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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성곽 문화체험 답사산행
산행일시: 2012년11월 25일
산행거리: 도상거리 약16㎞
산행시간: 6시간 40분(10:00~16:40)
산행코스:장충체육관(10:00)-국립극장(10:30)-남산팔각정(11:00)-안중근광장(11:20)-남대문(숭례문.11:40)-홍난파가옥(12:40)-인왕산정상(13:30)-창의문(14:45)-북악산정상(15:15)-청운대(15:30)-숙정문(15:45)-말바위(16:00)-혜화문(동소문,16:40)
남산-인왕산-백악산-낙산으로 이어지는 서울도성 길은 18.6km로 문화유산과 첨단 문화가 공존하는 곳으로 태조 때 만들어진 가장 오래된 성곽을 비롯해 우리나라의 국보1호 숭례문과 보물1호 흥인지문이 남과 동으로 버티고 있으며 숲속에서 북쪽의 찬기를 막아주는 숙정문과 옛 자취는 사라졌지만 선인들의 숨결을 느껴 볼 수 있는 돈의문, 그리고 대문의 사이사이에 있는 소문으로 서쪽의 서소문과 북쪽의 창의문, 동쪽의 혜화문과 남쪽의 광희문을 두고 있으며 길고 긴 성곽을 말없이 주시하노라면 태조로부터 순종에 이르기까지의 생생한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당시의 역사의 현장에서 조금만 옆으로 시선을 돌리면 현대문명의 산실인 고층빌딩과 폭 넓은 문화와 사회가 공존하는 현실을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서울성곽 순황 답사는 의미가 크다고 볼 수 있다.
◯장충체육관~국립극장 구간
시작점을 장충체육관으로 정하고 지나며 보니 장충체육관은 리모델링 공사가 한창이다.
<들머리에서>
장충체육관을 막 지나 서울성곽 안내판이 설치된 곳에서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본격적인 답사를 시작한다.
성곽 답사는 신라호텔 동쪽으로 성곽 밖으로 말끔히 단장한 순례길은 바로 옆 일반도로와 한동안을 옆에두고 이어지며 한동안 가다보면 돌문이 나오는데 돌문안쪽으로 가던지 밖으로 가던지 위쪽에 있는 공원위에서는 다시 만나게 된다.
옛날 같으면 성곽 안과 밖의 기준은 지금은 도저히 상상하지 못할 정도의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양반과 상놈의 신분과 계급에 대한 차이를 우리는 수시로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옛날 사극을 보아 온 것이 전부이나 실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심했을 것이다.
<타워호텔을 나서며>
성안에는 사대부들과 고관들의 기와집들이 있었을 것이고 성 밖으로는 초라한 초가에 배고픔에 찌든 상인들이 살았던 곳이었겠으나 우리가 지금 걷고 있는 주위는 초가와 비참한 어려움을 보이지 않고 고층의 아파트와 멋지게 지은 주택들이 즐비하기만 하다.
유연한 곡선을 따라 자연스럽게 휘어진 오르막으로 올라 3거리에 닫으니 멀리 불암산과 수락산이 보이며 성곽을 따라 유연하게 흐르던 시선은 벽돌색의 높은 건물로 이루어진 신라호텔에가서 멈춘다.
3거리에서 새로 설치한 데크 길은 타워호텔을 관통해 정문을 지나 국립극장으로 들어서 남산 순환도로를 따라 올라 가도록 되어 있는데 기왕 공사를 할 것이라면 건물 뒤로 이어져 고개위에 높은 이동통로를 설치한다면 시간도 10분을 절약할 수 있으며 성곽순례자의 번거로움을 덜 수 있는데 생각없이 공사를 한 것 같다.
▶이 구간에서 눈여겨 볼 점
⇨장충체육관
장충체육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돔식 실내체육관으로서 1963년 2월 1일에 개장을 하였는데 준공식 때는 당시의 최고회의 의장인 박정희가 직접 참석하여 테이프를 끊을 정도로 대단한 시설물 이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체육관을 설계할 기술이 없어 그 당시 아시아에서 일본에 이어 2번째 선진국이었던 필리핀 설계회사와 건축회사가 필리핀의 기술자들을 데리고 와서 장충 체육관을 지었다 하니 아이러니 하다 할 수 있다.
수차례의 보수를 거쳐 사용하더니 다시 리모델링 공사를 하고 있다.
