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 서둘러 호텔에서 출발했다. 시내 중심지 로터리에 멋진 자세로 등 뒤에서 비파를 타는 비천상 조각이 눈길을 끈다. 저런 자세로 과연 연주가 가능한지 어쨌든 참 멋진 포즈다. 이 비천상은 돈황의 상징으로 관광안내 포스타 등에 자주 보인다.
막고굴(莫高窟)은 돈황(敦煌)시에서 동남쪽으로 20여km 떨어진 명사산의 남쪽 끝에 있는 불교유적으로 산서(山西)성 대동(大同)시의 운강석굴, 하남(河南)성 낙양(洛陽)시의 용문석굴, 감숙성 천수(天水)시의 맥적산석굴과 함께 중국의 4대 석굴로 꼽힌다. 가는 도중에 돈황유적 홍보관에 들렀다. 이곳에서 입장권을 사고 예약된 시간에 맞추어 입장하면 1호 극장에서 약 10분 정도 돈황 서역기행에 대한 다큐먼터리 영화를 보고 위층 2호 극장으로 올라가면 아주 커다란 둥근 천장 전체를 스크린으로 입체적인 막고굴 영상을 보여준다. 직접 속으로 걸어 들어가서 벽화와 조각품들을 보는듯한 4차원 입체영화로 마치 실제인양 느낌이 생생하다.
막고굴은 서기 366년 악준(樂樽)이라는 스님이 삼위(三危)산의 상서로운 빛에 끌리어 가다가 석산 위에 홀연히 나타난 금빛불상을 보고 발원하여 석굴을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후 실크로드를 오가는 대상들과 서역기행 스님을 비롯하여 왕족에서 평민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4세기에서 14기까지 약 천년 동안 사암절벽에 굴을 파고 벽화를 그리고 조각을 만들어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문화유산을 남겨 놓았다. 서역 실크로드의 중요한 관문으로 동서문화의 교차로이고 불교를 비롯하여 티베트 불교, 라마교, 마니교 등 불교종합예술의 보물창고로 불린다. 약 2km에 이르는 사암절벽에 700여개의 석굴이 만들어졌는데 현재 492개가 남았다. 만들어진 시기는 당나라 232개, 수나라 79개, 서하(西廈) 60여개 등으로 당나라 당시의 석굴이 가장 많고 당(唐) 현종 때에는 17개의 사찰에 승려도 천여 명이 있었다고 한다. 원래는 막고굴 앞으로 개천이 흘렀으나 정부에서 유적을 보호하기 위해 물길을 앞쪽으로 돌리고 다리를 놓아 건너가게 했다. 관람객에게는 굴 일부만 개방되어 있고 보존을 위해 내부사진은 일체 찍을 수 없다. 각 굴의 입구에는 번호를 붙여 놓았다.
처음으로 보는 굴은 막고굴 가운데에 있는 96호굴이다. 안에는 높이 35m의 실내 최대석불이 있는데 미륵불로서 당나라 측천무후의 명에 의해 조성된 것이다. 이 미륵불 앞에 9층의 목조 누각을 건축하여 덮어 씌웠다. 이 누각이 막고굴의 상징으로 입장권에 그려져 있다.
이어서 320호굴에는 당나라 시대의 비천상이 그려져 있고 천정화가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 벽화는 宋·元대의 것으로 보살상에 수염이 그려져 있는 것이 특이하다.
제259호굴은 북위 초기의 것으로 ‘돈황의 모나리자’라고 불리는 선정불이 그려져 있다. 얼굴이 통통한 보살인데 모나리자와 그림의 구도가 비슷하고 미소가 아름답고 신비하다.
그리고 130호굴에는 26m의 미륵불이 있는데 96호굴에 있는 미륵불의 남쪽에 있다고 해서 南大像으로 부른다. 唐代에 조성한 것으로 宋代에 일부 훼손된 부분을 보완했다고 한다. 아래서 위로 올려다보기 때문에 생기는 시각상의 차이를 감안해서 조각하였으며 예술성이 뛰어난 막고굴을 대표하는 불상이다.
제148호굴에는 16m의 와불상인 열반상이 있는데 허리가 잘록하여 몹시 우아한 모습이다. 열반상 뒤 벽에는 석가모니의 죽음을 애도하는 72명의 제자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막고굴은 실크로드에서 피어난 동서문화교류에 대한 진귀한 보물이다. 전 세계적으로 현존 규모가 가장 크고 가장 잘 보존된 불교예술의 보물창고로 중국에서는 東方藝術明珠라고 부른다. 여기서 발견된 돈황문서는 한자, 산스크리트어, 위구르어, 소그드어, 쿠차어, 호탄어, 티베트어, 몽골어 등 다양한 언어로 쓰였는데 작성 연대는 서기 4세기에서 11세기까지로 불교관련 내용이 대부분이다.
