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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philthema 원문보기 글쓴이: 화상
11/15 [수]
2002 - 마라톤의 영웅 손기정(孫基禎, 1912-2002) 세상 떠남
평안북도 신의주(新義州) 출생이다. 16세 때 중국 단둥[丹東]의 회사에 취직하여 신의주∼압록강 철교∼단둥에 이르는 20여리 길을 매일 달려서 출퇴근한 일화가 있다. 1932년 신의주 대표로 제2회 동아마라톤대회에 참가하여 2위를 차지하였다. 1937년 양정고보를 졸업하고 1940년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을 졸업했다. 1935년 조선체육회에서 주최한 풀코스마라톤대회에서 우승하였으며, 전일본 마라톤선수권대회에서도 우승하였다.
1936년 제11회 베를린올림픽대회에 참가하여 2시간 29분 19초의 기록으로 우승하였다. 그후 대한육상경기연맹 부회장, 서울특별시 육상경기연맹 이사장, 서울올림픽대회 조직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88 - 동요 작곡가 윤극영(尹克榮, 1903-1988) 세상 떠남
불멸의 동요 '따오기'를 작곡한 동요 작곡가 윤극영 선생이 1988년 11월 15일 사망했다. 86세였다. 윤극영은 경성 법학 전문학교를 중퇴하고 일본의 도쿄음악학교와 도요음악학교에서 성악을 공부했다. 1923년에는 소파 방정환과 함께 색동회를 조직하고 그 이듬해에는 동요 보급단체인 다리아회를 조직해서 어린이 문화운동과 동요보급에 힘썼다.
현대 동요 100년의 역사에 기록된 이름들 가운데 가장 우뚝선 윤극영이 1920년대에 작곡한 '반달'이나 '따오기'에는 나라잃은 겨레의 아픔과 슬픔이 담겨있다. 그러나 윤극영의 동요들이 모두 그늘진 것 만은 아니었다. '까치 까치 설날은'이나 '고드름'같은 노래들에는 밝고 맑은 동심이 녹아있다. /조선
1988 - 소련, 첫 우주왕복선 부란호 발사
1978 -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미드(Mead, Margaret, 1901~1978) 세상 떠남
필라델피아 출생. 1929년 컬럼비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1925∼1939년 사모아섬·애드미럴티제도·뉴기니·발리섬 등의 미개민족을 조사하였다. 특히 여러 부족의 청소년기에 있어서 문제와 성(性)행동에 관한 조사결과를 보고하였다.
미국 자연사박물관(自然史博物館) 인종부문 관리자로 있으면서, 1954년 이후 컬럼비아대학 인류학 조교수를 겸하였다. R.베네딕트와 함께 미국 문화인류학에 심리학적 방법을 도입, 발전시켰다. 특히 인격형성과정에 있어서의 문화영향을 중시한 입장에서 연구를 추진하고, 각국 국민성에 관한 비교연구에서도 업적을 남겼다.
1960년 미국 인류학회장을 맡았으며, 사회·교육평론가로서도 활약하였다. 저서는 미국 각 대학에서 문화인류학·사회심리학·사회학 등의 전공 학생의 교과서로 사용된다.
저서에 《사모아의 성년(成年)》(1928) 《마누스족 생태(生態)연구》(1930) 《세 미개사회의 성(性)과 기질》(1935) 《남성과 여성》(1949) 《권위에 대한 소비에트인의 태도》(1951) 등이 있다.
1976 - 프랑스의 영화배우 장 가뱅(Gabin, Jean, 1904~1976) 세상 떠남
본명 알렉시스 몽코르제(Jean-Alexis Moncorgé). 파리 출생. 폴리베르제르, 물랭루즈의 무대에 섰다가 유성영화(有聲映畵) 초기인 1930년 영화계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호탕한 남성역으로 인기를 얻다가 《땅 끝까지 가다》(1936) 《망향》(1937) 《위대한 환상》(1937) 《안개낀 항구》(1938) 《수인(獸人)》(1938) 등에서 적역(適役)을 얻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는 자유 프랑스 해군에 들어갔고, 전후에는 소박한 늙은 갱역으로 새로운 면모를 보였다. 《현금에 손대지 마라》(1953) 《지하실의 멜로디》(1962) 등이 대표작이고, 《밤은 나의 것》(1951)으로 베네치아국제영화제 최우수 남우상을 받았다.
