,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한다. 또 '동백섬'으로도
유명하다. 이런 이즈섬에, 힘찬 기세로 낙도본부총회에 참석한 멤버가 있었
다. 초창기 섬의 벗은, 구습이 뿌리 깊게 자리잡은 땅에서 착실하게 절복하러
다녔다. 소금을 뿌리고 쫓아내는 일은 늘 있는 일이었다. 그래도 이즈오섬의
동지는 섬 사람들이 행복해지기를 바라며, 한사람 한사람과 대화를 거듭했다.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타고 울퉁불퉁한 자갈길을 달리며 '얼마나 많이 넘어
졌는지 모른다'고 웃음지으며 옛일을 이야기하는 벗도 있다. 한알 한알 뿌린
'묘법의 씨앗'은 드디어 조금씩 꽃을 피웠다. 1957년에는 반이 생겼고, 4년
뒤에는 이즈오섬 지구를 결성해, 다음 목표인 지부결성을 향해 모두 단결하여
투쟁했다. 그런 속에서 이즈오섬에 큰 화재가 발생했다. 1965년 1월 11일,
섬의 중앙부인 모토마치 번화가에 불이 나, 이즈오섬지청 등 지역의 중요시설
이 모두 불탔다. 강풍으로 불이 순식간에 번져 마을은 혼란에 빠졌다.
이케다 선생님은 즉시 간부를 파견해 격려했다. 섬에 도착한 간부는
화재를 모면한 회원 집에서 좌담회를 열었다. 전기마저 끊겨 촛불을 켜고
연 좌담회에는 멤버 50여명이 낙담한 모습으로 모였다. 파견간부는
"대악(大惡)이 일어나면 대선(大善)이 온다." (어서 1300쪽)는 '어서'를
배독하고 선생님 말씀을 전했다. "이즈오섬에도 회관을 짓고 싶습니다.
섬 동지 여러분이 희망에 불타 힘차게 노력한다면 섬은 반드시 부흥해 더욱
번영합니다. 그 원동력이 되기 바라는 마음으로 회관 건설을 추진하고자
합니다." 무겁던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모두 감싸 안으며 기뻐했다.
그리고 그 환희는 '이즈오섬의 부흥은 학회원이 해낸다!'는 결의로 바뀌었다.
좌담회에 참석한 섬 멤버는, 섬을 돌면서 선생님이 주신 전언을 동지에게
전하러 다녔다. 그리고 회원 1000세대를 목표로 삼고 서로 결의하면서
홍교에 힘썼다.
저는 1962년, 결혼을 계기로 이즈오섬에서 살기 시작했습니다. 남편과 함께
날마다 절복하러 다녔습니다. 신앙으로 받는 비난은 거셌지만, 남편은
어떤 말을 들어도 끝까지 참았습니다. "신심을 하고 있기에 더욱더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일에서도 온 힘을 다했습니다. 저도 지리를 모르는
섬에서 어둡고 험한 길을, 밤에는 한 손에 회중전등을 들고 대화확대에 힘썼
습니다. 그러나 섬 사람들은 저를 '이방인' 취급하고 상대해주지 않았습니다.
소금이나 물을 끼얹고, 각목을 들고 쫓아올 때도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제목을 부르면서 한사람 또 한사람과 신뢰를 쌓고 유대를 맺었습니다.
모토마치 화재 때 우리 집은 무사했지만, 주변 일대는 재투성이가 되었습니다.
낙담할 때, 이케다 선생님이 '이즈오섬에 회관을 짓고 싶다'고 하신 전언을
들었습니다. 마음속에 희망의 불이 켜진 듯했습니다.
화재가 발생하고 여덟달이 지난 뒤 이즈오섬회관 준공식을 거행했다.
동지는 한층 더 강하게 결의하고 꿋꿋이 절복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66년
1월, 드디어 회원 1000세대를 돌파해 화재가 일어나기 전의 두배 가까이 크게
비약했다. 1월 21일, 섬 동지가 바라던 회관이 준공됐다. '이즈오섬회관
준공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이곳에 사이좋게 즐겁게 모여 행복을 구축해
주십시오." 하는 이케다 선생님의 축전에, 기쁨의 박수가 일었다.
닷새 뒤인 26일에는 드디어 목표인 이즈오섬지부가 결성되었다. 회관에
모인 2000명 벗의 얼굴이 빛났다. "성훈에는 '화(禍)도 전환되어 행(幸)으로
되리라.' (어서 1124쪽) 하고 씌어 있다. 이즈오섬의 보배로운 벗들은
대형 화재라는 재난을 이겨내고, 각자 행복의 기반을 확립했다."
