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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환의 삶과 작품 세계
맹문재(문학평론가·안양대 교수)
1. 시인의 생애
박인환은 1926년 8월 15일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 상동리 159번지에서 아버지 박광선(朴光善)과 어머니 함숙형(咸淑亨) 사이에서 2남 1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1933년(8세) 인제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해서 다니다가 1936년 서울 덕수공립보통학교 4학년에 편입했다. 1939년 경기공립중학교에 입학해 2학년을 마치고 1941년 자퇴했다. 개성에 있는 송도중학교로 전학했다가 황해도 재령에 있는 명신중학교로 다시 전학해 졸업했다. 1944년 관립 평양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다.
1945년(20세) 8월 15일 조국이 해방되자 박인환은 학업을 그만두고 상경해 종로3가 2번지 낙원동 입구에 서점 마리서사(茉莉書舍)를 개업했다. 많은 문인과 예술가들이 교류하는 장소가 되었는데, 1948년 입춘 전후에 폐업했다. 4월 덕수궁 석조전에서 이정숙과 결혼한 뒤 종로구 세종로 135번지(현 교보빌딩 뒤)의 처가에서 살았다. 가을 무렵 『자유신문』 문화부 기자로 취직했다. 12월 8일 장남 세형(世馨)이 태어났다.
1948년 박인환은 김경린(金璟麟), 김경희(金景熹), 김병욱(金秉旭), 임호권(林虎權)과 동인지 신시론(新詩論)(산호장)을 발간했다. 동인지에 시 「고리키의 달밤」과 평론 「시단시평」을 발표했다. 1949년 김경린, 김수영(金洙暎), 양병식(梁秉植), 임호권과 신시론 제2집에 해당하는 동인지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도시문화사) 발간했다. 시 「열차」 「지하실」「인천항」「남풍」「인도네시아 인민에게 주는 시」를 발표했다. 여름부터 김경린, 김규동(金奎東), 김차영(金次榮), 이봉래(李奉來), 조향(趙鄕) 등과 ‘후반기(後半紀)’ 동인 결성을 논의했다. 9월 30일 박인환은 임호권, 박영준(朴榮濬), 이봉구(李鳳九)와 함께 조선문학가동맹을 탈퇴하는 성명서를 발표했고, 11월 30일 개인 성명서를 발표했다.
1950년 봄, 자유신문사를 퇴사하고 경향신문사에 입사했다.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박인환은 피란 가지 못하고 숨어 지냈다. 9월 25일 딸 세화(世華)가 태어났다. 1951년 1․4후퇴 때 대구로 피란 갔고, 2월 경향신문사 특파원으로 종군하며 기사를 썼다. 5월 26일 육군종군작가단에 박영준, 정비석, 조영암, 최태응 등과 함께 참여했다. 1952년 5월 15일 존 스타인벡의 기행서 『소련의 내막』(백조사)을 번역해서 간행했다. 5월 30일 일본의 시 전문지 『시학』(제7권 5호)에 시「書籍と風景」을 발표했다. 그 무렵 경향신문사를 퇴사하고 대동신문사 문화부장으로 입사했다. 6월 16일 『주간국제』(제9호)의 ‘후반기 동인 문예’ 특집에 평론 「현대시의 불행한 단면」을 발표했다. 12월 대한해운공사에 입사했다.
1953년(28세) 5월 31일 차남 세곤(世崑)이 태어났다. 7월 중순 무렵 서울로 돌아와 1954년 1월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정기총회에서 상임 간사를 맡았다. 1955년 3월 5일 대한해운공사의 상선 남해호를 타고 미국 여행을 한 뒤 4월 말경 귀국했다. 5월 대한해운공사를 퇴사했다. 8월 26일부터 31일까지 극단 신협이 공연한 작품인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번역했다. 10월 1일 『시작』(제5집)에 시 「목마와 숙녀」를 발표했다. 1956년 1월 초 선시집(산호장)을 간행한 뒤 1월 27일 동방문화회관에서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3월 초 박인환의 시 「세월이 가면」이 이진섭의 작곡으로 명동 일대에서 널리 불렸다. 3월 17일 ‘이상 추모의 밤’을 열었고, 추모 시 「죽은 아포롱― 이상 그가 떠난 날에」를 한국일보에 발표했다. 3월 20일 오후 9시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타계했다. 3월 22일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고, 9월 19일(추석) 문우들의 정성으로 묘소에 시비가 세워졌다.
