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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다해 7월30일 연중 제17주간 화요일
[청주] 인생의 끝에 서면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제1독서 : 탈출 33, 7 - 11 ; 34, 5ㄴ - 9. 28
† 복음 : 마태 13, 36 - 43.
★ 하느님께서는 광야에서 유랑하고 있는 당신 백성과 함께하시고자
그들 주위에 당신 천막을 치게 하신다. 모세는 그 안에서 하느님과
친구처럼 대화를 나누었다. 또한 십계명을 판에 기록할 때에는 그곳에서
사십 일 동안 머물며 빵도, 물도 먹지 않았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가라지의 비유’를 풀이해 주신다. 밀밭은
세상을 상징하는데, 이 세상에는 하늘 나라의 자녀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악한 자의 자녀들도 있다는 것이다. 악한 자의 자녀들이란 악마의 유혹에
빠져 다른 이를 죄짓게 하고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밀밭의 가라지 비유를 풀이해 주십니다.
밀은 하늘 나라의 자녀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악한 자의 자녀를 세상 종말에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심판하시다가는 밀도 함께 뽑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가라지는 밀밭에 자라는 억센 잡초를 가리킵니다. 실제로
가라지는 밀과 너무도 흡사하기 때문에 경험 많은 농부들도 분간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자라나면 밀과는 엄연히 달라서
아이라도 분간할 수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은 밀과
가라지가 서로 분간할 수 없을 만큼 흡사하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통하여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이들에게 ‘저 사람은 가라지야.’,
‘저 사람은 밀이야.’ 하고 쉽게 단정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신학교에 입학하면 많은 신입생이 처음에는 ‘어떻게 저런 애가
신학교에 들어왔을까?’ 하는 생각을 서로서로 갖게 됩니다. 온종일
함께 지내다 보니 서로 실망하는 부분이 많은 것입니다. 그러다가
학년이 올라갈수록 자신도 그 사람들처럼 많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또한 각자가 자신의 부족함에도 하느님의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하고자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며 서로 존중하게 됩니다.
곧 처음에는 사제가 되기에 합당하지 않은 ‘가라지’라고 서로
비판하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부족한 자신을 ‘밀’로 바꾸어 주시는
하느님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살아가다 보면 ‘가라지’라고 비판하고 싶은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판단을 보류합시다. 그 대신 농부이신
하느님께서 모든 이를 밀로 성장시켜 주신다는 점을 믿고 그분께
맡기도록 합시다.
- 매일 미사 -
◈ [청주] 인생의 끝에 서면 |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3년 다해 7월30일 연중 17주간 화요일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마태13,36-43)
인생의 끝에 서면
이건숙씨의 “꼴찌의 간증”에 보니 이런 글이 있습니다.
장수비결
“인생은 육십에 시작하는 것이니
칠십에 저승사자가 오면
잠깐 밖에 나갔다고 전해다오.
팔십에 저승사자가 오면
아직 이르다고 말해다오.
구십에 와서 가자고 하면
뭘 그리 서두르냐고 달래다오.
백살에 와서 가자고 하면
이제 서서히 좋은 시기 봐서
가겠다고 전해다오.”
인생의 끝에서면 하루라도 더 세상에 머물고 싶어지나 봅니다.
욕심이라고 하기에는 모두가 가진 기대요, 바람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2,17)
“자기의 육에 뿌리는 사람은 육에서 멸망을 거두고, 성령에 뿌리는
사람은 성령에게서 영원한 생명을 거둘 것입니다. 낙심하지 말고
계속 좋은 일을 합시다. 포기하지 않으면 제때에 수확을 하게 될
것입니다”(갈라6,8-9).
