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독서
▥ 하까이 예언서의 시작 1,1-8
1 다리우스 임금 제이년 여섯째 달 초하룻날, 주님의 말씀이 하까이 예언자를 통하여 스알티엘의 아들 즈루빠벨 유다 총독과 여호차닥의 아들 예수아 대사제에게 내렸다.
2 만군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 백성은 ‘주님의 집을 지을 때가 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3 주님의 말씀이 하까이 예언자를 통하여 내렸다.
4 “주님의 집이 무너져 있는데 너희가 지금 판벽으로 된 집에서 살 때냐?
5 ─ 만군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
너희가 살아온 길을 돌이켜 보아라.
6 씨앗을 많이 뿌려도 얼마 거두지 못하고 먹어도 배부르지 않으며 마셔도 만족하지 못하고 입어도 따뜻하지 않으며
품팔이꾼이 품삯을 받아도 구멍 난 주머니에 넣는 꼴이다.
7 ─ 만군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
너희가 살아온 길을 돌이켜 보아라.
8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집을 지어라.
그러면 나는 그 집을 기꺼이 여기고 그것으로 영광을 받으리라.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9,7-9
그때에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께서 하신
7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더러는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 하고,
8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하였기 때문이다.
9 그래서 헤로데는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헤로데 영주는 이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헤로데 영주는) 이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루카 9,7)
'이 모든 일'은 예수님의 기적에 대한 이야기들뿐만이 아니라, 바로 앞 장면에서 보여준 제자들의 활동에 대한 이야기도 포함될 것입니다.
이토록 그분의 제자들마저 그 권능을 행하는 것을 전해들은 헤로데는 몹시 당황했던 것입니다.
'당황했다'는 말의 원어의 뜻은 ‘길을 찾지 못해 헤매는 상태’로 ‘몹시 불안한 상태’에 빠진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헤로데의 이 혼란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본문에 따르면, 그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은 것은 세 가지였습니다.
‘죽은 요한이 살아났다는 것’과 ‘엘리야가 나타났다’는 것과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헤로데는 자신이 목을 벤 요한이라고 단정합니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하였다.'
(루카 9,9)
그가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한 것은 단순한 호기심이나 의혹, 혹은 소문을 확인하거나 그분을 따르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하는 왜곡된 마음으로 업신여기고 조롱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만나고자 했습니다.
이를 루카복음사가는 이렇게 전해줍니다.
'헤로데도 자기 군사들과 함께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조롱한 다음, 화려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돌려보냈다.'
(루카 23,11-12)
사실 우리도 예수님께서 하신 '이 모든 일'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뿐만이 아니라 그분의 제자들이 행한 권능도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당황하고 혼란스러워한다면, 우리도 ‘길을 찾지 못해 헤매는 상태’에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몹시 불안할 때, 얼른 주님께 의탁하고 신뢰를 회복해야 할 일입니다.
오히려 온갖 혼란과 의혹, 조바심과 노파심, 불안과 두려움에 쌓이는 유혹의 순간이, 바로 ‘우리 주님’께서 오히려 우리를 더 간곡히 부르시고 계실 때임을 알아차려야 할 일입니다.
오늘 저는 이러한 고백과 기도를 드려봅니다.
"당신은 제가 당신을 찾기도 전부터 저를 찾으시며 저를 쫄쫄 따라다니시는 저의 추종자입니다.
제가 당신을 믿지 못해도 저를 믿으시는 저의 신자입니다.
어떤 처지에서도 제 곁에 있어주시며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 아픔을 먼저 보시는 저의 벗입니다.
제가 당신을 사랑하지 못해도 저를 사랑하시는 당신은 저의 연인입니다.
말하기도 전에 저의 마음을 훤히 아시는 당신은 저의 스승이십니다.
끝까지 저를 놓지 않으시고 소중히 여기시는 당신은 저의 아버지이십니다."
하오니, 주님!
저는 당신의 사랑받는 새끼입니다.
결코 떨어질 수 없는 당신의 소중한 존재, 당신의 것, 당신의 사랑입니다.
어쩔 수 없는 당신의 사랑, 그 놀라움, 사랑이신 당신을 찬미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루카 9,9)
주님!
소문으로만 듣던 당신을 봅니다.
