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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니즘과 중세시대의 윤리사상 색인
헬레니즘<Hellenism>
그리스 인을 의미하는 헬렌(Hellen)이라는 그리스 어에서 유래한 말이다. 알렉산더 대왕(B.C. 336∼323)으로부터 아우구스티누스(B.C. 31∼A.D. 14)에 이르는 그리스 문명 시대를 가리키는데, 넓은 뜻으로는 B.C. 5∼4 세기의 소위 고전적 고대 그리스 문화에 대하여 그 이후의 그리스 문화를 가리킨다.
그리스 문화라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그리스 문화의 동방화, 동방 문화의 그리스화라는 풍조가 나타나, 특히 동방의 종교가 문화의 전 영역에 걸쳐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마이어(Meyer, E.)에 의하면, 헬레니즘의 문화는 될 수 있는 한 민족의 특성이나 특수한 생활 태도를 무시하고, 그 대신 아름다운 교양을 지닌 민족적 차별이 없는 인류를 이상으로 하였다고 한다. 교양은 그리스 민족의 교양을 기초로 하여 나타났으나 그 민족적 특성을 벗어던지고, 전인류의 문화가 되려고 했던 것이다. 이런 경향이 종교로 이첩되어 기독교와 이슬람 종교에 전해졌다.
또 이 시기에 있어서의 철학은 재빨리 스토아 학파, 에피쿠로스 학파, 희의학파 등으로 나타났다. 그 공통점은 안심입명을 원하는 개인주의적 태도였으며, 외부에서 오는 장해에 극도로 민감했고 자기의 내면에 파묻혀 욕망을 최소한도로 줄이려 하였다. 물과 빵만 있으면 제우스 신과 부귀를 다툴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러한 면에서 에피쿠로스는 전형적인 현자였다. 그런데 이 개인주의적 경향은 헬레니즘의 소극적인 일면을 나타내는 것으로, 폴리스의 조직이 붕괴된 이후 생활의 근거를 잃은 그리스 인에게는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유대교와 그리스 철학의 혼합인 필론(Philon)의 철학과 동방의 신비적인 종교 요소를 띤 신플라톤주의 등의 절충적 색채가 농후한 철학이 나타나기도 했다. (학원사, 철학 대사전, pp.1233∼1236)
고전(古典) 그리스의 뒤를 잇는, 세계사상 한 시대를 규정짓는 개념. 이같은 의미로 헬레니즘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것은 1863년 독일의 드로이젠이 그의 저서 《헬레니즘사(史)》에서 쓰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이 말은 그리스문화, 그리스정신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다. 이 시대의 특징에 관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리스문화의 확대˙발전으로 보는 견해, 반대로 오리엔트문화를 통한 그리스문화의 퇴폐로 보는 등의 견해도 있으나, 그리스문화와 오리엔트문화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 질적 변화를 일으키면서 새로 태어난 문화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시대범위]헬레니즘 시대의 범위에 관해서도 여러 설이 있다. 먼저 그 시작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시아 원정 출발(BC 334)에 두는 설, 페르시아를 멸망시킨 해(BC 330)에 두는 설, 대왕의 죽음(BC 323)에 두는 설 등이 있다. 그 종말도 극단적인 경우는 마호메트의 출현까지로 보는 설이 있다. 그 밖에 로마 제정기(帝政期)를 문화적으로는 헬레니즘시대로 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BC 330년 알렉산드로스의 페르시아제국 정복에서 BC 30년의 로마가 이집트를 병합하기까지의 300년간이 그 시대범위로 간주된다. 지역적 범위는 마케도니아˙그리스에서부터 대왕의 정복지 전역(인더스 유역˙박트리아˙메소포타미아˙소아시아˙이집트)까지이며, 서방의 로마도 문화적으로는 헬레니즘 문화권에 든다고 생각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로마는 포함시키지 않는 것이 관례이다.
[역사]알렉산드로스 대왕은 페르시아 제국을 멸망시킨 뒤 다시 동방으로 진군하였으나, 인더스강 유역에서 군대를 돌려 바빌론으로 돌아왔다(BC 324). 그러나 그 다음해 대왕이 갑자기 병사하자, 디아도코이(遺將)들은 서로 싸운 끝에 대왕이 남긴 영토를 분할하였다. 입소스전투(BC 301), 쿠르페디온전투(BC 281) 등을 거쳐 디아도코이의 세력 범위는 대개 결정되었다. 카산드로스(훗날의 안티고노스)왕조가 지배하는 마케도니아, 셀레우코스왕조가 지배하는 시리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지배하는 이집트의 3헬레니즘 왕국으로 분열하였으나 결국 로마에 합병되었다. 그리스 본토는 아이톨리아동맹˙아카이아동맹이라는 두 도시동맹을 만들어 독립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문화의 중심으로서 아테네가, 상업의 중심지로 코린토스가, 그리고 에게해(海)의 섬 가운데서는 델로스섬과 로도스섬이 노예매매의 중개 무역지로서 번영한 것 외에는 쇠퇴 일로를 걸었다. 그리고 최후에는 역시 로마령(領)이 되었다.
