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8월 6일 토요일
[(백)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마태 17,1-2).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은 공관 복음이 공통적으로 전하는 이 말씀에 따른 것이다. 곧,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일을 기리는 축일이다. 오늘 축일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9월 14일)의 40일 전에 지낸다. 교회의 전승에 따라,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40일 전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의 결과인 영광스러운 부활을 미리 보여 주시고자 거룩한 변모의 표징을 드러내셨다. 1457년 갈리스토 3세 교황이 로마 전례력에 이 축일을 도입하였다.
다니엘 예언자는 옷은 눈처럼 희고 머리카락은 깨끗한 양털 같은 분이 옥좌에 앉아 계신 것을 보는데,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이가 그를 섬기게 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산에 올라 기도하시는데,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옷이 하얗게 빛난다(복음).
<그분의 옷은 눈처럼 희었다.> ▥ 다니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7,9-10.13-14<또는 2베드 1,16-19> 9 내가 보고 있는데, 마침내 옥좌들이 놓이고, 연로하신 분께서 자리에 앉으셨다. 그분의 옷은 눈처럼 희고, 머리카락은 깨끗한 양털 같았다. 그분의 옥좌는 불꽃 같고, 옥좌의 바퀴들은 타오르는 불 같았다. 10 불길이 강물처럼 뿜어 나왔다. 그분 앞에서 터져 나왔다. 그분을 시중드는 이가 백만이요, 그분을 모시고 선 이가 억만이었다. 법정이 열리고 책들이 펴졌다. 13 내가 이렇게 밤의 환시 속에서 앞을 보고 있는데,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 연로하신 분께 가자, 그분 앞으로 인도되었다. 14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졌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28ㄴ-36 그때에 28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 29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 30 그리고 두 사람이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였다. 31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 32 베드로와 그 동료들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나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그분과 함께 서 있는 두 사람도 보았다. 33 그 두 사람이 예수님에게서 떠나려고 할 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34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는데 구름이 일더니 그들을 덮었다. 그들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자 제자들은 그만 겁이 났다. 35 이어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36 이러한 소리가 울린 뒤에는 예수님만 보였다. 제자들은 침묵을 지켜, 자기들이 본 것을 그때에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복음에서처럼 예수님께서 빛나는 존재가 되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써 모든 것이 끝나고 마는 무기력한 존재가 아니라, 그 죽음을 끝내 이기시고 영광스럽게 부활하시리라는 것을 미리 알려 주고 있지요. 또한, 그 자리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함께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두 사람은 구약의 모든 예언자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은 이미 구약 시대 때부터 예정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지요. 그런데 베드로는 왜 이런 말을 했을까요?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베드로는 순간적으로 영광의 자리에만 머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십자가 없는 영광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역시 이런 유혹에 끊임없이 직면하고 있지요. 고통과 희생 없이 영광만을 맛보려 할 때가 많지 않습니까? 그만큼 하루하루 많은 십자가가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나날의 고통과 걱정을 안고 살아가고 있지요. 삶이 허무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때로는 하느님께 불평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존재 역시, 이런 덧없어 보이는 상황에서 끝나고 말 것이 아니라, 언젠가 예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절대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와 함께 아파하시고, 고통을 함께 나누시며, 우리의 삶에 동참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
은갈치 눈동자와 한물 간 고등어 눈동자
당신 수난에 대한 첫 번째 예고 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 나라를 볼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 예수님의 말씀이 오늘 타볼산 위에서 실현되고 있습니다.
수석 제자단격인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만을 데리고 타볼산 정상에 오르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모습을 변화시키셨습니다. 깊은 기도 중에 예수님께서는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옷을 하얗게 번쩍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변모 중에 율법을 상징하는 모세와 예언자를 대표하는 엘리야가 나타납니다.
이 특별한 광경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잠깐 동안이나마 하느님의 나라가 제자들의 눈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님 안에 깃들어있는 진정한 신성(神性)을 자신들의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제자들이 보고 있는 하느님 나라는 아주 잠깐 동안입니다. 그들은 아주 ‘살짝’ 하느님의 나라를 맛본 것입니다. 예수님의 변모와 광채 역시 한시적입니다. 예수님께서 몸소 치러내셔야 할 수난과 십자가 죽음을 거쳐야 항구한 것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이야기하고 있었던 중심 대화는 머지않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겪으셔야 할 일, 고통과 십자가 죽음에 대한 대화였습니다. 지금의 이 변모는 시편의 서곡과도 같은 것입니다. 언젠가 부활과 승천 이후 완전한 변모로 변화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런 변모와 잠깐 동안 맛본 황홀한 하느님 나라에 완전 취해버린 베드로는 지금 이순간의 찬란한 모습을 계속보고 싶은 인간적 욕구로 인해 초막 셋을 짓고 싶어 합니다.
그러한 베드로의 간절한 염원과는 아랑곳하지 않고 즉시 베드로를 휘감은 것은 짙은 구름이었습니다. 영속적인 승리와 영원히 계속될 하느님 나라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짙은 구름 속을 헤쳐 나가는 일이 아직 남아있음을 암시하는 구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참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일은 아직 보류된 상태입니다. 지금 우리 앞에 주어지는 현실은 단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짙은 구름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기꺼이 막막한 현실을 견디는 일이며 여러 가지 부당한 현실이나 고통과 십자가 앞에 침묵하는 일입니다. 언젠가 활짝 갠 하늘이 열릴 그날이 올 때 까지 참고 또 참을 일입니다.
우리네 한평생 빛과 어두움이 언제나 교차합니다. 우리네 인생 하느님 나라의 빛나는 광채와 인간 세상의 비루함이 공존합니다. 우리의 일상은 하느님 나라의 찬란한 영광과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할 고통이 수시로 반복됩니다. 이렇게 우리는 영원한 생명과 유한한 생명 사이를 매일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 도래할 빛나는 하느님 나라를 꿈꾸며 침묵의 행군을 계속해나가는 것,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타볼산에 오르셔서 간절히 기도하시던 가운데 얼굴이 변하셨습니다. 진심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 열렬히 기도할 때 우리의 얼굴도 변화될 것입니다. 기도의 대가였던 성인들의 얼굴은 광채로 빛났습니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은 충만한 기쁨으로 빛납니다. 그들의 눈빛은 총기와 생명력으로 반짝거립니다. 마치 갓 낚아 올린 싱싱한 은갈치 눈동자처럼 신선합니다.
그러나 기도나 영적생활과 담을 쌓고 살아가는 사람들, 세상에 푹 파묻혀 살아가는 사람들의 눈동자는 마치 한물 간 고등어 눈동자 같습니다. 초췌하고 무기력합니다. 세상 언제 끝나나 하는 얼굴입니다.
자주 우리 얼굴을 바라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진지하고도 충실한 기도생활을 통해 반짝 반짝 빛나는 얼굴인가? 아니면 세상에서 가장 우울한 얼굴, 대체 세상 언제 끝나나 하는 울적한 얼굴인가, 수시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도 타볼산의 예수님처럼 열렬하고도 진지한 기도를 통해 얼굴이 변화되고 삶이 변화되고 인생관이 변화되는 은총을 맛보는 이번 한주가 되길 바랍니다.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