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팅 일자 07월 29일] [미팅시간 오후 18:25] 인천국제공항 3층 출국장 D21~D24 카운터 '하나투어' 피켓 앞 미팅 (※ 10명 미만시 개별 탑승수속)
인천☞ [미팅시간 오후 18:25] 인천국제공항 3층 출국장 D21~D24 카운터 '하나투어' 피켓 앞 미팅 (※ 10명 미만시 개별 탑승수속)
인천-성도로 이동 (약3시간50분 소요) [3U8904 20:55 인천 출발-23:45 성도(成都) 도착]
▣ 차마고도(茶馬古道)의 역사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차마고도를 통한 이차역마(以茶易馬) 정책을 통해 군사력을 증강했습니다. 중국 서남부에서 티베트~네팔~인도에 이르는 고대 교역로 차마고도는 횡단산맥(橫斷山脈)과 서장고원(西藏高原) 사이에 위치하며 서남지구 각 민족 간 경제 및 문화를 교류의 중심축이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차마고도는 대략 서한(西漢) 시기에 형성되었으며, 중국 차 문화의 발전 및 전파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서한(西漢)시대 감로연간(BC 53년~BC 49년) 감로사(甘露寺)의 승려 보혜선사(普慧禪師) 오리진(吳理眞)이 인류 역사상 최초로 차를 재배한 사천성과 보이차로 대표되는 운남성은 기후가 온난습윤하여 차의 생장에 적합하고 차를 가공하는 방법과 전통을 유지하고 있어, 차를 운송하고 저장하는데 탁월한 기술을 보유하고 있으며, 육식위주인 서장고원 지역의 민족들은 환경적 제약으로 채소가 결핍되어 차마고도로 운송되는 차를 통해 생존에 필요한 비티민을 공급받았습니다.
마방들이 말과 야크를 이용해 중국의 차와 서장의 말 등 물품의 교역을 위해 다녔으며, 이를 통해 문화의 교류도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전성기에는 유럽까지도 연결되었습니다. 차마고도는 주요 8개 노선이 있는데, 운남성 시솽반나(西雙版納)~푸얼(普?)~다리(大理)~리강(麗江)~더친(德欽)~차위(察隅)~방다(邦達)~린즈(林芝)~라싸(拉薩)~네팔~인도의 전장공로(?藏公路) 차마고도와 사천성 야안(雅安)~다두허(大渡河)~캉딩(康定)~더거(德格)~서장~네팔~인도로 이어지는 천장공로(川藏公路) 차마고도가 마방들의 활동이 가장 활발한 경로였습니다.
이들 경로는 길이가 약 5,000Km로 평균 해발고도가 4,000m 이상인 높고 험준한 길이지만 눈에 덮인 5,000m 이상의 설산들과 금사강(金沙江), 란창강(瀾滄江), 누강(怒江)이 수천 Km의 아찔한 협곡을 이루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로 꼽히며 이 세 강이 이루는 협곡은 “운남 삼강병류 보호지(Three Parallel Rivers of Yunnan Protected Areas)”라는 명칭으로 2003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되었고, 2007년 KBS 다큐멘터리가 제작되면서 국내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성도. ☞ 호텔로 이동하여 체크 인
♣ 예정호텔 : 성도공항대주점(成都空港大酒店, 5성급) OR 동급 ※ 항공편이 늦은 시간 도착하는 점과 다음날 성도 남쪽으로 이동해야 하는 동선을 감안하여 충분한 휴식을 위해 성도공항 앞에 위치하는 5성급 성도공항대주점을 이용합니다.
투숙호텔안내
숙박없음
[조식]
[중식]
[석식]
2일차2017-07-30 (일)
성도
조식 (호텔식)
☞ 야안(雅安)으로 이동 (130Km, 2시간 소요) . ▣ 티베트의 역사 7세기 최초로 티베트를 통일한 후 토번(吐蕃)을 건국한 송첸칸포가 네팔 브리쿠티 데비, 당나라 문성공주와 정략 결혼을 하면서 티베트에 불교가 전래되었습니다. 티베트인들의 삶과 밀접한 종교, 티베트 라마불교는 주술을 중시하는 토속 신앙인 본교를 배척하지 않고 혼합된 형태로 토착화하였습니다. 8세기 인도의 샨티 락시타와 파드마삼바바가 밀교를 전한 후 티베트 불교의 근본은 밀교가 되었습니다.
9세기 라마불교가 종교 이상으로 세력화되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랑다르마 왕은 경전을 불태우고 승려를 감금하는 등 라마교를 탄압하였고, 결국 승려계층에 의해 랑다르마 왕이 암살되면서 티베트는 분열되었고 오랜 암흑기에 접어들었습니다. 이후 일정한 세력을 가진 라마교 종파들이 사찰을 중심으로 작은 국가와 같은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각 종파들은 정치적 주도권을 잡기 위해 이전투구를 거듭했습니다.
