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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고학생부군신위, <顯考學生府君神位〉
흔히 우리나라를 일컬어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이라고 한다. 즉 ‘동쪽에 있는 예의의 나라’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 말은 분명 우리 스스로 칭한 말은 아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동쪽에 있는 나라라고 말한 것으로 볼 때 이 말을 한 사람은 분명 서쪽에 있는 어떤 나라의 사람이 한 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말은 과연 누가 말한 것일까? 그 근거를 찾다보니 약 2300년 전에 공자(孔子)의 7대 후손 공빈이 쓴 「동이열전, 東夷列傳」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곳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있다.
“ 먼 옛날부터 동쪽에 나라가 있는데 이를 동이(東夷)라 한다. 그 나라에 단군(檀君)이라는 훌륭한 사람이 태어나니 아홉 개 부족국가 구이(九夷)가 그를 받들어 임금으로 뫼셨다. 일찍이 그 나라에 자부선인(紫府仙人)이라는 도(道)에 통한 학자가 있었는데, 중국의 황제(黃帝)가「청구」땅 공동산에서 가르침을 받았으며 내황문(內皇文)을 받아가지고 와서 백성들에게 생활방법을 가르쳤다. 또한 순(舜)이 중국에 와서 요(堯)임금의 다음 임금이 되어 백성들에게 사람 노릇하는 윤리와 도덕을 처음으로 가르쳤다.
또한 그 나라의 자식들은 부모에게 극진히 효도하고 부모가 돌아가시면 3년을 슬퍼했다. 비록 그 나라가 크고 강성했지만 남의 나라를 업신여기지도 않고 침범하지도 않았다.
풍속은 순후(淳厚)해서 길 가는 이들이 서로 양보하고, 음식 먹는 것을 서로 양보하며, 남자와 여자가 따로 거처해 혼잡하지 않으니, 이 나라야말로 동쪽에 있는 예의바른 군자의 나라(東方禮義之國)가 아니겠는가?
이런 까닭에 나의 할아버지 공자(孔子)께서 ‘그 나라에 가서 살고 싶다.’ 고 하시면서, ‘전혀 누추하지 않다.’ 고 말씀하셨다.”라고 적고 있다.
동이열전(東夷列傳)에 의하면, 중국 유교의 시조(始祖)라 할 공자마저도 이 나라를 두고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이라고 부르며, 이 예의의 나라에 가서 살고 싶다고 한 예(禮과)와 도(道), 효(孝)와 충(忠)의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 아니었던가.
예(禮)와 도(道), 효(孝)와 충(忠)의 나라였던 이 나라! 얼마나 강성했던지 옛 고조선과 옛 고구려지역에는 이집트 피라밋보다도 더 큰 피라밋들이 수없이 발견되었는데, 중국 정부가 진시황의 무덤으로 생각하고 발굴했다가 진시황보다 수천년 앞서 만든 무덤으로써 그것도 동이족의 유물들이 쏟아져 나오자 당황하여 다시 파묻어 버렸다.
그리고 외국인을 그 장소로 안내하는 자는 사형에 처하는 법까지 만든 후 그 지역을 철저히 폐쇄하고서는 동이족의 이 어마어마한 역사와 유물을 중국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지금 고구려역사를 자신들의 역사로 편입작업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하면 자연히 북부여와 고조선이 중국역사로 넘어가게 되므로 그 때 약100개 이상의 거대한 피라밋들을 세상에 비로소 선보이려고 중국정부는 소리 소문 없이 역사왜곡을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후손들은 단군의 역사마저도 신화로 스스로 치부해 버리며 우리의 역사가 아니라고 부정하는 동안에 말이다. 오호통재(嗚呼痛哉)로다!
현고학생부군신위(顯考學生府君神位)에 대하여 설명하려다가 우리의 옛 상고사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되어 설명이 자연히 길어진 것 같다. 그러나 위의 상고사 설명부분 중에서 특히 유의하여야 할 부분이 있다.
바로 ‘자부선인(紫府仙人)이라는 도(道)에 통한 학자가 한 분 있었는데, 중국의 최초 황제(黃帝)가「청구」땅 공동산에서 가르침을 받았으며 내황문(內皇文)을 받아가지고 와서 백성들에게 생활방법을 가르쳤다.’는 이 부분을 유의해 두었으면 한다.
