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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명산의 향기
글쓴이: 최 흥 욱
계명산 가족들이 쓰던 가마솥
책 머리에
벽제 계명산은 내게 그리움의 동산이 되고 말았습니다. 맨발의 성자 이현필 선생의 삶을 사모한 나머지 1980년대 부터 그 산을 찾기 시작한 것이 오늘까지 왔으니 이제 그 산 계명산은 나의 사랑하는 벗 아니 포근한 어머니의 품과 같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내 영혼이 고독하고 피곤해질 때 나의 발걸음은 자연스레 그곳을 향합니다. 벽제 계명산엔 그리운 님이 있기에 내가 그리도 그곳을 즐겨 찾아가고 있습니다. 그리워하다 그리워하다 고개 숙이면 문득 눈물 너머로 보이는 향기 가득한 님이 있기에 나는 오늘도 그 산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멀리하고 숨어서 말 없이 좁은 길을 가는 순결한 님이 있기에 그곳을 그리도 그리워하며 찾아가는 것입니다.
벽제 계명산은 향기 가득한 동산입니다.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을때 이 산에 갔다 오면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을 얻고 기뻐하며 돌아오게 됩니다. 이 계명산에서 나는 향기를 글로 써서 알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문득 타고르의 기도가 생각납니다.
“당신의 사랑을 믿습니다. 이 말이 제 생애의 마지막 말 되게 해주십시오.”
계명산의 향기
첫 무렵의 수녀원 모습수녀원이 시작된 그 다음 해인 1958년에 찍은 사진이다
경기도 고양시 벽제에 있는 계명산에 가면 향기가 난다. 소리 없이 고요하게 속까지 파고드는 향기가 있다. 불광동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333번 버스 타고 30분가량 지나 벽제 상회 앞에서 내려 오른쪽 흙길 계명산 길 따라 조금 올라가면 계명산 수녀원이 나온다. 수녀원이라야 흙담집 몇 채와 벽돌집 한 채가 전부이다. 맨발의 성자 이현필 선생의 정신을 따르며 50년 넘게 이곳을 지키고 있는 올해 78세인 박공순 원장을 비롯하여 네 사람의 가족들이 함께 살고 있는 집이다. 정확하게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벽제 3동 산 1번지에 자리 잡고 있으며, 동광원 계명산 분원으로 일컬어지는 곳이다. 계명산은 북한산 다음으로 높은 이름 있는 산으로 생태계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 계명산 골짜기는 일명 수녀원 골짜기로 불리며 고양시 최고의 골짜기로 손꼽히는 곳이다. 이 산은 원래 개명산이었는데 나중에 마을 사람들이 계명산으로 불러왔다고 한다. 이 산에 얽혀진 이야기가 있다. 숙종대왕이 말을 타고 가다가 다리 앞에 섰는데 아침 해가 찬란하게 떠오르니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더니 마부가 개명산(開明山)이라고 대답해서 개명산이 되었다고 한다.
처녀 마을 수녀 마을
벽제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처녀 마을’, ‘수녀 마을’이라 부른다. 여자들만이 살고 있는 것이 그들의 눈엔 수녀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기쁨이나 행복은 함께 나눌수록 커지고 슬픔이나 불행은 서로 나눌수록 가벼워지는 법이지요”하고 고백하며 세상을 등지고 이곳에 들어온 여인들이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자립자족하며 내 것, 네 것 없이 함께 나누는 공동체 생활을 해 온지도 벌써 51년째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한때는 50명이 넘는 식구가 있었지만 지금은 박공순 원장(78세)을 비롯하여 박금선(68세), 박금자(60세), 오영실(43세) 자매가 한 가족처럼 살아가고 있다.