[사회경제] 헬레니즘 제왕국(諸王國) 가운데 마케도니아는 국력이 가장 약하였으나, 시리아˙이집트에는 오리엔트풍의 강력한 군주국가가 성립되었다. 이집트는 지리적 조건이 좋고 물산(物産)도 풍부하여 헬레니즘 왕국 중에서 가장 강력한 전제지배가 확립되었다. 전국토의 소유권은 원칙적으로 국왕에게만 소속되었다. 신하에게 주는 사여지(賜與地), 병사에게 주는 봉토(封土), 신전령(神殿領) 등이 있었으나 이것도 점유권이 주어져 있을 뿐, 왕은 언제라도 이를 회수할 수가 있었다. 왕의 부(富)를 늘리기 위해서는 개간(開墾)이 필요했는데, 유력한 신하에게 토지를 주어 개간시키고 개간이 되면 다시 몰수한 실례도 알려져 있다. 농경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왕료지(王料地)는 ‘왕의 농민’이라고 불리는, 이동의 자유가 없는 농노적(農奴的) 소작인이 경작하였다. 상공업과 그 밖의 모든 산업경제는 왕 한 사람의 부를 위해 강력하게 통제되어 제유식물(製油植物)의 재배, 착유(搾油)와 맥주양조˙제염(製鹽)˙제지(製紙) 등 거의 모든 산업은 전매제였다. 광업˙은행 등도 모두 왕이 독점하고 수입은 엄격하게 제한하였으며, 수출은 국내 소비를 채우고 남은 것만 사인(私人)이 행하였다. 이집트에는 알렉산드리아˙나우크라티스˙프톨레마이오스 등 그리스풍의 폴리스가 셋 있었다. 이 중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의 수도이기도 한 알렉산드리아는 상업항으로서 번영하였고, 또한 무세이온˙대도서관 등이 있는 그리스적 학예의 중심지로, ‘없는 것은 눈[雪]뿐’이라고 할만큼 번영을 누렸다. 프톨레마이오스왕조는 수족이나 다름없는 관료군(官僚群)이 이집트를 강력하게 지배하였는데, 고래(古來)의 토착종교와 왕가의 극단적인 근친결혼과 같은 풍속˙습관 등을 그대로 유지하고, 이집트 토착민과의 마찰을 피하여 현명하게 통치하였다. 신전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감독하였으나, 토착민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신관(神官)의 힘은 마침내 강력해져 프톨레마이오스왕조의 말기 왕권을 위협하였다. 그러나 헬레니즘 왕국 중에서는 가장 오랜 왕국으로, BC 30년 로마에 합병될 때까지 존속되었다. 셀레우코스왕조가 지배한 시리아에서도 오리엔트적인 전제군주국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그 지배영역은 헬레니즘 왕국 중 가장 광대하여 호족(豪族)과 어떤 종류의 자치권을 가진 민족(유대인 등), 영내(領內)에 많이 만들어져 있는 그리스풍의 폴리스 등 정치적으로 이질적인 요소가 많아 지극히 복잡하였다. 자료가 부족하여 상세한 점은 분명치 않으나, 이곳에서도 전국토가 원칙적으로 왕의 소유였다. 그리고 왕유지(王有地)는 ‘왕의 백성’이라고 불리는 농노적 농민이 경작하였다. 국토가 광대하고 정치적으로 복잡하였기 때문에 왕의 지배력이 고루 미치지 못하는 곳이 있어 멀리 파르티아˙박트리아와 서쪽의 페르가몬 등이 독립하였고, BC 64년에는 로마에 합병되어 그 속주가 되었다. 마케도니아에 관해서는 자료가 없어 그 정치˙경제 등의 상세한 내용이 알려져 있지 않으나, 로마와 싸워 패하여 BC 168년 로마령이 되고, BC 146년에는 그리스와 함께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문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정복한 각지에 만든 새로운 폴리스와, 그 뒤 셀레우코스왕들이 영내(領內)에 많이 만든 새로운 폴리스가 중심이 되어, 그리스문화는 오리엔트의 오지(奧地)에까지 침투하였다. 그리고 헬레니즘 세계에서는 간소화한 그리스어가 공통어(코이네)로서 사용되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오리엔트적인 전제군주풍의 의례를 채용하고, 페르시아 왕녀와의 결혼, 페르시아 귀족을 친위대로 채용하는 등 이민족 통치의 수단으로서 그리스문화와 오리엔트문화의 결합을 시도하였다. 그래서 전대(前代)와는 다른 새로운 헬레니즘문화가 탄생하였다. 이로써 그리스인이 이민족을 야만시한 관념이 희박해지고 세계시민주의가 역설되었다. 그러나 한편 폴리스의 강력한 지배가 사라져가고 있었기 때문에, 개인의 안심입명(安心立命)을 꾀하는 개인주의적인 철학의 제파(諸派)가 출현하였다. 제논이 시작한 스토아학파, 에피쿠로스의 에피쿠로스학파, 디오게네스의 키니코스학파, 아리스티포스의 키레네학파 등이 모두 이 시대의 철학파이다. 이 시대의 조각은 매우 훌륭하나, 전시대의 특징인 이상화는 약화되고 보다 사실적˙육감적으로 되었으며, 육체의 운동과 정신의 격동 등을 나타내기를 좋아하였다. 《라오콘》 《밀로의 비너스》 《사모트라케의 니케》 등은 모두 이 시대를 대표하는 조각들이다. 이 시대의 학예 중심지는 알렉산드리아˙아테네˙페르가몬 등이었는데, 특히 문헌학˙자연과학 등이 발달하고, 창조적인 문학 등은 오히려 쇠퇴하였다. 일반적으로 이 시대에는 그리스문화의 창조성이 점차 사라져가고 있었다.(두산동아대백과 사전) <닫기>
스토아학파<Stoicism>
키니크(Kynik) 학파를 계승하고 헤라클레이토스(Heracleitos)의 로고스(logos)설을 발전시킨 학파이다. 창립자는 제논(Zenon ho Kypros)이고 아테네의 스토아 포이키레에서 강의를 한 데서 이렇게 불리었다. 로마에까지 이어져 로마 제정 시대의 재상 세네카,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우스 등의 인물도 포함된다. 이들은 특히 도덕 방면에 새로운 면을 열어 후세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학설은 학도 사이에 이설이 있지만 대체로 논리·자연학·윤리의 셋으로 학문을 나누어서 특히 윤리를 가장 존중하고 전자를 논의하는 것도 인간의 문제를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들에 의하면 우주는 기식(氣息, pneuma)인 일종의 로고스적인 화기로 되어 있다. 이것은 가장 근본적인 물질이고 자기 자신에 증감은 없고 모든 것은 여기에서 나와서 여기로 돌아온다. 이것은 신이라고도 불리운다. 자신의 일부를 재료로하여 스스로 로고스로서 불·기·물·땅을 만들고 그것을 혼합하여서 일체 만물을 형성한다. 기식에는 원심과 구심의 두 방향을 포함하는 긴장이 있고 이 긴장 관계에 의하여 일체의 사물은 교체 교류하여서 그 형성 유지·소멸이 이루어지지만 어떻든 만물은 동질이고 신의 각인을 지닌다. 우주는 전체로서 유기체를 이루고 필연적·결정적으로 지배된다. 그러므로 운명적이지만 동시에 섭리이기도 하다. 인간은 소우주이고 그 본질인 로고스는 우주의 본질인 로고스와 동일한 것이므로 이성에 따르는 생활은 우주에 따르는 생활이 되며 이것이 자연에 따르는 생활이고, 아파테이아(apatheia)라고 불리우는 현자의 생활이다. 이성을 지니는 이상 모든 사람은 신의 아들로서 동포이다. 여기에서 그들은 사해 동포의 세계 시민주의를 제창하였다. ※ 로고스 - 세계를 합목적적으로 지배하는 법칙. (학원사, 철학대사전, 1972, pp. 613∼614)
