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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장 인천상륙작전과 서울탈환작전
제 1절 작전 개요
인천상륙작전과 서울탈환 작전은 1950. 9. 15일 인천상륙작전부터 수도탈환에 이어 의정부 탈환에 성공한 10월 3일까지 미 제10군단(미 제1해병사단, 미 제7사단, 국군 제1해병연대, 국군 제17연대 등)이 북한군 서울지구방위사령부 예하부대들을 격퇴한 작전이다.
1950. 6월 29일 한강방어선을 시찰한 맥아더 원수는 인천상륙작전이 불가피할 것으로 판단, 이미 일본에 주둔한 제1기병사단으로 7월 하순에 인천상륙작전을 단행할 수 있도록 상륙훈련을 지시하였다.
그러나 금강-소백산맥 선에서 북한군을 저지하는데 실패하자 일단 최초의 계획을 보류하고 합동전략기획단을 편성하여 인천상륙작전을 준비토록 하였다. 이때 "크로마이트 작전"이라 이름붙여진 상륙계획이 표면화 되었고 인천앞바다의 자연적 장애요소에 의해 많은 전문가들로부터 반대에 부딪치게 되었다.
하지만 장군은 이러한 장애요소가 바로 북한군이 방어태세를 소흘히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며 기습효과를 달성할 수 있다고 소신을 관철하여합동참모본부의 승인을 받아냈다. 이에 따라 유엔 해군과 공군은 9월 7일부터 14일까지 동해와 서해에서 양동작전을 펼쳐, 유엔 공군은 총 3,250여 회나 출격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 하에서 제7합동기동대는 미 제7함대 세력을 주축으로 261척의 함정과 미 제10군 예하 한국군 2개 연대를 포함한 미군 2개 사단 등 7만여 명의 병력으로 9월 15일 02:00시에 인천에 대한 상륙작전을 개시 하였다. 다음날 새벽 미 제10군단은 인천일대에서 저항하는 북한군을 소탕한 후, 18일에는 김포공항을 탈환하고 영등포로 진출하게 된다.
19일, 서울탈환작전으로 전환한 미 제10군단은 행주-능곡-연희동, 영등포-마포, 노량진-서빙고-남산 등 3개 방면에서 서울로 진출하여 9월 28일 서울을 완전 탈환하였다. 이리하여 29일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원수가 임석한 가운데 서울 수복 경축행사가 있었고 한국정부는 이날 서울로 환도하였다.
제 2절 작전 준비
1. 작전지역과 전선 상황
가. 작전지역의 특징
인천상륙작전계획
미 해병5연대 적색해안 만석동 주안염전
국군1해병연대
응봉산 인천
미해병5-3대대 녹색해안 내항 동인천역
월미도
외갑거
소월미도 염전
청색해안
미1해병연대
팔미도 월미도 인천항에 이르는 약 15km구간이 갯벌로 대형 함정들이 접근하는데는 많은 문제점이 있었다. 또한 월미도는 당시 동굴 속의 북한군 포진지와 참호들로 요새화 되어 있었다.
사실 인천에는 상륙전에 적합한 해안이 없는 편이다. 그러나 작전에 있어서 부족하나마 적색, 청색, 녹색 해안으로 분류하여 월미도에서 인천본토로 연결되는 방파제가 대체로 직각을 이루며 북쪽으로 뻗은 이 섬의 꼬리 부분에 서쪽으로 약 200m폭의 해안을 녹색해안, 인천 본토 쪽에서는 월미도와 본토가 이어지는 곳으로부터 북쪽에 암벽이 있는 약 300m 길이의 해안을 적색해안, 그리고 인천 시가지 남쪽 염전, 즉 원도의 동쪽 제방으로 이어지는 해안을 청색해안이라 하였다.
이러한 해안상의 특성을 고려하여 적색해안에 상륙하는 미 제5해병연대와 국군 제1해병연대는 사다리를 이용하여 안벽을 오르게 되었다. 청색해안은 만조 때에도 수심이 낮기 때문에 수륙양용차(LVT)를 사용해야만 했다.
나. 전선 상황
미 제8군사령관 워커 중장은 1950년 8월 초에 도착하는 미국의 증원부대를 전부 마산 정면에 집중시켜 대구 북쪽의 압력을 분산시키고자, 진주를 탈환하기위한 일대 반격작전을 구상하였다.
미 제25사단 예하 2개 연대, 미 제5연대 전투단 및 미 제1임시해병여단을 주축으로 미 제25사단장의 이름을 딴 "킨 특수임무부대"를 8월 6일에 편성하였다. 진동리를 출발한 해병여단은 8월 12일 최종 목표를 눈앞에 두었으나 상륙군 편성을 위해 갑작스레 철수명령을 받았다.
