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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성 見性 = |
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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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불 成佛 = |
900 |
= 제생 의세 濟生醫世 |
제중 濟衆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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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란 법문 아시죠? 삼란은 세 가지 어려운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디피컬트 difficult.. 세 가지 어려운 것이 있다. 미근이 듣냐?
difficult 세 가지..
- ㅎㅎㅎ
(편집자 : 원미근(圓美根). 미근은 미국인 유학생 맷 브레신의 법명임.
아직 우리말에 익숙하지 않지만 원불교 법에 재미를 붙여서 화요
공부방에 참석하였음. )
첫째는 뭐죠? 사람 몸 받기 어렵다. 여러분 받으셨죠? 사람 몸 받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시죠? 육도의 윤회 속에서 인도를 받는 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둘째, 불법을 만나기 어렵다. 때로는 온전한 몸 받기 어렵다.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부처님 법을 만났죠? 자. 사람 중에서
부처님 법을 만난 사람은 몇 퍼센트%에요? 사람 몸 받으려면 같은 몸
안에서도 몇 억 분의 일을 뚫고 받아야 합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육도의
윤회로 따지면 사람 몸 받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여러분은 아실 것입니다.
그 중에서 부처님 법을 만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그 다음 부처님 법을 만났는데 깨달으셨다. 부처님 법을 만났다.
♪♩우리 만남은 우연히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램 이었어 ♫♬
만남 – 바람
마음에 바람이 있어야 만남이 있어집니다. 제가 교화를 해 보니까.
저희 교당에 1년에 찾아오는 사람은 300명 정도 되는데, 그 중에 남은
사람은 한 20명 정도 됩니다. 그 20명 중에 보통급을 넘어서 특신급에
올라간 사람, 즉, 이 법이야말로 내 생을 받칠 만 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1년 지니면 반이 사라집니다. 다들 개인적이 사연이 있습니다.
‘요새 마음이 안 좋아요. 집안이 어때요. 누가 나를 째려보는 것 같아요.
교무님이 나를 안 쳐다보았어요.’ 한 반은 떨어져 나갑니다. 열명이
남았습니다. 그 열명 중에 특신급에 올라간 사람이 다섯 명도 될까 말까
합니다. 이 중에서도 몇 년 지나면 반은 사라집니다. 제가 옛날에
교당에 처음 나왔을 때의 사진을 보면 지금 원불교에 남아 있는 사람은
몇 명 없습니다. 이 안암 교당에 왔을 때 초기의 사진을 보면 별로
없습니다.
그러면 왜 남지 않았을까요? 바람, 원력이 있어야 합니다. 또는 확실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신심.. ‘야! 이것이구나. 이것.. 내가 찾던 것이
이것이구나! 여기서 하면 가능하겠다’ 는 확신을 갖는 것입니다. 이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마음을 먹었어도 몇 퍼센트%는 떨어져 나갑니다.
만남 – 바람 - 원력 • 신심
제가 원불교 학과 1학년 때 학생이 60 여명이 되었습니다. 그 해
여름에 완도에 훈련을 가서 우리 동기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 우리 이생에 죽을 때까지 이 회상에 몸 바쳐보자.’ 라고 했습니다.
1학년 마치고 사라지고, 2학년 마치고 사라지고, 3학년 마치고 사라지고,
4학년 마치고 사라지고, 대학원 마치고 사라지고, 교무 되어서 사라져서
한 10명 이상이 사라졌습니다. 저는 많이 떨어진 줄 알았는데 불교는
10명이 출가하면 1명이 남고 9명이 사라집니다. 우리는 90퍼센트가
남습니다. 우리쪽이 생존율이 높습니다.
이 원력과 신심이 딱 들어갈 때가 특신급입니다. 10명 중에 5명 될까
말까 합니다. 그것도 2~3년 동안 법회를 최소한 3분의 2 이상은 나와야
하고 훈련도 대여섯 번은 나야 합니다. 그래야 특신급으로 올라갑니다.
그것도 아주 빠른 사람입니다. 일반인들은 특신급으로 올라가는 데 보통
10년씩 걸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법을 안 만나면 강급합니다. 법을 만나지 못하면 사람의 마음은
거칠어집니다. 어두워집니다. 탁해집니다. 욕심이 아주 많아집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돈은 더 벌 수 있을지 몰라도 그 영혼에 때꼽재기가
더덕더덕 붙어서 결국엔 강급 생활을 합니다.
그러면 법회에 안 빠진 사람이 겨우 강급을 면하고 수평을 유지합니다.
그러나 발전하거나 나아가지 못하고 한자리에 머물러서 그칩니다.
