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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칠은 제7강의] 지식(知識, knowledge)의 은혜
성령께 ‘예’라고 말할 수 있는 성향을 주는 선물이다.
창세 2:15-17/3:1-13:
(창2:15) 야훼 하느님께서 아담을 데려다가 에덴에 있는 이 동산을 돌보게 하시며 (창2:16) 이렇게 이르셨다.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먹어라. (창2:17)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먹지 말아라. 그것을 따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는다.”
(창3:1) 야훼 하느님께서 만드신 들짐승 가운데 제일 간교한 것이 뱀이었다. 그 뱀이 여자에게 물었다. “하느님이 너희더러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하나도 따먹지 말라고 하셨다는데 그것이 정말이냐?” (창3:2) 여자가 뱀에게 대답하였다.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먹되, (창3:3) 죽지 않으려거든 이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 열매만은 따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 (창3:4) 그러자 뱀이 여자를 꾀었다. “절대로 죽지 않는다. (창3:5) 그 나무 열매를 따먹기만 하면 너희의 눈이 밝아져서 하느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이 아시고 그렇게 말하신 것이다.” (창3:6) 여자가 그 나무를 쳐다보니 과연 먹음직하고 보기에 탐스러울 뿐더러 사람을 영리하게 해 줄 것 같아서, 그 열매를 따먹고 같이 사는 남편에게도 따 주었다. 남편도 받아먹었다. (창3:7) 그러자 두 사람은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앞을 가리웠다. (창3:8) 날이 저물어 선들바람이 불 때 야훼 하느님께서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는 야훼 하느님 눈에 뜨이지 않게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창3:9) 야훼 하느님께서 아담을 부르셨다. “너 어디 있느냐?” (창3:10) 아담이 대답하였다. “당신께서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듣고 알몸을 드러내기가 두려워 숨었습니다.” (창3:11)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주더냐? 내가 따먹지 말라고 일러 둔 나무 열매를 네가 따먹었구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창3:12) 아담은 핑계를 대었다. “당신께서 저에게 짝지어 주신 여자가 그 나무에서 열매를 따 주기에 먹었을 따름입니다.” (창3:13) 야훼 하느님께서 여자에게 물으셨다. “어쩌다가 이런 일을 했느냐?” 여자도 핑계를 대었다. “뱀에게 속아서 따먹었습니다.
두려움의 은혜로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의 위대하심을 관상하는 어떤 성향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이 얼마나 크시고 거룩하시고 아름다우신가! 하느님의 편재하심! 하느님의 말씀으로 이모든 것이 만들어졌고 이런 피조물 안에 하느님의 거룩함이 스며들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 우리는 경탄하라는 초대를 받았습니다. 성자 앞에서 하느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진 만물 앞에서 하느님의 놀라움에 경외심 갖는 초대를 받았다. 효경의 은혜를 받음으로 두려움의 은혜를 보완하는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성령의 은혜는 보완하는 성향입니다. 하느님의 편재하심은 사랑하시는 하느님이 곳곳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 안에서 선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인류와 사랑의 계약을 맺기를 바라신다.
우리에게 당신의 성령을 주시고 성부와 성자 사이에는 사랑의 통교가 이루어진다. 우리 사이에 예수님과 함께 통교를 이룬다. 그래서 인간들 사이의 사랑의 공동체와 사랑의 친교를 이루어서 복되신 성삼의 친교에 참여하라고 초대받은 것입니다. 이런 인류사의 사랑의 친교를 통해서 복되신 성삼의 친교에 참여하라는 초대를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아빠’라고 부르도록 초대받은 것이다. 이 초대는 하느님의 사랑의 계약에 근거를 둔 것이다. 영원토록 하느님께 “예”라고 응답하는 것이다. 우리가 드려야 할 “예”가 있다. 이 지식의 선물은 성령께 예라고 말할 수 있는 성향을 주는 선물이다.
이 지식의 은총을 살펴보자. 우리는 창세기 아담 설화에서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그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신 아름다운 내용을 읽었다. 하느님은 우리 스스로 선과 악의 지식을 이해할 수 없으니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지식을 우리 스스로 이해할 없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양심을 주셨다. 우리는 이 양심을 통해서 빛을 받았다. 선과 악을 구별하는 빛은 양심을 통해서 받는다. 여러분이 복잡한 기계를 받았다고 합시다. 거기에는 설명서가 있지요. 이 설명서를 주의 깊이 읽어서 사용하면 오랫동안 자유롭게 잘 사용할 수 있지만, 읽어보지도 않고 ‘내가 다 알아’ 하면서 마구 사용하다 보면 그 기계를 망가뜨리게 됩니다. 이 기계를 사용할 수 있는 자유가 없어진다. 선과 악을 아는 선물을 받으라는 하느님의 호소는 우리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자유에 따라서 우리 자유가 신장되기를 바라는 부르심입니다. 우리의 양심은 우리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참된 자유로 성장하게 하는 것이다.