이 무렵 워커 중장은 적의 위협이 가장 심각할 것으로 보이는 낙동강 돌출부(창녕-영산)에 가장 강력한 예비대의 투입을 결정하였다. 이는 영산 동쪽의 밀양이 피탈되면 대구-부산의 주보급로는 물론 유엔군의 전산이 양단될 위험을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이 무렵 북한군은 거의 모든 전투역량을 부산교두보 확보를 위해 낙동강 전선에 집중하고 있었고 , 서울을 비롯한 후방지역에는 지역 경비부대와 병참선 경비부대, 그리고 훈련이 미숙한 신편부대를 배치해 놓고 있었다.
북한에서 발행하는 공식 전쟁사인 "조선전사"에 의하면 김일성이 사전에 상륙지점을 인천-서울지구라 하고 서해안 방어사령부를 조직하여 대비하라고 했다라고 기록한다.
하지만 이건 김일성의 우상화를 위한 예지력을 극대화하려한 것으로 신빙성이 결여된다고 본다.
그 이유로는 당시 인천에는 월미도에 제226독립유전연대 제3대대 소속의 400여 명과 제918해안포연대 예하부대가 방어임무를 하였고 , 인천 시가지에 신편 제9사단 예하 제87연대가 8월 12일부터 방어임무를 담당하였다.
인천 시가지 중 월미도 제방으로부터 북동쪽 주안 염전까지 5~6km의 해안방어는 단대호 미상의 여단인 제884군부대 예하 1개 대대가 방어하고 있었다. 이 대대의 작전문서에 유엔군의 상륙작전이 언급되는데 북한군은 약 2주일 전부터 예상은 하고 있었으나 여기에 대한 적극적인 대책은 미흡하였다.
북한군의 인천-서울 지역에서의 방어 병력은 10,000여 명 수준으로 정말 그들이 상륙작전을 예견했고 이에 대비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맞지않는다고 본다.
더욱이 북한군은 공군은 19대의 소련제 항공기를 보유하오 있고 해군은 당시 정찰함정 수척으로 구성된 5개 전대가 있었으나 이중 1개 전대만이 진남포 부근에 있고 나머지는 동해안 원산에 배치되어 실질적인 방해할 능력이 없었다.
다만 그들은 국군과 유엔군이 현재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하기에 전투력이 충분하지 못해 상륙작전을 감행하리라 판단을 못했고 인천항이 갖고 있는 자연적 여건에 실제 상륙작전은 적합하지 않다고 보았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빠른 시일내에 부산을 점령하면 전쟁은 승리로 끝난다고 보고 모든 새로운 전투력을 낙동강 전선으로 보냈다.
반면 유엔군은 이런 상륙작전을 기만하기 의해서 9월 초부터 동해와 서해에 양동작전을 전개하였고 실제 유엔군이 인천이나 군산으로 상륙할 기미가 나타나자 서해안지구 방어사령부를 설치했으나 편성할 전투력의 여력이 부족했다.
2. 초기 작전 구상과 경과
가. 상륙작전의 최초 구상
1950. 6. 29일 새벽 맥아더 원수는 전용기인 바탄호를 타고 엄호를 받으면서 수원비행장에 도착하였고 이승만 대통령, 무초 주한미국대사, 그리고 처치 장군의 영접을 받으며 수원 농업시험장에 위치한 전방사령부 상황실에 들렀다.
그리고 한강변 언덕에서 인천상륙작전의 구상을 하게 되었다. 맥아더 원수의 회고록에 의하면"공군과 해군을 지원해도, 거세게 남진하는 적을 한국군이 저지하지는 못할 것이다. 가능한 방법이라고는 우리 지상군의 즉각적인 투입뿐이었다."
맥아더 장군의 생각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1개 연대전투단을 즉각 투입하고 그 뒤에 있을 조기반격을 위해서는 주일 미군 중의 2개 사단으로 증원하겠다는 계획을 6월 30일, 미 합동참모본부에 건의하였다.
나. 불루하트 작전계획
인천상륙작전은 맥아더 장군이 한강선을 시찰하고 들어온 직후인 7월 첫 주에 그의 참모장인 알몬드 소장에게 지시하여 처음 연구가 시작되고 작전참모부장인 라이트 준장이 이끄는 연구진에 연구 되면서 "불루하트(Blue Hearts)"라는 암호 명칭이 부여 되었다. 이 계획의 기본개념은 남부전선에서는 미 제24.25사단이 정면에서 반격하고 이와 병행해서 해병연대 전투단과 육군부대가 돌격부대로 인천에 상륙하여 내륙으로 진출, 서울을 포위함으로써 적을 38도선 이북을로 구축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불루하트계획은 북한군을 38선 넘어로 격퇴시키려 작전일자를 7월 22일로 하였은나 적의 남진을 저지할 미군과 국군의 능력이 부족하여 7월 10일경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3. 크로마이트 작전계획의 발전
가. 크로마이트 기본계획
맥아더 장군의 상륙작전 계획은 미 해병사단의 증파를거듭 요구하는 동안 미극동군사령부 안에서 극비리에 다시 추진 되었다. 몇가지 계획이 발전 되면서 100-B, 100-C, 100-D의 세가지 방안이 발전되는데 D는 동해안 주문진, C는 군산, B는 인천이었었는데 인천이 최종 확정되었다.
