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풍 운동을 펼치다 왜 '우파분자'로 몰렸나
중국은 1957~8년에 반우파투쟁이라는 정치운동을 감행하였다. 현대중국의 정치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중국의 반우파투쟁을 알아야 한다.
1949년 중공정부 수립 후 중국 각 급 정부, 사회단체의 크고 작은 간부의 90% 이상을 공산당원이 차지했다. 초·중교 수준이 주축이고 일부 반문맹·문맹도 포함된 관료계층이 인민군중, 특히 고·대교 출신 군중의 눈에 차지 않음은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그들은 집권 8년 간 관료주의, 주관주의, 종파주의 작풍을 자행하여 광대한 인민군중의 강렬한 불만을 자아냈다.
중공의 1949년까지의 혁명은 민주주의 혁명이었다. 제국주의, 봉건지주, 매판자본가(외국자본과 결탁한 초대형자본가)에 대한 반대가 혁명의 핵심이었다. 반제는 민족해방혁명이고, 반봉건지주는 자산계급민주혁명이며 반매판자본만 사회주의혁명의 요소가 약간 포함되었었다. 다만 자산계급성격의 이 혁명을 무산계급(공산당)이 영도하였으므로 ‘신민주주의혁명’이라 불렀다.
광범위한 사회주의제도의 건립은 비폭력, 비혁명의 방법을 썼다(1954~1956). ‘사회주의개조’라 불렀으며 도시 자본가의 기업은 국가가 51% 이상의 주식을 사들여 ‘공사합영(公私合營)’이란 이름으로 국유화했다. 농민은 자원원칙에 의해 초급사(初級社)→고급사(高級社)를 묶어 집단농장화했다. 국유화와 집단농장화 와중에 강제가 동반되어 모순이 치열하였다.
이때 국외에서 심상치 않은 세 가지 사건이 터졌다.
1) 1956년 2월 제1서기 후루시초프가 소련공산당 20차 당대회에서 스탈린의 개인숭배와 반혁명숙청의 확대화를 비판하였다. 중공은 스탈린의 보고를 봉쇄하였지만 각 대학의 영어 신문 등을 통해 확산되었다. 모택동의 개인숭배, 반혁명숙청의 확대화는 스탈린의 죄행과 흡사하므로 중국인민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2) 1956년 6월 28~30일 폴란드의 포즈난에서 인민봉기가 일어났으며 진압시 74여 명이 죽고 80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3) 1956년 10월 23~11월 4일에 헝가리에서 인민봉기가 일어났고 소련군에게 진압되며 2700여명이 죽었다. 모두 소련식 사회주의 체제, 소련의 통제와 독재정치를 반대하는 봉기였다.

▲ 1956년 반소(反蘇) 봉기에 나선 헝가리 부다페스트 대학생들이 소련군에 저항하고 있다
이러한 형세 하에 1956년 말부터 사회주의·공산당·무산계급독재를 반대하고 관료주의를 반대하며 집단농장을 탈퇴하는 사조가 일어났다. 파업, 동맹휴학 및 시위유행 등이 비일비재하였다. 중국공산당은 부득불 정풍운동을 단행하였다. 1956년 11월에 결정짓고 1957년 4월부터 시작하였다. 당조직은 광대한 인민군중의 의견과 비판을 허심히 받아들인다고 하였다.
광범한 군중, 특히 고·대교졸 지식분자와 민주당파들은 뛰어들어 당조직에 의견을 제출하였고 비판도 가했다. 의견과 비판의 내용은 a) 당간부의 관료주의, b) 공산당의 그릇된 정책, c) 중국의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반대 등 세가지였다. 그 중 a)가 가장 많았고, c)는 적었다. 절대다수의 의견과 비판은 호의적이며 공산당의 풍기정돈에 기여하려는 동기에서 출발하였다.
