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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산 산행기
서울건축사 등산동호회 10월 정기 산행지인 금오산을 가기 위해 집결지인 교대역으로 나갔다. 교대역에 도착해 주변을 돌아보니 관광버스가 길가에 길게 줄을 서 있고 건널목을 건너는 사람들은 배낭을 매고 있었다. 정시에 출발해 정병협 회장이 이번달 정기 산행에 관한 인사말을 한 후, 근래 새로 나온 나의 졸저 '한국전통건축의 좋은느낌' 출판을 소개하며 인사말을 하게 했다.
엊그제 비가 온 후 기온이 많이 내려가 아침 공기가 쌀쌀했다. 높고 푸르러진 하늘과 투명한 대기가 날씨를 더 싸늘하게 느껴지게 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이렇게 철이 바뀔 때마다 세월이 급발진 하듯 빠르게 느껴진다. 올 해도 벌써 가을의 중턱을 지나고 있다.
가을은 아쉬움이 쌓여가는 계절이다. 봄에는 생명의 향연을 빨리 대하고 싶은 기다림의 계절이지만, 가을은 거두고 사라져 가는 상실의 아픔이 수반된 느낌에 따른 그리움이 마음속에 일렁이는 계절이다. 그리고 날씨가 싸늘해지면 세월 표정도 더 깊어간다. 가을에는 자연의 향수도 더 커져가는 듯하다. 특히 도시에서 자연의 감각과 유리되어 살아가는 도시인들은 원초적 본능처럼 자연을 갈망하는 마음도 커져간다.
차창밖에 보이는 들녘은 거의 다 비워져 가고 있다. 아직 수확하지 않은 벼들은 추적한 가을 빛깔로 변해 있고 비워진 논바닥은 이제 한동안 긴 침묵으로 새 봄을 기다리게 될 것이다. 그 허전함이 사색의 상념을 부르고 사람들의 마음에 파고든다. 야트막한 산기슭의 사과 밭에는 수확을 마치고 빈 종이 봉지만 매달려 있었다. 과실나무에 잎들은 그대로 매달려 있지만 이미 올해의 생동안 할 일을 다 마친 후여서 미련둘게 없는 표정이다.
산행에 나서는 시간이 많을 때는 산에 대한 향수보다 몸으로 겪어야 하는 부담이 더 크게 느껴졌는데 근래는 산행이 뜸하다 보니 산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것이 쌓이고 있다. 그래서 이번 산행은 산의 그리움에 이끌려가는 느낌도 들었다.
고속도로를 가다보니 구미 이정표가 보였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앞쪽에 구미 시내가 나타나고 우측으로는 금오산이 보였다. 금오산은 영남8경 또는 경북8경이라 불리며 빼어난 자연경관을 자랑한다. 기암괴석과 잘 발달한 계곡이 산세와 조화를 이뤄 가히 일품이다. 이 때문에 전국 각지에서 연간 250만 명이 찾아온다고 한다. 그리고 금오산은 수려한 경관만큼이나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삼족오(三足烏)와 숭산(嵩山), 임금을 예언한 산이라는 범상치 않은 지명 유래 등이 깃들어 있다.
10시 15분 금오산 주차장에 도착했다, 아직 아침 공기의 상쾌함이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등산로로 향하는 주차장 언저리로 가서 안내판을 보니 위쪽에 다시 주차장이 있고 그 곳이 산행 기점이었다. 다시 버스를 타고 위쪽 주차장으로 이동해 산행을 시작했다. 들어가는 입구 우측에 야은 길재의 시를 새긴 비석이 보였다. 야은 길재 선생이 고려 왕조 망국의 한을 노래한 시이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야은 길재(1353~1419) 선생은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개창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켜 이 곳 고향에 은거하며 학문에 정진하며 후학을 길러내다 여생을 마쳤다. 그 일은 중국 은나라 말 백이·숙제’가 새로 건국된 주나라 무왕을 섬기지 않고 수양산에 은거해 고사리를 캐 먹으며 은나라에 대한 충절을 지킨 것에 비견된다.
야은은 금오산의 도선굴과 대혈사 등지에서 오로지 학문에 매진했으며, 훗날 김숙자, 김종직, 정여창, 김굉필, 조광조로 이어지는 영남 사림의 뿌리가 되었다. 금오산에는 그의 학문과 충절을 기리기 위한 정자가 세워져 있는데 바로 국가지정문화재 제52호인 채미정(採薇亭)이 그것이다. 이 정자는 영조 44년(1768년)에 선산 일대의 선비들에 의해 세워졌는데 건립 이후 200여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풍우에 퇴락한 것을 1970년대 중반 중수했다.
