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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양미숙성도님
주 안에서 잘 지내시는지요.
지난 주일에는 금년 들어서 가장 춥다고 보도가 되었는데, 그 추위가 점점 더 강해지더니 오늘은 더욱 드세었습니다. 추위가 볼테기에 느끼는 강도가 더욱 세었거든요.
님은 마태복음 25:14-30에서 말씀되고 있는 ‘달란트 비유’와 관련하여 질문을 해 주셨습니다. 이는 님이 근무하시는 병동의 간호사 한분이 하시는 이야기를 듣고서 갖는 의문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야기는 님이 듣기에도 인간의 행위로 구원을 받자는 것으로 들립니다만, 그분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불현듯 생각난 ‘달란트 비유’를 인하여 이것에 관하여 설명한 글도 보기도 하였습니다만, 그럼에도 여전히 마음에 남는 의문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첫째, 자신이 받은 달란트(님은 이 달란트를 은사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대로 열심을 다해서 노력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로 나뉘어 열심을 다한 자는 천국에 들어가고 게으른 자는 내어 쫓김을 당한 것에서 “ ‘한 달란트 받은 자’가 주께 보고한 말도 그다지 틀린 것 같지 않다”는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둘째, 이런 의문을 가지고는 있지만 그것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럼에도 “어쨌거나 주인이 올줄 믿는자는 열심을 내서 마진을 남겨야 하는데 그것은 어떤 마진을 말하는건지..그냥 열심히 살으란 말인지 아님 전도를 열심히 하라는 말인지.. 아님 이웃사랑을 열심히 실천하라는 말씀인지...”하는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은 그 종의 말에 나는 심은 데서 거두는 자임을 말씀하시는데 “분명 행위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듯 하기도 하고 믿음을 심으란 얘기인듯 하기도 하고” 하여서 “분명 우리의 행위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 아닌가요?”라고 질문을 하셨습니다.
이에, 님의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달란트 비유’에 대한 설명과 함께 세 가지로 구분하여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 답변이 좀 길게 될 것 같습니다. 하오나, 답변을 보는데 시간이 걸리더라도 대충 읽지 마시고 찬찬히 살펴 잘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님에게 본 답글이 님의 궁금증을 풀어줄 수 있는 유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님이 궁금해 하는 달란트 비유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 그 내용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5장 14-30절 입니다.
“14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15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16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17두 달란트를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18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19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 새 20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1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 할지어다 하고 22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3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 할지어다 하고 24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26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27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28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를 가진 자에게 주어라 29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0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이 ‘달란트 비유’를 예수께서 무엇 때문에 말씀해 주시게 되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본문의 시작을 이렇게 말씀해 주시고 있죠.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14절)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또”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말이죠. 이유를 말하는 접속사로서 본 달란트 비유를 말씀하시게 된 것이 앞 문장과의 연결에서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왜냐하면”, 또는 “다시 말해서”, “그러므로”, “그러한 까닭에” 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말입니다. 앞서의 내용인 마태복음 25:1-13에서의 ‘슬기로운 처녀와 미련한 처녀 비유’에서 “천국은 마치…와 같으니”를 말씀해 오셨는데, 이 천국이 어떤 것과 같다는 것을 이제 달란트 비유를 통해서 다시 말씀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공교회가 택하고 있는 한글역 성경인 개역성경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이 “또”는 앞에서의 ’천국‘ 곧 하늘나라(하나님의 나라)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해서 이 “또”는 “또한(다시 말해서) 하늘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늘나라는 마치 ~것에 비유할 수 있다”라는 것으로 하늘나라가 어떻다는 것을 알게 해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이죠. 앞서에서 비유를 든 것과 같이 여기서도 ’하늘나라‘, 곧 ’천국‘을 알게 해주는 설명으로 비유를 들기 위하여 시작하고 있는 문장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달란트 비유‘가 무엇 때문에 말씀되어지고 있었던 것인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다음으로는 이 ‘달란트 비유’에서 해주시고 있는 내용이 무엇인지를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비유의 시작인 14절은 “천국은 마치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라고 하는 것으로, “하늘나라는 마치 어떤 사람이 다른 나라에 가게 되어 떠나게 되면서 자기 종들을 불러 자기 재산을 맡김과 같다”, 또는 “하늘나라는 또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먼 길을 떠나면서 자기 종들을 불러 자기 재산을 맡김과 같다” 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보게 되는 비유에 등장하는 “어떤 사람”인 ‘주인’은 이 비유를 말씀하고 있는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그리고 이 비유에서 어떤 사람인 주인과 함께 등장하는 “그 종들”은 본문 전체의 내용을 보게 되면 주인에 속한 자들로서 주인에 의하여 “착하고 충성된 종”과 “악하고 게으른 종”으로 나누어져 분리되어서 그들에게 합당한 곳으로 보내져 각각 그 행한 행위대로 주인으로부터 갚음을 받게 되는 자들입니다.