⇨신라호텔
<신라호텔 동쪽의 성곽 길>
지금은 남산이라고 하면 신라호텔은 범주에서 벗어난 듯 보이지만 일제강점기 때만 해도 남산의 기슭에 속했던 이곳에는 일본 애들이 관리하던 조계사라고 하는 절이 있던 곳으로 일본애들 장난으로 경희궁의 정문을 이곳에 이건하여 사용하기도 한 곳이기도 하다.
1988년부터 시작한 경희궁 복원사업 때 흥화문은 다시 제자리로 이건되었고 신라호텔은 흥화문과 똑 같이 궁궐식 문을 만들어 영빈관으로 현판을 달았다.
◯남산~백범광장 구간
타워호텔 정문을 통하여 나와 길 건너 국립극장 앞을 지나 남산 순환도로로 100여m를 가면 우측으로 성곽이 있고 성곽으로 오르는 데크 계단 길이 조성되어 있는데 신라호텔 옆을 지날 때와는 다른 개념으로 길지는 않지만 이곳은 명색이 남산을 오르는 길이므로 가파른 계단길을 쉼없이 올라야 하는 곳으로 첫 번째 난코스인 셈이다.
<남산 오르는 길>
우리와 같이 성곽 순례를 하는 팀이 앞에 오르고 있었는데 우리보다 더 약한 아마츄어들로 팀 전체를 이곳에서 추월하고 가쁜한 맘으로 팔각정으로 향한다.
서울관광의 으뜸이 되는 이곳은 타워에 올라가 동서남북 서울의 시가지와 고궁 그리고 날씨가 좋다면 인천 앞바다를 내려다보며 쌓였던 스트레스를 날려버리는 곳이고 보니 아직은 이른 시간임에도 중국인이나 일본인 그 외 외국인들까지 제법 올라왔는데 우리 팀이야 그럴 수는 없고 수박 겉핧기 식으로 남산타워의 외관만 보고 시가지 전망처에서 잠시 시가지를 내려다보고 팔각정과 팔각정아래 국사당터 표시석과 목멱산 봉화대를 둘러보고 하산을 시작한다.
< 남산>
봉수대 터를 지나 서편으로 나있는 넓은 길을 따라 내려서니 가야할 인왕산이 지척이라 바쁜 걸음으로 옛날 어린이 회관이 있던 곳, 지금은 그 명칭도 안중근 광장으로 바뀐 곳에 도착하여 우리의 의사 안중근을 생각하며 잠시 한숨을 돌린다.
<안중근 광장에서>
집채만한 정원석에 안중근 의사의 명언을 기록하고 구리빛으로 물든 안중근 의사의 동상을 보며 경외하는 마음으로 광장을 내려서 김구광장으로 들어선다.
자 다듬은 광장 동북쪽으로 김구동상이 세워져 있는데 대구독립군의 임상택 민족의 지도자인 김구선생님께 묵념을 하고 가야 한다며 울 티이 하나가되어 구령에 맞춰 인사를 한 후 다시 숭례문으로 발길을 돌린다.
<김구광장 주변의 새로 단장한 성곽>
남서쪽으로 아직도 때가 타지 않은 흰 대리석으로 단장한 성곽이 눈부실 정도였는데 우리는 새로 난 성곽을 따라 서울도성의 정문인 숭례문으로 내려선다.
▶이 구간에서 눈여겨 볼 점
⇨팔각정이 있는 국사당 터
국사당은 태조 이성계가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고 북악산의 수호신사와 지금의 남산인 목멱산에 수호신사를 두었던 사당으로 지금의 팔각정 자리에 있었으며 일제가 1925년에 국사당을 헐고 편액과 일부를 무악동으로 옮기니 지금 무악동에 국사당이 존재하고 있으며 처음에는 신사의 개념이 지금은 무당의 집으로 전락했다.
⇨목멱산 봉화대
<목멱산 봉수대 앞에서>
팔각정에서 조금을 내려서면 목멱산 봉수대가 5개로 설치되어 있는데 안내문에 의하면 당시 5봉수 제도로 운영되었는데 1봉수는 함경도-강원도-아차산을 통해 남산으로 전달되었고 2봉수는 경상도-충청도-광주 천림산을 통해 남산으로 전달되었고 3봉수는 평안도강계-황해도-무악 동봉(지금의 인왕산이 아닐까?) 그리고 4봉수는 평안도의주-황해도해안-무악서봉(지금의 안산이 아닐까?) 마지막 제5봉수는 전라도-충청도-양천의개화산을 통해 남산으로 전달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숭례문~ 홍난파 가옥 구간
일명 남대문이라고 불리는 숭례문은 서울도성의 정문으로 임진왜란과 한국전쟁 등 어쩔 수 없이 불가피하게 화재로 소실된 적이 있는데 지난2008년2월10일 고양시에 거주하던 채종기(73세)가 일산의 소유토지가 있는 부근에 재개발하는 과정에서 토지보상에 대한 불만으로 시너를 뿌리고 방화를 하여 누각 전체가 전소되었는데 전국에서 국민들이 전소되는 과정을 생방으로 보며 많은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갖게 했던 현장이다.