12세기 몽골에 의해 점령당했으나 문화적으로 몽골에 앞선 티베트는 13세기 라마불교를 몽골에 전파하면서 라마불교는 원나라의 국교가 되었습니다. 14세기 말 몽골의 세력이 약해지자 파크모두 왕조가 일어나 티베트 통치를 자임했으나 통일왕조를 세우지는 못했습니다. 15세기 라마불교 최대 종파인 거루파의 창시자 총카파(宗喀巴, 1357~1419년)는 반야중관(般若中觀) 사상을 기초로 타락한 밀교를 개혁하여 화려한 종교문화를 꽃피웠으나 티베트의 군사력이 약해지면서 평화를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총카파의 제자 중 젠둔 드럽(1391∼1475년)은 초대 달라이 라마가 되었고, 몽골은 거루파 지도자를 '위대한 스승'을 의미하는 달라이 라마라고 호칭했고, 달라이 라마 제도는 오늘날까지 티베트 사회에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17세기 거루파는 외세인 몽골을 끌어들여 닝마파를 축출하면서 달라이 라마 정권이 티베트를 재통일하였으나, 18세기 만주족이 청나라를 건국한 후 강희제에 의해 보호령으로 전락했습니다. 그러나 청나라는 달라이 라마를 국사로 임명하고, 달라이 라마는 황실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티베트의 지지기반을 다지는 긴밀한 협력관계가 1912년 청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200여 년간 이어졌습니다.
이후 티베트는 독립을 선언하고 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의 일원으로 활약했지만,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면서 1951년 모택동은 무력을 동원해 티베트를 점령했습니다. 중국은 달라이 라마 14세를 회유하기도 했지만 1959년 티베트 공산화에 반대하는 봉기가 발생하면서 120만 명에 달하는 티베트인들이 희생되었습니다. 1959년 달라이 라마 14세는 인도 맥그로드 간즈로 망명해 티베트 망명정부를 세웠고, 1960년대 문화대혁명으로 티베트의 종교유산은 처참하게 파괴되었고, 승려들은 강제적으로 환속되었습니다. 중국은 티베트의 자치를 허용하고 있지만 달라이 라마는 보다 높은 수준의 자치를 요구하며 중국과 대립하고 있습니다. 티베트인들은 자신의 국가를 관음의 정토로, 1989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달라이 라마 14세를 관음의 화신으로 믿고 있습니다.
아안. ▶서한(西漢)시대 감로연간(BC 53년~BC 49년) 감로사(甘露寺)의 승려 보혜선사(普慧禪師) 오리진(吳理眞)이 인류 역사상 최초로 일곱 그루의 차나무를 심어 만든 선차(仙茶)를 황실에 진상하여 황차방(皇茶坊)으로 불리는 [지구사(智矩寺)]
☞ 얼량산(二郞山) 터널을 통과, 루딩(盧定)으로 이동 (155Km, 3시간 30분 소요) . ▣ 티베트 장족(藏族)의 삶과 밀접한 라마불교(藏傳佛敎) 한국에서 티베트를 바라보는 시각은 극히 피상적입니다. 지난 몇년간 국내를 시끄럽게 했던 14대 달라이 라마의 방한문제에 있어서도 많은 사람들은 같은 이해의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그 첫번째는 티베트의 영역범위에 대한 인식이 너무 협소하다는 점이다. 지금 중국 영토의 일부분인 서장자치구(西藏自治區, 티베트)는 과거 티베트 전체 영토의 1/2에 지나지 않습니다. 중국 국토의 1/5을 차지하는 티베트에 대한 명확한 이해없이 티베트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거대하면서 거친 고산지대에 사는 티베트인들의 생활방식은 티베트의 수도 라싸나 동부, 중부, 서부가 각기 판이하고 서부의 사천성과 북부의 청해성(靑海省), 북서부의 감숙성(甘肅省)내에서도 각 지역마다 독특한 개성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티베트인 스스로를 부르는 표현 또한 가지각색이어서, 중부지방 사람들은 '보바(博巴)'라고 자칭하고 서부지역은 '캉바(康巴)'라고 합니다. 지금의 청해성과 감숙성, 사천성 서부에 사는 티베트인들은 스스로를 '안뚜어와'라 부르고, 사천성 일부 지역에서는 '지아룽와'라고도 자칭합니다. 언어학적 방면에서 또한 티베트어는 티베트-미얀마어계이지만, 크게는 3가지에서 많게는 수십가지까지 다양한 방언이 존재합니다. 웨이장(衛藏), 캉(康), 안(安)으로 대표되는 3대 방언은 거의 외국어나 다름없어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큽니다. 문자의 경우 7세기초 분열된 티베트를 최초로 통일한 영웅 송첸칸포가 창건한 자모 문자가 지금까지도 티베트 전역에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
티베트를 이해하기 위한 두 번째 고리는 라마불교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입니다. '라마'는 티베트어를 중국어로 음역한 것으로 '스승' 혹은 '윗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불교가 갓 전래됐을 당시 티베트인들은 사찰의 고승들을 '라마'라고 높여 부르고 일반 승려들은 '짜바'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던 것이 후세에 이르러 '라마' 한 단어로 통일하게 된 것입니다. 티베트에서 불교가 처음 전래된 것은 대략 7세기경으로 인도에서 직수입되기도 하고 중국에서 전래되기도 했습니다. 초기 티베트 본래의 다신숭배적인 원시신앙과 큰 마찰을 빚던 불교는 고원지대의 특수한 역사적 환경 속에 융합하면서, 10세기경에는 독특한 지역적 특색을 지닌 라마불교가 형성되었습니다.