이 내용을 좀 더 자세하게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인 주인은 자기 종들을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자신이 다른 나라에 갔다 오게 되는 먼 길을 떠나게 될 것을 이야기 해 준 후 그들에게 자기의 재산을 맡아 관리할 수 있는 각각의 재능(능력)에 따라 나눠 맡겼습니다. 주인이 이처럼 자신의 재산을 그들의 능력에 따라 맡기고 떠난 것은 단지 자기 재산을 맡겨 보관하여 지키게 하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종들이 각각 그들이 지닌 능력의 역량에 따라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여서 이윤을 남겨 주인의 재산을 증식시키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주인의 뜻을 잘 헤아려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를 맡은 종이 각각 맡은 것만큼의 이윤인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를 남김으로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규정하시고 맡은 달란트를 가지고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단지 보관만 해온 한 달란트를 맡은 종을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규정하며, 이들을 각각 분리하여서 그들에게 합당한 처리를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께서 ‘달란트 비유’를 들어서 ‘천국’에 대한 가르침을 하시고 있는 것은 천국이 이들에게 그들의 정체성을 드러내어 분류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일을 천국의 주인이신 예수께서 재림하셔서 하십니다. 그래서 그렇게 그들의 드러난 실체에 따라서 각각 “착하고 충성된 종”, 또는 “악하고 게으른 종”임을 규정하시고 이 서로 다른 종들을 분리하여 그들에 합당한 조치를 하십니다. 그것은 착하고 충성된 종은 천국에 들여보내는 것이며, 악하고 게으른 종은 천국 문 밖에 내쫓아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마지막 날에 이 일이 있게 될 것인데, 이러한 분리의 일을 천국 복음이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은 마치 …와 같다”를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마지막 날에 사람들을 천국에 들여보낼 자와 천국 문밖에 내쫓아 버릴 자의 두 종류로 분리하기 위하여 ‘현재’, 곧 “지금에” 사람들을 두 종류로 분류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비유로 알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천국이 어떻게 이렇게 사람들을 두 종류로 분류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인가를 이 ‘달란트 비유’를 가지고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비유에서 세 명의 종에게 주인의 재산인 달란트를 맡기는 것에서 말씀해 나가셨습니다. “또 어떤 사람인 주인이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맡기고 떠났다”. 세 명의 종들은 각각 주인으로부터 달란트를 받은 그 시로 바로 가서 행동을 취하였습니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자는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그리고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그 역시 두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그것을 가지고 가서 땅을 파고 감추어 두었습니다. 이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저축해 보관할 수 있는 은행이란 것이 없었기 때문에 땅을 파서 돈을 숨겨 놓는 것으로 돈을 관리하는 방법을 취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종도 주인으로부터 받은 돈을 땅을 파서 그 속에 숨겨 놓은 것입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 타국에 갔던 주인이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재산을 맡긴 세 명의 종을 불러 회계(會計)하였습니다. 다섯 달란트를 받았던 종은 원금 외에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라고 보고 하였습니다. 그것을 본 주인은 그가 맡은 일을 참으로 잘해 낸 것을 보고 기뻐서 말하였습니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 할지어다”. 그리고 나서 주인은 이번엔 두 달란트 맡겼던 종을 불렀습니다. 