키프로스의 제논이 스토아 포이킬레에 창설한 철학의 한 유파. BC 3세기부터 로마 제정(帝政) 말에 이르는 후기 고대(古代)를 대표한다. 키프로스섬 태생의 개조(開祖) 제논과 그 제자로서 적빈(赤貧)과 노동으로 이름 높던 소아시아의 아소스인(人) 클레안테스, 그 제자로서 스토아파의 학설을 체계적으로 완성한 킬리키아의 항구 도시 솔로이(솔리)의 크리시포스, 스토아 학설을 로마 사람에게 받아들이기 쉬운 형태로 만든 로도스섬의 파나이티오스, 종교적 경향이 강한 오론테스강 하반(河畔)의 아파메아인 포세이도니오스, 로마황제 네로의 스승이었던 세네카, 노예였던 에픽테토스, 로마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이 파의 주요 인물들이다. 제논이 아테네의 광장에 있던 공회당 ‘채색주랑(彩色柱廊)’에서 제자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그 제자들을 ‘스토아파’(柱廊의 사람들이라는 뜻)라고 불렀다. 스토아파 철학은 이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그렇듯이 고전기(古典期) 그리스를 대표하는 여러 나라의 좋은 가문 출신 사람들의 철학이 아니라, 변경(邊境) 사람이나 이국인의 철학이었으며, 그리스 문물이 좁은 도시국가의 틀을 넘어서 널리 지중해(地中海) 연안의 여러 지방에 미친 헬레니즘 시대를 대표하는 철학이었다. 그러므로 전통적인 철학의 여러 파와 스토아파 사이의 대립은 격렬하였다. 고전기까지의 철학의 여러 학설을 수용하여 일반화 통속화한 점에서 절충주의라는 비난을 받지만, 그 기반에는 고전 철학과는 아주 이질적인 것이 있다고 생각된다. 단지 로마시대 사람들의 저작을 제외하고는 스토아파의 저작은 오늘날 거의 전해지지 않아서 연구상 어려움이 있다. 애지(愛知:철학)는 논리 부문과 윤리 부문, 자연 부문으로 나뉘나, 이들은 각각 독립된 분파가 아니라 서로 나누기 어렵게 결합되어 있어 하나의 지혜를 사랑하고 구하는 애지를 구성하는 3요소가 된다. 지혜는 ‘신의 일과 사람의 일에 관한 지식’이라고 정의되지만, 이것은 사물에 관한 관조적(觀照的) 지식이 아니라, 인간생활에서의 모든 것을 올바르게 처리하기 위한 실천적 지식이다. 지혜의 이러한 실천적 성격에 스토아파의 특징이 있으며, 이 원리에 바탕을 두어 스토아철학은 고대철학원리의 주체적인 반성철학이 되었다. 애지(愛知)는 이러한 지혜를 습득하기 위한 ‘삶의 기술(ars vivendi)’의 연습이며, 이러한 재주를 갖는 사람이 현자(賢者)인 것이다. 그리고 현자의 지혜란 ‘자연에 따라 사는 것’을 아는 지혜이다. 인간은 자연에 의하여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므로, 자기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한 ‘자연의 충동’이 부여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칠 때 병으로서의 정념(情念)이 있다. 이 정념에 흔들리지 않고 자연 그대로 살아가는 데에 ‘활달한 삶의 흐름’이 있다. 스토아파의 현자의 이상은 바로 거기에 있다. 스토익이라고 불리는 비정한 금욕주의적 심정은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현자의 유덕한 삶이란 이성을 갖춘 유한한 개개의 자연물(인간)이 자연에 의하여 부여된 그대로의 자기의 ‘운명’을 알고, 운명대로 살아감으로써 본원(本源)인 자연과 일치하는 ‘동의(同意)’의 삶이다. 따라서 그것은 자연 그 자체가 이성적 존재자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자기귀환(自己歸還)에의 활동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현자는 모든 자연물의 근원인 자연 그 자체로서의 신과 일치한 자이며 신과 같은 자, 바로 신 그것인 것이다. 스토아 철학의 특징은, 이와 같은 자연존재에서의 개별성(個別性)과 전체성(全體性)의 두 계기의 강조와 양자의 긴장 관계에 있으며, 이것에 의하여 스토아 철학은 고대철학 원리의 집성인 동시에 다음 시대의 철학원리를 준비하는 것이 되었다. 언어연구 논리학 인식론에서도 구체성과 개별성을 중요시하는 스토아 철학은 전통철학에 없었던 새로운 요소를 많이 초래하였다. (백과사전) <닫기>
스토이시즘<Stoicism>
스토아학파의 영향을 받고 나타난 정신적 태도. 특히 실천도덕에서 희열이나 비애의 감정을 억압함으로써 평정(平靜)하고 무관심한 태도로 운명을 감수하는 인생관을 말한다. ‘스토익’이라고도 한다. 스토아학파에 속한 옛 사람들의 저서는 오래 전에 산일(散逸)되었으나 세네카, 에픽테토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저서는 널리 애독되어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고대 말기나 중세에서 스토아학파의 여러 학설, 특히 내적 자유의 윤리설은 그리스도교 윤리의 형성과 수도원 생활의 이상(理想)에 영향을 미쳤다. 16, 17세기는 또한 스토아설의 재흥기(再興期)로 근대 문예사상에도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셰익스피어의 《말괄량이 길들이기》에 나오는 한 구절인 “하지만 나리, 그 미덕이라든가, 도덕의 수행이란 것이 좋기는 하지만 제발 저 스토익이니 스토크(통나무)니 하는 것은 되고 싶지 않습니다요”(제l막, 제l장 31)는 그 일단(一端)을 보여주는 구절로, 스토아파의 무감각을 비꼰 것이다. <닫기>