모든 열매는 따먹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먹지 말라는 말씀에 좌절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탄의 계략은 진리를 왜곡시키는 것입니다. 사탄은 거짓의 왕입니다. 그는 거짓말만 합니다. 진리를 항상 왜곡시킵니다. 인간에게 “왜 하느님의 말을 들어야 하느냐? 네 자신 스스로 왕이 되어라”고 꼬인다. 네 자신의 말을 들어라. 그러면 하느님이 될 것이다. 하느님처럼 될 것이다. 선과 악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인간은 길을 잃게 된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하느님은 우리에게 경고하신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 갇혀 버린다면 우리는 자신의 욕망의 노예가 됩니다. 사탄의 계략은 항상 진리를 왜곡시킵니다. 처음부터 그랬습니다. 항상 사탄은 우리를 유혹하려고 한다. 그런 유혹에 빠진 결과는 즉시 반대로 나타납니다. “네가 주인이 될 것이다”라고 속삭인 말에 귀를 기울이면, 그 결과로 우리는 책임성을 잃어버립니다. 하느님은 “선악을 구별하려면 우리 양심에 귀를 기우리라”고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어떻게 교육할 지 압니다. 사탄은 우리를 노예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하느님이 아담에게 “왜 열매를 따먹었느냐?” 내가 아니라. 아담이. 아담은 내가 아니고 악마가 라고 책임을 떠넘깁니다. 결국 사탄의 노예가 됩니다. 스스로 자신의 행동의 주인이 되기보다는 사탄의 노예가 됩니다.
우리는 죄가 무엇인지 분간하기가 모호한 세상에 살고 있다. 심리학의 영향으로 죄를 짓고도 심리적인 문제 때문이라고 책임을 전가하고, 운명 때문이라고 하고 콤플렉스나 구조 문제나 스트레스나 개인 심리적인 병때문이라고 하며 죄책감을 없애 버린다. 이것은 어느 정도는 사실일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인격적인 책임을 지지 않으면, 어떻게 인격적인 사랑을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창조될 때의 본래 모습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실재로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언제 ‘예’할지 언제 ‘아니오’ 할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혼란스러운 세상에서는 성령의 특별한 선물인 지식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선과 악을 아는 은혜이고. “예와 아니오”를 아는 은혜이고, 좋고 나쁨을 아는 은혜이고, 옳고 그름을 아는 은혜이고, 어둠에 속하는지 빛에 속하는지를 아는 은혜입니다. 요한 성인은 어둠과 빛의 관계로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이미 구약성서 안에 “하느님의 성령이 우리의 비전을 바꾸어 주시기”를 바라는 열망이 나타납니다.
에제키엘 36장에서 새로운 영 새로운 마음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에제36:25) 정화수를 끼얹어 너희의 모든 부정을 깨끗이 씻어 주리라. 온갖 우상을 섬기는 중에 묻었던 때를 깨끗이 씻어 주고 (26) 새 마음을 넣어 주며 새 기운을 불어넣어 주리라. 너희 몸에서 돌처럼 굳은 마음을 도려내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넣어 주리라. (27) 나의 기운을 너희 속에 넣어 주리니, 그리 되면 너희는 내가 세워 준 규정을 따라 살 수 있고 나에게서 받은 법도를 실천할 수 있게 되리라. (28) 너희는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살면서 나의 백성이 될 것이요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
금요일마다 성무일도에서 아름다운 시편을 낭독한다. 시편 51편 1-4 / 10-13을 보자. 우리의 죄를 고백하면서 새로운 정신을 주시기를 빌며 성령을 간구하는 기도이다.
(시51:1) 하느님, 선한 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어지신 분이여, 내 죄를 없애 주소서. (시51:2) 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잘못을 말끔히 씻어 주소서. (시51:3) 내 죄 내가 알고 있사오며 내 잘못 항상 눈 앞에 아른거립니다. (시51:4) 당신께, 오로지 당신께만 죄를 얻은 몸, 당신 눈에 거슬리는 일을 한 이 몸, 벌을 내리신들 할 말이 있으리이까? 당신께서 내리신 선고 천번 만번 옳사옵니다.
(시51:10) 하느님, 깨끗한 마음을 새로 지어 주시고 꿋꿋한 뜻을 새로 세워 주소서. (시51:11) 당신 앞에서 나를 쫓아 내지 마시고 당신의 거룩한 뜻을 거두지 마소서. (시51:12) 그 구원의 기쁨을 나에게 도로 주시고 변치 않는 마음 내 안에 굳혀 주소서. (시51:13) 죄인들에게 당신의 길을 가르치리니 빗나갔던 자들이 당신께로 되돌아 오리이다.
첫 구절에서는 “제가 무언가 잘못했습니다”라고 고백을 하지만 완전히 잘못했다고 고백하지는 않는다. 제가 사랑의 계약에 완전히 응답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하느님의 영이 있습니다. 나의 의지를 새롭게 창조하실 하느님의 영이 계십니다.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라고 단호하게 하는 꿋꿋한 뜻(영)을 내려 주십시오. 당신께 ‘예’할 수 있는 너그러운 영을 항상 간직하게 해주십시오. 하느님께 ‘예’하는 것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영’을 주십시오. 계속해서 진리를 추구하겠습니다. 또 보완하는 은혜는 사탄과 싸우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관상하는 은혜입니다.