지금 채노인은 마산교도소에서 복역 중으로 노인 한사람의 착오로 인해 우리나라의 국보1호가 불타 없어져 다시는 옛 건물을 볼 수 없으며 그래도 사람은 안 죽었으니 다시 지으면 될 것 아니냐?고 반문해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던 노인은 많은 반성을 하고 있는지????
<복원중인 숭례문---내년 초에는 복원이 마무리된다고 한다>
복원 공사중인 남대문의 준공일은 2012년12월로 처음대로라면 다음 달에 옛 모습을 일반에게 공개할 것이라고 하는데 아직도 형체를 가리고 공사를 하는 것을 보면 예상보다 늦어지는 것 같으나 하루빨리 공사가 끝나 제 모습을 되찾아 당당한 모습을 보여줄 그날을 기대하며 서울역에서 남대문으로 이어지는 대로를 건너 상공회의소 건물 옆으로 들어서 시가지로 걷는다.
몇 개의 빌딩을 지나 4차선 도로에 도착하였는데 이곳은 서소문이 있던 곳으로 신촌 방향에서 시청으로 접어들기 위해 꼭 지나야 하는 서소문은 서울 8문 중 4소문 중의 하나인 서소문의 명칭은 소의문이다.
<옛 서소문인 소의문으로 복원 계획도 없단다>
소의문은 일제 강점기 때 도로사정을 핑계로 헐렸는데 복원 계획마저도 없는 소의문 터 위에는 자동차의 모습만 보일뿐 마포에서 새우젓을 지고 들어오는 한양사람은 소의문과 함께 영원히 사라진 것인지?
서소문을 횡단해 작은 고개 좌측은 배재학당이 있던 곳으로 지금은 배재고등학교가 고덕동으로 이전하였으나 옛날 배재학당 지금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화학당과 함께 젊은 학도를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신아일보와 정동교회가 마주 보고 있는 정동교회4거리를 건너 덕수궁 돌담길로 들어서 잠시 사진을 찍는 시간을 갖는다.
<덕수궁 돌담길의 모습>
지금은 데이트를 할 만한 곳이 많으나 옛날에는 이곳이 영화에도 수없이 등장하던 곳으로 비 내리는 덕수궁 돌담장 길~~을~ 로 시작하는 『덕수궁 돌담길』이라는 노래도 만들어진 곳이며 이 거리를 남녀가 함께 걸으면 이별을 한다는 속설이 있어 헤어지고 싶어 하는 남자는 이 돌담길을 걷자고 하고 헤어지기 싫어하는 여자는 돌담길은 싫다고 다툼을 하는 연인들이 있기도 했던 곳이기도 하다.
정동교회4거리를 막 지나 오른쪽으로 중명전이 있는데 잠시 건물만 보고 사진 한 장 찍을 시간을 주었으니 중명전은 원래는 수옥헌이라 하여 왕실 도서관으로 사용되었는데 1904년 경운궁(덕수궁이라고도 함) 대 화재로 집무실이 불타자 이곳에서 3년반 동안 집무를 보았는데 이때 정전으로 건물을 승격하였다.
잠시 중명전을 보고 나와 위로 걸으면 예술의 전당이었던 예원학교가 나오는데 옛날에는 연예인으로 키우고 싶은 돈 많고 빽 있는 사람들의 자녀들이 다니던 학교인데 지금도 유명세가 대단한 편이다.
예원학교가 끝나는 모서리에서 우측으로 가는 길을 따라가면 우리의 진로와는 다른 곳이지만 이곳은 러시아 공사관이 있던 곳으로 옛날 공사관의 잔해가 일부 남아있으므로 이곳으로 안내하였는데 정동은 덕수궁을 비롯해 중명전과 러시아공사관은 모두 고종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조선의 태조와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러시아 공사관이 있던 정동공원>
러시아 공사관을 보기위해 이곳으로 들어섰는데 이곳에서 간단히 준비한 김밥으로 점심을 해결하기로 하니 홍난파 가옥인근에 있는 공원에서 계획했던 점심이 20여분 앞서 러시아공사관이 있던 정동공원에서 하게 되었다.