깨지고 부서진 아픈 이들, 작고 가련한 이들, 무능하고 힘없는 이들에게서 당신을 봅니다.
어쩔 수 없어 힘없이 쫓겨 제 곁에 몰려와 있는 이들, 이들이 바로 당신입니다.
가난한 이의 모습으로 제 곁에 와 계시고, 제 안에 숨어계신 당신을 알아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가 있어야 할 곳>
오늘 독서 하까이서는 유다 지도자들에게 하시는 하느님 말씀입니다.
“주님의 집이 무너져 있는데 너희가 지금 판벽으로 된 집에서 살 때냐?
너희가 살아온 길을 돌이켜 보아라.
씨앗을 많이 뿌려도 얼마 거두지 못하고 먹어도 배부르지 않으며 마셔도 만족하지 못하고 품팔이꾼이 품삯을 받아도 구멍 난 주머니에 넣는 꼴이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으면 무엇을 해도 다 헛것이라는 말씀이고, 아무리 애써도 다 헛수고라는 말씀이고, 이것은 즉시 밤새 헛수고한 베드로 사도가 주님 말씀대로 그물질하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이 잡힌 얘기를 연상케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일생 갈릴래아 호수에서 고기잡이한 사람인데도 한 마리도 못 잡았다는 것은 오늘 하까이서의 말씀대로입니다.
우리는 신앙인이면서도 그리고 이것을 알면서도 얼마나 고집스럽게 내가 하려고 하고 혼자 하려고 듭니까?
그런데 오늘 하까이 예언자를 통해 본래 하시려는 말씀은 이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당신의 집은 무너져 있는데 재건하려고 하지 않고 자기 집만 있으면 된다는 것에 대해 하느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성당은 없어도 자기 집만 있으면 된다는 것을 나무라시는 거지요.
성당은 없어도 되는가?
내 집만 있으면 되는가?
내 집에 기도방이 없어도 되는가?
내 집에 하느님이 안 계셔도 되는가?
이런 질문이 꼬리를 무는 오늘 우리에게 즉시 복음의 한 장면과 주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주님께서 부모님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하신 뒤 부모는 집으로 돌아갔고 당신은 성전에 남으셨지요.
이를 나무라시는 어머니께 당신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모르셨냐고 되레 나무라셨는데, 우리가 있어야 할 곳도 성전 아닐까요?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자유를 누려라>
가끔 꿈 얘기를 듣습니다.
좋은 꿈을 꾸어서 복권을 샀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 무서운 악몽에 시달려 밤잠을 설치고 그 꿈 때문에 마음이 흔들려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괴로워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꿈은 꿈입니다.
아무리 좋아도 꿈이고 아무리 험해도 꿈입니다.
그러므로 꿈은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좋게 생각하고 기뻐하고 또 준비하면 되는 것입니다.
꿈에 끌려 다녀서는 절대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꿈대로 안 좋은 일이 생기게 됩니다.
좋지 않은 꿈 때문에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꿈을 다스리지 못하고 그 꿈에 매여 집착하기 때문에 안 좋은 일이 생길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꿈을 꿈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물론 때로는 죄를 짓고 그 죄책감 때문에 꿈을 꾸는 사람도 있습니다.
좋지 않은 일을 행하여서 악몽에 시달립니다.
그리고 안 좋은 일이 생기면 하느님께서 벌을 주시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벌을 주시는 것보다 본인 스스로 불안한 마음과 죄책감으로 몸을 괴롭히기 때문에 상황이 나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그 원인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잘못이 있다면 그 잘못에 대해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들을 위해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하고 용서를 넘어 아버지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의 허물에 대해서도 언제나 용서해 주시고 얽매인 것을 풀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죄의 고백을 통해 용서의 은총을 입어야 합니다.
자유를 회복해야 합니다.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께 대한 여러 소문을 듣고 몹시 당황하였습니다.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하고,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하였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하면서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하였습니다.
헤로데가 불안해하고 당황한 것은 당연합니다.
사람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다 소유한 왕이라 할지라도 죄책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죄값을 스스로 치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뻐합니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고백하면, 그분은 성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시므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1요한 1,9)
그리고 우리의 하느님은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에제 33,11).
혹시라도 마음의 불안이 있다면 하느님의 자비를 굳게 믿고 주님의 품안에서 자유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혹 두렵습니까?