계명산 수녀원 전경뒷편에 계명산과 그 정상 앵무봉이 보인다
맑은 골짜기 물이 쏟아져 내리는 산자락에서 논밭 일구며 부지런히 일한 탓인지 가장 나이든 원장 할머니도 툇마루에 앉아 밝은 낯으로 일하고 있었다. 보기엔 약하고 여린 여자들인데 놀라우리만큼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땅을 일구고 일하며 거기서 나는 것으로 넉넉히 살아간다. 수녀원 사람들은 땅에서 땀 흘리며 살아가는 아름다운 농사꾼이요 일꾼들이다. 우리가 땅을 파면 먹을 것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먹을 것이 내려온다는 확실한 믿음 가지고 땅을 파고 곡식을 심어 양식으로 삼고 날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노래하며 살아간다. 그것 먹고 날마다 일하면서도 그들은 아무 탈도 안 나고 오히려 살결이 윤택하기만한 이상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봄 여름 손에서 호미를 놓는 날이 없다. 얼마나 일을 많이 했는지 손가락에 지문이 없다. 그들은 “어서 파요. 파기만 하면 하늘에서 먹을 것이 온다고 선생님이 말씀하지 않던가요!”하며 한평생 땅을 일궈가는 아름다운 농사꾼들이다. “물소리 적막한 깊은 산골에 나 홀로 혼자 앉아 고독한 마음 이때가 그때라고 하시던 주님 행여나 이 산골에 오시려는지” 계명산 수녀들은 이런 노래를 부르며 청춘을 불살라 왔다. 다석 유영모 선생은 계명산 수녀들에게 “진달래야 진달래야 어느 꽃이 진달래인지 내 사랑의 진달래 너만 홀로 진달래야”라는 노래를 지어 주었다. 그런 시절은 지나가고 지금은 노인들 몇 사람이 여기서 수도생활을 하고 있다.
유기농으로 가꾸는 배추밭에서 식구들과 함께 벌레를 잡고 있는 박공순 원장(맨 왼쪽)
경건과 영성의 도장 예배방
그토록 내려 쌓이던 눈도 그치고 나뭇가지들 물기 올라 꿈틀꿈틀 새 순이 막 돋아나려는 듯 겨울이 지나가는 이월 어느 날 오후 필자는 한은우 목사, 최대용 목사와 함께 계명산을 찾아갔다. 아직도 눈이 녹지 않아 하얀 옷을 채 벗지 않은 그리움의 산 계명산으로 향했다. 순수와 고요, 겸손과 드러나지 않음, 세상을 거꾸로 거슬러 사는 영인들이 거기 있기에 그 향기 맡으려고 그렇게도 그리워하며 우린 이 산을 찾아간 것이다. 사랑스런 할머니 원장 수녀님이 우리를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다. 계명산 가족들이 농사지은 것들로 차려진 토박이 점심상을 맛있게 받은 뒤 1968년 아침, 저녁으로 예배하기 위해 지어진 ‘예배방’으로 장소를 옮겨 수녀원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 방은 대여섯 평 되는데 아주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지난 날 여기서 오북환 장로가 성경공부와 설교를 인도하였다고 한다.
이때 새벽예배는 새벽 3시에 언니들이 모여 성경공부를 하고, 새벽 4시에는 다함께 예배를 드렸다. 예배시간에는 성경 외에 가톨릭의 준주성범, 마더 테레사에 대한 책, 이 선생님의 ‘완덕’, ‘새해를 맞이하여’ 따위의 말씀을 읽었다. 성가집이나 책들은 바쁘고 힘든 삶이었지만 시간을 쪼개 일일이 손으로 베껴서 사용하였다. 예배 후에는 우거지 죽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 일을 하러 나갔다. 점심은 우거지 밥을 먹고, 저녁은 고구마 한 두 개가 전부였다. 저녁 식사 후에 예배를 드리고 예배 후에는 베틀로 옷감을 짜기 위해 실을 잇는 일을 했었다.
