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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와 예물
출 25: 1-9
성경을 보노라면 하나님은 종종 그 백성이나 그 종들로 하여금 「무엇을 드려라」 하곤 하십니다.
예컨대,
그 백성에게 있어서 「초태생은 내 것이니 구별하여 드려라」하셨고,
그 종 아브라함에게는 독자 「이삭」을 바쳐라 하셨고, 사르밧 과부에게도 작은 양식이지만 엘리야를 공궤하도록 하셨으며,
오늘 이 백성들에게는 「예물」을 드려라 하신 겁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러셔야 했을까요?
성경을 보는 우리들의 믿음이 굳세지 못했다면, 하나님의 이런 모습에 필경은 당황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자칫 불신의 눈으로 이러한 하나님을 바라본다면 「벼룩의 간」을 빼먹는다고 하거나 주었다가 빼앗는 하나님으로 비쳐 질성 싶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이 필요한 분이 아닌 신데...
모든 것이 주인이 되시는데....
왜 이토록 바쳐라! 드려라! 하실 까요?
1) 우리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함입니다.
욥은 당대의 일등가는 부자였습니다.
하루아침에 재난으로 인하여 모든 것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대 욥의 부인은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윽박질렀습니다.
그러나 욥은 자신의 생일을 저주했을지언정 하나님을 저주하진 않았습니다.
오히려 경배하고 찬양했다고 했습니다.
욥 1:21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은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 으실지니이다"
하나님께서 욥의 물질을 치신 것은 그의 믿음을 시험해 보신 겁니다.
과연 욥은 이 시험에 합격 판정을 받아 모년에는 갑절의 복을 받게 된 겁니다.
아브라함 역시 하나님의 주문대로 독자 이삭을 드렸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합격 판정을 내리셨습니다.
창 22:1-2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사람들은 대체로 비슷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지만 대체로 하나님보다 보이는 물질을 더 사랑합니다.
주의 종이라고 자천하지만, 물질의 종 되어 주의 말씀을 거부하고 물질에 붙잡혀 굴욕적인 삶을 살아가기가 일수입니다.
결국, 모든 우상 숭배의 근원이 되고, 탐심을 거부하지 못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을 잃어버립니다.
하나님께서 「물질을 드려라」하신 것은 물질 자체에 가치를 두어서가 아니라 그가 과연 어디에 매여 있는가? 과연 누구에게 순종하는가? 를 확인하고자 하심입니다.
물질이나 기타 주문하신 바를 드리는 것,
그러므로 대단히 중요합니다.
물질에 매여 있지 않다는 고백이요, 오직 하나님께만 순종하겠나이다 하는 새로운 믿음의 신앙고백입니다.
마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2) 우리로 하여금 청지기임을 확신시키기 위함입니다.
사람의 행복이 어디서 오는 줄 아십니까?
소유와 풍성함에서 온다고 믿었다면 잘못 아신 겁니다.
실상은 거짓말 같지만 「관계」에서 옵니다.
즉 좋은 관계가 행복합니다.
잠 17:1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 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리라"
사람에게는 필연적 두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과의 관계요,
둘째는 이웃(인생)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불화된 관계는 자연적으로 이웃과도 불화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본래 무슨 관계였나요?
아니 하나님은 왜 인생을 창조하셨나요?
창 2: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두시고"
한마디로 동산지기요, 청지기로 창조하시고 세우신 겁니다.
그러므로 인간 불행은 창조된 본래의 모습에서 어긋나 스스로 하나님 되고자 할 때 일어났습니다.
곧 이것이 타락인 겁니다.
이 모습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관계가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철학적 사고가 아닌,
사회적 역할이 아닌,
창조적 목적에서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분명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일을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입니다.
시간의 청지기요, 건강의 청지기요, 물질의 청지기 등 어느 것 하나 내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없음입니다.
그럼에도 주인행세를 하겠다는 것은 착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인이 뭐 좀 쓰겠다고 하는데 「안돼요!」하는 것은 큰 패역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주인인 것처럼 행세합니까?
청지기로 살고 있습니까?
신약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입성하시고자 하셨을 때 나귀가 필요하셨습니다.
제자들을 동네에 보내셨습니다.
나귀를 풀어 오너라!
주인이 뭐라고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성경을 읽어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아닌게 아니라 나귀 주인은 「주가 쓰시겠다」하는 제자들의 말에 더 이상 이유를 대지 않았습니다.