마태 4:1-11 :
(마태4:1) 그 뒤에 예수께서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2) 사십 주야를 단식하시고 나서 몹시 시장하셨을 때에 (3) 유혹하는 자가 와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4) 예수께서는 “성서에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 고 하지 않았느냐?” 하고 대답하셨다. (5) 그러자 악마는 예수를 거룩한 도시로 데리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뛰어 내려보시오. 성서에, ‘하느님이 천사들을 시켜 너를 시중들게 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너의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하지 않았소?” 하고 말하였다. (7) 예수께서는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떠보지 말라’ 는 말씀도 성서에 있다” 하고 대답하셨다. (8) 악마는 다시 아주 높은 산으로 예수를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화려한 모습을 보여 주며 (9) “당신이 내 앞에 절하면 이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사탄아, 물러가라! 성서에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고 하시지 않았느냐?” 하고 대답하셨다. (11) 마침내 악마는 물러가고 천사들이 와서 예수께 시중들었다. (공관복음 : 마르 1:11-13/ 루가 4:1-13)
이 유혹 사화를 주해하려는 것이 아니다. 저는 “예수님이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서 유혹을 받으셨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이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서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제가 반복하여 말씀드리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려 갈 때 침묵을 지키려고 합니다. 그 때마다 자주 오는 유혹이 있습니다. 성체성사 앞에서 머문 다음에 저에게 오는 유혹은 분심과 잡념의 유혹이다. 우리는 항상 유혹을 받는다. 기도를 재빨리 포기하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이렇게 유혹을 받는다면 기도하는 것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 예수님은 성령의 이끄심을 받아서 광야에 나가셨는데 “유혹을 받으러” 나가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스승의 제자로서 유혹을 받을 때에 놀라지 맙시다. 하느님은 유혹을 통해서 우리를 방문하시는 것입니다. 특별히 유혹이 많은 세상에 사는 교구 사제에게 그러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혹을 받으셨는데 ‘세상에서’ 당신의 사명을 시작하시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악한 세력을 어떻게 쫓아내는 것인지”를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악을 식별하도록 훈련시키십니다. 인간의 힘으로 악을 쫓아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고, 악한 세력을 쫓아낼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이나 기술은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도움과 사랑의 힘을 청하는 기도로서만 가능합니다.
마치 운동선수들이 어려운 묘기를 보이려고 할 때에 몇 번이고 그것을 연습하듯이 우리도 반복해서 유혹을 물리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나는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결코 유혹을 물리칠 수 없고, 오직 하느님께 사랑의 능력을 청하고 구해서 그 하느님의 힘으로만이 악을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계속 훈련을 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일어나는 유혹은 예수님이 받은 유혹과 같지는 않습니다. 어떤 때는 이런 유혹이 분명하지만 어떤 때는 모호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복잡성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다가 악에 이끌려 가 버립니다. 우리 안에 악의 뿌리가 있음을 느낍니다. 악에 자꾸 이끌리기도 합니다. 기도하면서 이런 상태에서 기도하고 싶지 않아서 “기도해 보아야 소용없구나”라고 생각하고 기도를 포기하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정확하게 그 유혹을 통해서 우리를 방문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정화시키기 위해서 마음을 성별하고 굳세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방문하십니다. 예수님께는 이것이 필요한 훈련이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면제받기를 바랍니까? 예수님보다 더 훌륭하게 이 유혹을 이기려고 하십니까? 그것은 필요한 훈련입니다. 유혹 앞에서 기도하고 또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경외하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유혹 앞에서 예수님은 기도했습니다. 그처럼 우리도 기도해야 합니다. 진실을 왜곡하는 사탄은 기도하는 우리를 유혹을 해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유혹한다. 예수님이 광야에 나가서 기도하는 것은 불편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편안하게 앞으로 나아 갈 수 없습니다. 편안함은 우리에게 앞으로 나갈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사탄의 제안 앞에서 예수님은 늘 어떻게 할지를 아셨습니다. 성서에서 나오는 하느님의 말씀이나 하느님의 뜻으로 악을 거부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상까지 이어지는 전 삶을 아버지께 “예”하고 응답하십니다. 예수님은 “(마태5:37) 그저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라고 만 하여라. 그 이상의 말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우리의 행동이나 머리 속에 ‘예’나 ‘아니오’만 있는 것이 아님을 압니다. 성령과 함께하는 지속적인 기도만이 우리를 순화시킵니다. 실재로 적용할 수 있은 방법을 제시합니다.