나. 상륙부대 편성
(1) 미 제10군단사령부 창설
"바로 당신이요"
8월 21일 육군부의 승인을 받아 작전계획은 보다 구체화되어 가는데 상륙군 부대의 지휘관을 누가 할 것인지 당시 참모장인 알몬드 소장이 질문하자 맥아더는 서슴없이 바로 그 자리에서 "바로 당신이요"라고 대답한다
미 제1해병사단(제1연대, 5연대, 7연대)과 한국군 제1해병연대(연대장 신현준 대령, 1대대장 고길훈 소령, 2대대장 김종기 소령, 3대대장 김윤근 소령)이, 미 제7사단(제31연대, 32연대)과 국군 제17연대(연대장 백인엽 대령)이 편성 되었다.
미 제7사단은 일본에 주둔하고 있었으나 해병사단은 구성되지 않은 상태였다.
(2) 미 제1해병사단의 편성
미 캘리포니아 펜들턴 기지에 위치에 있던 미 제1해병사단은 7월 초에 제1임시해병여단을 편성하여 급히 전선으로 보내고 남은 병력은 3,386명이었다.
하지만 맥아더의 요구와 그 당시에 자체병력을 증강시키기 위해 한국에의 참전을 열망하는 것이 맞아 떨어져 제1진이 제1해병여단으로 7월 14일 샌디에고를 3,386명으로 출발하였다.
다음에 사단장으로 보직된 스미스 소장이 완편을 위한 조치를 강구하게 되고 한국으로의 출발은 8.10~`5일 어간에 예정되며 먼저 한국에 파견된 제1임시해병여단이 제5해병연대로 되고 제7해병연대, 제1해병연대를 구성하여 9월 9일까지 미 제1해병사단이 일본의 고베와 부산에서 각각 출동준비를 갖추었다.
(3) 미 제7보병사단의 편성
미 제7보병사단은 일본 점령부대로써 1950년 7월 중 제24, 25사단 및 기병사단이 한국으로 출동할 당시에 장교 1540명과 병 1,500명을 보충해 주었기 때문에 병력이 부족한 실정이었다.
그래서 극동군에 전입되는 전 장병을 제7사단에 우선 충원시키고 한국군에서 8,637명을 선발하여 일본에서 미군과 함께 훈련하여 편성하게 되는데 이것이 카투사(KATUSA)의 실질적인 시초다
(4) 한국군 부대 편성
제1해병연대는 제주도에서 약 3,000명을 신병으로 모집하고 또한 김성은 부대 2개 중대로 보강하여 9월 6일 부산에 집결한 다음 미 제5해병연대와 합동으로 상륙전을 위한 특수훈련을 받았다.
제17연대는 수도사단 예하로써 안강.기계전투 중이었으나 미 제10군단에 배속되고 9월 14일부터 부산으로 이동하였다.
이상의 부대 외에도 미군부대에는 통역, 정보 및 기타의 특수분야에 상당수의 한국군과 경찰, 그리고 민간인들이 활동하였다.
(미 CIA 혼 요원과 한국육군 계인주 대령, 해군 연정 중령, 그리고 미군 정보부서인 잭슨 첩보부대에서도 정보를 수집하고 계 대령은 한국인 첩보요원 22명을 모집하여 인천지구에 약 90개소에 파견하여 첩보활동을 실시하였으며 , 동시에 250명의 공정대원을 투하시켜 많은 정보를 얻었다.)
화랑부대라 호칭되던 전투경찰대가 미군부대에 배속되어 미 제1해병여단에는 100여 명 규모의 1개 전투경찰중대가 배속되고 제7사단에는 국군이 충원되는 시기에 100여 명의 전투경찰대중대가 3개 보병연대에 각각 배속되어 훈련을 받은 뒤에 참가 하게 된다.
다. 상륙작전 최종 논쟁
미 합동참모본부는 8월의 전선상황에 대한 불안과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의구심을 버리지 못했다. 다라서 8월 21일 콜린스 육군참모총장과 해군참모총장이 도쿄로 날아왔다.
조수간만의 차와 지형의 두 가지 문제를 들어 인천상륙작전이 매우 위험하다고 주장하였으나 맥아더 장군의 단호한 설득에 결국 승인된다.
제 3절 인천상륙작전
1. 인천으로의 향진
(가) 제7합동기동부대의 발진
미 제1해병사단의 주력부대들은 8월 중순 미국 본토의 서해안을 출발하여 8월 말 일본 고베항에 도착하였다. 그리하여 8월 말 일본의 고베, 사세보 및 요코하마와 부산항은 상륙작전의 중심지가 되었다.
