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 케키 : “아이스 케키 장수가 들어왔다. 이삼 일에 한 번씩 들어와 몇 푼 안 되는 아이들 돈과 동네의 빈 병을 다 쓸어 가는 아저씨다. 그런데 그 아저씨 주위에 모여 있는 아이들이 모두 아이스 케키를 입에 물고 있다. 신기한 일이다. "무슨 돈으로 샀냐?" "빨간 고추 스무 개만 가져오면 아이스 케키 하나 준대!" "야, 근데 고추는 어디서 났냐?" "저기 갑수 아저씨네 헛간에 가면 많이 있어. 빨리 가서 가져와라" 상구는 벌써 다 먹고 갑수 아저씨 네로 또 뛰어간다. 같이 뛰어갔다. 가 보니 비를 피해 헛간에 멍석을 깔고 널어놓은 고추가 반 이상이나 비어 있었다. 우리 둘은 날쌔게 한 움큼 씩 주워 뛰기 시작했다. 가끔 먹어보는 아이스 케키지만 언제 먹어도 맛있다. 아이스 케키 파는 아저씨는 밀가루 부대에 반 정도 찬 고추를 챙겨, 큰 아이스 케키 상자가 달린 자전거를 타고 뒤뚱뒤뚱 부지런히 동네를 빠져나간다. 저녁때쯤 갑수 아저씨는 애들을 잡으러 다니느라 부산을 떨었고, 고추 훔쳐다가 아이스 케키 사 먹은 아이들은 며칠 동안 대문 밖으로 나오지도 못한 채 집구석에 처박혀 놀았다. 지은 죗값이다. 그 아이스 케키 파는 아저씨는 여름 내내 우리 동네에 나타나지 않았다...”(어디서 읽은 글 각색)
아이스 께끼 : 아이스 께끼 장사를 한번 해봤다. 날수로는 며칠. 고등학생 모자를 쓰고 진환이와 둘이서 했다. 그 때 진환이는 나보다 키가 제법 작았다. ‘꺼꾸리와 장다리’ 수준은 아니었어도 난 그 보다 키가 표 나게 컸었다. 누가 먼저 하자고 제안했는지 모른다. 통을 각각 하나씩 매었는지, 하나를 번갈아가면서 매었는지 그것도 모르겠다. 아무튼 우리는 어느 해 여름에 아이스 케키 장사를 했다. 진주서 했다. 아마 옥봉동 수정동을 주로 다녔던 것 같다. 진환이 집은 망경북동이고 나는 칠암동에 있었으니까 칠암동, 수정동, 강남동에서 했을 법도 한데, 이곳은 생각 안 나고 저곳은 생각나는 걸로 봐서 암만해도 그곳에서 한게 맞는지도 모른다. 이 또한 누가 먼저 그곳으로 가자고 제안했는지 모르지만, 우린 주로 미장원으로 갔다. 미장원의 누나들, 잘 사주었다. 미장원에 아이스 께끼 많이 팔았다. 진환이, 그 진환이 지금 서울 살 텐데 사는 곳을 모른다. 어쩌다 보니 서로 연락을 안 하고 산 세월이 대학 졸업 이후부터 줄 곳이다. 그와 함께 지낸 세월은 할 이야기를 많이 가진 세월인데. 밀착해 보낸 청소년 시절이니 할 이야기, 회상꺼리가 많은 세월인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아새끼 : 뭐라고 그랬는지 모르겠다. 촌놈아이시절, 그러니까 초동(樵童) 하동(河童) 악동(惡童) 시절에 우린 아이스 께끼를 ‘아새끼’라 불렀으니 ‘아새끼’라고 했는지도 모르겠고, ‘아이스 께끼’라고 했는지, ‘아이스 케키’라 그랬는지 ‘아스 께끼’라 그랬는지도 지금은 도통 모르겠다. 아니면 아무 말도 안하면서 그랬는지 그건 모른다. 우리들은 작정을 했다. 좌우간 아이스 께끼 한번 하기로. 학교서 동네에 이르는 길, 말하자면 등하교 길은 제법 멀다. 차는 한대 겨우 지나가는, 리어카나 소달구지는 여유 있게 지나가는 길이었다. 논과 밭 그리고 산이니 늘 뻐꾸기는 울었고 종달새는 날았다. 함께 다닐 때보다는 혼자 다닐 때가 많아 낮에도 안 무섭지 않은 길이었다. 상여집도 있었고. 