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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애론
존재의 근원에 대한 성찰, 사회적 타자에 대한 연민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Ⅰ.
근대에 접어들면서 인간은 자유의 확대와 생산의 증가로 더 나은 인간적 삶을 살게 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모순과 개발에 의해 발생한 생태계 파괴는 갈수록 심화되었고, 정치력부재로 계층간 불평등이 갈수록 개선되기는커녕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에 따라 경제적 궁핍은 말할 것도 없이 상대적 박탈감으로 인한 삶의 행복지수를 급속도로 떨어뜨렸다. 근대성에서 발생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여러 부문에 나타난 제국주의적 논리는 인간 삶의 자유와 생태적 가치를 매우 암울하게 만들어 인간 역사의 질적 진보에 역행의 그림자를 드리우게 하였다. 현대사회에 들어와 이 문제는 개선되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방식에 따라 더욱 음험해지고 교활해진 상태로 진행되고 있어 우리들 삶의 가치를 왜곡시키고, 문제의 실상을 외면하게 함으로써 환멸과 염증의 세태를 만연하게 하고 있다.
양극화의 심화 등 여러 문제의 본질을 알면서도 정부가 내어놓는 그 원인과 해결은 현실과 너무나 거리가 멀고, 시대에 뒤떨어진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됨으로써 진보적 지식인은 무기력과 좌절의 심리상태에 놓여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태에서 시인은 보다 나은 삶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묻는 것은 당대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절실한 사유라고 하겠다. 현실비판은 우리의 미래인 후손들을 위해 반드시 이 시점에서 물어야 할 지식인의 올바른 자세이기도 하다. 근대 이후 우리 인간사회를 분열시키고 혐오와 부정의 감정에 빠뜨리게 하는 제도, 혹은 그러한 이념에 대한 원인 분석과 근원적 문제해결을 위한 대책을 마련해두지 않으면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회적 갈등은 물론 지구 생태계의 위기를 통해 지구라는 행성 자체가 사라지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근대 이후 이러한 이념과 제도가 현재 지연 생태계까지 초유의 대위기를 맞게 함을 두게 볼 때 인간 사회의 문제가 단순히 인간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연 생태계와 우주의 문제와도 연동됨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부정적 근대성에 대한 반성은 물론 이 시점에서 생태주의 사상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하겠다.
Ⅱ.
생태주의 사상은 근대 이후 과학기술문명의 발달과 폐해에 따라 자연스럽게 발생한 사상으로서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산업 개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60년대 이후 시기부터 나왔다고 볼 수 있다. 아래 장정애 시는 이미 우리 사회가 도시광역화를 위한 도로확충사업이 한층 본격화된 이후 현재의 부산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작품인데, 시인은 공사가 인간중심주의에 의해 진행되면서 우리의 자연이 파괴되고 있음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이러한 생태계 파괴 현상을 시로 고발하고 있다. 두 시의 핵심은 인간의 욕망을 위해 위정자들이 생각없이 자연적 대상들을 인간 편의에 따라 재편하고 수단화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즉 생태계 파괴의 한 단면을 인류세의 부정적 징후로 보여주면서 그것이 자연의 생존권 박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생명적 가치마저 상실해 가는 일이 될 수 있음을 성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이 시는 일찍이 도시화와 산업화가 진전되는 시기에 인간과 자연의 뒤틀림과 그로 인한 노동자들의 빈곤 문제를 예언자적 시각으로 포착해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중앙대로 1453번가는