전통혼인례시는 남자는 사모관대 여자는 원삼족두리를 쓰고 례를 치루웠다 모든사람이 어른이되면 자연히 하루동안 최하위 벼슬(學生과 孺人)을 한다
우리의 참좋은 전통혼인례이다. 요즈음도 현대식의 턱시도(男)와 드래스(女)는 서양의 귀족(벼슬아치)들의 복장이다.
그러면, 지금부터 본론으로 「현고학생부군신위(顯考學生府君神位)」 에 대하여 글자를 한번 분석해보고자 한다.
․ 현(顯)의 자전(字典)적인 해석은 ‘크고 높다’, ‘나타난다’는 뜻이고, 일반적인 해석 또한 ‘나타난다’로 해석하고 있다. ․ 고(考)의 자전(字典)적인 해석은 ‘상고하다’, ‘궁구하다’는 뜻인데, 일반적인 해석은 죽은 남자 조상을 ‘고(考)’라하며 아버지를 나타내고, 죽은 여자 조상을 ‘비(妣)’라하고 어머니를 나타낸다고 해석하고 있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 현고(顯考)의 의미를 ‘돌아가신 아버지가 제삿날 거룩하게 나타나신다’는 뜻으로 풀이하고 있다.
․ 학(學)은 ‘배우다’는 뜻이고 생(生)은 ‘태어남’, ‘삶’이라는 뜻이지만, 통상 우리는 학생(學生)을 ‘배우는 사람’이라 한다.
그러나 「현고학생부군신위(顯考學生府君神位)」에서의 학생(學生)을 ☞ ‘배우지 않아 벼슬하지 못한 사람’을 뜻한다고 일반적으로 풀이하고 있다. 바로 이 대목, ‘배우지 않아 벼슬하지 못한 사람을 학생(學生)이라 한다.’는 바로 이 대목이 문제가 많은 해석이라 여겨진다.
그 다음에 글자자체로서는 하나도 어려움이 없지만 「현고학생부군신위(顯考學生府君神位)」에서의 부군(府君)이라는 글자 또한 여러 해석을 가져오게 한 요인이다.
․ 부(府)는 ‘마을’, 또는‘관청’을 나타내고, 군(君)은 ‘임금’, ‘어진 사람’, ‘군자’를 나타내므로, 부군(府君)이란 ‘고을 임금’ 또는 ‘어진 군자’ 정도로 해석되 어야 할 터인데, ☞ 일반적으로 부군(府君)을 ‘돌아가신 아버지 또는 조상을 높이어 일컫는 말’ 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그 다음에 신위(神位)라는 글자에 대한 해석은 그다지 큰 어려움이 없는 것 같다. 신(神)은 ‘신령’, ‘정신’의 뜻이고, 위(位)는 ‘자리’, ‘자리잡다’는 뜻이므로, ☞ 신위(神位)는 ‘고인의 신령 또는 영혼이 의지하는 자리’를 뜻한다고 자전적 또는 일반적으로 풀이하고 있다.
그러므로「현고학생부군신위(顯考學生府君神位)」의 자전적 해석으로는, ‘삶을 궁극에 까지 배워서 어진군자 신령으로 나타나시어 임하소서!’ 정도로 풀이하면 무난할 것 같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배우지 않아 벼슬하지 못한 채 돌아가신 아버지의 신령이시여 나타나시어 임하소서!’로 해석하고 있다.
「현고학생부군신위(顯考學生府君神位)」에서 ‘고(考)’라는 글자에 ‘돌아가신 아버지’라는 의미가 있다고 설명하면서, ‘부군(府君)’을 설명할 길이 없자 또 다시 ‘돌아가신 아버지, 또는 조상을 높이는 말’로 ‘부군(府君)’을 해석하고 있으니 도무지 그냥 이해하고 넘어가려해도 어물쩍 넘어가기에는「현고학생부군신위(顯考學生府君神位)」라는 단어가 우리에게 주는 무게감에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
더군다나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조상님들이 설사 그 당시 게을러서 놀기만을 좋아하고 공부하는 것을 싫어하였거나, 어려운 살림살이 때문에 배우지 못해 벼슬하지 못하였거나 간에, 돌아가신 분이 1년에 한 번 그것도 자신의 제삿날 후손들의 간절한 초청에 의해 기쁜 마음으로 부득이 위패모신 자리에 강림(降臨)하려고 하는데, 그때마다 ‘학생(學生)’이라는 글자를 보면 과연 어떤 마음이 들까?
