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와 옹수곤 그리고 상량정
요즘 창덕궁은 오색 단풍이 제철을 맞았다.
또한 예전 대비 외국 내방각이 부쩍 눈길을 끄는게 이채롭다.
바로 옆에는 북촌, 정면 길거너에는 카페, 공방 등이 즐비한 익선동 거리 그리고 율곡로가 새단장을 마쳤다.
창덕궁과 인연을 맺은게 근 10여 년이 다 되어간다. 인연 덕에 상대적으로 니즈를 해소하는 행운을 얻었다.
그러나 발길을 뗄 때마다 여전히 봄에는 꽃으로 여름에는 더위를 가을에는 단풍으로 겨울에는 설경이 제법인 그곳에 오르고 싶다.
바로 금석학자 홍두산인 옹수곤(翁樹崑, 1786 ~ 1815)이 이름을, 일제에 의해 상흔이 아로새겨진 상량정(上凉亭)이다.
무더운 여름 날 정자에 올라 천성이 책 읽는 건 싫어하니 낮잠을 청하거나 현판 이름 처럼 더위를 댈래는 시원한 바람을 쐬고 싶기도 하고 때로는 의문투성이인 상량정에 궁금증이 갈증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상량정(上凉亭)은 처음에는 육모정 평원루(六隅亭 平遠樓)로 불리워졌는데 청나라 금석학의 2인자 담계 옹방강(翁方綱, 1733년 ~ 1818년))의 6남 옹수곤이 썼다고 전하며 “먼나라와 사이좋게 지내다.”라고 한다.
1800년대 전반기는 서구 열강들의 서세동점기이고 상량정이 휴식, 외국공사 등과 소연회, 독서(북행각에 책 보관) 등 용도를 추정해 본다면 미국, 러시아, 청, 일 등과 우호적인 외교관계에 유지를 의미 부여한 것 같고 일제감정기를 지나면서 상량정으로 개칭되었으며 흰색 바탕에 검정글씨로 “시원한 곳에 오르다”라는 의미이다.
먼저 상량정(초기 평원루)의 연혁을 보면 영조 32년 1756년 화재기록으로 낙선당 존재(창경궁 영역)의 사실이 확인 가능하고 정조 12년 1788년 낙선제, 석복헌 화재로 소실되었으며 효명세자(이영)가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동궐도(1828 –1830년에서는 평원루를 확인할 수 없다.
평원루의 존재 사실은 헌종 15년 1849년 낙선재를 방문한 소치 허련에 의해 낙선재 언덕에 존재 함을 처음으로 확인했고 일본학자들이 조선의 침략과 통치를 수월하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동경대 세키노다다시 중심으로 제작된 조선고적도보(1915년)에서도 평원루가 낙선재 언덕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육모정 평원루(六隅亭 平遠樓)가 언제 상량정으로 명칭이 개칭되었는지인데 상량정 현판의 일본양식에 미루어 일제감정기에 일제에 의해 왜색된 것으로 추정 할 뿐이다. * 隅 모퉁이 모.
다음으로 홍두산인 옹수곤과 완당 김정희 만남과 금석문이야기를 해 볼 까 한다.
추사는 1810년경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 동지부사이자 사은사로 청나라 연경(북경)에 갔고 60일간 머물면서 훗날 스승으로 모신 당대 최고의 금석학자이자 서예가인 담계 옹방강과 완원을 만나 금석학과 고증학을 익혔으며 옹방강으로부터 보담재(寶覃齋), 완원에게서 완당이란 호를 얻었다.
추사는 1810년 귀국 후 자신의 서재를 “담계(覃溪) 옹방강을 보배롭게 여기고 받드는 서재”는 뜻으로 ‘보담재(寶覃齋)’라고 이름 붙였고
담계 옹방강과 8여 년 간 옹방강으로 부터 실사구시·시암 편액 등과 편지를 주고 받았다.
홍두산인 옹수곤과 추사의 인연은 추사가 연경에 갔을 때 옹방강에게는 7남 6녀를 두었지만 아들로 4남 옹수배와 6남 옹수곤 만 있었고, 연경에 체류 중 옹수곤을 인연을 맺게 되었다.
옹수곤은 금석학자로 추사가 연경에 머물 때 홍두산정·청수시 등 편액을 주었고 추사는 귀국 후 이광문, 심상규, 홍현주 등을 옹수군에게 소개시켜 주었으며 이들과 금석문과 학문을 교류하게 해주었다.
옹방강과 아들 옹수곤 부자는 연경에서 만남이 인연이 되어 금석문 연구자료와 방법을 추사에게 보내 주었고 추사가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황초령비, 무장사비 등 금석문을 연구하는 도움을 주었으며 계속적으로 학문교류를 하였다.
그러나 지금껏 상량정의 연혁, 옹방강과 옹수곤의 만남과 추사 등과 금석학 학문교류, 상량정의 사실 확인은 있었지만 처음으로 돌아가 연구를 다시 해야 할 듯하다.
여전히 풀리지는 않는 것은 옹수곤이 썼다는 현판 글씨와 동궐도 및 평원루의 사실 확인 시점의 시간적 차이와 언제 상량정으로 개칭되었는지. 상량정 현판 글씨는 누가 썼는지가 궁금증을 더한다.
옹수곤은 1815년 까지 살았고 효명세자의 동궐도(1828 – 1830)에는 평원루가 보이지 않으며 소치 허련이 평원루의 존재를 확인한 시점은 1849년이니 말이다.
게다가 1915년 조선고적도보에는 여전히 평원루로 기록에 남아 있으니, 일제감점기 어느 시점에 상량정으로 이름이 개칭 되었는지, 누구에 의해 쓰여졌는지에 대해 의문이 꼬리를 문다..
* 글 ; 양은석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