2. 시 세계 : 민족 국가의 건설과 전쟁 폭력의 고발
박인환의 시 세계는 1945년 8·15해방 이후의 시들과 1950년 6·25전쟁 이후의 시들로 구분된다. 해방기에 추구한 시들은 진정한 해방으로 민족 국가의 건설을 추구한 것이고, 한국전쟁 이후의 시들은 전쟁의 폭력으로 인한 상실감과 허무함을 노래한 것이다.
박인환의 시 세계에 대한 문학사의 평가는 모더니즘의 계보를 이은 것으로 정립되어 있다. 그렇기에 박인환의 시 세계는 현실 인식이 없다고 여겨진다. 한국의 경우 모더니즘의 개념을 문예 사조 자체로 이해하기보다는 리얼리즘과 대립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박인환의 시 세계는 해방기와 한국전쟁기에 현실 참여적인 시를 쓴 것으로 새롭게 정립되어야 한다.
한국은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되어 독립 국가를 수립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박인환은 그와 같은 상황을 국내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국가들까지 인식했다. 해방의 희열을 감상적으로 노래하기보다는 진정한 민족 국가 수립의 필요성을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캄보디아, 베트남, 투르키스탄, 홍콩 등 동아시아 국가들과 연대하며 제시한 것이다.
1500년대부터 포르투갈에 의해, 100년이 지나서는 네덜란드에 의해, 1942년부터는 일본에 의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는 다시 네덜란드에 의해 지배당하는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위해 민중들에게 항전을 촉구한 것이 그 여실한 모습이다. “이제는 식민지의 고아가 되면 못쓴다”라고 경고하면서, “마땅히 요구할 수 있는 인민의 해방/세워야 할 늬들의 나라”이기에 “국가 방위와 인민 전선을 위해 피를 뿌려”야 한다고 호소한 것이다. 민족 해방을 위해 “전인민은 일치단결하여 스콜처럼 부서져”야 한다고, “홀란드군의 기관총 진지에 뛰어들어”야 한다고 역설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박인환이 인도네시아의 민족 해방에 깊은 관심을 표명한 이유는 한국의 해방을 추구하기 위해서였다. “제국주의의 야만적 제재는/너희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욕”이라고 표명한 데서 잘 나타난다. 따라서 “힘 있는 대로 영웅되어 싸워라”(「인도네시아 인민에세 주는 시」)라고 인도네시아의 민중들에게 호소한 것은 곧 한국 민중들에게 호소한 것이다.
박인환은 「남풍」에서 말레이시아, 캄보디아, 베트남 등의 해방도 추구했다. “일찍이 의복을 빼앗긴 토민(土民)/태양 없는 마레”(「남풍」), 즉 말레이시아를 노래한 것이 그 모습이다. 말레이시아는 1511년부터 포르투갈에 의해, 1642년부터 네덜란드에 의해, 1824년부터 영국에 의해, 1941년부터 일본에 의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는 영국에 의해 다시 지배당했다. 말레이시아 국민들은 식민지 통치를 반대하고 일어섰는데, 박인환이 연대한 것이다. 박인환은 앙코르 와트 사원을 보유한 캄보디아의 민족 해방도 노래했다. 캄보디아는 1864년부터 프랑스에 의해, 1942년부터 일본에 의해 점령당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프랑스가 다시 지배하자 캄보디아의 국민들은 민족 해방을 외쳤는데, 박인환은 “크메르의 영광과 함께 사는/앙코르 와트의 나라”와 연대한 것이다. 박인환은 “월남 인민군”의 “항쟁의 총소리”도 지지했다. 베트남(월남)은 214년 진나라의 침략부터 약 천 년 동안 중국에 의해, 1862년부터 프랑스에 의해, 1940년부터 일본에 의해 지배당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호치민(胡志明)을 중심으로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선언하자 프랑스가 반대했다. 그 결과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일어났는데, 박인환은 베트남 인민들의 편에 선 것이다.