그 당시의 서글픈 가사사정이 생각나서 자꾸만 흘러내리는 눈물로 주체할 수 없으시거나, 그 당시의 배운 자들의 권세에 눌려 지내야만 했던 일이 생각나 복받치는 서러움에 목이 메여 잿밥이 도저히 넘어가지 않을 것 같다.
그런데도 후손들은 그런 마음을 아는 지 모르는 지 ‘학생(學生)’이라는 글자를 덩그러니 써놓고 있으니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후손들을 보며 저절로 한숨만 쉬고 계실 것만 같다.
부모님의 존함을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는 유교적 전통에 따라 ‘고(考)’라는 글자로 ‘돌아가신 아버지’이라는 말이 포함된다며 너도 나도 「현고학생부군신위(顯考學生府君神位)」이니, 영혼 세상에 사는 아버지 신령(神靈)을 이름자 없이 한결같이 ‘아버지 신령님이시여 내려오소서!’라고 말하고 있는 꼴이다.
‘아버지 신령님!’이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영혼 세상에 있는 모든 신령(神靈)들은 자신들의 자식들이 부르는 것인가 싶어서 거의 매일 귀를 곤두세우는 성가신 일을 당하시지나 않을까 심히 염려스럽다.
하지만 우리 조상님들은 원래 귀신같은 분들 아니신가? 귀신같이 오늘이 자신의 제삿날임을 알고, 으레 자신을 부르는 소리로 알고 가슴 설레는 마음으로 강림하실 것이다. 하지만 막상 강림하실 때마다 그 놈의 ‘학생(學生)’이라는 글자 때문에 1년 동안 고대하던 그 날을 기분 잡치며 영혼세계로 다시 돌아가시는 일이 계속되었을 것으로 생각하니 참으로 송구스럽다.
실제로 넣어야 할 이름자는 쏙 빼먹고 안 넣어도 좋을, 일반적으로 좋게 인식하지 않고 있는 ‘학생(學生)’이라는 글자는 왜 그렇게도 후손들이 넣을려고 안달하는지 말 못하는 조상님 신령으로서는 매우 괘씸해 하실 것 같다. 차라리 나같으면 그 ‘학생(學生)’이라는 글자대신 당신의 ‘이름자’를 적어주는 게 더 좋을 것 같다.
한편, 아버지 이름자도 함부로 부르지 않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하는 선비의 나라,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에서 최소한 1천년 이상 안넣어도 좋을 ‘학생(學生)’이라는 글자를 넣어가면서 조상님 신령으로부터 괘씸죄를 받을 어리석은 선비들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니,
혹시 ‘학생(學生)’이라는 글자, 아니「현고학생부군신위(顯考學生府君神位)」라는 글자의 깊은 의미를 우리가 모른 채 지내왔거나, 실제와의 의미와 다르게 해석해 왔을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생각되어 다시 한번 더 현고(顯考),학생(學生), 부군(府君), 신위(神位)에 대한 해석을 후손들이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그 해석법을 찾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항상 생각해왔다.
그러므로 「현고학생부군신위(顯考學生府君神位)」의 정확한 의미를 알고계신 분이 계시다면 상세히 밝혀주시길 간절히 원하는 바이며, 다음은 본인이 생각할 때, 「현고학생부군신위(顯考學生府君神位)」에서 ‘배우지 않아 벼슬하지 못한 사람을 학생(學生)이라 한다’는 일반적인 해석에 대한 반박이다.
‘학생(學生)’이라는 글자에 과연 우리가 모르는 무슨 깊은 뜻이 숨어있는 것일까? 현고학생부군신위(顯考學生府君神位)」라는 말에 학생(學生)이라는 말이 사용된 이유에 대해서 초심자의 입장에서 한번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우리는 흔히 ‘현재 배우는 사람’을 학생이라고 부른다. 예를들면, 고희(古稀)의 나이에도 지금 영어를 배우는 사람이 있다면 그 분은 ‘영어를 배우는 학생’인 것이다. 그런데 돌아가신 분, 즉 몸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현재 배운다’는 의미의 ‘학생’이라는 말은 서양적 의식으로는 가당치 않아 보인다. 하지만, 죽음을 ‘몸은 잃어버렸지만 영식(靈識)이 뚜렷해지는 상태’로 보는 동양적 의식, 특히 불교적인 의미에서는 가능한 해석이다.