미 제1해병사단은 고베에서, 제5해병연대는 부산에서, 그리고 미 제7보병사단은 요코하마에서 각각 승선하였고 대부분의 호위함정과 함포지원대 및 기함은 사세보에 집결하고 있었다.
(나) 제1해병사단의 출동
미 제5해병연대 주력은 9월 6일부터 7일 오전까지 전부대가 부산으로 이동을 완료하였다. 여기서 1주일도 안되는 기간에 한국 해병대의 재편성과 사격훈련을 도와야 하는 과업도 부과되었다.
일본 고베에서의 제1해병사단의 승선이 이루어지고 미 제7보병사단은 요코하마에서 승선이 이루어졌다.
(다) 한국 해병대의 출동
1950. 8월 31일에 승선명령이 하달되었으며 9월 3일에 미 제1해병사단에 배속된 한국군이 제17연대에서 해병대로 바뀌었다. 상륙에 앞서 미 제8군은 미군의 표준장비와 화기를 한국 해병대에 지급하였다. 보병에게는 M1소총이, 자동소총 사수에게는 자동소총(BAR)이, 그리고 기타 병사들에게는 카빈 소총과 단발식 소총이 각각 지급 되었다.
새로 장비를 지급받은 한국군에게 미 제5해병연대는 각 대대에서 우수한 하사관들이 교관으로 차출되어 교육을 시키게 되었고 개인화기의 사격은 함상에서 오륙도를 표적으로 시험사격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한국 해병대는미 제1해병사단의 제4연대로 배속되었다. 한국 해병대는 부산에서 승성준비를 완료한 다음 9월 11일 제2대대의 일부가 미 해군 LST 306호에 승선하고 기타는 12일 11:00시에 공격수송함 피카웨이호에 승선하여 다음날 13일 부산을 출항하였다.
(라) 일련의 지원작전
1)양동작전
맥아더 사령부는 적이 알더라도 대응할 시간적 여유를 주지않기위해서 인천에 함포사격을 D-2일붙터 실시 하였다. 적을 기만하기 위해 특히 북으로는 평양에서붙터 남으로는 군산까지 서해안의 상륙가능지역에 포격을 실시하되 객관적을로 가장 상륙작전이 있으리라 판단되는 군산에 쏠리도록 하였다.
상륙부대 항공기들은 9월 5일에서 10일 사이에 대체로 인천-서울 지역에 약 40%를, 그리고 나머지는 북쪽과 남쪽 목표물에 반반의 비율로 폭격을 실시하였다. 이때 미공군기들은 군산 일원을 강타하고 있었다.
9월 초까지 낙동강 전선에서 미 해병여단을 지원하던 미 해병 항공기들은 9월 10일에 총 43톤의 네이팜탄을 월미도에 퍼부어 숲들을 거의 태워버렸다.
태풍으로 일시 대피하였던 고속항모부대의 함재기들은 9월 12일과 13일, 월미도와 인천 일원에 다시 출격하였다. 이 무렵 서해상 군산에도 6일 부터 포격이 가해지고 9월 12일 미.영 혼성 기습부대가 군산에 양동작전을 감행하였다. 부대는 3명의 사상자를 내고 13일 새벽 큰 성과 없이 철수하였다.
이어 동해안에서는 9월 14일과 15일에 삼척 일대에 맹렬한 포격을 가했다. 15일 포격에는 미국 동부 대서양 연안에서 바로 전날 오후 도착한 전함 미주리호가 가세하여 16인치 거포의 위력을 과시하였다.
이와는 별도로 14일 영덕 장사에서는 육본 독립 제1유격대대(일명 명부대)가 양동작전을 전개하여 북한군을 기만하였다.
2) 사전 포격과 폭격
유엔군 사령부는 9월 4일부터 경인지구를 고립시키기 위해서 해병비행대대 함재기를 투입하여 폭격을 집중하였다. 목표는 인천 반경 50km 이내의 도로와 교량 그리고 터널과 조차장이었다.
9월 9일부터 공군은 평양-서울간의 경의선 정거장을 폭격하였고 철도 선로를 마비시키게 했다. 9월 11일 신막비행장을, 12일 평양비행자을 폭격하여 야크기를 파괴하였으며 14일에는 폭격기 60대를 투입하여 경인지구로 향하는 모든 철도망을 파괴하여 적 병력과 보급품의 수송을 일체 불가능하게 하였다.
9월 10일 해병 비행대대 항공기 14대가 월미도를 공격하고 12일 부터는 제77기동함대 해군기들이 월미도를 공격하고 13일 07:00시에는 기동함대들이 월미도 전방까지 진격하여 정박하였다.