1. 첫째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잘못된 것을 고백합니다. 어떤 때는 그 잘못이 무엇인지 그 뿌리가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예수님과 사랑의 관계를 방해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알지요. 이것을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사랑하는 예수님과의 관계를 방해하는 것은 무엇이나 아니오라고 물리쳐야 합니다. 먼저 우리 자신이 겸손되이 “무언가 잘못되었고 제가 그것을 원하지 않습니다”라고 기도한다. 성령은 뉘우치는 마음을 주실 것이다. 무언가 깨어졌다는 것을 깨닫는 은총을 줄 것이다. 나는 이런 잘못된 것을 원치 않지만 스스로 고치거나 보상할 수 없음을 압니다. 주님께 신뢰와 확신을 가지고 저에게 힘을 주십시오 라고 기도한다. 이렇게 하는 것 자체가 영적인 체험이 된다. 우리가 길을 잃었다고 느낄 때에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심을 느낀다. 성베드로는 물 속에 가라앉을 때에 외쳤고 예수님이 그 순간 구세주이심을 체험한다. 우리가 잘못할 때에 “주님 잘못했습니다 당신을 신뢰합니다 주님만이 저를 구할 수 있습니다”라고 기도하자. 이것이 첫 단계이다.
2. 두 번째 단계는 빛을 찾고 빛에 매혹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작은 빗줄기를 보자 마자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작은 빛이라도 큰 빛인 양 받아 들어야 한다. 그 빛에 이끌려야 한다. 이것은 성령의 선물이다. 성령은 우리가 점점 빛에 이끌리도록 은총을 주신다. 하느님의 빛이 우리를 비추고 자유롭게 한다. 세상으로부터는 올 수 없는 빛이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이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셨다. 왜냐하면 악마는 항상 빛을 가장하고 거짓말을 한다. 거짓말이 없는 죄는 없다. 죄의 밑바탕에는 거짓이 있고 핑계가 있다. 악마는 항상 진실을 왜곡시킨다. 그래서 하느님의 빛과 성령의 빛에 이끌리도록 기도하자. 아이들이나 어떤 사람들은 진리에 대한 감각이 있다.
3. 세 번째 단계는 우리 자신이 복음의 빛의 인도를 받는 것이다. 복음을 읽으면 말씀이 하느님의 빛을 가져다줍니다. 성서를 가까지 할수록 예수님의 빛나는 정신을 그대로 받게 된다. 우리는 죄의 기회를 피하도록 아주 조심해야 한다. 죄가 멀리 있을 때에는 우리가 강하다고 생각되는데 죄가 가까이 있으면 약해진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깨어 있으라고 초대하신다. 기도하고 깨어 있으라고 하시는데 깨어 있으라는 것은 죄의 기회를 피하고 죄를 의식하라는 것이다. 묵시록에 보면 악마가 어떻게 하는 지 볼 수 잇다. 하느님의 어린양이 나온다. 죄를 피하려고 싸우려고 할 때에 자신의 약함을 느끼고 여러 번 죄에 빠지기도 하고 같은 죄를 반복하여 범하므로 실망하기도 한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16:33)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겠지만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하고 말씀하셨다.
죄를 이기는 겸손한 방법은 “예수님 당신을 신뢰하고 당신께 의지합니다”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신뢰를 가져야 합니다. 지식의 은총라는 것은 우리 자신의 힘에 대한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사랑의 힘”에 대한 지식을 말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에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충실할수록 우리에게 다시 새로운 힘을 주시는 하느님께로 이끌려 가는 것입니다. 오늘은 성모 성탄 축일입니다. 마리아는 원죄의 면제를 받았습니다. 마리아의 양심은 깨끗했지만 아들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서 오는 구원의 결과입니다. 성모 마리아께 이 은총을 주시라고 기도합시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서 모든 죄를 극복해 내실 것입니다. 성모송.
[성령칠은 제8강의] 굳셈(勇氣, force)의 은혜 (1)
루가18:31-33:
(루가18:31)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거기에서 사람의 아들에 대하여 예언자들이 기록한 모든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 (32) 사람의 아들이 이방인들의 손에 넘어가게 될 터인데 그들은 사람의 아들을 희롱하고 모욕하고 침뱉고 (33) 채찍질하고 마침내 죽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김신부님의 질문에 응답합니다. 김신부님의 질문은 “유혹이 어떻게 사탄의 유혹이 아니고 하느님의 방문으로 이해되는가?”이다. 루가 사가는 예수님이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서 유혹을 받은 것은 성령의 은총이었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방문에 대해서 준주성범에서 언급한다. 하느님은 위로와 잡념으로 인간의 마음을 찾아오신다. 물론 유혹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은 아니다. 악마로부터 오는 것이다. 광야에는 고통이 있다. 예수님이 유혹을 받을 때에 그분의 반응은 즉시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약함을 아신다. 하느님의 사랑만이 그분을 힘있게 할 수 있다. 우리는 예수님의 약함에 대하여 말할 수 있다. 예수님의 인성은 완전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의 인성은 악마보다는 약하다. “하느님과 함께하지 않으면 악마의 세력을 대결할 수 없다”는 것이 신비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유혹에 빠지기를 바라지 않으신다. 그래서 당신의 힘을 우리에게 주신다. 하느님의 힘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이 유혹은 당신 사랑의 힘을 가지고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의 길이나 기회가 될 수 있다. 성령으로 가득 차서 유혹을 받으신 것은 필요한 것이었다. 비록 유혹을 받더라도 기도하는데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위대한 훈련이다. 유혹을 받는 것이 불편하지만 마음을 열고 하느님의 사랑의 힘을 간구하면서 그것을 견디어 내면 마침내는 그 유혹이 하느님 방문의 기회가 된다. 그것은 진정한 하느님의 방문이다. 기도를 통해서 위안을 받는 것보다 유혹을 받는 것이 환상이 적을 것이다.