둘째, 유교가 득세한 조선시대부터 자기조상님들 세도를 자랑하기위해 위패 또는 지방에 ‘학생’ 대신 ‘관직명’을 기재하는 것이 유행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때부터 ‘학생’이라는 말이 ‘관직’과 대조되는 말로 굳어진 것 같다.
그리하여 ‘배우지 않아 벼슬하지 못한 사람’을 학생으로 지금까지 널리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 경우 몇 가지 문제점이 남아있다.
문제점 하나,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돌아가신 조상님을 살아계신 분같이 극진히 모시던 시절에 후손들이 스스로 조상신을 깎아내리는 듯한 의미, 즉 ‘배우지 않아 벼슬하지 못한 사람’ 의 뜻으로‘學生’이라는 말이 쓰였다면, 설사 나랏님이 이 ‘학생’이라는 말을 사용하도록 강제한다 할지라도, ‘죽으면 죽었지 조상을 욕되게 하지 않는다’ 는 올곧은 선비들이 수없이 많은 세상에서 이것이 가당할 수 있었겠는가? 불가능하다 여겨진다.
문제점 둘, 돌아가신 여자 조상님을 위패로 모실때 ‘유인(孺人)’이라 적는다. 예를들면 돌아가신 어머님이 김해김씨라면, 「현비유인김해김씨신위(顯妣孺人金海金氏神位)」라고 지방을 쓴다. 그런데 ‘유인(孺人)’이란 조선시대에 남편의 벼슬이 정9품, 종9품인 경우에 사용하는 호칭이다. 그러므로 남편이 배우지 못해 벼슬하지 않은 경우에는 적합하지 않다.
문제점 셋, ‘ 유인(孺人)’이라는 말이 배우지 못해 벼슬하지 않은 ‘학생 남편’과는 어울리지 않음에도 ‘내조를 잘해서 남편으로 하여금 벼슬하지 않고 청렴결백(?)하게 살아가도록 한 공로(?)로 나랏님으로부터 일계급 특진하여 호칭을 받게 되었다.’라는 근거없는 구차한 설명이 시중에 나돌고 있으나 말도 되지 않는 억지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돌아가신 본인 한 분만 제사지내는 단설(單設)인 경우에는 그런대로 너그러이 넘어갈 수 있겠으나, 돌아가신 내외(內外)분을 함께 제사지내는 합설(合設)인 경우에는 다음과 같이 문제가 매우 커지게 되기 때문이다.
원래 제사에서는 서쪽이 높은 방위이고, 동쪽은 낮은 방위로 보아서 합설인 경우 서쪽에 아버지 조상을, 동쪽에 어머니 조상을 모시는 것이 하나의 법도인지라 서고동비(西考東妣)라고 일컫는데, 관직을 우선시하는 유교풍습에 따르자면 학생인 아버지보다 관직이 높은 어머니를 서쪽에 모셔야 하는지라 서비동고(西妣東考)가 되어서 매우 부적합한 것이다.
앞서도 언급되었듯이 돌아가신 조상님을 살아계신 분같이 극진히 모시던 시절에 후손들이 스스로 조상신을 깎아내리는 듯한 의미, 즉 ‘배우지 않아 벼슬하지 못한 사람’의 뜻으로 ‘학생’이라는 말을 설사 나랏님이 사용하라 엄명하였다 하더라도, 산골짜기 마을에 밤12시까지 기다리며 ‘학생’이라는 말을 사용했는지 안했는지 확인 할 관리도 없었을 터인데 스스로 거리낌 없이 계속해서 ‘학생’이라는 말을 사용해 왔다는 것은 오래 전부터 관습적으로 사용해 온 말로 추정해 볼 수밖에 없다.
오히려「현고학생부군신위(顯考學生府君神位)」에서 ‘학생’ 대신에 ‘관직명’을 넣은 것이 비관습적인 행위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 같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자신들의 조상을 내세우려는 인간적 욕구심리가 작용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존경하는 聖人들은 한결같이 ‘욕심을 버리고 이 세상을 살라’고 말씀하셨다. 성인들께서 버리라고 한 대표적인 다섯가지 욕심이 무엇인가? 바로 식욕, 재물욕, 성욕, 명예욕, 수면욕이 아니던가.