이현필 선생 추모예배 마치고 예배방 앞에서 이인옥 장로, O, 엄두섭 목사, 오북환 장로, 김준호 선생, 윤영윤 선생(왼쪽 앞줄)
토박이 여성 수도 공동체
장작을 때어 따뜻하게 달구어진 온돌방에 앉은 우리들은 박공순 원장의 계명산 수녀원의 어제와 오늘의 이야기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들었다. “여그 수녀원은 1957년 3월 5일에 정한나 어머니, 서울 어머니(이희옥) 그리고 저가 계명산 앵무봉에 들어와 초막을 짓고 살면서 시작되었지요. 당시 마을의 주소는 경기도 고양군 벽제면 상곡리였어요.” 근심 걱정이란 하나도 없는 듯한 온화한 얼굴을 가진 박공순 원장이 조용 조용히 말문을 꺼내었다. 1956년 정한나 집사는 당시 현동완 YMCA 총무와 정인세 동광원장을 따라 이곳에 왔다가 이 산골짜기가 너무 좋아서 초막을 치고 얼마 동안 여기 살았다고 한다. 그때 정한나 집사의 가슴 속에 도토리에 맹물을 끓여 먹더라도 여성들만으로 자립하는 수도원을 짓고 살고 싶은 뜨거운 열망이 싹텄던 것이다. 그래서 능곡에 살던 이희옥씨를 끌어 들였고, 이희옥씨는 평소에 뜻을 같이하던 박공순씨를 끌어들였다. 알고 보니 이 계명산 수녀원은 세 사람의 여인들 곧 정한나, 이희옥, 박공순에 의해 시작된 토박이 수도 공동체이다.
정한나 수녀의 움막1956년에 계명산에 들어온 그는 여기서 홀로 기도하고 잠자며살았는데 1998년 홍수로 떠내려가고 말았다
개척자 세 여인들
정한나는 전남 화순 능주 출신으로 일찍 남편을 잃고 동광원에 들어왔는데 여장부로서 이현필 선생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고아원을 위해 많은 일을 한 사람이다. 그는 처음에 계명산에 들어와서 앵무봉에서 흘러내리는 개울가에 토굴을 파고 어귀에 헌 거적때기 하나를 깔고 지냈다고 한다. 여인의 몸으로 홀로 수도하면서 머리도 삭발하고 초목과 함께 철저히 썩으며 세상 떠날 때까지 이 골짜기에서 청춘을 불살랐다고 한다. 이희옥은 어느 큰 병원장의 딸이었는데 참 믿는 길 찾아 이 교회 저 교회 다니다가 1955년 정한나 어머니 만나 대화하는 가운데 “이것이다, 바로 이 길이다!”하는 감격이 넘쳐 그 뒤 속세 떨쳐 버리고 1957년 계명산에 들어와 세상 떠나기까지 서른 여덟 해 동안 젊음을 불살랐다. 그 고운 손으로 땅을 파며 농사짓고 밭 가꾸고 모 심고 소 기르고 지게 지고 나무하고 살았다. 그는 계명산 초대 분원장으로 있으면서 십일조 모아 가난해서 먹을 것 없는 사람을 도와주고, 30년 동안 쌀 밀가루 쑥을 모아 팥떡해서 굶주림에 허덕이는 마을 집집마다 식구 수대로 나눠주고, 이런 일하면서 계명산 초목과 함께 썩어간 성녀였다. 해마다 성탄절이 되면 동네 사람들에게 떡을 넉넉히 나누어 주면서 마을 사람들과 성탄의 기쁨을 나누고, 저녁에는 앞산에 등불을 밝히고 성탄 찬송을 불렀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지금도 그때 그 떡 이야기를 하고 있다.
현재의 땅을 확보하고 자립하는 데는 이희옥 어머니의 공이 매우 컸다. 어머니의 가족들이 잘 살았기에 많은 땅을 사주었으며 초기에는 이불, 생활 필수품을 대주고, 십일조를 보내주어 자립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길가에 오막살이라도 지어서 예수 잘 믿는 오고 가는 사람들 따뜻한 밥이라도 해 주어야겠다는 아름다운 꿈을 가졌던 서울 어머니 이희옥. 그는 숨지기 직전 이런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 앞에 잘못하고 사람 앞에 잘못하고 죄송합니다. 내 속에 죄만 생각하는데 말을 하지 말라. 이제는 자기 속에 죄만 생각해야지. 죄가 몇 가지나 되나 하는 중 음란죄라. 이렇게 아프다(췌장암) 처음에는 따가왔는데 지금은 눌러도 아프지 않아요. 이제 나는 속 찬송할 때가 왔습니다.” 그 때가 바로 1995년 1월 6일 새벽 4시 50분이었다.