(소설《신 인간혁명》제28권 '승리섬')
이즈오섬회관 준공식이 끝나고 회관직원으로 채용되었습니다. 7년 뒤
1973년 3월, 도쿄 신주쿠구에서 열린 회합에 참석할 때, 저는 회합장소
맨 뒤쪽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케다 선생님이 뒤에서 입장하면서
말을 건네주셨습니다. 저는 엉겁결에 "이즈오섬에서 왔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회합이 끝난 뒤, 선생님과 간담시간을 가졌습니다.
선생님은 이즈오섬에 관해 이것저것 묻고 저에게도 격려를 보내주셨습니다.
"아버지는?" 하고 물으셔서 "고등학교 2학년 때 돌아가셨습니다." 하고 대답
하니 "그렇군요. 힘들었겠군요." 하고 다정하게 감싸 안아주셨습니다.
그 뒤에도 가마타문화회관과 가나가와문화회관에서 다시 만났을 때, 이즈오
섬에 관해 물으셨습니다. 이즈오섬은 화재뿐 아니라 산사태와 지진 등
많은 재난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학회원은 지역에 희망의 존재가
되겠다고 결의하면서 한사람 한사람이 분투했습니다. 선생님이 주신
"언제나 보러 갈까/ 동백꽃/ 그 아래서/ 광포를 향해 춤추는/ 그대들"
이라는 시를 마음에 품고 다함께 전진하고 있습니다.
이즈제도에 있는 섬 중 하나인 하치조섬은 하네다공항에서 비행기를 타면
1시간도 채 안걸리지만, 도쿄에서 대형 여객선을 타면 10시간이나 걸린다.
지금은 하루에 세편, 하네다공항에서 직항이 있지만, 학회 초창기에는
연락선도 며칠에 한번씩 취항했다. 그래도 멤버는 달마다 의기양양하게
바다를 건너 광포의 스승 슬하로 갔다. 하치조섬은 세이쿄신문 구독추진에서
눈부신 결과를 남겼다. 1991년 5월에는 섬에 있는 세대의 30퍼센트, 21세기
를 맞이한 2001년에는 35퍼센트가 세이쿄신문을 구독했으며 그 대부분이
'평생 구독'이다. 이케다 선생님은 하치조섬의 벗을 생각하며 이렇게 썼다.
"여러분은 본디 부처로서, 지금 여러분이 있는 장소를 상적광토로 만들기
위해 출현했습니다. 부디 힘을 합쳐 하치조섬을 광포 모범의 섬으로 만들어
주십시오. 광포 제2장의 큰 조류를 하치조섬에서 일으켜주십시오.
저는 쭉 지켜보겠습니다." (소설《신 인간혁명》제28권 '승리섬')
하치조섬에서는 다른 어떤 신문보다 세이쿄신문을 애독합니다.
우인이 다른 우인에게 "세이쿄신문을 구독해주세요" 하고 부탁할 정도입니다.
구습이 뿌리 깊던 초창기를 되돌아보면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절복하러 가면 "두번 다시 오지 말라"고 고함치거나, 낫을 휘두르기도 했습
니다. 그래도 학회가를 부르면서 열심히 이야기하고 다녔습니다. 조금씩
세대가 늘어 1967년에 지부가, 1978년에는 지역이 생겨 초대 부인부장을
했습니다. 1980년 12월, 도쿄 오타구의 오모리문화회관에서 이케다 선생님
이 격려해주셨습니다. 선생님은 회관 로비에서 우리에게 "잘 알고 있습니다"
하고 진심 어린 격려와 기념촬영도 해주셨습니다. 선생님의 마음을
가슴에 품고 하치조섬의 동지는 더욱더 힘차게 노력하고 있습니다.
초대 지역장인 남편도 기쿠치 후지 씨와 함께 이케다 선생님에게 격려를 받았
습니다. 초창기부터 부부가 함께 절복을 하러 다녔습니다. 위협을 받기도
하고, 폭언을 듣기도 했지만, 섬 사람을 모두 행복하게 만드는 불법을 이야기
하는 기쁨과 즐거움이 더 컸습니다. 1978년, 이케다 선생님이 하치조섬에
주신 시를, 섬을 대표해 남편이 받았습니다. "하치조의/ 벗의 행복을/
기원하며/ 만날 날을/ 즐겁게 기다리노라" 선생님이 우리 하치조섬의 동지를
기원해주신다고 생각하니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또 1979년, 인도를 방문하신
선생님에게서 전보가 도착했습니다. "아시아 광포의 길은 열렸습니다.