저녁 화해성사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해서 묵상하길 권합니다.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시면서 그분의 수난 안에 굳셈의 은총이 나타나는 것을 보시길 바란다. 이냐시오의 기도를 알지요. 그리스도의 수난이여 저를 굳세게 하여 주소서. 수난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면 그것이 우리에게 힘을 주고 평화롭게 한다. 루가복음 18장의 말씀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고 있다고 한다. 루가 사가는 예수님의 전 생애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예수님의 삶은 의도적으로 예루살렘으로 향해 가시는 걸음이다. 예수님은 단호하게 예루살렘을 향하셨다고 하신다. 예수님이 여러 마을을 방문하시는데 예루살렘에 가는 길이었다.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백성을 위해서 화해의 재물을 드리는 장소이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의 삶으로 이 화해의 제사를 드린다는 것을 의식하신다. 당신 형제 자매를 성부와 화해시키신다.
루가 9:22와 44 : (루가9:22) 예수께서는 이어서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루가9:44) “너희는 지금 내가 하는 말을 명심해 두어라. 사람의 아들은 머지 않아 사람들의 손에 넘어 가게 될 것이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은 예수님 생애의 지속적인 목표입니다. 예루살렘은 모든 민족이 한데 모으리라는 예언의 말씀이 선포된 만남의 장소이다. 마침내 예수님이 돌아가신 다음에 라야 당신의 영을 아버지 손에 맡기신 다음에라야, 성령 강림절의 성령이 내리시고 그 영이 모든 사람을 한데 모아서 하느님의 큰 백성으로 만드실 것입니다. 그것은 우주적인 화해와 친교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간절한 바램이었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를 바라신다.
루가12:49-50 : (루가12:49)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이 불이 이미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루가12:50)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이 일을 다 겪어 낼 때까지는 내 마음이 얼마나 괴로울지 모른다.
예수님이 고통받기를 바라시는 것이 아니다. 오직 화해를 이루어서 우주가 완전히 친교를 이루는 것이 예수님의 간절한 바램이다. 고난은 당신 사랑의 힘을 보여줄 뿐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희생이 하늘에서만 온전히 완성되리라는 것을 아셔서 여기에 대한 다른 환상이 없었다.
루가 22: 15-16 : (루가22:15) “내가 고난을 당하기 전에 너희와 이 과월절 음식을 함께 나누려고 얼마나 별러 왔는지 모른다. (16) 잘 들어 두어라. 나는 과월절 음식의 본뜻이 하느님 나라에서 성취되기까지는 이 과월절 음식을 다시는 먹지 않겠다“ 하고 말씀하셨다.
빠스카의 완성은 종말론적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의 힘을 잃어버리고 쇠약해질 수 있다. 루가는 예수님의 전 생애를 악마와의 대결로 본다. 오전에 광야에서 당신 사명을 시작하시면서 악마와의 싸움을 보았다. 악마는 예수님을 3가지로 유혹을 한 다음에 다음 기회를 노리고 떠나갔다고 한다. 예수님이 싸우셨다면 우리도 싸우는 것에 놀라지 말아야 하겠다. 그러나 어떤 것도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시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굴욕도 비방도 모욕도 함정도 박해도 끓임 없이 예수님 안에서 트집을 잡는 것도 예수님을 막지 못했다. 체포하려는 것도 사형 선고도 돌로 치는 것도 죽이려고 하는 것도 막지 못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사랑을 계시하시려고 오셨다. 당신 백성을 위해서 오셨다. 매일 역경을 체험하셨다.
모욕을 당하시는 장면을 보자.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는 이 사람이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구나! 라고 말한다. 안식일에 금하는 짓을 왜 하느냐고 시비합니다. 예수님께 “보라 먹보요 술꾼이구나!”라고 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시면서 마귀의 괴수라는 말을 듣는다. 악마의 괴수 베엘제불의 힘을 빌어서 악을 몰아낸다고 비난한다. 순수하고 결백하신 하느님의 아들이신 데 하느님의 아버지의 사랑의 능력을 가졌을 뿐인데, 마술사나 악마라는 비난을 받는다. 죄인들을 환영하시기 때문에 멸시를 받으셨다. 그것은 모욕이면서 박해이다. 예수님 회당에 가서 예언자 이사야의 두루말이를 받으신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루가4장) 그 말을 다 들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회당 밖으로 끌고 나가서 절벽에서 밀어 떨어뜨리려고 한다. 예수님을 트집잡으려고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다. 예수님이 행하는 것을 보고 어떻게 예수님을 잡을까 그것만 모의합니다.
(루가11:53) 예수께서 그 집을 나오셨을 때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몹시 앙심을 품고 여러 가지 질문을 던져(루가11:54) 예수의 대답에서 트집을 잡으려고 노리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릴 수 있을까 하고 감시를 한다.
