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모
주봉이는 아버지만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진다.
아버지는 삼대독자로 태어난 주봉이를 품고 살았다.
주봉이 태어나고 산후 독으로 어미가 죽자 주봉이 아버지는 핏덩어리를 포대기에 싸안고
이 마을 저 마을을 돌며 젖동냥을 다녔다.
젖을 얻어먹인 집에 주봉이 아버지는 몸으로 보답했다.
마당을 쓸고 장작을 패고 엄동설한에 부엌에 물을 길어줬다.
주봉이 일곱살 때 새엄마가 들어왔다. 절름발이 아들 하나를 데리고.
새엄마는 착한 사람이었다.
떡 하나가 들어와도 절름발이 친아들을 제쳐두고 주봉이에게 먼저 줬다.
주봉이 아버지는 안심하고 다시 새우젓 외장을 돌기 시작했다.
주봉이는 세살 아래 절름발이 의붓동생 만석이를 그렇게 싫어했다.
만석이가 주봉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는 걸 질색했고 새엄마를 엄마라 부르지도 않았다.
아버지가 회초리로 종아리를 때려도 끝끝내 만석이 엄마라 불렀다.
집안에 큰일이 터졌다.
외부로 장사 다니던 아버지가 새우젓 지게를 지고 밤중에 삼십리 길을 걸어 집으로 오다가 둑길에서 넘어져 굴렀는데
일어나 걸을 수가 없었다.
둑길을 지나던 동네 사람이 도랑에 처박혀 끙끙거리는 그를 발견해 목숨을 건졌다.
열흘이 지나도 한달이 지나도 주봉이 아버지는 일어나지 못하고 약값을 마련하느라 살림은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주봉이 새엄마는 주막에서 허드렛일을 하고 주봉이는 저잣거리에서 야바위꾼 바람잡이로 일하며 푼돈을 벌어왔다.
아버지가 삼년을 누워 있으니 뙈기밭이 야금야금 다 날아가고 아버지는 옆구리에 욕창까지 생겼다.
황 의원은 밀린 외상 약값을 갚지 않는다고 욕창에 바를 연고도 주지 않았다.
열한살 주봉이가 황 의원 대문을 발로 차다가 옥졸에게 끌려가고 사흘 만에 풀려나 집에 갔더니 곡소리가 났다.
아버지를 묻을 곳이 없었다.
한때 어울렸던 야바위꾼 형들의 도움으로 관도 없이 부목을 대 아버지 시신을 묶고
이불 홑청을 뜯어서 덮어준 다음 밤중에 산으로 올라가 산벚나무 밑에 묻었다.
뒤이어 고리채 영감님이 사람을 불러와 집을 압류했다.
새엄마는 산에 올라 술 한잔을 따르고 서럽게 울더니 절름발이 아들을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지고
열한살 주봉이도 한 많은 고향 점촌을 미련 없이 떠났다.
돈! 아버지 옆구리에 바를 고약 한통 값이 없어 오장육부가 옆구리로 흘러나오게 했단 말인가!
주봉이에게 돈은 살부지수(殺父之讐·자기 아버지를 죽인 원수)가 됐다.
4년이 지나 주봉이 열다섯살이 됐다.
그는 보부상이 돼 팔도강산을 돌아다녔다. 그의 장사 밑천은 두 다리다.
돈, 돈, 돈! 아버지를 죽인 원수지만 혈혈단신 주봉이가 이 세상에서 기댈 곳이라고는 돈밖에 없었다.
스무살이 되자 장사에 눈을 떴다. 굴러다니는 돈이 보였다.
주봉이 불과 스물다섯에 주단포목계 거부가 됐지만 아직도 고리짝을 지고 단숨에 백리를 걷고 기생집 한번 가지 않았다.
주봉이 서른두살에 무릎이 시큰거리더니 엉덩이뼈가 칼로 찌르듯 아팠다.
주막 구석방에 누워 천장만 바라보고 있으려니 고향 생각이 떠올랐다.
사인교를 빌리고 가마꾼을 사 고향 점촌으로 가서 어릴 적 빚으로 남의 손에 넘어갔던 집을 웃돈을 얹어주고 되찾았다.
황 의원을 불렀다. 황 의원이 주봉이 무릎을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밤마다 요강에 피를 토했다. 부전자전, 장마철에 바짝 졸아든 엉덩이에 욕창이 생겼다.
세살 아래 집사가 주봉이의 명으로 돌아다니다가 보름 만에 할머니와 절름발이 젊은이를 찾아서 데려왔다.
주봉이가 물었다.
“만석아, 너는 뭘 하고 살았느냐?”
절름발이가 대답했다.
“왕골농사를 지어 돗자리를 짜서 장에 내다 팔았습니다, 형님.”
주봉이가 후 하고 한숨을 쉬더니 어머니에게 말했다.
“어머니 몸이 쇠약해지셨네요. 고기를 자주 사 드세요.
아버지께서 묻힌 산을 제가 샀습니다.
만석이 이름으로 이 집과 함께 등기를 했습니다.”
“흑흑.”
벽에 기대 무릎을 베고 누워 있는 주봉이 얼굴을 쓰다듬으며 새엄마는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
“봉분을 올리고 비석도 세웠고 그 옆에 어머니 묏자리도 마련해뒀습니다.”
주봉이 가쁜 숨을 토하며 “만석아 결혼했냐?” 물으니
“예, 아들 하나 딸 하나 뒀습니다”라고 답이 돌아왔다. 주봉이 다시 입을 열었다.
“만석아 이 열쇠를 받아라. 다락 속에 돈 궤짝이 세개 있다. 어머니 잘 모시고.”
새엄마 무릎을 베고 주봉이는 편안하게 이승을 하직했다더라. 서른두살에.
첫댓글 돈 돈돈
주봉이가 새엄마의 은혜를 저버리지 않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