법회에 안 빠져도 큰 변화가 없습니다. 일요일에 교당에 와서 잘
살아야겠다고 하지만 저녁에 자고 나면 또 똑같습니다. 점수를 너무
짜게 줬나요? 오늘 내가 좀 피곤한지 몰라도 하고 싶은 말 하겠습니다.
- ㅎㅎㅎ
결석 안 한 사람이 겨우 평균을 유지합니다. 결석 안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면 결석한 사람은 어떨까요? 내가 지켜본 바로는
결국은 하향 곡선으로 강급합니다. 법회 겨우 보는 것은 타성에 젖어서
겨우 강급 안 할 뿐입니다.
그런데 올라 채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특신급이 되었을 때,
신심과 서원이 났을 때 한 번 탁 올라 챕니다. 특신급은 가다가 살짝
챕니다. 그런데 그때 경계가 너무 많이 와서 90퍼센트%는 한방에 나가
떨어집니다. 갑자기 공부를 더 해야 한다거나 갑자기 알바가 생기는 등
온갖 핑계가 생기면서 법은 뒷전으로 밀립니다. 그러나 원력과 신심이
있는 사람은 법이 뒷전으로 밀리지 않고 앞서는 것입니다. 이 법에 내
생명을 바칠 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9인 선진님은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 법에 내 생명을 바칠 만 하다고 생각하고 당신들의
생명을 바친 것입니다. 그것이 특신급입니다.
원력이 있으면 보통 번뇌의 3분의 2가 떨어져 나갑니다. 아까 도안
교우가 무위도에 가서 10일간 선을 하는데 번뇌가 많았다고 했죠?
왜 번뇌가 많은 줄 아세요? 원력이 없으니까 그런 것입니다. 서원이 딱
서야 합니다. 서원이 딱 서면 염불을 안 해도 번뇌의 3분의 2는 다
도망가 버립니다. 이처럼 서원은 무서운 것입니다.
염불과 좌선 하는 방법을 잘 몰라도 원력이 서서 오롯하고 순수한
마음이 되면 진경에 들기도 합니다. 특히 이렇게 어린 아이들 같은
경우는 오롯한 마음이 되면 진경에 0.1초라도 들어갑니다. 그러면 그
아이는 일생 선하기 쉽습니다. 초•중•고등학교 때…
그래서 수양은 어릴 때 경험하면 좋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사심이 없기
때문에 길게는 못해도 잠깐 시키면 진경에 탁 들어 갑니다.
강급하는 사람들은 때꼽재기가 가득해서 선을 해도 잘 벗겨지지
않습니다. 설거지도 밥 먹고 바로 해야 잘 벗겨지지 며칠 지나면
굳어지는 것과 똑 같습니다.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씩 닦은 사람은 계속
그 자리에 머물고 한 번씩도 안 한 사람은 강급합니다.
특신이 났을 때 한 번 꺾어서 올라 채는데 그 다음에 경계가 오면 두
가지로 나뉩니다. 경계가 오면 올라 채는 사람이 있고 떨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경우에도 올라 채는 사람은 10퍼센트%도 안 됩니다.
90%가 나가 떨어집니다. 처음에 만 명으로 시작해서 경계를 거치면서
결국엔 한 두 명 남습니다.
경계는 내인內因 외연外緣 이라고 했습니다. 내 안의 서원과 신이 있는
사람은 외부의 경계가 영향을 주지만 크게 좌우하지는 못합니다.
내 안에 서원과 신이 없는 사람은 외부 경계가 엄청나게 크게
다가옵니다. 이것이 바로 노예 생활입니다. 노예 생활은 돈이 나를
잡아버리고 주위 상황들에게 휘둘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일생
동안 핑계를 대고 합리화 하면서 주위 환경에 놀아납니다. 이런 외부의
환경을 뚫는 것은 경계를 이겨내는 내인內因, 내 마음입니다.
마음은 우주도 감싸고도 남는 것이고, 경계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꽃이 피는 것을 연속으로 보여 주는 것 보셨어요?
꽃이 어떻게 피나요? 꽃봉오리가 천천히 부드럽게 피어서 마침내 활짝
핀 꽃이 됩니까? 꽃봉오리가 탁탁 튕기듯이 단계적으로 핍니다. 알아요?
몰라요???
- ㅎㅎㅎ
우주에 천천히 부드럽게 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해가 뜰 때도 마디를 지으면서 뜹니다.
- ㅎㅎㅎ
정말입니다. 사실을 말하는데 왜 웃어요?