1973 - 통일벼 개발
한국에서는 자원민족주의와 더불어 대두한 ‘식량무기화’의 새로운 물결 속에서 식량자급의 숙원달성을 위하여 마닐라시(市) 교외에 본부를 둔 국제벼연구소(IRRI)에서 개발한 ‘기적의 볍씨(miracle rice) IR 8’을 들여와 연구를 거듭한 결과, 한국 실정에 맞는 통일벼 계통의 신품종 육성에 성공, 1974년 이래 이의 보급에 주력함으로써 미곡증산에 다대한 실적을 올렸다. 그러나 미질(米質)이 좋지 않고 밥맛이 나빠서 1980년도 장려품종에서 탈락하여 근래에는 거의 심지 않고 있다.
1969 - 미국 워싱턴 DC서 25만여명의 군중이 월남전 반대 시위
1969년 10월 15일을 '베트남 반전의 날'로 정하여, 워싱턴을 중심으로 미국 각지에서 일어난 대규모의 베트남반전통일행동이다. 이 반전운동은 그해 11월, 12월에도 계속되었으며, 1971년 6월에도 일어났다. 또 베트남전선(戰線)으로부터의 탈주병을 숨겨주거나 국경을 초월하여 보호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국방부는 베트남전쟁의 전모에 대해 조사·연구하고, 이것을 47권이나 되는 방대한 〈미국방성 비밀보고서〉(펜타곤 페이퍼)로서 총정리하였는데, 그 개요가 《뉴욕 타임스》에 게재되었다. 이것은 미국의 베트남정책의 허상을 드러내는 것이 되었고, 반전운동에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1920 - 국제연맹, 제네바서 제1차 총회
국제연맹은 제1차 세계대전 후에 설립된 국제평화기구로서 국제연합의 전신이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연합국을 주축으로 국제 평화와 안전을 유지하고 경제적·사회적 국제협력을 증진시킨다는 목적으로 1920년 설립되었다. 설립 구상은 대전 중에 영국과 프랑스에서 이미 진행되었으나, 미국 대통령 토머스 윌슨(Thomas Woodrow Wilson)이 1918년 1월 〈평화를 위한 14개 조항〉에서 제창하면서 표면화 되었다. 1919년 1월 개최된 파리강화회의(파리평화회의)에서 집단안보와 국제분쟁의 중재, 무기감축, 개방외교를 원칙으로 하는 연맹의 규약을 정하고 본부는 스위스의 제네바에 두었다.
성립 후 10년간 국제평화와 안전을 위하여 순조롭고 효과적으로 운영되었으며, 국제협력 분야에서는 상당한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1930년대 들어 독일·이탈리아·일본·소련 등의 침략행위에 대하여 합당한 조치를 취할 수 없을 정도로 약화되었다. 즉, 제창국인 미국이 베르사유조약에 대한 의회의 인준거부로 인하여 처음부터 불참하였고, 영국·프랑스 간의 이견이 많았으며, 신흥 군국주의 세력의 도발에 대하여 집단적인 제재능력을 갖지 못하였다.
일본의 만주·중국 침략,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략, 독일의 베르사유조약 거부를 막지 못한 국제연맹은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스스로 붕괴되었다. 1946년 4월 18일 개최된 연맹총회에서 해체를 결의하고, 국제연맹의 구조와 형식, 목적을 이어받은 국제연합을 발족시켰다.
1908 - 서태후(西太后, 1835~1908) 세상 떠남
중국 청나라 말기의 ‘서태후(西太后)’는 이름이 아니다. 1861년 함풍제가 병사하고 후궁에서 태후에 오른 서태후가 서쪽에, 정실이 동쪽에 기거하다보니 편의상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을 뿐이다.