<정동4거리---서대문인 돈의문이 있던곳>
20여분 아주 간편한 식사를 마치고 정동4거리에 도착해 서대문이라 불렸던 돈의문터를 보며 일제강점기 때 도로확장으로 헐어버린 돈의문을 생각하며 복원될 돈의문을 하루 빨리 보고 싶은 맘을 담아 기원해본다.
서울성곽의 서쪽 대문으로 창건된 돈의문은 원래 지금의 서대문 주변이 아닌 사직동과 독립문을 잇는 부근으로 알려져 있으며 세종 15년(1422년)에 현 위치로 이건 되었으며, 임진왜란 등에 의해 멸실되어 숙종 때 중건하여 유지하던 돈의문은 1915년 일제 강점기에 전차궤도 복선화로 인해 철거되었다고 한다.
<옛 서대문인 돈의문의 모습>
서울시는 서울성곽 4대문 중 유일하게 미 복원 상태로 있는 돈의문 복원을 위해 사업을 추진 중에 있으며 돈의문 시계의 개방감을 확보하고 교통 흐름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서대문 사거리의 고가차도도 철거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길을 건너 강북삼성병원 안에 있는 경교장을 보고 송월동으로 올라서 성벽으로 따라가면 성곽 옆에 작고 단아한 모습의 주택을 만나게 되는데 바로 홍난파 선생의 자택이다.
<홍난파가 살았던 집>
가옥 밖에는 홍나파 선생의 흉상을 세워 놓았는데 도심에 사진 찍을 곳이 없어 한컷 담아본다.
▶이 구간에서 눈여겨 볼 점
⇨숭례문에 대한 이야기
원래 이름은 숭례문이며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대문이라고도 불리며 조선초기의 건축물로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이었으나 2008년2월10일 고양시에 거주하던 채종기(73세)가 재개발하는 과정에서 토지보상에 대한 불만으로 시너를 뿌리고 방화를 하여 누각 전체가 전소되었다.
<화재가 나기 전의 숭례문의 모습>
풍수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말을 빌리자면 정도전이 지금의 경복궁터를 주장하여 궁궐을 지었는데 이 당시 반대 여론이 만만치 않았는데 그 이유는 경복궁은 관악산을 마주보고 있어 화(火)산이 관악산으로 하여금 불이 난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정도전은 여론을 잠재우는 비책을 내놓았는데 첫 번째는 경복궁정문인 광화문 앞 양쪽에 해태(해치)를 세워 화기를 막고, 둘째는 도성의 정문인 숭례문의 현판을 세로로 달아 화기를 누르고, 세 번째는 지금의 서울역 자리에 큰 못을 파서 물을 가득 채우므로 화기를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해 현 위치에 경복궁을 세울 수 있었다.
그런데 불이 나던 당시 광화문의 위치가 14m밀려들어갔고 각도도 비틀어졌다하여 있던 광화문을 헐고 새로 짓느라 해치상도 다른 곳으로 이동시켰으며 서울역 부근에 있던 큰 연못인 남지도 어느 때부터 빌딩으로 바뀐 상태였으므로 화기를 다스리는 기운이 모자라 남대문에 불이 났다고 한다.
⇨남대문은 국보 1호인데, 동대문은 왜 보물 1호인가?
이 모든 게 일제의 식민지 잔재로서 일제는 우리나라 문화유산을 지정하면서 국보는 한 개도 허락하지 않았고 모조리 보물로만 지정하였는데 당시 조선총독부가 지정한 보물 목록을 보면 보물1호 남대문, 2호 동대문, 3호원각사지10층석탑, 4호 보신각....
해방이후 이러한 보물체계를 유지하다가 1962년 문화재 위원회가 발족한 이후 국보1호 남대문, 보물1호 동대문, 국보2호 원각사지10층석탑, 보물2호 보신각..... 으로 당시에 등록되어 있던 보물 목록에서 홀수는 국보로 짝수는 보물로 지정하고 번호를 매긴 것으로 사실 역사적이나 문화적 등의 가치측면에서는 국보나 보물의 차이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서소문
소의문은 건축당시 소덕문(昭德門)으로 명명되었으나 성종 때 소의문으로 부르게 되었으며 한강으로 통하는 용산과 마포 그리고 서강으로 통하는 문으로 성내의 장례행렬이 지나는 문이기도 했으며 1914년 일제가 도시계획을 한다는 구실로 헐었으며 지금은 흔적도 찾아 볼 수 없으니 안타까운 마음이야 어찌 글로 다 할 수 있으랴.
