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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 SUCCESS, BUT SERVICE"
일제강점기 ‘의료사각지대’ 간호선교사로 활동
철두철미 한국인처럼 여성·고아·병자에 헌신적
● 잊혀져 있던 인물 ‘서서평 선교사’
“삶은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NOT SUCCESS, BUT SERVICE)
초기 선교사들 중 장로교의 언더우드, 감리교의 아펜셀러, 평양 숭실전문의 베어드, 이화전문의 스크랜턴 등은 깊이 연구되고 널리 소개되었다. 그러나 서서평(徐舒平, 1880-1934) 선교사는 남자가 아닌 독신여성, 목사가 아닌 평신도, 의사가 아닌 간호사라는 이유로 오랜시간 잊혀 있었다.
서서평 선교사는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의 간호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32세에 조선으로 와서 1912년부터 1934년 54세로 소천하기까지 22년 동안 일제점령기에 당시 한국의 궁핍한 지역으로 의료혜택을 받지 못했던 광주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던 근대 초창기 선교사이다.
CGN TV가 제작하여 2017년 4월 26일부터 전국적으로 개봉되어 상영한 서서평 선교사의 일대기 영화 “서서평! 천천히 평온하게” 다큐멘터리는 진정한 섬김과 헌신의 삶을 돌아보는 계기로서 일대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미국에서도 LA, 달라스, 뉴욕, 뉴저지, 애틀란타에서도 개봉된 서서평은 1년여간의 제작 기간을 거쳐 완성되었다. CGN TV 제작진은 이 영화를 위해 독일 비스바덴과 미국 뉴욕, 전라도 일대와 제주도 등 국내외에서 관련 자료를 추적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한 시나리오에 주인공인 윤안나 등의 열연이 더해져 서서평 선교사의 섬김의 일생과 사역활동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호평을 받았다.
서서평 선교사의 일대기는 오늘날 부와 명예와 교회의 높은 자리를 추구하는 성공과 번영 신앙에 물든 일부 한국교회의 리더들에 대한 큰 도전으로 평가된다.
● 미혼모 출생 기구한 운명 서서평
서서평은 1880년 9월 26일 독일 남부 휴양도시 비스바덴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엘리자베스 쉐핑(Schepping)이다. 서서평은 비스바덴(Wiesbaden)의 숙박업소에서 청소부(House Maid)로 일했던 그녀의 어머니 안나가 당시 휴양지에서 독일인 남성들과의 일탈(逸脫)속에서 원치 않았던 아이로 출생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어린 아기를 조부모에게 맡기고 3세일 때 미국으로 이민한다. 할머니는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다. 그래서 쉐핑은 카톨릭 교구학교에서 공부했다.
9세에 할머니를 잃고, 주소 적힌 쪽지 한 장을 들고 엄마 찾아 미국으로 떠난다. 가톨릭 미션 스쿨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성마가병원 간호전문학교를 졸업한다. 뉴욕시립병원 실습중 동료 간호사를 따라 장로교회 예배에 참석하고 개신교로의 전향을 결심한다. 어머니의 신앙인 가톨릭을 따르지 않고 개신교로 개종했기 때문에 집에서 쫓겨났다.
서서평은 유대인 요양소, 이탈리아 이민자 수용소 등에서 봉사활동을 하기도 했고, 1904년 뉴욕 성서교사훈련학교(Bible Teacher Training School)의 여행자를 돕는 선교회(Traveler’s Aid Missionary)에서 1년간 봉사하였다.
1911년 졸업 후, 가난과 전염병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미개의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병든 자들에게 의료봉사가 절실하다.”는 포사이스(Forsythe) 선교사의 소식을 접하고, 1912년, 미국 남장로교 해외선교부 모집에 지원하여 간호선교사로 파송을 받는다.