이때 적은 모든 병력을 해안으로 전진 배치하였으며 월미도와 인천항에 배치된 북한군 포대가 대응사격을 해왔다. 또한 북한 평양방송은 유엔함정 13척을 침몰 또는 파손시켰다는 등의 허위보도를 흘렸다.
사실 수로에서 폭파된 기뢰는 8개로써 미친 영향은 없었으며 마침내 9월 15일 00:00시에 선견공격전대가 일군의 구축함을 선두로 인천수로로 진입하였다. 이들은 클라크 대위가 밝혀주는 팔미도 등대의 안내를 받아 무난히 인천항에 접근하였다.
3) 월미도 상륙
이미 엄청난 항공 및 함포 사격을 받아 앙상한 모습으로 변해버린 월미도에 15일 06:15분 3척의 로케트 포함들이 1,000발의 5인치 포탄을 집중하였다.
상륙부대들은 거의 저항을 받지않고 올라섰고 07:45분 맥아더사령관이 승선하고 있는매킨리호에 "포로 45명, 적의 저항 경미함"이라는 보고가 올라가고 월미도는 함락 되었다.
※월미도에 올라서다
105m의 월미도는 벌집처럼 되었고 적이 땅굴을 구축하고 버티었으나 막강한 화력앞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미 해병의 총 피해는 부상자 17명인 반면 적 사살 108명, 포로 136명이 확인되었다. 적 포로진술에 의하면 월미도와 소월미도에는 적 226연대 예하부대 및 제918해안포연대 제2대대 등 약 400명이 있었으며, 이들 중 150여 명이 도쟈 전차가 밀어붙인 참호안에서 사살되거나 생매장 되었다.
2. 돌격단계와 상륙군 상륙
가. 돌격단계
9월 15일 새벽, 공격함대의 함선들은 대부분 인천 수로 입구의 해역에 집결하고 H시인 17:30분이 전 함대에 전달되고 이어 14:30분에 화력지원함들이 불을 뿜으며 무려 20분 동안 6000여 발의 로켓탄이 인천에 집중되었다.
마침내 "상륙군 상륙"이라는 상륙명령이 하달 되었다. 그리고 메 제5해병연대 예하 2개 대대와 한국 해병 제3대대는 수송함에서 하선망을 타고 내려와 상륙주정을로 옮겨탔다. 거의 같은 시간 미 제1해병연대의 돌격대대를 태운 상륙주정과 월미도에 행정상륙할 2개 대대의 포병을 실은 수륙양용트럭들이 솓아져 나와 순식간에 500여 대가 넘는 상륙주정과 수륙양용차량들이 넓은 수송함정구역을 뒤덮었다.
적색해안의 공격개시선은 해안으로부터 약 2km거리에, 그리고 청색해안에는 약 5km거리에 설정되어 있었다.
나. 적색해안 상륙
미 제5해병연대는 적색해안을 감시하는 응봉산은 적의 수중에 있었고 참호로부터 강력한 저항이 있었으나 상륙군들은 해벽에 다다라 수류탄을 투척하고 사다리를 이용하여 상륙을 개시하였다. 자정무렵 1명이 전사하고 3명이 부상하면서 통제선을 확보하게 된다.
다. 청색해안 상륙
미 제1해병연대가 상륙할 청색해안은 400m 폭의 개천 남과 북쪽해안으로 자연스럽게 구분되어 있었다. 장갑수륙양용차(LVT)를 이용하여 해안에 상륙하면서 1명 전사, 19명 부상의 피해를 입고적 사살 50명, 폴 15명의 전과를 올렸다.
3. 해안두보의 확보와 인천 시가지 작전
가. 해안두보 진격
미 제1해병사단은 해안두보의 확보와 차후 내륙 진격작전을 위해 경인 국도를 축선으로 항여 2개 연대가 병행 공격하는 기동계획을 수립하였다. 이를 위해 한국군 해병 제3대대가 인천 시가지 소탕을 맡기고 제1,5해병연대가 병행 공격 토록 하였다.
이를 위해 9월 16일 미 해병 항공기들이 국도를 따라 인천으로 접근중인 북한군 T-34 전차 6대를 간석동에서 폭파하는 시시점에 각 대대들이 목표선을 향해 진격하였다.
나. 인천 시가지 소탕
한국 해병 제3대대는 미 제5해병연대 예비부대로써 D일 오후 적색해안에 상륙하여 응봉산 서쪽에 숙영지를 마련하였다. 한국군 잔여 부대들은 야간에 상륙하여 공동묘지 부근 북쪽해안에 숙영하였다.
적들은 대부분 인천지역을 벗어나 도주한 것으로 보였으나, 상당수가 민간인으로 변장하여 주택가에 숨어들어 있었다. 이들은 소탕작전간 무기력하게 투항하거나 생포되었으며 많은 인원이 도주하다 사살되었다.