⇨중명전은 왜? 이제서 일반인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나?
<왕실도서관에서 정전으로 바뀐 중명전>
원래 경운궁(덕수궁)의 일부였으나 일제강점기 시대에 일본 넘들로 하여금 궁이 쪼개지면서 동떨어진 건물이 되었다. 해방 이후 문화재청 전신인 구황실사무총국으로 넘어갔으며 1963년 일본에서 귀국한 이방자 여사에게 박정희 대통령이 선물했으나 1977년 민간에 매각해 버렸고 이후 개인회사의 사옥 등으로 쓰이다가 2006년에 다시 문화재청이 매입한 중명전은 근·현대사 100년을 고스란히 담은 대한제국 시대 외교사 중심의 전시관을 갖추고 2010년8월29일부터 시민들에게 공개되었다.
◯홍난파가옥~인왕산~창의문 구간
홍난파 가옥을 지나 골목길을 갈지(之)로 지나오면 현저동 인왕산 입구 초입이 된다.
초입 전망대에서 북악산에서 청와대로, 경복궁으로, 우리나라의 심장부인 종로와 중구 일대를 보며 한가한 시간을 가져본다.
급할 것 없이 여유있게 성곽을 따라 올라가다보니 20~30명 되는 경사모 탄체가 성곽 답사중으로 경사모의 뜻을 물어보니 동호회란다.
<맨 좌측이 얼굴바위, 가운데는 모자바위, 우측은 달팽이바위>
무악동에서 인왕스카이웨이로 지나는 도로에 올라서니 공사로 인해 계속 통행을 제한하던 성곽코스가 개방이 되었다, 참 다행이라는 생각으로 경사진 계단을 따라 올라서 성곽 미니 전망대에서 선바위를 보고는 다시 새로 단장한 성곽을 따라 하염없이 올라간다.
올라가며 계속 보는 얼굴바위는 보는 방향에 따라 얼굴의 윤곽이 드러나는데 가깝게 보는 것보다 멀리서 보는 것이 얼굴의 형태가 잘 나타나는 것 같았고 얼굴바위 우측 아래 쪽 좌측에 있는 바위는 모자바위라고 하는데 그 이유를 모르겠고 우측은 달팽이 바위라고 하는데 바위 위쪽 2개의 더듬이 모양이 돌출되어 달팽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 것 같다.
<정상에서 본 범바위>
가파른 계단길을 올라 큰 바위를 지나는데 이 바위는 범바위라고 하는데 어느 쪽에서 봐야 범의 모습이 보이는지?
범바위 위에서 북악을 타고 흐르는 청와대와 경복궁, 시내를 내려다보아도 한눈에 볼 수 있고 지나온 남산의 타워도 가스로 희미하게 보이고 현저동을 시작으로 유연하게 비틀고 다시 반대로 틀며 오라오는 성곽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용이 트림을 하는 모양으로 착각을 할 정도이다.
<기차바위을 배경으로>
<새로 단장한 성곽이 한 마리의 용이 나는 모습이다>
바로 앞 군부대를 안고 한 바퀴를 돌아가는 유연함은 돌아가는 삼각지도 아닌데 잘 돌아가고 가야할 인왕산은 웅장한 치마바위와 정상부의 사람들이 보인다.
범바위를 내려서 진흙 길을 지나면 우측으로 잘 생기지지 못한 , 그렇지만 결코 힘이 없어 보이지는 않는 남근석이 있는데 이 바위는 이곳에서 볼 때 남근석이고 정상으로 오르면서 옆에서 보면 코끼리의 얼굴과 코와 비슷하다하여 코끼리 바위라고 한다.
코끼리 바위를 지나는 길은 가파른 계단길을 오르는데 산행을 할 때 고산 험하고 코가 땅에 닿을 정도로 힘든 길을 오를 때에 비하면 이 정도는 양호한 길이었을 것이다.
<삿갓바위에서>
이렇게 땀을 빼고 오르면 인왕산 정상으로 정상에는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이 바위는 삿갓바위라고 하는 데 왜 삿갓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는지 아무리 찾아봐도 근거를 찾지 못했는데 이참에 삿갓바위 전설이라도 하나 만들어 버릴까?