서서평은 32세인 1912년 2월 20일부터 한국으로 파송되어 1934년 54세로 소천하기까지 22년 동안 일제점령기에 의료혜택을 받지 못했던 광주의 궁핍한 지역을 중심으로 제주와 추자도 등에서 간호선교사로 활동하였다.
그녀에 대한 최초의 체계적 기록은 백춘성 장로가 저술하고 대한간호협회가 1980년에 발간한 그녀의 일대기 ‘천국에서 만납시다.(선교사 서서평 일대기)이다. 여기에서는 조선 개화기(조선 말엽)에 한국에 와서 서울과 가장 열악지역인 군산, 광주 등지에서 간호학교 설립, 육아사업, 윤락여성, 빈민구제 등으로 일생을 바친 그녀의 일대기를 기록하고 있다.
서서평 선교사가 처음 맡은 일은 전라도에서 간호사 양성과 기독교 선교활동이었다. 그 후, 서울의 세브란스에서도 근무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3.1운동이 발발하자, 조선인들을 치료해 주고 독립운동가들의 옥바라지를 해주었다는 이유로 일제는 서울 활동을 금지시켰다.
광주에 와서 맨 먼저 한국말과 한국 풍습을 익히면서 이름도 한국식으로 지었다. 그는 원래 성격이 조급했기 때문에 매사에 서서(徐徐)히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성을 서(徐)씨로 하고 이를 또 강조하는 뜻에서 이름의 첫 자를 천천히 할 서(舒)자로 두 번째 자는 모난 성격을 평평하게 한다는 뜻에서 평평할 평(平)자를 붙여 서서평이라 했는데 이는 그의 본 이름인 쉐핑의 발음을 살린 것이기도 했다.
서서평은 간호사로 사역했으나 성경 교사로서 한국 언어를 무척 잘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문화를 탁월하게 이해해 전주와 군산, 광주 등에서 여성들을 대상으로 성경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예수님에게로 인도했다. 서서평은 특히 미혼모, 고아, 한센인, 노숙인 등 가난하고 병약한 많은 사람을 보살폈다.
● 선교· 교육· 구제에 ‘혼신의 힘’
서서평의 일대기를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 근대적인 간호사역의 초석
서서평은 1923년 조선간호협회(현 대한간호협회) 결성을 주도하여 초대회장에 선임되었고, 그로부터 11년동안 회장으로 재임하면서 협회 발전을 위해 발 벗고 나섰다. 조선간호협회를 만국간호협회(ICN)와 일본 적십자 간호협회에 가입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라 할 수 있는 ‘간호 교과서’ ‘실용 간호학’ ‘간호요강’ ‘간이 위생법’등 4권과 ‘간호사업사’를 비롯한 많은 번역서를 책으로 냈다. 그리고 한글 말살정책이 진행 중인 일제 치하에서 간호부협회의 소식지와 서적들은 모두 한글 전용을 고집했다. 조선 사람들에겐 출애굽기를 가르치며 독립의 확신을 심어주려 애썼다.
서서평은 안식년일 때, 1929년 조선간호부협회를 세계협회에 가입시키기 위해 갔던 미국에서 자신을 할머니에게 버려두고 떠났던 어머니를 다시 만난다. 하지만 어머니는 “내 딸이라 하기에 부끄럽다.”며 매몰차게 거절하였다.
▽ ‘여성교육’ 한국 최초의 여성신학교
서서평이 바라본 조선 땅은 고난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한 번 순회 진료와 전도 여행을 나서면 한 달 이상 말을 타고 270㎞ 이상 거리를 돌았다. 진흙탕에 말이 쓰러지면 일백리길을 걸었다.