(루가13:31) 바로 그 때에 몇몇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께 가까이 와서 ”어서 이 곳을 떠나시오. 헤로데가 당신을 죽이려고 합니다“ 하고 말하자 사람들의 증오 때문에 예수님은 계속 피해 다니신다.
(루가19:47) 예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는데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를 잡아죽일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 가난한 사람들이나 단순한 사람들만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잡아죽일 생각만 하고 있다.
(루가19:14) 그런데 그의 백성들은 그를 미워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대표를 뒤따라 보내어 ‘우리는 그자가 우리 왕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고 진정하게 하였다.
(루가22:1) 무교절 곧 과월절이라는 명절이 다가 왔다. (루가22:2)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백성들이 무서워서 예수를 어떻게 죽여야 탈이 없을까 하고 궁리하고 있었다.
루가복음에는 예수께 대한 살의가 가득하다. 수난 복음을 보자. 화해성사를 준비하기 위해서 수난을 묵상하는 것은 도움이 된다. 죄에 대항하여 싸우는데 도움이 된다. 예수님의 사랑의 힘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의 사랑의 힘에 끌려서 죄에 대하여 잘 대항할 수 있다. 우리의 힘만으로는 절대로 죄를 극복할 수 없다. 예수님처럼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 우리의 화해성사가 되어야 한다. 이런 성서를 늘 묵상하므로서, 우리 마음을 열어서 특별한 은총인 하느님의 사랑의 힘을 받아들이자. 겟세마니의 예수님의 모습을 보자. 내일 더 보충하겠습니다만 오늘은 “예수님이 아버지 뜻대로 하십시오”라고 하는 말씀의 의미를 보자. 예수님은 인간으로 갖은 계획은 하느님의 뜻에 일치하는 것이었다. 이 뜻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서 당신 생애를 걸어야 했습니다. 이제 이것이 다 끝났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은 인간적으로 볼 때에 패배로 끝났습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관점으로 볼 때에 실패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에 투신한다는 것과 우리 마음은 다른 문제이다. 예수님은 당신이 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 하느님의 뜻에 당신의 마음을 여신다. 예수님은 인간의 계획의 실패와 한계를 받아들이신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신뢰하신다. 깨뜨리지 않는 사랑의 충실성을 아버지 안에서 보시고 아버지를 신뢰하신다. 우리는 사도직을 하다가 인사이동된다. 그러면 우리 자신을 다 바쳐서 한 일을 내버려두기도 해야 한다. 우리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사랑의 충실성이 우리가 하는 어떤 일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행한 것을 버려두어야할 때에는 그것이 쉽지 않음을 체험한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에 온 마음을 바치기도 해야 하지만 그보다는 우리 마음이 그리스도의 보편성에 이르러야 합니다.
우리는 유다의 입맞춤을 봅니다. 사랑의 표지인 입맞춤으로 배반한다. 악마의 죄악이다. 이보다 더 큰 거짓이 있을 수 없다. 그 다음에 베드로의 부인이 나온다. 베드로는 그 말을 부인하면서 “여보시오, 나는 그런 사람을 모르오” 하였다(루가22:57). 예수님이 이곳 저곳을 끌려 다닌다. 빌라도에 갔다가 헤롯에게로 간다. 아무도 예수님을 존중하지 않는다. 그 다음에 갈바리아로 가신다. 예수님은 학대를 받으신다. 군인이 조롱한다. 십자가의 예수께서는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하고 기원하셨다(루가23:34).
예수님의 용서는 당신 사랑의 능력입니다. 그 후에 아버지 손에 당신의 영혼을 맡기신다. 예수님의 사랑의 힘이 아버지의 손에 맡겨집니다.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이끌려집니다. 그 사랑의 힘이 나를 끌어당깁니다. 저는 십자가의 길의 기도를 하곤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힘을 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주님 당신의 사랑의 능력을 저에게 주십시오. 성령의 아름다운 선물을 주십시오.
수난 사화를 묵상하든지 십자가의 길을 하시든지 자유롭게 하시되 조용한 가운데 평화롭게 하십시오. 저는 때때로 다음과 같은 짧은 기도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서 돌아가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해서 돌아가셨다.” 이것은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필요로 합니다. 그 원천은 하느님이십니다. 십자가 밑의 마리아는 당신 아들의 사랑의 능력을 바라보시고 관상하신다. 마리아는 아들의 사랑의 힘으로 기도하신다.