거짓을 벗어 버리고 진리를 추구하십시오!
이득형씨는 권위와 권력을 설명합니다.
권위는
1)인간적인 매력과 인격에 매어지는 것
2)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따라옴
3)자리에 관계없이 평가가 높아감
4)죽은 뒤에도 없어지지 않음
5)지도자 선택의 첫째가는 기준이 됨
권력은
1)직제상 지위(자리)에 주어지는 것
2)사람들을 덮어놓고 복종시킴
3)자리가 높아질수록 더 강해짐
4)권위가 없는 사람일수록 더 휘두름
5)그 자리를 떠나는 동시에 없어져버림
권위와 권력은 분명히 다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만나는 헤로데는 권력을 잡았지만 권위는 없었습니다.
헤로데는 권력을 가지고도 불안해하였습니다.
권력을 이용하여 많은 사람에게 폭력을 사용했고, 특히 당시 유다인들이 최고의 예언자로 알고 따르던 세례자 요한을 죽였는데, 그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소리도 들렸고 여러 소문이 있었기에 불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어도 ‘도둑이 제 발이 저린다.’고, “때린 놈은 발을 오그리고 자도 맞은 놈은 발을 펴고 잔다’고 합니다.
자기가 한 짓을 알기에 늘 불안하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속적인 권력이 아니라 권위를 지니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혹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지배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권력의 마음입니다.
‘돈이면 다 된다’는 식의 마음으로 이웃에게 재물이나 지위를 가지고 대접받고자 한다면 그에게서 권위는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권위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고, 우리는 그 권위에 복종해야 합니다(로마 13,1-2).
주님께서 생명을 주관하는 권위(루가 12,5)를 가지셨고, 말씀대로 이루시는 힘을 지니셨습니다(요한 5,39).
또한 가르침대로 행하심으로써 권위를 지키셨습니다.
우리도 삶의 자리에서 각자의 권위를 키워야 하겠습니다(2고린 10,8).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어머니는 어머니로서, 자녀는 자녀로서, 아내는 아내로 남편은 남편으로서의 위치기 있습니다.
각자의 위치에 걸 맞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권위를 지키시기 바랍니다.
직장이든 가정에서든 각기 권위가 살아나기를 기원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존재 자체로 기쁨과 희망, 위로와 은총의 표지이신 예수님>
'그때에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루카 9,7)
헤로데가 몹시 당황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묵상해봅니다.
루카 복음 사가에 따르면, 헤로데가 당황해 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전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역사상 전무후무한 신선하고 통쾌한 말씀 선포를 통해 가난과 고통에 시달리던 백성들을 위로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끝도 없이 밀려드는 수많은 군중 가운데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 치유의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이미 목숨이 끊어진 사람조차 다시 삶으로 되돌이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한 가지 한 가지가 모두 백성들에게 기쁨과 희망을 건네셨던 좋은 일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함께 기뻐하고 감사해도 모자랄터인데, 왜 헤로데는 몹시 당황해했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아무래도 최근 자신의 생일 잔칫날, 자신의 얼굴을 살리려다가 발생한 세례자 요한 참수 사건이 떠올라 당황해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죽었던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났는데, 그가 곧 예수라고 떠들고 다녔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당황해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헤로데는 비록 제한된 권력이었지만, 로마 식민지 체제하에서 쥐 꼬리 만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는 사람이었다면, 고통받고 있던 백성들을 안타깝게 여기고, 그들을 위해 뭐라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는 백성들의 안위나 복지는 손톱만큼도 없었습니다.
위태위태한 자리지만, 어떻게든 자신의 자리를 보전하고, 알량한 권위를 행사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수입을 챙기며, 그렇게 비참한 군주로서의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헤로데는 권위도 없고, 품위도 없으며, 자신이 대체 뭘 해야 되는지 전혀 알지도 못하고, 그저 거들먹거리고 폼만 잡고 살아가는 폭망한 천박한 지도자서의 전형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엉뚱한 사람이 그 자리에 앉으면 죽어나는 것은 백성이라는 것을 헤로데 역시 온 천하에 잘 보여준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이 죽고 예수라는 사람이 등장했는데, 그가 왕으로서 자신이 해야 되는데 전혀 하지 못하는 일들을 척척 해내고 있으니, 헤로데 입장에서 당황스러운 것입니다.