그렇다면,「현고학생부군신위(顯考學生府君神位)」에서 ‘학생’ 대신에 ‘관직명’을 넣은 것은 聖人의 권장사항이라기보다는 누구든지 자신들의 조상을 내세우려는 인간적 욕구심리가 이곳에서까지도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원래 이 ‘학생’이라는 말은 어떻게 해서 나온 말일까? 그리고 이 ‘학생’이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배울 학(學), 날 생(生)으로 이루어진 학생(學生)! 이 글자대로의 의미라면 ‘生을 배운다.’는 뜻이므로, ‘생(生)’의 뜻만 알면 학생이라는 말은 자연적으로 알 수 있을 것 같다.
생(生)이라는 말은 생(生)과 사(死), 즉 ‘삶과 죽음’ 또는 ‘나고 죽음’이라고 할 때의 죽음에 대비되는 말이 아닌가? 그런데 아주 쉬운 말인 것 같은 데 막상 쉬운 말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공자가 말했던 모양이다. “삶도 아직 모르는데 죽음을 어찌 알겠는가?”라고...
성인이라고 여기는 공자마저도 아직 완전히 모르는 그 ‘삶’을 설명하려니 무척이나 어렵다. 어느 누구도 죽어보지 않고서는 죽음을 설명할 수 없고 누구든지 삶을 완전히 살아보지 않고서는 삶을 완전히 설명할 수 없다.
삶에 대한 완전한 설명은 어렵더라도 굳이 설명해야한다면 ‘삶은 죽음의 과정이다.’라고 말하고 싶다. 더욱더 요약하여 말하라면 ‘삶은 죽음이다.’라고 정의하고 싶다. 그게 무슨 말인가? 삶이 죽음이라니...
우리는 태어나면서 한 살을 먹고 매년마다 한 살을 더 보태어 간다. 그래서 태어나서 60번째 새해를 맞이하면 만60세라고 말한다. 그런데 인간이 80세까지 장수한다면 사실 60년 살았다는 말이 80세의 삶에서 60년 죽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한 살 먹었다는 말은 1년 죽었다는 말과 동일하지 않은가? 그러므로 ‘삶은 죽음이다’라고 정의 내려도 무방한 것이다.
우리 인간은 삶이 곧 죽음이고 죽음이 곧 삶이라는 사실을 잊고 지낸다.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이고 삶과 죽음이 합쳐져야만 온전한 삶이고 온전한 죽음이지만, 죽음이라는 말을 끄집어내는 것을 금기시하고 죽음이라는 단어를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조차 싫어하는 인간속성 때문에 인생은 온전하지 못하고 반쪽의 삶으로 변해버린 것이 아닐까?
완성된 인간, 즉 成人을 우리는 聖人이라 부른다. 성인의 삶은 다른 게 없다. 삶과 죽음을 동일하게 보며 삶을 살아가신 분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온전한 삶을 살아가신 분들이다. 그런데 우리네 보통 인간들은 삶과 죽음을 동등하게 보지 않고 삶만 보기 때문에 온전한 삶이 아닌 반쪽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네 보통 인간들은 반쪽의 삶이 아닌 온전한 삶을 살기위해서 성인의 삶을 본받아야 한다. 그것이 우리네 보통 인간들의 사명이요 삶의 목적인 것이다.
삶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인간에게 주어진 중대한 사명을 해결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 이 삶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석가모니 부처님은 6년이나 피나는 수행을 하였고, 달마대사는 소림굴에서 9년간을 면벽수도 하였지 않은가?
대학이란 책은 옛 대학에서 사람을 가르치던 소이(所以)의 법(法)이다. 그 대학경(大學經)의 첫머리에 ‘대학의 도(道)는 명덕을 밝히는 데 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데 있고, 지선(至善)에 머무는 데 있다.’고 하였다.
명덕을 밝힌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심즉리(心卽理)의 입장에서 마음을 밝힌다는 말과 같다. 지선(至善)에 머문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추호의 악도 없는 마음의 본연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대학에서 공부하는 목적은 마음을 밝혀 백성을 새롭게 하여 마음의 본연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대학에서 기술을 배워 잘 먹고 잘살아 보겠다는 생각과는 그 취지가 많이 다르다 하겠다.