17세에 궁녀로 입궁한 그녀가 귀인과 빈을 거쳐 태후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황제 생전에 총애를 받아서가 아니었다. 함풍제를 이을 유일한 아들이 그의 핏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과감한 결단력에 간교한 계책까지 갖춘 야심가였고 남성을 능가하는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5세의 어린 아들이 동치제로 즉위하면서 그녀의 47년 절대권력도 함께 시작됐다. 정실 동태후가 있었지만 그녀는 본시 성격이 온순해 서태후의 적수가 되질 못했다. 동치제가 생모인 자신보다 양모인 동태후를 더 따르자 그녀는 아들을 미워했고 아들은 결국 나이 스물을 못넘기고 1874년에 죽었다. 그녀는 4세밖에 안된 자신의 여동생의 아들을 광서제로 옹립하고 수렴청정를 이어갔다. 1881년 동태후마저 의문의 죽음을 맞자 이제 권력은 사실상 그녀의 독차지가 됐다. 사치했던 그녀는 쌀 5000kg에 상당하는 비용을 하루 식사비로 썼으며 옷만해도 3000상자가 넘어 하루에도 몇번씩이나 옷을 갈아 입었다.
1898년 청년이 된 광서제가 개혁주의자들의 무술변법에 힘을 실어주며 일대 개혁을 추진하려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서태후는 수구파들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변법을 103일 만에 진압하고 광서제를 무력화시켰다. 결국 광서제는 10년간 유폐된 채 지내다가 1908년에 죽음을 맞았다. 다음날인 11월15일 서태후는 이제 2세밖에 안된 광서제 동생의 아들 푸이(溥儀)를 선통제로 세우고는 자신도 곧 73세로 눈을 감았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권력을 움켜쥐려했던 여인이었다. /조선
1907 - 독일군 장교 슈타우펜베르크(Stauffenberg, Claus, Graf Schenk von, 1907~1944) 태어남
아돌프 히틀러를 암살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육군 대령이며 북아프리카 전투에서 기갑사단의 사단장이었던 슈타우펜베르크는 1943년 4월 매우 심한 부상(왼쪽 눈과 오른손, 그리고 왼손의 손가락 2개를 잃었음)을 입었고 뒤이어 베를린의 예비부대 참모부에 재배치되었다. 점점 확산되던 육군 장교들의 히틀러 암살모의에서 주역을 맡았으며 계획된 암살을 실행에 옮기는 일을 자신이 직접 맡았다. 2번의 예비시도 끝에 1944년 7월 20일 라스텐부르크에 있는 히틀러 사령부에 폭탄을 장치하는 데 성공했으나 그 독재자를 죽이는 데는 실패했다. 동시에 베를린에서 계획된 쿠데타도 마찬가지로 실패했다. 슈타우펜베르크와 몇몇 공모자들은 그해 7월 20일 밤에 베를린에서 즉결 처형되었다. 이들은 이 사건 뒤에 벌어진 유혈참극에서 죽은 수천 명 가운데 첫번째 희생자들이었다
1887 - 미국의 화가 오키프(O'Keeffe, Georgia, 1887~1986) 태어남
위스콘신 주 선프레리 근처 농장에서 태어나 1904년 시카고 미술학교, 1907년 뉴욕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서 공부했으며 상업미술 활동을 했다. 1912~1916년에 텍사스 등의 학교와 대학에서 미술을 가르쳤다. 1916년 사진작가인 앨프레드 스티글리츠가 그녀의 소묘를 보고 작품성을 인정하여 화랑 ‘291’에서 개인전을 열어주었다. 이들은 1924년 결혼하였고 스티글리츠는 그녀의 작업을 항상 격려해 주었다. 스티글리츠는 그녀를 모델로 수백 점의 연작 인물사진을 찍었다. 그후 그녀는 뉴욕과 뉴멕시코에서 살다가 1946년 스티글리츠가 죽자 뉴멕시코 사막에서 은둔생활을 하며 그림을 그렸다.