제논<Zenon ho Kyprios>(BC 335?~BC 263?)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스토아학파의 개조(開祖). 키프로스섬 키티온 출생. 페니키아인(人)의 혈통으로 추정된다. 30세경에 아테네로 가서, 각 학파의 여러 스승에게 배운 뒤에, 독자적인 학파를 열어 아고라(agora:집회장, 중앙 광장)에 있는 이른바 ‘채색 주랑(彩色柱廊)’이라고 불리는 공회당(公會堂)에서 철학을 강의하였다. 주랑을 스토아라 하므로 스토아학파라는 이름이 생겼다. 그의 철학은 절욕(節慾)과 견인(堅忍)을 가르치는 것이었으며, 사람이 자기 힘으로 살며, 다른 누구에게도, 어떤 일에도 빼앗기지 않는 행복을 얻는 힘을 부여하는 철학이었다. ‘자연과 일치된 삶’이 그 목표였다. 전통적인 여러 철학의 학설을 종합하여 풀이하였기 때문에 절충(折衷)의 흠은 있지만, 그 설의 근본에는 동방(東方)의 요소가 있다고 믿었으며, 이 독자성 때문에 순수한 그리스인 이외의 제자들을 많이 모아, 새로운 헬레니즘 시대를 대표하는 철학으로 발전하였다. 그의 철학은 윤리학이 중심이며, 인생의 목표인 행복은 우주를 지배하는 신(神)의 이성(理性) 즉 로고스를 따르는 일이었고, 이로써 부동심(不動心)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라고 풀이하였다. 논리학 자연학 윤리학 수사학에 대해 많은 논문을 썼으나, 현재는 인용(引用)에 의해 그 단편이 알려질 뿐이다. <닫기>
아우렐리아누스<Lucius Domitius Aurelianus>(215?~275)
로마의 황제(재위 270∼275). 병졸에서 입신출세하여 군대의 추대를 받고 황제에 즉위한 군인황제이다. 전술 군제(軍制)를 개혁하여 외적에 대비하였고, 반달족 다키아인 등을 도나우(다뉴브)강 지대에서 추방하였으며, 북방 알라만족을 토벌하고, 동방에서는 팔미라제국을 격파하여 각지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또 만족침입(蠻族侵入)에 대비하여 로마시를 주위 19`km의 성벽으로 방비하였는데 그 성벽은 현재도 남아 있다(아우렐리아누스 성벽). 또한 274년 동방의 태양신을 국가신으로 숭배하기도 하였다. 275년 페르시아 원정 중에 암살되었다. <닫기>
키닉 또는 키니코스 학파<Cynics/Kynikos學派>
소크라테스의 제자 안티스테네스가 창설한 고대 그리스 철학의 학파. 견유학파(犬儒學派) 시니시즘이라고도 한다. 이 파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의 극기적인 철학의 일면을 계승하여 덕(德)만 있으면 족하다 하여 정신적˙육체적인 단련을 중요시하였으며, 쾌락을 멀리하고 단순하고 간소한 생활을 추구하였다. 일반적으로 자족자제(自足自制), 개인의 도덕적 책임과 의지의 우월성을 존중하였으며, 권력이나 세속적인 일에 속박되지 않는 자유를 원하였고, 세계시민으로 자칭하여 헬레니즘 세계로 설교여행을 다니기도 하였다. 키니코스라고 부르게 된 것은 안티스테네스가 교편을 잡았던 학교가 아테네 교외의 키노사르게스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으나, 그보다는 시노페의 디오게네스(BC 412?∼BC 323)로 대표되는 ‘개와 같은 생활(kynicos bios)’에서 유래한 듯싶다. 가진 것이라곤 남루한 옷과 지팡이, 목에 거는 수도사의 주머니밖에 없으며, 나무통을 집으로 삼아 살아가는 거지 철학자는 스스로 ‘개와 같은 디오게네스’라고 이름하였다.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 신의 특징이며, 필요한 것이 적을수록 신에 가까운 자유로운 인간’이라는 것이 그들의 입버릇이었다. 그들은 사회적인 습관은 물론, 이론적 학문이나 예술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태도를 취한다. 옛 사람은 그들의 이러한 점을 평하여, 키니코스주의라는 것은 ‘덕에 이르는 지름길’이라고 하였다. 이 키니코스라는 말에 어원을 둔 cynical이라는 형용사는 ‘냉소적인’ ‘조롱적인’의 뜻을 가진다. 이것은 디오게네스의, 세상의 모든 질서에 대한 철저한 조소적 자세에서 유래한다. 대낮에 디오게네스는 등불을 켜 들고 ‘인간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외치면서 거리를 방황하였다고 한다. 이 학파의 생활방식은 나중에 스토아학파 등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 학파는 BC 3세기경에 융성하였고 그 이후에는 쇠퇴하였으나 로마제국이 도덕적으로 타락하였던 1세기경에 다시 융성하였다. 루키아누스(Lucianus)는 키니코스학파 사람들의 거지와 같은 생활 태도나 무교양을 비판하였다. <닫기>
자연법
단순히 관습, 입법, 기타의 제도에 의하지 않고 사회 또는 인간의 본성에 근거한 법칙 또는 규범을 말한다. 스토아 학파에서는 진정한 법은 자연과 조화된 바른 이성이며, 보펀적·영구적이라고 주장하였고, 그것은 로마의 법학과 결합하여 사회적 기초를 얻어 법의 보편적 체계를 쌓는 기준이 되었다. 중세에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 속에 중세 자연법 사상의 완성된 모습을 볼 수 있다. 즉 그는 신의 세계 지배의 하부로서 도덕의 기초·신분제의 변증, 그리고 제도의 기준을 자연법에서 구한 것이다. 그 후 종교 개혁에 의한 기독교 세계의 분열은 자연법의 세속화를 결정적으로 하였고, 법의 보편성의 회복은 '인간의 본성'에서 출발하여 법의 근원을 인간 이성과 일치하는 사회 질서에서 구하는 그로티우스(Grotius. H.)에 의하여 시도되었다. 이리하여 독일에서 전개된 자연 법학은 사회 관계를 법적으로 정서(整序)하고, 신권설에 대항하여 절대 왕정의 합리적 법률 제도를 정립하였다. 한편 절대 왕정에 대항하는 개인주의의 입장에 서는 자연법의 중점은 무엇보다도 평등한 개인의 행복 추구, 자유의 자연권에 놓여졌다. 합의에 의한 구속을 자연법으로 정립하는 사회 계약설은 17, 8 세기에 있어 시민 혁명의 이론이 되었다. (학원사, 앞의 책, p.929) <닫기>
범신론
유신론처럼 신과 자연과의 관계를 질적으로 다른 것이라 보지 않고 자연의 모든 것을 신이라 하고 그 속에서 대립을 인정하지 않는 입장을 말한다. 종교가 품고 있는 신비적 경향을 이론화하려 할 때에는 범신론의 형태를 취하는 것이다. 자연이나 세계를 보편적인 신이라는 원리로서 통일하려는 그리스 사상이나 불교와 같은 형태와, 이와는 달리 모든 것에 통하는 것이 신이라 하고, 자아와 신의 일치를 주장하는 베다(Veda)나 브라만(Brahman)의 종교와 같은 두 형태가 있다. 범신론은 한쪽에서는 일체의 모든 것에 신성이 있어 구별이 없다는 낙관적인 태도를 취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일체의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를 좋다고 하여 도덕적인 노력은 필요치 않다고 하는 비관적인 태도를 취한다.
