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41] 김기영 (金基榮) - 나의 삶을 돌아보며 7. 야목 수련과 40일 하계 및 동계 전도 - 1 1 1959년 7월 여름방학이었다. 경기도 야목에서 진행된 2차 전국 인도자 협회수련회(당시에는 교회장 등 책임자를 인도자라고 하였음)에 참가하였다. 40명 수련생 중 남자는 7명뿐이었고 나머지는 다 여자였다.
2 ‘아버님이 어린양 잔치를 위해서 복귀된 해와를 찾으셔야 하는 섭리적인 시대인지라 여자들이 이렇게 많은가 보다.’라고 말하는 영통하는 할머니 아주머니 식구들이 있었다.
3 스케줄대로 수련을 진행하고 있는 동안 아버님은 2, 3일이 멀다고 747 자가용 지프를 타고 서울에서 야목까지 방문해 주셨다. 4 참아버님이 오시는 날은 참아버님의 지시가 스케줄이 되는 것인데 특별훈련이라고 하시며 자주 갯벌에 나가 고기잡이를 하도록 하셨다.
5 갯벌 중간중간에 긴 장대를 꽂고 장대에 그물을 매서 물밑까지 늘어뜨려 놓는 준비를 하루 전에 해 놓도록 하시고, 새벽에 갯벌로 나아가 아버님이 중앙에 수련생들이 횡으로 줄을 서서 몽둥이를 하나씩 들고 수면을 두들기며 그물이 있는 데까지 물고기(가물치)를 몰아가는 것이었다. 6 반바지가 없는 시절이어서 모두 긴 바지를 무릎 위로 걷어 올리고 맨발로 허리쯤 차는 물속으로 들어갔다. 물고기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사람 벽을 만들어 전진하며 한 손으로는 몽둥이로 수면을 두드리고 한 손으로는 물속에서 물을 그물 쪽으로 휘저으며 물고기들을 몰고 가는 것이다.
7 그 물속에는 가시덩굴 줄기들이 엉켜 있어서 발바닥과 종아리를 수도 없이 찔렸지만 아버님의 구령에 맞추어 전진하느라 아픈데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8 지친 일행들은 저녁 식사 후에 모두 호롱 불을 켜놓고 발바닥에 박힌 가시를 빼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아파도 다음날 아버님이 또 가자고 하시면 절룩거리며 모두 나섰다.
9 747 자동차에 서울의 식구들을 동승시켜 오시면서 수련생들을 위해 맛있는 것을 많이 가지고 오셨는데, 지금도 여수 가실 때 헬기에 식구들을 동승시켜 가시는 것은 그때와 똑같다.
10 아버님이 하시는 일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수련생들이 힘들었지만 사실은 수련생들보다도 아버님께서 영육 간에 많은 정성을 들이시는 특별한 기간인 것을 알게 되었다.
11 그 해 가을에는 매일 새벽 5시에 교회 안방에서 아버님이 영어 공부를 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