작품의 주제는 주로 두개골, 짐승의 뼈, 꽃, 식물의 기관, 조개껍데기, 산 등의 자연을 확대시킨 것이다. 윤곽선이 율동적이며 자연에 대한 탐미적 경향을 보인다. 선명한 색으로 그리되 엷은 톤의 물감으로 원근법과는 다른 방법으로 대상에 강약을 부여했다. 그녀의 그림은 생물형태적 형상에 추상적인 아름다움을 부여하여 신비스럽고 때로는 상징적이기도 하다.
오키프는 서유럽계의 모더니즘과 직접적 관계가 없는 추상환상주의의 이미지를 개발하여 20세기 미국 미술계에서 독보적 위치를 차지했다. 후기 작품은 주로 뉴멕시코의 맑은 하늘과 사막 풍경을 그렸고 1970년에 휘트니 미술관에서 회고전을 개최하였다. 대표작으로 《검은 붓꽃 Black Iris》(1926), 《암소의 두개골, 적, 백, 청 Cow's Skull, Red, White and Blue》(1931) 등이 있다. 자서전 《조지아 오키프 Georgia O'Keeffe》가 1976년 발간되었다.
1887 - 미국의 시인 무어(Moore, Marianne Craig, 1887~1972) 태어남
미주리주(州)의 세인트루이스 출생. 1909년 브린 모어 칼리지를 졸업하고 칼라일 상과대학에서 공부하였다(1921). 뉴욕공립도서관의 사서직에 있다가, 1925년 문예잡지 《다이얼 The Dial》의 편집에 참여하였다. 이미지즘의 영향에서 출발하여, 그 후에 ‘사물주의(事物主義 Objectivism)’를 표방하는 독특한 시풍을 수립하였다. 그의 시는 명확한 이미지를 나타내고, 섬세하면서도 냉정하여 잘 억제되어 있고, 기지와 역설이 풍부하였다. 그 중에서도 《선시집 Selected Poems》(1935)과 《전시집 Collected Poems》(1951, 퓰리처상 수상)이 유명하다. 이 밖에도 《시집 Poems》(1921) 《관찰 Observations》(1924)과 라 퐁텐의 《우화시》의 운문 번역 《라 퐁텐의 우화집 The Fable of La Fontaine》(1954), 평론집 《편애(偏愛) Predilections》(1955) 등이 있다.
1876 - 프랑스의 시인 노아유(Noailles, Anna-Elisabeth Mathieu de, 1876~1933) 태어남
루마니아의 명문 출신이지만 파리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고 사망하였다. 그녀는 미인이고 조숙했으며, 21세 때에 노아유 백작과 결혼하였다. 처녀작으로 낸 시집 《헤아릴 수 없는 마음》(1901)이 크게 호평을 받아 명성을 얻었다. 잇달아 《나날의 그림자》(1902) 《생자(生者)와 사자(死者)》(1913) 《영원한 힘》(1920) 《고통이라는 명예》(1927) 등 많은 시집을 출판하였으며, 관능적인 향락과 불안과 우수(憂愁)가 담긴 시를 즐겨 썼다. 그 밖에 소설로는 《놀란 얼굴》(1904) 《지배》(1905) 등이 있다.
1875 - 중국의 민주혁명가 추근(秋瑾, 1875~1907) 태어남
별칭은 감호여협(鑑湖女俠). 자는 쉬인칭[璿卿], 호는 징슝[競雄]. 저장 성[浙江省] 산음(山陰:지금의 사오싱[紹興]) 사람으로 시(詩)와 사(詞)에 뛰어났다. 1904년 일본으로 유학하여 공애회(共愛會)·십인회(十人會)·홍문천지회(洪門天地會) 등에 참가하면서 혁명활동을 했고, 1905년초 중국으로 돌아와 광복회에 가입했다. 7월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중국동맹회에 가입하여 저장 성 책임자로 선출되었다. 1905년 11월 일본정부가 청조의 요청으로 '청국(淸國)학생단속규칙'을 공포하자 1906년초 항의하여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다. 1907년 1월 상하이[上海]에서 〈중국여보 中國女報〉를 창간하고 여권신장과 혁명을 부르짖었다. 후에 사오싱으로 가서 대통(大通) 사범학당을 운영했다. 또한 광복회와 연락을 맺고 광복군을 조직하여 청조(淸朝) 타도운동에 앞장섰다. ...