자신을 생각지도 못한 봉사의 왕, 섬김의 왕으로서 신선하고 파격적인 예수님의 모습에 백성들이 환호하고 박수를 치니, 몹시 당황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은 존재 자체로 선인들에게는 기쁨과 희망, 위로와 은총의 표지입니다.
반대로 악인들에게는 두려움과 당황스러움의 표지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라는 존재 앞에, 그리고 그분이 매일 건네시는 말씀 앞에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까?
몹시 당황해하고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까?
아니면 기뻐하고 환호하고 있습니까?
설레는 가슴으로 그분 말씀에 행복해하고 있습니까?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
'헤로데 영주는 이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루카 9,7)
여기서 ‘이 모든 일’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가리킵니다.
그 당시에 ‘예수’ 라는 분이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 죽은 사람을 살리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신다고 널리 소문이 퍼졌는데, 그 소문을 헤로데도 들었습니다.
아마도 신하들이 헤로데에게 그런 일이 있다고 보고했을 것입니다.
“몹시 당황하였다.” 라는 말은 ‘미신적인 불안감’에 사로잡혔다는 뜻입니다.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의 귀신이 나타나서 해코지를 할까 봐 불안해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말을 ‘양심의 가책’이나 ‘죄책감’으로 해석하는 이들이 있는데,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헤로데의 모습들을 모두 종합해서 생각하면, 그는 세례자 요한을 죽인 일에 대해서 양심의 가책이나 죄책감을 전혀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을 느끼기는커녕 기고만장해서 예수님마저도 죽이려고 했습니다(루카 13,31).
‘양심의 가책’과 ‘미신적인 불안감’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라는 말은 죽은 이들의 ‘부활’ 자체를 부정하는 말입니다.
“부활 같은 것은 없다. 그러니 예수는 ‘되살아난 요한’이 아니다.”
헤로데는 부활은 안 믿었어도 귀신의 존재는 믿은 것 같은데, 그것은 내세에 대한 믿음과는 상관이 없고, 세속 사람들의 사고방식일 뿐입니다.
헤로데가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했다는 말은 ‘호기심’이 생겨서 예수라는 사람을 한 번 ‘구경’하고 싶어 했다는 뜻입니다.
나중에 예수님께서 재판을 받으실 때 예수님과 헤로데가 만나게 되는데, 그때 헤로데는 또다시 죄를 짓게 됩니다.
'빌라도는 이 사람이 갈릴래아 사람이냐고 묻더니, 예수님께서 헤로데의 관할에 속한 것을 알고 그분을 헤로데에게 보냈다.
그 무렵 헤로데도 예루살렘에 있었다.
헤로데는 예수님을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오래전부터 그분을 보고 싶어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 일으키시는 어떤 표징이라도 보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헤로데가 이것저것 물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그 곁에 서서 예수님을 신랄하게 고소하였다.
헤로데도 자기 군사들과 함께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조롱한 다음, 화려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돌려보냈다.
전에는 서로 원수로 지내던 헤로데와 빌라도가 바로 그날에 서로 친구가 되었다.'
(루카 23,6-12)
헤로데가 기대한 것은 ‘신기한 일’을 구경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술사의 마술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심리와 비슷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헤로데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신 것은 대답할 가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헤로데가 주님이신 분을 업신여기고 조롱한 것은 ‘큰 죄’를 지은 것입니다.
빌라도와 헤로데가 친구가 되었다는 말은 두 사람 다 똑같은 ‘속물’이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헤로데가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한 일과 예리코의 세관장 자캐오가 예수님을 보려고 애쓴 일을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들어가시어 거리를 지나가고 계셨다.
마침 거기에 자캐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세관장이고 또 부자였다.
그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보려고 애썼지만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
그곳을 지나시는 예수님을 보려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거기에 이르러 위를 쳐다보시며 그에게 이르셨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자캐오는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였다.'
(루카 19,1-6)
자캐오가 들은 예수님의 소문은 헤로데가 들은 것과 별로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캐오는 그 소문을 듣고서 ‘구원’을 갈망하게 되었고,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만나기를 ‘간절하게’ 바라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간절함’이 신앙의 출발점이고, 신앙생활을 하게 만드는 힘입니다.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던 여자가 예수님의 옷에 손이라도 대기를 원했던 그 간절함도 좋은 예가 됩니다(마르 5,25-28).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희망하는 것은 ‘관광객’으로서 그 나라를 구경하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로서 아버지의 집에 들어가서 살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마치 관광하듯이(구경하듯이) 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헤로데처럼 만들어 버리는 일입니다.