정상에서 뒤어 오르는 일행과 만나 땀을 식히고 건너편에 있는 기차바위를 배경으로 추억을 만들고 단경왕후의 기다림과 그리움의 한이 서린 치마바위를 다시 상기하고 정도전이 고집을 부리지 않고 하륜의 뜻에 따라 인왕산 아래 궁궐을 세웠다면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 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치마바위를 내려서 창의문으로 향한다.
인왕산에서 창의문으로 가는 길은 만만치 않았는데 그 이유는 맨땅이 별로 없고 군인들이 사용하던 길을 대부분 이용하고 있어 계단으로 되어 있는 데 산의 높이에 비해 경사도 심해서 그런지 가팔랐다.
한사람도 낙오없이 내려선 일행은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서 휴식을 가지며 한가롭게 휴식을 취해본다.
▶이 구간에서 눈여겨 볼 점
⇨치마바위의 전설
연산군의 폭정으로 1506년 박원종이 주동이 되어 반정을 일으키니 이것이 중종반정인데 연산의 뒤를 잇는 중종의 장인이자 중종의 첫째부인인 댠경왕후 신씨의 아버지인 신수근이 반정에 반대하였다는 이유로 공신파에게 사약을 받고 후에 신수근의 딸이라는 이유로 단경왕후를 폐서인하여 사가로 돌려보내게 된다.
<범바위에서 본 정상이자 치마바위>
그 후 중종은 10여년 금슬 좋게 살았던 단경왕후를 못 잊어 경복궁 경회루에 들러 인왕산을 바라보며 폐서인이 된 왕후를 그리게 되고 이 소문이 퍼져 궁 밖으로 나가자 폐비 신씨는 날마다 아침이면 인왕산에 올라 경회루가 잘 보이는 곳에 치마를 걸어두었다가 저녁이면 걷는 행동을 일상화하며 중종이 다시 궁으로 불러주기를 학수고대 하였으나 끝까지 단경왕후는 입궐하지 못했는데 단경왕후가 매일 치마를 걸었다 해서 치마바위라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인왕산 호랑이 출현 기록
예로부터 호랑이의 출현이 잦았다고 하며 기록에 의하면 태종5년 경복궁에 광해군 때는 종묘에 호랑이가 출현해 많은 피해를 주었다고 한다.
◯창의문~혜화문 구간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서 휴식을 취하며 뒤에 떨어진 일행을 기다려 모두 한 자라를 한 후 창의문으로 들어서기 위해 길을 건넌다.
길을 건너면 최규식 경무관의 동상이 있는데 이 분은 1968년 남파 무장공비 김신조 일당들이 청와대를 습격하였을 때 종로 경찰서장으로 그들의 길을 막아서며 목숨으로 대통령과 국가를 구했던 인물이다.
동상 좌측의 계단으로 올라서면 바로 창의문인데 창의문은 4소문 중 북소문에 해당하는 문으로 계곡의 이름을 따서 자하문(紫霞門)이라고도 부르는데 자하계곡이라는 말은 생소하게 들리지만 당시에는 부암동일대를 자하계곡으로 부른 것으로 여겨지는데 자하(紫霞)란 검붉은 안개를 말하는 뜻이니 아침 일출 때 햇빛이 비치면 검붉은 안개가 깔리곤 했을 계곡이 있었던 것으로 예상을 해본다.
우리 일행이 기념촬영을 하려하자 문화재 보호재단 소속 아저씨가 눈치 빠르게 자청해서 사진을 찍어준다니 이렇게 고마울 수가........
<창의문에서>
<창의문의 천장에 그려져 있는 봉황문양>
창의문 주변을 구경하려니 이 아저씨 통금시간이 다되었다는 말에 홍예 안 천장의 쌍 봉황의 문양을 확인해야하는데 얼떨결에 그냥 계단으로 올라섰고 창의문 2층 문루가 열려있어 들어서려니 비상벨이 울려 내부공신 현판도 확인하지 못하고 창의문 안내소로 간다.
