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이중표 목사님의 가르침! “대충 해라! 사람에게 모욕감을 주어서는 안된다.”
나는 지금 며칠째 이중표 목사님의 말씀을 되새기고 있다.
1996년으로 기억한다.
94년에 인도에 다녀온 나는 뜻밖의 인연으로 동북인도 마니푸르 오지에 있는 작은 신학교 건축 건에 관여되었다. 건축의 ‘건’자도 모르는 세상 물정을 모르는 나에게 신학교에서 건축 설계도를 보내고 총 건축 비용 예산이 890만원이라며 지원을 호소하였다. 나는 당시 신학생 3명의 장학금을 보낼 생각을 하고 있었으므로 신학교의 편지에 당황하였다. 그러나 건축비를 감당할 위치도 안되고 능력도 없으므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여쭈며 기도하였고 그냥 어느 모임에 가서 이런 편지를 받았다고 보고하였다. 그런데 그날 밤에 어느 어르신이 자기가 건축비 전액을 후원하겠다고 약속하였다. 많은 우여곡절 끝에 95년 초에 890만원 보다 더 많은 1,200만원을 총회를 통해서 건축비로 보냈다. 그런데 1년이 가도 건축 소식이 없고 1년 반이 되었을 때 파운데이션을 놓은 사진 한 장이 덜렁 왔다. 그리고 가타부타 일체 말이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신학교의 불성실과 비상식에 분개하고 있을 때 총회의 초청으로 그 신학교가 속해 있는 교단 총무가 우리 교단행사에 참석하셨다. 공적인 행사가 끝나고 선배 목사님께서 그 분을 모시고 이중표 목사님을 방문하러 가는 길에 동행하게 되었다. 나는 초면인 총무에게 신학교 건축 사실을 아느냐고 질문하였다. 그는 안다고 대답하였다.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그가 신학교 건축을 하지 않고 돈을 용도 변경하여 사용한 장본인인 것처럼 직격탄을 쏘았다. 우리가 신학교 건축후원금을 너희 총회로 보냈는데 그 돈을 받았느냐? 받았으면 왜 건축이 늦어지냐? 설계도대로 라면 건물을 지어도 열 번은 더 지였을 텐데 아직도 기초 밖에 놓지 않았다니 그게 말이 되냐? 혹시 돈을 다른 용도에 사용한 것은 아니냐? 등을 가시가 돋친 말투로 계속 질문을 하였다. 내 콩글리쉬을 조금 알아들은 총무 어르신은 나의 질문에 대답을 못하고 난감한 표정이었다. 그 때 이중표 목사님께서 나의 말을 멈추게 만들었다.
“그만해라. 대충해라. 그것이 아무리 사실이라 해도 사람에게 모욕감을 주어서는 안된다. 우리 손님을 우리가 존중해야지. 우리가 불러 놓고 닦달하면 되겠는가?”
“우리도 옛날에 가난한 시절에 다 그랬다. 우선 사람이 먹고 살아야 되니 프로젝트 비용이 와도 돈이 옆으로 새기 쉬운 거다. 그 때 외국 교회들이 우리를 몰아쳤으면 우리가 설자리가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도 사람의 배고픔을 아시고 다 봐주신다. 하나님께서 이해하시는 것을 우리가 왈가왈부할 일이 없다.”
“우리가 하나님께 헌금을 했으면 아무리 목적 헌금이어도 다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손길에 맡겨야 한다. 우리가 했으니 우리가 목적대로 사용했는가? 아닌가? 확인하면서 시험에 빠질 일이 없다. 그 좋은 헌금을 하고 시험에 빠지는 사람은 참으로 불쌍한 사람이다.”