오늘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가라지의 비유를 설명해 주시는데 아주
쉽게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밭은 세상이다. 그리고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이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
사실 세상의 종말은 개인적으로 볼 때는 죽음의 순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생여정의 수확 때인 죽음의 순간에 남을 죄짓게
하고 불의를 저지르는 가라지의 상태로 있다면 불구덩이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의인의 상태였다면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고
그 삶은 해처럼 빛나게 됩니다. 너무도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쉽게 알아들은
만큼 삶의 모습도 맑고 밝아졌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안타깝게도
마지막 날에 좋은 씨앗인 하늘나라의 자녀가운데에서도 내적으로는
악한자의 자녀로 밝혀질까 두렵습니다. 얼마나 오래 살아 왔는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살았느냐의 문제가 더 소중함을 생각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의인은 이 세상의 삶을 살면서 하느님과
멀리 떨어지는 것보다 죽음을 간절히 청했습니다. 그야말로 “의인은
희생의 제물이고 그의 생애는 끊임없는 제사입니다”(성녀 벨라뎃다).
먼 훗날 하느님의 나라를 갈망하지 않고 지금 여기서 참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알곡을 만드는 것은 오늘 여기서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의인의 삶이 빛나듯 우리의 삶이 해처럼 빛났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절대 긍정의 자세로 살아가면 어떨까요?
2013년 다해 7월30일 연중 제17주간 화요일
언젠가 어떤 모임이 끝난 뒤에 저녁 식사 시간이 되었습니다. 따로
저녁 식사 메뉴를 정한 것이 아니라서, 사람들에게 식사로 무엇을
할 것인지를 물어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아무거나’를 외쳤고, 그래서
저는 “날도 더우니까 우리 오랜만에 화평동 세숫대야 냉면이나 먹으러
갈까요?”라고 제안을 했습니다. 이 말에 어떤 분이 텔레비전을 봤는데
냉면에 대장균이 많다면서 싫다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회’를 이야기
하자, 여름에 무슨 ‘회’냐면서 특히 일본 물고기에 방사능 오염이 많이
되어 있다는 이야기도 하시네요. 그러면 ‘고기’를 먹을까 했더니, 이렇게
더운데 불을 떼면서 식사를 하냐고 하십니다.
이렇게 하나하나 따지다보니 먹을 수 있는 음식이 하나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몸에 좋은 것 없다고 안 먹고 살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어쩌면 음식에 문제가 아니라, 꼬투리를 찾고 있는 우리
자신에게 더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싶네요.
사실 반대를 위한 반대를 많이 접하게 됩니다. 또 실제로 우리 스스로가
이러한 행동들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반대를 위한 반대는 사기를
꺾고 의욕을 잃게 만듭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 곁에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떠나갈 수밖에 없어 특히 외로움을 많이 겪게 됩니다.
따라서 절대 긍정의 자세로 살아가면 어떨까요? 즉,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사랑을 위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찬성을 할 수도 있는 우리가 된다면 이 세상을 보다 더 풍요롭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가라지의 비유 말씀을 해설해주십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비유 말씀 중에서 가장 명백한 내용이라 굳이 설명이
따로 없어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강조의 의미로 다시금 설명하면서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즉, 사랑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못하고 부정적인 생각으로 쉽게 단죄하고
내치고 있는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종종 성당 안에 어떤 사람 때문에 상처를 받아 더 이상 신앙생활을
못하겠다는 말씀을 듣습니다. 어떻게 성당 다니는 사람이 그럴 수
있냐는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미 아셨습니다. 교회 안에
좋은 씨와 나쁜 씨가 함께 뿌려져 있다는 것을. 그리고 수확 때에 밀과
가라지를 구별하듯, 최후 심판 때에 우리들을 구별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감히 주님보다 먼저 이 세상 안에서 판단하고
단죄해서는 안 됩니다. 끝날 까지 기다려주고 참아주시는 주님처럼
우리 역시 기다리면서 대신 사랑만을 실천하는데 더욱 더 노력해야
합니다.