거대한 티베트 영토만큼 전래 경로도 다양했던 불교는 중국과 인도에서 들어온 승려들의 교파가 서로 달랐습니다. 티베트 승려들이 불법을 배우고 불경을 번역하며 제자들은 양성하는 것도 역시 그 갈래를 달리했습니다. 이런 연유로 각 교파들은 서로 자기의 깃발을 내걸고 자신들이 남보다 낫다는 것을 표방하고 나섰습니다. 여기에 각지에 할거했던 다양한 지방 토호세력들과 결탁을 하면서 정교합일(政敎合一)이라는 사회체제를 갖추었습니다. 오늘날까지 생명력을 유지하면서 티베트인의 정신세계와 생활문화를 지배하는 라마불교 종파는 거루파, 닝마파, 거쥐파, 사가파 등입니다.
현존하는 라마불교의 가장 오래된 종파로 11~12세기 티베트의 고승 슈오츄웅바와 주어푸바에 의해 창립된 닝마파는 8세기 인도 고승 파드마삼바바(蓮花生)를 창시자로 받들고 있습니다. 이들은 옛 티베트에서 성행하던 주문을 숭상하고 그 전통을 계승했습니다. 성립 당시 새로운 불법을 숭상하는 기타 교파와 대립해 '닝마파(낡은 교파)'라고 불렸으며, 승려들이 모두 붉은 모자를 썼기 때문에 '홍교(紅敎)'라고도 불립니다. 사천성에서는 더거(德格)의 주칭사(竹慶寺), 바이위(白玉)의 시아투어사, 캉딩(康定)의 진캉사(金剛寺) 등은 모두 닝마파 사찰입니다. 시아투어사는 닝마파에서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사원으로, 최전성기에는 140여 칸의 건물과 300여 명에 달하는 승려들이 수도했습니다.
거쥐파(喝擧派)는 마얼바(瑪爾巴), 미라르바(米拉日巴)가 창시한 종파로 '거쥐'는 '입으로 전한다'는 뜻입니다. 불법을 구두로 전하는 것을 중요시하여 귀로 듣고 마음으로 이해하기에 힘쓰고 경전을 중시하지 않습니다. 거쥐파의 승려들은 불법을 닦을 때 흰 옷을 입었기 때문에 '백교(白敎)'라고도 불립니다. 라마불교에서 활불환생 제도를 가장 먼저 실행한 거쥐파는 일반 승려들이 모두 남자인 반면 사찰의 주지가 여승인 '샤딩사(沙丁寺)'라는 절이 있습니다. 오늘날 티베트 카즈에 있는 이 사원의 주지를 '두어지파무'라 부르며 라마불교의 유일한 여활불로 받들어지고 있습니다.
티베트 사가(薩迦) 지방을 중심으로 교파가 발흥한 사가파는 사찰의 벽에 홍ㆍ백ㆍ남 세 가지로 칠을 하기 때문에 '화교(花敎)'라고도 불립니다. 사가파의 창시자는 티베트 콴(款)씨 가문의 후예인 궁췌지에부로, 11세기 사가에 사원을 짓고 스스로 교주가 되었습니다. 이 교파의 승려들은 혼인해 자식을 낳은 뒤에는 여자를 가까이하지 못하도록 했고, 사찰의 주지를 가족에 따라 전승하는 제도를 확립했습니다. 이에 따라 정치와 종교 두 가지 권력을 한 가족에 집중시켰습니다. 원대에 가장 강력했던 사가파는 5대 교주인 바스바(八思巴)가 원나라의 제사(帝師)에 봉해지고 티베트의 실권을 장악하는 정교합일의 지방정권까지 성립시켰습니다. 그러나 14세기 등장한 거루파에 의해 대체되고 사가와 사천성 더거(德格)로 그 세력이 축소되었습니다. 더거의 겅칭사(更慶寺)는 인경원(印經院)을 포괄하는 중요한 사찰입니다.
'계율을 잘 지킨다'는 뜻의 거루파는 라마승들이 누런 모자와 옷을 쓰고 입기에 세칭 '황교(黃敎)'라고도 합니다. 거루파는 라마불교에서 가장 늦게 형성된 교파인데, 승려들이 계율을 엄격히 지키게 하고 불경을 공부하는 것을 착실하게 순서에 따라하게 하며 종교조직체를 강화하는데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달라이 라마나 판첸 라마가 모두 거루파의 정치ㆍ종교 지도자입니다. 16세기 중엽부터 티베트 전지역에서 가장 큰 교세와 영향력을 행사한 거루파는 오늘날에 이르러 다른 세 종파를 훨씬 압도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라마불교를 상징하는 달라이 라마는 거루파 지도자를 호칭하는 것입니다.