박인환의 참여 의식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현대 여성주의 소설과 비평의 선구자로 평가되는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를 노래한 「목마와 숙녀」가 대표적인 작품이다. 울프는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공포감에 휩싸여 1941년 3월 28일 유태인 남편인 레너드에게 애정 깊은 편지를 남기고 우즈강에 투신했다. 박인환은 한국전쟁으로 인한 상실감과 허무감을 버지니아 울프의 비극적인 생애와 연결해 노래한 것이다.
박인환에게 한국전쟁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고 성장해온 그 어떠한 시대보다 혼란하였으며 정신적으로 고통을 준 것이었다.”(선시집 후기)라고 토로했듯이 엄청난 상처를 주었다. 따라서 한국전쟁의 체험을 담은 작품들은 폐허가 된 상황 속에서 생존을 절규한 것이다. “엄마는 전쟁이 끝나면 너를 호강시킨다 하나/언제 전쟁이 끝날 것이”(「어린 딸에게」)냐라고 했듯이 기총과 포성을 들으며 태어난 딸아이에게 전하는 말은 절망적이다. “전쟁 때문에 나의 재산과 친우가 떠났다./인간의 이지를 위한 서적 그것은 잿더미가 되고/지난날의 영광도 날아가 버렸다.”(「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라는 데서도 볼 수 있다.
그렇지만 박인환은 한국전쟁으로 인한 슬픔과 절망에 함몰되지 않았다. “시를 쓴다는 것은 내가 사회를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지지할 수 있는 마지막 것”(선시집 후기)이라는 의지를 가지고 밀고 나아갔다. 전쟁으로 인한 허무함과 상실감을 시대와 역사적인 차원으로 인식하고 노래한 것이다.
3. 영화평론 세계 : 한국 영화의 애정과 전망
박인환은 1948년 1월 「아메리카 영화 시론」(『신천지』)을 발표한 이후 59편의 영화평론을 발표했다. 동시대의 그 어떤 영화평론가보다 활발하게 활동했다.
박인환이 영화평론을 본격으로 쓰기 시작한 것은 1954년 1월 한국영화평론가협회를 결성하고 상임 간사를 맡은 뒤부터였다. 영화평론이 본격화되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박인환이 주도한 운동은 한국 영화평론의 토대를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전쟁이 휴전된 뒤 물밀 듯이 들어오는 서구의 문화 중에서 영화는 단연 앞장선 것이었는데, 박인환이 시대의 흐름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이다.
박인환은 「아메리카 영화에 대하여」(『신천지』, 1948. 1), 「전후(戰後) 미․영의 인기 배우」(『민성』, 1949. 11), 「미․영․불에 있어 영화화된 문예 작품」(『민성』, 1950. 2), 「로렌 바콜에게」(『신천지』, 1950. 6), 「그들은 왜 밀항하였나?」(『재계』, 1952. 8) 등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전쟁 이전부터도 영화평론의 관심이 높았다. 미국의 영화배우이자 모델인 로렌 바콜(Lauren Bacall)을 모더니즘 시 운동을 추구한 동인지 『신시론』의 표지 사진으로 쓸 정도였다.
한국전쟁의 상흔이 채 가라앉지 않았는데도 1954년 『영화계』(2월), 『신영화』(11월), 『영화세계』(12월) 등의 영화 잡지들이 창간된 데서 볼 수 있듯이 한국 영화는 빛을 보이기 시작했다. 박인환은 영화 잡지들을 비롯해 다양한 매체에 영화평론을 발표함으로써 외국 영화를 소개하는 것은 물론 한국 영화의 상황을 진단하고 전망했다. 영화 제작자, 감독, 시나리오, 배우 등에 애정을 갖고 발전 방안을 제시했고, 외화 본수를 제한하는 문제며 영화의 사회의식과 역할에 관한 의견을 내었다.
