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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아서 연구
김진수 교수
합신 구약 Th.M. 및 박사 과정
제출일및 발표일: 2018년 4월19일
발표자 선형수 목사 (20188024)
교재: Thomas Edward McComisky, the minor prophets.
발표범위: 84-106쪽, 호5:13-7:7
해설
5:13-15 이스라엘이 앗수르를 의지함으로 멸망의 길로
13 호세아는 아스라엘이 마침내 자기 병을 알았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정치적, 사회적 상황이 급속히 쇄락함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앗수르에 도움을 구했다. Menahem은 앗수르 비위를 맞추고자 디글랏 빌레셋 3세에게 조공을 바쳤다 (왕하15:19-20). 메나헴은 지주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여 조공을 모았다.
하나님보다는 잠재적 원수의 도움을 구하는 어리석음을 보얐다. אֶל- מֶלֶךְ יָרֵב은 ‘야렙의 왕’인데 ירב이 애굽을 가리키는지 분명하지 않다. 이어서 וְהוּא가 나오기 때문이다. 남성 단수 대명사 (그)이다. 물론 호7:11에 애굽과 앗수르가 짝을 이루어 나온다. מִצְרַיִם קָרָאוּ אַשּוּר הָלָכוּ:
그러나 이어서 여성 단수 대명사가 아닌 여성 단수 대명사가 이어지니 야렙을 애굽으로 단정할 수 없다.
다른 견해는 ‘위대한 왕’(아카드어로 sarru rabu)로 מלכי רב로 ‘나의 왕은 크다’로 보는 것도 근거가 약하다. ‘야렙’으로 읽는 것이 정통적이다.
‘야렙’은 앗수르의 선지적 명칭일 수 있다. 야렙은 ריב의 저시브로 읽을 수 있다. ”그가 다투게 하리.” 호세아 세 자녀들처럼 야렙이 예언적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여수룬이 이스라엘 명칭으로 쓰이는 것과 유사하다 (신명기 32:15). 즉 앗수르가 이스라엘을 정복하리라는 호세아의 예언적 확신이 담긴 말이 ‘야렙’ יָרֵב일 수 있다. 이는 이즈르엘이 사람들에게 심판이 불가피함을 상기시킴과 같다. 이스라엘의 정복자가 될 나라에 도움을 구함은 아이러니다.
1:4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필사적으로 도움을 청해도 상처를 나을 수 없다. 상처는 야웨께서 만드신 것이기 때문이다. 스튜어트는 진정 위험의 근원은 앗수르가 아니라 야웨라고 한다.
1:5 하나님이 아브라함 언약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그들이 그들의 죄를 담당하고 일정 기간이 지나서 회복할 것이다. 그것이 포로 귀환인지 종말적 회복인지 알 수 없다. 스튜어트는 야웨는 그의 백성의 회개를 기다리는 하나님이라 한다. 하나님의 부재 위협은 기본 언약 저주 모티브이다 (스튜어트).
5:13-15 요약 및 질문
1)5:13절에서 메나헴이 지주에게 중과세 함은 결국 힘없는 백성이나 소작농 혹은 임차농 혹은 힘없는 자들에게 피해가 갔다는 의미이다.
2) 하나님은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회개를 기다린다. 그들을 사지에 내몰아서 멸망과 포로의 고난을 겪게 함은 남은 자의 회개와 회복을 통해 언약을 잇고자 하신다.
6:1-3 야웨는 백성의 회개에 답하신다.
6:1 하나님은 백성의 회개를 촉구하신다. 영적으로 죽은 자가 겸손히 하나님께 돌아오면 자비로 맞아 주신다 (역대하7:14). 이스라엘의 소망은 언약의 약속에 근거한다. 야웨께서 결코 자기 백성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실 것임을 호세아는 안다(스튜어트, 신32:39는 나는 죽이고 살리고 상처주고 치료한다고 말한다). לכו ונשובה는 “오라 그리고 우리가 돌아가자.” הלך의 G37, שוב의 N49.
6:2 חיה는 D20.5, קום은 H20.5. 백성이 신실하게 하나님께 응답하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곧 반응하신다. 일으켜 세움은 국가적 안정을 의미한다. 회개는 하나님 앞에 사는 것이다. 생명은 그 나라의 약속된 유업에 대한 관계 회복이다. 죽음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약속한 관계가 끊어지는 것이다. 스튜어트는 n:n+1은 정해진 때를 가리킨다고 본다.