그 종은 주인 앞에 나아와서 자신이 맡았던 원금 두 달란트 외에 두 달란트를 더 내놓으면서 보고 하였습니다. “주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러자 이번에도 주인은 그가 맡은 일을 참으로 잘 해 낸 것을 보고 크게 기뻐하면서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 할지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제 주인은 마지막 남은 자기 재산 한 달란트를 맡겼던 종을 불렀습니다. 그 종은 주인에게 나아와서 보고하였습니다.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여기서 한 달란트를 맡았던 종은 자신의 주인을 ‘굳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거친 분’, ‘사나운 분’, ‘무서운 분’, ‘혹독한 분’, ‘엄격한 분’, 또는 ‘인색하고 매정한 분’이라는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종은 주인에게 자신이 주인으로부터 재산을 맡아 관리한 일에 대해 보고하는 것을 “주인님은 씨를 뿌리지도 않은 곳에서 거두어들이고 심지도 않은 데서 모아 들이는 ‘굳은 사람’인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비록 주인으로부터 받은 재산을 가지고 잘 관리하여서 이윤을 남겨 재산을 증식시키더라도 주인이 그 모든 돈을 다 빼앗아 갈 것이므로 돈을 다만 땅 속에 묻어 감추어 두었다가 그 돈을 있는 그대로 가지고 왔습니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보고를 받는 주인은 크게 노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그런 인색하고 매정한 사람으로 알았느냐? 그래서 네가 수고하여 힘들이고 애써 관리하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안면몰수하고 네가 관리한 돈을 모두 빼앗길 것으로 알고 있느냐? 그렇다면 마땅히 너는 적어도 내 돈을 이자 놀이하는 사람에게라도 맡겨 두어 내가 이자라도 받을 수 있도록 해주었어야 하지 않느냐? 그런데 너는 그렇게 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이 악하고 게으른 종에게서 모든 돈을 빼앗아 열 달란트를 가진 사람에게 것을 주어라.” 그리고 나서는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잘 활용하는 사람은 더 많이 받아서 풍족하게 될 것이나 그렇지 않은 자는 가지고 있는 것마저도 빼앗길 것이다. 이 아무런 쓸모없는 자를 끌어내 바깥 어두운 곳에 내쫓아라. 거기서 슬픔으로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드신 달란트 비유는 사람들의 세계에서 있을 수 있는 상식적인 일을 가지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인이 자기 종들에게 맡긴 달란트는 거액의 재산입니다. 한 달란트는 5,000~6,000데나리온에 해당하는 액수로, 1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루 품삯인 것을 감안하면 당시에서는 참으로 굉장히 큰 금액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재산을 자기 종들에게 각각 나누어 맡기면서 그 종들이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게 하는 것을 통해서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눌 자와 주인으로부터 엄히 책망을 받고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날 자로 분류해 나가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해주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주인이 마침내 집에 돌아오게 되었을 때 이들이 주인과 함께 어떤 자들이 될 것인지를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며, 하나는 악하고 게으른 종입니다. 이것을 구분 짓고 분류하는 일을 ‘천국’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를 가지고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 중심적 내용이 지니고 있는 의미는 앞에서 계속해서 강조적으로 반복하여 말하였듯이 “천국”, 곧 “하늘나라(하나님의 나라)는 마치 이렇다”는 것입니다. 천국은 말이죠.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게 되는 자는 주인의 뜻을 잘 받들어 섬기는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그 모습을 나타내는가 하면, 주인으로부터 진노를 사서 바깥 어두운 곳에로 쫓겨나 거기서 슬피 울며 가슴을 치며 통곡을 할 자는 주인을 “굳은 사람”, 그러니까 인색하고 매정한 자로 여기며 전혀 주인의 뜻에 따르지 않고 자기 임의로 사는 것으로 그의 모습을 나타낸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각각 다르게 나타내시는 것을 통해서 그들을 구분하여 분류 짓는 일을 하는 것이 천국 - 천국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 - 이라는 것입니다.