모든 것이 신이라면 많음과의 차별이 부정되어 무세계론이 되며 선악 진위의 구별이 없어지고 가치의 실현을 지향하는 인격의 자유로운 활동도 무의미하게 되나, 주로 인간의 내면적 신비적 생활을 강조하여 스피노자, 괴테, 셸링 등의 관념론적 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다. (소광희 외, 철학의 제문제, 지학사, 1985, pp.418∼419) <닫기>
에피쿠로스학파<Epicurean school>
에피쿠로스의 학설을 신봉한 파. 에피쿠로스가 죽은 뒤 이 학파는 약 600년간 계속되었으나, 그동안 스승의 학설을 변경하거나 발전시킨 사람은 없으며, 오직 한 사람 눈에 띄는 제자로는 루크레티우스(BC 94∼BC 55?)가 있을 뿐이다. 그는 《만물의 본성에 대하여귾e rerum natura》라는 책을 써 에피쿠로스의 원자론 및 쾌락설을 상세히 논하였다. 에피쿠로스 자신의 저서는 대부분 산일(散逸)하여 겨우 단편적(斷片的)인 것밖에 남아 있지 않아 에피쿠로스의 사상은 이 책에 의해 후세에 전해진 셈이다. 그의 쾌락주의는 감각적인 쾌락을 물리치고 간소한 생활 속에서 영혼의 평화를 찾는 데 있었다. 따라서 원자론을 기초로 하는 그의 방대한 체계는 이 윤리적 생(生)의 실현을 초점으로 하였다. 그러나 이 학파는 쾌락주의라는 기치(旗幟) 때문에 많은 오해와 비난을 받아 오다가, 겨우 근세에 와서야 P.가생디가 에피쿠로스 철학을 부흥, 이것이 J.로크를 통해 영국 경험론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한편 오늘날 쾌락주의자라는 뜻으로 쓰이는 ‘에피큐리언’은 원래 ‘에피쿠로스의 무리’라는 뜻이다. <닫기>
에피쿠로스<Epikouros>(BC 342?~BC 271)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사모스섬[島] 출생. 35세 전후에 아테네에서 학원을 열었다. 그 학원은 ‘에피쿠로스 학원’이라 불렀고, 부녀자와 노예에게도 문호가 개방되었다고 한다. 제자들은 각자 형편에 맞는 기부금을 내고 학원에서 공부하고 함께 우정에 넘치는 공동생활을 영위하면서 문란하지 않은 생활(아타라쿠시아) 실현에 노력하였다. ‘에피쿠로스 철학’의 기초를 이루는 원자론(原子論)에 의하면 참된 실재(實在)는 원자(아토마)와 공허(케논)의 두 개뿐으로서, 원자는 불괴(不壞)의 궁극적 실체이고 공허는 원자가 운동하는 장소이다. 원자는 부정(不定)한 방향으로 방황운동을 하는데, 이것에 의해 원자 상호간에 충돌이 일어나서 이 세계가 생성(生成)한다. 그러므로 세계에 있는 모든 것, 즉 인간이나 신(神)들이나 모두 원자의 결합물에 지나지 않으며, 또한 인식(認識)이란 감각적 지각에 지나지 않고 물체가 방사(放射)하는 원자와 감각기관과의 접촉에 의해 성립한다.
이 자연학에 의하여 그는 죽음과 신들에 대한 공포를 인류로부터 제거하려 하였다. 죽음이란 인체를 구성하는 원자의 산일(散逸)이며, 죽음과 동시에 모든 인식(자기)도 소멸한다. 즉, 재악은 그것이 감지되는 경우에만 재악이 되나, 죽음은 그 감지하는 힘을 빼앗는 것이므로 하등 나쁜 것도 아니다. 죽음은 우리에게 무관계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현재할 때에는 죽음은 현재하지 않으며, 죽음이 현재할 때에 우리들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들도 인간과 동질의 존재이며 인간에게 무관심하다. 인생의 목적은 쾌락의 추구에 있는데, 그것은 자연적인 욕망의 충족이며, 명예욕 금전욕 음욕(淫慾)의 노예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을 폈다. 곧, '방탕자의 쾌락'이 아니라 차라리 고통과 혼란으로부터의 소극적인 해방, 말하자면 '번뇌없는 평정(平靜, ataraxia)'을 의미한다. 그는 공공생활의 잡답(雜踏)을 피하여 숨어서 사는 것, 빵과 물만 마시는 질박한 식사에 만족하는 것, 헛된 미신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 우애(友愛)를 최고의 기쁨으로 삼는 것 등이 에피쿠로스가 주장하는 쾌락주의의 골자였다. 키레네 학파도 행복, 유덕한 생활의 최고원리를 삼았지만 에피쿠로스는 특히 정신적인 '조용한 쾌락'을 가치있는 아타락시아로 삼았다. 《자연에 대하여》 등 300여 권에 이르는 저서가 있었으나 그 대부분은 산일되고 단편만이 전한다.(두산세계백과와 임석진 역, 세계철학사, 분도출판사, 1980 p.258 참조) <닫기>
키레네학파<Kyrene 學派>
고대 그리스 철학의 한 학파. 창시자는 북아프리카의 키레네에서 태어난 아리스티포스이다. 그가 소크라테스의 제자라고 하여 소(小)소크라테스학파의 하나로 꼽힌다. 이 학파의 특징은 쾌락주의로서, 쾌락을 선(善)으로 생각하고 따라서 쾌락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데 있다. 이 학파에 속하는 사람들로는 아리스티포스의 딸 아레테, 손자인 아리스티포스와 테오도로스, 헤게시아스, 안니케리스 등이 있으나, 그들이 주장하는 쾌락설은 다양하다. 창시자인 아리스티포스는 현재의 육체적인 쾌감을 쾌락이라고 하면서도 쾌락의 대부분은 불쾌를 초래하기 때문에 사려(思慮)로써 쾌락을 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테오도로스는 쾌락이란 것은 사려에 의한 즐거운 기분이라 하였고, 안니케리스는 우애나 조상에 대한 사랑, 조국애 등에서도 기쁨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하였다. 한편 헤게시아스는 불쾌를 수반하지 않는 쾌락은 없다고 생각하여 생활에 무관심한 태도를 현명한 것이라고 하였으나, 생활에 무관심할 수 없을 바에는 자살하는 편이 낫다고 주장하여 자살 권유자(페이시타나토스)라는 별명을 얻었다. 쾌락주의가 이와 같이 염세관으로 귀착한 사실은 역설적이며, 이 학파는 나중에 에피쿠로스학파에 영향을 주었다. <닫기>
교부철학<patristic philosophy>(敎父哲學)
원시 기독교가 사도 바울(Paulus)로 말미암아 체계를 갖춘 후 새로운 기독교적 철학이 발생하여 2세기경부터 7, 8세기까지 계속된다. 이를 교부철학이라 부르는데, 그 까닭은 교회에서 인정받은 철학적 교양이 풍부한 기독교 신도들이 당시 기독교에 박해를 가한 이교적 로마 제국의 압제를 받으면서도 교회를 육성하기 위하여, 또 기독교를 변호하기 위하여 노력했다는 의미에서 받은 그들의 명예스러운 존칭(敎父, patres ecclesiae)에서 유래한다.
