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당함에 대하여] ㅡ kjm / 2020.9.26
"시드니 루멧의 영화 <전당포>(1964)를 어렸을 때 처음 보았다. 우리가 노인을 동정하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그의 잘못(사람을 조금 귀찮게 한 것)에 비해 받은 모욕이 부당하게 커 보이기 때문이다."
ㅡ [한겨레] [크리틱] 노인과 철학 이야기 / 김영준
그 이유의 정당함에 대하여 분노를 싸지르는 것은 바보멍청이들이나 하는 짓이다.
그러나 그 이유가 부당함에도 분노하지 않는다는 것은 바보멍청이 축에도 끼지 못 한다.
아껴둔 냉장고 안의 사과 하나를 꺼내 먹었다고 엄마에게 뺨을 맞게 되면 부당함을 느낀다.
왜 옆집 아이처럼 좋은 성적을 받지 못 하냐고 아빠에게 심한 잔소리나 야단을 맞으면, 속으로 옆집 아저씨는 부장인데 아빠는 왜 아직 과장이냐고 되물으며, 부당함을 느낀다.
유치원에서 아이가 밥을 먹다가 흘렸을 때 유치원 선생님이 아이의 볼을 꼬집고 엉덩이를 때리면 아이도 부당함을 느낄 줄 안다.
이 부당함이 지극히 반복되어 만성화에 이르면 개인의 인성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몰지각이 병화되어 분별력을 상실케 하고 만다.
이 정도의 잘못에는 이 정도의 벌을 주는 게 마땅한데, 도를 넘는 행위가 행위의 분별력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빵을 하나 훔쳤다고 평생을 감옥에 갇혀 있음도 부당함이요, 수조원을 부당이득으로 챙겼는데 번번히 집행유예로 풀려남도 부당함이다.
부당함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늘 상식이 있어 왔는데, 상식이 통용되지 않고 '유전무죄 무전유죄'(유검무죄 무검유죄)와 같은 '대체상식'으로 채워지면 사람들은 분별력을 잃는다.
상식이 무너지고, 분별력을 잃고, 부당함이 만연되어, 마침내 부조리한 사회가 되고 말아, 분노조절장애나 우울증을 겪는 사람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많아져 위험들이 상존하는 사회가 펼쳐진다.
이게 어디 어제 오늘의 일이냐고 체념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사람들은 불공평을 호소하고, 공정과 정의를 부르짖는다.
조국과 그의 가족들이 검찰에게 파상공격을 당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부당함을 느꼈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그러한 부당함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아마도 분별력이 떨어지는 혹은 분별력을 떨어뜨리는 사람들이지 싶다.
"멀리서 보면 희극이요,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던 채플린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 사회는 참으로 '웃픈 사회'이기도 하다.
"세계는 유한하다. 그러나 한편 세계는 유한하지 않다."는 칸트의 이율배반의 두 명제를 빌려온다면, 언론의 자유와 징벌적손해배상은 서로 이율배반이면서도 또한 둘 다 참이다.
오히려 부당함의 관점에서 본다면, 징벌적손해배상의 크기에 비례해서 언론의 자유의 크기가 허락된다고 볼 수 있다.
가령, 징벌적손해배상이 3~5배라면 그 크기만큼의 언론 자유가 허락되어야 하고, 징벌적손해배상이 20배라면 그 20배만큼의 언론의 자유가 허용될 수 있다.
거꾸로도 참이다. 즉, 언론의 자유가 크다면 징벌적손해배상은 20배가 되어야 하고, 언론의 자유가 작다면 징벌적손해배상은 3~5배가 되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걸 혼동하고 있다.
세월호 사건과 박근혜 탄핵 사건 이후로 사람들은 '부당함'의 실체에 대해서 눈을 떴다.
이젠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얼렁뚱땅 넘어가는 일이 없다고 보면 된다. 또한 '선택적 수사'나 '선택적 정의'같은 부당함도 묻힌 채 넘어가지 않는다.
또한 침소봉대하려는 조중동 언론 행태도 간과되지 않는다.
가짜뉴스나 악의적 오보에도 징벌이 내려질 것이다.
지금은, '부당함을 참지 않는 사회'다.
앞으로는 더욱 더 그리 될 것이다.
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