반대를 위한 반대의 삶을 당장 버리고, 대신 사랑을 위해 과감하게
찬성도 할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구름 낀 날이라고 해서 결코 당신의 햇살을 망치지 마라. 비록 당신은
볼 수 없어도 햇살은 언제나 거기서, 당신 안에, 당신이 허락할 때
빛나기 위해 준비하고 있으니까(에이미 피첼).
동창신부 모임. 사진찍는다고 하니까 다 숨습니다. ㅋㅋ
진정한 행복은 어디에?
제가 즐겨하는 운동은 여러분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자전거 타기’
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 좋아하는 운동이 있는데 바로 ‘볼링’입니다.
스트레스도 풀 수 있고, 집중력을 키울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좋아합니다.
아마 볼링을 좀 치시는 분들의 꿈은 ‘퍼펙트’(열 프레임 모두를
스트라이크(Strike) 처리하는 것으로 300점입니다)가 아닐까 싶습니다.
저 역시 20년 가깝게 볼링을 치면서도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그러나 꼭 해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어제 볼링장에 갔다가 이
꿈의 퍼펙트를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인정받을 수는 없었지요. 왜냐하면
기계 상의 문제로 기록된 퍼펙트였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투구에서 1개의 핀이 남았습니다. 그러나 컴퓨터 화면 상에서는
스트라이크 표시가 됩니다. 남은 핀을 치자, 이것 역시 스트라이크
표시가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프레임에서도 1개의 핀이 남고
스페어(Spare) 처리를 했는데, 이 역시 둘 다 스트라이크 표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끝까지 다 스트라이크를 쳤습니다.
처음의 기계 상의 고장을 보지 못한 사람들은 처음부터 다 스트라이크를
친 줄 알고 박수를 쳐 줍니다. 그런데 제 양심상 도저히 퍼펙트라고
인정할 수가 없어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계 고장으로
인한 가짜 퍼펙트이니까요.
만약 제가 양심을 속이고서 퍼펙트를 쳤다고 볼링장 명예의 전당에
오른다면 행복할까요? 그렇지 못할 것 같습니다. 계속 불편한 마음을
간직할 수밖에 없겠지요. 그보다는 편안한 마음을 선택하는 것이 나를
더 행복하게 해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양심을 속이고 순간의 만족을 추구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순간의 만족이 영원한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님을, 대신 마음의
불편함만 잔뜩 가져다준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진정한 행복을 향해 묵묵히 걸어 나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 인천 교구 성소 국장 조명연 마테오 신부 -
◈ [기타]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행복하기에 실천하는 것이 복음적 삶이어야 합니다.'
2013년 다해 7월30일 연중 제17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마태오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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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결과가 두렵기 때문에 옳은 길을 살려는 사람들과, 그저 그 길이
좋고 행복하기에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옳은 길을 걸으려 하는
사람들이 있다.
오늘 복음을 읽고 마지막 날 불구덩이로 표현된 지옥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잘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한 이들도 있으리라.
하지만 우리는 이 단계를 넘어서야 한다.
두려움은 절대로 성숙한 삶을 만들어주지 못한다.
즉 자유롭고 창조적인 복음적 삶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오히려 복음을 무겁고 버거운 짐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사실 이러한 두려움을 이용해 지옥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구약 성서에서 말하는 십일조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식의 엉터리
논리를 세뇌시키는 경우를 잘못된 교회들을 통해서 보게 된다.
복음적 실천은 두려워서 하는 것이 아니다.
즉, 그 어떤 봉사나 봉헌도, 그 어떤 희생의 행위도 사랑하기 때문에,
옳기 때문에 스스로 나오는 마음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이 행복한 길이다. 옳은 길을 걷는다 해도 그것이 두려움으로
가득 찬 길이라면 어떻게 행복할 수가 있겠는가?
물론 두려울 수 있다.
