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설교요약> 양치기 / 요한복음 21:15-19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 21장 15절 이하의 말씀은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설교의 본문이었습니다. 신학생 시절에 채플 설교시간에 외부 강사들이 단골로 들고 오는 본문이었는데요, 그 이유는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는 당부를 하시는 대목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신학교에서 목사과정을 밟고 있는 예비 목회자들에게 주님께서 직접 당부하시는 것과 같은 연상을 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신학교 교수가 되어서도 이 설교를 자주들은 이유가 역시 외부강사로 초청된 목사님들이 자주 이 본문으로 설교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본문은 일반교인들 보다는 목회자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본문이라고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기록되었을 그 때의 청중에게만 선포된 말씀을 넘어서서, 2000년 동안이나 영향을 끼쳐왔고, 성경이 자국어로 번역되고 누구나 읽게 되면서부터, 현재 성경을 읽고 있는 그리스도인들 모두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기 때문에, 오늘의 본문은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신앙적인 삶의 방향을 제공하는 말씀이 분명합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는 명령을 전달하실 때에 먼저 질문하신 것이 있습니다.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입니다. 예수는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을 세 번 반복하였습니다. 그리고 세 번 반복해서 “내 양을 먹이라”는 취지의 명령을 하였습니다. 우리의 경우에도 같은 질문을 세 번이나 반복해서 물으면, 대답하는 사람은 당황하거나 불안해집니다. “왜 같은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해서 할까?”하는 생각이 들다가, “지금 나를 믿지 못해서 그러는 것 아닌가”하고 의심이 들기 때문입니다.
정확한 시간에 와야 하는데, 늘 지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여러 번 다짐 시키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대화 속에는 “너를 못 믿겠다.”는 암시가 깔려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도 주님에 세 번째 물으실 때에 “불안해서” 항변하듯이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라고 말입니다. 다 아시면서 그렇게 자꾸 물으시냐는 의미일 것입니다.
“사랑하느냐?”고 물은 단어 원문이 아가페(agape)와 필레오(fileo)를 번갈아 사용한다는 것 때문에 의미를 구분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두 단어는 동의어입니다. 문체상 반복을 피하기 위함일 뿐입니다. “내 양을 먹여라!”라고 하신 명령은 양의 먹이를 제공하라는 의미이고, “내 양을 치라!”는 말은 양치기 역할을 하라는 의미입니다. 이것 역시 같은 의미입니다. 요한복음 10장을 보면 선한목자의 비유가 나오는데, 여기서 주님이 하신 양치기의 역할을 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은 베드로라는 제자를 대표로 삼아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무리들(지난 번에 말씀드린 사람을 낚는 어부가 건져낸 전도의 열매들)을 양치기의 마음으로 인도하라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그런데 그 양치기에게 먼저 던진 주님의 질문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세 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신 이유가 있을까요? 일반적으로는 베드로가 “나는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한 과거를 상기시키기 위한 질문이었다고 해석합니다. 세 번 부인 했으니, 세 번 사랑하겠다는 말을 해서 결심을 단단히 시키려고 한 것일까요? 베드로가 “불안했다”는 말의 의미는 개역성경에서는 “근심하여”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원문의 의미를 보면 “슬퍼서” 또는 “마음이 아파서”라는 의미가 있는데, 앞서 세 번 부인했던 과거를 기억한다면, “마음이 아파서”라고 번역하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자기의 과거 행적을 생각해보니, 지금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하는 이 세 번의 대답을 하는 자신이 너무나 불쌍하고, 안타깝고, 비참하게 느껴지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주인공이 사도 베드로여서, 이 본문은 목회자들에게만 해당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명령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명령입니다. 왜냐하면, 첫째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는 질문은 특정인에게만 해당하는 질문이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21장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셔서 아침식사를 차려주시고 위로하면서 시작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불안과 걱정에 휩싸여서 나아갈 방향을 잃어버린 제자들입니다.
실제로 현대의 그리스도인들 역시 엄청난 관성의 힘으로 굴러가는 거대한 사회 속에서 상처받고 좌절하고 우울감에 빠져 자신이 가야할 방향을 잃고 방황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가 있었다면, 그들이 예수를 사랑하는 마음을 기억한다면, 그 예수는 어떤 방식으로든 위로를 주고, 희망을 줄 것입니다. 지금 예수는 베드로에게 뿐만 아니라, 여기 모인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위로를 주시는 동시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리스도의 위로와 격려를 나누어주는 양치기가 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둘째로 “내 양을 먹이라”는 말씀에서 중요한 것이 드러납니다. 이 양떼는 “주님의 양떼”입니다. 양치기인 내가 양떼를 아무리 잘 먹이더라도 “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는 “주님의 양”입니다. 그러니, 양치기는 일을 맡은 청지기이지, 양을 자신의 것으로 삼아 “소유주”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주인이 아닌 청지기의 역할이 어떤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속에서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산다면, 그리스도인의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자신과 더불어 타인의 삶에 대하여서도 공감과 연민의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주님의 사랑을 확인하면서 주님의 양을 돌보라고 하신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이웃을 섬기는 마음이 하나라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명령은 그리스도인 누구나에게 주시는 명령입니다.
요한복음은 21장 18-19절에 이런 질문과 명령을 주신 이유를 해설하였습니다. 젊어서는 스스로 결정하지만, 늙어서는 끌려 다닌다는 말의 의미는 베드로의 순교를 암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양을 돌보다가, 결국에는 순교한다는 뜻입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입니다.
“순교자”라는 영어 단어 Martyr는 마르튀스(μαρτυσ)라는 헬라어에서 나왔는데, “증인, 증거자”라는 의미입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할 때, 그를 피의 증인이라고 불렀습니다.(행22:20) 이렇게 보면, 베드로의 순교는 우리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증언”(witness)인 셈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삶으로 보여주어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살아계심을 증거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삶으로 보여주는 증거를 옆에서 보고 들은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위로를 받고 희망을 갖게 된다면, 그것이 바로 오늘 베드로에게 주신 “내 양을 먹이라!”를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절망과 좌절에서 건져내어 희망을 품고 세상을 힘차게 살아가도록 이끄시는 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예수를 삶속에서 보여주면 그리스도의 위로가 세상에 퍼져나갈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양치기로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2024.5.12.
홍지훈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