박인환이 타계한 이후 발표한 영화평론은 「<격노한 바다>」(『향학(向學)』, 1956. 4), 「이태리 영화와 여배우」(『여원』, 1956. 6), 「J.L. 맨키위츠의 예술― <맨발의 백작 부인>을 주제로」(『예술세계』, 1956. 6), 「회상의 명화― <백설 공주> <정부(情婦) 마농>」(『아리랑』, 1956. 7), 「절박한 인간의 매력」(『세월이 가면』, 근역서재, 1982. 1. 15) 등이다.
4. 평론 세계 : 문학, 예술, 사회의 참여
박인환은 1948년 4월에 간행된 『신시론』(제1집)에 「시단 시평」을 발표한 이후 왕성하게 평론 활동을 했다. 「시단 시평」에서는 해방 뒤 시인들이 쓴 시가 현실적이면서도 시대를 극복하려는 작품이 드물다고 진단하고, 바른 세계관과 시 정신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창조 정신이란 곧 인민의 것”이라는 인식을 보여주었다.
박인환은 「김기림 시집 『새노래』」(『조선일보』, 1948. 7. 22), 「김기림 장시 『기상도』 전망」(『신세대』, 1949. 1)에서 보듯이 김기림의 시 세계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새노래』가 시사(時事) 문제를 정리하지 못한 점을 짚어내었고, 『기상도』가 시의 형식과 사고를 에즈라 파운드와 T. S 엘리엇의 복합작용이라고 평가했다. 박인환은 「조병화 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遺産)』」(『조선일보』, 1949. 9. 27), 「조병화의 시」(『주간 국제』, 1952. 9. 27), 「현대시와 본질― 병화의 『인간 고도(孤島)』」(『시작』, 1954), 「시에 대한 몇 가지 생각―『사랑이 가기 전에』와 『동토(童土)』에서」(『조선일보』, 1955. 11. 28~29) 등에서 보듯이 조병화의 시에도 애정을 보였다. 이외에 「1954년의 한국시―『시작(詩作)』(『시작』, 1954. 11), 「현대시의 변모」(『신태양』, 1955. 2)를 통해 시단의 흐름을 정리했다.
박인환은 해외 문학에도 관심이 높아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신천지』, 1948)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발생한 초현실주의와 다다이즘 문학 운동은 물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어난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와 그의 행동을 평가했다. 「전쟁에 참가한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 회상」(『평화신문』, 1951. 3. 26)에서는 프랑스의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가 제1차 세계대전에 참가한 상황을 소개했다. 「현대시의 불행한 단면」(『주간 국제』, 1952. 6. 16)에서는 모더니즘 시 운동이 일어난 시대적 배경으로 현대 문명의 도래와 사회의 불안정을 들었고, 영국의 시인 W. H. 오든과 S. 스펜더가 등장한 상황을 살펴보았다. 영국의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작품을 살핀 「버지니아 울프 인물과 작품」(『여성계』, 1954. 11)도 발표했다. 「해외 문학의 새 동향」(『평화신문』, 1954. 2. 15/2. 22)에서는 미국의 문학과 영국의 문학을 살폈고, 「작업하는 시인들― 사르 안하임의 새 노작을 중심」(『평화신문』, 1955. 1. 23)에서는 영국의 시단을 정리했다. 「위대한 예술가의 도정(道程)― 아카데미 회원 당선의 희보(喜報)를 듣고」(『평화신문』, 1955. 10. 30)에서는 장 콕토의 삶과 예술 세계를 소개했다.
