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시골교회 전경 ⓒ복음과상황 이종연
시골집 식사기도
이 밥이 우리에게 먹혀 생명을 살리듯
우리도 세상의 밥이 되어
세상을 살리게 하소서

한 방울의 물에도 천지의 조화가 스며있고
한 톨의 곡식에도 만민의 땀이 담겨 있으니
감사한 맘으로 먹게 하시고
가난한 이웃을 기억하며
식탐 말게 하소서

꼭꼭 씹어서 공손히 삼키겠습니다.

‘시골집’의 식사기도이다. 밥 먹을 때 마다 한 톨의 밥 안에 담긴 만민의 땀을 기억하고 감사한다는 것이 우리 시대에 가능한 일일까? 누군가는 ‘그것이 과연 필요한 일인가’ 물어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힘없고 불편한 몸을 가진 이들이 (그것을 굳이 약함이라 생각지도 않고) 살아가는 시골집에서는 자신의 삶을 담아 이 기도를 드리고 있다. 임락경 목사와 함께 30명이 살아가는 시골집은 일상속에서 조용히 예수의 삶을 사는 작은 예수들의 집인 것이다.

“가끔 사람들이 식당인 줄 알고 차 몰고 들어왔다가 (다운증후군인) 봉수 보고 놀라서 차 돌려서 나가는 경우도 있다”고 말하는 시골집 이애리(47) 원장. 그렇게 시골집은 누구나 발길 돌려 들어오고 싶게 생겼다. 지금은 비가 새서 공사를 해야 할 판이지만 바깥에서 보면 멋진 돌집과, 첨탑 대신 우리식으로 교회를 짓고 싶다 하여 몇 년 전 지은 기와집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광덕3리 195번지 ‘시골집’의 시작은 이렇다. 청년 임락경이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맨발의 성자라 불리는 이현필 선생을 찾아 동광원에 들어간다. 그곳에서 고아와 결핵환자들을 돌보며 살던 그는 1966년 화천으로 군대를 오게 되었다. 마침 광덕리에 광덕교회가 세워졌고 그는 교회에서 초등부 선생을 했다. 그리고 제대 후에도 교회에 목사가 없어 1969년부터 1971년까지 평신도로서 목회를 하게 되었다.

“1980년도에 다시 광덕리로 이사를 왔다. 이사를 오게 된 것은 무슨 뜻이 있는 것이 아니다. 외상으로 땅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박계문 장로님께서 생전에 아들 하자, 양자 하자 하면서 재산 상속을 하신다고 유언을 하셨다. 하지만 나는 거부를 하였다. 그 재산 받아서 이곳에서 지금처럼 활동을 한다면 마을 분들이 싫어할 것 같았다. 저 자식 남의 재산 가지고 복지사업 한다고 했을 것이다. 아무튼 그냥 상속해 주시겠다는 재산은 받지 않고 없는 돈 빌려서 땅을 사게 되었다. …… 농사짓고 살다 보니 정신박약인 진경이가 12살 때 와서 같이 살게 되었다. 또 아주 아주 모자란 바보 태은이도 오게 되었다. 이렇게 식구가 늘다 보니 10여 명이 넘었고, 넘다 보니 집이 좁아 마을 건너편으로 집 짓고 이사 오게 되었다. 이제는 기관에서도 복지시설로 부른다.” (<촌놈 임락경의 그 시절 그 노래 그 사연>중, 임락경 지음, 삼인 펴냄)

시골집은 남들이 볼 땐 교회이기도 하면서 복지시설이다. 또한 농사지은 콩으로 된장, 간장을 만들어 팔 때 사용하는 브랜드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연스럽게 한 가족이 되어 함께 살아가게 된 이들에게 시골집은 그저 ‘우리 집’일 뿐이다. 뜻 맞는 사람들끼리 으?으? 만든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10여 명 되던 식구가 이제는 25명으로 늘었고 올봄에 분가한 정현이네와 주리 이모네 두 가정까지 합치면 31명이다. 말이 분가이지 잠만 따로 잘 뿐, 시골집에서 삼시를 같이 먹고 생활비도 함께 쓰고 일도 같이 한다.