왜요?
자신이 누군인지 너무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시간도 내어 주려무나,
네 물질 좀 써야겠다.
여러분은 어쩌시겠습니까?
아니 지금가지 어때셨습니까?
그러므로 「드려라」하시는 것은 「너는 청지기이다」하는 확인입니다.
청지기의 행복은 주인이 쓰고자 할 때 행복합니다.
3) 더욱 풍성케 하시기 위함입니다.
세상 원리와 천국 원리는 다릅니다.
세상 원리는 사람들의 법이라면,
천국 원리는 하나님의 통치이기 때문입니다.
풍성케 되기 위해서는 세상은 뭐라고 합니까?
움켜잡으라고 합니다.
어느 부자에게 한 청년이 부자가 되는 비결을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부자는 청년을 다짜고짜 절벽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나무를 두 손으로 꼭 잡으라고 했습니다.
청년은 그대로 했습니다.
이제 부자는, 청년에게 한 손을 놓으라고 했습니다.
청년은 시키는 대로 한 손을 놓았더니 떨어져 죽게되었습니다.
청년은 외칩니다. 떨어져 죽을 것 같아요!
그때 부자는 말했습니다.
부자가 되는 일은 한번 들어온 돈을 꼭 붙잡아라 놓으면 죽는다고 하는 심정으로....
이게 세상 원리입니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정주영씨는 세계적 재벌입니다.
그 역시 큰돈은 벌었지만, 그 자신은 구두쇠 였습니다.
구두 한컬레로 15년, 20년을 신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검소함, 본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곤란합니다.
하나님의 원리는 나누고 베풀 때 풍성해집니다.
잠 11:25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 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는 자는 윤택하여 지리라"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에서는 아껴야합니다.
그러나 교회와 하나님 앞에서는 쓸 줄 알아야 합니다.
밖에서는 펑펑 쓰고, 교회와 하나님 앞에서 작은 자는 풍성할 수가 없습니다.
짧은 목회를 배우면서,
또한 설교는 하지만,
이토록 드리고 나누는 삶은 여타 훌륭한 교우들에게 배웁니다.
참으로 궁색한 중에도 드리고 나눌 줄 아는 그들 삶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음을 봅니다.
그래서 제 자신도 그렇게 살려고 하고, 동생들에게, 우리 교우들에게도 이것만큼은 꼭 가리키고 싶은 겁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 인색하지 마십시오.
너무 타산적으로 드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주의 종들과 이웃들에게 나누는 것 핑계대지 마십시오.
사르밧 과부는 구차한 중에도 공궤하였기에 기름병에 기름이 마르지 않고 가루 통에 가루가 넘쳐 났습니다.
수넴 여인은 드림을 잘 하였다가 아들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드리고 나누는 일,
하나님이 아니 계시면 손해 보겠으나 하나님이 계시기에 이러한 일은 투기가 아니라 결국은 자기를 위한 투자가 됩니다.
마 6:20-21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여 도적이 구멍을 뚫지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최근에 미션 바라바라는 책을 보았습니다.
일본의 유명한 깡패들이 변화 받아 예수 믿게된 간증문 이었습니다.
그중 오사카의 다께시다라는 한 깡패는 부인의 손에 끌려 예배당에 갔었습니다.
간 날이 장날이라고 그날 설교가 예물을 드리면 10배의 복을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시험적으로 수중의 20만원을 드렸습니다.
그 다음날 후배가 용서를 빈다면 한 상자를 놓고 갔습니다.
케익이라고 생각하고 펼쳐보니 200만원이 들어 있었습니다.
신기했습니다.
한참 후 두 번째 예배당을 갔는데, 예배당이 헐리게 되었는데 건물을 사기 위해서 4억이 필요한 것을 들었는데, 이번에는 그것을 자신이 하겠노라고 약속을 했습니다.
이유인즉 신앙보다는 100배나 복을 받는다는 얘기에 구차한 그는 서약한 것입니다.
그 약속을 지키고자 대출을 신청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고민하고 있던 중,
약속 시간 5시 30분전에 오야봉의 호출을 받아 나가보니 은행 지점장이 함께 있었습니다.
대출을 거절한 은행지점장 이었습니다.