위쪽으로 이어진 산행로가 반듯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고무 타이어 길을 지나니 목재 데크 길이 나왔다. 길 주변에는 여러 개의 돌탑이 세워져 있었다. 보기 드문 사각형 돌탑도 보였다. 여러 가지 크기와 형태의 돌을 가지런히 쌓은 탑은 그것이 지닌 의미 외에도 그 자체로서 정성스러운 조형미가 크게 와 닿는다.
길을 오르다 금오산성 성문을 지났다. 이 산성은 고려시대 부터 있었던 성으로, 조선시대에 4차례에 걸쳐 새로 쌓은 성이다. 영조 때에는 총 병력이 3500여명에 이르렀다고 전해질 만큼 국방의 요충지로 이름 높았다.
계속해서 오르막길을 가다 보니 우측으로 해운사 안으로 들어가는 계단이 놓여 있어 사찰 안으로 올라섰다. 마당에 당도하니 아담한 경내에 반듯하게 세워진 대웅전 뒤로 솟은 바위 봉우리가 기세 있게 서 있었다. 대웅전 뒤로는 삼성각이 있고 좌측에는 야외에 석조 약사불이 조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대웅전 뜰에서 되돌아보니 멀리 시선이 트여 보였다. 마당 앞쪽에 놓인 범종루는 밖에서 보면 2층으로 되어 있었다.
해운사를 나와 다시 산길을 올라갔다. 그 곳에도 길 주위에 돌탑이 나타났다. 약수터를 조금 지나 대해 폭포 100m 전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도선굴로 올랐다. 그 곳은 우리나라 풍수지리설의 창시자인 도선선사가 득도했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동굴로 오르는 길은 아스라한 기암절벽을 돌아가게 되어 있는데 사람들의 발길로 바닥돌이 반질반질해져서 미끄러워 난간 쇠사슬을 잡으며 조심스레 올라갔다. 예상보다 이동하는 거리가 길었다. 그 길 끝에 있는 천연동굴인 도선굴에 도착했다. 굴 내부는 제법 너르게 되어 있어서 안정감이 느껴졌다. 위를 올려다보니 동굴 상부가 지붕처럼 덮혀 있고 동굴 안 깊은 곳에는 불상이 모셔져 있었다. 그리고 그 동굴 너머에도 절벽이 둥굴 형태로 파여 있었다.
도선굴을 나와 다시 대해폭포dp 도착했다. 시원한 물줄기가 쏟아지고 있어서 폭포다운 위용이 느껴졌다. 대해폭포 아래에는 대해골의 경치에 반한 선녀들이 목욕을 즐겼다는 선녀탕이 보였다.
폭포를 지나니 급경사 지형에 계단길이 높다랗게 이어지고 있었다. 대해 폭포에서 정상까지 2.1 km 거리였다. 460여개나 되는 계단이 끊임없이 놓여 있는 길이라 숨이 차올라서 ‘할딱고개’라는 지명이 생겨났을 것 같았다.
그 계단을 오르니 좌측으로 쉼터 같은 전망 바위가 나타났다. 정상부 좌측 안내판에는 정상 오르는 제 1관문 지났다는 글이 써 있었는데 그 글을 보며 생각하니 이제 겨우 시작이라는 뜻으로 느껴져 이 산 꼭대기에 다다르기가 만만치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전망바위에 올라 주변을 돌아보니 아까 지난 해운사와 도선굴, 그리고 대해폭포가 한눈에 펼쳐 보였다. 아까 도선굴을 오를 때는 상당히 높은 봉우리 같았는데 거기서 보니 저 아래에 보였다. 그리고 정상부의 봉우리는 아직 까마득히 느껴졌다.
계속해서 급경사 오름길을 올랐다. 해발 976m인 금오산은 특별히 높은 산은 아니지만 평소 산행을 하며 느끼던 다른 곳보다 더 높게 느껴졌다. 그 이유는 시작부근의 표고가 67m로 낮기 때문에 정상(976m) 까지의 높이차가 909m나 되기 때문인 것 같았다. 대게 다른 곳은 시작 지점의 표고가 약 200M 정도 되는데 이곳은 편차가 큰 편이어서 더 높게 느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계속된 오름길에 경사가 급한 곳이 많았다. 길 바닥은 시루떡처럼 옆으로 층층이 결이 난 편마암 계통의 돌이 조각조각 흩어져 있었다. 거리도 멀었다.