“우리 집에 같이 살던 식구들이 이 동네에 집 한 채랑 땅을 조금씩 샀어. 이왕이면 자칭 건강한 사람이 장애인 한명씩 맡아라하고 내보내 봤는데 잘 못하고 있어. 3년 기대하고 있는데 연습기간이니까 지원을 해 줘야지.” 임락경(62) 목사의 말에서 소박한 소망과 진심이 느껴진다.

망할 교회?

▲ ‘시골집’에서는 농사 지은 콩으로 된장, 간장을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복음과상황 이종연
후에 임락경 목사 하는 말이 “버스 기사가 이 동네 견습하러 왔다가 그 날 사표내고 가더구만…”했다. 참 험하다. 광덕고개, 참 험해서 버스 기사가 혀를 내 두르고 도망갈 만큼. 포천 이동에서 그 광덕고개를 넘으면 광덕 초등학교가 나온다. 거기서 오른쪽 길로 난 개울다리를 건너 조금 더 가면 왼편에 기와집이 한 채 있으니 그곳이 시골교회이다.

임락경 목사가 시골교회 이름을 지을 때 망할 교회라고 지으려고 했단다. 장애인도 없어지고 환경오염도 없어져야 하니 장애인들과 농촌에 살고 있는 우리 교회는 부흥하면 안 되고 망해야 한다는 의미에서였다. 그러나 (남들이 자꾸 물어봐서 그냥 1981년에 교회를 시작했다고 말하는 임 목사의 말에 따라) 26년이 지난 지금 시골교회의 모습은 오히려 든든하기만 하다.

몇 년 전 새로 지은 시골교회는 지붕에 기와를 얹고 처마 끝에는 풍경을 달아 비오면 낙숫물 소리, 바람 불면 풍경 소리가 퍼져 나간다. 십자가 첨탑도, 교회간판도 없는 모양이 예배당 같지 않아서 이곳 사람들이 즐겨 부르는 시골집이란 말이 더 어울린다.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박경미 교수는 “지금의 기독교는 예수를 기념하는 종교지, 예수를 ‘사는’ 종교가 아니”라고 말했다. 예수의 모습을 닮은 교회가 드문 이유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를 ‘사는’ 사람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시골집에 도착해 첫 식사를 하며 예수를 사는 이들의 이야기를 마음에 그려 보았다.

아침 6시 30분, 식사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면 모두 시골집 식당으로 모인다. 아침은 늘 죽을 먹는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지만 든든하면서도 가볍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어 좋다. 8시 30분에는 함께 다과를 나누며 일과를 계획한다. 오늘은 김매기, 내일은 고추 따기 식이다. 함께 할 일도 있지만 각자 알아서 해야 할 잔손이 가는 일들도 있다. 저녁 식사를 하고 나면 하루 일과는 끝이다. 그 이후 시간은 자유인데 대부분 9시가 넘으면 잠자리에 든다. 시골집에 오면 몸이 건강해 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습관도 큰 몫을 하는 것 같다.

힘이 없어 바깥일을 못하시는 할머니들은 몸이 불편한 식구들의 대소변을 가려주거나 소일거리를 맡기도 한다. 장애를 가진 식구들은 아무 일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을 도움으로 인해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는 것만으로 그들은 시골집의 보물들이다. 물론 이들도 불편한 정도에 따라 서로 도와가며 함께 일을 한다.

이렇게 단순한 일과 외에, 따로 지켜야 할 규칙이나 공동체 식구가 되기 위한 기준 등이 시골집에는 없다. 그들 스스로 특별한 공동체라고 생각하지도 않을뿐더러 그저 없는 사람은 기대 살고 있는 사람은 나눠 주며 산다. 지향하는 공동체의 모습이 있지만 강요하지 않는 것이다. 기대하는 것들을 알아주길 바라면서도 먼저 나누고 사랑하는 것. 내가 좀 더 손해 보는 것. 그것이 시골집의 오늘을 살아가는 힘인 동시에 시골집을 찾는 이들에게 주는 가르침이 아닐까.

