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기도
하느님,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보이지 않는 보화를 마련하셨으니
저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일으키시어
언제나 어디서나 하느님을 오롯이 사랑하여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참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제1독서
<내 빵을 먹고 내가 섞은 술을 마셔라.>
▥ 잠언의 말씀입니다.9,1-6
1 지혜가 일곱 기둥을 깎아 자기 집을 지었다.
2 짐승을 잡고 술에 향료를 섞고 상을 차렸다.
3 이제 시녀들을 보내어 성읍 언덕 위에서 외치게 한다.
4 “어리석은 이는 누구나 이리로 들어와라!”
지각없는 이에게 지혜가 말한다.
5 “너희는 와서 내 빵을 먹고 내가 섞은 술을 마셔라.
6 어리석음을 버리고 살아라. 예지의 길을 걸어라.”
제2독서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으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5,15-20
형제 여러분, 15 미련한 사람이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잘 살펴보십시오.
16 시간을 잘 쓰십시오. 지금은 악한 때입니다.
17 그러니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으십시오.
18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거기에서 방탕이 나옵니다.
오히려 성령으로 충만해지십시오.
19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로 서로 화답하고,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그분을 찬양하십시오.
20 그러면서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복음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6,51-58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52 그러자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5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54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58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성체와 에너지 보존의 법칙
오늘 복음도 예수님께서 성체성사의 신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하느님께서 당신의 살과 피를 주셔야 하는 분임을 이해하지 못할까요? 당신을 따라온 이들은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라며 말다툼합니다.
하느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법칙 중 ‘열역학 제1법칙,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믿어야 합니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란 “에너지는 생성되거나 소멸되지 않으며, 단지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변환된다.”입니다. 이 법칙을 받아들인다면 사실 빅뱅으로 우주가 생겨나거나 무생물에서 생물이 생겨나고 또 하등동물에서 고등동물로 진화한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모든 존재는 에너지입니다. 어떻게 에너지가 없었는데 온 우주라고 하는 어마한 에너지 체계가 저절로 존재할 수 있을까요? 생명체도 무생물보다는 높은 에너지입니다. 생명체가 죽어서 에너지가 빠져나가면 무생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고등동물도 하등 동물보다 에너지 체계가 높습니다. 그래서 고등동물이 세포가 분해되는 건 있어도 무성생식을 하는 단세포동물이 양성생식을 하는 복잡한 체계를 가진 동물로 저절로 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에 위반됩니다. 아무리 진화론을 주장하는 학자들도 이 모든 게 확률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은 먹지 않으면 살 수 없음도 알게 합니다. 그런데 육체만 에너지가 필요할까요? 우리는 정신적인 에너지도 에너지라고 말합니다. 사랑도 에너지입니다. 사랑할 사람이 없고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죽고 싶어집니다. 에너지가 다 떨어진 것입니다. 특별히 부모로부터 사랑 받지 못한 이들은 자신 안에 사랑을 간직하지 못한 채 언제나 배고프게 살아갑니다.
톨스토이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부모님의 사랑을 충분히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자랐습니다. 두 분 다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사랑의 배고픔을 쾌락으로 채우려 했으나 채워질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게 되자 50세가 넘어 자살 시도까지 합니다. 이때 그는 만들어진 것은 창조자에게서만 에너지를 받을 수 있음을 알고 그리스도께 기도하고 그분이 원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는 “내가 진정으로 따르는 신앙은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은 존재가 존재를 낳고 생명이 생명을 낳으며 사랑이 사랑을 낳는다는 말을 뒷받침합니다. 우리의 생명은 누군가 생명의 희생으로 받은 생명입니다. 보리스 콘펠드 박사는 러시아에 살던 유대인 의사였습니다. 그는 거기서 의사로서 죄수들이 병을 핑계하지 않고 죽도록 일하다가 일터에서 죽게 하는 일과, 난치의 환자는 목숨을 연장하지 말고 죽도록 하여 경제를 낭비하지 말라는 명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받아들였고 한 장암 환자를 치료해줍니다. 암 환자는 “왜 당신은 이렇게 위험한 시도를 하면서 나를 살리려 합니까, 당신은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까?”라는 질문을 의사 보리스에게 던집니다. 보리스는 “괜찮아요. 염려 마셔요. 이미 당신과 나를 살리고자 죽으신 분이 계시거든요.”라고 대답합니다. “도대체 그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에 조용히 미소를 흘리며 의사 보리스는 “그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말합니다.