하지만 그 두려움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부족한 응답에서
오는 감정이어야 한다. 옳은 일을 하면서도 행복하지 않다면 그것은
옳은 일이 아닐 수 있다. 우리의 길과 우리의 마음이 옳은 것이라면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행복할 수 있음을 믿는다.
귀가 없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청각 장애를 가진 이들이 아니라 한다면 모든 소리는 귀로
들어온다. 중요한 것은 그 소리를 식별하는 마음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른다는 것은 그분을 사랑한다는 말이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수도회] 섬뜩한 경고 이면에는 애끓는 사랑의 마음이
2013년 다해 7월30일 연중 제17주간 화요일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마태 13,36-43
섬뜩한 경고 이면에는 애끓는 사랑의 마음이
공생활 기간 내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행적을 따라가 보면 사랑과
연민의 정으로 똘똘 뭉쳐진 예수님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무시무시’합니다.
언젠가 도래할 세상 종말에 펼쳐질 일을 예고하십니다. 특히 불의하고
악하게 산 사람들이 맞이할 최후의 모습을 소개하시는데, 갑자기 나는
어떻게 될까, 걱정이 밀물처럼 밀려옵니다.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보십시오. 예수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섬뜩합니다. 수확 때 농부가
수확을 합니다. 밀과 가라지를 함께 거두어들여 밀은 소중히 따로
모읍니다. 그리고 가라지들은 한쪽에 던져놓습니다. 수확하는 곳
한쪽에는 가라지들을 태울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일이 마무리되어갈 무렵 쓸모없는 가라지들은 가차 없이
불속으로 던져집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가라지처럼 살아온 사람들의 처지도 똑같을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죄인들의 구세주이신 예수님, 우리 인간들을 향한 한없는 인내와
희생만을 되풀이해 오신 예수님께서 오늘을 어찌 이리 까칠해
지셨을까요?
제 개인적으로 예수님의 강력한 경고 이면에 담겨져 있는 우리 인간을
향한 극진하고 애끓는 사랑을 바라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주신
구원의 메시지를 들고 이 땅에 오신 메시아 예수님이셨습니다. 갖가지
놀라운 기적들을 통해 하느님의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당신의 메시아성을 거부하고 하느님 사랑의 메시지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계속 마음에 걸렸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가장
하느님 가까이 있어야 할 유다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가장 우선적인
구원의 대상이어야 할 대사제들, 율법학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끝끝내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기다려왔던 구원이 코앞인데, 손만 살짝 내밀면 영원한
생명인데, 그걸 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 그들에게 다가온 구원이 어렵지도 않았습니다. 자신들 앞에
나타나신 예수님 안에 현존하고 계시는 하느님을 발견하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는 일, 그분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일, 그것이 구원되기
위한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 쉬운 선택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너무나 안타까우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그 안타까움과
아쉬움의 표현이 종말에 대한 강력한 경고인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현재를 살아가면서도 미래의 교회를 지향해야 합니다.
순례하는 우리 교회, 당연히 미완성의 교회는 언젠가 맞이하게 될
목표지점에 도달한 완성된 교회를 꿈꾸며 살아야 합니다.
미완성의 지상교회는 당연히 많은 결함과 유한성과 죄를 안고
나아갑니다. 교회 안을 살펴보면 너무나도 당연히 가라지도 여기
저기 포함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내 안을 살펴봐도 밀이 있는가
하면 가라지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교회 공동체 안에 여기 저기 가라지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내 안의 숱한 가라지 앞에서도 마찬가지겠지요.