청나라 말의 혁명가 서석린(徐錫麟, 1873~1907)은 1904년 광복회(光復會)에 들어가 회당(會黨)을 중핵으로 하는 군대를 조직하여 청조(淸朝) 타도계획을 급선회시키려고 하였다. 같은 저장성 출신의 여인 추근(秋瑾)과 함께 무장봉기하여 청조 고관을 암살시킬 계획을 세우고, 1907년 7월에 안후이성[安徽省] 순무(巡撫) 은명(恩銘)을 암살한 데 이어 무장봉기했으나 실패하여 처형당했다. 추근도 이 사건에 관련되어 처형되었다.
1874 - 덴마크의 생리학자 크로그(Krogh, Schack August Steenberg, 1874~1949) 태어남
1874년 11월 15일 그레노에서 출생하였다. 코펜하겐대학교에서 동물학을 공부하였다. 1902년 그린란드 원정대에 참가하여 북극의 동물들을 연구하였으며, 특히 기체의 압력에 관한 연구에 관심을 나타내어 수중에서 동물의 생리에 관한 기압을 연구하였다. 1903년 개구리의 호흡에 관한 학위논문을 썼으며, 1916년 코펜하겐대학의 동물생리학 교수가 되었다.
1903년 동물의 물질대사에서 질소의 역할에 관한 연구로 빈 학사원상을 받았고, 1920년 모세관 운동의 조절기능을 발견하여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하였다. 저서로 《Anatomie und Physiologie der Kapillaren》(1924)이 있다.
1871 - 오스트리아의 식물학자 체르마크 폰 자이제네크(Tschermak von Seysenegg, Erich, 1871~1962) 태어남
완두 실험에 관한 멘델의 고전적 논문을 발견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작센 프라이베르크 근처 로트포어베르크 농장에서 일하기 위해 빈에서의 학업을 중단했다. 1896년 할레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몇 군데의 품종개량소에서 일했고, 1901년 빈에 있는 농업 아카데미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실질적으로 그곳에서 교수 생활의 대부분을 보냈다.
1898년 봄에 겐트 식물원에서 완두 품종개량 실험을 시작했다. 다음해 빈 근처 에슬링겐의 임피리얼재단(Imperial Family's Foundation)에 근무하면서, 자신의 정원에서 완두에 대한 실험을 계속했다. 그는 실험결과를 저술할 때 멘델의 작업을 참조했으며, 빈대학교 도서관에서 그에게 보낸 멘델의 논문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멘델의 완두 실험이 자신의 실험과 일치하며 어떤 면에서는 자신의 실험보다 잘 되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
1862 - 독일의 극작가, 소설가 하우프트만(Hauptmann, Gerhart, 1862~1946) 태어남
슐레지엔의 바트잘츠브룬 출생. C.하우프트만의 동생. 어릴 때 경건한 종교적 환경에서 자라나 한때 조각(彫刻)을 공부하다가 후에 예나대학·베를린대학에서 생물학·철학을 공부하였다. A.홀츠, J.슐라프가 제창하는 ‘철저한 자연주의’의 영향하에 처녀희곡 《해뜨기 전Vor Sonnenaufgang》(1889)을 발표하고, 일약 자연주의 문학의 기수가 되었다. 이어 가정비극 《쓸쓸한 사람들 Einsame Menschen》(1891)에서는 삼각관계로 고민하는 무력한 남편을 묘사하였고, 직공(織工)들의 반란을 다룬 군중극 《직조공들 Die Weber》(1892)로 극단에서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걸작 희극 《비버 모피(毛皮) Der Biberpelz》(1893)를 비롯하여 《마부 헨셸 Fuhrmann Henschel》(1898) 등의 사실극이 발표되었다.