▶중국 역사상 최대의 농민 봉기인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1851~1864년) 때 청나라 정부군에 의해 1863년 4만 명의 태평천국군이 이곳에서 전멸했고, 1935년 5월 29일 주덕ㆍ주은래가 이끌던 홍군이 국민당군에 포위되어 위기에 처했을 때 22명의 선발대를 보내 로정교를 탈환하여 대도하(大渡河)를 건너 병력을 이동시켜 훗날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가능하게 했던 [로정교(盧定橋)]
☞ 캉딩(康定, 해발 2,550m)으로 이동 (45Km, 1시간 소요)
캉딩깐즈장족자치주(甘孜藏族自治州)는 예로부터 티테트와 중국의 접경이었으나, 1951년 중국의 티베트 통치 이후 사천성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티베트의 동쪽에 위치하고 티베트 장족(藏族)이 많이 거주하여 동티베트로 불립니다.
석식 (현지식)
♣ 예정호텔 : 캉딩옥경설련정품주점(康定玉景雪蓮精品酒店, 4성급) OR 동급
투숙호텔안내
숙박없음
[조식] 호텔식
[중식] 현지식
[석식] 현지식
3일차2017-07-31 (월)
캉딩
조식 (호텔식)
☞ 중국과 티베트의 경계였던 절다산(折多山, 해발 4,298m) 경유 (35Km, 1시간 소요)
▣ 룽다(Lungda)와 타르초(Tharchog) 마을 입구 등에 긴 장대에 라마경전을 오색의 긴 깃발로 매단 것을 '룽다'라고 합니다. 마치 초원을 질주하는 말 갈기와 같은 모습으로 바람이란 뜻의 룽(風)과 말이란 뜻인 다(馬)가 합쳐진 티베트어로, 진리가 바람을 타고 세상 곳곳으로 퍼져 모든 중생들이 해탈에 이르라는 티베트인들의 염원이 담겨 있습니다. 긴 줄에 정사각형의 경문을 줄줄이 이어 달은 만국기 같은 형태를 '타르초'라고 합니다. 타르초의 색깔은 우주 5원소를 의미하며, 파란색은 하늘, 노란색은 땅, 빨간색은 불, 흰색은 구름. 초록색은 바다로 우주의 모든 것을 상징하며, 모든 생명의 근원과 신성을 상징합니다. 라마불교 고유의 하얀 불탑을 '쵸르텐'이라고 합니다.
티베트인들은 타르초와 룽다에 적힌 불경을 바람이 읽으면 그 바람을 맞은 사람은 불경을 읽은 것과 같다고 여긴다고 합니다. 룽다나 타르초에는 옴 마니 반(파드)메 훔 같은 경문이 가득 씌어있습니다. 사람들은 타르초가 휘날리는 고갯마루에 오르면 향을 피우거나, 라체(신성한 언덕, 험난한 고갯길 등에 쌓은 돌 무더기로 우리의 성황탑과 비슷함)에 하닥(무사안녕, 축복, 환생 등 인간이 신(神)과 자연에 의지하고 바라는 모든 소원을 담은 백색의 긴 천)을 걸며 소망과 무사태평과 환생을 빌곤 합니다.
☞ 티베트어로 '보살이 좋아하는 땅'을 의미하는 타공(塔公, 해발 3,730m)으로 이동 (75Km, 2시간 소요)
▣ 거루파(格魯派)의 활불(活佛) 달라이 라마(Dalai-Lama) 달라이 라마 칭호는 제3세 달라이 라마 소남 갸초(1543∼1588)가 몽골 토메토의 알탄 칸의 초청을 받고 1578년 청해(靑海) 지방에 갔을 때 받은 것입니다. 그 이름의 뒷부분 '갸초'에 해당하는 몽골어가 '달라이'로서 '바다'를, '라마'는 티베트어로 '스승'을 뜻합니다. 제3세는 원래 드레풍사원의 주지였는데, 선대인 겐둔 갸초(1475?∼1542)가 거루파의 정치적 지도자로서 대립하는 카르마파(특히 紅帽派)와 다투었기 때문에 같은 행동이 기대되어, 스스로 몽골 부족을 유세하며 신자를 얻어야 했습니다. 그가 죽은 뒤 새로운 활불로 알탄 칸의 증손 윤텐 갸초(1589∼1616)가 선출되자, 외국의 군사력을 배경으로 하는 노골적인 위협정책이라 하여 카르마파의 증오심이 확대, 군사적인 대결만을 남겼습니다.
제5세 달라이 라마 롭상 갸초(1617∼1682) 때에는 몽골정권에 큰 변동이 생겨서 거루파는 흔들리고, 소남 랍된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세력은 새로 카르무크와 동맹하여, 결국 구시 칸의 군대를 티베트에 끌어들여 신샤크파 정권을 전복, 사실상 티베트의 정치ㆍ종교의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1642년 달라이 라마 정권이 수립된 후, 드레풍사원의 주지는 티베트 국왕의 신분과 거루파 법왕의 지위를 얻었습니다. 제5세의 제자이자 섭정이던 상게 갸초(1653∼1705)는 달라이 라마의 국가 원수로서의 정당성을 '문수리근본의궤경(文殊利根本儀軌經)'의 예언을 인용 증언하며, 티베트는 원래 관음보살의 교화의 땅으로 정해져 있고, 달라이 라마는 관음보살의 화신이라면서, 제1세를 총카파의 제자 겐뒨 둡(1391∼1472)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주장을 추가했습니다.
