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 명의 간도및 만주영역에서의 영향력및 그와 관련된 의식을 생각할 경우 과연 명이 생각하는 조선영토의 범위는 어디까지였을까?
오늘날 국경선인 압록 두만강 이남만을 조선영토라고 인정하고 압박을 가했을까라는지에 대해서 의문이 갑니다.
혹자는 4군6진의 개척이 명의 눈치를 보는 범위에서 실행한 것이라고 하는데 확실히 명이 조선에 대해서 압록강 두만강 이남을 국경으로 해라고 다소간의 강압적인 자세를 요구했는지?
명의 실질적인 영역범위가 연산현 서쪽부터라고 한다면 거기서 서간도및 압록강 방향에 대해서는 명의 관심밖이 었을까 아니면 조선과의 완충지대로 두려고 했을까?
혹시 명도 청처럼 봉금지대적인 성격을 두려고 했는지도 의문점입니다.
첫댓글 제 지식이 워낙 짧은 지라, 정확히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조선 초기에는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이었다가, 조선 후기 청이 세워진 다음에는 만주족들이 대거 지나 본토 지대로 이동하면서 간도와 만주 지역이 만주족들의 휴가지?? 정도로 남게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명 태조 주원장이 연산관(천산산맥고개)을 중심으로 이서는 명, 이동은 조선의 영역이라 정하였으나 명이 북원을 정벌하고 요동에 인구가 계속 불어나자 그 관문을 계속 압록강 쪽으로 조금씩 전진시켜 마침내는 압록강을 국경으로 정하게 됩니다.
두만강 유역 역시 고려 시대 윤관이 고려지경이라는 국경비를 세운 선춘령을 경계로 인정하였으나 여진족들의 잦은 발호로 인해 적극적인 행정력을 펼 수가 없었죠. 결국 6진을 개척하는 수준에서 만족해야 했습니다.
글쎄요. 청대의 여러 문헌들에서도 경계를 봉황성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명나라 때의 국경이 압록강이었을지는 의문입니다. 북간도 같은 경우 원래 행정력이 잘 미치지는 않는 곳이었지만, 조선과 청이 새삼 이곳을 놓고 회담까지 가졌다는 것은 조선이 이곳을 다분히 의식했기 때문이라고 보입니다.
게다가 당시 여진족은 누르하치가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리 강력한 세력은 아닙니다. 조선측에서는 자신들의 속국으로 여겼을 정도이지요. 고려 시대에도 내지(內地)는 천리장성 이남이지만, 영향력 범위까지 생각한다면 동만주 지역까지라고 볼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