한편, 점차 상징적·낭만적 경향이 짙어져 몽환극(夢幻劇) 《한넬레의 승천(昇天) Hanneles Himmelfahrt》(1894), 서정미 넘치는 낭만적 상징극 《침종(沈鐘) Die versunkene Glocke》(1896), 《그리고 피파는 춤춘다 Und Pippa tanzt!》(1906) 등을 거쳐 후년의 인형극 《축전극(祝典劇)》(1913), 최후의 대작 《아트리덴 사부극(四部劇) Die Atriden-Tetralogie》(1941∼1949)에 이르는 작품계열이 있다. 그 밖에 단편소설로는 에로스의 승리를 구가한 걸작 《소아나의 이단자 Der Ketzer von Soana》(1918), 장편으로는 종교적 사상체험을 담은 《기독광(基督狂)》(1910) 등이 있다. 서정시인 《틸 오일렌슈피겔 Till Eulenspiegel》(1927)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후 독일 민족의 도의적인 분기(奮起)를 일깨웠으며, 서정시집으로 《오색서(五色書) Das Bunte buch》(1888) 등을 남겼다.
하우프트만은 자연주의에서 출발하였으며, 그 완성자인 동시에 그 초극자(超克者)이기도 하다. 그는 독일문학에 공통된 관념적인 묘사를 피하고 하층민에서 영웅에 이르기까지 살아 있는 인간과 생의 고뇌 그 자체를 사실적이면서도 구상적(具象的)으로 부각시킨 점에서 독일로서는 독자적인 작가였다. 1912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기독광》과 《소아나의 이교도》는 박찬기 번역으로 을유문화사에서 간행되었다.
1776 - 멕시코의 소설가 페르난데스 데 리사르디(Fernández de Lizardi, José Joaquín, 1776~1827) 태어남
멕시코 독립 운동에서 활약한 주요 문인이었다. 주로 독학으로 공부한 페르난데스 데 리사르디는 '멕시코 사상가'라는 필명으로 글을 썼는데, 이는 그가 창간한 급진적인 신문 〈펜사도르 멕시카노 El pensador mexicano〉(1812)에서 차용한 이름이었다. 군주제와 교황권을 모두 경멸했기 때문에 투옥·파문을 당했다. 스페인계 중앙 아메리카 최초의 악한소설 〈욕심쟁이 앵무새 El periquillo sarniento〉(1816)는 19세기초 멕시코 사회를 다채로운 이야기를 통해 묘사하고 있으며, 프랑스 계몽주의 사상과 루소의 교육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 또한 〈키호티타 양과 그녀의 사촌 La Quijotita y su prima〉(1819)·〈슬픈 밤과 행복한 낮들 Las noches tristes y días alegres〉(1823) 등도 썼다. ...
1670 - 모라비아(Moravia :현재의 체코)의 교육자 코메니우스(Comenius, Johann Amos, 1592~1670) 세상 떠남
헤르보른대학교와 하이델베르크대학교 등에서 공부한 다음 고국으로 돌아가, 형제교단(Unitas fratrum)이 설립한 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30년전쟁(1618~1648)으로 합스브루크 왕가의 지배하에 들어가자 합스부르그의 왕인 페르디난드 2세의 체포를 피하여 망명, 1625년 이후 조국에 돌아가지 못하였으며, 영국·스웨덴·폴란드 등 여러 신교 국가에 초청되어 평화를 위한 교육의 구상에 의거한 학교개혁을 실천하는 한편 유럽의 평화실현구상을 발표하였다.
30년전쟁 초기에는 절망적인 현실부정사상을 지니고 당시의 정치·학문·종교를 모두 부정하였으나, 원리적으로 인간과 사회를 다시 새롭게 포착하여 청소년교육과 민중계몽의 방법을 범지(汎知:pansophia)로서 체계화하였다.
그는 저서 《대교수학(大敎授學) Didactica magna》(1657)에서, 교육을 인간 생산의 위치에 놓고 고유한 생산방법을 전개하였다. 당시 유럽에서 그의 이름은 저서 《열려진 언어의 문 Janua linguarum reserata》(1631)과, 범지의 구상에 근거한 유아용 교과서인 《가감계도표시 Orbis sensualium Pictus》(1658)로 유명하였다.