천국이란 말이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오심으로 온 세상의 사람들에게 나타난 바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에 의한 천국의 도래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물밀 듯이 밀려들어오게 됩니다. 바닷가 해변의 모래알로, 밤 하늘의 무수한 별들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약속의 씨에 의한 많은 후손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천국을 소유한 자가 됩니다. 그리스도의 함께 하심은, 그래서 그리스도의 소유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는 그렇게 됨으로써 그리스도의 나라인 천국을 소유한 것이 됩니다. 그런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자신들이 주로 섬기는 그리스도께서 맡긴 일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다시 돌아올 것을 항상 염두에 두고서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있습니다. 그것은 악하고 게으른 종이 주인을 “무서운 분”, “가혹한 분”, “인색하고 매정한 분”으로 알고서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빼앗아 갈 분으로 알고 자기 것이 되지 않을 것에는 아무런 마음 쓰는 것이 없는 것에 반하여 언제 주인이 돌아오시더라도 자신이 그동안 소유하고 있던 모든 것은 주인의 것을 맡았던 것으로 주인에게 돌려드리는 준비 속에 있는 것에서 말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말해지고 있는 것은 이 종은 주인이 집을 떠나 있다 다시 돌아올 때까지 주인이 집을 비워두고 없는 때에도 자기 것에는 관심이 없고 항상 주인의 소유된 사람으로 있으면서 주인이 돌아올 때 그 사람으로 주님 앞에 서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들어 있으며 그 권능의 행하심이 그의 인생에 고스란히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것 외에 자기를 위하여 자기 것의 또 다른 주머니를 차고 챙기는 것이 없는 것, 그 까닭이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자기의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그리스도 한분만을 존귀히 여기는 것은 그분에게서 자기가 소유했던 가치보다 큰 그 이상의 가치를 그리스도에게서 보게 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말입니다. 오직 한분 그리스도이신 예수님만을 항상 염두에 두고 그분의 기다림 속에서 그분이 맡기신 일에 헌신하여 감당하고 있는 자로 있게 하실 것을 예수께서는 깨어 준비하여 있는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그렇게 깨어 준비되어 있음에 따라서 그리스도는 그를 “악하고 게으른 종”으로부터 분리하여 자신과 함께 자신의 나라에 참예하여 즐거움을 함께 하게 합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예수께서 비유를 통하여 착하고 충성된 종에게는 그들이 맡았던 달란트를 배가 되게 하는 이윤을 남긴 것을 기뻐하며 그에게 더 큰 일을 맡기겠다고 하고, 악하고 게으른 종이 맡았던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를 가졌던 자에게 주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주인으로부터 맡은 달란트를 배가 되게 한 것에 대한 착하고 충성됨의 보상, 또는 상급의 개념으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기쁨을 그도 함께 누릴 수 있게 하시는 것에서의 표현입니다. 주인의 종에게는 자기 것의 소유 개념이 없는데, 그 종에게 자기 것의 소유 개념이 되는 보상, 상급을 주시는 것으로 해석하여 설명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하여 전달해 주어 알게 해주시는 뜻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일이 됩니다. 주인의 기쁨에 참여한 자가 되게 하여 그 기쁨을 주와 함께 즐기게 하시는 주인의 선하심이 “착하고 층성된 종”으로 그대로 온전히 나타납니다. 그러나 주인의 선하심을 알지 못하는, 그래서 주인이 베푸시는 긍휼을 입지 못한 악하고 게으른 종은 주 앞에 설 때까지 주인을 “굳은 사람”으로 여기며 주인의 뜻과는 상관없이 패역한 세대를 이루고 삽니다. 그리고 그는 그가 알고 한 행위 그대로 엄하고 두려운 주인으로부터 모든 것을 빼앗기고 어두운 곳에로 쫓겨나 슬피 울며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입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이런 내용을 이해한다면, 이제 님이 궁금해 하면서 알고자 하는질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답변드릴 수가 있습니다.
첫째, ‘달란트’에 대한 올바른 이해입니다. 님의 질문을 보면 님은 ‘달란트 비유’에서의 달란트를 “은사”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달란트 비유’에서는 그런 내용을 담고 있지를 않습니다. 주인이 달란트를 각각의 종들에게 맡길 때 그들의 “재능”에 따라 맡긴 것에 비유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말이죠. ‘달란트’와 종들의 각각의 재능(능력)과는 같지가 않습니다. 따라서 달란트=재능(능력)으로 알고서 이것을 또한 은사의 개념으로 이해하여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각각의 재능(능력)에 따라 은사를 주셨다는 식으로 이해하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만일에 그렇게 이해한다면 심각한 오류가 생깁니다. 그것은 각각의 종들이 몇 달란트를 맡았든지 간에 그들 모두는 각각 “악하고 게으른 종”이 아닌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종들이 받은 ‘달란트=재능=은사’는 그들 모두에게서 동일하게 “착하고 충성된 결과”로 나타나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달란트 비유’는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종들이 각각의 재능에 따라 달란트를 맡았는데 이 달란트를 맡긴 주인에 의해서 어떤 종은 천국에 들어가고 어떤 종은 그 맡은 것을 다 빼앗기고 천국 바깥 어두운 곳에로 내쫓겨 슬피 울며 통곡할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천국은 마치 이와 같다”는, 주인이 맡긴 ‘달란트’가 이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말이죠. 여기서의 ‘달란트’는 영어인 ‘talent'(타고난 재주, 재능)의 의미에서가 아닙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24장에서부터 계속해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 천국 복음의 중심 사상 - 하나님 나라의 주인(임금) - 이신 메시야께서 오시는 날에 있을 일에 대한 것입니다. 이 날에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인자(주 예수)와 함께 데려감을 당하고 어떤 사람은 내버림을 당합니다. 그 데려감을 당하는 자에게 있어오게 한 것이 달란트를 맡긴 주인이 드러낸 “착하고 충성됨”이며, 그 내버림을 당하는 자에게 있어오게 한 것이 달란트를 맡긴 주인이 드러낸 “악하고 게으름”입니다.