특히 제3대대는 좌측의 철로 연변, 응봉산의 공원일대, 주택가 등 일대를 소탕했다. 경찰서에 진입한 해병들은 다수의 시민들이 적에 의해 구치소 안에서 학살당한 참상을 목격하였다.
소탕작전 첫날 해병대의 전과는 포로만 181명이었으며, 다수의 적을 사살하고 무기를 노획하였다.
다. 해안 교두보의 확보와 인천 수복
D+1일 미 해병사단 포병연대 제4대대가 적색해안으로 상륙하여 포병 제1, 제2 대대와 합류하고, 전차 대대는 상륙조건이 순조롭지 못해 19:00시에 완료하였다. 이날 야간까지 양륙현황은 병력 약 15,000명, 차량 1,500대, 그리고 하물이 1,200톤이었다. D+3일 이후의 양륙작전은 제2공병특수여단 통제하에 황색해안(인천항 내항)으로 예정 되었다. D+1일 미 해병사단의 총 손실은 전사 4명, 부상자 21명이었다.
9월 18일 오전 시청광장에서 시장 취임식이 거행되었고 9월 18일 오후, 상륙군 후속부대로서는 최초로 미 제7보병사단 제32연대가 인천에 상륙하여 우선 미 해병사단에 배속되어 소사방향의 군단통제선까지 진출하여 미 해병사단의 우측방을 엄호토록 하였다.
3.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결과
이곳은 국군이 피해를 입어 발굴을 한다는 것보다는 우린 미군유해 찾기와 혹시나 있을 수 있는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는시기에 서울이 피탈될시에 이곳으로 철수한 많은 군경이 북한군에 의해서 집단총살이 될 수 있다는 사실과 북한군이 유엔군과 국군이 반격작전으로 밀고 올라왔을 때에 무고한 우익인사 등을 처형한 것 들을 확인하고자 했다.
더욱이 미군에 배속되어 있거나 여타한 이유로 미군과 함께 움직인 정보요원 등 많은 비밀을 찾기 위해 만은 시간을 노력했다. 그러나 월미도, 응봉 등 전상에 나오는 전투지역은 사실 지금 흔적조차도 찾기 어렵게 변해 있다.
가. 월미도에 올라서다
나는 많은 기대감을 가지고 월미도를 찾았다. 고등학교 시절에 이곳으로 바다구경을 왔던 추억도 있다. 그러나 이제 군복을 입고 전사자 유해를 찾는다는 것이 무척이나 무거운 발걸음이었다.
특히 이곳은 국군이나 미군보다는 북한군이 상대적으로 많이 죽어간 곳이기 때문에 그만큼 신경이 쓰였다. 우리는 북한군을 찾는 것이 아니라 국군 및 유엔군을 찾는 발굴단이다. 하지만 호기 있을 수 있는 그 1%의 가능성을 가지고 탐사를 시작했다.
"북한군의 병력중에는 우리 국군이 상당수 들어가 있었다?"
나는 이미 참전용사님들을 만나 증언을 듣는 과정에 초기 전투시 서울 한강북방에서 남쪽으로 철수하지 못한 많은 병력이 변복으로 숨어지내다 이런 저런 사유로 북한군에 들어가 남한을 향해 총을 소게 된다는 아픈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러니 총알받이로 앞에 내세우는 것은 바로 국군포로출신이나 경찰출신들이 앞세 얼굴을 내밀어 먼저 죽게 하였다.
하지만 어떤 방법으로 죽어있는 유해의 국적을 가릴 것인가는 사실 어려운 문제였다. 그러나 인도주의적 입장과 인간 존엄성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우리는 현장조사는 실시하여 기록을 남기려 노력해 왔다.
"내가 저 꼭대기에 오르는 길을 만들 때에 해병대 방위병으로 참가했소"
걸어서 오르는 도중에 삼거리 부분에 물건을 파는 분이 게시는데 나이가 들어보여 혹시나 해서 물어봤더니 본인이 해병대 방위병출신으로 이곳 전망대 공사를 할 때에 직접 참여했다는 것이다.
"그럼 혹시 도쟈나 포크레인으로 땅을 밀 때에 유해는 없었었나요?"
"그걸 내가 전부 보았을 리는 없으니 답변이 곤란합니다. 다만 당시에 하도 파편등과 때로는 대형 포탄이 발견되어 긴장은 많이 했다고 기억됩니다"
"다른 곳에 북한군이 매몰되어 있다는 소문은 없습니까?"