“이번 여행에서 500명 넘는 조선여성을 만났지만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열 명도 안 됐다. 조선 여성들은 ‘돼지 할머니’ ‘개똥 엄마’ ‘큰년’ ‘작은년’ 등으로 불린다. 남편에게 노예처럼 복종하고 집안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아들을 못 낳는다고 소박맞고…이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한글을 깨우쳐주는 것이 제 가장 큰 기쁨 중 하나이다.”(1921년 내쉬빌 선교부에 보낸 편지)
이에 서서평은 한국 최초의 여성신학교인 이일학교(현 한일장신대의 전신)를 세워 여성들을 가르쳤다. 그녀의 미국인 친구인 니일(Lois Neel)의 원조를 받아 양림 뒷동산에 붉은 벽돌로 3층 교사를 짓고 ‘니일’양 이름자의 발음을 따서 한자로 ‘이일(李一)’학교라 했다.
서서평은 또 여학생들의 자활능력을 기르기 위해 명주, 모시, 마포, 무명베 따위 천에다 자수를 놓아 책상보, 손수건 등의 수예품을 만들게 했다. 이 물건을 미국에 수출했으며 미국에서는 버지니아주의 벤스(Vence)부인이 팔아 대금을 송금해 왔고, 이 돈은 이일학교 여학생들의 학비로 쓰였다.
이처럼, 그녀는 무지하고 힘없는 여성들의 어머니 역할을 하였다. 축첩금지. 공창 폐지 운동을 하면서 윤락여성들이 새 삶을 살기 원하면 대신 그 빚을 갚아주고, 이들을 공부시켰다. 선교비 대부분을 어려운 학교 유지비에 쓰다 보니 서평의 생활은 극도로 쪼들릴 수밖에 없었다.
서서평이 별세한 뒤 ‘이일학교’는 1941년 9월에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폐교되었으며 해방 후인 1948년 9월 구애라 선교사에 의해 이일학교가 복교되었고, 1961년 3월 31일 전주 한일여자신학대학(韓日女子神學大學)에 합병되었다.
조선 농촌여성과 같이 무명베 옷에 검정 고무신을 신었고, 보리밥에 된장국을 먹으며 검소와 절제를 몸으로 실천했다. 선교사 서서평은 조선인처럼 산 것이 아니라 완전한 조선인으로 생활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래서 당시 조선인들에게 푸른 눈의 어머니라고 불리웠던 것이다.
▽ 나병환자·빈민구제
서서평은 한국에 와서 당시 조선인들도 돌보지 않았던 한센병자의 더 나은 삶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흔히 문둥병이라고 부르는 나병(한센병) 환자를 돌보며 나병환자의 치료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1933년에는 서서평은 조선인 목회자 등 동역자들과 함께 50여명의 나환자를 이끌고 서울로 행진을 시작했다. 강제 거세 등으로 나환자들의 씨를 말리는 정책을 펴고 있던 일제 총독부에 나환자들의 삶터를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소식을 들은 전국 각지의 나환자들이 이 행진에 합류했다. 서울의 총독부 앞에 이르렀을 때 동참한 나환자들의 숫자는 530여명에 달했다. 결국 총독부도 두 손을 다 들었다. 이로 인해 일제총독부는 소록도에 나병환자 단독시설을 허락하고 지금의 국유지인 전남 소록도가 있을 수 있었다.
서서평은 임금 대부분을 걸인과 빈민과 나환자, 여성을 위해 사용했다. 그녀의 관심은 언제나 버림받은 고아와 가난한 과부에 머물렀다. 고아들을 친 자식처럼 아껴주었고, 가난하고 의지할 곳이 없는 여성들은 먹이고 입히고 가르쳤다. 고아 14명을 자녀로 삼고, 오갈 데 없는 과부 38명과 한 집에 살면서 이들을 돌보았다.
서서평은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한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방안을 찾았다. 서서평은 ‘성미 제도’를 활용했는데, 이것은 한국교회 역사에서 대단히 획기적인 방안이었다. 이 제도는 머지않아 조선 예수교장로회의 공식사업으로 채택되었다. 개인 차원의 긍휼이 교회차원의 긍휼사업으로 승화된 것이다.