해서 말입니다. ’달란트비유‘에서의 “달란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은 “천국은 마치 이와 같다”는 천국에 대한 가르침으로, 이것이 어떤 일을 하는 것인지를 알 수 있게 해주시고 있는 것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제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님은 님이 근무하여 일하시는 병동의 한 간호사가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이야기가 “인간의 행위로 구원받자”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되어가는 것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러면서 님에게는 어떤 한 교회에서 있었던 일과 맞물려 생각하게 되면서 불현듯 이 ‘달란트 비유’가 생각났고, 이것에서 자신의 은사대로 열심을 다해서 노력한자와 그렇지 않은 자로 나뉘어 열심을 다한 자는 천국에, 게으른 자는 내어 쫓기는 것으로 이해를 하였습니다 - 그러나 여기서의 비유되고 있는 달란트가 ‘은사’로 말해지고 있는 것이 아님은 바로 앞에서 설명을 통해서 답변을 드렸습니다 - 그리고서는 갖는 의문이 있었는데 “어쨌거나 주인이 올 줄 믿는 자는 열심을 내서 마진을 남겨야 하는데 그것은 어떤 마진을 말하는 건지..그냥 열심히 살으란 말인지 아니면 전도를 열심히 하라는 말인지.. 아님 이웃사랑을 열심히 실천하라는 말씀인지...”라고 하는 의문을 가지는 질문을 하였습니다.
앞에서 설명을 드린 ‘달란트 비유’에서 두 달란트 맡은 종과 다섯 달란트 맡은 종이 그것을 가지고 장사하여서 각각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를 남김으로 님이 말한 대로 마진, 곧 이윤을 남겼는데, 이것을 이야기 해주시는 비유에서 “그렇기 때문에 너희들(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도 내가 준 은사를 가지고 잘 사용하여서 마진(이윤)을 남기거라!”하는 내용을 볼 수가 있는지요. 아닙니다. 그러한 내용 전개는 결코 전혀 볼 수가 없습니다. 그와 같이 이 '달란트 비유‘를 가지고서 예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은 “열심히 살라”거나, “전도를 열심히 하라”거나, “이웃사랑을 열심히 실천하라”거나 하는 따위의 말씀을 해 주시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러한 삶이 필요하지 않다거나, 이러한 삶을 살아갈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모두에 우리가 자원하여서, 그리고 자발적으로 힘껏 하면서, 그렇게 열심히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무릇 할 마음만 있으면 그렇게 살 것입니다. 그러나 무릇 할 마음이 없으면 그렇게 안 살겠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본 ’달란트 비유‘를 통해서 주시는 말씀은 그것을 말해 주시기 위해서 하고 있는 이야기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것이 ’달란트 비유‘의 본의(本意)와 중심 내용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달란트 비유‘를 통해서 제자들에게 해 주시고 싶으신 이야기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이죠. 이제 앞에 두고 있는 곧 있게 될 성경의 예언대로 십자가에 달려 대속의 죽음을 당하신 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을 받는 부활을 하실 것이며, 이것이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서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해주시는 말씀을 하시는 것에서 “천국은 마치 이와 같다”는 것을 알게 해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말이죠. ’달란트 비유‘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의 의도를 벗어나서 다른 것으로 이야기를 끌고 나가고 이야기를 임의적으로 생각하고 만들어서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마지막 질문인 셋째, 님은 또한 “또 한 달란트 받은 자의 말도 그다지 틀린 말 같지 않더라는 거죠”라고 하면서, “그런데 주님은 그 종의 말에 나는 심은 데서 거두는 자임을 말씀하십니다. 분명 행위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 듯 하기도 하고 믿음을 심으란 얘기인 듯 하기도 하고 아니 믿음은 본인이 심는게 아니니까요”라고 님이 이해하여 알고 있는 것을 말하면서 “분명 우리의 행위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 아닌가요?”라고 물었습니다.
