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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휘 李東輝(1873 ∼ 1935)】 "강화의 바울, 항일민족투쟁의 선구자"
【이동휘 李東輝(1873 ∼ 1935)】 "강화의 바울, 항일민족투쟁의 선구자"
1873년 6월 20일 함남 단천군(端川郡) 파도면(波道面) 대성리(大成里)에서 아전을 지낸 바 있는 빈농 이승교(李承橋)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하빈(河濱)이다. 호는 성재(誠齋), 모산(茅山), 이광(李光) 등이 있고 이명으로 성삼(誠參), 성제(誠齊), 성제(猩濟), 성제(誠濟), 각민(覺民), 성제(誠薺), 대자유 등을 썼다. 유년시절 향리의 대성재(大成齋)에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이후 단천군수의 심부름을 하던 통인(通引)으로 일하다가 군수 이계선(李啓善)이 생일잔치 날에 어린 기생을 차별적, 억압적으로 취급하는 것에 분노하여 동헌에 뛰어들어 화로를 뒤엎고 도피하였다.
이용익(李容翊)의 부름으로 상경하여 그의 추천으로 서울의 사관양성소를 졸업한 후, 육군 참위에 임명되었다. 청렴강직과 충성심을 인정받아 1901년 참령으로 승진하여, 삼남검사관(三南檢査官)이 되었고 삼남 지방의 부정부패한 지방 진위대 장교와 지방 관리들을 엄격하게 처벌하여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1903년 5월 국방 요충지인 강화도 진위대장으로 부임하여 강화 군민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1904년 러일전쟁 발발 이후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되는 가운데, 군대 장전(臟錢) 30만 냥을 횡령한 강화부윤 윤철규(尹喆奎)가 성재를 러시아 간첩이라고 무고하였다. 이에 부하 4명과 함께 항의 차 방문하자, 서울로 도피한 윤철규가 내부(內部)에 고발하여 육군 법원의 명령으로 재판을 받고, 부하들만 처벌을 받았다. 윤철규 공금 횡령 사건이 유야무야로 끝나자 1905년 3월 군직을 사임하였다.
이보다 앞서 1903년 11월에는 강화도 최초의 근대적 사립학교인 합일학교를 설립하였으며, 1904년 대한협동회에 참여하여 일제의 토지침탈에 반대하였다. 1905년에는 윤명삼, 유경근 등과 보창학교(普昌學校)를 설립하여 교육 운동에 헌신하였다.
일제와 강제적인 을사늑약을 체결하게 되자, 을사오적(乙巳五賊)을 처단하고 자결할 결심으로 광무황제, 2천만 동포형제, 진신(縉紳), 법관(法官), 을사오적, 각국 공사관 사절,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 주한 일본군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 앞으로 보내는 8통의 유서를 작성하였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이후 대한자강회 및 서우학회의 강화도 지회를 설치하고 한북흥학회 결성에 참여하 등 대중을 상대로 한 교육, 문화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기독교야말로 쓰러져 가는 나라를 구할 수 있다는 신념에서 기독교 활동에도 힘썼다.
1907년 7월 일제가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정미7조약 강제 체결과 군대 해산을 자행했다. 이에 강화도 진위대의 김동수(金東秀), 연기우(延其羽) 등과 군민들이 봉기하자 봉기의 배후 조종자로 일제 경무총감부에 체포되어, 4개월 후인 12월 초 석방되었다.
석방 후 서우학회와 한북흥학회를 통합하여 서북학회(西北學會)를 만드는 한편, 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를 통하여 항일구국운동을 계속하였으며, 1909년 이후에는 캐나다 장로교 선교회의 전도사로서 그리어슨(R. G. Grierson) 목사와 함께 함경도 일대에서 기독교 전도활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 북간도 교육단을 조직하여 정재면(鄭載冕)을 북간도에 파견하여 교육활동을 전개하도록 하였다. 경술국치를 앞둔 1910년 8월 초 일제에 의하여 예비 검속되었고, 경술국치가 대외적으로 선포된 후에야 석방되었다. 1911년 1월 말부터 2월 초순까지 북간도 각지의 교회를 순방하며 대사경회(大査經會)를 열어 기독교를 전파하는 한편, 계봉우 · 오영선 · 장기영 · 김하구 등 앞서 북간도로 건너온 30여 명을 중심으로 항일 비밀 결사 조직인 광복단(光復團)을 조직하였다.