결론적으로 말해 유교에서는 ‘인간을 승의(勝義)한 학자(學者)’, ‘오륜(五倫) 과 오상(五常)의 도(道)를 배우는 학자(學者)’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대학에서는 이치를 궁구하는 철학, 마음을 바르게 하는 윤리학과 자기를 닦고 남을 다스리는 참된 의미에서의 정치학 등을 배우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은 성즉리(性卽理)의 입장에서 리(理)를 배워야 하는 것이며, 그것도 궁리(窮理)를 배워야 하는 것이다. 더 쉽게 말한다면 바로 마음을 밝혀 그 본연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배워야하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로서의 유교(儒敎)인 것이다.
이제,「현고학생부군신위(顯考學生府君神位)」에 대한 해석을 해도 나름대로 받아들이는데 큰 어려움이 없을 듯싶다.
「현고학생부군신위(顯考學生府君神位)」를 ‘배우지 않아 벼슬하지 못한 채 돌아가신 아버지의 신령이시여, 이 자리에 나타나시어 임하소서!’로 해석하기 보다는 ‘돌아가신 아버지께서는 生을 궁극까지 배워서 명덕을 밝히고 지선(至善)의 상태, 마음의 본연 상태, 선신(仙神) 상태로 화현해서 이 자리에 강림하소서!’로 해석하고 싶다.
다시 말해서, ‘돌아가신 아버지께서는 生을 궁극까지 배워서 자부선인(紫府仙人)이라는 도(道)에 통달한 선신(仙神)과 같은 분으로 화현하여 이 자리에 강림하소서!’로 해석하고 싶다.
물론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사람이 죽어서도 生을 계속해서 배울 수 있는 어떤 주체가 있는가?’ 라는 질문에 눈으로 보여줄 수 있는 어떤 증거는 없다. 하지만 그것을 부정하면 기독교든, 불교든, 유교든 종교는 성립되지 않는다.
아무튼 「현고학생부군신위(顯考學生府君神位)」에 대한 결론적인 해석을 내린 것 같다. 이 해석을 한 목적은 제삿날 왜 돌아가신 조상님들을 두고 ‘학생(學生’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는가? 평소에 궁금해 하던 분들에게, 특히 조상님들의 은덕을 기리는 자리, 조상님을 모시는 제삿날에 살아있는 후손들이 조상님의 치부거리를 들추어내는 ‘학생(學生’이라는 단어를 왜 후손들이 사용해야 한단 말인가? 라며 궁금해 하신 분들에게는 매우 좋은 자료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오늘날 어렵사리 오른 벼슬 官의 직급을 지니신 사무관, 서기관이상 되시는 분에게는 달갑지 않은 내용일 수도 있어 조금 걱정스럽다. 그러나 그 분들은 계속해서 후손들에게 종전의 변함없는 일반적인 해석으로 계속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현고사무관부군신위(顯考事務官府君神位)」 또는「현고서기관부군신위(顯考書記官府君神位)」로 사용하여 주시고,
박사학위를 받은 조상님들을 두신 자랑스러우신 후손들은 「현고박사부군신위(顯考博士府君神位)」, 육군대위 출신으로 돌아가신 아버지를 모실 때에는 「현고육군대위부군신위(顯考陸軍大尉府君神位)」등등으로 각자 자부심을 가지는 방향으로 해석하여 떳떳한 마음으로 조상님들을 모시길 바랍니다.
아울러, 「현고학생부군신위(顯考學生府君神位)」를 적으며 위패를 모시는 후손들은 전혀 ‘학생(學生’이라는 이 글자가 세속에 더 이상 때묻지 않은, 아주 맑은 영혼을 기리는 뜻깊은 말임을 이해하시고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이시어 다음 명절부터는 더욱더 가족과 함께 즐겁게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한분도 빠짐없이 원만하게 소원성취하시길 다시 한번 더 기원하면서 이 글을 여러분들에게 드립니다. 그리고 큰 절을 올립니다.
관혼상제(冠婚喪祭)의 의식중에서 상례와 제례때 자주 접하게되는 차려진 제상을 향해 아무런 의미없이 절하는 것과는 정성으로서는 큰 차이가 있다 할 것이다. 엄마에 해당되는 글자는妣 "죽은어미비"로 읽는다. 또 그렇게 지내는 제사가 "성의롭다"고 할 수 있을테니까. 성의는 다르다 할 것이다.