다시 한참을 걸어 올라가다 보니 정상으로부터 좌측 1.1km 우측길 0.9km로 거리가 표시되어 있었다. 예상 보다 멀리 느껴지는 코스였다. 길이 가파르고 내리막 길 없이 게속해서 오름길이었다. 좌우를 살피다 우측길로 올라섰다. 이성환 건축사 아들 재석이가 나를 보고 거기서 아빠와 함께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그 곳도 주변이 휜히 조망되는 곳인데 다른 일행도 몇 분이 쉬고 있었다.
이성환 건축사가 나에게 일행이 어디쯤 오느냐고 물어보아서 내가 더 뒤에 올라왔을 거라고 했다. 아까 할딱고개 전망대에서 잠시 머물러 앞서 간 것으로 알았는데 맨 앞에서 올라온 이 건축사가 그렇게 물으니 아리송했다. 아마도 아까 갈림길에서 좌측길로 간 것 같아서 이 건축사와 함께 정상으로 향했다. 이 건축사가 다른 일행에게 연락이 되어 정상에서 모여 점심을 먹기로 했다고 했다.
조금 가다보니 허물어진 성 자락이 보였다. 아까 올라오면서 보았던 성곾 안쪽의 또 다른 성 같았다. 다시 조듬 더 가다보니 정상까지 0.6km 이정표가 세워져 있었다. 아까보다 조금 완만해진 오름길을 가는 동안 100m 마다 표식이 세워져 있었다.
정상 바로 앞에서 좌측으로 약사함 으로 가는 길이 보였다. 입구에 일주문이 놓여 있고 그 안으로 들어가니 높다란 바위 절벽으로 이루어진 협곡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입구에 세워진 일주문이 마치 협곡과 한 몸체로 이루어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계단을 내려가니 전에 이 곳 모습을 담은 사진과 비슷한 풍경이 보였다. 높은 절벽을 등진 약사암 우측의 독립된 봉우리에 지어 놓은 육각형 정자가 구름다리로 연결된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그 다리는 입구를 막아 놓아서 들어가 볼 수 없었다. 그 다리 입구 좌측 아래로 다시 작은 암자가 놓여 있었다. 그 곳을 들러 다시 약사암 마당으로 올라왔다.
약사암 기단에서 바라보니 주변 풍광이 훤히 트여 보였다. 앞쪽 석탑이 몇기 세워진 봉우리에 몇 사람이 올라 있었다. 주변이 다 허공이라 마치 딴 세계 풍경 같은 느낌도 들었다.
다시 계단을 올라 일주문에서 좌측으로 조금 가서 정상에 당도했다. 그곳에 금오산의 최정상인 현월봉 정상석(976)이 세워져 있었다. 그 정상석 앞에서 다른 일행이 핸드폰으로 사진 촬영을 부탁해 찍어주고 나도 기념 사진을 찍은 후 주변을 돌아보니 광활한 주변이 실오라기 하나 막힘 없이 깨끗하게 트여 보였다.
금오산은 남숭산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산의 아름다움과 수백개의 절이 들어선 고귀함으로 중국의 오악(五嶽) 중 으뜸인 숭산에 버금간다 해서 붙여지 이름이다. 그리고 금오산 자락에는 중국 명나라의 건국의 시조 주원장이 태어난 전설이 있고, 조선 초 풍수지리의 대가인 무학대사는 금오산의 형국을 보고 ‘임금이 날 산’이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금오산은 서쪽으로 김천의 남면과 동남으로는 칠곡의 북삼에 걸쳐 있다. ‘금오’란 이름은 신라에 불교를 가장 먼저 전한 고구려의 승려 아도화상이 어느 날 이곳을 지나던 중 저녁노을 속으로 황금빛 까마귀가 나는 모습을 보고 지었다고 전해진다. 금까마귀는 예로부터 태양 속에 사는 세 발 달린 상상의 새, 바로 삼족오를 뜻한다. 그래서 구미 시민들은 금오산을 태양의 정기를 받은 명산으로 여기며 소중히 여긴다.