고전15:4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눅24:7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바울이 “성경대로”라고 한 것이 호6:2를 염두에 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스튜어트).
6:3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방식, 목적, 사랑의 요구, 약속을 아는 것이다(4:1). 순종하는 백성에게 하나님이 사랑으로 반응하신다. 그러나 호세아 시대 백성은 하나님을 이방 신들을 바라보듯 했다. 그들에게 더이상 언약의 하나님이 아니었다. 회개하면 회복시키신다(신명기30:3).
6:4-6 유다와 이스라엘의 일시적 사랑
6:4 회개 촉구에서 갑자기 분위기가 어둡게 바뀐다. “내가 무엇을 하랴?” 두나라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덧없는 것, 아침 구름, 이슬같은 것이어서 하나님께 좌절을 안겨드렸다. 자기 백성의 개혁에 실패했다. 번영시는 하나님을 무시했다(4:10b). 재난시에는 다른데서 도움을 구했다(5:11). 희망을 약속해도(2:23-25), 진노를 협박해도(5:1-7) 결과는 같았다. 언약에 신실치 못한 에브라임과 유다를 어찌해야 하는가. 사랑하고 택한 자들을 벌해야 하는 하나님의 고뇌가 있다. 앗수르의 침략이 다가오는데 사랑하는 그들을 넘겨주어야 한다. 6:1-3의 야웨의 절대적 신뢰의 그림과 6:4의 불신실함이 대조를 이룬다(스튜어트).
6:5 그 백성에게 언약의 신실함이 없으므로 야웨께서 그들을 선지자들에 의해 베었다. 벤다, 자른다 는 의미가 무엇인지 명쾌하지 않다. חצב는 수로, 우물을 파다 (신명기6:11), 돌을 다듬다, 기둥을 다듬다 (잠언9:1, 왕상5:29). BDB 345. Ho 6:5 G14.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 나라를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게 다듬으신다는 의미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죽인다הרג 는 병행 개념과 맞지 않다고 맥코미스키는 말한다. 야웨 입의 말과 선지자들과 병행 구조로 쌍을 이룬다. 선지자들의 사역을 통하여 그 나라에 이르른 하나님의 말씀이 그 나라를 죽였다.
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
옛날 옛시대에 깨신것 같이 하소서
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르신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
이사야 51:9 KRV
https://bible.com/bible/88/isa.51.9.KRV
עוּרִי עוּרִי לִבְשִי- עֹז זְרוֹע יְהוָה
עוּרי כִּימֵי קֶדֶם דֹּרוֹת עוֹלָמִים
הֲלוֹא אַתְּ- הִיא הַמַּחְצֶבֶת רַהַב מְחוֹלֶלֶת תַּנִּין:
이사야51:9에서 이 단어 חצב의 사용은 ‘죽이다’의 능동적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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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 미가야, 아모스, 기타 선지적 인물들의 말이 어떻게 그 나라를 죽인 것인가?
지혜롭지 않은 국가 정책, 부패한 관리들, 그리고 여호와의 전통에서 이탈함으로 그 나라가
망한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은 언약적 의무에 신실하게 반응하는데 실패했다. 하나님의 밀씀은 파괴력을 가진 칼이다(히4:12). 하나님의 심판은 낮의 빛처럼 확실하다. 그들은 선지자들의 경고의 말씀을 듣고 돌이키지 않으므로 멸망의 길 죽음의 길로 갔다.
6:6 “나는 제사 보다 인애를 원한다.” 그들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에 실패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삼상15:22-23).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혼합주의를 지적한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상한 심령이 없었다.
요약및 질문
6:1-3
1) 종말론적 언약의 가르침이다.
6:4-6
2) חסד가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께 신실한 사랑이 없었다.
6:7-11a 언약을 깬 이스라엘
6:7 첫사람 아담이 언약을 깬 것처럼 호세아 시대 사람들이 시내산 언약을 깼다(맥코미스키).
스튜어트에 의하면 אדמה로 보아서 그 나라가 먼지처럼 여호와를 배반했다. 모세 언약을 어김으로 저주에 들어갔다.
메이즈는 아담을 장소로 본다. 여호수아가 요단을 건널 때 장소를 아담으로 본다. 수3:16.