그 후 의사 보리스는 이 사람을 살린 것이 알려져 밤에 습격받아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의 죽음을 보며 솔제니친은 땅에 엎디어 흐느끼며 “보리스, 알겠습니다. 이제는 저도 저의 최선을 바쳐 주님을 위해 살겠습니다. 그리고 저도 그분의 이름을 전하겠습니다.”라는 고백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솔제니친은 1970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합니다.
에너지도 저절로 생겨날 수 없는 것처럼, 사랑도 생명도 받아야 합니다. 톨스토이는 “뉘우치고 회개한다는 말은 모든 사람에게 자신이 악하며 약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말입니다. 또한 자기가 지은 모든 잘못된 행위를 인정하고 영혼을 깨끗이 함으로써 신성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에너지는 저절로 생성되거나 저절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확실한 죽음 앞에서 생명력이 풍부한 사람이 됩시다. 톨스토이는 마지막에 신상에 귀의했습니다.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자를 풀이하면 장작 위에 눕고 쓸개를 맛본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안에는 ‘복수’가 담겨 있습니다.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오와 월이라는 두 나라는 서로 다투며 원한을 주고받았는데, 먼저 월의 왕이 급습해서 오나라의 왕을 죽인 것입니다. 아버지를 잃은 오나라의 새 왕은 장작더미 위에서 잠을 자며 복수를 맹세하지요. 시간이 지나 월을 공격한 오나라는 월나라를 철저하게 파괴합니다. 이후 월나라 왕은 곰의 쓸개를 핥으면서 복수를 다짐했고, 결국 오나라를 쳐서 복수에 성공합니다.
와신상담 끝에 복수에 성공해서 남는 것이 무엇일까요? 복수에 성공했을 때는 순간의 만족과 기쁨이 있었겠지만, 결국 아픔과 상처만을 남기고 또 다른 복수를 만들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피해는 힘없는 사람들에게 더 크게 다가옵니다.
역사 안에서 전쟁은 결국 모두 망하는 길임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평화를 쫓아야 합니다. 평화만이 모두를 살리는 길입니다. 하지만 자기만족만을 위해 복수를 다짐하고 실행하면서 어리석은 길을 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의 길은 모두를 위한 길이었습니다. 특별한 사람만이 아닌, 죄인이나 의인이나 상관없이 함께 살아가도록 하는 그래서 구원의 길로 나아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주님의 뜻에 반대되는 모습이 내 안에서 그리고 우리 주위에서 너무나 자주 보입니다. 국가 간의 전쟁도, 또 개인 간의 원한도, 또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는 모든 모습이 망하는 길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어떤 길을 선택해야 지혜로운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요?
제1독서의 잠언은 “어리석음을 버리고 살아라. 예지의 길을 걸어라.”라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순간의 만족만을 위한 삶은 어리석음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삶은 순간의 만족이 아닌 영원한 만족을 따라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라고 하시면서, 이 살을 먹고 피를 마시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물론 당시의 유다인은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라면서 말다툼을 벌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직접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는 것이 아닌, 성사적 표지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생명을 주고받는 그분의 신비에 참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미사 때마다 우리는 주님의 성체를 모십니다. 단순한 먹거리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제2독서에 바오로 사도는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으십시오.”라고 하십니다. 당신을 받아 모신다는 것은 주님과 함께한다는 것입니다. 즉, 사랑의 삶을 살면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모두가 힘을 모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순간의 만족이 아닌, 영원한 만족을 좇을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받아 모시면서 더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사랑의 길만이 우리 모두를 위한 길입니다.
오늘의 명언: 군자는 마음이 평안하고 차분하다, 소인은 항상 근심하고 걱정한다(공자).
사진설명: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