[성령칠은 제9강의] 굳셈(勇氣, force)의 은혜 (2)
히브 12:1-4 :
(히브12:1) 이렇게 많은 증인들이 구름처럼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우리도 온갖 무거운 짐과 우리를 얽어매는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2) 그리고 우리의 믿음의 근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만을 바라봅시다. 그분은 장차 누릴 기쁨을 생각하며 부끄러움도 상관하지 않고 십자가의 고통을 견디어 내시고 지금은 하느님의 옥좌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3) 죄인들에게서 이렇듯 심한 미움을 받으시고도 참아 내신 그분을 생각해 보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지치거나 낙심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4) 여러분은 죄와 맞서 싸우면서 아직까지 피를 흘린 일은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바친 순교자들을 생각하면서 강의를 시작합시다. 여러분은 103위 성인 순교자들을 모시고 있다. 성령이 역사 하신 증거이다. 굳셈의 선물이다. 순교자들에게 똑 같은 성령이 힘을 주셨다. 우리는 어제 예수님의 사랑의 힘이 예수님의 수난에 드러나는 것을 보았다. 예수님의 사랑의 힘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힘이 교회에 생명을 준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의 것입니다. 우리는 화해성사를 통해서 예수님의 치유의 능력과 접했습니다. 이 힘은 개인적으로는 나를 위한 것이다. 이 화해성사는 항상 우리에게 가능하다. 우리는 때로는 나약하고 깨지기 쉽다. 그리스도의 충만한 사랑에 응답할 수 없기에 우리는 의심의 유혹에 빠진다. 성사를 보아도 똑 같은 잘못을 범하곤 한데 왜 고백성사를 보나? 라는 의혹을 갖는다. 우리는 화해성사에 대한 믿음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사랑의 힘에 응답하는 것을 보았다. 여러분이 화해성사의 풍성한 결실을 맺고 그것을 사용하려면, 유혹 가운데 기도하신 예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사랑의 힘으로 유혹 중에 있는 우리 믿음을 굳게 하신다. 내가 성사를 볼 때에 내가 약했고 유혹에 빠졌다는 것을 고백하고 내가 하느님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고백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깨어 있으라고 가르치신다. 죄의 기회를 피하라고 가르치신다. 주님이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실 때에는 “아버지께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죄를 피할 힘을 청하라고 가르치신다. 죄로 이끌어 가는 것들을 피하라고 가르치신다. “여러분의 눈이 죄짓게 하면 눈을 빼어 버리시오”라는 가르침을 알고 있다. 발이나 손이 죄의 기회가 되면 잘라 버려라.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하신다. (마태16:23)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돌아다보시고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장애물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구나!” 하고 꾸짖으셨다. 네가 생각하는 것은 하느님의 생각이 아니라 인간적인 생각이라고 하신다.
우리는 죄에 빠지는 것을 피하도록 하는 많은 기회들이 주어진다. 고백성사를 보러 갈 때에 우리는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죄에 너무 집착하려는 경향이 있다. 죄책감에 빠지고 그것을 지나치게 생각하곤 한다. 고백성사를 보러 갈 때에 죄책감이 가득하므로 그 죄책감을 없애려고 간다. 두려움과 죄책감을 계속 간직하고 싶지 않고 실패하는 것도 원치 않고 이제는 성공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갖는다. 이런 태도는 너무 지나치게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화해성사는 하느님의 사랑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을 관상할 기회입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팔에 안겼을 때에 아버지의 사랑을 느꼈습니다. 그 다음에 그는 아들의 마음을 회복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에 예수님의 사랑을 본 후에야 참된 제자의 마음을 찾는다. 고백성사를 볼 때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바라보고 명상하고 귀를 기울이자. 그분은 나를 사랑하셨고 나를 위해서 생명을 주셨다. 그분은 교회를 사랑하셔서 교회를 위해서 생명을 바치신다. 그분은 당신 사랑으로 교회를 섬긴다.
이냐시오 성인의 기도를 보자. “그리스도의 영혼이여 나를 거룩하게 하소서. 그리스도의 몸이여 나를 구하소서. 그리스도의 피여 나를 취하게 하소서. 당신 상처 안에 나를 숨겨 주소서.” 정말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우리는 항상 예수님의 상처를 발견할 수 있다.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를 당신께 이끈다. 예수님께 “주님 죄송합니다”라고 할 수 있는 은총을 주님께 청해야 한다. 내가 실패해서 죄송한 것이 아니라 내가 당신의 마음을 상해 드렸기 때문에 죄송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거스른 것을 죄송해 하는 마음을 깨우쳐 주시도록 성령께 은총을 구해야 한다. 마리 비안네 성인에게 어떤 사제가 와서 고백을 한 후에 “내가 신학교 때부터 계속 기도했지만 응답이 없습니다.”라고 하소연했다. 성인은 “기도하는 것 자체로 넉넉하다”라고 했고, “당신은 속죄를 하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했다. 어떤 고행이 우리에게 좋은 것일까요. 가장 좋은 고행은 “우리에게 매일 다가오는 사목의 어려움을 기쁘게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고행을 일부러 찾을 것이 아니라 삶의 고행이 올 때에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고행을 기쁘게 받아들일 때에 그 사랑이 우리에게 옵니다. 이런 종류의 고행을 할 때에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행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때때로 내가 관능의 노예가 되어 갈 때에 나를 자유롭게 해 줄 행동을 하면 좋다. 예수님은 우리 마음을 해방시켜 주시길 원하신다. 우리는 점점 위로를 찾고 또 찾는다. 새로운 것이 나오기만 하면 내가 가져야 한다. 우리는 곰곰이 생각해야 한다. 내가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있다면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나의 의견이나 생각이나 권위에 대하여 너무 큰 확신을 갖고 있음을 알고,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상해 주고 있음을 안다면, 반성하고 성령의 빛을 좀더 탐구할 때이다.