점심을 먹고 집 뒤에 있는 밭으로 김을 매러 갔다. 시골집에서 짓는 곡식 종류는 고구마, 땅콩, 고추, 녹두 등 32가지나 되고 내년부터는 벼농사도 지을 계획이다. 앞마당에는 닭과 오리, 돼지도 키우고 있다. 고구마와 땅콩 밭의 김을 매고 옥수수를 따고 있으니 ‘딩딩딩’ 종소리가 들린다. 저녁 먹을 시간이다.

시골이라 저녁만 먹으면 주변이 어둑어둑 해지고 금세 천지가 잠자듯 조용해진다. 서울은 지금쯤 시내 중심부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는 시간일 터이다.

나도 왕년에는 육상선수!

▲ ‘엄마 신발은 어디에’에 참가한 정현이네 엄마도 아이들과 한데 어울려 뛰고 응원을 하면서 운동회 기분을 냈다. ⓒ복음과상황 이종연
오늘은 광덕초등학교 운동회 날! 시골집에서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모두 4명이다. 어제 저녁부터 정현(11), 정환(9)과 하경(11), 예경(10)이가 잔뜩 부푼 마음으로 오늘을 기다려서인지 하늘도 쾌청하다. 시골집에서도 오늘은 일을 하는 대신 운동회에 가기로 했다. 몸이 불편해 집에만 있던 은비(14)도 동생인 하경이와 예경이를 보러 아빠를 따라 나서고 봉수씨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학교로 간다.

전교생이 50명도 안 되는 시골 분교이지만 만국기가 하늘을 장식하고 시골집 식구들이 운동장 한 쪽을 차지하고 앉으니 제법 운동회 분위기가 난다. 부모님을 위한 순서 ‘나도 왕년에는 육상선수’대회에 은비네 엄마가 참가해서 1등을 했다. 오랜만에 뛰어서 힘들다면서도 연신 즐거워하는 엄마를 보며 아이들도 즐겁다. ‘엄마 신발은 어디에’에 참가한 정현이네 엄마도 아이들과 한데 어울려 뛰고 응원을 하면서 운동회 기분을 냈다.

운동회가 끝나고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 비도 아이들을 위해 저녁까지 기다려 준 것은 아닐까.

사는 이야기, 삶은 이야기

▲ 시골집 이애리 원장 ⓒ복음과상황 이종연
서른 명 넘는 식구들과 같이 지내려면 생활비도 만만치 않을 것 같다. “한 달에 생활비가 800만 원 정도야. 옷 사거나 먹는 건 거의 없고 대부분 공과금이지 뭐. 한 달 시작할 때 대책 없이 시작해도 그냥 살아지데”라고 태평하게 말하는 이애리 원장.

정말 그가 대책이 없는 건 아니다. 손수 농사지은 콩으로 ‘시골집’ 된장과 간장을 만들어 팔아 그 돈으로 기와집도 지었다. 다만 더 많은 이익을 내려고 하지 않는 이유는 “돈으로 하는 짓은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돈 많이 벌려고 했으면 된장도 더 많이 만들고 지금도 엄청 바쁘겠지. 그런데 일용할 양식만 있으면 살아. 내려놓으면 채워지는 거고.” 그래서인지 시골집은 그 흔한 홈페이지 하나 없다. 먼저 맛 본 사람들이 알음알음으로 주위에 소개해 단골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봉수(36)씨가 조심스레 다가와서 손을 내민다. 악수를 하자는 줄 알고 손을 내밀자 잡은 손을 위로 올리더니 나를 한 바퀴 휙 돌린다. 봉수씨는 요즘 노래 배우는 재미에도 흠뻑 빠져 있다. 하경이(11)가 풍금을 쳐줄라치면 바로 달려와 함께 노래를 부른다.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여름엔 여름엔 파랄거예요 산도 들도 나무도 파란 잎으로…” 그는 그렇게 춤추는 것도 좋아하고 노래도 음정, 박자 조금씩 틀리지만 그만의 스타일로 멋들어지게 부를 줄 아는 시골집 스타이다.

