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상 정치철학상 보수는 개인의 자유와 도덕성을 강조하고 전통, 시장, 법, 애국의 가치를 중시한다. 이러한 보수의 관점은 우리 사회의 발전을 위하여 소중한 지침을 제공한다. 진보를 말하는 사람도 이러한 보수의 가치를 외면할 것이 아니라, 그 합리적 핵심을 수용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명박스럽다’, ‘한나라스럽다’라는 경멸 섞인 신조어가 나도는 이유
그런데 현재 한국 사회에서 ‘보수’란 단어는 무엇을 떠올리게 할까? 정치적․문화적 권위주의, 대북 강경노선, 경제성장 중시와 인권·복지·환경 경시, 강압적 법집행, 서울 중심 및 특권층․엘리트 중심 정책 등이 아닐까. 소통 보다는 명령과 지시를 선호하고, 정부·체제 비판자를 ‘이적행위자’로 낙인찍어 처벌하고,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장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금지하고,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형사처벌로 억압하며, “무찌르자 공산당”이나 “멸공통일”식의 대결일변도의 대북정책을 추구하고, 지식기반사회에서 토목을 통한 성장을 밀어붙이고, 복지를 걸인에 대한 적선으로 생각하거나 ‘빨갱이’ 정책으로 치부하며 경시하고, 경제적 효율성의 미명 아래 지방의 추락과 공동화(空洞化)를 무시하고, 상속세·증여세 등 부자를 위한 감세정책을 고수하는 것이 한국 사회 자칭 ‘보수’의 모습이다. 게다가 이들은 전쟁불사를 호언하면서도 자신은 군대를 가지 않았거나 자신의 자식을 군대에 보내는 것을 꺼리는 모순적 행태, 청년층의 투표율이 높아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퇴행적 행태를 보인다.
도대체 이런 사람들을 ‘보수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런 사람들에게 ‘수구꼴통’이라는 비어(卑語)가 붙여지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정부와 여당의 지도부를 형성하고 있으니 세간에는 ‘명박스럽다’, ‘한나라스럽다’라는 경멸 섞인 신조어가 나돌 수밖에 없다. 이에 나는 한국의 보수진영 사람들에게 미국 영화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본받으라고 권하고 싶다.
진품 보수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 배워라
이스트우드는 진정한 보수주의자의 역할모델이 될 만한 사람이다. 그는 문자 그대로 ‘골수’ 공화당원이고, ‘자유지상주의자’(libertarian)를 자처한다. 그는 70-80년대 <더티 해리> 씨리즈에서 범죄인에 대한 개인적 응징을 정당화·찬미하며, 히피 운동과 민권 운동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민주당원과 진보파가 주류인 헐리우드에서는 물론 미국인 전체로부터 넓고 깊은 존경을 받고 있다. 예컨대, 이스트우드는 자신이 만든 <미스틱 리버>(2003)에 주연으로 출연한 팀 로빈스, 숀 펜 등 진보파 배우로부터도 존경을 받고 있으며, 2009년 미국의 대표 설문조사기관 ‘해리스 폴’의 설문조사에서 미국 내 가장 인기 있는 영화스타로 뽑힌 바 있다. 이는 단지 그가 군 복무를 마친 공화당원이면서도 월남전과 이라크전에 반대했고, 환경보호에 적극 나섰으며, 무기통제, 실업보험, 여성의 낙태권, 동성애자간의 혼인 등을 찬성하는 등 진보적 입장을 견지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일관된 신조와 노장의 연륜이 녹아 있는 일련의 영화가 진보와 보수를 넘어 공유해야 할 묵직하고 진지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밀리언 달러 베이비>(2004)는 손님이 먹다 남은 고기조각을 싸서 먹으며 버텨야 하는 생활환경 속에 있는 여성 복서지망생 매기와 아일랜드계 늙은 권투 트레이너 프랭크 간의 ‘부녀’적 인연의 전개와 비극적 종말을 그린다. <그랜 토리노>(2008)는 월남전의 여파로 미국에 정착하게 된 남아시아 소수민족 출신인 이웃 청소년 타오와 수와 교유하고 이들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던지는 고집불통이자 외골수인 한국전 참전용사 월트를 그린다. 