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복음화, 미래교회의 희망] 가톨릭신문-동아시아복음화연구원 공동기획 ⑥ 일본교회는 왜 복음적 활력이 없어 보일까?
천황제와 국가 종교화 앞에 그리스도교는 설 자리 잃었다
발행일2019-07-07
[제3152호, 11면]
1869년 박해를 피해 신자들이 숨어들었다고 전해지는 고토 지역 ‘키리시탄의 동굴’. 동굴 입구에 세워진 그리스도상은 신앙선조들을 기리기 위해 1968년 설치됐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 일본교회는 오랜 선교 역사를 갖고 있지만, 아시아의 다른 교회와 마찬가지로 교세는 여전히 미미하다. 아시아교회의 이해 확대를 위해 공동기획을 펼치고 있는 가톨릭신문과 동아시아복음화연구원(원장 김동원 신부)은 이번 호부터 9회에 걸쳐 가난하고 작은 공동체이지만 일본사회에 큰 울림을 주고 있는 일본교회를 소개한다. 그 첫 회로 수원교구 안양 호계동본당 주임이자 동아시아복음화연구원 연구기획실장인 최영균 신부의 글을 통해 일본교회의 복음화가 활성화되지 않는 이유를 알아본다.
■ 보편교회에 대한 신화?
동아시아에서 복음화 성공의 상징은 한국교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일본이나 중국교회 복음화의 성공여부를 한국이라는 특정 지역의 관점에서 비교평가하려는 사람들도 많다. 한국교회가 동아시아의 예루살렘(?) 자리를 차지한 이유는 교회 외부의 여러 가지 사회요인에 기인한 것이 크다. 단순히 한국의 신자들이 열심하고 우수하기 때문에 교회적 번영을 이룩한 것은 아니다.
한·중·일은 문화적 동질성을 상당 부분 공유하고 있지만, 19세기 후반 이후 각 국가 사회의 고유한 경로를 통해 근대국가로 발전하였고, 그 맥락 속에 교회의 운명도 결정되어 지금과 같이 다른 모습을 가지게 된 것이다. 개개의 교회들은 나름의 고유한 모습과 가치를 갖는다. 따라서 특정 지역교회가 다른 지역교회에 대해 보편적 준거의 자리를 누릴 수는 없다.
하느님 나라는 완전하고 보편적 성격을 가졌지만 지상의 그 어떤 교회도 완전할 수 없다. 즉 우리가 보편교회라는 말을 할 때 그 뜻은 기준이 될 수 있는 완벽한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지역의 교회들이 일치와 동질성을 공유한다는 뜻이다.
일본을 비롯한 지역교회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보편교회’의 이미지를 제고할 필요가 있다. 교회는 늘 지역 속에서만 존재해 왔다. 보편교회는 바티칸에 있는 행정부서, 성당들, 고위관료 성직자들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고 한국교회처럼 외형적으로 성공하고 힘있는 교회도 아니다. 굳이 보편교회를 정의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친교를 이루는 고유한 지역교회들의 총합이라 할 수 있다. 우리 그리스도교든 다른 여타의 종교든 ‘순수한 초문화적 실재’란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특수한 문화적 표현과 실재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 교회도 한때 그 지역의 외래 종교였다.
일본교회가 종교성을 잘 드러내지 않고, 신자수의 증가가 정체된 것은 한국교회처럼 성공적인 것 같지 않아 보이지만 일본교회 역시 그리스도 공동체의 또 다른 측면을 보여줄 뿐 좌절된 복음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일본교회가 왜 종교성을 잘 드러내지 못하고 신자수가 정체됐는지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자.