이 많은 죄들, 어쩔 수 없는 근원적인 결핍들, 되풀이 되는 악습들,
때로 비루한 일상들...견뎌 나가다 보면 언젠가 반드시 극복 가능한
날이 올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부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신부 -
◈ [기타] 연중 제17주간 화요일
2013년 다해 7월30일
어제는 서울 대교구 가톨릭 대학생 연합회에서 학생들이 수련장을
찾아 주셨습니다. 수련장에는 ‘무지개 공연장’이 있습니다. 저는 그
공연장의 벽에 ‘벽화’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침
대학생 연합회 지도 신부님과 만날 기회가 있었고, 신부님께서는
미술을 전공하는 학생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학생들의 도움으로
그저 하얀 벽이었던 곳이 꿈과 상상력을 키울 수 있는 아름다운
벽화로 변화되었습니다. 수련장에 아름다운 벽화를 그려주신
학생들과 함께 해주신 지도신부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하고, 병을 치료하는 방법이 서양의학과
동양의학은 차이가 있습니다. 서양의학의 특징은 발병된 부위를
수술이나 약물을 통해서 제거하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과 함께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서양의학의
장점은 효과를 눈으로 확인하기 쉽고, 조기에 치료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서양의학의 단점은 발병부위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정상적인 세포를 상하게 하기도 하고, 발병 원인을 파악하기 보다는
발병부위를 제거하기 때문에 다시 재발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입니다.
동양의학은 우리 몸은 전체가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정 부위에 질병이 발생하면 그곳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우리 몸 전체에 이상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질병 부위를 없애거나
잘라내기 보다는 그와 같은 질병이 사라질 수 있도록 몸 전체를 다스리는
처방을 내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몸의 체질을 연구하고, 각 장기의
기능을 연구하는 것이 동양의학의 치료 방법입니다. 당장 눈에 드러나는
증상을 치료하기 보다는 그 원인이 무엇인가를 찾아내고, 근본적인
치료를 하려고 합니다. 동양의학의 장점은 몸의 기능을 강화시키는
것입니다. 상처부위를 제거하거나, 질병부위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몸의 기능이 건강해지도록 해서 몸 자체가 이겨내도록 저항력을 키워
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동양의학의 단점도 있습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이고, 효과가 즉시 나타나는 것도 아닙니다.
예전에 서양 사람들은 동양의학의 ‘침, 뜸’의 효능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침과 뜸’이 우리의 몸을 상하게 하지 않고
치유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이 각 지체로
되어있지만 한 몸을 이루고 있다는 점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동양
사람들은 서양의학의 장점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어떤 질병들은
서양의학의 방법이 탁월한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서양의학과 동양의학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건강을
위해서 유익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밀과 가라지의 이야기를 설명해 주십니다.
밭은 우리의 몸과 같습니다. 밀은 건강한 지체입니다. 가라지는 병들과
아픈 지체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서양의학에서 하는 것처럼
즉각적으로 가라지를 제거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동양의학처럼
말씀을 하십니다. 지켜보면서 몸의 기능을 강화시켜 나가라고 하십니다.
건강한 지체들이 활력을 얻으면 건강하지 않은 지체들이 치유 될 수
있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예전에 이런 실험이 있었습니다. 10명의사람 중에는 열심한 사람, 대충
일하는 사람, 게으른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게으른 사람을 다른
곳으로 옮기면 모두가 열심한 것 같지만 열심한 사람 중에서 또 게으른
사람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게으른 사람을 공동체에서 쫓아내는 것이
최선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게으른 사람들 또한 부지런한 사람이 되도록
동기를 부여해 주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전에 감동적인 경기를 본적이 있습니다. 육상경기에서 1등으로 달리던
선수가 넘어졌습니다. 그 뒤로 오던 선수가 넘어진 선수가 일어나기를
기다렸고 둘은 서로 손을 잡고 결승점에 도달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관중들은 모두 일어나서 박수를 쳤습니다. 넘어진 1등을
뒤로하고 2등으로 오던 선수가 1등이 되었다면 그렇게 감동적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공동체에서도 그렇습니다. 여러 단체들이 있습니다. 각 단체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인 지체들입니다. 어떤 단체는 열심히 봉사를
합니다. 어떤 단체는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함께
지내야 합니다. 잘못이 있는 사람, 단체를 배제하고, 공동체에서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이 아닙니다.