두 영화 모두에서 이스트우드가 분한 주인공은 땅에 떨어진 ‘가족의 가치’에 절망하면서도 혈연을 넘어서는 새로운 연대를 실천한다. 프랭크과 월트는 모두 완고할 정도로 자신의 힘에 의존해서 자신의 삶과 존엄을 책임지려는 개인주의자이자 자신의 과오와 실수에 대하여 홀로 참회하는 도덕주의자이면서도, 이를 넘어 자신의 힘이 닿는 최대한 약자를 돌보는 보수파 백인 남성이다. 물론 프랭크와 월트는 모두 이스트우드의 분신이자 ‘아바타’이다. 그리고 <더티 해리>의 해리와 달리 <그랜 토리노>의 월트는 총을 내려 놓는다. 그리하여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 프랭크는 자신이 갤릭어로 “Mo Cuishle”(=My darling, my blood)라고 부른 매기를 자기 손으로 안락사시켰지만, 그녀는 <그랜 토리노>에서 월트의 1972년형 포드 그랜 토리노를 물려받은 타오로 부활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이스트우드가 “극우 보수파들이 공화당을 파멸시키고 있다”고 비판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네오 콘’과 ‘신자유주의’의 기치 아래 보수와 자유주의의 가치를 군사화하고 강자 위주로 폐색(閉塞)하는 행태를 그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의 보수주의는 닫혀 있지 않고 열려 있으며, 그의 보수주의에는 자기 책임, 도덕성, 그리고 약자에 대한 연민과 연대가 녹아들어 있다. 그리하여 그는 진보파나 대중이 미워할 수 없는 보수주의자 아니 사랑할 수밖에 없는 보수주의자이며, 그의 보수주의는 희망과 따뜻함이 있는 보수주의이다.
개념 있고 수준 있는 보수를 보고 싶다
필자는 우리 사회에서 이스트우드 정도의 개념 있고 수준 있는 보수를 보고 싶다. 달리 비유하자면, 이승만과 박정희의 동상 밑을 맴도는 보수가 아니라, ‘G20’ 수준의 보수, ‘월드컵 16강’ 수준의 보수 말이다. 사실 이스트우드류의 ’마초’ 또는 ’꼰대’라면 그 ‘마초성’과 ‘꼰대성’ 마저 ‘간지’나지 않은가. 불행 중 다행으로 지방선거 이후 한나라당 내에는 변화의 흐름이 형성되고 있다. 과거 ‘제헌의회파’의 지도자로 민주화운동을 이끌었고 지금은 당내 ‘쇄신 모임’을 주도한 김성식 의원은 정부가 국민을 이기려하면 안된다고 강조하며. “덜 쪽팔린 정치”를 하고 싶다고 말한다. 과거 ‘소장파’의 핵심이었던 남경필 의원은 국민들이 한나라당에 대하여 ‘악플’을 다는 게 아니라 ‘무플’로 대응하는 단계로 갔다고 진단하며 당의 혁신을 촉구하고 있다. ‘귀족풍’ 홍정욱 의원도 한나라당은 진보를 포용하는 ‘개방적 보수’, ‘쿨(cool) 보수’로 재탄생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붉은 한나라”가 되는 것을 두려워 말아야 한다며 치고 나온다.
필자는 스스로 보수가 아니라 진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한나라당 내의 이러한 흐름이 용두사미로 끝나지 않고 강화되기를 진정으로 희망한다. 그리고 평생 도시 빈민의 벗으로 “가짐 없는 큰 자유”를 추구했던 고 제정구 의원의 정신이 한나라당에서 살아나길 바란다. 그렇지 못하다면 한나라당은 영원히 ‘고·소·영’과 ‘강·부·자’ 집단, 사법부의 판결이 마음에 안 든다고 판사를 모욕·위협하고 대법원장 차에 달걀을 던지는 ‘대한민국어버이연합’의 노인들,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군복, 군화, 선글라스를 갖추고 나와 가스통 시위를 벌이는 사람들의 대리인·대변인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보수를 지향하는 사람이라면, 80세의 진품 보수 이스트우드 옹(翁)이 한국에 와서 이런 사람들을 보면 뭐라고 말했을까 생각하길 바란다.
첫댓글 테러리스트라고 했을까요
파시스트라고 했을까요
그랜토리노라는 영화를 봤는데, 클린트이스트우드답구나 했더랬슴니다. 최근 히어 애프터라는 영화를 개봉했다길래 볼라 했는데 흥행성적이 저조한지 cgv인천에서 상영을 안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