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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中道, skt. madhyamā-pratipad)>
1. 중도(中道)란?
중도란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성취하시고,
제일성으로 5비구에게 “나는 중도를 깨달았노라”라고 이르시니
이것을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한다.
따라서 중도란 구경의 깨달음의 눈으로 본 구경의 진리인
만법의 참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만법의 참모습의 내용이 중도이다.
그런데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중도(中道)와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중도는 그 성격이 다소 다르다.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중도는 고(苦)와 락(樂)의 양극단을 떠난
‘중도의 길’을 말한다. 따라서 중도의 길은 지나치게
쾌락주의적인 호화로운 생활도 아니고
극단적인 고행주의 생활도 아닌 몸과 마음이 조화를
유지할 수 있는 적당한 상태의 생활을 영위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소나(sona)경>에서는 중도를 거문고 줄에 비유해서,
거문고 줄이 지나치게 팽팽하거나 느슨해도
좋은 소리를 내지 못하기 때문에 가장 좋은 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그 줄이 적당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어야 하는 것과 같이
몸과 마음의 조화를 유지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열반을 얻기 위한 수행의 길 역시 극단적인 상태를 피하고,
중도의 실천이 가장 좋은 길이라고 했다.
그래서 언뜻 보면
‘중간(中間)’ ‘적당한 상태’란 말과 유사한 단면이 있다.
그런데 용수(龍樹, Nagarjuna)로 비롯된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중도는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중도로부터 많이 확장된 개념이다.
이와 같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중도의 개념을
더 확장해서 해석한 것이
AD 3세기 초반 용수(龍樹)에 의해서이다.
중생은 근본적으로 무명으로 인해
아상(我相)의 관점에서 만법을 보기 때문에
유무, 상하, 장단, 생사, 빈부, 귀천, 고저, 선악, 시비,
주객, 고락 등으로 일체를 상대적으로만 볼 수밖에 없다.
이것을 변견(邊見)이라고 한다.
우리는 ‘공’ 혹은 ‘중도’와 같은 부처님 가르침을 이해할 때,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는 지식, 내가 경험한 것,
그리고 내가 참고로 할 수 있는 사전이나 책, 자료들을 동원해서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더 이해하기가 힘들어지는 것이다.
부처님이 깨달으신 세계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세계가 아니다.
예컨대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까지 인류가 연구하고 개발한 과학적 지식으로는
설명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경지이다.
지금 <중도(中道)>란 제목으로 설명하고 있는 이 글도
엇비슷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지 중도를 정확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절대 아니다. 중도를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말 큰 사전에 있는 단어들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말이다.
때문에 불교에서 ‘깨쳐라’고 하는 말을 자꾸 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지식체계를 다 버리고,
또 다른 부처님 가르침의 세계를 상상해야 한다.
어리석은 인간의 분별지는 이분법적 논리에 의해서 사물을 변별(辨別)한다.
‘있다’가 아니면 ‘없다’이며, ‘옳다’가 아니면 ‘그르다’가 존재할 뿐이다.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것은 존재 할 수가 없다.
불교에서 말하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견해 중
변견(邊見)이라는 것이 바로 이분법적 논리이다.
예를 들면, 너와 나, 좌와 우, 상과 하, 부자와 빈자와 같이
이분법적 논리에 의해서 단정하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이분법적인 논리의 진실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중도이다.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닌 중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닌 중간은 어정쩡한 회색시대이고,
이런 사상을 가진 자는 우물쭈물하는 비겁한 존재들이다.
중도는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닌, 좌우를 초월한 ‘새 길’을 말한다.
거기에 사성제(四聖諦), 연기법(緣起法), 팔정도(八正道) 등이
꿈틀거리는 곳이다. 따라서 중도(中道)에서 ‘중(中)’을
지금까지는 아무도 모르고 또 없었던, 전혀 ‘새로운, 바른’ 길,
이런 말로 해석해야 한다.
그리고 중도를 중심으로 한
용수의 철학을 중관사상(中觀思想)이라고 한다.
사실은 중도를 용수가 처음 제기한 것이 아니다.
이미 부처님께서 중도의 중요성을 말씀하셨다.
그런데 초기불교에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중도와 대승불교의 용수가 말한 중도는 다소 다르다.
초기불교에서 중도는 부처님께서 고락(苦樂)을 모두 체험한 결과
극단적인 수행으로는 깨달음에 이를 수 없음을 체득하고,
마음수행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는 실천적 중도였다.