그러나 중공중앙과 모택동은 군중들의 의견과 비판을 반동계급의 반혁명행위로 몰아붙이며 그들에게 ‘우파분자’의 모자를 씌우고 반격을 가했다. 6월 8일, 즉 정풍운동을 시작한지 40여일 만에 <인민일보>에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라는 사설을 내어 전국적인 반우파운동을 호소하였다. 힘차게 전개되던 정풍운동은 이내 반우파투쟁으로 역전하였다.
무릇 공산당조직, 특정 당간부에게 의견을 제출한 자는 모두 반당우파분자로 몰렸고 당간부들이 사적인 감정으로 우파분자의 모자를 씌운 자도 많았다. 1958년 반우파투쟁이 끝날 때 전국적으로 55만2973명이 우파분자의 모자를 썼는데 중·상층 지식인이 대부분이다. 많은 전국적, 심지어 세계적인 석학―페이쌰우퉁(费孝通) 사회학자, 딩링(丁玲) 작가, 류하이쑤(刘海粟) 화가 등도 우파분자로 되었으며 많은 전인대 대표, 정협위원들도 우파분자로 몰려 해임되었다.
많은 조선족지식인들도 우파로 몰렸다. 그들이 우파분자로 몰린 죄행은 대체로 두 가지인데, 첫째, 왜 본인의 동의 없이 외국(북한) 국적의 조선족을 무작정 강제로 중국국적으로 만들었느냐? 둘째, 왜 조선족자치주인데 자치를 제대로 못하느냐이다. 모두 지방민족주의자, 민족분열주의자의 죄명으로 우파분자의 모자를 썼다. 이름 있는 조선족 작가는 이근전(李根全) 한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 우파분자로 몰렸다.
우파분자의 모자를 쓴 사람은 ‘계급의 적’이므로 간부 직무에서 해임은 당연하고 농촌이나 광산으로 쫓겨나 사상개조를 해야 했다. 주위 사람들은 그들을 인간취급하지 않았고 처자식들도 주위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고 모욕을 당하며 살아야 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적어서 몇 년, 많으면 10년 이상의 옥살이를 하여야 했다.
항일 독립운동을 펼치던 김학철이 우파분자로 몰린 이유
1959년 9월 ‘개조 표현이 좋은 우파분자’의 우파분자모자를 벗겨주었다. 우파분자의 5%인 2만8165명이 모자를 벗었다. 그들을 ‘모자 벗은 우파’라 불렀으며 실은 여전히 우파분자로 취급하였다. 정치운동 때마다 그들은 우파분자와 다른 ‘계급의 적’들과 같이 투쟁을 당해야 했었다. 모택동이 사망하고 나서 1978년에 와서야 우파분자에 대한 재조명을 실행하고 사면복권을 해주었다. 결과 진짜 우파분자는 우파분자 총수의 1만분의 1.7인 96명뿐, 나머지 1만분의 9998.3은 억울하게 누명을 쓴 우파분자였다.
‘우파부자’에게 사면복권을 해주고도 중공은 반당, 반사회주의분자에 대한 반우파투쟁은 잘한 일이라고 고집한다. 반당반사회주의분자라 함은 주요로 전국적인 우파분자 장버쥔(章伯钧), 뤄룽지(罗隆基), 펑원잉(彭文应), 추안핑, 천런빙(陈仁炳) 5인의 ‘죄행’을 말한다. 추안핑의 ‘당천하’ 의견, 장버쥔의 ‘양원제’ 주장, 뤄룽지의 ‘사면복권위원회를 설립하여 정치상 애매하게 당한 자를 복권해주자’는 주장 등은 모두 건설적인 의견인데 말이다.

▲ 반우파운동 당시 농공민주당(農工民主黨) 지도자 장백균(章伯鈞·사진 가운데)이‘대우파’로 몰려
군중으로부터 공개 비판을 받고 있다. 우파 중에 지도자급을 대우파로 부른다.
진짜 우파분자가 당한 인생의 비극은 말이 아니다.