언약은 세 주석 공히 시내산 언약을 깬 것으로 본다. 필자는 아담을 장소가 아닌 첫사람으로 본다. שם이 문제가 되나 ‘거기에서’는 그 나라에서로 보면 된다.
6:8 길르앗은 구약에서 이스라엘 트랜스 요르단 지역이다. 호6:8; 사사기 10:17, 12:7에 길르앗이 나온다. 호세아6:8의 길르앗은 요르단 건너편 이스라엘 영토 일 수도 있다. 그게 맞다면 호세아서에서 에브라임처럼 전체에 대한 부분을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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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르앗은 악행자의 도시로 비난받는다. 특정한 죄를 말하지는 않으나 일반적 악행이다. 피의 발자국, 살인이 있는 도시이다. 정치적 시해 혹은 피흘림의 죄가 선지자의 기억에 있었다.
6:9 제사장들도 살인죄가 있었다. 백성을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로 이끌어야 할 그들이 잔인한 정치적 음모에 빠졌다. “세겜 도상”이 언급된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세겜은 족장시대 이후 종교적 정치적 중심이었다(스튜어트). 맥코미스키에 의하면 세겜은 사마리아에서 벧엘로 가는 교차지점이었다. 당시 제사장들은 종교적 책임보다는 정치적 관심사에 빠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벧엘로 가는 도상에서 정치적 시해가 일어났을 것이다.
6:10 살인뿐만 아니라 음행이 있었다. 사회적 부패, 종교적 타락이 그 나라를 멸망으로 이끌었다. 기저에 하나님께 대한 불신실함이 있었다(5:3).
6:11a 매이즈는 11a를 유대 편집자가 삽입한 것으로 본다. 메이즈는 ‘추수’가 역사진행 속에서 하나님의 최종 행위라고 말한다. 스튜어트는 에브라임에 대한 죄의 기소가 유다에도 적용된다고 말한다. 맥코미스키는 편집설을 소개하지만 유다가 여기 들어간 이유를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4장14절은 남성들의 음행과 우상섬김의 죄는 반드시 멸한다고 말한다. 여성들은 당시 약자로서 남자의 의지에 종속되었기 때문이다. 4 :15는 이스라엘이 음행하더라도 유다를 잘못하게 말라 경고한다. 6:11a는 유다에게도 결국 음행과 우상의 죄가 전염됨을 말하며 결국 시기의 차이는 있으나 심판을 벗어날 수 없음을 말한다.
6:7-6:11a 요약 및 질문 혹은 소감
6:11a에서 보듯 맥코미스키의 주석은 산만하고 요점을 정리하는 것이 약하다. 내용은 보수적이라서 괜찮다.
언약에 불신실한 백성(6:7), 피흘림(살인, 시해, 6:8), 제사장들의 음모 가담과 살인(6:9), 성적 부패(6:10)로 심판은 필연적으로 찾아 온다. 먼저는 북이스라엘, 다음은 남유다이다.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 타락은 결국 심판을 기다린다.
오늘 이시대 역시 정치, 종교, 사회의 타락으로 위기를 맞고 있다.
6:11b-7:3 야웨께서 앗수르를 의존하는 이스라엘의 배반을 들춘다.
6:11b 그의 백성의 회복을 바라본다. 고통없는 치유는 없다. 먼저 악이 들추어지고 도려내야 한다. 회복은 그 다음이다.
7:1 회개를 말하지 않으나 죄가 드러나면 용서를 구해야 치유와 회복이 가능하다. 14:2-4는 들춰진 죄에 대해 백성의 회개를 촉구한다. 죄를 들추는 것이 먼저이다.
앗수르에 조공을 바치고자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여 백성은 도탄에 빠져서 도적과 노상 강도로 변했다.
7:2 경제상황이 악화되었다. 하나님은 죄를 기억하신다는 사실을 백성이 생각하지 않는다. 이판사판이다. 그들의 불법적 행위가 파멸로 이끈다.
7:3 메나헴은 앗수르에 조공을 바치고 자기 자리를 공공히 하고 자기 이익을 취하는데 골똘한다. 고관들도 자기 이익만 챙긴다. 그들은 힘없는 백성을 착취하고, 백성은 강도, 도적으로 변하고 무법천지로 바뀌고 멸망으로 치닫는다. 왕과 관리들이 백성을 편안케할 본분을 망각했다.