- ㅎㅎㅎ
이것을 붓글씨로 설명하겠습니다. 붓을 잡는 것을 중봉이라고 하는데
이 중봉을 서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봉은 붓에 힘이 있는 것입니다.
중봉이 되지 않으면 아무리 연습을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중봉을 탁
세워서 연습을 계속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한 일자를 쓸 때 탁탁탁 세 번
꺾어집니다. 붓글씨를 못 쓰는 사람은 그냥 쭉 나갑니다. 사람의 인생도
그냥 쭉 크는 것이 아니라 툭툭툭 매듭을 지어가면서 커 가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마찬가집니다.
사람이 툭툭 매듭을 지어서 클 때가 바로 훈련을 날 때 입니다. 훈련을
나고서 더욱 힘을 발휘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상시 훈련입니다. 상시
응용 주의 사항. 즉, 교당을 계속 다니면서 일상 생활에서 어떻게 정기
훈련을 받은 것을 활용할 것인가? 오늘 내가 염불 좌선 강연을 하는데
여러분이 그냥 ‘~하면 좋겠다’ 고 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실지로 반복을
통해서 해야 합니다.
야구 선수가 공을 분석해서 어떻게 치면 좋겠다고 하면 홈런이
나옵니까? 죽어라 연습을 해야 합니다.
됐겠어요? 남들 놀 때 한 번도 못 놀고 연습 했을 것입니다. 그 사람은
휴일이라는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휴일이 많잖아요?
중국의 원자바오 총리는 22년간 하루도 쉬어 본 적이 없답니다. 자신의
고향에 가 본지가 12년 되었대요. 그러니까 역사적으로 그런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일 중독이라면 안 되겠지요. 그러나 어떤 것을
이루려고 하는 사람은 그만한 정성과 반복 속에서 있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상시 훈련이 중요합니다.
이런 모든 것의 시작은 스승을 통해서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승을 멀리하고 법을 멀리하면서 동지들과 놀 때만 나타나고, 엠티MT
때만 나타나고, 영화 볼 때만 나타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언젠가 알아서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밥도
사주지 마세요. 돈 아깝고, 시간 아깝습니다. 그런 사람은 결국은 떨어져
나갈 사람입니다. 차리리 그 시간에 경전 보세요.
일상 수행의 요법을 실행 하려면.. 즉, 삼학 팔조와 사은 사요를
실행하려면 훈련을 통해야 합니다. 그리고 훈련을 받기 전에 먼저
서원과 신이 스승을 통하고 개인 스스로의 마음 속에 확실히
갖추어져야 합니다.
단학 선원이나 국선도에 사람들이 다니지만 결국 그 사람들은 끝까지
못합니다. 큰 마음, 간절한 원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원불교에 다니는
사람도 마찬가집니다. 내가 원불교에 다니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 작은 자기와 너무 작은 기준에 타협하고
자꾸 거기에 놀아납니다.
그럼 대종사님 당대에는 어떻게 했는지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대종사님 당대에는 원기 10년도에 최초로 만덕산 초선지에 가서 초선을
났습니다. 그리고 총부에 들어와서 제자들 교육을 시켰는데, 염불은
저녁에 처음에 2시간씩 시킵니다. 좌선은 아침에 2시간에서 10분을
빼줍니다. 경행이라고 하는데 10분을 중간에 빼줍니다.
그때 당시의 선진님들은 여러분보다 다 얼굴이 안 좋습니다. 여러분은
다 피자도 먹고 하잖아요? 그런데 그때 선진님들은 먹을 것이 없었고
놀리다가 선을 시키는 것도 아니고 일을 죽어라 합니다. 낮에 일을 하고
저녁에 선을 나시고 아침에 2시간씩을 선을 나셨습니다.
그때 당시에는 여름 겨울에 3개월씩 선을 나셨는데 일자 무식인 할머니
할아버지도 성리에 터진 소리가 나옵니다. 마음을 바라볼 수 있는 힘이
있고 우주를 바라보는 눈이 달라지고 말 한 마디가 달라졌습니다.
무엇을 통해서..? 3개월 훈련을 통해서 달라졌습니다. 마음 공부는 남녀
노소 부귀 빈천이 상관없습니다. 원불교에 많이 다녔다고 마음 공부를
잘하는 것은 아닙니다.
대산 종사님은 원불교 훈련 제대로 난 사람과 사회 사람 100명하고 안
바꾼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훈련을 나면 정체되고 찌든 삶에서 탈피가
됩니다. 제가 훈련을 날 때마다 마음이 항상 괴롭습니다. 훈련을 날 때
미꾸라지 같이 알바나 인턴 그리고 과외 때문에 못 간다는 소리를 들을
때 이 사람은 서원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서원이 있는 사람은 그런
소리를 안 합니다.