국내로 귀환한 얼마 후인 3월 안명근, 양기탁 사건에 연루되어 또 다시 일제에 체포되었다. 인천 앞바다에 있는 대무의도(大舞衣島)에서 1년의 유배 생활을 보내고, 1912년 6월 유배에서 해제되었다. 이후 북간도 한인대표로서 북경정부의 리위안홍(黎元洪) 총통을 만나 간민회(墾民會)를 승인받았다. 국내에서의 항일구국운동이 어렵게 된 상황에서 1913년 2월 혜산진에서의 부흥사경회를 틈타 압록강을 건너 북간도 연길현 용정 명동촌으로 망명하였다.
북간도에서 한인자치기관인 간민회를 지도하는 한편, 북간도 각지를 순회하며 신교육 보급과 기독교 전도 활동을 계속하였고, 동포 사회의 단결과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당시 북간도 한인 사회는 민족 운동 방식과 민족 정체성 문제를 둘러싸고 기독교 계열 인사와 유학 계열 인사들 사이에 이른바 신구(新舊)학파 간의 갈등이 격화되고 있었다.
간민교육회, 간민회 계열의 신학파는 일본의 간섭 배제와 지속적인 민족운동을 위해서는, 중국 당국의 협력과 후원을 얻어야 하며 중국 국적 취득과 호복(胡服)과 호발(胡髮)의 채택을 장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반하여 사우계(士友契), 공교회(孔敎會) 계열의 구학파는 이러한 신학파의 동화 정책을 민족문화 말살 노선이라고 비판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추종자들이 주축이 된 신학파의 활동을 지도하는 한편, 김정규(金貞奎)와의 면담을 제의하는 등 구학파와의 단합을 모색했으나, 응하지 않아 실현되지 못했다. 아울러 중국인들과 연합을 모색하기 위하여 중한연합전도회(中韓聯合傳道會)를 조직하고 부회장으로 활약했다.
1913년 10월 일제의 위협이 미치고 있던 북간도를 떠나 훈춘(琿春)을 거쳐 러시아 연해주로 이동했다. 당시 연해주 한인 사회는 기호파(충청, 경기 출신), 서도파(평안, 황해 출신), 북파(함경 출신) 간의 지방 파쟁으로 인하여 한인사회 대표기관인 권업회(勸業會)가 침체 상태에 빠져 있었다. 파벌 해소와 민족단결을 강조하여 권업회가 명실상부한 통합적 한인자치단체로 재건되도록 하는 한편, 권업회 총대로서 연해주 각지의 한인 사회를 순방하면서 권업회의 조직 정비와 한인 사회의 단합을 위해 활동했다.
러일전쟁 10주년이 되는 1914년에는 제2의 러일전쟁 발발에 대비하여 한러 연합에 기초한 항일 광복전쟁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를 위해 만주와 러시아에 흩어져 있는 민족운동세력과 무장력을 결집하여 광복전쟁을 이끌어갈 대한광복군정부를 조직하였다.