목사님의 말씀이 몽둥이가 되어서 나를 쳤다. 참으로 창피하고 부끄러웠다. 그러나 목사님은 나를 더 꾸짖지 않고 방향을 바꾸어서 조금 주눅이 들어버린 인도 총무님을 두 팔을 벌려 안아주셨다. 손님을 가슴으로 맞아들이는 이 목사님의 따스하고 허물없는 자세와 태도에 숨을 죽이지 않을 수 없었다. 쥐구멍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두 분이 서로 인사를 나누며 선물을 주고받았다. 인사가 끝난 후에 이 목사님께서 내게 신학교 건축 건에 물었다. 나는 얼떨결에 진행된 상황을 이야기해 드렸다. 그러자 목사님께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 좋은 일을 우리가 맡아서 해야겠다. 빨리 연락해서 설계도와 건축 예산안을 보내라고 전해라. 그리고 우리는 지금부터 그 학교가 주의 종을 잘 양육하는 학교로 세워지도록 기도하자.”라고 말씀하고 자청해서 신학교 건축을 떠맡으셨다.
나는 그 날로 신학교에 소식을 전하였고 설계도와 예산안을 받아서 이 목사님께 전달하였다. 그리고 건축비 송금과 진행 상황에 대하여 관여하지 않았다. 다만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할 따름이었다.
세월이 흘러 목사님은 2005년 7월 7일 세상을 떠나셨고 나는 아직까지 살아서 붙여주신 권사님과 남겨주신 비전아시아와 함께 뒷일을 감당하고 있다. 그런데 열심히 일을 해왔던 분들, 성실한 사람들도 돈으로 시험에 빠지는 일들이 왕왕 있어서 프로젝트를 중단하고 싶을 때, 사람을 내치고 싶을 때가 있다. 조목조목 따져서 사람을 코너에 몰아넣고 그들에게서 잘못했다는 말을 듣고 싶은 충동에 빠질 때가 있다.
작년과 올 초에 나는 유난히 시험에 빠졌다.
나의 마음 약한 것을 이용해서 ‘A 프로젝트’로 동의를 구한 다음에 ‘B 프로젝트’를 기획안으로 올리는 사례, 예산안을 낮게 잡아서 일단 나의 승인을 받은 다음에 일을 시작한 후에 두 배로 올리는 사례, 후원금을 받으면서 1년 내내 바쁘다는 핑계로 일체 보고를 하지 않는 사례, 가짜 대학 입학서류를 만들어서 보내고 등록금을 요청하는 사례, 공무원 시험일이 늦어져서 10개월 동안 더 학원에 다니며 공부를 해야 된다며 당당하게 생활비를 요청하는 사례, 은행 빚을 갚아달라는 사례, 한국방문을 추진해서 초청해달라는 사례, 자신의 실수와 허물을 가리기 위해서 나의 수고와 헌신을 과장하고 미화하는 사례 등으로 말미암아 진위를 가리며 어떻게 해야 좋을지 고민이 되어 모든 것을 끊어버리고 싶은 충동에 빠졌다.
그러면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하나님은 내가 어떻게 하는 것을 기뻐하실까? 를 묻고 또 물었다.
바보처럼 속아주는 것도 귀찮고 모르는 척하고 그냥 지나가는 것도 피곤하다. 사람들의 얄팍한 잔꾀에 비위가 확 틀어진 것이다. SNS로 주고받는 소식을 중단한다. 그러면 마음이 편해져야 하는데 마음이 편해지지 않는다. 이중표 목사님의 말씀을 곱씹는다.
“대충 해라. 사람에게 모욕감을 주어서는 안된다.”
“하나님도 사람의 배고픔을 아시고 다 봐주신다.”
“ 헌금 했으면 다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손길에 다 맡겨야 한다. 확인하면서 시험에 빠질 일이 없다.”
“ 그 좋은 헌금하고 시험에 빠지는 사람은 참으로 불쌍한 사람이다.”
말씀을 곱씹으면서 목사님이라면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라고 여쭈었다.
그러자 이 목사님께서 기다렸다는 듯 대답하셨다.
“살아 있는 것이 기쁜데 그런 것으로 골치 아프지 마라. 사랑이면 하는 것이고 사랑이 아니면 안하는 거지. 그러나 그 사람들에게 모욕감을 주지 마라.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네게 보낼 때는 그들만 위하는 것이 아니고 너를 위하는 계획과 뜻도 있는 것이 아니겠니?”
가슴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따스한 목사님의 음성이 주님의 음성으로 들렸다.
사순절 길모퉁이에서 부끄러움으로 엎드려 울었다.
“주여! 제가 바리새인 입니다! 죄인입니다.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2024년 3월 24일 주일 자시
우담초라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