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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저 울고 싶어요.
시 56:1-9
영화 ‘국제시장’을 보았습니다.
상영 두 달 여에 관객 수 1,330만 명을 넘었다고 합니다.
이 영화를 보던 어떤 부부가
“자기는 왜 자꾸 울어요......?”
“이 영화 보고 안 우는 사람이 정상이여?”
라고 큰소리로 말해서 곁의 사람들이 함께 웃었다고 쓴 감상평을 읽었습니다.
저는 영화 스토리가 우리 세대가 겪어온 일이어서
‘다 아는 그런 이야기 가지고 뭘 그렇게까지.......’ 하는 마음으로 스크린 앞에 앉았습니다.
영화가 시작되어 6.25전쟁 이후 가난했던 시절을 고달프게 살아오면서,
가족을 소중하게 여기는 희생,
웃음을 빚어내는 우정,
아픈 사람끼리 만나 등을 기대고 사랑하는 이야기들이 화면에 가득 담겨 나왔습니다.
“당신의 인생에 왜 당신은 없느냐?”는 아내의 항의,
“이런 불행을 우리 아이들이 겪지 않고 우리가 겪은 게 얼마나 다행인가?”라고 쓴
남편의 편지글이 감동적이었고,
영화 첫 장면에서, 후퇴하는 군대가 배에 실려 있던 무기를 내버리고 피난민을 태웠던
사상 유례가 없을 인간애에서도 감동을 크게 받았습니다.
스토리가 전개되자 스멀스멀 마음 밑바닥에서 눈물기가 스미더니
눈 가에 가득 맺혔다가 주르르 볼을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옆에 있는 식구들한테 우는 것을 들킬까봐
닦지 못한 눈물이 볼을 지나 턱에 매달렸습니다.
극장 안이 깊은 바다 속처럼 가라앉은 것을 보면 나만 우는 것이 아니었나 봅니다.
영화가 끝났어도 모두들 한 동안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아마 울었던 흔적을 지우는 뒤처리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참 오랜만에 흘려본 눈물입니다.
살아온 세월의 무게가 무거워서 그러는지 요즘 별 것도 아닌 일에 곧잘 울먹이게 되지만
그러나 눈물을 보이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스스로 주책 스럽다는 생각이 들고,
다른 사람들 보기가 민망해서 눈물을 삼켜 감추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영화관에서 울었습니다.
눈물을 참으려고 껌벅거렸지만 도저히 막을 수 없게 되자
그냥 흐르는 대로 내버려 두었습니다.
영화관이 어둡고 스크린을 향하고 앉아 있어서 부끄러움을 감출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박근혜 대통령은 이 영화를 보러 올 때 ‘수건을 준비해 갖고 왔다.’면서
관람 중에 계속해서 눈물을 훔쳐냈다고 합니다.
어쩌면 울 작정을 하고 영화관을 찾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대통령의 일을 하면서 울고 싶은 일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사람이 살면서 울 일이 참 많습니다.
아기 적 요람에서 뿐 아니라 살아가면서 울 일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울 자리를 찾고, 눈물을 닦아줄 누군가를 찾아 헤맵니다.
어렸을 때 울 일이 있으면 엄마한테 갔습니다.
엄마는 설움을 받아 주고, 위로해 주고, 눈물을 닦아 주었습니다.
엄격한 아버지 앞에서는 잘 울 수 없었습니다.
성인이 된 다음에도 아버지보다 어머니에게 정을 더 느끼는 것은
어머니의 품이 울 수 있는 자리였기 때문일 겁니다.
육신이 아프면 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도움을 받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아파서 울고 싶을 때 찾아가서 마음 놓고 울 수 있는 데가 어디일까요?
풀어놓지 못하고 속으로 맺히는 설움이 심신의 병이 됩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오늘의 우리들은 울 데가 없어서,
눈물을 씻어 줄 사람이 없어서 외로워하고 있습니다.
유대의 탈무드에 ‘사람 앞에서는 웃고, 하나님 앞에서는 울라’는 말이 있습니다.
울고 싶은 사람은 하나님을 찾아가라는 충고입니다.
본문은 “다윗이 가드에서 블레셋 사람에게 잡힌 때에” 라는 표제가 붙은 다윗의 시입니다.
이 시의 배경인 사무엘 상 21장에서 다윗은 사울 왕에게 쫓기는 정처 없는 신세였습니다.