주변에 부족한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잘못을 하는 사람들도 보일
것입니다. 그럴 때 오늘 주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싫은 사람 대하는 자세
2013년 다해 7월30일 연중 제17주간 화요일
<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
복음 : 마태오 13,36-43
< 싫은 사람 대하는 자세 >
오늘은 제가 여행하면서 겪었던 어려움에 대해 말해보겠습니다.
저의 왼쪽 귀 신경이 한 30%정도 죽어서 소리가 잘 들리지 않습니다.
터키 여행을 할 때 아침에 샤워를 했는데 물이 귀로 들어가고서는
계속 그렇게 되었습니다. 물을 통해 바이러스가 들어갔는데 그
바이러스는 터키 사람들에게는 전혀 지장이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비행장 옆에서 자라서 귀가 좋지 않은 상태에서 바이러스가 들어
갔는데도 오랜 시간 방치해 두어서 영영 회복될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렇듯 오직 터키를 여행하는 외국 사람들만 그 나라 물을 마시기만
해도 설사를 하는 등의 홍역을 치러야합니다. 그러나 그 나라에 가면
물에 항상 존재하는 바이러스기 때문에 외국인을 위해 그것을 제거할
수는 없습니다. 여행객들은 처음에 그 나라 물로 씻은 샐러드도 먹지
말아야 하지만 아예 그 나라에 살려면 그 물에 적응하기 위한 고생을
좀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한 번은 페루 마츄피츄에 올라갔을 때입니다. 마츄피츄는 잉카인들이
마지막으로 숨어 살던 산꼭대기에 있는 도시입니다. 날이 더워 반팔을
입고 다녔는데 모기 같은 것이 저의 팔을 물었습니다.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돌아와서 병원치료를 받아야할 만큼 짓무르게
되었습니다. 팔에 붉은 것들이 퍼져나갔고 매우 간지러웠으며 진물이
나왔고 약국에서 산 연고도 듣지를 않았습니다. 이유를 물어보니
역시 저에겐 그 벌레에 대한 항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항체가 없는
이유는 물론 한 번도 물려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완벽한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인간이
되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 되어가는 과정에서 악은 필수불가결한
요소입니다. 사람이 완전해지기 위해서는 좋은 것 안에서만 클 수
없고 반드시 악도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아토피가 많은 것도 너무 깨끗한 환경에다 아기를 놓아두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태어나면 그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데 바로 무균실에
들어가고 또 밖으로 나와도 공기청정기가 켜 져 있는 아파트에 들어가니
그것이 문제입니다. 이런 때는 아무리 건강에 좋은 것을 먹이더라도
저항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므로 세상에 나왔을 때는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는 세상의 악에 접하게
해야 합니다. 보호하는 것만이 최선은 아닌 것입니다. 신학을 공부하면서
안 것인데 우리 가톨릭 신학은 끊임없이 가톨릭에 반하는 이단들과
싸우면서 성장한 것입니다. 이단들이 없었다면 우리 자신이 어떤 신학을
가지고 있었는지 파고들을 필요도 없었겠고, 굳이 단단한 신학을 정립할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천사들은 악과 접할 시간이 없습니다. 죄를 하나도 짓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래서 천사들을 인간보다 더 높이 올려주셨을까요?
아닙니다. 천사들은 하느님의 종으로 두셨고 죄 많이 짓는 인간을 당신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그만큼 악 때문에 죄도 많이 짓지만 그만큼 악
때문에 성숙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자녀로 합당하게 성장시키기
위해 우리 주위에 악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이렇듯 하느님께서 가라지를 세상에 놓아두시는 것은 다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이유 없이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혹시 우리는 ‘저 인간만 없어졌으면 편할 텐데’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으십니까?