여기서 님은 “한 달란트 받은 자의 말도 그다지 틀린 말 같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앞에서 설명 드린 부분에서 여기에 해당하는 내용을 다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섯 달란트를 맡은 자와 두 달란트 맡은 자가 주인에게 나아와 자신들이 각각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를 남긴 것을 보고하자 이를 칭찬한 주인은 이제 마지막 남은 자기 재산 한 달란트를 맡겼던 종을 불렀습니다. 그러자 그 종은 주인에게 나아와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여기서 한 달란트를 맡았던 종은 자신의 주인을 “굳은 사람”이라고 표현하여 말하였습니다. 이 “굳은 사람”이란 말에서 ‘굳은’의 뜻은 ‘마른’인데 이는 ‘거친’, ‘혹독한’, ‘사나운’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굳은 사람”이란 ‘거친 분’, ‘사나운 분’, ‘무서운 분’, ‘혹독한 분’, ‘엄격한 분’, 또는 ‘인색하고 매정한 분’이라는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종은 주인에게 자신이 주인으로부터 재산을 맡아 관리한 일에 대해 보고하는 것을 “주인님은 씨를 뿌리지도 않은 곳에서 거두어들이고 심지도 않은 데서 모아 들이는 ‘굳은 사람’(무섭고, 인색하고 매정한 분)인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비록 주인으로부터 받은 재산을 가지고 잘 관리하여서 마진(이윤)을 남겨 재산을 크게 불려놨더라도 주인이 그 모든 돈을 다 빼앗아 갈 것이므로 결국은 자신에게는 아무 것도 남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 돈을 다만 땅 속에 묻어 감추어 두었다가 이제 그 돈을 있는 그대로 가지고 왔습니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 보고를 받는 주인은 크게 노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그런 인색하고 매정한 사람으로 알았느냐? 그래서 네가 수고하여 힘들이고 애써 관리하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안면몰수하고 네가 관리한 돈을 모두 빼앗을 것으로 알고 있느냐? 그렇다면 마땅히 너는 적어도 내 돈을 이자 놀이하는 사람에게라도 맡겨 두어 내가 이자라도 받을 수 있도록 해주었어야 하지 않느냐? 그런데 너는 그렇게 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이 악하고 게으른 종에게서 그가 가지고 있는 한 달란트를 빼앗아서 열 달란트를 가진 사람에게 것을 주어라.” 그리고 나서는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잘 활용하는 사람은 더 많이 받아서 풍족하게 될 것이나 그렇지 않은 자는 가지고 있는 것마저도 빼앗길 것이다. 이 아무런 쓸모없는 자를 끌어내 바깥 어두운 곳에 내쫓아라. 거기서 슬픔으로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님이여, 이 내용을 보면 말이죠. 한 달란트 맡았던 자가 한 말에 우리가 납득하여 수긍하고 받아들일만한 타당한 것을 볼 수가 있는지요. 그래서 님에게 생각되는 대로 한 달란트 받은 자의 말에서 그다지 틀린 말 같지 않은 것을 보게 되는지요. 한 달란트를 맡았던 악하고 게으른 종은 자신에게 달란트를 맡긴 주인을 아주 무섭고도 인색하며 매정한 분으로 여겼습니다. 이렇게 알고 있는 대로 주인은 그러한 분으로 나타나고 있는가요?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맡았던 자에게 주인이 행한 것을 보면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여 주인과 함께 그 즐거움을 누리게 하시는 자비를 보고 있지를 않습니까? 그러한데 한 달란트 맡았던 자가 말한 대로의 무섭고 인색하며 매정한 분으로의 나타남은 어떤 사람에게서 있게 되는가요? 주인을 그렇게 알고, 그에게 맡긴 한 달란트 비유가 말해 주는 천국을 소유하여 그 즐거움에 참예하게 하시는 주님의 자비를 거부하고 배척하는 자에게 입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맡았던 자에게서 그가 하고 있는 말이 그다지 틀린 것 같지 않다는 것을 전혀 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주인에 대하여, 즉 천국의 주인을 자기 임의로 크게 오해하고, 주인의 뜻을 따르지 않는 강팍하고 패역한 악한 자의 모습을 보이고 있을 뿐이랍니다.