쫓겨 다니는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윗은 두려워서 울고 고독해서 울었습니다.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8절)
다윗은 ‘저의 떠돌아다니는 사정을 주님께서 헤아리셨으니
저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아 주십시오.’ 하고
하나님 앞에서 통곡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래도 다윗은 울 자리가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울 자리가 있다면 그것은 축복입니다.
‘엄마가 아기에게 맨 처음 준 것은 눈물이고
또 아기가 엄마에게 맨 먼저 드린 것도 눈물’이라고 합니다.
엄마는 아기를 낳는 진통을 겪으며 아파서 울다가,
산고 끝에 태어나서 울고 있는 아기를 보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이 눈물에는 물기와 소금기만이 아닌 사랑과 생명의 의미가 녹아 있습니다.
아기는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웁니다. 가르치지 않아도 울고,
울지 않으면 엉덩이를 때려서라도 울게 합니다.아기는 울음으로 새 삶을 시작합니다.
그래서 사람의 최초 의사전달 수단은 울음입니다.
아기가 말을 배우기까지는 울음으로 의사를 표합니다. 엄마는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고 무엇을 요구하는지 압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마음에 맺혀서 차마 말 못할 사정에 부딪히면 눈물을 흘립니다.
그 눈물을 보아주고, 말 못하는 심정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너무나 고마운 사람입니다.
당연히 그 사람을 좋아하고 의지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유교전통이 강한 우리나라에서는 울음을 절제시켰습니다. 특히 남자들이 우는 것은 사내답지 못한 행동이라고 꾸짖었습니다.
눈물은 여자들이나 흘리는 것으로 여겨서
눈물이 여인의 가장 강한 무기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생리적 구조로 볼 때 남자의 눈물샘이 여자의 것보다 훨씬 커서
흘릴 수 있는 눈물의 량이 더 많다고 합니다.
여자보다 남자들이 울 일이 더 많은 것을 창조주께서 아시고
큰 눈물샘을 마련해 주셨나 봅니다.
그래서 남자의 눈물은 대포알이고
여자의 눈물은 소총알 이라는 재미있게 비교한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울보 아빠입니다.
아이들이 자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눈물이 납니다.
뒷모습을 보면 이 아이들이 겪어야 할 인생의 짐들이 보여서
그 작은 등이 가여워 훌쩍입니다.”
페이스북에 만화를 올리고 있는 하재욱 작가의 말입니다.
“이 땅의 가장들은 속내를 이야기 할 곳이 없어요.
절대 흔들려서도, 약해져서도, 울어도 안 되지요.
저는 약한 이야기들을 여기다 해버리면서(만화 글로 써내면서) 힘을 얻습니다.
저와 비슷한 남성들이 많이 공감합니다.
그리고 그 아내들이 ‘우리 남편 불쌍하다. 가족에 대해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구나.’
라며 남편을 다시 보고요.”
우리가 서로의 설움을 이해해주고 받아준다면
참으로 많이 다정해질 수 있을 겁니다.
남편이 아내의 눈물을 받아준다면 더 없이 고마운 남편입니다.
아내가 남편의 눈물을 닦아 줄 수 있다면 너무나 사랑스런 아내입니다.
그들 부부는 숫한 갈등과 문제를 눈물로 녹여가면서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자녀의 눈물을 받아주는 엄마와 아빠의 품이
우리 자녀들에게 너무나 필요합니다.
여러분, 울고 싶거든 그냥 펑펑 우세요.
암 전문의 이병욱 박사는 아픈 사람에게
“솔직하게 눈물을 흘리는 시간이 꼭 필요합니다.
모든 것을 토해 내듯이 큰 소리로 우세요.” 라고 권한다고 합니다. 이 박사는 이어서
“고치기 어려운 환자는 말기의 암환자가 아니라
감정이 말라버려 마음이 돌처럼 굳어진 환자입니다.
눈물은 현대의술로 못 고치는 병을 치료하는 ‘신이 내린 자연치유제’입니다.
눈물을 흘리면 어린아이 같은 순한 마음과 영혼으로 되돌아가 병든 마음이 회복됩니다.