유아교육에서 성인교육까지 이르는 일관된 교육구상, 단선적 학제안, 남녀공학의 원리 그리고 아카데미의 구상 등은 그 후의 교육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교육방법에서의 직관주의와 언어의 결합, 교육내용에서의 실학주의, 전체 민중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제도, 그리고 교사의 전문성 등에 관한 선진적인 구상은 현재의 교육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1957년에 UNESCO가 중심이 되어 그의 사상을 널리 보급시켰으며, 그의 조국에서는 대표적 저작인 《교육학총저작집 Opera didactica omnia》(1657)의 출판 300년을 기념하여, 이 책의 사진판을 공간하였다.
1630 - 독일의 천문학자 케플러(Kepler, Johannes, 1571~1630) 세상 떠남
바일 출생. 군인의 아들로 태어나 4세 때에 천연두를 앓는 등 육체적인 병약함과 경제적인 빈곤 속에서 자랐다. 17세에 아버지가 전상으로 죽자, 이듬해 튀빙겐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여 신학을 공부하고 1591년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신학에 싫증을 느끼고, M.메스트린 교수로부터 소개받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地動說)에 감동되어 천문학으로 전향하였다. 1594년 그라츠대학에서 수학과 천문학을 강의하는 한편, 점성력(占星曆)의 편수(編修)를 위촉받아 일하면서, 그 해 겨울의 강추위와 전쟁을 예고한 것이 적중하여 좋은 평판을 받았다. 1595년 천체력(天體曆)을 발간하고, 이듬해 《우주구조의 신비》를 출판하여 행성의 수와 크기, 배열간격에 대한 생각을 밝혔다. 이로 인하여 T.브라헤와 G.갈릴레이를 알게 되었다.
당시는 신교와 구교의 싸움이 격렬하였으므로 신교신자인 케플러는 구교파로부터 심한 배척을 받았다. 그 후 1600년 그라츠대학을 떠나 프라하로 옮겨 브라헤의 제자가 되었다. 이곳에서 루돌프 2세의 보호를 받으며, 화성(火星)의 운행을 관측하였고, 브라헤가 16년간에 걸쳐 연구한 화성 자료를 브라헤의 임종시 인계받았다. 1601년 브라헤의 후임으로 궁정의 수학자가 되었다.
그 후 행성들의 합(合)을 연구하던 중에 뱀주인자리에서 초신성(超新星:케플러신성)을 발견하였다(1604). 1609년 화성관측 결과를 《신(新)천문학》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였다. 여기서 행성의 운동에 관한 제1법칙인 ‘타원궤도의 법칙’과 제2법칙인 ‘면적속도(面積速度) 일정의 법칙’을 발표하여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수정 ·발전시켰다. 또한 운동의 기인(起因)으로서 태양의 자전에 따른 자기적(磁氣的) 추진력을 제안하였다. 1611년에는 천연두로 아내와 한 아들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굴절광학 Dioptrice》을 저술하여 케플러식 망원경의 원리를 설명하였다. 1612년 루돌프 2세가 죽어 더이상 궁전의 보호를 받을 수 없게 되자, 린츠대학의 수학교수 겸 측량감독으로 자리를 옮겼다.
1619년 《우주의 조화 De Harmonices Mundi》를 출판하여, 행성의 공전주기와 공전궤도의 반지름과의 관계를 설명한 행성운동의 제3법칙을 발표하였다. 1626년 종교전쟁을 피하여 울름으로 이전하였고, 다음해에 로그를 사용하여 행성의 위치를 계산한 《루돌프표(表) Tabulae Rudolphinae》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당시의 원양항해자들로부터 큰 신뢰를 얻었다. 1628년 발렌슈타인 후작의 전속 점성술사가 되어 슐레지엔으로 거처를 옮겼다. 1630년 11월 15일 길에서 급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