섬 여러분에게 안부 전해주세요." 언제 어디서나 섬을 생각하시는 선생님
에게 감사하고, 보은하겠다는 마음을 가슴에 품고 생기발랄하게 분발하겠
습니다.
1978년 3월 31일 밤, 저는 아내와 세 딸 그리고 기쿠치 후지 씨와 함께
도쿄 오타구에 있는 오모리문화회관에 갔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이 회관을
시찰하고 계신다'며 오타 간부가 데려가 주었습니다. 회관에 가서 선생님이
계신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하치조섬에서 왔다고 소개하자, 선생님은
"하치조섬! 하치조섬에서 오셨습니까!" 하고 두 팔을 벌려 활짝 웃으면서
맞아주셨습니다. 곧바로 간담을 해주셨습니다. 선생님은 배가 고플 거라며
미래부인 딸들에게 빵을 건네주시고 이름을 물으면서 긴장을 풀어주셨습니다.
여러모로 염려해주셔서 따뜻한 마음으로 가득했습니다. 또 세 딸들에게
유머를 섞어가며 격려해주셔서 웃음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끝으로 제게
"올해 몇살인가요? 직업은?" 하고 물으셔서 "마흔일곱이고 중학교 교사입니
다." 하고 대답하니 "모두 알고 있습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하치조에/ 우리 벗 그대가/ 있으니/ 묘의 훈풍/ 행복 향기롭구나"
하는 시를 주셨습니다. 하치조섬을 위해 끝까지 힘쓰겠다고 세운 서원은,
이케다 선생님과 새긴 원점이 되었습니다.
1981년 4월, '오타의 날' 기념회합에 참석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회합
전날에는 폭풍우 때문에 가지 못하고, 당일 아침배도 타지 못했습니다.
임시 배편을 타고 겨우 갈 수 있었지만,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했습니다.
회합장소인 오타구체육관에 도착했습니다. 아직 어린 큰아들을 데려갔는데
칭얼대서 안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로비에 있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이
타신 차가 보인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엉겁결에 밖으로 뛰어가보니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주위의 행사요원을 격려하고 기념촬영을 하셨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아기를 데려오신 어머니, 어서 오세요." 하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저와 마찬가지로 어린 아이를 달래려고 로비에 있던
부인부들과 함께 선생님이 계신 곳으로 갔습니다. 선생님은 아이들의 머리를
하나하나 쓰다듬어 주셨습니다. 당시 장남은 머리에 혹이 나서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고 있었는데, 선생님은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기념촬영도 해주셨습니다. 회장을 사임하고도 여전히 태연자약하게
동지를 격려하시는 선생님 모습에 결의를 새롭게 다졌습니다.
끝으로 존귀한 승리섬부에 대한 마음이 응축된 시 (소설《신 인간혁명》
제28권 '승리섬')를 인용하며 '사명의 천지 승리섬' 연재를 마친다.
붉게 물든 바다에
출항을 알리는 징소리 울려 퍼진다.
자, 파랑을 헤치고 나아가라.
세계광포의 선구로
바닷새의 섬, 야자나무의 섬.
불처럼 타오르는 섬, 큰바위섬.
어디나 사명의 천지다.
상적광의 도읍이다.
사납게 휘몰아치는 무정한 열풍에
통한의 눈물을 흘리는 나날이었다.
우리는 오로지 기원하노라.
폭풍우에 맞서 사자처럼 일어서라고.
개척의 괭이질 은빛 땀방울
자비의 씨를 뿌린 지 몇 해이던가.
지용의 긍지를 가슴에 품고
웃음으로 감싸는 대화행
동지는 승리하고 또 승리했도다.
아, 만천의 별 청명하고
좌담의 뜰에 환희 불탄다.
인생 개가를 올리는 주름진 환한 얼굴
바다는 어머니다, 은혜가 있다.
바다는 아버지다, 단련이 있다.
보라, 후계의 젊은 독수리는
용감히 날아올라 부자 춤춘다.
그대여, 예지(睿智)의 빛이 되어라.
신뢰 두터운 기둥이 되어라.
일가화락(一家和樂)의 모범이 되어라.
행복 항로를 밝히는 등대가 되어라.
백화요란한 이 길에
우러러보이는 공덕나무에 무지개 뜬다.
울려라 희망의 교향곡.
영광 빛나라 승리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