눈물은 하나님이 주신 천연 항암제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가슴 속에 맺힌 분노, 미움, 슬픔과 한을 눈물로 담아 펑펑 쏟아내야
몸 안의 독소를 녹여내고 건강하게 살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마음과 육신의 병을 고치는 최고의 방법은
마음의 빗장을 풀어놓고 한바탕 눈물로 씻어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설움이 복받치는 순간에 이르면 뇌파는 춤을 추고 심장 박동이 빨라집니다.
하지만 눈물을 흘리는 동안에 심장 박동이나 지율신경계가 안정 상태를 보입니다.
어떤 학자는 ‘목을 놓아 우는 것은 뇌를 리셋 하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고 했습니다.
눈물 실험을 위하여 10명에게
슬픈 영화를 보여주고 흐르는 눈물을 시험관에 담게 했습니다.
다음에는 양파 껍질을 벗길 때 나는 눈물을 모았습니다. 검사결과 슬퍼서 흘린 눈물에는 양파로 인해 흘린 눈물에 없는
스트레스 호르몬이 있었습니다. 카테콜라민은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우리 몸을 긴장시키기 위해 분비되는 호르몬인데
이 호르몬 분비 상태가 긴 시간 지속되면 혈관이 좁아져서 심혈관에 부담을 주게 됩니다.
이 스트레스 호르몬이 눈물과 함께 몸 밖으로 배출되었던 것입니다.
‘뇌의 혁명’의 저자 하루야마 시게오 박사는
“우는 것은 스트레스를 지우는 일이다.
뇌에서 좋은 호르몬을 내는 방법과 나쁜 호르몬을 제거하는 방법이 있는데
울음도 결과적으로는 좋은 호르몬을 내는 것과 비슷한 효과가 있다.
왜냐하면 울음은 몸속에 쌓여있던 나쁜 스트레스를 없애기 때문이다.”고 말했습니다.
감정에서 우러나는 눈물은 몸 안의 스트레스를 풀어내고
혈액 순환을 활발하게 해서 피부 피용에도 탁월한 효과를 나타낸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여성들의 눈물 미용법이 활발히 진행 중이라고 합니다. 우리들 감정의 바다에서,
웃음을 ‘파도’에 비유한다면 눈물은 ‘해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정으로 끌어올린 한 번의 눈물은
마음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거나 감춰 두었던 상처들,
혼탁해진 영혼까지 정화시키고 순화시킵니다.
눈물은 하나님께서 만드셨습니다.
눈물을 만드신 것을 보면 하나님도 눈물이 많으신 모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울보로 지으셨기 때문에 우리의 눈물에 관심이 많으십니다. 우리의 울음을 알아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드려야 합니다.
시편 56편의 초점은 8절입니다.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세상에 이보다 더 절절한 감정 표현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아픈 눈물을 이토록 아름다운 시구로 다듬어낸 다윗은 멋진 시인입니다.
다윗은 자기가 흘린 눈물을 하나도 빠짐없이 눈물 병에 담아 주시기를 애원합니다.
울게 된 사연도 주님의 책에 기록하시어 두고두고 기억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흘린 눈물을 담아 두고 계십니다.
그냥 담으실 뿐 아니라 흘린 눈물의 량을 기록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우십시오.
하나님은 자녀들의 눈물을 옷자락에 받아 주십니다.
상처 받고 굳어진 마음을 열기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한다면
기도와 사랑으로 제단의 두 기둥을 삼고 하나님 앞에서 우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아기 같이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소리 내어 울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부끄럼 없이 흘리는 눈물로 위로와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시 84:6-7)
눈물골짜기 저 건너편에서 하나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흘리는 눈물이 헛되지 않게 해주십니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사 38:3-6)
하나님은 히스기야 왕이 드린 눈물의 기도를 받으셨습니다.
눈물로 뿌린 씨의 열매를 반드시 거두게 하십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 126:5-6)
오늘도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울고 있으면
하나님은 눈물을 닦아 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울고 싶으면 울어라.
나는 네 눈물을 안다.
나는 항상 네 곁에 있단다.
나는 너를 끝까지 사랑하고,
내가 너를 영원히 지켜 주겠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우십시오.
그러나 울리지는 마십시오.
남을 슬프게 하고, 억울하게 하고, 괴롭혀서 울리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자녀의 눈물을 병에 담으실 때 그 눈물의 사연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자녀를 울리고 눈물을 흘리게 한 사람에게 섭섭해 하실 것입니다.