실제로 서서평은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자신을 위해 쓰는 비용을 최대한 줄였다. 여러 가지 비용 가운데 식비를 줄이는 것이 가장 쉬운 일이었다. 그래서 다른 선교사들이 하루 식대로 3원을 쓸 때, 서서평은 10전으로 하루를 버티면서 돈을 모았고, 그렇게 모인 선교비를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위해 사용했다. 이러다보니 결국 서서평은 심각한 영양실조에 걸릴 수밖에 없었다.
한국 최초 여성신학교·대한간호협회 전신 창설
개인서 교회차원 구제 ‘조선 최초의 성미제도’
일제하 소록도에 나병환자 단독시설 계기마련
●‘진정한 삶’ 성공이 아니라 섬김
서서평 선교사의 책상에는 ‘성공이 아니라 섬김’(Not Success But Service)이라는 좌우명이 붙여져 있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준 서서평 선교사는 1934년 6월 26일 새벽 4시, 54세를 일기로 사랑과 헌신의 생애를 마쳤다. 만성 흡수불량증세가 나타나는 만성풍토병인 ‘스프르’(Sprue)와 폐렴을 앓던 영양실조 등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했다. 그녀가 죽을 때 남기고 간 전 재산은 담요 반장, 쌀 두 홉과 현금 27전이 전부였다고 한다.
그녀는 소천할 때까지 22년 동안 한국 땅에서 수많은 업적을 남기면서 간호학계의 선구자로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작은 예수’ 또는 ‘조선의 마더 테레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녀는 모친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자신의 슬픔을 조선에 와서 부모로 버림받은 고아들을 돌보는 신앙적 승화를 몸소 실천했다.
서서평의 장례식에는 이일학교의 제자들, 13명의 양딸, 수백 명의 거지와 한센환자들이 참석하여 ‘어머니’라고 목 놓아 울었고, 광주 최초로 사회장으로 치루어졌다고 전한다. 당시 동아일보는 ‘자선과 교육사업에 일생을 바친 빈민의 어머니 서서평 양 서거’라는 제목하에 그녀의 죽음을 대서특필했다. 이때 장례가 10일 동안 지속됐는데, 그 이유는 생전 그녀가 장기마저 세브란스에 기증했던 탓이다.
1926년 이 땅의 한 매체는 서서평 인터뷰 기사에서 “사랑스럽지 못한 자를 사랑스러운 존재로 만들고, 거칠고 깨진 존재를 유익하고 아름다움을 지닌 그리스도인으로서 단련된 생명체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 서서평의 열정”이라고 썼다.
서서평은 1928년 5월 10일 평양에서 열린 한국간호협회 6회 총회에서 사도행전 20장 17~35절을 본문으로 “바울의 고난”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물질문명이 발달한 서양 태생이면서도 동양의 청빈 사상을 더 좋아합니다. 예수님은 머리 둘 곳도, 두 벌 옷도 갖지 않으셨을 만큼 청빈하셨기 때문입니다.”
서서평은 자신의 시신까지 의학용 해부용으로 기증한 철저히 이웃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그리스도를 따른 섬김의 삶을 살았다. ‘쉐핑’(Schepping)은 이디시아어로 샘에서 무엇을 끌어내다(Shep), 그로부터 큰 기쁨을 얻고 매우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의미가 있다. 우리에게 서서평은 큰 기쁨이요, 자산이다. 서서평은 지금도 광주광역시 양림 뒷동산에 묻혀 있으며 그녀를 흠모하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 영원한 흔적으로 생생하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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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평(Elisabeth Johanna Shepping)선교사
‘서서평, 천천히 평온하게’가 지난 4월 26일 한국에서 개봉되었다. 이 영화는 기독교방송 CGN TV에서 제작한 첫 번째 영화이다. 이 영화 주인공은 1912년 32세의 젊은 나이에 조선 땅에 찾아와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며 헌신한 파란 눈의 여인이다. 그녀는 가난하고 억압받던 조선 땅에 ‘작은 예수’라 불리며 살아간 서서평 선교사이다. 그녀는 폐병에 몸이 으스러져도 자신의 건강보다는 굶주리는 조선인들을 걱정했다. 오늘날 기독교회는 큰 건물과 안락함 그리고 화려함으로 치장해가고 있다. 개중에는 유산 놓고 다투는 부잣집 자식들처럼 분쟁으로 사회의 지탄을 받기도 한다. 한마디로 믿음의 실제가 미약하다. 믿음은 논리가 아니다. 삶이며 생명 그 자체이다. 따라서 현대 교회와 선교사들이 시급히 해야 할 일은 옛 선교사들의 헌신 정신을 배우고 오늘의 삶에 구현하는 것이다.