사람은 각기 다르기 때문에 어디를 가든 나와 안 맞는 성격을 지닌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어쩌면 그 사람이 정말 내가 생각하듯이 가리옷 유다와
같은 가라지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함께 있는 동안 나에게
저항력이 그만큼 커지고 내가 더 완전해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있으라고 놓아두신 것을 내가 굳이 뽑아
버리려고 발버둥 쳐서는 안 됩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도, 나를 괴롭히는
사람도 나의 스승인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사람 중 가장 작은이도 세례자
요한보다 완벽하다면 우리는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회피할 수만은
없는 것입니다. 연옥에서라도 그런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것을
배우지 않고는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라지를 뽑는 것은 밀이 아니라 하느님의 천사들입니다. 밀은 그저
가라지 속에서도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면 그만인 것입니다.
지구를 휩쓸었던 대홍수 때, 세상의 갖가지 동물들이 노아의 방주로
몰려들어 구해 주기를 애원하였습니다. 이때 善도 급히 방주로 달려
왔으나, 노아는 <선>이 배에 오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짝을 갖춘 자만을 태운다”고 하며 냉정하게 <선>을 박대하였습니다.
그래서 <선>은 다시 숲으로 돌아가 자기의 짝이 될 상대를 찾았습니다.
마침내 <선>은 <惡>을 데리고 배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이 때부터<선>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악>이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 중에 바꾸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까? 그 사람을
내 안에 넣으십시오. 나의 예방주사라고 생각하십시오. 그 사람을 품지
못하면 나의 성장은 거기서 멈춘다고 생각하십시오. 그 사람이 없으면
나도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그 사람과
함께라도 능히 행복할 수 있도록 자신을 단련하십시오. 그러면 그
사람조차도 하느님의 축복 중 하나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 수원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인생의 평을 하늘로부터 받을 준비
2013년 다해 7월30일 연중 제17주간 화요일
선한 것과 악한 것을 구분하지 못하며 산다면 참 딱한 사람입니다.
더구나 남에게 해가되는지 유익한지를 의식하지도 않아도 그렇고요.
뭐든 자기에게 해가되면 안되고 자기이익만 생각하고 사람도 그래요.
그러나 인간의 근본과 인생의 목적을 배우는 일에 신경 써야 합니다.
그래야 선과 악을 가리며 자유의지로 선한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인생의 평을 하늘로부터 받을 준비를 하며 사는 사람이 됩니다.
“밭은 세상이다. 그리고 좋은 씨는 하늘 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마태오 13,38)”
-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 [기타] 들을 귀가 있는 사람
2013년 다해 7월30일 연중 제17주간 화요일
아니 이렇게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시는데도 못 알아듣는 사람이 있단
말인가? 있었으니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하고 말씀하셨겠지.
사실 우리는 같은 말을 제각기 알아듣는 경우가 많다.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대로, 자신의 관심대로 또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알아듣는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이란 자기의
생각이나 관심으로, 자기의 경험으로 듣는 사람이 아니다. 말뜻을 잘
이해하고 공감한다고 해도 알아듣는 것은 아니다. 알아들음이란 말하는
그 사람을 진심으로 만날 때 가능하다.
주님의 이 비유 말씀을 알아들은 사람들은 각자의 삶이 달라질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 테니까. 우리는 얼마나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있는지 살펴볼 일이다. 내 생각이나 관심으로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아닌지. 말 너머 말씀하시는 주님을 만나야 한다. 그러려면
말씀이 내 안으로 충분히 들어올 수 있도록 멈추어 있을 시간이 필요하다.
말씀이 내 안으로 들어와 나를 비추어 볼 수 있도록 멈추어서 가만히 숨을
길게 쉴 필요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만날 수 있다. 말씀하시는 주님을
온 마음으로 만나고 받아들일 때 내 삶이 달라진다. 내가 달라진다.
말씀으로 인해.
‘주님, 들을 귀를 허락하소서. 아멘.’
- 박 후임 목사(봉곡 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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