추안핑(儲安平)은 <광명일보>의 주필이었는데 ‘공산당이 천하를 독점한다(黨天下)’는 의견을 제출하였다가 중국 랭킹 4위의 우파분자로 몰렸다. 우파분자로 몰린 후 몇 평 안 되는 좁고 습한 집에서 겨우 언명하며 살아야 했다. 1966년 문혁이 터지자 너무 군중대회의 투쟁에 시달려 투하자살을 시도하다가 실패했다. 나중에는 이혼한 처가 추안핑과 잘 아는 다른 남자와 연애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치욕감을 금치 못하여 사라졌는데 지금까지 그의 행방을 알아내지 못하였다. 후에 사망했다는 결정이 내려졌지만 마지못한 결정에 불과하다.
조선족의 골수 우파분자 김학철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중국 역사상 가장 처음으로 모택동의 개인숭배와 대약진, 인민공사 등의 좌경착오를 비판하는 장편소설 <20세기의 신화>를 펴냈다. 그는 수없는 비판을 당했고 비인간의 대우를 받았으며 장장 25년간 창작활동을 중지해야 했다. 문혁 때는 10년간 옥살까지 하였다. 그가 진정한 사면복권을 받은 해는 1985년, 69세 때이다. 김학철은 85세로 사망했다.
김학철은 중국 상하이에서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하고 독립운동을 하다가 우한(武漢)에서 항일의병대를 조직했다. 1940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태항산맥 일대에서 반일무장투쟁을 하다가 일본군 총탄에 허벅지 관통상을 입고 포로 되었으며 다리 하나가 절단되었다. 일본 나가사키 감옥에 4년반동안 감금되었다가 광복을 맞아 풀려났다. 실로 하자 없는 공산당, 혁혁한 공헌이 있는 혁명 투사인데도 일단 우파분자로 되니 이런 참상을 면치 못했다.
만약 1957년 중공이 ‘우파분자’들의 건설적인 의견을 받아들였다면 그 후에 일으킨 1958~9년의 대약진·인민공사화 운동, 4청(四淸) 운동, 문혁 등 재난을 모면했을 지도 모른다. 1979년부터 등소평의 창도로 실행한 개혁개방은 1954~56년의 사회주의 개조를 전면 부정하고 중국을 1953년 이전의 체제로 역전시켜놓았다. 즉 1957년 ‘우파분자’들의 주장은 20년 후 등소평의 주장과 다를 바 없다. 그러므로 소위 진짜 우파도 응당 죄명을 벗겨주어야 맞다.
확정된 우파분자는 대부분 민주당파의 좌장들이다. 그들은 공산당을 도와 국민당-장개석을 반대한 공산당의 단결대상, 전우, 심지어 공로자들이다. 모택동은 1956년 4월 <10대 관계를 논함>에서 공산당과 민주당은 장기공존(長期共存), 호상감독(互相監督)의 관계라고 하였다. 그 이듬해에 반우파투쟁을 벌여 자기가 한 말을 번복하고 자기에게 의견을 제출한 민주당파의 조장들을 일거에 몰살시킨 셈이다. 지금도 중국에 야당이 생존하고 있지만 이미 한 차례의 강 서리를 맞은, 자기의 주장을 감히 내세우지 못하는 공산당의 들러리에 불과하다.
이는 김일성의 행태와 다를 바 없다. 김일성은 자기의 권력이 충실해지는 정도에 따라 1955년 먼저 남로당을 숙청하였고, 다음 친소련파를 숙청하였으며, 세 번째로 중국에서 온 연안파를 숙청하였고 1968년에 마지막으로 갑산파를 숙청하였다. 1968년 이후에는 소련 스탈린 이상의 개인숭배, 1인독제를 실행하였다.
모택동도 힘이 모자랄 때는 통일전선이요, 혁명의 단결대상이요, 전우요 하며 민주당의 힘을 빌었다. 사회주의 개조가 끝나고 권력이 공고해짐에 따라 1957~58년에 반우파투쟁이란 명목 하에 전우관계인 민주당 좌장들을 일거에 소탕하고 공산당의 유아독존(唯我獨尊), 일당독재를 실행하였다. 이것이 반우파투쟁의 본질이겠다.
첫댓글 모택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