사람은 마음만으로 절대 변화가 없습니다. 용광로에서 달궈지고
망치질을 수 없이 받는 쇠처럼 그 사람이 훈련을 통해서 반복을 통해서
했을 때 비로소 달라지는 것입니다. 변화는 거기에서 있어지는 것입니다.
마음만으로 일상 수행의 요법을 아무리 하려고 해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훈련을 통해서 그것이 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훈련을 정기와 상시로 나누었습니다.
불보살은 무엇을 통해서 됩니까? 다른 것이 아닌 훈련을 통해서 됩니다.
훈련이라는 것은 순간순간 마음 공부의 총체요, 유념이요, 반복이요,
지속적인 단련입니다. 훈련을 통해서 사람이 바뀌는 것입니다.
원불교의 여러 가지 매력 중의 하나가 훈련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여기에 와서 7일간의 출가여행도 만들고 여름에 쉬는 날 끼면 3박
4일, 안 끼면 2박 3일로 훈련을 합니다. 만으로 따지면 하루를 빼야
합니다만… 이번에도 훈련을 지지난 중에 갔다 왔는데 우리 일반 교도가
37명 났고 청년들은 57명 났습니다. 그런데 일반들은 해제식할 때 열댓
명 있었습니다. 나머지는 다 사라졌습니다. 결국은 나중에 후회를
합니다. 내가 다음 생에도 가져 간다는 온전한 정신에는 관심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온전한 정신에 밥을 주고 채워주고 영양분을 주는 것을 생각 안 합니다.
달콤한 것을 보고, 달콤한 소리를 듣고, 입에 달콤한 것을 먹는 것에
에너지를 쓰다가 결국은 훈련을 못 나는 것입니다. 불보살은 훈련으로
되는 것입니다.
대종사님은 개교의 동기에 사실적 도덕의 훈련이라고 하셨습니다.
사실적이라는 것은 실질적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신앙 생활과 수행
생활을 통해서 변화하고 진급을 해야 합니다. 그런 변화와 진급을
하려면 훈련을 해야 하고, 그 훈련은 사실적인 훈련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죵교인들이 괴로움이 많습니다. 사실적인 훈련이 아닌
관념적입니다. 일요일에 와서 설교를 듣고 돈 좀 내고 영혼의 위로를
좀 받고 아편 주사를 한 방 맞는 것입니다. 그 약발로 하루 이틀 가고
집에서는 사실적으로 하지 못 하는 것입니다.
견성이 10의 에너지라면 성불은 900이라고 했습니다. 만 명이
견성하려고 달라 들었을 때 정작 견성한 사람은 10명도 채 안 됩니다.
그것은 아까 그런 경계 속에서 다 무너진 것입니다. 겨우 훈련한다는
것이 좌선 5분?? 그렇게 해서 불보살이 되겠어요?
대종사님이 그렇게 고생하고 배 고파서 힘 없는 제자들을 왜 2시간이나
앉혀 놓겠어요? 여러분은 저녁에 2시간 선을 하라고 하면 하겠어요?
그런데 그렇게 시키셨고 그렇게 하고 나면 달라집니다.
초보자는 처음에 원력과 신심으로 하는 것입니다. 스승의 말이나 법의
말을 받들어서 신심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다 보면 체험이라는
선물이 옵니다.
‘아! 염불을 하니까 이렇게 좋구나!’
‘아! 선을 이래서 하는가 보다!’
이런 말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초반에 원력이 없으니까 번뇌투성이에다 신심은 별로 없고 오직
자신이 아는 만큼만 믿겠다는 생각을 갖습니다. 아는 만큼만 믿겠다는
것은 아는 것이 별로 없기 때문에 믿음이 별로 없다는 것이고 결국은
수행하기 싫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훈련 갈 때 핑계 대고 다
빠져버립니다.
여러분 다른 것은 양보를 해도 훈련 갈 때 양보하지 마세요. 어떤
사람에게서 훈련 갈 때 집안 일이 있다고 나에게 전화가 왔어요.
그러라고 했지만, 속으로는 불쌍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네가 그 윤회의 사슬을 못 끊고 다시 들어가는구나.’
훈련은 우주의 기운이 거기에 응해 주는 것입니다. 저기 미근 교우는
우리말을 못 알아 듣습니다. 나는 속으로 ‘그래 못 알아 들어도 앉아
있어라.’ 왜? 못 알아 듣거나 알아 들어서만이 아닌 것입니다. 거기에
마음이 함께하면 기운이 응해 줍니다. 좌선의 방법 염불의 방법을
몰라도 사심만 없으면 내가 진경에 들 수 있다고 했죠? 똑 같습니다.