신앙생활은 정말로 ‘간절하게’ 해야 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즉 온갖 정성을 다 쏟아서 해야 하는 생활입니다.
간절함이 없으면 정성도 없고, 형식만 남아서, 위선자가 되어버립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 중심의 공동체 삶 - 중심, 질서, 균형>
“주님은 당신 백성을 좋아하시고,
가난한 이들을 구원하여 높이신다.”
(시편 127.4)
"“역사가 없는 나라”
최근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상을 초월하는 야만적 행태들을 보면서 다시 역사를 생각한다.
대한민국의 역사를 망각한 나라가 아니라, 아예 역사가 없는 나라이다.
이 나라엔 역사의식도, 역사청산도, 역사교육도 없다."
어제 읽은 칼럼 기사 일부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올바른 역사 교육이 빠지 교육은 얼빠진 교육입니다.
공동체 중심을 확고히 해주는 데 올바른 역사 교육은 필수입니다.
역사가 없는 나라는 미래가 없습니다.
이는 나라뿐 아니라 모든 공동체와 개인에도 해당됩니다.
또 하나 인터넷에서 읽은 기사입니다.
"“내 새끼 지상주의를 넘어야 한다”
모두가 존중받는 공동체형 학교를 지향해야 한다.
광화문 1차 집회에서 한 선생님은 이렇게 외쳤다.
“교육은 사랑입니다. 아이들을 사랑할 기회를 주십시오!”
이제 우리 모두 공동체적 학교를 향한 여정을 시작하자. 모두가 사랑하기 위해서이다.
이 새로운 과제를 위해 우리 모두가 지혜를 모으자.
정답이 없는 이 여정 위에서 말이다."
사랑이 답입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입니다.
하느님이 답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이 답입니다.
공동체든 개인이든 똑같습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서 질서와 균형도 이뤄집니다.
바로 우리 믿는 이들의 고백입니다.
그동안 강론에서 삶의 중심에 대해 얼마나 많이 강조했는지 모릅니다.
중심부재, 중심상실에서 기인하는 온갖 재앙이요 불행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가톨릭 기도서 맨처음에 나오는 십자성호를 그으며 바치는 성호경은 하느님이 삶의 중심임을 전 존재에 각인시켜주는 기도입니다.
개인기도든 공동기도든 하느님 중심을 확고히 해주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여기 열세명의 수도형제들이 늘 거기 그 자리 요셉 수도원에서 정주의 삶을 살 수 있음도 이런 한결같은 하느님 중심의 삶에서 기인합니다.
오늘 독서와 말씀을 묵상하면서 떠오는 시편 127장 전반부 내용입니다.
“주님께서 집을 아니 지어 주시면,
그 짓는 자들 수고가 헛되리로다.
주님께서 도성을 아니 지켜 주시면,
그 지키는 자들 파수가 헛되리로다.
이른 새벽 일어나 늦게 자리에 드는 것도,
수고의 빵을 먹는 것도 헛되리니,
주님은 사랑하시는 자에게,
그 잘 때에 은혜를 베푸심이로다.”
(시편 127,1-2)
하느님 중심을 잃은 삶에서 저절로 터져 나오는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코헬렛 첫 절의 탄식입니다.
오늘 제1독서 하까이서도 하느님 중심 부재의 삶이 얼마나 헛된 노고인지 잘 드러납니다.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너희가 살아온 길을 돌이켜 보아라.
씨앗을 많이 뿌려도 얼마 거두지 못하고, 입어도 따뜻하지 않으며, 품팔이꾼이 품삯을 받아도, 구멍난 주머니에 넣는 꼴이다.”
이래서 주님은 하까이 예언자의 입을 통해 시급히 주님의 집을 지어 공동체의 중심을 확고히 하라 명령하십니다.
“주님의 집이 무너져 있는데, 너희가 지금, 판벽으로 된 집에서 살 때냐?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너희가 살아온 길을 돌이켜 보아라.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집을 지어라.