눈물로 전후 사정 얘기를 하니,
은행장이 감동되어 대출해 주어 교회당을 헌당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기적을 보고 예수를 믿어 지금은 신학교와 어학원을 하는 목사님이 되었습니다.
영육이 풍성해진 겁니다.
주님은 우리를 풍성케 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의 사람, 이 삶도 맛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풍성하면 교회도 풍성하니 곧 이것이 천국인줄 믿습니다.
오늘 드려진 예물로써 「성막을」 만들겠다고 하십니다.
곧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겠노라는 언약인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
또 다른 예배요, 또 다른 신앙의 덕목입니다.
많던 적던 그것은 믿음과 형편에 따라 하지만, 억지가 아닌 「자원」함으로 해야 합니다.
왜요?
구원의 대가가 아니라 은혜의 빚이기 때문입니다.
찬송가 185장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길을 주었다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제 목 : 오직 하나님의 지시만을
본 문 : 출 25:1-9
요 절 : (출25:9)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지니라
구름이 시내산에 머무르고 하나님의 영광이 불같이 맹렬히 나타나는 가운데,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구름 가운데 산으로 올라가서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받기 위하여 40주야를 산에 있었다.
그러나 25장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막과 그 안에 비치할 여러 기구를 만들라고 하시면서 그 양식도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오늘 본문인 25장 1-9절까지는 여러 예물을 하나님께 바쳐 성소를 짓게 하라고 하신 말씀이다.
예물과 봉헌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가장 영광스러운 의무였다. 이는 계약민들의 예배 활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가진 민족이라는 점에서 그 우수성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율법 준수의 일환으로 하나님과 만나는 예배행위의 중요성을 알아야 하겠다.
1. 요청하시는 하나님.
(출25:8)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
성소를 짓도록 요청받은 사람은 누구인가? 그들은 죄의 사슬에서 구속함을 받고 하나님을 위하여 구별된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속해 내기 전에는 에덴 동산에서의 아담과 족장들, 그리고 애굽에서 모세에게 나타나 교제하시기는 하셨지만 그들이 예배할 성소의 건립을 제의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와를 위하여 구별된 사람들하고만 거하신다. 그러나 처음 성소를 짓도록 사람에게 제안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 자신이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구원하신 백성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그들 가운데 거하기를 원하셨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열망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에서 타락 이전의 사람 인 아담과 함께 거하셨으며, 그 다음에는 성막과 함께 거하셨으며, 그 다음에는 성막과 성전, 그리고 성육신 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인성 안에서, 오늘날은 성도들 안에서 거하기 원하신다.
그러므로 성경은 “(고전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라고 기록하고 있다.
2.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라.
성소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중에 거할 곳이기 때문에, “내가 네게 보이는 대로 장막의 양식과 그 기구의 양식을 따라 지을지니라”고 말씀하셨다.
또 하나님은 그들을 시켜 성소를 지으라고 말씀하시면서 그것이 나를 위한 일이라고 하셨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여 자신의 일을 성취하시길 원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는 우리의 뜻과 생각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뜻과 명령에 따라서 행해야 한다는 교훈도 얻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설계를 위해 필요한 재료들만 책임지신다는 의미를 분명히 하고 있다.
만약 모세나 그의 백성이 하나님의 원해 계획보다 더 많은 것을 사용하려고 고집하였다면 그들은 그 재료의 수집을 위해 걱정해야만 했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흔히 범하는 실수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지도 않는 책임을 떠맡는다. 그리고는 우리 일상 생활에 수많은 것들을 스스로 끌어들임으로써 하나님의 계획에 만족하고 묵묵히 그의 계획을 따랐다면 필요 없었을 걱정과 근심으로 애를 태운다.
3. 매일 매일 위한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한 매시간의 계획을 가지고 계시고 성령의 지시하심이나 주위 환경의 흐름을 통해 그것을 보여주신다. 그분 안에 거하자. 그리고 그분이 가르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하지 말며 그분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행하자. 그럼으로써 우리의 삶은 성막이 되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빛나며 제물은 열납될 것이다.
적용.
1) 신앙 생활에서 하나님이 주([)가 되고 우리가 보(�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므로 하나님보다 앞서려는 생각은 금물이다.
2)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
그러나 종종 우리는 나의 뜻을 고집하며 하나님의 율례를 벗어난 모습은 없는가?
출처: 하늘농장(Heaven農場) 글쓴이: 하늘일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