1. 출생과 성장배경
서서평(徐舒平, 1880.9.26.-1934.6.26)은 독일 출신의 미국 선교사이다. 자신의 급한 성격을 다스리기 위해 우리나라 이름을 지을 때 ‘천천히’라는 의미의 ‘서(徐)’와 평평할 평(平)를 성과 이름에 넣은 것으로 그의 삶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본명은 엘리자베스 요한나 쉐핑(Elisabeth Johanna Schepping)이며 1880년 9월 26일 독일 비스바덴(Wiesbaden)에서 태어났다. 서서평은 아버지가 호적에 없는 원치 않는 아이로 태어났다. 더구나 그녀가 3세일 때 어머니 안나 쉐핑(Anna Schepping)은 어린 아기를 조부모에게 맡기고 미국으로 이민 가버렸다. 그녀는 9세에 할머니를 잃은 후 주소 적힌 쪽지 한 장을 들고 엄마 찾아 미국으로 갔다. 가톨릭미션스쿨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성마가 병원 간호전문학교를 졸업했다. 뉴욕시립병원 실습 중 동료 간호사를 따라 장로교회 예배에 참석하고 기독교로 개종을 했다. 그녀는 전염병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간호사를 필요로 한다"는 선교부의 포사이스(Forsythe) 선교사의 소식에 접한 후 한국 선교를 지망하였다. 그리고 1912년, 미국 남장로교 해외선교부를 통해 간호선교사로 조선에 파송을 받았다.
2. 선교사 생활
그녀는 1912년 2월 20일 한국으로 파송되어 32세인 1912년부터 1934년 54세로 소천하기까지 22년 동안 사역했다. 그녀는 한국어를 배우고, 옥양목 저고리와 검정 통치마를 입었으며, 남자 검정 고무신을 신고, 된장국을 좋아했다. 온전한 조선인이 되고자 했고, 평생 독신으로 살며 미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일제점령기에 의료혜택을 받지 못했던 광주의 궁핍한 지역을 중심으로 제주와 추자도 등에서 간호선교사로 활동하였다. 미혼모, 고아, 한센인, 노숙인 등 가난하고 병약한 많은 사람을 보살폈다. 가진 것을 모두 가난한 이들에게 내어주고 정작 자신은 영양실조로 삶을 마감했다. 당시 선교사는 생활비로 3원을 받았다. 그 중에서 쉐핑이 자신을 위해 쓴 돈이 겨우 10전밖에 안 된다. 나머지는 모두 불우한 조선인을 위해 사용했다. 그녀는 병의 원인을 알 수 없었던 시체를 해부해 연구 자료로 삼으라는 유언을 남겼다. 서 선교사는 조선인처럼 산 것이 아니라 완전한 조선인으로 생활했다.