또한 님은 “그런데 주님은 그 종의 말에 나는 심은 데서 거두는 자임을 말씀하십니다. 분명 행위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 듯 하기도 하고 믿음을 심으란 얘기인 듯 하기도 하고, 믿음은 본인이 심는게 아니니까요”라고 님이 이해하여 알고 있는 것을 말하면서 “분명 우리의 행위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 아닌가요?”라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에서 “주님은 그 종의 말에 나는 심은 데서 거두는 자임을 말씀하십니다”라고 한 부분은 님이 착각하거나 실수하여 오기(誤記)한 듯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이니깐요.
이 부분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의 의도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 주인을 평가하여 말하기를 “네가 나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사람으로 알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기의 ‘심지 않은 데서 거둔다’고 하고 또한 ‘헤치지<뿌리지> 않은 데서 모은다’는 것은 ‘추수’의 의미를 가지고 말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맡은 종이 한 말인 이것을 대개의 경우는 오해하여 잘못 알고 있습니다. 주인이 말이죠.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는 일을 하는 참으로 큰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주인을 아주 좋게 치켜세우는 말을 하는 것인양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이죠. 하나님은 못할 일이 없으신 전능하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종의 말에 대해 주인이 한 말을 보면, 그러한 종의 말을 주인이 인정하고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나를 그런 자로 알고 있느냐?”하면서 그를 엄히 책망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렇다면 종이 한 말은 대개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그러한 뜻에서 하고 있는 말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달란트 맡았던 종이 한 말의 의도는 그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일까요? 추수란 심은 자가 거두고, 뿌린 자가 모으는 것이 원리입니다. 그런데도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은다는 것은 이러한 원리에서 벗어난 것으로 조금도 인정사정이 없다는 것을 이러한 표현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우 인색하고 매몰찬, 곧 매정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한 달란트 맡은 종이 주인을 이렇게 표현하여 말하는 것은 자신이 맡은 한 달란트를 가지고서 나가 이것으로 장사하여 마진(이윤)을 남기는 일을 할지라도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은 주인이 남는 이삭하나 없을 만치 다 챙겨갈 것이고, 자기가 장사하는데 이 한 달란트를 투자하여 사용했다가 그 돈을 모두 잃어버려 남은 것이 아무 것도 없게 되면 주인이 무일푼인 자기에게서 그 돈의 상환을 독촉할 것이며 여기에 어떤 배려의 여지도 없는 참으로 인색하고 매정한 험한 꼴을 당할 것이기 때문에 이를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을 하는 의도는 주인은 아무 권리도 없는 곳에 자기 권세를 행사하는 사람이며 여기에 조금도 인정사정이 없는 인색하고 매정한 무섭고 두려운 사람이 아니냐는 의중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말을 하는 종에 대하여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그런 인색하고 매정한 사람으로 알았느냐? 그래서 네가 수고하여 힘들이고 애써 관리하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안면몰수하고 네가 관리한 돈을 모두 빼앗길 것으로 알고 있느냐? 그렇다면 마땅히 너는 적어도 내 돈을 이자 놀이하는 사람에게라도 맡겨 두어 내가 이자라도 받을 수 있도록 해주었어야 하지 않느냐? 그런데 너는 그렇게 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이 악하고 게으른 종에게서 모든 돈을 빼앗아 열 달란트를 가진 사람에게 것을 주어라”라고 책망하며 그를 바깥 어두운 곳으로 내쫓아 거기서 슬픔을 이기지 못하는 큰 고통으로 가슴을 치며 통곡하게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말이죠. 님이 말한 ”그런데 주님은 그 종의 말에 나는 심은 데서(‘심지 않은 데서’ 인데 님이 착각하여 잘못 쓴 오기(誤記)일 것으로 보입니다만) 거두는 자임을 말씀하십니다“는 님이 잘못 알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결코 한 달란트 맡았던 종이 말한 대로 자신을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는 자라고 하는 것으로 말씀하며 그 종의 말을 인정하는 말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다음에 님은 '달란트 비유‘를 “분명 행위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 듯 하기도 하고 믿음을 심으란 얘기인 듯 하기도 하고 …분명 우리의 행위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 아닌가요?”