부처님은 출가 전의 쾌락도 출가 후의 고행도
모두 한편에 치우친 극단이라고 하며, 이것을 버리고
고⋅락(苦樂) 양면을 떠난 심신의 조화를 얻은
중도(中道)에 비로소 진실한 깨달음의 길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체험에 의해서 자각했다.
따라서 부처님은 고⋅락 두 가지 극단의 길을 가서는 아니 되고,
중도의 길을 가야 한다고 하셨다.
이러한 중도는 열반적정(涅槃寂靜)을 말한다.
그리고 중도의 길은 여덟 가지 바른길이라 해
팔정도(八正道)를 제시했다.
그러나 대승불교에 있어서,
용수의 중관사상에서 주장하는 중도는 사상적 중도이다.
여기 중도에서의 ‘중(中)’자는 가운데라는 뜻이 아니고,
‘정확하다’, ‘올바르다’라는 뜻으로 바를 ‘정(正)’자와 같은 의미이다.
그래서 중도를 팔정도(八正道)라 한 것이다.
그리고 중생의 견해가 상대적인 관점에 완전히 물들어 있기 때문에
이 상대적인 관념을 타파하기 위한 주장이다.
또한 ‘중(中)’은 「무자성(無自性)-공성(空性)」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부처님의 중도와 용수의 중도가 전혀 별개의 것이란 말은 아니다.
오히려 용수의 중도론 뿌리는 부처님이 말씀하신 중도에 닿아 있다.
즉, 용수의 저서 <중론(中論)>은 초기불교를 비판하고
대승불교를 수립하려고 저술한 것이 아니라,
부파불교에 의해 왜곡된 불교를 바로잡고
초기불교를 바르게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 저술한 것이다.
부파불교 당시 일부 부파의 아비달마교학에서
자성(自性)의 존재를 긍정하거나 연기설(緣起說)을 왜곡해
부처님 사상에 배치되는 주장이 더러 있었다.
용수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중론>을 비롯한 자신의 저술을 통해
엄격히 비판하고, 자신의 설이야말로
모두 부처님 진의를 전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모든 존재가 연기성이기 때문에
그 자체의 고유한 자성(自性)이 없으므로 공이라 했고,
이 공은 유⋅무 극단이 없는 것이므로 중도를 지향한다고 했다.
중생은 근본적으로 무명으로 인해 아상(我相)이라는 관점에서
만법을 보기 때문에 유 무, 장 단, 빈 부, 귀 천, 선 악 등으로
일체를 상대적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것을 변견이라고 한다.
그러나 깨달음으로 본 만법구경(萬法究竟)의 바른 참모습은
이러한 상대는 조금치도 존재하지 않고
일체법은 원융무애(圓融無碍)하다.
이렇게 원융무애한 만법의 참모습을 중도라고 한다.
중도(中道), 이것이 불교의 근본 사상이다.
중도라는 것은 모순이 융합되는 것을 말하며,
모순이 융합된 세계를 중도의 세계라 한다.
세상의 이치는 모두 상대적(相對的)으로 이루어져
상대적인 대립을 이루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 현실 세계는
그 전체가 상대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므로 자연 이 현실 세계에서는 모순과 투쟁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 상대의 세계, 곧 양 변의 세계에서는 전체가 모순 덩어리인 동시에
투쟁인 것이다. 그 결과 이 세계는 불행에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불행에서 벗어나고 투쟁을 피하려면
근본적으로 양변, 상대에서 생기는 모순을 모두 버려야 한다.
이를테면 서로 옳으니 그르니 하는 시비(是非)를 버리면,
평화가 저절로 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양변을 여의지 못하는 것이다.
현실 세계가 사바고해(娑婆苦海)인 까닭도 거기에 있다.
부처님께서 “중도를 정등각했다.”고 선언하신 것은
바로 그 모든 양변을 버렸다는 말씀이다.
곧 나고 죽는 것도 버리고, 있고 없는 것도 버리고,
악하고 착한 것도 버리고, 옳고 그른 것도 모두 버렸다는 말이다.
그렇게 모두를 버리면 시도 아니고 비도 아니고,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고,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
절대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이렇듯 상대의 모순을 모두 버리고 절대의 세계를 성취하는 것이
바로 해탈이며 대자유이며 성불인 것이다.
모든 대립 가운데에서도,
철학적으로 보면, 유(有) 무(無)가 가장 큰 대립이다.
중도는 있음(有)도 아니고 없음(無)도 아니다.