북악산 서울 성곽은 68년 북한의 무장공비들의 청와대 습격사건 이후 오랫동안 통제되어 왔었는데 2007년 4월 노무현전 대통령 집권당시 사전에 예약을 받고 신분을 확인시키는 절차를 밟은 뒤 일정한 인원에 대해 출입을 시키다가 2007년 7월부터 출입절차를 간소화하여 자율개방을 하고 있지만 현재 창의문↔숙정문(2km)은 신분증을 반드시 지참해야 통행이 가능하다,
우리 일행은 공터에 비치된 출입신청서에서 신상을 적어 신분증을 제시한 후 출입패용을 받았으나 안타깝게 시인마뇽 선배님께서 오늘따라 신분증을 가져오지 않아 보호재단 직원과 한동안 실랑이를 벌였지만 고압적 태도의 문화재보호재단 직원은 끝내 출입을 허용하지 않아 혜화동에서 만나기로하고 나머지 일행만 북악산 성곽 길로 들어선다.
이곳을 오르기 위해서는 주의할 점이 있는데 청와대를 보호하기위한 경찰들이 곳곳에 근무를 서고 있는데 사진을 찍을때 성곽 안쪽으로는 금지되어 있고 성곽을 찍을 때는 초소와 근무자 그리고 가로등에 달려있는 감시 카메라가 포함되면 안 된다는 것인데 만약 위 사항에 위배되게 찍은 사진은 현장에서 삭제를 해야만 그 지점을 통과할 수 있으므로 철저한 주의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수없이 이어지는 콘크리트 계단을 오르면 북악산 정상에 닿는데 북악산은 큰 의미로 보아 북한산이지만 적은 의미로 북악산이라는 자기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북악이외에도 백악산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다.
<백악산 정상에서>
북악산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백악산은 북악산은 경복궁의 진산으로 인왕산, 남산, 낙산과 함께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산으로 조선조에 쌓은 성곽이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어 등산을 하면서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이기도 하다.
뒤 따라 올라오는 일행들의 얼굴은 모두 힘들어 보였는데 서울도성 답사에 200~300m대의 산들이라고 하여 대충 계산을 하였을 것인데 생각 외로 가파른 계단으로 호된 신고식을 했을 것이다.
잠시 숨을 돌리고 정상의 달콤함을 즐기며 끼리끼리 기념사진을 찍으며 시간을 보내지만 이곳에도 경찰이 포진되어 있으므로 청와대쪽으로 내려다보며 청와대나 경복궁을 볼 수 있는 행동은 할 수가 없다는 것이 아쉬운 점이다.
정해진 공간에서시간을 보낸 뒤 정상을 내려서 청운대로 향한다.
정상에서 청운대로 향하는 좌측에는 성곽을 수리중인 곳도 있으며 이곳에서 조금 내려서면 길가에 소나무가 있는데 1.21사태 소나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다.
<1.21사태소나무에서>
주유소 습격사건 아주 오래전 일어났던 청와대 습격사건은 북한에서 1968년1월21일 무장을 한 공비들을 남파시켜 청와대를 습격하고 대통령을 암살 하려했던 사건으로 당시 이곳에서 우리군과 우리 군경이 공비들과 교전을 벌일 때 총탄을 맞은 소나무들로 젊은 세대들은 그냥 지나쳐 버릴 수 있는 현장이지만 기성세대들은 잊을 수 없는 사건임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청운대에서>
청운대에서 잠시 추억을 만들고 성곽을 따라 한없이 내리막길을 가다보면 서울도성 4문 중 북문인 숙정문에 도착을 하게 된다.
조선의 개국공신이자 당시 실세였던 정도전은 유교의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에 따라 각 문의 이름을 지었다고 하는데 이에 따라 흥인지문-동대문, 돈의문-서대문, 숭례문-남대문, 숙청문-북대문으로 이름을 지었다.
위에 따르면 지(智)에 해당하는 문이 숙청문이며 오늘날의 숙정문인데 처음에는 지(智)자를 따와 소지문(炤智門)으로 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었는데 최종 낙점은 숙청문(肅淸門)으로 정해졌으며 숙청문으로 불리던 이 문은 어느 시기엔지 지금의 숙정문으로 바뀌어 부르고 있다고 한다.
<서울성곽의 북대문인 숙정문>
숙정문을 벗어나 경사진 성곽을 따라가면 말바위 안내소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패용증을 반납하고 말바위로 향한다.
경사진 성곽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입체 계단을 설치하여 성곽을 넘어 와룡공원으로 가야 하는데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말바위를 구경하기위해서 30여m를 더 올라간다.
그냥 지나쳐도 되는데 굳이 말바위를 오른 이유는 일행들과 이곳을 오며 말바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말바위에 대한 유래를 들려주기 위해 말바위를 함께 오른 것이다.