제6세 달라이 라마 찬잉 갸초(1683∼1706)가 청(淸)나라의 간섭으로 폐위되어 북경(北京)으로 연행되려 할 때, 일반 승려와 민중은 이에 저항하여 달라이 라마에 대한 강렬한 신앙을 보였습니다. 1750년 이후 청의 지배 하에서 달라이 라마의 선출방법이 흐트러져, 제9세부터 12세까지 어린 달라이 라마는 권력투쟁의 희생이 되었습니다. 제10세 달라이 라마는 난을 피해 정권을 잡고 독립과 근대화를 꾀했으나 실패했습니다. 제14세 달라이 라마는 중국군이 티베트로 공격해와 중국에 병합되었으며 한때는 새 체제에 복종했으나, 1959년 측근과 함께 인도로 탈출, 다람살라(Dharamsala)에 망명정권을 수립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제1대 달라이 라마 : 젠둔 드럽(Gendun Drub 1391~1475) 제2대 달라이 라마 : 지알와 젠둔 갸초(Gyalwa Gendun Gyatso 1475~1543) 제3대 달라이 라마 : 지알와 소남 갸초(Gyalwa Sonam Gyatso 1543~1588) 제4대 달라이 라마 : 왼텐 갸초(Yonten Gyatso 1589~1617) 제5대 달라이 라마 : 응가왕 롭상 갸초(Ngawang Lobsang Gyatso 1617~1682) 제6대 달라이 라마 : 리그진 창기앙 갸초(Rigdzin Tsangyang Gyatso 1683~1706) 제7대 달라이 라마 : 켈상 갸초(Kelsang Gyatso 1708~1804) 제8대 달라이 라마 : 잠펠 갸초(Jampel Gyatso 1758~1804) 제9대 달라이 라마 : 룽토크 갸초(Lungtok Gyatso 1806~1815) 제10대 달라이 라마 : 출트림 갸초(Tsultrim Gyatso 1816~1837) 제11대 달라이 라마 : 케드럽 갸초(Khedrup Gyatso 1838~1856) 제12대 달라이 라마 : 트리네 갸초(Trinle Gyatso 1856~1875) 제13대 달라이 라마 : 툽텐 갸초(Thubten Gyatso 1875~1933) 제14대 달라이 라마 : 텐진 갸초(Tenzin Gyatso 1935~ 현재)
중식 (현지식)
▶청(淸)나라 가경제(嘉慶帝, 재위 1796~1820년) 때 창건되어 일명 '소대소사(小大昭寺)'로 불리는 사가파(薩迦派=花敎) 사찰로 호법전(護法殿), 높이 10m의 천수관음상이 있는 천수관음전(千手觀音殿), 641년 문성공주(文成公主, 625~680년)가 티베트와 화친을 위해 정략결혼을 가던 도중 남긴 불상을 모시는 와불전(臥佛殿)이 있는 [타공사(塔公寺)] - 문성공주가 당나라 황실 누구의 딸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당시 중국 서쪽의 티베트를 토번(吐藩)이라고 불렀는데 변방에는 이들의 침략으로 피해와 혼란이 많았습니다. 7세기초 분열된 티베트를 최초로 통일한 영웅 송첸칸포(松贊干布, 617~650년)가 당 태종에게 공주와의 혼인을 요청했으나 몇차례 거절당했습니다. 그러나 토번의 세력이 더욱 강성해져 주변의 군소국가를 패퇴시키고 당나라의 변방을 침략하면서 당나라와 전투를 벌어졌고, 양측의 화의(和議)가 성립하여, 641년 송첸칸포와 문성공주의 혼인이 이루어졌습니다. 문성공주가 토번으로 시집을 가면서 상당한 혼수품과 시녀들이 함께 이주하면서 티베트에 농업기술과 건축, 공예, 불교가 전해졌습니다. 당시 티베트에는 포탈라궁(布達拉宮)과 많은 사찰(곰파)이 지어졌고, 이로 인해 문성공주는 티베트 불교의 공로자로서 라마교의 존상(尊像)이 되었습니다.
▣ 라마불교의 경전을 넣은 전경통(轉經筒, 마니차) 티베트 라마교 사원에는 어김없이 황금색 대형 마니차가 설치되어 있고, 장족들은 집이나 길을 걸어가면서도 우측 손에 작은 휴대용 마니차를 들고 계속 돌리고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불심이 깊었던 티베트인들은 글을 배우지 못해 라마불교 경전을 읽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바로 마니차인데, 중앙에 막대기를 꽂은 원통 속에 부처님의 가르침인 경전을 둘둘 말아 넣고 돌리면 원통(圓桶)에 달린 무게추의 원심력에 의해 자연스럽게 회전운동을 합니다. 티베트인들은 마니차가 돌아가면서 일으키는 바람(氣)이 경전을 읽어준다고 생각합니다.