이것을 비유비무(非有非無)라고 하니,
곧 있음과 없음을 모두 떠난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다시 유와 무가 살아난다(亦有亦無).
그 뜻을 새겨 보면 이러하다.
곧 2차원의 상대적인 유와 무는 완전히 없어지고
3차원에 가서 서로 통하는 유무가 새로이 생긴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유무가 서로 합해진다.
그러므로 붓다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유무가 합하는 까닭에 중도라 이름한다.
(有無合故名爲中道)」
불생불멸의 원리에서 보면 모든 것이 서로 생멸이 없고,
모든 것이 서로 융합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고,
모든 것이 무애자재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있는 것이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이 곧 있는 것이라.
(有卽是無, 無卽是有)고 말씀하신 것이다.
2. 용수(龍樹, Nagarjuna)
용수의 생몰연대는 확실치 않다. 다만 고대 남인도에 있었던
사타바나(Satavahana) 왕조의 가우타미푸트라 샤타가르니 왕이
용수의 친구이자 후원자였던 점을 미루어,
불멸 후 6~7백년 경에 해당하는 AD 2세기 후반과
3세기 전반 사이(AD 약 150~250년)의 인물로 추정된다.
그는 남인도 바라문 가문에서 태어났고,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했으며,
자라면서 당시 인도의 거의 모든 종교, 철학 등을 섭렵한 후,
최종적으로는 불법에 귀의해 중관사상을 수립함으로써
부처님 사상을 논리적으로 완성시켰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지금처럼 그렇게 정연하게 정리된 것이 아니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지금처럼 논리 정연하게 갖추어진 데에는
용수의 노력이 컸다.
용수가 불교에 입문할 무렵, 인도 불교계는 여러 부파가 갈라져서
20여 종으로 난립한 부파불교시대였다.
그리고 이들 교파는 전문수행인들이라 할 아비달마(阿毘達磨)
논사들에 의해 방대한 논서(論書)가 작성되고,
지나치게 번쇄한 이론중심의 아비달마불교가 성행하고 있었다.
이들 이론중심의 아비달마불교에 불만을 품은
대중적 성격을 띤 새로운 불교개혁운동으로 대승불교가 일어났고,
이들 혁신적인 불교도들을 중심으로 대승경전의 편집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또 전통적인 바라문교의 육파철학(六派哲學)이
하나 둘 정비되어감과 동시에 브라만교가 대중적인 힌두교로
서서히 그 얼굴을 내밀기 시작하는 시기였다.
이러한 사상계의 혼돈 속에서 불세출의 사상가이자,
훗날 대승불교의 아버지, 제2의 붓다, 혹은 보살이라 칭송되는
용수가 탄생했다. 용수는 <중론(中論)> 외에 <대지도론(大智度論)>,
<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 <십이문론(十二門論)> 등
많은 저서를 남겼으며, <반야경>, <화엄경> 등
대승경전의 사상을 간결하게 잘 정리해서 대승불교의 기초를 놓았다.
용수의 핵심 저서인 <중론(본명 중송/中頌)>은
용수의 초기작품으로 27장 449게송(한역은 445게송)으로
간결하게 이루어져 있다. 그 후 <중론>에다가
용수의 <십이문론(十二門論)> 및 그의 제자 제바(提婆 Kanadeva, 2~3세기경)의
<백론(百論)>을 합해 삼론(三論)이라 불렀고,
이에 근거해 삼론종(三論宗)이 성립됐다.
그리고 중국 수⋅당시대에 삼론종을 대성시킨
길장(吉藏, 549~623)이 지은 <중관론소(中觀論疏)>는
<중론> 연구의 획기적 저서로 꼽힌다.
그리고 후세의 몇몇 불교학파가 그에게 연원을 두고 있어서
중국에서는 용수를 8종(宗)의 조사(祖師)라고 해서 매우 존숭했다.
3. 중도(中道)의 특징
• 중도(中道)는 분별의 양극단을 배격한다.
<중론(中論)>을 중심으로 한 중도(中道) 지향의 사상을
중관사상 혹은 중관철학이라 하고,
중관사상의 흐름을 이어받은 논사들을 중관파(中觀派)라 불렀다.
중관파는 후에 유식(唯識)을 설하는 유가행파(瑜伽行派)와 함께
인도 대승불교의 2대 사상이 됐으며,
<중론>은 대승불교에 이론적 기초를 부여함으로써
대승불교의 사상 전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중도는 <반야경>에 입각한 대승공관(大乘空觀)의 입장에서
공사상(空思想)을 철학적으로 체계화한 <중론>의 핵심사상이고,
원시불교 이래의 무아(無我)사상과 연기설(緣起說)을
재해석하고 확장함으로써 공(空)사상을 확립한 이론적 근거였다.