광일 삼촌은 5년 전 우연히 라디오에서 시골집 이야기를 듣고 이곳에 왔다. 그때 일은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다면서도 묵묵히 퇴비로 쓸 톱밥을 켜 담아 뒷간으로 가져가는 그의 익숙함을 보니 굳이 지난 이야기를 말하지 않아도 그의 삶이 이미 하나의 이야기가 된 듯하다.

▲ 묵묵히 퇴비로 쓸 톱밥을 켜 담아 뒷간으로 가져가는 그의 익숙함을 보니 굳이 지난 이야기를 말하지 않아도 그의 삶이 이미 하나의 이야기가 된 듯하다. ⓒ복음과상황 이종연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오후. 광일 삼촌이 잔뜩 화가 났다. 까려고 물에 담가둔 마늘이 없어진 것이다. 또 서울 할머니(67, 원래 이름은 이금빈인데 이곳에서는 서울 할머니라고 부른다) 짓이 틀림없다. 할머니는 뭐든지 몰래 감추고 모른척하기가 일쑤이다. 낮잠을 자던 할머니를 깨워 마늘을 어디에 감췄냐고 묻자 처음엔 시치미를 떼면서 모른다고 하신다. 광일 삼촌이 다그치자 할머니가 비닐하우스로 쭈뼛거리며 가더니 구석에서 마늘이 담긴 빨간 망을 슬쩍 꺼내셨다. 나중에 얘길 들으니 할머니는 1년에 한번 올까 말까한 아들에게 주려고 뭐든 감춰두신단다.

▲ 서울할머니(왼쪽)가 1년에 한번 올까말까한 아들에게 주려고 숨겨두었던 마늘을 광일 삼촌의 성화에 못 이겨 꺼내 놓고 물끄러미 서 있다. ⓒ복음과상황 이종연
우행 아저씨는 변산공동체에서 지내다가 시골집에 온 지는 이제 1년이 되어간다. 아저씨는 밥 먹을 때 마다 꼭 무릎을 꿇고 식사를 한다. “밥을 쉽게 먹는 게 아니니까 나도 그냥 꿇어 앉아 먹는 거요. 혼자 힘으로는 밥을 못 먹고, 가끔은 살아 있는 생명을 죽여 먹기도 하니…, 그리고 이렇게 허리를 펴고 앉아 먹으면 꼬리뼈도 펴지고 좋지요.” 그렇게 앉아 식사를 한지 몇 년 쯤 됐다며 아저씨는 대수롭지 않은 듯 말하지만 식당 한쪽 벽에 붙어있는 시골집 식사기도의 구절구절을 아저씨는 이렇게 몸으로 옮겨 살고 있었다.

글 사진 이종연 기자 limpid@newsnjoy.or.kr

“공동체란 그런 거야”
시골교회 임락경 목사 인터뷰

▲ 시골교회 임락경 목사 ⓒ복음과상황 이종연
그 자신은 한번도 ‘공동체’라고 말하지 않지만 공동체로 살려는 사람들은 자주 임락경 목사를 찾곤 한다. 기자가 취재를 갔을 때도 의정부에서 목회를 하는 부부가 공동체를 만들고 싶다며 임 목사를 찾아왔다. 임 목사는 한국에서는 공동체가 안 된다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공동체 안돼. 선진국에서는 학비, 병원비, 노후 생활비를 국가에서 챙겨주니까 공동체 하면 돼. 한국에서는 그거 챙기느라 못하는 거야. 그래도 희망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한텐 뭐라고 하냐면 ‘살다 보면 전 재산을 들여서 고쳐야 할 병이 올 때가 있다. 그 때 돈 다 모아서 그 병 고칠거냐’고 물으면 대답을 못해. 그런데도 공동체 한다는 사람 보면 머리가 숙여져. (잠시 말이 없다가) 일단 공동체는 해야 돼. 누구라도 해야 돼. 근데 해 보면 참 어려워.”