그러면 나는 그 집을 기꺼이 여기고, 그것으로 영광을 받으리라.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우선적인 것이 공동체든 개인이든 하느님 중심의 가시적 표지인 주님의 집을 삶의 중심에 놓으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가시적 중심인 주님의 집인 성전에서 끊임없이 거행되는 시간전례 및 미사전례등 교회전례에의 참여가 하느님 중심의 삶을 견고히 해줍니다.
오늘 복음의 헤로데는 이런 삶의 중심이 없기에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에 몹시 당황하여 안정과 평화를 잃고 불안과 두려움으로 전전긍긍, 갈팡질팡, 우왕좌앙 내적 혼란에 휩싸입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을 잃을 때 세상 것들에 중독 마비되어 괴물이, 폐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요한이, 더러는 엘리야가, 또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는 말을 듣자 헤로데는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물으면서 헤로데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합니다.
믿는 이들 모두 다 롤모델이자 삶의 중심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분, 예수님 “이 사람은 누구인가?” 평생 화두로 삼아 묻고 따라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살아가는 예닮의 여정. 하닮의 여정중에 내적 안정과 평화에 영원한 생명의 구원입니다.
마침 어제 어느 자매님이 전해 준 감동적 메시지가 마음이 깊이 남아있습니다.
“저는 요양원에서 지난 주에 남편 모셔와 꼼짝않고 곁에서 케어하고 있습니다.
저는 몹시 힘든데 남편이 좋아 죽으니, 그저 된걸요.
‘예닮, 하닮의 여정’ 참으로 지금의 저에겐 의미 깊숙이 다가옵니다.”
주님의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전례 은총이 우리 모두 “일치의 중심”인 주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누리며 살게 하십니다.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 미사의 말씀은 본질을 잡으라고 촉구하십니다.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루카 9,7)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헤로데의 귀에까지 들어가자 그가 몹시 당황합니다.
자기가 목을 벤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난 건 아닌지 걱정하는 것으로 보아 두려움이 영 없지 않은 것 같기도 하지요.
예수님의 인격과 가르침, 구마와 치유에 대한 백성의 놀라움, 기대, 희망이 헤로데에게는 썩 달갑지 않아 보입니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보려 하였다.'
(루카 9,9)
헤로데의 물음은, 하지만 진정한 앎을 향하고 있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알고 싶고 또 만나고 싶다는 건, 그로 인해 자신이 변화되기를 허락하는 모험을 감수하겠다는 용기에서 시작됩니다.
그런데 헤로데에게서는 그런 지향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두려움이 더해진 얕은 호기심일 뿐이지요.
제1독서는 주님께서 하까이 예언자를 통해 성전 건립을 재촉하시는 대목입니다.
"너희가 살아온 길을 돌이켜 보아라."
(하까 1,5.7)
이 말씀이 두 차례나 반복된 이유는, 성전 건립이라는 절대 과제 앞에서 백성들에게 먼저 지난 삶을 성찰해 보라는 강조하시기 위함입니다.
유배에서 돌아온 뒤 나름 사명감과 열정을 가지고 시작한 성전 건립이었지만, 그리 넉넉지 않은 귀향민들의 재정 형편과 사마리아 주민들의 방해로 중단된 상태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 건립의 재개를 차일피일 미루면서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과 같은, 먹고살기 위한 일상에 매몰되어 버렸지요.
주님은 살아온 길을 돌이켜 보라고 하시면서, "씨앗을 많이 뿌려도 얼마 거두지 못하고, 먹어도 배부르지 않으며, 마셔도 만족하지 못하고, 입어도 따뜻하지 않으며, 품팔이꾼이 품삯을 받아도 구멍 난 주머니에 넣는 꼴"(하까 1,6)이지 않았느냐고 아주 구체적이고 적나라하게 일깨워 주십니다.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집을 지어라.
그러면 나는 그 집을 기꺼이 여기고 그것으로 영광을 받으리라."
(하까 1,8)
주님께서는 더 이상 지체하지 말고 성전을 지으라고 촉구하십니다.
하느님 백성에게 성전을 짓는 일은 자기들의 정체성을 다시 세우고 그분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중요한 일입니다.
이 본질을 외면한 채로는, 아무리 세상사에 혈안이 되어 애를 쓴들 손에 바람을 잡듯 헛수고일 뿐이지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집을 지어라."