본문에서 다윗이 탄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오래 숨어서 기다리고 내 발걸음을 살피며 나를 죽이려고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그들이 달아나지 못하게 해 주소서.
오 하나님, 분노하시고 그들을 납작하게 낮추소서.”(시 56:6,7)
“행악하는 너희는 다 내 곁을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내 모든 원수가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홀연히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
(시편6:6-10)
어떤 부부가 쪼들리는 살림 때문에 자주 싸우더니
‘살기가 싫어졌다.’고 하소연했습니다.
살림살이가 어려울수록 서로를 이해하고 격려해야 합니다. ‘살림’이라는 말이 ‘살린다.’에서 왔습니다.
살림을 한다는 것은 가정과 식구를 살리는 일을 한다는 말입니다.
살려주는 일은 기쁨을 주는 일입니다.
그러나 식구들이 살고 싶지 않게 만드는 것은 눈물을 흘리게 하는 일입니다.
남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 주는 사람은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대신 맡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남의 눈에서 눈물이 나게 하는 사람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가 마주한 사람의 얼굴에서 웃음이 아니라 눈물을 보기 때문입니다.
내 앞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 피어나는 웃음이 곧 나의 행복입니다.우리는 생존경쟁이 끊임없는 세상에서 눈물 없이 살아가기 어렵습니다. 남의 눈에 눈물을 흘리게 하고 이기는 것은 결코 승리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남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이 승리자입니다.
여기에 교회의 사명이 있습니다.
교회는 우는 사람과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 우셨습니다(히5:7).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사랑의 눈물을 흘리신 예수님께서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어라.”(롬14:15) 하셨습니다.
남을 위해서 흘리는 눈물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어린 왕자’를 쓴 생텍쥐페리는 슬픔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살아 있다는 증거이고,
특히 남을 위해 흘리는 눈물은 모든 사람들의 가슴 속에 심는 보석이라고 했습니다.
계시록 21장에서 천국의 그림을 봅니다.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3,4절)
예수께서 가르치신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는 기도가 응답되는 자리가 교회입니다.
천국처럼 온전할 수는 없지만 교회는 천국의 지점입니다.
교회는 눈물에 젖은 인생들이 머물 수 있는 쉼터입니다.
주님은 인생의 눈물을 기쁨의 샘물로 바꿔주시려고 물과 피를 쏟으셨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세워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우리의 눈물을 거두시려고 흘리시는 눈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예수님처럼 이웃의 눈물을 씻어주는 일을 해야 합니다.거듭 말씀 드리거니와 교회는 사람들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는 모임이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을 주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나의 기쁨은 남의 눈물을 먹는 만큼 커집니다.
다른 사람이 나로 인하여 기뻐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나의 기쁨이 참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함께 다짐하십시다.
사람들의 눈에서 눈물을 씻어주시는 예수님을 따라서
식구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식구가 되겠습니다.
성도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성도가 되겠습니다.
이웃의 눈물을 닦아주는 교회를 세우겠습니다.
누구든지 울 일이 있는 사람이 찾아오면 그의 눈물을 닦아주는 교회로 세우겠습니다.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려면 그의 눈물과 함께 해야 합니다. 눈물이 아니면 씻어낼 수 없는 설움과 아픈 상처를 가진 사람들,
그들의 눈물을 씻어주고 위로하는 일 보다 더 보람된 일은 없을 것입니다.
눈물을 닦아주는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이제, 여러분의 호주머니에 있는 손수건이 내 눈물을 닦는 데만 쓰지 않고
남의 눈물을 닦아 주는 데에도 쓰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울 일이 참 많으시지요?
울고 싶어지거든 그냥 펑펑 우십시오.
곁에서 누가 울거든 눈물을 닦아 주면서 함께 우십시오.
그리고 꼭 하나님 앞에서 우십시오.
다윗처럼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하고 기도하면
주님께서 받아 안고 위로해 주십니다.
주님은 약속하셨습니다.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다.”(계 7:17)
설교 후의 기도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다.”고 일러주신 주님!
험한 세상, 눈물 골짜기를 지나듯 살면서도
차마 소리 내어 울지 못했던 저희들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의지하여 주님 앞에서 울겠습니다.
눈물은 슬프오나 눈물을 닦아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 때문에
행복한 자가 되었으니 감사드립니다.
저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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