그는 1995년 1월 9일 오후 3시 손수 지은 흙담집 좁은 방에서 두 손 모은 채 잠드는 듯 눈을 감았다. 주의 얼굴 닮은 거룩한 그 눈가에는 이슬 같은 눈물이 젖은 채 하늘로, 하늘로 높이 올라갔다. 그의 무덤과 비석이 수녀원 뒷산 밭 한편에 외로이 세워져 있다. 박공순은 전남 화순 출신으로 신혼 초에 남편에게 이현필 선생을 소개받은 뒤 남편을 여의고 동광원에 들어왔으며 나중엔 어머니와 동생들(금선, 금자)까지 데리고 들어온 구도적인 여인이다. 지금은 계명산 분원장으로 이곳을 지키고 있는데 계명산에 들어와 얼마나 일을 많이 했던지 손가락 무늬가 다 없어져 버리고 말았다. 지금 살고 있는 집도 그와 식구들이 흙을 이기고 돌을 가져다 쌓고 지붕도 얹어서 세웠다. 논밭을 가는 일도 일일이 손으로 했고, 외출은 물론이고 고향에도 거의 가지 않고 그곳에 파묻혀 살기를 어언 51년이 지나가고 말았다. 그는 분명 일하며 기도하는 우리 시대의 거룩한 그리스도의 종이었다.
예배방 안에서 박공순(왼쪽)이 이희옥 어머니에게 사과를 깎아드리는 정겨운 모습
노동의 현장 떡번지
양식을 구하는 일이 매우 시급한 일이어서 그들은 산을 개간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산 위로 한 시간 올라가면 ‘떡번지’라고 하는 평평한 곳이 있는데 이곳을 1958년부터 개간하기 시작하였다. 이곳은 원경선 선생, 오북환 장로가 돌아보고 결정한 곳이었는데 이곳에는 옛날에 큰 절이 있어서 사람들이 와서 복을 빌면서 떡을 이리저리 던져 떡이 널려 있다하여 ‘떡번지’라고 하였다. 목수 일을 하던 오 장로는 이때부터 이곳에 함께 살면서 개간하는 일과 집짓는 일을 도와주었다. 약 4천 평이나 되는 ‘떡번지’를 개간하기 위해 불을 놓아 밭을 만드느라고 많은 고생을 하였다. 그곳에 집도 두세 채 지어 노인들이 살도록 하였다. 나중에 식구가 줄어든 후에는 이곳에 나무를 다시 심어서 원상복구를 하였다.
수녀 양성반 과정
1972년 이후에는 해마다 10명 가량의 여반 식구들이 ‘양성반’이라는 이름으로 1년씩 훈련을 받기 위해 계명산에 들어왔다. 이들은 주로 성경공부를 하고 간혹 바쁜 일이 있을 때는 농사일을 거들었다. 1회 9명, 2회 14명, 3회 13명, 4회 7명, 5회 9명을 끝으로 양성반은 5년 동안 계속되었다.
계명산 수녀원 제1회 수녀 양성반1972년부터 5년 동안 계속되었는데 이들은 1년씩 성경공부와 농사일을거들며 훈련 받았다. 둘째 줄 오른쪽에서 셋째가 정한나 수녀(수녀원 시작),넷째가 이희옥 수녀(초대 원장), 맨 끝 앉은 이가 박공순 수녀(현 원장)이다
이현필과 계명산 사랑
우리들이 이 계명산을 이토록 그리워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맨발의 성자 이현필 선생이 이곳에 자주 와서 거닐고 기도하고 명상하다가 바로 이곳에서 마지막 세상을 떠난 향기 나는 동산이기 때문이다. 이현필 선생은 동광원 분원들 가운데서도 이곳을 사랑해서 여기 자주 와서 수녀원에서 조금 산쪽으로 올라가면 오른쪽 골짜기 언덕에 지은 현동완 총무의 산장(지금은 신촌예배당 수도처)에서 늘 머물곤 했다고 한다. 마지막 광주에서 고별성회를 마치고는 서울에 올라와 여기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1964년 3월 12일 계명산에 들어온 이현필 선생은 하루 ‘베틀방’에서 머물다가 산장으로 옮겨와 닷새 동안 여기 있으면서 마지막 가르침을 주었다.