정의 어원 부군의 정확한 어원이나 의미는 밝혀져 있지 않다. 조선시대 서울의 각 관아 내의 부군당에는 목제 남근[木莖]을 모셔 두었는데, 이로부터 부근당(付根堂)이라는 말이 유래했고 이것이 부군당(府君堂)으로 변했다는 설명이 있다. 이와는 달리, 부군(府君)은 중국 한나라 때의 태수(太守)를 의미하는 것인데, 부군당이 관아에 모셔진 당이고 부군신이 주로 해당 관아의 우두머리가 많다는 점에서 부군은 관직명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설명도 있다.
유래 단지 조선시대 서울의 각 관아에 모셔진 신당(神堂)이었던 부군당이 민간의 신앙 대상으로 변화되어 오늘날과 같은 마을공동제의의 한 형태로 자리 잡은 것으로 추측된다.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권64 「예고(禮考)」 음사조(淫事條)에 “나라 풍속이 도하(都下, 서울 안)의 관부(官府)에는 으레 작은 집 하나를 설치하여 두고, 종이돈[紙錢]을 총총 걸어서 이를 ‘부군(府君)’이라 불렀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芝峯類說)』 권17 「인사부(人事剖)」 제사조(祭祀條)에도 “오늘날 풍속에 관아[衙門]에는 대개 기도하고 제사지내는 곳을 두었는데 이것을 부군(府君)이라 한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또한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 권2 「한성부(漢城府)」 사묘조(祠廟條)를 보면 부군사(符君祠)가 각사(各司, 서울 내의 관아에 대한 통칭) 아전의 청방(廳房) 곁에 있었다고 한다. 『통문관지(通文舘志)』 권1 「연혁(沿革)」 관사조(官舍條)에도 “부군당(符君堂)은 2칸인데, 누각(樓閣)의 정북쪽에 있다.
강희(康熙) 정해년(丁亥年, 1707, 숙종 33)에 중건(重建)하였는데, 옛날 것에 비해서 반 칸을 더 늘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외에도 조선시대 관아도(官衙圖)를 보면, 부군당이 2칸에서 3칸 사이의 작은 건물로 대체로 중앙에서 벗어난 구석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문 가운데 태극문양이 그려져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종이돈이 걸려 있었다. 신들은 대체로 화상(畵像)으로 모셔졌으며, 모시는 신은 부군당에 따라 달랐다고 한다. 예컨대 형조(刑曹)의 부군당에는 제갈공명(諸葛孔明)이, 병조(兵曹) 부군당에는 문천상(文天祥)이, 한성부 부군당에는 공민왕이, 전옥서(典獄署) 부군당에는 동명왕(東明王)이, 포청(捕廳)과 사역원(司譯院), 의영고[義盈庫, 조선 시대에 호조(戶曹)에 속하여 기름·꿀·후추 따위의 공급과 관리를 맡아보던 관아] 부군당에는 송씨 처녀[宋氏姐]가, 양현고(養賢庫) 부군당에는 최영(崔瑩)과 그의 딸인 고려 우왕(禑王)의 왕비가 모셔져 있었다.
부군당에 모셔졌다는 목제 남근은 송씨 처녀를 위한 것으로, 그 신을 위한 제물이기도 하면서 그 신의 상징이기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능화(李能和)에 의하면 사역원 부군당에 남근 10여 개가 모셔져 있었다고 한다. 또한 『동국여지비고』를 보면 10월 1일에 제사를 지냈다고 하는데, 이를 통해 부군신에 대한 정기적인 부군당제가 있었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한편 황윤석(黃胤錫)의 『 이재난고(頤齋亂藁)』에 의하면 의영고 부군당제를 아전과 노비들이 올렸다고 하는데, 이것은 관아의 부군당제의 실제 진행은 아전층을 중심으로 이뤄졌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이는 당시 조선시대 부군당제가 무속과 연관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상익(李商翼)이란 사람이 의금부 부군당제에서 춤을 추었다는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205책 현종(顯宗) 8년 11월 14일 갑인조(甲寅條)의 기록은 조선시대 부군당제가 가무(歌舞)를 중심으로 하는 무속 굿의 모습을 하였음을 확인시켜준다. 언제부터인지 정확하게 그 시기를 알 수는 없지만, 조선시대 관아의 부군당제는 민간화되어 현재 마을의 공동제의로서 행해지고 있으며, 부군당은 마을제당의 역할을 하고 있다. 내용 및 특징 경상북도 1개로 나타나는데, 이를 통해서 부군당제는 거의 대부분 서울 지역에 분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서울민속대관』1을 보면, 서울시에서 부군당으로 조사된 마을제당은 모두 19개인데, 17개의 부군당이 한강변을 중심으로 존재하고 있다. 한강변에서 떨어진, 보다 안쪽에 있는 부군당은 3개의 부군당에 지나지 않는다. 조선시대 서울의 각 관아에 부군당이 존재했다는 점에서 현재 대부분의 부군당이 서울 지역에 나타나는 점은 쉽게 이해된다.