그리고 이에 의해 부파불교가 지닌 오류를 결정적으로
논박했을 뿐만 아니라 인도 일반 철학사상까지도 비판했다.
따라서 중도의 중심사상은
「연기(緣起)→무자성(無自性)→공(空)」으로 귀결되는데,
모든 존재가 연기성이기 때문에 그 자체의
고유한 자성(自性)이 없으므로 공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 공은 유 ․ 무의 극단이 없는 것이므로
중도(中道)를 지향한다.
중도란 아무런 걸림 없이 바르게 관찰하는 것이고,
올바르게 관찰하는 거기에 깨달음이 있다고 했다.
즉, 어리석은 중생의 생각으로 구성한 양극단의
상대적인 개념을 모두 근거 없음을 밝혀내서 부정하고,
궁극적인 깨달음을 지향한다.
그리하여 수행을 높이 쌓아 번뇌와 무명(無明)을
탁 깨뜨려버리면 허공처럼 청정하고 확 트인 참마음 자리가 열린다.
여기에는 한 점의 속박도 치우침도 없다.
이것을 ‘중도의 경지’라고 한다.
• 중도는 곧 연기론(緣起論)이며, 공성(空性)을 추구한다.
용수가 <반야경>의 공관을 추구한 것은
그것이 바로 연기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임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이것은 곧 우리가 공(空)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실제 모든 사물이 각기 독자적인 존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상호의존적인 연기의 관계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연기의 관계로 이루어진 까닭에
연기의 관계를 떠나있는 독자적인 성질로서 자성(自性)이나
실체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용수는 불교의 핵심을 연기로 파악했으며,
이 연기는 관계성과 다르지 않은 것으로 봤다.
즉, 연기는 모든 존재의 존재방식을 ‘관계’로 설명하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존재가 타자와 관계를 맺으면서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존재도 자성(自性)이 없으며,
이것이 용수가 말하는 공(空)의 의미이다.
그리하여 <중론>에서
“인연으로부터 생하지 않은 사물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므로 일체의 사물은 공이 아닌 것이 없다.
(未曾有一法 不從因緣生 是故一切法 無不是空者-제24장 19게)”라고 했다.
즉, 용수는 연기하고 있는 것을 공성이라 설하고,
그것이 중도 그 자체라 했다.
• 중도는 「무자성(無自性) - 공(空)」을 추구한다.
특히 용수는 이러한 연기의 인연관계를 떠나 있는 것을 자성(自性)이라 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연기하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자성이란 존재할 수 없고,
따라서 무자성(無自性)이며 공이라고 했다.
곧 자성(自性)이란 인(因)과 연(緣)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자립적인 것이며, 또한 다른 것에 의존하는 일 없는
항상 고정불변한 존재인데, 실제로 그와 같은 것은
생겨날 수도 있을 수도 없다고 했다.
곧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인과 연의 상호관계로 생겨나는 것이고,
따라서 그와 같은 것은 곧 자성이 없는 까닭에 공(空)인 것이다.
그래서 용수는 <중론>에서
“공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모든 사물이 성립한다.
만약 공의 의미가 없다면 모든 사물은 성립하지 않는다.
(以有空義故 一切法得成 若無空義者 一切則不成-제24장 14게)”라고
까지 말했다. 결국 이 세상은 공관에 의해 성립되는 것이지
자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중도(中道)를 개념적으로 이해하려면
중도의 핵심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이게 실제 공성(空性)이 체험되고
공성이 어떻게 이 삼라만상을 만들어 내는지를
본인 스스로 체득을 했을 때만이 진정한 실천행이 될 수 있다.
그때 가서야 진짜 중도적 삶을 스스로 구현해 낼 수 있다.
• 중도의 뿌리는 부처님에 있다.
용수는 <중론>을 통해 부파불교에 의해 왜곡된 불교를 바로잡고
초기불교를 바르게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 저술한 것이다.
그리하여 용수는 자신의 설이야말로 모두
부처님의 진의를 전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지금도 일부 학자는 대승비불설(大乘非佛說)을 주장하며
대승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크게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용수의 진의를 파악한다면 대승불교야말로
부처님 사상의 확장이라 이해하게 될 것이다.
[출처] 블로그 아미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