거룩한 일터 베틀방
옷감을 짜는 일이 매우 중요한 수입원이었는데 이것은 1960년에 세계 봉사회로부터 베틀을 지원 받고 기술을 배워서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박공순 언니가 했고 그 뒤 박금선, 박옥순 언니가 이 일을 했다. 일년 내내 옷감을 짰는데 여기에 사용하는 실은 방직공장에서 나오는 자투리 실을 싸게 사다가 일일이 손으로 이은 것이었다. 실을 잇는 일이 손이 많이 가는 일이어서 밤이면 식구들이 모여 이 일을 하였다. 만들어진 옷감은 김현봉 목사가 담임한 아현예배당 교인들이 많이 사갔고, 가까운 마을이나 절에도 팔았다. 이 일은 20년 동안 계속되었다.
이현필 선생은 1964년 3월 12일 이 베틀방에 오셔서 하룻밤을 지냈다. 이 방에 와서 “이 베를 짜는 사람도 마음의 베를 짜게 하시고 이 베옷을 입는 사람도 복을 받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다. 또 한 끼에 1원씩 모아서 구제하면 가난한 사람들을 살릴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씀한 뒤 윗길이 의인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셨다.
베틀방 최대용 목사, 박공순 원장, 최흥욱 목사, 박용배 목사(왼쪽부터) 100년이 넘은 건물이다
마지막 말 남기고 가신 그 방에선
우리들 일행은 계속 이야기만 듣고 있을 수 없어 ‘예배방’을 나와 이현필 선생이 마지막 세상을 떠난 곳과 묘소를 찾아 눈 덮인 오솔길을 걸으며 올라갔다. 눈 쌓인 계명산에 바람이 매몰차게 불어댄다. 벽제 계명산 양쪽 골짜기의 물이 한데 모여 흐르는 곳, 언제나 솔바람과 물소리뿐인 작은 흙담집. 여기가 맨발의 성자 이현필 선생이 돌아가신 자리이다.
마지막 말 남기며 하늘로 올라간 성인의 숨결이 지금도 감도는 곳이다. 그 몸의 향기 아직도 사무친 방, 그가 앉아 기도하고 명상하던 바위, 그가 걸어다니던 솔밭 길을 말없이 걸어가 보았다.
이현필 선생은 3월 13일 현동완 YMCA 총무의 산장으로 옮겨 닷새 동안 여기 머물며 예배 인도하면서 마지막 가르침을 주었다. 아침, 저녁으로 예배를 인도하였다. “땅 파는 것은 주의 음성을 듣는 것이고 시래기 밥은 기도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였다.
3월 15일 주일에는 전체 식구들이 모였다. 이현필 선생은 무릎 꿇고 앉아서 식구들이 부르는 찬송을 무릎을 치며 박자를 맞추었다. 그리고는 고린도전서 7장을 돌려가며 읽게 하였다. 식구들이 읽기를 끝내니 “여러분! 음성이 어찌 그리 맑은지요. 제 마음이 너무 기쁩니다. 여러분, 동정 잘 지키다 오십시오. 여러분에게서 태어날 자녀들이 서울의 훌륭한 집안에서 태어나서 여러분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하며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였다.
현동완 총무의 산장이현필 선생은 계명산에 와 여기서 닷새 머물다가 세상을 떠났다지금은 신촌예배당 수도처로 사용되고 있다.