1913년 말 독립자금 모금을 위한 애국저금단(愛國貯金團)을 조직하였고, 장교 양성을 위해 1914년 북간도 왕칭(汪淸)현 나자구(羅子溝)에 무관학교를 설립하였다. 이동휘는 이상설에 이어 제2대 정도령(正都領)에 취임하여 광복전쟁계획을 총지휘하였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러시아가 일본과 동맹국이 되면서 이러한 광복전쟁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설상가상으로 러시아 당국은 일제 당국의 요청을 받아 이동휘 등 36명의 한인 지도자들에 대한 체포령과 추방 명령을 내렸다. 이동휘는 북간도로 이동하여 일본의 중국에 대한 21개조 요구로 중일 간에 전운이 감돌자 중국과의 연합을 통한 대일 전쟁 계획을 추진하였고 정도령 명의로 훈춘 · 북간도 · 서간도 각 군구 사령관과 각급 군직을 임명하였다. 그러나 1915년 5월 9일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일본의 요구에 굴복함으로써 이 계획 역시 무산되고 말았다.
1916년 11월 초 부인 강정혜의 생일을 맞아 왕칭현 하마탕(蛤螞塘)에 있는 가족이 머무르는 집을 방문했다가 일본 영사관의 형사 6~7명의 습격을 받아 도피했으나, 병을 얻었고, 의형제이자 동지인 계봉우는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고 말았다. 1916년 12월, 러시아 한인 사회의 원로이자 신한촌민 회장, 권업회 회장을 지낸 김도여(金道汝)가 사망하자 이상설, 이종호, 김치보와 함께 호상인(護喪人)으로 각지에 부고하였다.
1917년 3월 러시아 2월 혁명 발발 소식을 접하고 ‘신시대의 도래’에 따른 새로운 일을 도모하고자 급거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을 찾아갔으나, 1917년 4월 16일 러시아 헌병대 한인 정탐원 구덕성(具德成, 또는 具德承)의 밀고로 ‘독일 간첩 혐의’로 체포되었고, 10월 혁명 후인 1917년 11월 하순 김알렉산드라와 볼셰비키 세력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다.
10월 혁명 이후 볼셰비키 세력과의 연대를 통한 항일 투쟁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1918년 5월 13일 최초의 한인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을 창당하고 위원장에 취임하였다. 한인사회당은 기관지 발행, 군사학교 설립, 일본군 병사들을 상대로 한 반제반전(反帝反戰) 선전, 한인적위대 조직 등을 추진하였다. 1918년 6월 13일부터 23일까지 단체와 지역 대표 142명이 참가하여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개최된 제2회 특별전로한족대표회의에서 최재형과 함께 명예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체코군 봉기(1918년 6월)와 곧 이은 일본 · 미국 · 영국 · 프랑스 등 연합국의 무력 개입으로 백위파 정권이 들어서게 되자 100여 명으로 구성된 한인적위대는 전일과 유동열의 지휘 하에 러시아 적위파군과 함께 우수리전투에 참가하였다. 백위파군과 싸워 반수 이상의 희생자를 냈지만, 국권 상실 후 우리가 전개한 최초의 한인무장투쟁이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1918년 8월 초 미국 · 일본 · 영국 · 프랑스 등 간섭군의 개입으로 시베리아와 러시아 원동 지역의 볼셰비키 정권이 붕괴되고, 간섭군의 지원을 받은 백위파 정권들이 들어서자, 한인사회당은 불법화되었으며 이동휘 역시 북만주의 오지로 도피하였다.
3 · 1운동 당시 이른바 민족대표들과 임시정부는 미국 등 서구 열강과 파리강화회의에 큰 희망을 걸고 독립이 가까운 시기에 달성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이 결과 국내외에서 여러 임시정부가 조직, 발표되었다. 그는 이들 여러 임시정부에서 손병희, 이승만과 함께 정부 수반으로 선임되거나(경성독립단 정부 조직 안의 집정관, 신한민국정부 집정관), 행정수반(한성정부 국무총리총재), 또는 군무 책임자(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총장, 대한국민의회 선전부장)로 선임되었으나, 어느 직책도 수락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한인사회당 위원장에 충실하겠다는 결의에 따른 것이다. 한인사회당 인사들은 3 · 1운동의 ‘민족 대표들’과 임시정부 조직자들을 비판하였다. 이는 일본과 연합하여 러시아 혁명에 개입하여 러시아 백위파를 지원하고 있던 미국 등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본질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한인사회당은 5월 초의 제2회 당대회에서 김규면(金圭冕)이 이끌던 신민단(新民團)과 통합하였고 박진순, 박애, 이한영 등 3명을 1919년 3월 초에 창립된 국제공산당(Comintern, 제3국제공산당)에 파견하기로 결의하였다. 한편, 블라디보스토크에 독립군부(獨立軍府)를 조직하고 장정 모집과 군사 훈련 등 독립군 조직에 착수하였다.