이 말씀을 재차 음미해 보면, "산"은 하느님 현존의 장소를, "나무"는 생명의 나무인 십자가를 떠올리게 해 줍니다.
"집"은 문자적 해석으로는 당시 건립이 시급한 실제의 성전이지만, 그 이면에는 성령의 성전인 우리 존재를 담고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돈도 좋고 인간 관계도 중요하고 신분과 스팩, 커리어도 필요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그게 본질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존재의 주인이신 분, 그 정수로 들어가는 과정 곳곳에 쌓여 있는 여러 층의 껍질들 정도일 듯합니다.
우리의 과제는 그 껍질들이 주는 풍요와 안위에 취해 거기서 멈추기보다, 그것들을 뚫고 본질로 들어가 거기 계신 주님을 알고 만나고 사랑하고 하나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신앙은 심리적 두려움이나 기복적 청탁, 얕은 호기심이나 체면치레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일입니다.
세례를 받고도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의 갈망 없이 신앙과 데면데면 거리두기를 하고 있다면, 행여 신앙에 물들어 세속적 성공 대열에서 이탈하게 될까 봐 선을 긋고 있다면, 자칫 신앙 때문에 자신이 변화될까 봐 경계하고 있다면, 아직 헤로데 차원의 헛된 물음만 남발하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아직 영혼의 성전 건립은 시작조차 못한 거지요.
사랑하는 벗님!
이렇게 날마다 말씀을 중심으로 모이는 우리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진심으로 궁금하고, 그분을 만나 그분 인격에 맞닿고 싶고, 그분과 일치하여 사랑이 되고픈 이들입니다.
이 사랑의 갈망이 나날이 뜨거워지고 열렬하지고 성숙해지길 기원합니다.
생명의 근원이시고 목적이시며 본질이신 분께 매일 조금씩 더,더,더 가까워지고 있는 우리 모두를 축복합니다.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평화신문 지면에서 수녀님의 글을 읽었습니다.
제목은 ‘꽃 피우지 않는 나무’입니다.
오늘은 그 내용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어떤 분이 12년간 꽃을 피우지 않는 나무가 있었는데 어떻게 하면 꽃을 피울까 라는 전화 상담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그 나무를 좋아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10년이 넘도록 꽃 한 번 피우지 않는 나무를 누가 좋아하느냐며 장모가 준 것이라서 버릴 수 없어 억지로 키운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상담원은 ‘만일 어떤 사람이 당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그 사람을 좋아하겠습니까? 당신이라면 무럭무럭 자라 꽃을 피울 수 있겠습니까?’ 라고 되물었습니다.
상담원은 잠시 후 ’지금부터 잘 살펴보세요. 그리고 그 나무한테서 좋아할만한 것들을 찾아보세요. 그 다음에 그렇게 멋진 나무가 당신 정원에 있어서 기쁘다고 이야기해 보세요. 그러면 꽃이 필 것입니다.’
몇 달이 지난 후 상담원은 전화를 받았습니다.
‘혹시 몇 달 전 꽃 피우지 않는 나무에 대해 조언을 구하던 사람을 기억하십니까?
당신이 시킨 대로 했더니 글쎄 그 나무에 거짓말처럼 꽃이 가득 피었지 뭡니까?
너무도 아름다워 눈이 부실 정도랍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너희가 살아온 길을 돌이켜 보아라.
씨앗을 많이 뿌려도 얼마 거두지 못하고 먹어도 배부르지 않으며 마셔도 만족하지 못하고 입어도 따뜻하지 않으며 품팔이꾼이 품삯을 받아도 구멍 난 주머니에 넣는 꼴이다.
주님의 집이 무너져 있는데 너희가 지금 판벽으로 된 집에서 살 때냐?”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계명을 지키지 않고, 세상의 유혹에 빠져 산다면 신앙의 꽃은 피지 않을 것입니다.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은 ‘왜 우리가 바빌로니아로 끌려갔는가? 왜 우리의 성전은 이방인의 손에 의해서 처참하게 파괴되었는가? 왜 우리의 신앙은 아름답게 꽃 피우지 못 했는가?’를 성찰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무심하셔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쳤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기억했고,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와 눈물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만나면서 꽃을 피웠습니다.