기독교 사상이 아직도 이 시대에 넘어오기 이전 즉 사도 바울 같은 순수한 신도들만이 퍼져 있었던 시대에는, 철학은 지상의 지혜라 하여 멸시되었고, 하나님의 지혜를 계시로서 가르쳐 주는 신앙이야말로 참된 진리라 믿었던 것이다. 따라서 신도들은 그들의 신앙을 순수하게 지켜나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처럼 열렬했던 그들의 신앙심에도 동요가 일고 신앙의 진리성에 대한 인간적인 회의와 반성 그리고 사변이 움트기 시작했다. 원래 기독교적 진리는 게시로 나타난 초자연적 진리로서 인간의 이성 능력이 도달하기 힘든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이교도의 나라 로마 제국의 힘의 박해를 무자비하게 받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러는 한편 그들의 진리와 신자를 상실하지 않기 위해서 신앙의 변호에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급기야는 소위 변호서를 로마 황제에게 제출하게까지 되었다. 이것이 교부 철학의 발단이 된 것이다. 그들은 신앙의 진리를 단순히 계시를 통해서만 파악하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이성에 의해서도 파악해야 하였으며, 또 그러지 않고는 이미 변모한 시대 속에서 기독교 신앙을 유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 방편으로 그리스 철학을 연구하기 시작하고 스토아 철학도 부분적으로 흡수하였는데, 특히 플라톤의 이데아의 세계관은 가장 적절한 연구 대상이 되었으며 신플라톤학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여기에서 교부의 명칭은 후에 주교 또는 승려, 심지어는 펑신도에게도 적용되었는데, 전통을 지키면서 저술하는 교회에 의해서 승인받은 사람이면 다 교부라고 통칭하였다. 그러나 교부로 불린 사람들의 범위 구별은 아직까지 명료하지 못하다. (강성위 역, 서양 철학사, 이문 출판사, 1988, p. 387 이하)
고대 그리스도교의 교부들의 철학˙사상 등을 주된 연구 대상으로 삼는 학문. 고대 그리스도 교회에서는 교회의 정통교리를 저술로써 설명하고, 성스러운 생활을 함으로써 신도의 모범이 된 사람들을 교부라는 이름으로 존중하였다. 가톨릭에서는 이들 교부의 저술이 정통교리의 권위로서 후대에서도 인용되었다. 넓은 뜻으로는 고대 그리스도교 저술가를 통틀어 교부라고 하기도 하는데, 교부의 저술에 대한 연구는 교부학(敎父學)이라고 한다. 교부는 대개 고대 그리스 로마의 문예에 정통한 사람들로서 그 중에는 어려서부터 그리스도교도인 사람도 있고 커서 개종한 사람도 있지만, 어느 경우이든 고대문명의 유산, 특히 시인과 철학가의 학설이 사도들의 가르침과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 하는 문제에 흥미를 가졌다. 그리스도교는 처음,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단일성 때문에 고대 이교문명과는 전혀 이질적인 원천에서 나온 종교로 등장하였지만, 차차 고대 이교세계까지 교세를 넓힘에 따라 고대문명, 특히 그리스 철학사상과 대립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요구를 충족시킨 사람들이 교부인데, 이들 교부들이 고대문명 속에서 불멸의 위치를 확보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준비하고 사람들을 진리 그 자체인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길이라고 하여, 그리스도 사상에 이를 섭취하였다. 한편, 그리스도교의 교리는 궁극적으로 이성으로써는 해명될 수 없는 신비이기는 하지만, 이성으로 파악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는 교리 그 자체도 이성적인 구조(構造)를 갖추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 그리스도 사상이 하나의 종합적인 세계관으로 형성되고, 그 위에 중세 그리스도교의 신학체계가 세워진 것이다. 교부시대는 2~7세기 또는 8세기까지에 이른다. 그리스 교부란 그리스어(語)로 저술활동을 한 동방의 교부를 말하고, 라틴 교부란 라틴어로 저술활동을 한 서유럽의 교부를 말한다. 19세기에 J.P.미뉴가 편찬한 《그리스 교부집성》 162권과 《라틴 교부집성》 221권은 이 방면에서는 가장 총괄적인 것이다. 그리스 교부는 사변적(思辨的)이어서, 그리스도교를 하나의 궁극의 철학적 진리를 나타내는 것으로 해명하려 하였다. 그리스 철학과 그리스도교는 처음에는 통일성이 없이 혼재하고 있었지만, 얼마 후에는 조화된 그리스도 사상으로 통일되어 갔다. 그리스 철학의 여러 학파를 거친 다음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접촉한 유스티누스, 타티아누스 아테나고라스는 “이것만이 유일한 참된 철학”이라고 부르짖은 2세기의 교부이며 호교가였다. 3세기에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교의학교(敎義學校)를 지도한 클레멘스 오리게네스가 있고, 4세기에는 카파도키아 지방에서 활약한 그레고리우스, 바실리우스, 닛사의 그레고리우스 등이 그리스 교부의 대표적인 사람들이었다. 라틴 교부로는 그 유명한 “불합리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라고 말한 테르툴리아누스와 키푸리아누스 암브로시우스˙아우구스티누스 등이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교도인 아버지와 그리스도교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당시 유명한 로마의 변론가인 그는 이교도적 교양으로부터, 어렸을 때 어머니로부터 받은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돌아올 때까지의 과정을 기록한 《고백록》을 썼다. 이것은 이교문명으로부터 그리스도교 문명으로 옮겨가는 시대의 고뇌와 환희를 한 사람의 내면의 역사로 부각시킨 것으로서, 정신사에 있어서 중요한 기록이 되어 있다. 그가 여기에서 그려낸, 인간의 내면의 지주(支柱)가 되고 빛을 밝혀주는 ‘내면의 신(神)’의 사상은 그 후 서유럽 그리스도교 사상을 형성하는 힘이 되었다. <닫기>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354.11.13~430.8.28)