1919년 8월 30일 상하이(上海)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해주의 국민의회가 국내에서 선포된 한성정부 봉대에 합의하였고, 국민의회는 해산을 선언하였다. 한성정부의 국무총리총재에 선임되어 있었기 때문에 새로이 출범할 임시정부의 국무총리직을 맡고자 상하이로 갔다. 임시정부라는 큰 그릇에서 한인사회당의 노선을 실현시켜야 한다는 김립, 김하구 등 측근들의 주장을 받아들인 결과였다.
그러나 임시정부와 국민의회 사이에 합의 사항의 해석을 둘러싸고 ‘승인개조분쟁(承認改造紛爭)’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결국 “상하이 측과 정전(政戰)을 벌임으로써 대국을 파괴할 수 없다”며, 1919년 11월 3일 개조된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직에 취임하였다.
대한국민의회의 문창범(文昌範)과 박용만을 제외한 주요 각원들이 취임함으로써 임시정부는 지지 기반이 훨씬 확대되었고, 독립운동 최고 기관으로서의 권위도 확립되었다. 그러나 미국에 있던 대통령 이승만은 사실상의 분립 정부인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를 워싱턴에 설립하고, 종래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서 수합하던 애국금 등 미주 지역의 모든 독립운동 자금을 독점하였다.
그리하여 미주 동포로부터 자금이 끊어지면서 임시정부는 재정적 어려움과 침체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20년 중반 6명의 임시정부 차장들과 함께 대통령 이승만 불신임 운동을 전개하였지만, 안창호의 적극적인 반대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상하이의 한인사회당 간부들은 국제공산당 파견원 보이틴스키 등을 만나 동아시아에서의 공산주의 선전과 당 조직 문제를 협의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블라디보스토크로부터 보이틴스키와 함께 상하이로 온 김만겸과 함께 ‘공산주의자 그룹’을 구성하였다. 보이틴스키와의 협의에 따라 한인사회당은 국내와 일본에서의 조직 사업을 위해 파견원들을 밀파하였다.
1920년 7~8월에 개최된 국제공산당 제2차 대회에 한인사회당 대표로 참석하였던 박진순은 국제공산당 집행 위원회의 원동 책임자로 선정되었다. 아울러 당 대표 박진순과 임시정부 특사 한형권은 볼셰비키 정부로부터 200만 루블의 차관 제공을 약속받는데 성공하였으며, 1차분으로 40만 루블을 받았다.