향을 싼 종이에 향 내음이 나듯이 저렇게 아무것도 몰라도 교당에 와서
앉아 있으면 그 기운이 응해줍니다. 그것이 인연이라는 것입니다.
저 친구는 알아 듣지 못하겠지만…
인생의 목적은 수양에 있다는 대종사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성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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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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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
분별성 주착심 |
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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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살 때 아무리 지지고 볶고 한다고 해도 죽으면 마음과 뜻은 나가
떨어집니다. 다 사라집니다. 다음 생에 엄마 아빠도 모릅니다. 사람은
결국 분별성과 주착심의 노예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머릿속에서 지지고 볶고 지지고 볶고 합니다.
그런데 다음 생에도 가지고 가는 것은 온전한 내 정신입니다.
내가 이 정신의 힘을 얼마나 갖추었는가를 가지고 갑니다. 더 나아가서
성품은 깨쳐버리는 것이고 정신은 수양하는 것입니다. 수양을 통해서
성품이 깨쳐지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은 이 마음으로 살고 온전한 정신까지 못 갑니다. 누가 자신을
칭찬해 주면 기분이 좋고 누가 뭐라고 하면 기분이 안 좋은 것은 다
분별성과 주착심 때문입니다. 전부 다 아이들이 바꿈살이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래성 쌓는 것과 같고 거품과 같고 풀잎에 맺힌 이슬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모릅니다. 결국은 내가 죽을 때 가져가는 것은
온전한 정신입니다. 성품을 깨쳐서 정신을 가져가는 것입니다. 정신
수양에 대해서 잘 생각해 봐야 합니다. 남자들은 젊을 때 딴짓거리
하다가 좀 생기면 돈과 명예를 찾다가 다 나가 떨어집니다.
‘교무님 사회가 얼마나 먹고 살기 힘든 줄 아세요 기도해도 빠져 버리고
좌선해도 빠져 버리고 훈련도 빠져 버립니다. 참, 나. 그래 놓고 큰
소리를 칩니다. 사람이 죽을 때 집을 가지고 갑니까? 돈을 가지고 가요?
가지고 가는 것은 정신입니다. 진짜 가지고 갈 것은 쳐다보지도 않고
가져 가지도 못할 것에만 바쁩니다. 그럴 때는 어떻게 말해 줘야 해요?
허튼소리를 하고 있으니까 사실대로 말하기도 곤란할 때가 많습니다.
그 사람의 가치관은 분별성과 주착심에서 끝납니다. 희노애락애오욕
喜怒哀樂愛惡慾의 번뇌 속에서 흔들리며 살다가 그것이 마치 인생인 것
같고 그것이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습니다.
적적성성한 마음자리 얼마나 좋습니까? 정신 수양에는 염불과 좌선이
있습니다. 염불은 부처를 생각하는 것으로 생각을 대치하는 것이고
좌선은 생각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염불은 먼저 소리에 걸어서 그
생각마저도 넘어 서는 것이고 좌선은 단전의 위치에 기운을 주해서
생각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를 같이 할 때
위력적입니다. 제가 처음에 진경을 맛 보았을 때도 염불과 좌선을 같이
했을 때입니다.
내가 군대를 가기 전에 우리 아버지가 저에게 총부에 하도 가보라고
하는데, 제가 효자 아닙니까? 그래서 총부에 갔습니다. 한 2주 있었는데
저녁에 염불을 하고 좌선을 했는데 진경에 들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끝났다고 죽비를 딱 때리는데 그 죽비소리가 얼마나 얄밉던지.. 얼른
내 방에 가서 또 앉았는데 틀어져 버렸습니다. 그 이후로 25년 간
좌선을 거의 빠지지 않았습니다. 너무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것도 중간에 과정이 있습니다. 항상 기쁘고 진경에 드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스승의 지도를 받아야 합니다.
교전에 보면 기운을 바르게 하고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기운이 바르게 해야 병이 생기지 않습니다. 기운이 바르다는 것은
호흡이 바르다는 말이고 마음에 사심이 없다는 말도 됩니다. 그리고
기운은 단전까지 가는 것입니다. 생각도 단전까지 갑니다. 기운과
마음을 단전에 내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수승화강이 되고 마음이
비워지면서 진성이 싹 올라옵니다. 하단전을 통해서 중단전 상단전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수양회는 20분을 한다지만 백날 해봐라 그것 가지고 무슨 수양이냐?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만 그렇게 해서 견성 하겠습니까? 그것도 늦게
자고 늦게 퍼먹고 듬성듬성 하면 되겠습니까?