<말바위에 올라>
말바위 유래와 요염한 골반돌리기 시범으로 한 바탕 웃으며 피로도 풀어 본다.
말바위에서 아래로 내려서면 삼청공원이지만 우리일행은 와룡공원으로 가야하므로 말바위에서 잠시 시간을 보낸 후 다시 데크계단을 통해 성곽을 넘어 한적한 와룡공원에 도착한다.
말바위에서 와룡공원의 성곽은 얼마 되지 않으나 이곳 응봉에는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으므로 우회하여 온 것이고 응봉은 이궁이면서 법궁의 역할을 하였던 창덕궁의 주산이 되는 곳으로 응봉 능선을 타고 내려가면 창덕궁 인정전에 닿는다는 것이다.
어차피 성곽 길을 개방한 것이라면 짧은 거리를 군부대 때문에 우회하지 않고 바로 갈 수 있도록 해야 될 것으로 응봉에 주둔하고 있는 군부대가 다른 곳으로 이전해야할 것이다.
와룡공원에서 성북동길까지는 성곽을 따라 넓은 길로 이어지는데 마지막 가는 가을을 아쉬워하는 단풍나무들은 아직도 잎새를 떨어뜨리지 못하고 나뭇가지에 매단 채 오는 겨울을 원망하고 있는 듯하고 성곽너머 경사진 곳에는 빈민촌이 형성되어 있는 1960년대 서울을 보는 것 같았는데 서울에서도 부자들이 산다는 성북동에 빈민촌? 좀 안어울리지만 현실임은 어찌 부인할 수 있을까?
와룡공원에서 혜화동으로 향하는 구간은 성북동길 고개까지는 성곽길이 잘 나있으므로 문제가 없으나 길을 건너 왕 돈가스집 골목으로 들어서며 경신고등학교 담장을 우측에 끼고 계속 걷다보면 정문이 나오는데 정문을 지나 갈림길에서 비교적 길이 좋은 좌측으로 가면 성곽을 이탈하는 것이므로 우측으로 들어서 혜화문에 도착 한다.
<동소문인 혜화문>
▶이 구간에서 눈여겨 볼 점
⇨창의문
가장 원 모습을 잘 유지한 문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문은 1396년(태조 5) 도성을 쌓을 때 북서쪽에 세운 문으로 무지개 모양으로 석축을 쌓고 그 위에 문루를 세운 문으로 옛날에는 북대문인 숙청문이 항상 닫혀 있었으므로 경기도 양주 등 북쪽으로 통행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 문을 거쳐서 왕래하였다고 한다.
조선의 15대 왕이었던 광해군의 폭정이 이어지자 반정을 주도한 이괄, 이귀, 김류 등이 홍제원에 집결했다가 세검정에서 칼을 씻고 창의문을 통해 궁으로 들어가 반정에 성공하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사실들은 1956년 창의문 보수공사를 할 때 천장에서 묵서가 발견됨으로 확인이 되었는데 지금 창의문에는 인조반정 때 공을 세운 공신들의 이름이 적힌 현판이 걸려있다고 한다.
⇨숙정문
숙정문(肅靖門)은 서울성곽의 북대문으로 본래 사람들의 출입을 위해 지은 것이 아니라 4대문의 격식을 갖추고 비상시에 사용할 목적으로 지어졌기에 평소에는 닫아두었다고 하며 기록에 의하면 ‘여염집의 부녀자들이 정월 대보름 전에 숙정문에 가서 세 번 놀고 오면 그 해의 재액을 면할 수 있다는 풍속이 전한다.’고 기록하고 있는가하면 "숙정문을 열어놓으면 북쪽의 음기가 성내로 침범함으로써 장안 부녀자들의 음기가 탱천하여 풍기가 문란해지고 바람이 난다는 이유로 닫아두었다."는 속설을 전하고 있다.
⇨말바위의 전설
산 중에 있는 말바위 혹은 말바우, 말등바위 등은 아이의 잉태를 바라는 여인이 바위 등에 올라가 엉덩이를 앞뒤좌우로 흔들며 남녀의 결합을 상징하는 몸짓을 하며 하늘에
간곡히 아이의 잉태를 빌던 바위라고 한다.
아이의 잉태를 바라는 바위인 말바위는 전국 방방곡곡에 산재하는데 서울엔 관악산 말바위, 안산 말바위, 삼청공원 말바위, 북한산 말바위 등이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