상하이의 ‘공산주의자 그룹’은 9월 15일 여운형, 안병찬, 조동호 등을 가담시켜 한인공산당을 조직하였고 김립, 계봉우, 이한영을 당 대표로 모스크바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이한영은 베이징(北京)에서 다시 상하이로 귀환하고, 김립과 계봉우는 도중에 박진순과 한형권을 만나게 되어 모스크바행을 포기하고 치타로 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지도자들의 대립과 갈등으로 제대로 활동을 펴지 못하고 있는 동안, 일제는 3 · 1운동 이후 급속히 성장하며 식민 통치에 위협이 되고 있던 연해주 지역과 서북간도 지역의 한인 민족 운동 세력에 대한 보복에 나섰다. 1920년 4월 연해주의 러시아 혁명 세력과 한인들을 공격한 4월 참변, 그리고 10월~11월 서북간도의 동포 사회에 대해 대대적인 약탈 · 방화 · 파괴를 자행하고 수천 명의 동포를 살해한 간도참변이 바로 그것이었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서의 승리는 우리 독립군이 일제 침략군을 상대로 얻어낸 쾌거였다. 그러나 일제 침략군에 의하여 활동 근거를 파괴당하고 국내 진공을 위해 축적했던 총탄 등을 소진하고 지친 독립군 부대들은 볼셰비키 세력이 장악하고 있던 ‘혁명적 자유지’ 흑룡주(아무르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간도참변은 임시정부가 일제 침략군의 만행으로부터 만주의 동포들을 보호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내외의 격렬한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이와 동시에 만주, 러시아로부터 온 인사들이 중심이 된 급진론자들과 안창호로 대표되는 실력준비론자들 간에 독립운동의 방략을 둘러싼 노선 논쟁이 촉발되었다. 대통령 이승만의 상하이 도착 역시 임시정부 내외의 ‘명쟁암투(明爭闇鬪)’를 격화시켰다. 급진론의 득세와 모스크바 자금을 배경으로 임시정부의 전면적인 개혁을 추진하였다.
1921년 1월 초에 개최된 국무원 회의에서 이승만에게 위임 청원 문제에 대한 해명 및 대통령제의 폐지와 혁명 위원회의 성격을 띤 국무위원제의 채용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의 완강한 반대와 다른 각원들의 반대로 임시정부 개혁안이 좌절되자, 1921년 1월 24일 임시정부를 탈퇴하였다. 이어 남형우, 김규식, 유동렬, 안창호 등 각료들이 연속 사퇴하게 되면서, ‘통합’ 임시정부는 이제 하나의 독립운동단체로 전락했다.
임시정부 탈퇴 후 광둥(廣東)으로 내려가 오성묵을 통역으로 호법정부(護法政府) 수반 쑨원(孫文)과 군무총장 천중밍(陣炯明)을 만나 한중(韓中) 간의 협력 방안을 논의하였다.
1919년 말에서 1921년 초까지 가장 큰 변화 가운데 하나는 국내외 각지에서 한인공산당 조직들이 우후죽순처럼 출현한 것이었다. 이는 1919년 말 이후 시베리아 내전에서 백위파를 몰락시킨 볼셰비키 세력의 승리가 확실해지면서 볼셰비키 정부에 대한 기대가 커지고 있던 사정을 반영한 것이다. 아울러 3 · 1운동 당시 파리강화회의와 미국 등 서구 열강에 걸었던 지나친 기대가 실망과 배신감으로 바뀐 결과이기도 했다.
이들 공산 단체들을 지도할 중앙기관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두 세력이 각축전을 벌이게 되었다. 이동휘의 한인사회당과 이르쿠츠크에서 새로이 부상한 신흥 한인 공산 세력이 바로 그들인데 후일 각각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로 불리게 된다.
상해파는 한인 민족운동의 전통과 경험에 뿌리를 두고, 민족혁명을 1차적 과제로 한 연속적인 2단계 혁명 노선을 취하였으며 독자적인 한인 공산당 조직의 건설을 지향하였다. 반면 이르쿠츠크파는 즉각적인 사회주의 혁명을 목표로 한 1단계 혁명 노선을 채택하였고, 러시아 공산당에 가입한 인물들이 주축이 되었기 때문에 볼셰비키의 지휘와 감독을 당연시하였다. 민족운동 기반이 취약한 이르쿠츠크파는 임시정부와 대립 관계에 있던 국민의회 세력과 연합하였다.
1921년 상반기 이들 두 세력은 명실상부한 전한공산당(全韓共産黨)의 지위와 만주, 연해주로부터 흑룡주의 자유시에 집결해 있던 독립군 부대들에 대한 지휘권을 둘러싸고 각축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국제공산당(코민테른) 동양비서부장 슈먀츠키(Boris Shumiatsky)는 당 대회를 준비하고 있던 한인사회당(상해파)의 당, 군 간부들을 체포하는 등 이르쿠츠크파와 국민의회 연합 세력을 일방적으로 후원하였다.