원불교에 정기 훈련을 꼭 나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를 해야 하고 경계가
왔을 때는 서원과 신심을 통해서 또는 스승님과 문답을 통해서 클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런데 거의가 다 나가 떨어집니다.
상시 훈련으로 집에서 아침과 저녁에는 음양의 이치에 반드시 동정이
골라 맞아야 됩니다. 세상의 이치가 다 마디마디가 있고 동정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도 똑 같습니다.
아침 |
정(靜)-음(陰) |
낮 |
동(動)-양(陽) |
저녁 |
정(靜)-음(陰) |
사람이 산다는 것은 음양의 이치에 맞아야 합니다. 아침, 저녁에는
음이고 낮에는 양입니다. 반드시 음과 양이 골라 맞아야 합니다.
순간순간에도 음과 양이 맞아야 하지만 하루를 놓고 봐도 음과 양이
맞아야 합니다.
낮에는 육근이 죽어라 보고 말하고 움직였으면 다시썼던 육근을
일원자리에 돌이켜야 합니다. 그런데 저녁에는 TV를 보다 자거나 밤에
무슨 일을 하거나 아침에는 정신 없이 출근합니다. 아까 자살률
이야기를 했는데 자살을 왜 합니까? 낮에 양만 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균형이 안 맞아서 무너지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물리학계 대가라는 사람을 포항 공대애서 서강대로 모셔왔는데
죽어라 쓰니까 우울증 때문에 아파트에서 내려버리는 것입니다.
우울증이 왜 옵니까 쓰기만 해서 음양의 이치가 안 맞기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들어오는 것이 있게 하고 쓰면 괜찮습니다. 그래서 정靜
가운데 동이 같이 되어야 하고 동動 가운데 정이 같이 있어야 합니다.
정중동(靜中動) 은 과거이고 동중정(動中靜)이 현대입니다.
아침•저녁 |
정중동(靜中動) – 과거 |
낮 |
동중정(動中靜) – 현대 |
현대에는 낮에 활동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침 저녁으로 활동을 많이
하면 안됩니다. 나무는 저녁에 크는 것입니다. 사람도 저녁에 크는
것입니다. 야구선수
망쳐버립니다. 똑같이 내가 일생을 살 때 이 정을 어떻게 잘 하느냐에
따라 보은을 얼마나 잘하느냐가 달린 것입니다.
제가 아침 저녁으로 정을 하지 않았다면 몸살이 나서 저는 진작에
죽었을 것입니다. 정을 했기 때문에 살아 있는 것입니다. 정하는 것이
사치요, 신심 난 사람이 하고, 교무님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출가 재가를 떠나서 원불교를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 누구나 인간이라면
음양의 이치에 맞게 동중정이 맞아야 되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은 동정이 안 맞으니까 낮에 죽어라 일하고 저녁에는 먹고
살기 힘들다며 죽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밤에는 TV를 보거나 노래를
듣다 자는데 아침에 일어나도 필름이 계속 돌아가고 노래가 술술
나옵니다. 그렇게 살면서 낮에는 또 죽어라 일합니다.
동중정이 맞으면 낮에도 무시선으로 하고 저녁에 정을 하니까 기운이
회복이 되어 건강해지고 만사에 기운이 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녁에는
반드시 호흡을 하다가 자야 합니다. 반드시 최후의 일념과 최초의
일념을 같이 맞추어주는 것이 좋습니다. 수도인은 오른쪽이 아래로 가게
해서 잡니다. 즉, 왼쪽 심장이 위로 올라가게 해서 잡니다.
법정 스님의 책을 봤더니 어떤 스님 밑에 열세 살 난 아이가 갔는데
오른쪽으로 안 자면 잘 때 뺨을 부쳐버립니다. 그렇게 해서 길들여
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원불교가 불교보다 어쩐다며 프라이드를 갖고 그러는데 차라리
갖지를 말던가 아니면 가지려면 불교보다 그만큼 무엇을 좀 더 해야
하는데, 겨우 20분 하면서 수양이라고 참 기가 막혀서…
- ㅎㅎㅎ
어떻게? 하면 됩니다.
염불법과 좌선법은 정기 훈련법과 상시 훈련법의 관계 다음에 3장이
염불법이고 4장이 좌선법입니다. 그때 자세히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만 말씀 드리겠습니다. 제가 학생 때 좌산님께서 강의를 해
주셨는데 목탁을 치면서 어머니 어머니를 부르면서 하라고 하셨습니다.