박공순 원장은 이현필 선생이 세상 떠나기 이틀 전 3월 16일 밤에 일어났던 일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칠흑같이 캄캄한 밤중이었는데 갑자기 동쪽 하늘에서 환한 빛이 ‘화악!’ 소리 내면서 강한 불빛이 지금의 선생님 묘소 가까이 떨어지고 있었어요.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쳐서 개울까지 내려왔지요. 다시 올라가 창밖 문틈으로 들으니 선생님께서 ‘죽어도 영원히 여기서 살고, 살아도 영원히 여기서 살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어요.” 이날 밤 이현필 선생은 한나 어머니 무릎에 손을 대시면서 “어머니, 어머니, 당신은 성모 어머니이십니다!”라고 부르면서 동광원 식구들을 잘 맡아 키워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드디어 운명의 순간이 가까워 왔다. 3월 17일 화요일 밤 이현필 선생은 방 가운데 계시고 식구들은 기역자로 앉아있었다. 열이 40도 이상 올라갔는데도 고통을 더 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셨다. 이날 밤 박공순도 선생님 가시는 자리 지켜보려고 일찍 올라가서 선생님 방에 불을 때고 방구석에 앉아있었다. 시중들던 조정은 양에게 “언니 가라고 해. 언니 가라고 해. 손님이 많이 올 텐데.”하며 자신의 죽음을 미리 알고 알려주는 것이었다. 이현필 선생은 먼데 있어도 그 사람이 무슨 마음먹고 있는지 다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박공순이 취나물로 죽을 끓여드렸다. 그랬더니 “아, 참 맛있다! 맛있다! 계명산이 왜 이렇게 사랑이 많고 음식이 맛있는 것이지?”하고 시중든 조정은 양에게 물었다. “아무개가 잘해서 그래요.”하고 대답했더니 “뭘 그래. 공순씨가 했지.”하고 말씀하는 것이었다. 이현필 선생은 박공순의 선생님 대접하려고 하는 그 마음을 꿰뚫어 보았던 것이다.
조정은이 문고리 잡고 방으로 들어가려하니 선생님이 하나님과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네, 네! 한 번도 타지 않는 나귀를 제게 보내주신다고요.”하는 선생님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정은은 그 소리에 압도되어 문고리를 잡고 떨고 있었다. “정은 양, 어떻게 이 동광원이 유지되는지 아는가?”하고 이현필 선생이 물었다. “어머니들 희생적으로 모이고 공순씨도 가나마나한 시집갔고 얼마나 희생하고 사는지 아는가?”라고 정은 양에게 말씀하는 것이었다. 선생님 뵙고 싶어서 가만히 문틈으로 박공순이 들여다보고 있는데 벌써 아시고 “공순씨!”하고 그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다. 박공순 원장은 그때 일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한다. “선생님은 제가 남원에 가도 광주에 가 있어도 제 마음을 다 알고 계셨어요.”
불덩이 같이 뜨거워진 몸 금방 끊어질 듯한 숨소리만 들렸다. “주님, 저는 주님을 사랑하고파 무척 애썼습니다. 주님, 저는 지금 주님의 십자가 지고 갑니다.”하고 이현필 선생은 기도하였다. 마지막 신기한 기쁨, 환희의 물결 밀려와 “오, 기쁘다! 오, 기뻐! 오매 못 참겠네. 아이고, 기뻐! 이 기쁨을 종로 네거리에라도 전하고 싶네!” 마지막 말 남기며 그는 계명산 산장에서 고요히 눈을 감았다. 제자들의 “겟세마네 동산의 주를 생각할 때에” 찬송 소리를 들으며 1964년 3월 18일 수요일 새벽 3시 겟세마네 동산의 주님처럼 무릎 꿇은 채 그는 하늘로 올라가셨다. 꽃 피고 새 우는 희망의 4월 다가오는 봄의 문턱에서 한 알의 밀알 되어 파묻혔다.