막고굴에서 가장 중요한 동굴의 하나가 17호굴로 최초로 돈황문서가 발견된 장경동(藏經洞)이다. 1900년대에 석굴을 관리하던 도교 도사 왕원록(王圓菉)은 16호굴 입구의 모래를 치우다 우연히 작은 굴(17호굴)을 발견했는데 장경동(16호굴 안 17호굴)에는 세 평정도의 방에 천정 높이까지 수만 점의 두루마리 경전과 회화작품 등 보물이 보관되어 있었던 것이다.
위 쇠창살이 있는 동굴이 바로 장경동(藏經洞)이다. 동굴 안의 스님은 홍삐안스님으로 9세기 이곳 막고굴에서 수행정진하던 모습을 그대로 조각해 놓았다. 돈황문서가 발견 당시 있던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스님 뒤 벽화에는 당시 스님이 쓰시던 가방과 물병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지금 우리가 쓰는 가방 못지 않게 모양이 세련되고 멋지다.
불교와 고미술에 별다른 지식이 없던 왕도사는 발견당시 지방관청에 신고를 했으나 무사안일에 젖은 관리들이 운반에 돈이 든다는 이유로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소문을 듣고 찾아 온 러시아인 오브르체프에게 약간의 은전을 받고 경전 한 무더기를 팔았고, 이어서 당시 이 지역 유적을 조사하던 영국 고고학자 스타인에게 두루마리 경전, 견직물, 회화작품 등 1만 여점을 넘겨주었다. 그리고 소문을 듣고 찾아 온 프랑스 고고학자 펠리오는 장경동 안까지 들어가서 고문서의 목록을 만들었고 그 중 값어치가 높은 두루마리 문서 1만점과 6천여권의 사본과 화첩을 트럭 열 대에 나누어 싣고 헐값에 가져갔다.
왕도사로부터 귀중한 돈황문서를 약탈한 펠리오는 대부분의 보물을 상자에 포장하여 본국으로 보내고 그 중 일부만을 북경으로 가져가서 전시를 했다고 한다. 이 때 처음으로 돈황문서를 본 중국의 학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고 급기야 정부에서 막고굴을 관할하는 지방관청에 지시하여 남은 문서들을 모두 북경으로 가져오도록 조치했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소중한 문서들을 모두 도굴당한 후였기 때문에 중국 내에서 막고굴 문헌의 실체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훗날 중국의 학자들이 거꾸로 프랑스와 미국 등에서 막고굴 유물에 대한 마이크로필름을 구입해야만 했고 동굴에서 뜯겨진 벽화의 필름을 도굴꾼의 후손들에게 사들여 고작 확대경 앞에서 들여다 볼 수밖에 없었던 중국학자들의 비애는 실로 깊었을 것이다.
영국의 스타인이 찍은 1900년대 막고굴 모습
신라 혜초스님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또한 이때 펠리오에 의해 발견되어 현재 파리 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왕오천축국전은 신라의 헤초스님이 723년부터 5년 동안 돌아본 인도의 5개 천축국과 지금의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중앙아시아의 종교와 풍물 등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 세계 유일의 8세기 여행기록이라고 한다. 혜초스님이 길을 떠날 때의 나이는 16세로 추정되는데 당시 약관의 나이에 낯설고 물설은 이역만리 서역을 혼자서 여행하면서 겪었을 위험과 어려움이 얼마나 컸을지 그 깊은 종교심에 마음이 숙연해진다. 1100년 동안이나 이역만리 돈황 땅에 묻혀 있다가 발견된 사연이 무척이나 궁금하다.
장경동 앞에는 장경동진열관을 따로 만들어 복제품 등이 전시되어 있고 발견 당시의 막고굴 사진과 귀중한 문서를 약탈해 간 외국인들의 사진도 전시되어 있다. 그 후 일본, 미국에서도 찾아와 불상, 벽화 등을 약탈했고 1914년 두 번째로 돈황을 방문한 스타인은 다시 은화로 6,000여 권에 달하는 경서 다섯 상자를 사들여 돌아갔다고 한다. 끝
추가로 사진 몇장 올립니다.
첫댓글 친구들과의 오붓한 여행이 보기 좋다
그리고
상세한 여행기 메모하고 자료 찾고 글 쓰느라고 고생이 많았겠소
덕분에 구경 잘 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