박인환은 연극평론도 나름대로 발표해 「황금아(Golden-Boy)」(『경향신문』, 1952. 4. 21)에서는 극단 ‘신청년(新靑年)’의 공연을 관람하고 성의를 다한 배우들을 응원했다. 「‘신협(新協)’ 잡감(雜感)― <맹 진사댁 경사>를 중심으로」(『경향신문』, 1952. 4. 21)에서는 공연 감상평을 썼다. 「현대인을 위한 연극―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중심으로」(『평화신문』, 1955. 8. 2)에서는 미국의 문명과 사회 문제를 해석했다. 「테네시 윌리엄스 잡기(雜記)― 그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길」(『경향신문』, 1955. 8. 24)에서는 윌리엄스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소개했다.
박인환은 미술평론 「정종여(鄭鍾汝) 동양화 개인전을 보고」(『자유신문』, 1948. 12. 12)에서 작품이 갖는 시대성을 평가했다. 사진 평론 「보도 사진 잡고(雜考)」(『민성』, 1948. 11)에서는 무역과 교통이 발달되고 지식과 민주 사상이 고도화됨에 따라 뉴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짐으로써 사진의 기록적인 중요성을 제시했다. 「나의 문화적 잡기」(『연합신문』, 1953. 5. 25)에서는 문화인 등록을 요구하는 정부의 정책에 반대했다.
박인환은 여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 「여성에게」 (『경향신문』, 1954. 1. 8),「여자여! 거짓말을 없애라!」(『여성계』, 1954. 4) 등에서 한국전쟁 이후의 사회와 아울러 여성의 변화를 살폈다. 「자유에서의 생존권」(『수도평론』, 1953. 8)에서는 동부백림(東部 伯林) 반공 폭동의 진상을 밝히면서 자유가 박탈된 민중에게 경제적인 고통이 가중되면 반항이 일어나는 것을 증명했다. 박인환은 한국전쟁 동안 경향신문사의 특파원으로 「서울 돌입!」 등 많은 종군 기사를 쓰기도 했다.
5. 산문 세계 : 사랑의 변주곡
박인환은 시인의 길에 들어서기 전에 「고(故) 변(邊) 군(君)」(『경기공립중학교 학우회지』, 1940. 6. 20)을 썼고, 그가 타계하기 직전에 「환경에서 유혹― 회상 우리의 약혼 시절」(『여원』 제2권 2호, 1956. 2. 1)을 썼을 정도로 많은 산문을 발표했다. 유고작으로 「사랑은 죽음의 날개와 함께」(최영 편, 『사랑의 편지』, 태문당, 1963. 11. 15)를 남겼다.
박인환은 「여성미의 본질- 코」(『부인』, 1949. 4. 30)에서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 얼굴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코를 회상했고, 「천필(泉筆)」(『민주경찰』, 1954. 7. 15)에서는 만년필을 가지고 싶어 하는 남편을 위해 마련해준 아내에게 고마워했다. 「꿈같이 지낸 신생활(新生活)」(『여성계』, 1955. 10)에서는 아내와의 결혼 생활을 그렸고, 「현대 여성에 관한 각서」(『여성계』, 1954. 3)에서는 사랑이 인간 사회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기에 노력의 필요성을 제시했다. 「실연기(失戀記)」(『청춘』 창간호, 1951. 8)에서는 지나간 사랑에 대한 회한을 담고 있다.
박인환의 사랑은 개인적인 것이면서 사회적인 의미를 갖는다. 「크리스마스와 여자」(『신태양』, 1955. 12)에서는 부산에서 피란 생활할 때 아버지를 잃은 한 소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박인환은 판잣집에서 울고 있는 그 소녀가 안쓰러워 주머니를 털어 조위금을 건넸다. 「미담이 있는 사회」(『가정』 창간호, 1954. 12. 24)에서는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서 미담이 사라지는 사회를 안타까워했다.
박인환은 「원시림에 새소리, 금강(金剛)은 국토의 자랑」(『신태양』, 1954. 4)에서 자신이 태어나서 자란 인제의 푸른 산과 맑은 물과 순박한 고향 사람들을 자랑했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 간성으로 전근 가시는 담임 선생님을 배웅한 일, 애국가를 가르쳐준 동네의 목사님,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고향 등을 소개했다.