결국 이르쿠츠크파는 1921년 5월 단독으로 당 대회를 개최하여 고려공산당을 창당하였고, 한인사회당 세력 역시 상하이에서 별도의 고려공산당을 창당하였다. 마침내 이르쿠츠크파를 지원하던 러시아 군이 1921년 6월 28일 자유시(러시아 아무르주 스바보드니)에 집결하고 있던 상해파 계열의 사할린의용대 등 독립군 부대에 대한 무장 해제를 감행하여 수백 명의 독립군을 살상함으로써, 독립운동 사상 최악의 비극적 사건인 자유시 참변이 발생하였다.
상하이의 고려공산당 대회에서 박진순, 홍도와 함께 모스크바 파견 대표로 선정되었다. 이들은 동양비서부장 슈먀츠키와 이르쿠츠크파가 상해파 인사들에 대한 체포와 탄압을 자행하고 있던 시베리아를 경유할 수 없었다. 대신에 이들은 1921년 6월 19일 상하이를 떠나 인도양, 수에즈 운하, 지중해, 알프스 산맥, 독일을 거쳐 4개월 만인 10월 말 레닌그라드에 도착하였다.
이들 고려공산당 대표들은 국제공산당 간부들을 비롯한 볼셰비키 지도자들을 면담하고 자유시 참변을 비롯해 슈먀츠키와 이르쿠츠크파의 불법적 활동과 전횡을 설명하였다. 고려공산당 대표단의 설명에 대해 국제공산당 집행위원회 검사위원회는 상해, 이르쿠츠크 양파의 주장을 검토하고 11월 15일 자로 결정서를 발표하였는데, 상해파 대표단의 의견이 크게 반영되었다. 이 결정서에 따라 이르쿠츠크 군 감옥에 갇혀 있던 상해파 당 간부들과 자유시 참변 당시 체포된 장교와 병사 80여 명이 석방되었다.
고려공산당 연합 간부의 자격으로 11월 28일 레닌을 만난 일화는 그가 레닌 서거 1주년을 맞아 쓴 두 글, 즉 『선봉』(1925년 1월 21일)에 기고한 『레닌동무의 서거 제1주년을 추회하면서』와 『동아일보』(1925년 1월 22일)에 기고한 글 『동아일보를 통하야 사랑하는 내지동포에게(5)』에 나타나 있다.
또한 당시 통역을 맡았던 김아파나시(김성우)가 『찌허오케안스카야 즈베즈다(태평양의 별)』 신문(1929년 1월 22일)에 기고한 『나의 일리치와의 만남』에 잘 묘사되어 있다. 이 글들을 기고할 당시의 직책은 변강 당위원회 소수 민족부 소속의 도서관 주임이었다. 도서관은 ‘조선해외동포위문회’에서 보내온 서적들을 접수하여 시작한 사업이었다.
1921년 12월 고려공산당 연합 중앙 간부의 자격으로 홍도와 함께 이르쿠츠크로 가서, 국제공산당 동양비서부 당국자들과 파쟁의 중단과 연합을 위한 실질적인 조치에 합의하였다. 이와 함께 당시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극동노력자대회)에 참여할 조선대표단의 집행위 간부들과도 회합을 갖고 국민대표회 준비위원회 구성안에 합의하였다.
즉 국민대표회 준비위원회는 조선 혁명을 5개 민족 그룹인 조선대표단, 고려공산당 중앙위원회, 상해의 국민대표회 준비회,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민의회의 대표 20인으로 구성하기로 한 것이다.
이러한 합의에도 불구하고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원동민족혁명단체 대표회(1922년 1월 21일 ~ 2월 1일)에서 슈먀츠키와 김규식, 한명세가 이끌던 조선대표단 집행위가 이동휘의 대리인으로 대회에 참여하려던 박진순의 대회 참여를 저지하고 탄압하는 등 상해파를 철저히 배제하였고, 대회를 배타적으로 자파 위주로 진행하였다.