어린 시절의 상여 집은 얼마나 무서운 집이었던지. 당신에게는 상여 집 이미지가 그렇게 각인되어 있지 않은가. 나만 그런가. 그 상여집 앞에서 우린 기다렸다. 혼자 오는 영순이를 기다리는 것이다. 우리들은 모두 책보를 뒤로 매었다. 한반의 숙자만 란도셀을 등에 졌다. 숙자 아버지는 일본에 있고 늘 하얀 두루마기를 입는 할아버지와 미모의 젊은 어머니와만 사는 숙자는 늘 좋은 옷(세라복) 뒤에 란도셀을 매고 다닌 것이다. 머리는 당연히 하이칼라. 영순이가 온다. 혼자서 온다. 책보를 뒤로 매고 털레털레 오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함께 걷는 걸음에 합류했다. 한 동네 또래들이니 경계심도 없었다. 학년은 같아도 반은 그와 나는 달랐던 것 같다. 동시에 했다. 아이스 께끼! 아니, 아새끼 했던가. 뛰었다. 영순이는 ‘와 그러노’ 하면서 웃었던 것 같다. 뛰면서 뒤를 돌아봤는지 안 봤는지도 모르겠다. 영순이의 미소가 아름답게 회상된다. 초등학교 졸업 이후로 그를 본적이 없다. 바로 부산으로 이사 간 것으로 기억된다. 그도 내가 어디 사는지 모를 것이다. 내가 자기와의 ‘아이스 께기’를 회상하고 있는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꽃의 살, 속살, 에라 아이스 께끼! : 4월 10일 일요일, 비가 많이 내린다. ‘논리적 사고’에 대한 내 생각을 이야기하러 부곡 가는 길이다. ‘부곡 하와이’의 그 부곡이다. 부산 사는 우리는 하와이는 몰라도 부곡 하와이는 안다. 마침 강연 장소도 부곡 하와이 호텔이다. 강연을 마쳤다. 아직도 비가 내린다. 온통 벚꽃길이 또 온통 비로 젖어 있다. 왼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꽃이다. 오른편을 봤다. 꽃길이다. 산은 또한 온통 부드러운 靑山, 흰 구름 청산. 뒤를 봐도 그랬고 앞을 봐도 그랬다. 위를 봤다. 꽃송이, 송이들이다. 헤아릴 수도 없이 많다. 문득 내가 지금 꽃의 속살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속살, 슬그머니 부끄러워진다. ‘아이스 께끼’가 슬그머니 생각 속으로 들어온다. ‘아이스 케키’ 했다. 발음은 안했다. ‘아새끼’ 라고도 했다. 默言! 便이, ‘점심 묵을 데 빨리 안 찾을라요. 뭘 그리 보고 있능기요. 꽃이 밥 주요. 집에 가서 묵을라요’ 한다. 가다가 오데 좋은데 있으면 묵자고 했다. 오다가 묵(먹)었다. 김해 생림 아정공간에 와서 칼국수 묵었다. 공간은, 조관우의 노래가 지배하고 있었다. '얼굴', 조관우의 '얼굴'...
첫댓글 지금도 꽃의 속살이 부끄러운가 봅니다. 감명 깊고 속살이 깊은 이야기를 푸셨습니다. 이 자지러질 사꾸라, 접사꾸라 피는 봄에. ( 이 난리 북새통에 왜말로 지껄임을 용서 바랍니다.)
아이스케키하던 기억이 남아서, 이 꽃처럼 피어나서 잠시 기쁨을 선사합니다.
한창이기도 하고 가고 있기도 하는 봄날입니다. 독두님, 저는 부곡의 벚꽃 길을 이 봄에 비내리는 중에 또박또박 걸을 수 있었습니다. 행운이었던 셈입니다.
로즈마리님, 로즈마리가 순을 올리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지난 겨울에 로즈마리님 덕분에 로즈마리를 알게 되었습니다. 아이스 께끼 그리고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