박인환은 「서울 재탈환」(『사정보(司正報)』, 1951. 4. 9)에서 국군 6185부대가 서울을 재탈환한 장면을 그리면서 폐허가 된 서울과 그 속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담았다. 「서울역에서 남대문까지」(신태양』, 1952. 11)에서는 한국전쟁에 동원된 비행기의 폭격으로 건물들이 처참하게 파괴된 상황을 그렸다. 「밤이나 낮이나」(『사정보』, 1951. 9. 10)에서는 전쟁의 폭격으로 말미암아 고향의 옛 모습을 찾을 수 없는 안타까움을 그렸다. 「암흑과 더불어 3개월」(『여성계』, 1954. 6)에서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 3개월 동안 바라본 체포, 납치, 살육 등의 상황을 담았다. 「밴 플리트 장군과 시」(『세월이 가면』, 근역서재, 1982) 에서는 박인환이 한국전쟁에 참가한 제8군 사령관 밴 폴리트 장군을 위해 헌시를 쓰게 된 사연을 밝혔다.
「19일간의 아메리카」(『조선일보』, 1955. 5. 13․17)에서는 미국 여행 동안 인상 깊었던 장면들을 소개했다. 무성한 삼림, 미국인들의 질서 의식, 약속시간 엄수, 한국전쟁에 대한 높은 관심 등이었다. 그러면서 한국인이 정신적인 면이나 지식적인 면에서 민국인에 비해 결코 수준이 낮지 않다는 자부심을 내보였다. 「서북 미주의 항구를 돌아」(『희망』, 1955. 7)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뒤 재건에 힘쓰는 일본의 모습, 미국 사람들의 술 문화, 어렵게 살아가는 한국 유학생들과 이민자들을 소개했다. 「미국에 사는 한국 이민」(『아리랑』, 1955. 12)에서는 일제에 쫓겨 망명한 박용현 씨 집을 찾아가 딸기 농사를 열심히 지어 자식들을 공부시키는 모습을 응원했다. 「몇 가지의 노트」(『세계의 인상』, 진문사, 1956. 5. 20)에서는 미국 여행에서 만난 노동자, 식당 주인, 서점 주인, 자동차 회사의 세일즈맨, 도서관장, 오일 회사의 사무원 등 상류층이 아닌 사람들을 소개했다.
박인환이 아내에게 보낸 11통의 편지도 흥미롭다. 「이정숙에게」, 「사랑하는 아내에게」, 「사랑하는 나의 정숙이에게」라고 부른 데서 볼 수 있듯이 아내를 무척 사랑했다. “세형, 세화, 세곤이나 잘 놀고 있습니까? 밤마다 당신과 애들을 꿈에 보고 헛소리를 합니다.”(「정숙이」)라고 썼듯이 자식들도 지극히 아꼈다. 이봉구 소설가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다정다감한 면을 볼 수 있다.
