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석지칭(釋智稱)
지칭의 성은 배(裵)씨이고, 본래 하동(河東)의 문희(聞憙) 사람이다. 위(魏)의 기주(冀州)자사 배휘(裵徽)의 후예이다. 할아버지 대에 난을 피해서 경구(京口)에 임시 머물렀다.
지칭은 어릴 때부터 강개(慷慨)하여, 자못 활쏘기와 말타기를 좋아하였다. 나이 열일곱 살 때 왕현모(王玄謨)와 신탄(申坦)을 따라 북쪽으로 가서 험윤(獫狁)을 토벌하였다. 매양 전투가 벌어져 칼에 피가 묻을 때마다, 마음에 측은한 생각을 품지 않은 일이 없었다. 그 아픔을 자기 몸의 아픔보다 더 깊이 느꼈다. 이에 문득 탄식하였다.
“남을 해쳐서 자신을 구제함은 어진 사람의 뜻이 아니다.”
일이 안정되자 갑옷을 벗었다. 우연히 『서응경(瑞應經)』을 읽고는 곧 깊이 느끼고 깨달았다.
‘사람의 백 년은 기약할 수 없는 것이며, 나라와 성(城)이 중한 것이 아니로구나.’
곧 남간사(南澗寺) 선방에 있는 승종(僧宗)에게 투신하여, 5계 받기를 청하였다.
전송의 효무제(孝武帝)가 한때 익주(益州)의 앙(仰)선사가 서울로 내려온 것을 맞이하여 공양한 적이 있다. 지칭은 곧 뜻을 모아 그에게 귀의하였다. 앙선사도 도탑게 그를 상대하고 대접하였다. 앙선사가 문강(汶江)으로 돌아가자, 그를 따라 노닐며 거슬러 올라갔다. 촉(蜀)의 배사(裵寺)에서 출가하고, 앙선사를 스승으로 삼았다. 이때 나이는 36세이다.
오로지 율부에 정진하여 『십송률』을 크게 밝혔다. 또한 『소품경』 1부를 외웠다. 그 후 동쪽 강릉으로 내려가, 은(隱)ㆍ구(具) 두 스승으로부터 다시 선과 율을 전수받았다.
의가(義嘉)가 난리를 일으킨 때를 만나, 곧 자리를 옮겨 서울에 머물렀다. 그러다가 흥황사(興皇寺)에서 율을 강의하는 법영(法穎)을 만났다. 지칭은 겉에 나타나지 않거나, 가까이 하기에 너무나 먼 것에 대해, 의견을 물어 결정 할 때면, 말하는 것마다 중심을 찔렀다. 그러니 자리에 함께 한 사람들이 놀라고 감탄하지 않음이 없었다.
정림사(定林寺)의 법헌(法獻)과는 강석에서 서로 만났다. 법헌은 그의 문답이 맑고 깊이 있음을 들었다. 곧 손잡고 산사에 머물렀다. 이에 『소품경』을 복습하여 외우고, 율을 닦아 구축하였다.
그 후 여항(餘杭) 보안사(寶安寺)의 석승지(釋僧志)가 초청하였다. 그러자 지칭은 고향으로 돌아와 『십송률』 강석을 열었다. 운서사(雲栖寺)에서 다시 허리를 굽혀, 사주(寺主)가 되어 주기를 청하였다. 지칭은 마침내 그 소임을 받아들였다.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이지만, 그의 기준들을 들어올려 법으로 내보였다.
얼마 후 서울로 돌아왔다. 문선왕이 보홍사(普弘寺)로 초청하여 율을 강의하게 하였다. 수백 명의 승려가 모두들 책을 잡고서 뜻을 이어받았다.
지칭은 집을 떠나 도에 들어와서는, 번다하게 쌓이는 일을 버리려 애썼다. 항상 경조사(慶弔事)와의 인연을 끊고서 인간관계를 두절하였다. 집안 어른들의 흉한 부고[凶故]가 있을 때마다, 계율을 지키고 슬픔을 절제하였다. 오직 도 닦기를 더욱 부지런히 힘썼다. 그로써 일년 상[朞功之制]을 마쳤다.
주방(朱方)의 사문 혜시(慧始)가 지칭을 초청하였다. 고향으로 돌아가 강설하였다. 그러니 친척과 마을의 옛 친구들이 모두 와서 문안하였다. 모두에게 정중하게 훈육하여, 효도와 자애할 것을 당부하였다. 이별에 즈음하여서는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마을 사람들이 굳게 만류하였다. 그러나 그곳에 머물지 않았다. 서울로 돌아와 안락사(安樂寺)에서 쉬었다.
항상 법륜을 굴려서, 율장의 대본을 30여 차례 두루 강의하였다.
북제의 영원(永元) 2년(500)에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72세이다. 『십송의기(十誦義記)』 여덟 권을 지었다. 세상에 성행한다. 그의 제자 승변(僧辯) 등이 안락사에 비를 세웠다.
∙총(聰)ㆍ초(超)
지칭의 제자 가운데, 총ㆍ초 두 사람이 가장 율장에 뛰어나, 문도들이 손을 모아 읍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