페르시아 왕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모든 것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제 주변에도 사랑 받지 못해서 시들었던 것들이 있었습니다.
2년 전에 아마존에서 구입한 차고의 천막이 바람에, 햇빛에 여기저기 찢어졌습니다.
새로 천막을 사서 덮어 주었더니 산뜻하고 아름다운 차고가 되었습니다.
싱크대의 수도꼭지가 나사가 풀려서인지 덜렁거렸습니다.
새 수도꼭지를 사서 달았더니 물이 시원하게 나왔습니다.
지하에 있는 배수관이 막혀서 물이 넘쳤습니다.
2년 전에 고쳤는데 다시 막혔습니다.
배관공을 불러서 다시 뚫었습니다.
물은 막힘없이 흘렀습니다.
차고도, 수도꼭지도, 배수관도 저의 사랑을 받지 못하니 낡고, 덜렁거리고, 막힌 것입니다.
관심을 가지고 손을 쓰니 다시 꽃이 피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도 비슷합니다.
내가 사랑하지 않으면 건강하던 몸도 시들고 맙니다.
불평과 불만을 입에 달고 살면 가슴에 화가 들어와 살게 됩니다.
세상이 우울하고, 짜증납니다.
그러면 건강은 시들게 마련입니다.
음주와 흡연을 지나치게 하고, 폭식을 하면 당연히 몸은 시들게 됩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희망을 가지고 살면 몸은 곧 긍정의 꽃이 피게 됩니다.
적당한 운동과 규칙적인 식사를 하면 몸은 다시금 활력이 넘치기 마련입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하느님도 나를 사랑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들의 삶도 땀을 흘리고, 자신을 희생해서 누군가를 위한 다리가 되어 줄 때, 아름다운 꽃이 필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인생은 허무한 것이 아니라, 인생은 하느님을 만나는 축복의 시간입니다.
하고 싶은 일만을 좋아했던 헤로데는 결코 느낄 수 없었던 행복입니다.
해야 할 일을 좋아하다면 우리 모두는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비가 오는 날 우연히 돌 위에 있는 달팽이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 달팽이를 보면서 책에서 읽은 달팽이에 관한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글쎄 달팽이는 후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옆으로 갈 수도 없고 오로지 전진만이 가능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달팽이가 유일하게 하는 것은 그냥 앞으로 나아가거나 아니면 그냥 멈추는 것뿐이었습니다.
인간으로 생각하면 정말 별것 아닌 모습입니다.
그런데 다르게 보니, 자기 집 하나 짊어지고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렇게 앞으로 잘 나아가고 잘 멈추기를 반복합니다.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야 잘 사는 것처럼 생각하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실상 많은 것을 하면서도 살기 힘들다고 말하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때로는 우리에게도 달팽이와 같은 단순함이 필요합니다.
주님이라는 집을 짊어지고 주님 뜻에 맞게 묵묵하게 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반대편에 있는 악(惡)을 피하기 위해 악 앞에서 과감하게 멈출 수도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사는 우리를 주님께서는 원하십니다.
세상 것을 이것저것 다 하는 것이 잘 산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에만 집중하고 주님 것을 하는 데 최선을 다하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잘 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만이 주님의 인정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세상의 기준만을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은 결국 후회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을 제대로 살 수도 없습니다.
그 모습을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헤로데 영주를 통해 발견할 수 있습니다.
헤로데 영주는 세례자 요한을 참수했지요.
자신의 생일날, 헤로디아 딸의 춤값으로 세례자 요한의 목을 내어준 것입니다.
사실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을 의인이라고 생각했기에 그의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했던 맹세를 지키려고 아무런 죄도 없는 세례자 요한을 죽였던 것입니다.
그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전해 듣고는 당황하게 됩니다.
죽은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났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악(惡) 앞에서 과감하게 멈출 수 있는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상 안에서 비치는 자기 모습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악(惡)을 행하는 데 거침이 없었고, 그 결과는 이러한 불안감 속에서 살게 됩니다.
또,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죄 없는 세례자 요한을 죽인 못된 영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달팽이처럼, 우리 역시 단순해야 합니다.
특히 악(惡) 앞에서 과감하게 멈추고, 선(善)을 향해서만 묵묵하게 걸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모습을 갖춘 사람만이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참 신앙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