여기 사는 분들은 주로 어떤 사연으로 오나
서른 명 설명을 서른 번 해야 돼. 다 달라. 그러면서도 다 같아. 한마디로, 가족이 있는데 집에 있으면 천대받고 정부에서 혜택 못 받는 사람이 와요. 아무것도 없으면 정부 혜택을 받는데 아무것도 있어.

공동체를 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규모가 적당할까
법인 아니고서는 식구 얼마 되는지 물어볼 필요가 없어. 이렇게 (공동체로) 사는 사람들은 거의 30명 내외야. 능력이 거기까지야. 많으면 지들끼리 싸우고 적으면 또 보충되고. 다섯 명을 뺐더니 다섯 명이 그날 들어와.

공동체를 하려면 농사를 지어야 하나
그럼.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 즉, 농사는 천하의 으뜸가는 근본이야. 농사는 기본이고 다른 걸 부업으로 삼아야 하는 거야. 농사는 잃지 말아야 해. 복 복(福)자나 가멸 부(富)자를 봐도 전부 밭 전(田)자가 들어가 있지. 토지를 놓치면 안 돼.

농부 입장에서 FTA는 어떻게 생각하나?
유기농만 하면 괜찮아. 수입 농산물은 방사선을 쏘거든. 그게 유기농이더라도 60억조의 미세한 화살로 쏴 버리는 거야. 그 곡식은 썩질 않아. 그걸 우리가 먹는다는 거지. 유기 농산물로 암 치료 할 수 있어? 아토피, 관절염 그거 못 고치거든. 유기농만 하고 있으면 FTA 아무 상관없어.

여기저기 초대 받으시는 곳이 많은데 오가는 길에 주로 뭘 생각하나
‘집 우(宇) 집 주(宙) 넓을 홍(弘) 거칠 황(荒)’인데 우주(宇宙)가 넓고 거칠거든. 그 우주를 집 삼는 사람은 감각이 예민해져. 그러면 다른 사람보다 먼저 알아. 느낌이 빨리 온다고. 풍수를 알게 된다는 거지. 바람과 물에 대한 감각을 느끼는 거야. 그걸 좀 일찍 터득을 했어. 땅 속에 물이 어디로 지나가는지 알아. 그런 거 보려면 차타서 책 볼 겨를이 없어. 겨울에 눈 와서 땅이 얼어도 이 코너 돌면 얼음이니까 조심해야겠다 싶어 천천히 운전하는 거지.

오래 사실 것 같다 (웃음)
날 일(日) 달 월(月) 찰 영(盈) 기울 측(?) 이거든. 달도 차면 기울게 되어 있듯이 사람은 언제라도 기울게 돼 있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죄가 천기누설죄거든. 내가 몇 사람에게 온천 나오는 자릴 알려줬어. 그 천기를 누설해서 나는 오래 못 살아.

인터뷰가 끝나갈 즈음 임 목사는 인터뷰 시작할 때 했던 말이 떠올랐는지 문득 다시 공동체 얘길 꺼냈다.

“살다가 생활력이 부족해지잖아. 그럼 공동체 가면 생활 해결돼. 왜냐. 전깃불 혼자 있어도 하나 켜야 하고 네 명 있어도 하나 켜야 하잖아. 방 안 온도는 혼자 있으면 18도 올려야 하고 일곱 있으면 17도만 올려도 돼. 농기구? 집집마다 트랙터 한 대씩 사는데 공동체로 살면 한 대만 있어도 되잖아. 공동체란 그런 거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