이현필 선생 추모예배 마치고 2006. 3. 18. 계명산 분원의 새 수녀원 건물 앞에서
이현필 선생 묘비잔디 위에 앉으면 그가 앉았던 바위, 다니던 솔밭 길이 내려다보이고 골짜기의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님이 묻히신 그곳에 가고싶다
이 집에서 나와 왼쪽 산 가파른 언덕길로 오솔길 따라 5분가량 올라가면 이현필 선생의 묘소가 나온다. “주님 가신 길이라면 태산준령 험치 않소. 갈보리 십자가는 저를 위함이요”그가 지은 노래를 조용히 부르며 묘소 앞에 엎드린다. 한겨울 눈보라 치는 골짜기를 맨발로 걸으며 갈보리 십자가의 노래 부르며 흐느껴 통곡하던 성인 이현필 선생이 묻힌 곳이기에 우린 오늘 그의 숨결을 맛보려고 여기 엎드린 것이다. 묘소의 노오란 잔디가 내 언 몸을 녹여준다. 새들이 주위에서 아름답게 노래하고 있다. 따뜻한 햇살이 하늘에서 내려온다. 문득 눈앞에 묘비에 새겨진 글귀가 들어온다. “이현필 선생은 동광원과 귀일원을 창설하고 고아와 병자를 위해 사랑과 희생적 눈물겨운 일생을 보내셨다. 예수를 본받아 살려고 지리산 눈보라 속에서 십자가의 노래 부르며 통곡 참회하시고 잃은 양 찾아 일생 맨발로 다니신 한국의 성자였다. 이천년 삼월 십팔일 엄두섭 짓고 김흥호 쓰다.” 이 비문을 가슴으로 읽어 내려가는 내 속에서 고요한 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 그리운 사람. 몸서리쳐지도록 그리운 사람. 아직도 내 안에 남아 가슴을 흔드는 사람. 그리워하다 그리워하다 고개 숙이면 문득 눈물너머로 보이는 향기의 사람. 오늘도 난 그 향기 때문에 살아가고 있다. 계명산에서 나는 사랑의 향기 힘입어 님의 발자취 기쁨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좁은 길로 간 이현필 선생, 이게 바로 나사렛 예수의 길인데 나도 흉내라도 내며 따라가야 할 텐데. 바로 이 길이다. 내가 가야 할 길은. 우리들이 가야 할 길은. 아, 새해는 또 이렇게 시작하는 것이다.”
제1회 영성 관상집회
2007. 9. 24-26. 강사: 엄두섭 목사
오세휘 장로, 이인옥 장로, 엄두섭 목사, 백남철 목사(앞줄 왼쪽부터)
최대용 목사, 조동희 목사, O, 최흥욱 목사, 박용배 목사(뒷줄 왼쪽부터)
아, 그곳엔 그리운 님이 있기에
벽제 계명산엔 그리운 님이 있기에 향기가 난다. 쉴 사이 없이 달려만 가던 나의 발걸음이 자연스레 향하는 그곳엔 내가 그리워하는 님이 있다.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을 때에는 내 마음은 언제나 그곳에 먼저 가 있다. 물 흐르는 소리 풀벌레 울음소리 각종 열매 익어가는 향기 가득한 벽제 계명산. 그곳에 가면 세상을 멀리하고 그 고운 여인의 손으로 땅 일구며 흙과 함께 곡식 가꾸며 숨어서 말없이 주의 길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다. 화려한 문화시설도 없고 사람들도 찾아오지 않는 흙담집 몇 채요 밭이 전부인 그곳 산골이지만 한평생 순결 지키며 좁은 길 가는 그리운 님이 있다. 여든 가까우신 할머니지만 열여덟 소녀 같은 청순함을 머금은 해맑고 거룩한 어머니와 같은 그가 그곳에서 세상을 위해, 사람들을 위해 날마다 기도하고 있다. 계명산 골짜기에서 들려오는 땅 파는 소리 기도하는 소리가 바로 이 험악한 세상을 이기는 힘이다. 아, 그곳엔 그리운 님이 있기에 향기가 진동하는 것이다.
수녀원 새 건물
사람들 발걸음 끊어진 곳에
흙담집 몇 채 지어 놓고
기도하고 일하고 나누면서
님의 은총 받으며
사랑하며 살아가는 당신들이
저 푸른 산 보다
더 푸르러 보였습니다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모습으로 나타나 보이는
향기만으로도
만족합니다
당신들의 모습 속에서
원형의 그리스도인들을
또 잃어버린
나를
찾아 나섭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