도로 확장으로 늙은 가옥들이 한숨에
허물어져 가고
빈 하늘에는 귀 몇 개가 매달려 있다
온천동의 역사가 오가는 바쁜 골목길,
나뭇가지에 걸려있는 구멍 난 제비집이
칼바람 휭휭한 채
하루하루 멍들어가고 있다
베어져 버린 일상이 밑동이만 남았고
겨우내 물오른 몸뚱아리들은 퇴물처럼 누워
최면에 걸린 듯 초록으로 웃고 있다
오늘도 공사 중인 도로에는
미처 하지 못한 말들이 벙어리 되어 울고
먼 시간 날아온 노래는 이별 전의
일상을 그리워한다
그늘 한 줌 갖지 못하는 자연이
삶의 무대 뒷편으로 퇴거당하고 있다
장정애 <진통하는 도로> 전문
장정애의 시 <진통하는 도로>는 인간중심주의 관점에서 저질러진 개발의 논리에 의해 자신의 터전에서 뽑혀지고 있는 나무들과 뭉개지고 있는 오래된 가옥들 그리고 파괴되고 있는 자연에 대한 연민이 녹아 있는 시다. 인간의 생활환경을 위한다는 명목, 즉 도로정비사업이라는 이름 하에 오래된 기와집과 나무들은 손발이 잘리고 자신의 태반을 등진 채로 버려져 원하지 않는 장소에 옮겨 심어지기는커녕 그 자리에서 내동댕이쳐진다. 시인은 이를 ‘삶의 무데 뒤편으로 퇴거당하고 있다’고 형상화하였다. 여기에 깃들어 있는 것은 전통가옥과 나무들의 입장에서 갖는 슬픔과 고통에 관한 공감과 연민이다. 시인 장정애는 인간의 관점이 아니라 오래된 전통가옥과 나무 자체의 자연적 관점에서 고통받고 있는 객체의 상실에 대해 말함으로써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연민은 존재의 근원에 대한 성찰을 전제로 한다
근대성에서 강조되는 것은 주체다. 주체성의 확립은 근대성의 달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근대성이 추구하는 자유와 평등정신은 주체의 개별적 위상 확립이 전제되지 않고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대다수 학자들은 근대성이 합리화와 동시에 주체화를 의미한다고 본다. 이때 주체화는 근대성의 근본적인 목적이고 합리화는 주체화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 주체 즉 자아의 강조가 가져온 긍정적 측면에 대해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 긍정적 근대성이라 할 수 있는 해방의 인식과 개성이라 부를 수 있는 내면성의 확장이 그것이다. 도로확장에 따른 도시정비의 불가피성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공사가 자연 보호와 자연에 대한 연민 속에서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진행되지 안고 있음을 시인은 ‘한숨’ ‘허물어져가고’ ‘빈 하늘’ ‘구명 난’ ‘칼바람’ ‘멍’ ‘베어져버린’ ‘밑둥이’ ‘퇴물’ ‘벙어리’ ‘이별’ ‘무대 뒤편’ ‘퇴거당하다’ 등의 부정적인 어휘로 생생히 감각화하고 있다. 이런 구체어의 정서적 환기력은 생태 파괴의 심각성을 노정한다.
그러나 오늘날 근대성의 결과가 파탄의 징후를 드러내고 있는 이 시점에서 이러한 점을 추겨세우는 것으로 그치는 발상은 너무 낭만적이라는 지적을 떠나 맹목적이라 할 수 있다. 그 까닭은 부정적 근대성으로 남겨주는 주체중심주의, 이성중심주의, 인간중심주의가 바로 다른 대상들을 타자로 만들어 소외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장정애의 이 시는 오늘의 우리 현실에서 극복되어야 할 대상들이 되고 있다. 즉 근대적 주체는 자신을 절대화하면서 타자를 복속하고 왜곡하고 은폐시키는 경향으로 나아간다. 제국주의적 시선과 행동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이분법으로 주체 아닌 타자들, 동물이나 식물 또는 비생명체인 사물들을 무시한다. 인간중심주의적 사고로 인한 폭력과 파괴는 전국 곳곳에서 행해지고 있다. 시적 화자는 바로 이런 점을 놓치지 않고 라캉의 ‘응시’ 개념으로 대상을 객체화해 바라보도록 하고 있어 주목을 끈다.