라고 하였습니다만, 지금까지 답변 드린 것에서 그 내용을 보면 이러한 것을 생각하게 될 만한 그 어떤 내용도 담고 있지를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달란트 비유‘는 우리의 행위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라거나 우리가 우리의 믿음을 심고 뿌리면 그것을 거두고 모으는 일을 주님이 하신다는 것에서 하시는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지금 이 비유를 통해서 메시야이신 인자가 오시는 날에 있을 일을 알게 해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앞서에서의 비유인 ’슬기로운 처녀와 미련한 처녀 비유‘에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인, 곧 천국과 지옥으로의 분리하시는 일을 하실 것임을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을 여기 ’달란트 비유‘에서는 “착하고 충성된 종”과 “악하고 게으른 종”된 그들의 속성을 드러내셔서 하실 것을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일을 천국의 주인이신 예수께서 해 나가십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시는 것을 통해서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이 이제 곧 그들의 주께서 악한 자들에게 사로잡혀서 이방인들에게 넘겨지고 십자가에 달리는 일을 하게 될 것인데 그 되어지는 모든 일에서 제자들은 자기 자신을 인자의 다시 오심에 관점을 두고서 있어야 할 것 - 이것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달란트 비유’를 말씀하시는 초점이다 - 을 말씀해 주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천국은 마치 이와 같다”고 말입니다. 천국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임한 천국으로 말미암아 제자들은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존재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날, 곧 구약성경에서 예언해 오신 인자가 오시는 날에 그들의 주님과 함께 천국에 들어가 주님의 즐거움에 참예할 것입니다. 그리고 천국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도래한 천국은 “악하고 게으른 종”을 드러내시는 일 또한 해 나가실 것입니다. 이들의 특성은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거역하며 배척할 것이며, 그래서 예수님을 악한 자의 손에 넘겨 십자가에 달려 죽음에 처하게 할 것입니다. 이 일이 예수님의 오심에 의한 천국의 도래에 의하여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의 “악하고 게으름”이 저들의 머리 위에 어떻게 하나님의 저주의 화로 쏟아져 내릴 것인지를 주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아 바깥 어두운 곳으로 내쫓겨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에서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님이여,
이상으로 답글을 마칩니다.
본 답글이 모든 시대에 걸쳐서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의 일컬음을 받는다”는 ‘이신칭의’요,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이신득구’에 대항하여 항상 인간의 육체의 욕망에 꿈틀대며 추구하는 “인간의 행위로 구원받자”는 풍조로부터 자신을 보호하여 지키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것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습니다.
이제 날씨가 많이 추워졌습니다.
매서운 칼바람을 맞는 날도 점점 늘어나겠지요.
이러한 때에
건강에 유의하실 것과
평안하실 것을
주께 구합니다.
첫댓글 이 질문도 참 유익하다고 생각합니다. 습관적으로 통상적으로 잘 아는 내용이라고 지나갈 수 있는데 이렇게 질문함으로써 문제의 본질을 더 깊게, 바르게 알게되어 기쁩니다. 저도 사실은 양미숙님의 말씀처럼 달란트를 은사적인 차원에서 알고 있었습니다. 강단에서 주로 그렇게 말씀을 하지요. 그리고 별 의문없이 있었는데.. 목사님의 글에서, 그런 것이 아니라’달란트비유‘에서의 “달란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은 “천국은 마치 이와 같다”는 천국에 대한 가르침으로, 이것이 어떤 일을 하는 것인지를 알 수 있게 해주시고 있는 것임에 대해 전체 문맥과 예수님의 비유의 촛점이 어디에 있었는가에 대해 살피지 못하였던
말씀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는 저의 불찰이었음을 보게 됩니다. 얼마전 강단에서 들은 말씀도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많이 해서 하나님께 칭찬듣는 종들이 되자라는 것이었습니다.
본 답글을 3일에 걸쳐 읽었습니다. 우리집에는 방해자가 많거든요. ㅎㅎ 답글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목사님. 항상 육체의 욕망이 꿈틀대며 성경을 인간의 행위중심으로 이해하는 습관은 참으로 끊어내기가 힙이든가 봅니다.
안녕하세요 양미숙성도님. 긴 글을 인내를 가지시고 읽으심에 감사하며 지혜의 영이신 성령께서 함께 하셨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습니다. 점점더 하나님의 말씀의 본의에 입각하여 성경을 보시는 일을 해 나가시면 어느덧 성경을 인간의 행위중심으로 이해하는 습관에서 벗어나 있는 자신을 발견하시게 될 것입니다. 님께서 인사의 글을 남겨 주심에 감사하며, 주 안에서 건강히 잘 지내실 것과 평안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