초대 그리스도교 교회가 낳은 위대한 철학자 사상가. 누미디아(북아프리카) 타가스테(지금의 수크아라스로 당시 로마의 속지) 출생. 성인(聖人). 그의 생애는 주요저서라고 할 수 있는 《고백록(告白錄) Confessions》에 기술되어 있다. 아버지 파트리키우스는 이교도의 하급관리였고 어머니인 모니카는 열성적인 그리스도교도였다. 카르타고 등지로 유학하고 수사학(修辭學) 등을 공부하여, 당시로서는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 로마제국 말기 청년시절을 보내며 한때 타락생활에 빠지기도 하였으나, 19세 때 M.T.키케로의 《철학의 권유긅ortensius》를 읽고 지적 탐구에 강렬한 관심이 쏠려 마침내 선악이원론(善惡二元論)과, 체계화하기 시작한 우주론(宇宙論)을 주장하는 마니교로 기울어졌다. 그 후 그는 회의기를 보내며 신(新)플라톤주의에서 그리스도교에 이르기까지 정신적 편력을 하였다. 그의 그리스도교로의 개종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384년에 만난 밀라노의 주교(主敎) 암브로시우스였다. 그는 개종에 앞서 친한 사람들과 밀라노 교외에서 수개월을 보내면서 토론을 벌였는데, 그 내용들이 초기의 저작으로 편찬되었다. 388년 고향으로 돌아가서 수도생활을 시작하려 하였으나 사제(司祭)의 직책을 맡게 되었고, 395년에는 히포의 주교가 되어 그곳에서 바쁜 직무를 수행하는 한편, 많은 저작을 발표하였다. 《고백록》도 그 중의 하나이지만, 대작으로서는 《삼위일체론(三位一體論)》 《신국론(神國論)》 등이 널리 알려졌다. 만족(蠻族) 침입의 위험을 직접 당하면서 죽어간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대문화 최후의 위인이었으며, 동시에 중세의 새로운 문화를 탄생하게 한 선구자였다. 그의 사상은 단순한 이론을 위한 이론이 아니라, 참된 행복을 찾고자 하는 활기있는 탐구를 위한 것으로서, 그가 살아온 생애에서 그것을 떼어놓을 수는 없다. 그 체험을 통하여 찾아낸 결론은 《고백록》의 유명한 구절 “주여, 당신께서는 나를 당신에게로 향하도록 만드셨나이다. 내 영혼은 당신 품에서 휴식을 취할 때까지 편안하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말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즉, 인간의 참된 행복은 신을 사랑하는 그 자체에 있다는 것이다. 신을 사랑하려면 신을 알아야 함은 물론, 신이 잠재해 있다는 우리의 영혼도 알아야만 한다. 그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가 철학의 대상으로 특히 관심을 가졌던 것은 신과 영혼이었다. 신은 우리 영혼에 내재하는 진리의 근원이므로, 신을 찾고자 한다면 굳이 외계로 눈을 돌리려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영혼 속으로 통찰의 눈을 돌려야 한다. 윤리에서는 모든 인간행위의 원동력이 사랑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인간은 결코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존재이며, 윤리적인 선악은 그 사랑이 무엇으로 향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하였고, 마땅히 사랑해야 할 신을 사랑하는 자가 의인(義人)이고, 신을 미워하면서까지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악인(惡人)이라고 하였다. <닫기>
스콜라철학<Scholasticism>
스콜라(schola)란 말은 라틴어로 학교의 뜻을 가진다. 즉 서기 4세기부터 서유럽 기독교의 모든 수도원과 주교좌 성당에 마련된 부속 학교를 가리킨다. 흔히 스콜라 철학을 고대 그리스 사상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집성·반복한 것이라고 보는 이가 많으나, 과거의 철학에서 많은 자료를 활용하고 평가했다고 해서 스콜라 철학의 고유한 독립성마저 잃어버린 것은 결코 아니다. 또한 스콜라 철학은 순전히 신학적 제약을 받은 철학이라고 보아 '신학의 시녀'라고만 알고 있는 이도 있으나 이것 역시 편견에서 오는 그릇된 생각이다. 스콜라 철학의 대표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철학을 완전 독립된 학문으로 알았고, 이 철학과 신학의 조화적인 관계를 수립하였다. 역사적으로 스콜라 철학은 중세적 정신 생활의 초점을 이룰 만큼 모든 전문 분야, 즉 예술, 문학, 정치론까지에도 침투되었기 때문에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중세적 세계관의 바른 모습을 볼 수 없다. 현재 카톨릭 교회에서는 스콜라 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 안에서 가장 완성된 중세의 스콜라 사상의 종합을 발견하고 있다.
스콜라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적 방법을 이용하여 무엇보다 먼저 인식론을 수립하는 것이 그 특징이다. 그 인식론에서 출발하여 본체론, 즉 유(有, ens, being)의 원리를 규정하고 해석하며, 또 이미 증명된 원리를 근거로 하여 인생 및 우주의 수수께끼를 푸는데 노력한다. 그래서 스콜라 철학의 논리학, 심리학, 우주론 역시 형이상학과 긴밀히 연결된다. 이런 견지에서 형이상학은 다른 철학 부문의 기초이며 중심으로 완성된 것이다. 따라서 스콜라 철학은 그 보편성을 가진 형이상학 때문에 '논리학적으로 형성되는 전체 철학'을 이룩할 수 있는 것이다. (강성위 역, 서양 철학사, 이문 출판사, 1988, p. 466 이하)
그리스도교의 교의를 학문적으로 체계화하려는 철학. 중세 초기에 샤를 대제(大帝)는 유럽 각지에 신학원(神學院)을 설립하고 학문육성에 진력하였다. 스콜라학의 명칭은 이 신학원 교수(doctores scholastici)에서 유래하며, 그 후 중세의 신학원과 대학에서 연구되는 학문을 널리 스콜라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스콜라 철학은 그 가운데 한 부문인 철학 분야이다. 스콜라학은 이 때문에 중세의 신학(神學) 철학 연구 전반을 총괄하는 것으로 매우 다방면에 걸친 것이지만 거기에는 전체적으로 공통되는 몇 가지 특징도 있다. 그것은 중세의 학문연구방법(스콜라학적 방법)에서 오는 것인데 이것에 의하여 중세철학의 본연의 자세가 근본적으로 규정되었다.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 중세의 학문 연구는 대체로 성서와 교부(敎父)의 저서,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철학자, 기타 저술가의 저서에 대한 문헌적 연구에서 시작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들 저서의 독해 주석 해석이 그 첫째 작업이었다. 이 무렵 성서는 신(神)의 말을 전하는 것으로서 가장 중시되었다(성서의 권위). ② 신의 말은 먼저 신앙에 의하여 인간에게 받아들여지지만 ‘신앙’은 인간이 거기에 내포되는 신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새 사람으로 재생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신앙의 이해’라는 것이 스콜라학이 지향하는 목표였다. 이 때 신앙과 이해(또는 이성)는 서로 한쪽이 다른 한쪽을 요구하면서도 한쪽이 다른 한쪽에 용해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긴장관계에 있으며 이것은 바로 중세철학을 구성하는 두 요인이다. 따라서 중세철학을 ‘신학의 하녀’라 하여 한편에 대한 예속관계로서만 보는 것은 일면적이다. 스콜라철학은 한쪽이 다른 한쪽에 예속되는 곳에서는 상실되며, 긴장관계에 있는 양자의 종합에 의해서만 스콜라학이 성립된다. 스콜라학의 다양성은 이 종합의 다양성에 있다. ③ 교부와 철학자의 저작은 이를 위해 사용되었다. 하나하나의 문제점에 따라 참조되는 여러 전거(典據)에서 볼 수 있는 여러 설(說)이 수집 정리되었다. 12세기 초, 페트루스 롬발드스의 《명제론집(命題論集)》은 이런 종류의 대표적인 저작이다. 아벨라르두스는 이들 여러 견해를 하나하나의 논점에 대하여 긍정측과 부정측의 대립하는 양자로 분류하는 방법(그렇다와 아니다의 방법)을 도입하였다. 13세기의 슴마(완전한 단일로서 간결한 총괄)는 이들 대립하는 여러 견해 사이의 조화와 종합의 시도로서 여러 영역에 관하여 이루어진 여러 설의 집대성이며, 참으로 학술의 종합이라고 할 만하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神學大全)》은 그 중 가장 저명한 것이다.