일행을 기다리는 데 오지 않음 시장하지만 같이 만나 식사하기로 하고 오르던 반대쪽으로 내림길을 내려서 조금 가다 보니 너른 시멘트 포장 데크가 나왔다. 그 곳에 서니 역시 주변이 특 트여보였다. 옆에 가던 분이 초행인 나에게 돌탑으로 가는 것이 맞느냐고 물어보았다. 그 말을 들으니 돌탑과 연결 된 길일 것 같아, 아까 약사암에서 보이던 멋진 풍광을 볼 수 잇다는 기대감에 서둘러 걸어갔다.
조금 가다보니 좌측으로 조망이 트인 바위가 나왔다. 그리고 그 곳을 오르자 바로 앞에 바로 그 석탑이 있는 봉우리가 보았다. 그 앞에서 낮은 절벽을 내려가 그 봉우리에 올랐다. 절벽 위쪽에 부부가 앉아서 조망을 즐기고 있었다. 그 곳에 오르니 약사암이 훤히 조망되었다.
금오산의 특징은 주변이 훤출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아무 막힘없이 트인 주변 조망이 시원스러운데 특히 거기서 바라보이는 정상과 약사암이 어우러진 풍광은 더욱더 빼어났다. 좌측 정상부 봉우리와 조금 떨어져 커다란 바위 봉우리가 솟아 있고 그 중탁에 약사암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우측에 구름다리와 연결된 육각정이 마치 신선의 쉼터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봉우리는 마차 하늘에 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 곳을 나와 다시 정상으로 갔다. 잠시 후 앞쪽에서 일행이 도착했다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식사를 하고 올라왔다고 했다. 아까 함께 있던 몇 일행도 이미 식사를 마침 후라 할 수 없이 혼자서 식사를 했다. 오늘 산에서 함게 식사를 할 때 나눠 마시려고 가져간 솔송주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잠시 후 하신을 시작했다. 아까 올라온 방향과 다른 길을 택해 다시 약사암을 지나 마애여래불 쪽으로 갔다. 가다보니 좌측 바위틈에 약수가 보였다. 천연바위가 함지박처럼 파여 바닥에 물이 작은 연못처럼 고여 있어 태초의 자연 같은 신비로운 느낌도 들었다.
다시 길을 지나다 마애불상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 곳 마애불은 특이하게 모서리 진 바위 코너 부분에 입체적으로 새겨져 있어서 더 입체감이 크게 느껴졌다.
그 곳을 지나 하산길을 가다보니 금오산 제1경이 20m 거리로 표시되어 있었다. 손으로 그린 화살표를 따라 그 쪽으로 숲길을 조금 가다보니 주변이 시원스레 조망되는 바위에 돌탑이 여러기 세워져 있었다. 탑 자체의 형상도 가지가지이고 탑 꼭대기에 올려 놓은 상부 돌의 형상도 갖가지인데 꼭대기에는 까마귀 등 여러 형상을 한 돌을 올려 놓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곳에 있던 한 분이 바로 돌탑을 세운 분이어서 여러 가지 형상에 관해 자세히 설명을 해 주었다. 그리고 각각의 특징적 형상이 잘 보이는 위치도 알려주었다.
시간이 너무 지체되는 듯 하여 그에게 인사하고 하산 갈림길에 도착했다. 거기서부터 할딱고개 계단 - 대해폭포 - 해운사 - 돌탑 등 아까 올라갔던 길을 거꾸로 지나 주차장에 도착했다.
주차장으로 들어서니 우리 일행을 태우고 온 버스가 보였다. 그리고 바로 앞쪽에 있는 식당에서 일행이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버스에 배낭을 두고 그 곳을 가서 막걸리로 건배를 하며 함께 즐겁게 식사를 했다. 산행을 마친 후라 음식이 더 맛이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서울로 향했다. 몇몇 일행이 올라가는 차 안에서 무료함을 달려려는 듯 뒷 좌석에서 뒷풀이를 해서 솔송주를 주었다. 명산의 기운을 느끼는 순간은 좋지만 이렇게 먼 거리를 오가다 보면 차 안에서 다시 피로감이 느껴지게 되는 것이 흠이다. 그래도 금오산은 명산으로 불리는 명성을 실감할 수 있어 좋았다.
(20131012)
첫댓글 아기자기한 이야기를 담고있는 듯한 산임엔 분명한 것 같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
맑은 가을 날씨에 금오산의 맑은 기운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기회였던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맛갈스러운 금오산 산행기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계절에 함께한 산행 즐거웠습니다. 행사 치루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