3. 서 선교사가 바라 본 조선
그녀의 눈에 비친 조선은 고난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한 번 순회 진료와 전도 여행을 나서면 한 달 이상 말을 타고 270㎞ 이상 거리를 돌았다. 진흙탕에 말이 쓰러지면 머리에 이고 백리 길을 걸었다. 그녀가 썼던 편지 한 토막은 당시 실상을 드러내고 있다. “이번 여행에서 500명 넘는 조선여성을 만났지만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열 명도 안 됐습니다. 조선 여성들은 ‘돼지 할머니’ ‘개똥 엄마’ ‘큰년’ ‘작은년’ 등으로 불립니다. 남편에게 노예처럼 복종하고 집안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아들을 못 낳는다고 소박맞고, 남편의 외도로 쫓겨나고, 가난하다는 이유로 팔려 다닙니다. 이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한글을 깨우쳐주는 것이 제 가장 큰 기쁨 중 하나입니다”(1921년 내쉬빌 선교부에 보낸 편지).
4. 공헌
간호선교사의 자격으로 1912년 조선에 들어온 서서평 선교사는 이후 광주 제중원을 비롯해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며 간호원 훈련을 비롯해 간호교과서 저술, 조선간호부회(현 대한간호협회) 창립, 10년간 회장으로서 국제간호협의회 가입을 위해 노력했다. 또 배우지 못한 여성들을 모아 설립한 이일학교(현 한일장신대), 부인조력회(현 여전도회연합회) 조직 등 여성계몽과 복음 전파를 위해 헌신했다. 특히 한국 사람들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고아와 거지, 한센병자들을 거두어 교육시켰다.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했지만, 서서평은 수양딸 13명과 나환자의 아들 1명 등 14명의 한국 아이를 입양해 기른 ‘조선의 어머니’이기도 했다. 또한 서서평은 선교사이기도 했기에 조선인들에게 성경의 출애굽기를 가르치며 해방의 꿈을 가지도록 도왔다. 그의 삶은 참으로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죽으면’ 얼마나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지 입증했다.
5. 죽음
1934년 6월 서서평 선교사는 광주에서 만성풍토병과 과로, 영양실조로 숨졌다. 그녀가 남긴 건 담요 반 장, 동전 7전, 강냉이가루 2홉뿐이었다. 한 장 남았던 담요는 이미 반으로 찢어 다리 밑 거지들과 나누었다. 시신도 유언에 따라 의학연구용으로 기증됐다. 장례에 자신의 세운 이일학교의 학생이 운구 행렬을 이루고 그 뒤로 수많은 여성이 소복을 입고 뒤따랐다. 광주 최초의 시민사회장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서서평이 죽자 천 여명이 장례 행렬을 따르며 ‘어머니’라 부르며 곡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장례식은 광주 최초의 시민사회장으로 치러졌고, 참석한 1천여 명의 사람들이 “어머니”라고 목 놓아 우는 통곡소리는 마치 비행기소리와 같았다고 한다.
맺음 말
서서평 선교사는 아버지가 없는 미혼모의 자식이요, 어미로부터 버림받는 존재였다. 그러나 이 유년시절의 아픔을 십자가 신앙으로 승화시키고 자신의 삶을 선교사의 삶으로 전환시켰다. 그녀의 인생 좌우명은 "성공이 아니라 섬김"(Not Success But Service)이었다. 진정한 예수의 정신을 삶으로 실천한 자였다. 이에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는 서 선교사를 전세계에 파견된 수많은 사역자 가운데 유일하게 ‘가장 위대한 선교사 7인’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그녀는 종교를 뛰어넘는 사랑과 헌신으로 가장 낮은 자들을 섬기며 진정한 예수의 사랑을 몸소 보여주었다. 그녀의 삶은 진정한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신앙이란 종교와 인종의 벽에 갇히지 않고 종교와 인종의 벽을 넘어서 이웃인 인류를 섬기는 보편주의로 나아가는 것을 보여준다.
오늘 맘몬이즘시대 교회와 선교 현장이 너무 세속의 유혹을 좇는 경향이 짙다. 문화와 환경적으로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열악한 시대를 한 알의 밀알로서 헌신한 서서평 선교사의 얘기가 하나의 청량제가 되어 우리 가운데 조금이라도 신선한 도전이 되었으면 싶다.
jrsong00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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