티베트인들은 왼손으로는 백팔염주를 세고, 오른손으로는 마니차를 돌리면서 천수경에 나오는 관세음보살의 육자진언(六字眞言) '옴 마니 반(파드)메 훔' 진언염불을 합니다. 육자진언은 관세음보살의 자비를 나타내는 주문으로, 문자적인 뜻은 '옴, 연꽃속에 있는 보석이여, 훔'으로서 이 주문을 외우면 관세음보살의 자비에 의해 번뇌와 죄악이 소멸되고, 온갖 지혜와 공덕을 갖추게 된다고 합니다. 이런 뜻과 상관없이 티베트인들은 그냥 많이 외우기만 하면 그 자체로 영험을 얻을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옴(Om) : 천지가 개벽한 태초 이전부터 울려온 우주의 소리(氣)를 의미함 마니(Mani) : 여의주(如意珠)를 뜻하며, 깨끗한 지혜를 상징함 반메(Padme) : 연꽃을 뜻하며, 무량한 자비를 상징함 훔(Hum) : 우주의 수많은 존재들 중 하나하나의 개별적인 존재가 담고 있는 소리를 의미함
▶해발 5,820m의 티베트 4대 성산(聖山) 야라설산(雅拉雪山)이 보이는 아름다운 타공초원에 1997년 주칭사(竹慶寺)의 활불(活佛) 뚜오지쟈시가 기부해 100Kg의 금을 사용해 조성한 [목아금탑(木雅金塔)]
☞ 9~11대 달라이 라마가 환생한 빠메이(八美, 해발 3,500m)로 이동 (40Km, 50분 소요)
▶1728년 발생한 티베트 내란을 피해 달라이 라마 7세(1708~1757년)가 7년간(1728~1735년) 머물렀던 [혜원사(惠遠寺)] - 1716년 몽고 준가르 부족이 티베트를 침략했던 시기 리탕(理塘)에서 환생한 달라이 라마 7세는 8살 때 리탕사(理塘寺)에서 출가했습니다. 1720년 강희제(康熙帝) 때 준가르 부족을 평정한 청나라 군대를 따라 라싸(拉薩)로 들어가 포탈라궁(布達拉宮)에서 달라이 라마 좌상(坐床) 행사를 거행했습니다. 그러나 1728년 옹정제(雍正帝) 때 티베트에 내란이 일어나면서 다시 리탕으로 이주했다가, 다시 태녕(泰寧)으로 옮겼습니다. 당시 청(淸) 황실에서는 백은(白銀) 16만 냥을 보내 1,000여 칸의 궁전루방과 400여 칸의 평방(平房)을 지어 혜원사를 개축하였고, 132존(尊)의 금불상과 함께 1,700여 명의 호위 병력을 보내면서 최고의 사찰을 의미하는 '구룡구사(九龍九獅)' 현판을 하사했습니다. 1735년 비로소 라싸로 돌아온 달라이 라마 7세는 1751년 건륭제(乾隆帝)의 지원으로 티베트를 통치했습니다.
▣ 오체투지(五體投地) 오체투지는 고대 인도에서 행하여지던 예법 가운데 상대방의 발을 받드는 접족례(接足禮)에서 유래한 것으로 불보(佛寶)ㆍ법보(法寶)ㆍ승보(僧寶) 삼보(三寶)에 올리는 큰 절을 의미합니다. 자신을 낮추면서 양 무릎과 팔꿈치, 이마 등 신체의 다섯 부분이 땅에 닿도록 하는 오체투지는 중생이 빠지기 쉬운 교만을 떨쳐버리고 어리석음을 참회하는 예법으로 밀교에서는 스스로 고통을 겪으면서 수행하는 방법으로 행하여져 엎드려 온몸을 완전히 땅에 붙이는 형태를 취합니다.
☞ 중국의 대표적인 명소를 소개하는 책자 "중국국가지리"에 가장 아름다운 산간마을로 소개된 미인계곡 단바(丹巴, 해발 1,850m)로 이동 (80Km, 2시간 소요)
단바
석식 (현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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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식] 호텔식
[중식] 현지식
[석식] 현지식
4일차2017-08-01 (화)
단바
조식 (호텔식)
▣ 신비한 여인국, 미인계곡 단바(丹巴) 당나라 시기의 역사를 기록한 구당서(舊唐書)에 따르면 당(唐)과 토번(吐蕃, 오늘날 티베트) 사이에 위치한 동녀국(東女國)은 오늘날 단바와 다오푸(道孚) 일대에 도읍을 정하고, 걸어서 동서로 9일, 남북으로 20일에 달하는 영토에 크고 작은 80여 개의 성(城)과 1만 여명의 병력, 수백 명의 시녀를 거느린 여왕이 통치하는 여인천하의 나라였다고 전해집니다. 여자 왕족 중 총명하고 지혜로운 두 명을 정하여 한 명은 여왕이 되고, 다른 한 명을 소여왕이 되어 여왕에게 변고가 생길 경우에 대비하였고, 5일마다 열리는 국가의 중대사를 논의하는 회의도 여자 귀족들이 참석했습니다.