한 번 해보시겠어요?
(목탁을 두드리면서)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이렇게 하셔도 되고 아니면 자기 이름을 부르세요. 저 같으면
김제원불. 김제원불. 김제원불. 김제원불. 김제원불. 김제원불. 김제원불.
김제원불. 김제원불. 김제원불. 김제원불. 김제원불. 김제원불. 김제원불.
김제원불. 김제원불. 김제원불. 김제원불. 김제원불. 김제원불……
이렇게 해도 되고
부처님.
나무아미타불은 어느 것으로 해도 됩니다. 제가 옛날에 백양사에서 아침
예불을 선운 스님과 같이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아주 빠른 속도로 했습니다.
우리는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이렇게 하는데 ‘나무’라는 것은 귀의한다. 아미타 부처님이라고 하는데
아미타불은 무량수각 이라고 합니다. 무량수는 자성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자성자리를 깨친다는 말입니다.
무 |
량 |
수 |
각 | |
無 |
量 |
壽 |
覺 | |
=자성(自性) 자심미타 |
| |||
우리 육신은 80~100년 살면 가지만 자성, 우리의 성품이라는 것은
무량수입니다. 여기는 죄복을 넘어선 자리입니다. 이 자리를 깨친다는
말입니다. 이 자리에 귀의한다는 말입니다.
‘나 그 자리에 가고 싶소 가고 싶소…’ 그 소리 입니다.
그런데 서원이 없으면
‘내가 가든 말든 잘 모르겠소. 가든 말든 잘 모르겠소…’
이렇게 하면 가겠습니까?
계속 ‘귀의하겠습니다. 귀의하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때로는 헌배를
하고 때로는 기도를 간절한 신앙의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염불은
소리에 마음을 집주하는 것입니다. 오만 가지의 번뇌가 돌아다니는데
거기에 ‘나무아미타불’이라는 그 소리에 들이대서 수많은 생각을 한
생각으로 대치하는 것입니다. 일념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념으로 계속 하다 보면 그 일념을 넘어선 일념이 있습니다. 넘어선 그
일념이 그 소리를 바라볼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염불입니다.
염불 하기 전에는 음식을 조금 먹고 잠을 적당히 자야 합니다. 서원을
챙겨야 합니다. 그 다음에 헌배나 요가를 해서 몸을 만든 다음에 염불을
해야 합니다. 염불을 하고 나서는 좌선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요일
헌배 수행의 밤에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교당에서는 아침에 헌배를 40배 하고 일상 수행의 요법을 외우고 염불
좌선은 결국에는 정신 수양을 하고 사리 연구를 잘해서 견성을 하자는
것이고 견성을 잘해서 실 생활에 활용해 쓰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삼학 팔조 사은 사요 일상 수행을 실행하자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염불 좌선이 재미있다고 염불 좌선만 하는데 염불 좌선이
목적은 아닙니다. 염불과 좌선은 내가 생각의 생각을 비우고, 비우고,
비워서 맑게 하여 정신의 본래자리에 가게 만들고 좌선을 통해서 번뇌를
비워서 자성자리를 확인하고 그것이 바로 염불로 이어집니다. 견성은
거기서 있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어디 훈련 가서 마음자리라는 것은 이것이다는 설명을 듣고
성품을 봤다고 하는데 내가 그런 사람은 그냥 머리를 한 대 때리고
싶습니다. 그러게 해서 견성하는 것 아닙니다. 전생에 닦은 사람은
가능합니다. 육조 대사 같은 분은 가능합니다. 그렇지 않은 범부들은
서원을 세워서 그렇게 육신을 조절하고 염불하고 좌선해서 진경에
들어가다 보면 그 진경자리 그 자리가 성품자리입니다. 그래서 수양과
연구가 반드시 연결되게 되는 것입니다. 진경자리 그 자리가
성품자리입니다. 거기에 맑은 마음과 맑은 정신으로 의두를 비추면 지혜
광명이 자성으로 밝아지면서 훤해져 버립니다. 알려고 해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알려는 마음도 탈입니다. 비추다 보니까 밝아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원리입니다.
염불 좌선 안하고 겨우 한다는 것이 관념으로 설교를 듣고 책보고
건지로 이해하고 자주 들어서 그러겠지 라고 넘겨짚고 그렇게 해서 무슨
견성이에요. 그것은 견성이 아닙니다. 수양을 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견성을 할 수 없습니다. 전생에 닦은 사람 빼고는 어렵습니다.