이런 자연에 대한 연민없이 진행되는 무자비한 공사가 일상의 모습으로 내재화되었을 때에는 계층적 차원에서 동일자기 타자들, 즉 가진 자가 가지지 못한 자를 자신의 욕망대로 좌우하려는 매우 비인간적인 현상으로 발현된다. 곧 경제적 측면에서 고용주가 노동자의 권리를 대등한 주체의 권리로 보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하나의 도구적 존재로 보게 되거나, 인간이 비인간적 생명체를 경시하고 무시하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 결과 공존의 모습보다 분열과 갈등의 현상이 심화된 형태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 필연이다. 도로공사현장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생태파괴문제는 이러한 공존의 가치가 깨진 역사적 현실과 이념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위의 시는 이를 대변한다. 결국 이 시는 사회적 약자로 전락한 타자에 대해 오늘날의 관점에서 어떤 공존이 와야 할지를 제기하였다고 할 수 있고, 더 나아가 그러한 시대적 공존의 가치가 어디에 기반을 두고 있어야 할지를 묻고 있는 작품이라 하겠다.
생태계 파괴의 현상이 점점 심해지는 오늘의 현실에서 문득 장정애 시인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한다. 인문학의 위기가 깊어지고 있다는 작금의 현실에서 시의 존재이유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단순한 문제가 아닐 것이다. 소비자본주의로 치닫는 당대의 현실에서 정말 시는 필요하기는 할까. 요즘 ‘아닌 시’들 같이 자신의 심중에 어린 말들만 내뱉는 시들은 이제 효용가치가 덜할 것이다. 그런 시가 전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현실을 돌파하는 데에 한계가 있으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시가 지금 여기의 현실에 필요할까. 이 물음은 시의 본질과 기능 등 시대의 변천에 따른 시학의 근원적인 문제를 탐구하는 것에 해당한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장정애 시를 발견한 것은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장정애 시인의 <밥상>이란 시에 담긴 타자의식과 대상에 대한 연민을 살펴보자.
편의점 앞 탁자에
달랑 컵라면뿐인
김치도 없는 가난한 식사
빠른 걸음으로 오는 허기진 오후에
쫓기듯 서서 허겁 질겁 삼키는
시곗바늘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플랫폼 노동자들
휴식의 발목을 잡고
먹는 즐거움마저 빼앗긴 이마엔 땀만
송골송골
비둘기에게 무료를 던지는 한가한 시간
아롱이다롱이 닮은 아이스크림을
건드리기도 미안한 햇빛화살이 눈을 찌르는 오후
삶의 무게가 컵라면의 무게보다
더 가볍다는 현실
구겨진 햇살을 들쳐 업고 온
하루가 나비날개보다 무겁다
장정애 <밥상> 전문
‘밥상’이란 시는 사회적 경제적 약자인 비정규직 노동자의 비참한 삶을 정조준하는 시다. 익명을 요구한 배달원 A씨는 여름철 배달업 종사자들 고충이 무엇이냐고 묻자 “사무실이 아니면 편의점이나 픽업 가게에서 쉬는 게 전부”라며 “사무실 외에 별도로 라이더들에게 주어진 휴식 공간은 없다. 무더위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토로했다. ILO총회 본회의 연설에서 한국노총 위원장은 "웅보 ILO 사무총장이 추구하는 새로운 사회계약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가 확립되어야 한다"라며 "민주주의는 사회 구성원에 대한 존중을 밑바탕으로 하여야 하나, 현재 정부는 친기업 반노동 정책으로 일관하고 있다"라고 윤 정부 질타 쏟아내자, ILO 사무총장은 "한국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 전지혜 인천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노동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인간답게 노동할 수 있는 환경이 전제돼야 한다”며 “폭염 시 노동자들에게 휴게시간, 공간을 마련하도록 정부와 지자체의 주기적 현장 모니터링과 관심이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시인이 활 수 있는 일이란 소극적 참여다. 현실을 고발하고 시정을 요구하는 것이다. 시적 화자는 플랫폼 노동자들의 열악한 근무환경을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먹는 한 노동자의 모습으로 형상화하였다.