두 번째는 힘의 선물인데요. 예수님의 사랑의 힘에로 끌려가는 성향을 갖게 한다. 사랑은 한 번도 “이만하면 넉넉하다”라고 하지 않는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셨고 우리의 인성을 취하셨고 우리의 종이 되셨다. 끝까지 사랑하셨다. 죽는 순간까지 사랑하셨다. 우리는 어제 예수님이 우리를 끌어당기는 힘을 보았다.
필립 3:12 :
(필립3:12) 나는 이 희망을 이미 이루었다는 것도 아니고 또 이미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달음질칠 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붙드신 목적이 바로 이것입니다. (빌3:13) 형제 여러분, 나는 그것을 이미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고 앞에 있는 것만 바라보면서 (빌3:14) 목표를 향하여 달려갈 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를 부르셔서 높은 곳에 살게 하십니다. 그것이 나의 목표이며 내가 바라는 상입니다. (빌3:15) 그러므로 믿음이 성숙한 사람은 모두 이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어떤 문제에 관해서 다른 생각을 품었더라도 하느님께서는 그것까지도 분명히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빌3:16) 어쨌든 우리가 이미 이룬 것을 바탕으로 해서 다 같이 앞으로 나아갑시다.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은 한이 없다. 우리가 점점 더 많이 받을 수 있다. 받으면 받을수록 더 많이 줄 수 있다. 어쨌든 이미 우리가 이룬 것을 바탕으로 해서 다같이 앞으로 나아갑시다. 더 많은 것을 주고 더 많이 주기 위해서 더 앞으로 나아갑시다. 예수님의 사랑을 더 많이 알려고 합시다. 점점더 깊이 깨닫고 점점더 가까이 따르고 당신 교회를 위해서 잘 섬기기 위해서 그분께 작은 걸음이라도 한 발짝씩 나갑시다. 오늘 내가 그분께 가야 할 작은 발자국이라도 놓치지 않도록 하자. 위대한 일을 할 수는 없을 지라도 가장 낮은 자리를 취할 수 는 있습니다. 좀더 섬기는 자리를 택할 수 있습니다. 더 작은 사람이 될 수 있다. 사랑의 과정은 더 많은 것을 필요로 한다.
세 번째 단계는 사도직 안에서 예수님의 사랑에 신뢰를 갖는 것이다. 예수님이 12 사도를 불렀을 때에 그들에게 능력과 권한을 주셨습니다. 악령을 쫓아내고 치유하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더러 그러한 능력에 의지하기보다는 하느님의 사랑에 의지하라고 하셨다. (루가10:20) 그러나 악령들이 복종한다고 기뻐하기보다도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어떤 전달의 수단이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교리반을 위해서 책과 계획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 실재로 무엇에 의지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이런 방법에 의지하고 있습니까? 아버지의 사랑의 능력에 신뢰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가장 가난한 사람 중에 한 사람이라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어 있다”고 하신 것은 여러분이 하느님의 사랑 받는 자라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사도직을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 받는 사람들에게 파견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사도행전에 보면 성령께서 사도들에게 그런 확신을 어떻게 주셨는지 알 수 있다. 우리가 서로 돕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도들 안에 하느님의 사랑의 능력이 작용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 신부님의 강론 중에서 단순한 사람들 안에 성령께서 활동하신다는 것을 증거하셨다. 우리가 서로 만날 때에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증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을 굳세게 해준다. 때때로 대화할 때에 기운을 잃어버린 일도 말할 수 있지만 하느님의 활동을 말하면서 서로의 믿음을 북돋아 주는 대화가 필요하다. 이런 것을 전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 성령께서 능력을 주시는 장면을 보자.
사도4:13 (행4:13)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본래 배운 것이 없는 천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 그 두 사도가 예수를 따라 다니던 사람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 사람들이 어떤 박해도 감수하면서도 “우리는 보고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박해를 받고 나서 교회가 기도를 하고 있다.
(사도4:29) 주님, 지금 그들의 위협을 받고 있는 우리를 살피시고 주님의 이종들로 하여금 조금도 굴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할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기도를 하였을 때에 성령이 이 선물을 쏟아 주신다. (사도4:31) 그들이 기도를 다 마치자 모여 있던 곳이 흔들리고 사람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서 하느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게 되었다.
얼마나 아름다운 구절입니까? 성령이 주시는 은총을 받도록 기도합시다. 하느님의 사랑에 대하여 이렇게 기쁘고 담대하게 전할 수 있도록 은총을 구합시다. 하느님의 사랑의 기쁜소식으로 굳세어지고 또 그것을 전하게 됩니다. 성모님과 함께 기도합시다. 성모님은 예수님의 십자가에까지 따라가셔서 예수님을 깊이 깊이 따르셨습니다. 사도들과 함께 이런 성령의 힘을 받았습니다. 마리아는 사도들을 격려해 주셨습니다. 성모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