6:11b-7:3 요약 및 소감 혹은 질문
죄가 들추어져야 고통과 책벌과 그리고 치유와 회복이 따른다.
정치종교 지도자가 본분을 망각하면 약한 백성은 벼랑으로 몰린다.
7:4-7 이스라엘의 부패한 지도자들
7:4 모두가 간음자들이다. 간음은 결혼에 대한 불신실함, 이스라엘이 앗수르를 의지함으로 야웨께 불신실함을 말한다. 모든 계층 사람들이 정욕과 술취함에 빠졌다.
불을 조절해야 할 빵굽는 자가 자리를 지키지 않는다. 결혼의 성결을 멸시하고 정욕에 빠진 모습이 조절되지 않는 타오르는 불과 같다. 음모와 반역의 열기가 야웨를 무시한다(스튜어트). 사마리아 지도자들은 음모(6), 폭력(7)으로 권력을 잡고 야웨의 뜻은 멸시한다(스튜어트).
7:5 “우리왕의 날”은 모호하다. 메나헴 왕이 앗수르와 협상을 성공하여 동맹을 자축한 날일 수 있다. 어쨋든 어떤 일이 일어난 날이다. 고관들이 병이 날 정도로 술에 취했다. 국가 전체 지도력이 술에 빠져서 병이 날 정도이다. 메이즈는 왕과 고관들이 술에 취한 틈을 타서 시해 사건이 일어났다고 한다. 876년 시므리가 엘라를 시해했다(왕상16:8-14). 지도자가 어리석고 참모들이 어리석으면 희망이 없다(르호보암, 역대하10:1-16). 종교지도자가 백성과 같아지면 영적 능력을 잃고 하나님의 복을 상실한다.
7:6 지도자들이 정치적 음모에 몰입한다. 그들 마음이 달구어진 오븐같다. 빵굽는 자가 잠만 잔다. 지도자와 백성이 자기 자리를 지키지 않는다. 오븐은 7:4에서 성적 열정으로, 7:6은 정치적 음모로 은유된다. 예레미야는야웨께 받은 계시를 말하지 않으면 가슴이 타는 것 같았다(렘20:9). 여기서 하늘과 땅같은 대조를 이루는 마음이다.
백성이나 지도자나 모두 악행에 빠져서 통제가 불가능하다. 그들 마음이 달궈진 오븐이고 불이 솟아 오르나 통제할 베이커는 잠만 잔다. 베이커는 누구인가. 정작 오븐에서 빵을 구울 수 없다. 생명의 빵은 없고 죽음의 음모와 간음과 살인과 타락만 있다. 그들을 통제하는 하나님의 영은 없고 악한 영이 지배한다.
7:7 후기 여로보암 시대의 무정부 상태를 본다. 이 기간에 6왕들중 네왕들이 시해되었다. 키없는 배처럼 백성들이 혼란과 폭력에 휩싸였다.
그런 혼돈 속에서 아무도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기도가 없다. 심판의 운명으로 치닫는다. 교만하고 고집센 자들이다(스튜어트).
7:4-7 요약, 소감, 질문
모든 계층 사람들이 정욕과 술취함에 빠졌다(7:4). 오늘의 대한민국 역시 돈이라면 하나님처럼 여기고 정욕과 술취함과 뇌물에 빠졌다. 돈많은 재벌이 돈으로 정치, 법조, 학계, 금융, 산업, 노동, 사회, 관료, 언론, 종교 등등 모든 조직을 매수하여 결국 약한 백성만 더욱 가난하고 비참해진다.
잠자는 베이커처럼 정치, 종교 지도자들,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자기 자리를 지키지 않고 본분을 다하지 못하고 돈을 하나님보다 사랑하고 쾌락과 음란과 권모술수에 빠지는 세상은 동서고금에 희망이 없다.
5:13-7:7 요약, 소감, 질문
기본으로 돌아가자. 말씀, 기도, 겸손, 믿음으로 무장하자.
에브라임은 위기의 해결책을 외부 앗수르에서 힘을 빌려 해결코자 했다.
그들은 가장 두려워 해야 할 하나님을 잊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חסד즉 인애(헤세드)를 원하신다.
겉치레 종교 의식에 앞서서 우리의 마음이 헤세드로 서가는가.
우리의 나의 허물을 보고 자복하고 회개하자.
악행은 그 자체로 이미 형벌이다. 그리고 정해진 심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