동녀국의 남자들은 집안에서 아이들을 돌보며 집과 망루를 짓거나 수리하고 전쟁이 나면 전쟁터에 나가 싸우는 역할을 하였고, 논과 밭에 나가 생계에 필요한 농사를 지을 의무와 가장으로서의 권한은 모두 여자에게 있었던 철저한 모계사회였습니다. 동녀국에는 남녀가 결혼하지 않고 자유연애를 통하여 애정을 나누는 독특한 주혼(走婚) 제도가 있는데, 이런 성인 남자를 아시(사랑을 나눈 연인)라고 합니다. 주혼에는 나름의 기준이 있는데 양가 어른들의 허가나 동의가 불필요하고, 같은 마을 사람끼리의 주혼은 불가능했습니다. 보통 외할머니가 집안의 가장이고 엄마와 외삼촌, 아시가 다는 형제자매가 같은 집에서 살았습니다.
아시는 어두운 밤 사랑하는 여인의 방에 들어가 애정을 나누기 위하여 높은 돌 벽을 올라야 했는데 이를 파방즈(벽 타기)라고 합니다. 벽 타기를 잘하는 남자가 인기가 높았는데, 성인이 되기 직전 남자들은 보통 아시 경험이 많은 외삼촌을 통하여 파방즈를 배우고, 파방즈 비법 전수의 결과로 낳은 아이의 양육과 교육에 대한 의무와 권한은 아빠인 아시에게는 없으며 모두 엄마에게 있습니다. 결혼이 아닌 주혼이기에 어느 한쪽의 집에 가서 거주하지 않으며, 여러 아시들과 주혼관계를 유지할 수 있고, 언제든 어느 한쪽의 사랑이 식어 주혼을 거부할 경우 둘 사이의 교제는 중지됩니다.
전통가옥은 4층으로 1층은 가축을 기르는 축사, 2층은 주방과 워꿔(돼지의 내장을 꺼내 10년 이상을 삵힌 고기)등의 저장실, 3층과 4층은 거실, 경당과 사람들이 거주하는 방으로 사용됩니다. 가장 전망이 좋은 4층 베란다에는 화장실이 있는데 대소변은 바로 지상으로 떨어져 대지에 비옥한 거름을 제공합니다. 집을 지을 때에는 라마 스님이 집터를 정한 후 집에서 가장 중요한 화로가 놓여 질 자리에 액을 막고 복을 부르는 부적을 만들어 신에게 땅을 빌려 달라는 "싸뤄 의식"을 행합니다. 집 건축에는 남자들의 품앗이로 약 6개월이 소요되며 지어진 집은 100~500여 년을 사용합니다. 전통가옥의 지붕 위에 치켜세운 사각 모서리는 토지신(土地神), 산신(山神), 수신(水神), 화신(火神)을 상징하며 집과 가족의 안녕을 기원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볼 때 당(唐)과 토번(吐蕃)의 두 강대국 사이에서 모든 것이 부족한 고산지대에서 살아가야 했던 동녀국 사람들로서는 결혼을 통한 일부일처제에서 아들에게 재산을 상속하여 소가족화 되는 것은 사회적으로 여러 문제점들을 수반하기에 자신들의 생존을 위하여 주혼이라는 독특한 제도를 통하여 외할머니와 엄마, 딸 등 여자를 중심으로 한 모계사회를 유지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장녀에게는 한 가족의 가장으로서 생계를 책임져야 할 의무와 재산을 상속 받을 권한이 있었습니다.
1500여 년 전 사서(史書)에서 동녀국은 사라졌지만 1950년까지 교통이 불편한 험준한 산악지대에는 최후의 동녀국 여자 부족장이 존재했었는데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과 함께 인민해방군이 막강한 부족장의 권력을 몰수하고 추방했습니다. 동녀국은 지구상에서 사라졌지만 오늘날까지 그들의 후예들이 한족(漢族), 장족(藏族), 강족(羌族)과 혼혈되어 살고 있으며 그들 중 일부는 옛 동녀국의 주혼제도를 비롯한 모계사회를 구성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외부 사람들의 시각에는 이들의 주혼제도가 단순한 흥미거리로 회자될 수 있지만, 오늘날 사랑보다는 상대방의 조건을 우선시하고 결혼이라는 형식에 얽매여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남편도 아내도 없지만 가족을 이어주는 것은 오직 진정한 사랑뿐이라고 믿는 동녀국 사람들이 우리에게 무언의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신비한 여인국, 모계사회 동녀국(東女國)의 [사파촌 망루(梭坡村 望樓)] - 사서(史書)에 의하면 "한 개 망루의 수십 명 병사가 만 명의 적군을 물리친다."는 말이 있는데 동녀국의 망루는 평소에는 여왕이 거주하였고, 전쟁이 발발하면 군사요새이자 전쟁을 알리는 봉화대로 사용되었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장족마을"을 의미하는 가융장족(嘉絨藏族)이 살고 있는 [갑거장채(甲居藏寨)]
▶남녀가 결혼하지 않고 자유롭게 사랑을 나누던 여인국의 독특한 주혼(走婚) 풍습으로 아시라 불리는 남자가 야심한 밤에 연인의 집 가파른 벽을 타고 오르는 [파방즈(爬房子) 체험]
중식 (현지식)
☞ 쓰구냥산(四姑娘山, 해발 2,745m)로 이동 (105Km, 2시간 30분 소요)
쓰구냥산사천성 최고봉으로 '촉산의 왕'으로 불리는 해발 7,556m의 궁가산 다음으로 높아 '촉산황후(蜀山皇后)'로 불리는 쓰구냥산의 면적은 480㎢이며, 쓰구냥산의 서쪽에 42Km의 쌍교구(雙橋溝)ㆍ중앙에 40Km의 장평구(長坪溝)ㆍ쓰구냥산ㆍ동쪽에 30Km의 해자구(海子溝)ㆍ쓰구냥산 등 3구 1산(三溝一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아름다운 장족 처녀와 같은 모습으로 해발 6,250m의 야오메이봉(?妹峰), 5,664m의 싼구냥산(三姑娘山), 5,454m의 얼구냥산(二姑娘山), 5,355m의 따구냥산(大姑娘山)이 있습니다.