■ 종교화된 민족주의와 그리스도교-서구의 갈등
일본은 17세기 초 에도시대가 시작되면서 천주교를 금지했다. 19세기 중반 메이지유신 이후 서구종교에 대한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었지만, 한국과 비교해보면 겨우 명맥만 유지해 온 사회의 소수 집단인 듯 보인다. 신자수는 인구의 0.3%(45만 명) 정도를 유지하며 100년간 신자수가 정체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방인사제와 수도자도 적고, 각종 신심단체는 활성화 되지 못하고, 전례와 교회적 생활양식도 로마 표준에서 볼 때 다소 이완 돼 있는 듯 하며 적극적인 신자선교와 교회문화를 사회에 알리는 데도 대단히 소극적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1549년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가고시마를 통해 들어온 것을 일본교회의 시작으로 본다. 그 당시 선교사들은 무역을 매개로 하면서 영주들을 대상으로 선교하여 대단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외세에 대한 경계심을 가졌던 일본의 지도층은 서구에서 들어온 종교를 국가의 질서와 주권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였고, 교회의 선교적 번영은 채 100년이 못가고 두 세기에 걸쳐 잠복하게 되었다. 에도시대를 거치며 일본인들에게 그리스도교는 곧 외세의 심각한 일탈이며 사회의 안정과 질서에 대한 위협으로 각인되었다.
이후 19세기 이래 가톨릭교회와 개신교를 포함하여 무려 200개가 넘는 외국 선교 조직들이 경쟁적으로 입국하여 교회를 세워 일본의 신자수는 증가하였다. 그러나 메이지 정부가 안정되고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국가 신도(神道)에 기초하여 국가 정체성을 재확립하기 시작함에 따라 이 성장은 멈추게 되었다.
20세기 초 제국이 된 일본은 국가의 문화적 통제와 함께 자기 폐쇄적인 모습을 보인다. 메이지 헌법이 종교의 자유를 보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는 종교화된 천황과 국가를 경신례의 대상으로 삼아 모든 국민과 종교인들에게 의례를 강요하였다.
일본 정부는 신도를 국가의 ‘비종교적 제도’로 정의하고 국가 신도의 의례에 참여하는 것은 개인의 종교적 신념과 관련 없이 일본인의 애국적 의무로 간주하였다. 그리스도교와 일본사회 사이에 긴장이 발생하였고 여기에 의구심을 품는 가톨릭교회와 개신교 교단들은 일본시민들로부터 타자화 되고 배제되었다. 1939년 의회는 정부에 권한을 주어 어떤 종교단체든 제국의 길과 함께하지 않으면 해산할 수 있도록 했다. 1939년 종교단체법이 발효됨에 따라 교회는 공식적 법적 지위를 얻기 위해 교육부가 제정한 일련의 조건을 따라야만 했으며, 종교화된 국가와 민족 앞에 외래의 종교는 그 정체성을 공공연하게 드러낼 수 없게 되었다.
■ 그리스도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
한편 전쟁 후 연합군 최고사령관은 국가 신도를 해체한다는 칙령(1945년 12월 15일)을 발표했고, 신도에 특별한 법적지위와 재정적 지원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조치를 취했다. 신도를 포함하여 모든 종교 단체는 ‘종교법인’으로 등록하여 동등한 법적 지위를 갖게 되었다. 1947년 공표된 헌법 제20조와 제89조는 종교의 자유와 종교와 국가 간 분리의 원칙을 천명한 것이었다.
이것은 국가 신도의 ‘세속화’를 의미하는 것이며, 이때부터 종교의 자유시장 경쟁체제가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여기서 동아시아 교회의 발전과 관련된 운명이 갈리게 된다. 서구세력을 상징하는 그리스도교를 일본과 한국은 각각 다르게 받아들인 것이다.
한국에게 서구-그리스도교는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벗어나게 해준 해방자로서의 이미지였다면, 일본에게는 국가와 민족의 발전을 꺾은 점령군이었다. 한국에게 극복해야 할 외세는 일본이었지만, 일본과 중국에게는 서양이 그러한 존재였다. 즉, 전후 근대국가 발전의 과정에서 서구 그리스도교 문화가 한국에서는 사회발전의 중요한 친구로 받아들여졌다면, 중국과 일본에서는 구중화(중국)와 신중화(일본)의 영광과 자존심을 밟은 원수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교회는 교육과 복지 영역을 넘어 지역운동(육아, 먹거리, 자원활동)과 소수자와 사회정의를 위한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일본교회는 그리스도교의 종교성을 직접적으로 알리고 신자수를 늘리기보다 복음의 기쁨과 진정성을 생활현장과 사회적 약자들 사이에서 겸손하게 그러나 가슴 뛰게 증거하고 있다.
최영균 신부(수원교구 호계동본당 주임·동아시아복음화연구원 연구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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