진경자리에 들었을 때 그 자리에서 의두 요목을 들이대서 밝아지는
것입니다. 언제 해야 해요? 젊을 때 해야 합니다. 어릴수록 좋습니다.
그런데 젊은 사람은 과외 한다고 하고 공부 해야 한다고 하고 결혼
한다고 하고 애기를 낳는다고 합니다. 또 나이를 먹은 사람은 다리
아프다고 합니다. 언제 해? 언제 해? 언제…???
나이가 많고 적고 환경이 좋고 나쁨을 넘어서는 것이 서원이고 신입니다.
환경을 초월하는 것이 서원과 신입니다. 그런 환경의 지배를 받아서 이
핑계 대고 저 핑계 대면 무슨 수행이에요? 수행이라는 것은 그런 것을
넘어 서는 것입니다. 다 떨어져버려도 좋습니다. 진짜 경성할 사람만
남겨서 키우고 싶습니다. 숫자는 상관이 없습니다.
원불교 교도가 많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짜 서원과 신을 세워서
수행의 재미를 맛보고 스스로 밝아져 이것이 대종사님의 법을 알고
스스로 기쁨의 춤을 추고 노래 하고 스스로 밝은 빛을 내는 것이 바로
교화이고 이것이 바로 인생에 있어서 이 종교를 만난 보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질문하세요?
n 질문과 답변 =========================================
Q_박원허 : 절박한 심정으로 수행을 하다가 어느 순간에 마음에 평화를
얻으면서 제 스스로 만족이 되자 오히려 수행이 게을러졌습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A_교무님 : 내가 전력으로 하다가 마음이 편해지니까 방심을 했다.
이것은 신분의성의 기초가 안 된 것입니다. 서원이 약한 것입니다.
원불교를 다니면서 작은 앎과 작은 마음에 만족하며 살자? 이것은
아닙니다. 원불교는 일원상의 진리를 깨쳐서 대인이 되자는 것이고 이
세상에 보은 하자는 것입니다. 내 마음의 평화만 알고 살자는 것은
아닙니다.
Q_박원허 : 두 번째는 단전 호흡을 할 때는 기운이 모이면, 색에
이끌리는 마음이 커지는 것 같다. 욕정이 막 나오거나 하는데 어디에서
찾아봐도 그냥 참아야 된다는 얘기만 있지 그것을 어떻게 돌려서
활용한다는 얘기가 없었습니다.
A_교무님 : 그것은 대치공부가 필요하다. 그래서 원력과 신심이
중요해요. 옛날 스님이 선을 할 때 아랫도리가 올라오니까 밑에
내려가서 술집아가씨하고 하고 오는 경우가 있기도 합니다. 선을 하다가
보면 기운이 단전에 충만해서 정기가 올라와서 어쩔 줄을 모를 때가
있기도 합니다. 그런 경우가 종종 나옵니다.
선은 뭐하자고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좌선 전에 일상 수행의 요법을
외웁니다. 선은 일상 수행의 요법을 하기 위한 것입니다. 내가 뭐를
하기 위해서 선을 하는가? 서원이 무엇인가? 이럴 때 스승님은 법으로
어떻게 하라고 했는가? 원력이 크면 그런 것들은 기본적으로 해결이
됩니다. 그리고 마음의 원리로 놓고 볼 때는 육신의 기운이 차분해지고
정기가 그쪽으로 가다 보니까 당연히 그런 현상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 그런가 보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Q_황원공 : 제중 없이 성불하기 어렵고, 두 개가 일치라고 했는데
900에는 제중의 노력이 들어 간 젓이지요?
A_교무님 : 포함 된 겁니다. 제중 없이 어떻게 성불한다는 겁니까?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수행만으로 성불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수행은 제중이 함께한 수행이어야 합니다. 절대 성불할 수 없습니다.
나 혼자 열심히 일해 보세요 절대 망합니다. 나 혼자 열심히 하되
반드시 주위에 은혜를 베풀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열심히 한 것에
성과가 나오지 그렇지 않으면 주위에서 다 막아 버립니다. 살아보면
압니다.
나만 열심히 하면 된다는 사람은 제일 멍청한 사람이고 가장
가난해지려고 준비하는 사람입니다. 열심히 하되 반드시 자타간에
균형이 맞아줘야 합니다. 음식점에도 싼 것도 있어야지, 내 이득만
보려고 하면 음식점 망해버립니다. 똑같습니다.
감사합니다.
타이핑:
편 집:
950302_화공_45_제2장_1절 정기훈련법-염불좌선.doc
첫댓글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
늘 감사합니다~
이제야 글을 보았습니다.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