[화염방사기로 다 태워 죽이고 도쟈로 덮어 버렸다?〕
"사실 이 월미도 전체가 검게 타버리고 지금 나무들은 그 이후에 자란 것인데 지금 안으로 들어가 보시면 포탄구덩이는 많아요. 또 저쪽 반대쪽에 내려가면 당시의 큰 벙커같은 곳이 있는데 화염방사기로 미군이 북한군을 다 태워죽이고 도쟈로 밀어서 덮어버렸다는 소문이 있어요"
우리는 전망대에서 남서쪽으로 상륙군이 올랐다는 루트를 따라 탐사를 했다. 여기저기 포탄 탄흔이 깔려있다. 그러나 유해의 흔적은 찾기가 쉽지않았다. 비록 북한군이지만 강제로 끌려와 도망도 못가고 제대로 싸우지도 못한채로 호안에서 죽어간 그들이 불쌍하다. 총도 맞지않았는데 불도쟈로 밀링어 참호속에서 호흡질식으로 죽어간 그들도 대한민국 국민이다.
---전쟁의 비극은 승자도 없고 패자도 없다. 다 불행한 역사다---
나는 이곳 월미도를 3~4회 탐사 및 탐문하며 레드해안부터 모두를 걸어보았다. 이제는 그 흔적조차도 해안가에는 없다. 다만 월미도 섬에는 아직 많은 탄흔이 남아 그 당시를 기억케 한다.
나. 화성 송산 와룡산에 온 북한군?
이미 언급을 하기도 했지만 사실 인천상륙작전 당시에 양동 작전을 군산지역에 가장 많은 량의 포탄을 퍼부었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실제 병력이 상륙했다가 철수를 했다.
그런데 나는 탐문을 다니면서 북한군이 군산에서 미군의 상륙작전에 대비하여 병력이 해안가에 배치되었다던가 아니면 어떤 행위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하지만 이곳 화성 송산에 와서는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와룡산과 천등산에 교통호를 팠다"
지역 주민들 상당수가 이런 제보를 했다. 교통호를 파기 위해서 어디서 끌고왔는 지는 모르지만 노무자들을 투입해서 산 중턱에 길게 교통호를 팠다는 것이다.
또 다른 제보는 여기서 교통호를 파다가 유엔 공군의 폭격으로 많은 인원이 죽었는데 그대로 흙더미에 묻혔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린 이곳에 대한 시굴을 해보기로 하고 탐지장비를 가동해서 정밀 탐사를 했다. 그러나 흔적이 식별되지 않는다.
또 다른 제보는 사람이 많이 죽긴 했는데 그 유족들이 들어와 서로 발구하여 대부분 찾아갔다는 설도 있다.
또 다른 제보는 북한군이 무고한 송산면일대 양민을 잡아다 길게 교통호를 파게 하고 죽였다는 설도 있다.
다. 응봉일대는 인민군이 지역주민을 죽이고 갔다?"
상륙작전간 가장 치열한 적의 저항이 있었다고 하여 우리는 이곳 자유공원일대를 찾았다. 맥아더 장군 동상에 묵념도 했다. 그러면서 주변을 살펴보았으나 이곳이 전쟁터란 간판이 없다. 물론 전국에 대다수가 그렇치만은... .
그래서 주변의 민가를 돌면서 혹시나 흔적을 찾을까 했는데 찾지는 못하고 대신 그 당시부터 줄곧 살아왔다는 할아버지 몇 분을 만났다. 그분들의 이야기를 적어본다.
"경찰서 자리에 시체가 많았어요"(여기에는 몇분이 더 같은 이야기를 했다)
"나는 일곱살인가 그랬는데 우리 아버지가 하룻밤은 밖에 갔다오더니 아파서 곧 돌아가셨는데 동네 인민재판에 가서 매맞고 병들어 죽었어요"
"머슴살이 했던 사람이 안보이다가 갑자기 빨간 완장을 차고 나타나 집을 내놓아야 한다고 큰소리를 치는 바람에 우린 쫒겨나 옆집 헛간에서 한 3개월 살았어요. 그러다 동란때는 천안으로 피난갔다 왔어요"
"저기 무슨 학교가 있는데 포로들이 그곳에 와서 있다가 배를 타고 거제도나 제주도로 갔어요. 그런데 그 학교에서 서로 난투극이 벌어져 수없이 죽고 다쳤다고 들었어요"
"저놈들이 물러나는데 어디서 데려왔는지 많은 사람들을 끌고 가다가 이 곳 일대에서 미군비행기 폭격으로 다 죽었는데 그놈들은 민가에 숨었다가 도망치면서 살아 있는 사람들을 죄다 쏴 죽이고 갔어요"(여기에도 몇몇 분이 동조했다)
우리는 인민재판이 있었다는 집에도 가보았다. 그 당시는 기와집이었는데 지금은 개량주택이 되어있다. 주인을 만나보니 전쟁이후에 새로 들어와 사는 분이다.
"혹시 어르신 이집이 6.25전쟁 당시에 북한군이 주둔하고 있을 때에 인민재판이 벌어졌던 집이라는 것 아시나요?"