정치적 신분제 시회는 극복되었다고 흔히 말하지만 경제적 신분체제가 잔존하고 있는 한 진정한 자유의 확보는 불가능함을 이 장정애의 <밥상>이란 시는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부정적 현상이 산업현장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제도가 심화된 사회의 여러 부분에 걸쳐 나타나고 있으며. 노동자의 인간적 가치를 훼손하고 노동자를 하나의 물적 도구로 간주하는 우리 사회 주체들의 갑질이 ‘삶의 무게가 컵라면의 무게보다/ 더 가볍다는 현실/ 구겨진 햇살을 들쳐 업고 온/ 하루가 나비날개보다 무겁다’는 문학적 언어로 표현되고 있다. 이스라엘의 철학자 아비사이 마길릿은 <품위 있는 사회>에서 품위 있는 사회란 인간의 존엄성에 가치를 두고 제도가 사람들을 모욕하지 않는 사회라고 이야기했다. 여기서 말하는 모욕이란 인간을 인간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것, 사람들을 인간이 아니라 단순한 물건이나 도구 동물 인간 이하의 그 어떤 것에 불과한 것처럼 대우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품위있는 사회란 제도가 사람들을 모욕하지 않고 제도를 통해 그 권한 아래 있는 사람들을 존중하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는 우리 사회의 품위없음을 정조준하고 있다고 하겠다.
Ⅲ.
위 두 작품의 시적 진술에 따르면 공존적 가치가 사라진 자본주의적 사회는 바로 인간으로서 자켜야 할 품위 자체가 사라진 사회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공존의 문제는 이제 인간만의 시선으로 그치지 않는다. 인간도 이 지구상의 한 동물로 살면서 상태계의 한 축으로 존재한다. 그런데 인간이 추구하였던 근대 이후 과학기슬 문명은 자연을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재료로 대상화하였다. 그것은 자연적 대상물을 인간의 생명권과 대등하게 볼 수 없는 도구적 존재로 여기는 것에 해당한다. 그리하여 자연물에 대해 인간중심주의적 사고를 발휘하여 마음대로 재단하고 분할하는 이기적 행위를 수행한다. 이것은 자연과의 공존을 깨뜨리는 행위로서 인간 자신만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동일자 중심적 사유의 발현이다. 그 결과 급속하게 자연생태계가 붕괴되는 위기 상황을 초래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인간문명을 반성하고 인간중심주의의 폐해를 지적할 수밖에 없게 되었는데, 이 일을 수행하는 사상이 모두가 알고 있는 생태주의 사상인 것이다.
시가, 시인이 모든 존재들의 아픔과 슬픔을 대신 울어 그들의 존재성을 드러내고 그것에 참된 의미를 부여하고 붙잡는다면 이야말로 존재의 구원으로서 연민이자 시의 존재 이유가 아니겠는가. 때문에 평자는 위 시들에서 공감과 함께 그것에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는 연민의 정서에 주목해 보고자 한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고통과 불행을 어루만지고 치유하는 마음이 연민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존재의 의미를 살려 구원의 길로 나아가고자 하는 염원일 것이다. 이 연민은 모든 시대 현실에서도 필요했겠지만 오늘의 현실에서 더욱 필요한 정서인 것만은 분명하다. 오늘의 시대는 근대 산업자본주의의 심화로 모든 존재가 소외화, 사물화, 상업화 등의 비생명화의 길로 떨어지고 있는 것은 물론 과학기술문명의 발달이 인간중심주의의 공룡적 욕망과 결합하여 자연생태계를 극도로 파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장정애의 생태사상과 연민의 정서는 푸코의 ‘생명의 정치’ 차커트의 ‘인간 너머의 연대’의 측면에서 그리고 시정신의 차원애서 높이 평가된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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