☞ 해발 3,850m에 길이 8.8Km의 파랑산 터널(巴朗山隧道)을 통과해 도강언(都江堰)으로 이동 (155Km, 3시간 소요)
중식 (현지식)
▶BC 306~BC 251년 촉군(蜀郡)의 태수 이빙(李泳)과 그의 아들 이랑(二郞)이 민강(岷江)의 홍수를 막고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만든 인류 최초의 수리시설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도강언(都江堰)] - 주입구인 보병구(寶甁口), 치수(治水)의 신(神)으로 추앙받는 이빙 부자를 기리는 이왕묘(二王廟), 물의 흐름을 나누는 어취(魚嘴), 여수로(餘水路)인 비사언(飛沙堰), 이빙이 민강의 사나운 용을 복종시킨 곳에 조성한 복룡관(伏龍觀) 등이 있습니다.
☞ 성도(成都)로 이동 (65Km, 1시간 15분 소요)
성도사천성의 성도(省都)인 성도의 역사는 2,500여 년전 주(周)나라 고촉왕(古蜀王)이 성을 쌓으며 一年城邑 二年成都(1년에 읍이 생기고 2년에 도시가 된다)는 말에서 도시명이 유래되었습니다. 성도는 수많은 영웅호걸들이 할거하던 춘추전국시대 삼국지 유비를 중심으로 하는 촉한(蜀漢)의 도읍으로, 예로부터 천부지국(天府之國)이라 불리며 중국 서남지역의 정치, 상업, 교통의 중심지로 발전했습니다.
▶남북조 시대에 창건된 성도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로 627~645년까지 18년간의 인도 순례 후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를 쓴 당(唐)나라 고승 현장(玄奬, 602~664년)의 사리가 모셔진 [문수원(文殊院)] - 본래 명칭은 신상사(信相寺)였으나 1697년 개수하면서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고, 1703년 강희제가 친필로 "공림(空林)"이라는 현판을 쓴 후 "공림당(空林堂)"으로도 불립니다. 사찰의 주지인 자독해월(慈篤海月) 법사가 이곳에서 수행하고 영험을 발휘하여 문수(文殊) 보살의 화신이 되었다고 전합니다. 당송(唐宋) 이후 명인들의 서화 500여건을 소장하고 있는데, 이 중에는 국보급이 300여건, 각종 경서 12만 여권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밖에도 역대 비각, 조각, 자수, "공림팔관(空林八觀)" 등 중요한 문화재가 있으며, 그 중에서도 현장의 사리가 가장 진귀한 것으로 꼽힙니다.
▶유비(劉備, 161~223년)와 제갈량(諸葛亮, 181~234년)을 모시는 1,500여 년 역사의 사당으로 한소열묘(漢昭烈廟)라고 불리는 [무후사(武候祠)] - 대문(大門)을 들어서면 이문(二門), 유비ㆍ관우(關羽, 162~219년)ㆍ장비(張飛, 165~221년)의 상이 있는 유비전(劉備殿), 과청(過廳), 제갈량전(諸葛亮殿), 삼의묘(三義廟), 결의루(結義樓)가 직선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내부에는 촉한의 역사적 인물들을 상징하는 청(淸)나라 때 만들어진 41점의 토우가 촉한의 군신서열에 따라 배치되어 있습니다. 사당 내의 중요한 문화재 중 하나인 당비(唐碑)에는 제갈량의 공덕을 칭송하는 내용이 적혀있으며, 명(明)나라에 이르러 "삼절비(三絶碑)"라고 불렸습니다. 서쪽에는 유비의 가묘 혜릉(惠陵)과 제갈량이 황제 유선(劉禪, 207~271년)에게 바친 출사표(出師表)가 있는 삼국문물진열관(三國文物陳列館)이 있습니다.
▶촉나라의 옛 거리를 재현한 [금리고가(錦里古街)]
중식 (현지식)
☞ 공항으로 이동 (20Km, 40분 소요)
성도-인천으로 이동 (약3시간10분 소요) [3U8903 15:25 성도 출발-19:35 인천 도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