모스크바로 귀환하자 슈먀츠키와 조선대표단의 파당적 행위를 알게 되어 대회 선언서에 대한 서명을 거부하였으며, 이르쿠츠크에서의 모든 합의 사항을 백지화하였다.
결국 상해와 이르쿠츠크 양파의 연합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베르흐네-우진스크에서의 고려공산당 연합 대회(1922년 10월 19일 ~ 10월 28일)가 실패로 돌아갔으며, 이어 상하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1923.1~6) 역시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가 창조파, 개조파로 각각 분열되었던 것이다. 결국 윤해, 원세훈 등 국민의회 계열 인사가 중심이 된 창조파가 한형권이 가져온 모스크바 자금의 잔금 20만 루블을 배경으로 대회를 주도하였다.
창조파가 조직한 국민위원회는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겨가 국제공산당의 승인과 자금을 얻어 민족 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하려고 했으나 결국 추방되고 말았다. 국제공산당이 고려공산당 해산 후 1923년 초 조직한 꼬르뷰로(Korbureau) 내에서 창조파의 국민위원회를 지지한 국민의회파의 한명세와 대립하였다.
1923년 말 한명세를 일방적으로 지원하는 국제공산당 동양부의 정책에 반대하여 꼬르뷰로 위원을 사퇴하였고, 이어 국제공산당은 1924년 초 꼬르뷰로를 해산하고 고려공산당 창립을 목표로 한 고려공산당 창립 대표회 준비위원회(오르그뷰로, Orgbureau)를 조직했다. 이후 일선에서 물러나 ‘원동 해방 전쟁’에 참여했던 그의 추종자들이 1923년 1월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조직한 적기단(赤旗團)을 지도하였으며, 국내에서의 조선공산당 활동을 간접적으로 후원하였다.
1925년 4월 이르쿠츠크 계열의 화요파가 단독으로 조선공산당을 조직하고 대표단을 파견하여 국제공산당의 승인을 신청하자, 국제공산당이 승인 여부를 물어왔을 때, 국내에 있던 동지 김철수(金綴洙)의 의견을 받아들여 승인 의사를 보냈다. 그리하여 1926년 초 재건된 2차 조선공산당은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국내 화요파)가 연합한 것이었다.
1926년 가을 새로운 파벌로 등장한 ML파의 3차 조선공산당에 대항하여 1926년 말 서울파와 상해파 연합의 조선공산당이 성립되자, 서울 · 상해파의 대표로서 6차 국제공산당 대회에 파견되기도 했다.
1930년 당시 하바로프스크에 위치했던 변강 당위원회 소수 민족부장과 선전선동부장을 맡고 있던 김아파나시의 주선으로 원동 변강(遠東邊疆, 연해주 지역)의 모플(MOPR, 국제혁명가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모플의 목적은 혁명 운동 과정에서 희생되고 고통받는 혁명가와 그 가족들을 후원하기 위한 모금과 선전 활동에 있었다.
원동 변강 모플위원회는 그의 열성적인 활동과 공적을 인정하여, 1932년 10월 12일 하바로프스크에서 열린 원동 변강 모플 열성자 대회에서 훈장을 수여하는 등 여러 차례 표창하였다. 수청(水淸, Suchan, 현 파르티잔스크) 지방의 여러 어장들을 방문하여 모플을 위한 의연금을 모집하여 아르쫌(Artyom)탄광의 노동자들을 찾아가다가 무인지경에서 강한 눈보라를 만나 독감에 걸렸다.
아르쫌에서 고향 친구 이시협과 한국인의 집을 방문하여 한약 치료를 받았으나 위독해졌다. 아르쫌탄광에서 자동차를 구하여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의 자택으로 옮겨 신한촌 치료소와 한인 의사들이 모여 치료했으나 소생하지 못하고 1936년 1월 31일 오후 7시경 세상을 떠났다. 향년 62세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