[초기] 샤를 대제 시대부터 12세기까지이며 신(新)플라톤파 철학을 도입하여 가짜 디오니시오스(Dionysios)의 번역에 의하여 커다란 영향을 끼쳤던 스코투스 에류게나, 신앙과 이성(理性)의 관계를 명확히 한정시키고 스콜라학의 방법을 확립하여 ‘스콜라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켄터베리 대주교인 안셀무스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신(神)의 존재에 관한 안셀무스의 증명은 유명하다.
[전성기] 13세기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서(自然學書)를 아라비아 철학에서 이입함으로써 종래의 신학으로부터는 독립된 지적 연구(知的硏究)가 일어난다. 이 새로운 연구를 대폭적으로 채용하고 게다가 이것을 전통적인 스콜라학의 체계 속에 혼연히 융화시킨 것이 토마스 아퀴나스이다. 신학에 대한 철학의 원리적인 독립성이 유지되면서 전체는 신학의 체계로서 종합되었다. 이에 비해 보나벤투라는 전통적인 아우구스티누스적 신비주의적 경향을 지켰다.
[말기]14세기로, 신앙과 이성과의 조화가 점차 상실되었다. 유명론자(唯名論者) W.오컴, 신비주의자(神秘主義者) M.J.에크하르트가 대표적이다. <닫기>
토마스아퀴나스<Thomas Aquinas>(1225?~1274.3.7.)
중세 유럽의 스콜라 철학을 대표하는 이탈리아의 신학자. 로마와 나폴리 중간에 있는 로카세카 출생. 성주(城主)의 아들로 처음에 나폴리대학에 입학했으나 설교 및 학문연구를 사명으로 하는 도미니코회(會)에 들어가 파리와 쾰른에서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에게 사사하였으며, 그 동안에 사제(司祭)가 되었다. 1252년 파리대학 신학부의 조수로 연구를 심화시키는 한편, 성서 및 《명제집(命題集)》의 주해에 종사하였고, 57년 신학교수가 되었다. 59년 이후 약 10년 간 이탈리아 각지에서 교수 및 저작에 종사, 68∼72년 재차 파리대학에서 교편을 잡은 후 나폴리로 옮겼다. 74년 리옹 공의회(公議會)에 가던 도중 포사노바의 시토회 수도원에서 병사하였다. 그는 방대한 저작을 남겼는데, 그 종류는 그가 대학교수 및 수도회원으로서 행한 각종 활동을 반영하는 것이다. 우선 《신학대전(神學大全)긕umma Theologiae》(1266∼73) 《대이교도대전(對異敎徒大全)긕umma de Veritate Catholicae Fidei Contra Gentiles》(59∼64) 등의 교과서적, 체계적 저작을 꼽을 수 있으며, 《진리에 대하여》 《신의 능력에 대하여》 등 그가 교수로서 지도한 토론의 기록과 성서의 주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요 저작, 그리고 프로클로스, 가짜 디오니시오스, 보에티우스 등의 저작 주해 및 신학과 철학의 갖가지 문제에 대하여 논한 소논집(小論集) 등이 있다. 그는 ‘스콜라철학의 왕’이라 불리고, ‘천사적 박사(Doctor angelicus)’ 또 ‘공동(共同)의 박사(Doctor Communis)’라는 존칭이 주어졌다. 그는 《대이교도대전》의 권두에서 예지(叡智)의 탐구는 모든 인간의 영위(營爲) 중에서도 가장 완전˙고귀˙유익하여 커다란 기쁨을 주는 것이라 찬미하였지만, 그의 일생을 한마디로 표현할 말을 고른다면 ‘끊임없는 예지의 탐구’ 바로 그것이다.
그에게 있어 예지의 탐구란 신학˙철학의 어떤 말로 불리든 간에, 주체 외부에 체계 혹은 작품을 쌓아올리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궁극목적을 향하여 전진하는 전인격적(全人格的)인 자기실현의 발걸음이었다. 거기에 토마스 철학의 ‘실존적’ 성격이 있다. 그의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떠나서는 논할 수 없다. 그는 생애를 통하여 아리스토텔레스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그의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반복도, 그리스도교화도 아니며, 오히려 아우구스티누스와 안셀무스를 거쳐서 형성된 그리스도교 철학을 독창적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그는 철저한 경험적 방법과 신학적 사변(思辨)을 양립시켰는데, 이와 같이 독자적인 종합을 가능하게 한 것은 창조(創造)의 가르침에 뿌리박은 존재(存在)의 형이상학이었다. 그는 거의 모든 학문영역에서 비길 데 없는 종합화를 이룩함으로써 중세사상의 완성자가 되었지만, 동시에 그가 신(神) 중심의 입장을 유지하면서도 인간의 상대적 자율(相對的自律)을 확립한 일은 곧 신앙과 신학을 배제하는 인간중심적˙세속적인 근대사상을 낳는 운동의 기점이 되었다. 그는 엄밀한 의미에서 최초의 근대인(近代人)이며, 그 영향은 그의 이름을 붙인 학파를 훨씬 초월하여 현대 사상 전역에 미치고 있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