그러나 서울에서도 왜 한강변에 부군당이 집중적으로 분포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충분한 설명이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이다. 당집의 형태를 갖추기도 하지만, 집주저리나 나무, 돌무더기 등으로 이뤄지기 한다. 이런 점에서 당집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는 점은 서울 지역 부군당의 한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조선시대 부군당과의 연속성을 찾아볼 수 있기도 하다.
부군할아버지, 부군할머니처럼 부부로서 모셔지는 것이 보통이다. 물론 부군당제에서는 부군신, 즉 부군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중심으로, 산신·장군신·대동어른·대감·칠성·제석 등 민간의 여러 신들도 같이 모셔진다. 그리고 부군당에는 마을마다 차이가 있지만, 부군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여러 신의 화상이 봉안되어 있다.
부군할머니로 불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부군신의 정체가 분명한 마을도 있다. 동빙고동 부군당의 경우 단군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부군신으로 모시고 있다. 보광동 부군당의 부군신은 김유신 장군이며, 서빙고동 부군당은 조선의 이태조(李太祖) 내외를 부군신으로 모신다. 신정동 부군당은 사도세자를, 전농동 부군당은 조선의 개국공신인 조반(趙胖) 내외를, 이를 통해 서울 지역 부군당제의 중심 대상은 주로 인물신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한편 신길2동 방아곳지 부군당에는 지금도 목제 남근이 모셔져 있고, 무당이 진행하는 부군당굿의 호구거리에서 남근을 반드시 놀려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여자들이 바람난다고 믿는다. 이처럼 현재 서울 부군당제의 주신(主神)인 부군신이 인물신이고, 아직도 남근을 모시고 있는 부군당이 존재한다는 점 역시 현재 서울의 부군당과 조선시대 부군당과의 연속성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서울의 부군당제는 마을 주민 중에서 선출된 제관에 의한 유교식 제의와 이후에 진행되는 무당의 굿이 합쳐진 형태로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유교식 제의보다는 무당굿이 중심을 이룬다. 유교식 제의는 마을의 사정상 굿을 할 수 없는 경우에 굿을 대체하는 의미로서 행해지며, 무당의 굿과 함께 행해질 때는 굿의 한 절차로 편입되어 행해지고 있다. 이처럼 무당의 굿이 부군당제의 중심이라는 점도 부군당제의 특징이다. 또는 3월이나 4월 등에 지내기도 한다. 제의 시기는 최근 주민들의 생활과 의식이 바뀌면서 이에 맞춰 새로 정해지기도 한다. 한편 부군당제는 마을에 따라 일년에 한 번 지내기도 하며, 두세 번 지내기도 한다. 1회 이상 부군당제를 지내는 마을의 경우, 그 중 한 번은 반드시 무당굿으로 진행하며, 나머지는 유교식 제사나 치성으로 진행한다. 의의 부군당제는 공동의 세시의례로서 행해지는 일반 마을제의의 성격과 역할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한 해의 삶이 시작되고 마감되는 정초나 10월에 주로 행해지며, 제일을 선정하고 제관을 선출한 후 온 마을 사람들이 금기를 준수하면서 공동의 비용과 노력으로 부군당제를 지낸다. 이러한 제의 과정이 마을 주민들을 하나로 묶어 주는 공동체 통합의 역할과 마을축제의 기능을 하는 것은 다른 마을제의와 동일하다.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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