6. 번역 세계 : 전쟁 반대, 예술가의 길, 추리 소설
박인환이 번역한 작품들은 전쟁 반대, 예술가의 길, 추리 소설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박인환이 번역한 작품은 소설 7편, 시 1편, 기행문 1편으로 총 10편이다. 윌러 캐더의 장편소설 『이별』은 사후에 간행되었다. 테네시 윌리엄스의 희곡 「욕망의 이름이라는 전차」는 번역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박인환의 번역 작품 중에서 전쟁 반대와 관계된 것은 『소련의 내막』(백조사, 1952. 5. 15)을 우선 들 수 있다. 미국의 소설가인 존 스타인벡(John Steinbeck, 1902~1968)이 사진작가 로버트 카파(Robert Capa, 1913∼1954)와 함께 1947년 7월 말부터 약 2개월 간 『뉴욕 헤럴드 트리뷴』지의 특파원으로 소련에 다녀온 뒤 발표한 기행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뒤 소련의 실정을 구체적이면서도 객관적으로 담아내었기에 큰 의미를 갖는다. 존 스타인벡은 독일군의 침공으로 파괴된 곳곳을 복구하는 소련 민중들의 눈빛에서 재건의 희망을 보았다. 또한 전쟁을 바라지 않는 러시아 민중들의 마음을 미국인들에게 제대로 전했다. 제임스 힐튼(James Hilton, 1900∼1954)의 소설 「우리들은 한 사람이 아니다」(『신태양』, 1954. 5)에서 의사인 데이비드는 극장의 댄서인 레니 아르가드레바나의 부러진 손목을 치료해주면서 인연을 맺는다. 그러는 사이 영국과 독일의 전쟁으로 동원령이 공포되고, 두 사람은 죄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살인범으로 몰려 사형에 처해진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민중들의 삶이 무너지는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다. 알렉스 컴포트(Alex Comfort. 1920~2000)의 시 「도시의 여자들을 위한 노래」(『시작』 2집, 1954. 7. 30) 역시 반전(反戰) 의식을 담았다. “오 눈(雪)과 불타는 포화의 세계여/밤과 요동하는 램프의 국토여/오 동포와 적의 밤이여”라고 노래한 데서 볼 수 있다. 포화로 말미암아 세계가 불타고 국토가 요동치고 동포와 적의 밤이 놓여 있는 것이다.
박인환이 번역한 작품들 중에는 예술가의 길을 추구한 소설이 있다. 펄 S. 벅(Pearl Sydenstricker Buck, 1892~1973)의 소설 「자랑스러운 마음」(『여원』, 1956. 2)은 한 여성 조각가의 삶을 조명하고 있다. 그녀는 삶의 어려움으로 예술보다 생활을 우선하다가 끝내 조각가의 길을 걷는다. 윌러 캐더(Willa Sibert Cather, 1873~1947)의 장편소설 『이별』(법문사, 1959. 10. 10)은 박인환의 유고작으로 간행되었다. 주인공인 루시 게이하트는 해버퍼드 출신으로 18세의 나이에 시카고로 음악 공부를 하러 간다. 루시는 아우어바흐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는데, 어느 날 선생의 친구인 클레멘트 세바스찬의 독창회를 듣고 매료되어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다. 해버퍼드에서 알고 지내는 해리 고든이 찾아와 청혼하지만, 예술가의 길을 선택한 루시는 세바스찬을 사랑한다며 거절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세바스찬이 코모호에서 배가 전복되어 사망한다. 정신적으로 충격받은 루시는 고향에 내려가 아버지, 언니 폴린, 이웃의 램지 부인 등의 도움을 받고 과수원에서 햇볕을 쬐면서 마음의 안정을 취한다. 그러다가 스케이트를 타러 강에 갔다가 그만 익사하고 만다.
박인환은 추리 소설도 번역했다. 「새벽의 사선」(『희망』, 1952. 9)은 오전 1시 10분 전부터 6시까지 일어난 연애, 절도, 살인, 범인 체포 등을 쓴 윌리엄 아이리시(William Irish, 1903∼1968)의 추리소설이다. 「바다의 살인」(『신태양』 28호, 1954. 12)은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Miller Hemingway, 1899~1961)의 추리소설이다. 해리 모건은 쿠바의 땅 하바나의 항구에서 선원으로 살아간다. 중국인을 플로리다 등에 밀항시키는 일을 처음에는 거절하지만, 아내와 딸 셋의 가장이라는 책임감 때문에 생각을 바꾼다. 그 결과 밀항, 밀수 등에 손을 대다가 생명을 잃고 만다. 「백주의 악마」(『아리랑』, 1956. 2)는 추리소설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아가사 크리스티(Agatha Christie, 1890~1976)의 작품으로 잉글랜드 데번 주의 해안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담고 있다. 미모의 여성으로 남자들과 스캔들을 일으키던 알리나가 해변가에서 교살당했다. 푸아로의 추적 끝에 범인은 알리나와 함께 밀회를 가졌던 패트릭이고, 공범자는 그의 아내인 크리스틴으로 밝혀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