"아니요. 처음 듣는 이야기 입니다"
"그럼 사시면서 특별히 어떤 뭐 꿈자라가 사나웠다던가 그런 일 없으세요"
"별 특별한 일이 없이 살아옵니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아니예요. 혹시 만약 이곳에서 인민재판으로 죽어간 사람이 있었는지 알아보려는건데... ."
"아아, 알았어요. 무슨 말인지. 그런데 전혀 아무런 이상한 꿈도 없었어요"
"계산동 국궁장에 가보세요"
아저씨는 상당히 센스가 있으신 분이라 우리의 의도를 쉽게 간파하였다. 그리고 오히려 우리에게 좋은 정보를 주셨다.
"나는 여기 오기 전에 지금 계산동에 살았어요. 우리 동네에 지역 빨갱이들이 많아서 동네 사람들이 많이 끌려갔는데 지금까지 소식이 없는 집들이 많아요"
"당시에 몇살이었습니까?"
"내가 11살인다 되지요. 계양산성 복원사업간에도 유해가 나왔다는 이야기 있었어요. 거기 국궁장에 가면 나이드신 어른들이 계시니 찾아가 물어보세요"
지금 월미도나 인천시가지는 너무 변하여 유해를 찾기란 어렵다. 이곳은 꼭 상륙작전과 연관된 유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개전초기에도 많은 군경이 이곳으로 해서 바다로 탈출을 하는 상황에 북한군이나 지역의 프락치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제복을 입고 있으면 곧 신분이 노출되니 민가에서 민복으로 갈아입고 도보나 항구에서 배를 이용하려다 적에게 발각되어 죽고 혹은 민가에 숨어있다 붙들려 나와 인민재판에서 죽기도 하고... .
4. 소련 군사고문단장 라주바예프의 6.25전쟁 보고서 내용
보고서에는 월미도에는 독립육전대 예하 2개 육전중대, 76밀리 포대, 37밀리 대공포 2문등이 방어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2개 대대병력의 육전연대 주력은 2개 76밀리 포대, 1개 대공포 포대 등과 함께 인천항과 도시를 방어했다.
9월 14일 300대의 항공기를 동원한 강력한 공중폭격과 함포사격을 실시한 후에 월미도 상륙을 시도했고 상륙정들이 500m내지 600m 전방까지 접근하자, 섬의 수비대는 대응 사격을 했고 상륙군은 철수 했다고 기록한다.
여기서 기록에는 공산군의 포격으로 상륙정 2척, 전마선 6척이 침몰했고 소형 구축함 4척이 파손 되었다고 하여 전사내용과 차이가 난다.
9월 15일 새벽 상륙함정들이 수개 방향에서 섬으로 접근하여 섬의 수비대는 막대한 손실을 입고 상륙을 저지하는데 실패하여 전원 전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9월 16일 새벽 상륙군이 인천 시가지에서 전투를 벌였고 시가엣서 영웅적으로 싸운 독립육전연대 예하 대대와 2개 포병중대 병력은 전원 전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5. 인천일대 민간인 피해 실태(일부 내용 중복됨)
가. 인천 보도연맹원 학살 사건
1950년 6월 29일~7월 4일어간에 정치사상범과 가족, 보도연맹원 등 700-1,000명이 죽은 사건이다. 대한민국은 1948년 8월 15일 정부가 수립되고 12월에 국가보안법을 제정한다. 당시에 공산분자들이 준동하여 4.3사건이나 여.순사건등이 계속 발생하면서 국가위기 상황이 초래되는 마당에 좌익분자들을 국가 체제내로 끌어들여 통제할 필요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이듬해 1949년 6월 5일에 "국민보도연맹"을 결성하여 정부는 좌익의 자수와 전향을 권고하기에 이르고 보도연맹이 조직을 키우면서 사상과 무관한 사람들까지 다수 가입하였다.
전쟁이 발발하자 1950년 6월 25일 치안국장 명의로 각 경찰국에 "전국요시찰인 단속 및 전구 형무소 경비의 건"이 하달되었다. 이를 위해 결국 구속이 이루어지게 되는데 전황이 불리해짐에 따라 검속된 후 2~3일 사이에 인근 바다, 산골짜기 등지로 끌려가 학살된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인천도 군경과 청년방위단이 나서 700~1,000명을 끌어다 인천 도원동(인천시청), 서해 바다의 월미도, 수인/송도 해안, 수인역 앞산, 송도역 앞산에서 죽이게 된다.
인천은 6월 29일 일부 시민들이 인천시청앞을 행진하며 인민군을 찬양하게 되고 후퇴해 들어오는 군경이 현장에서 민간인에게 총을 쏴서 몇십명이 죽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군경이 민가를 수색해 불순분자란 명목으로 700여 명을 잡아다 총살했다는 내용이다.
당시에 보도연맹원들은 적기를 앞세우고 시가행진을 하고 인민군을 맞이할 준비를 하며 인천시청을 점령하고 정부기관을 접수할 준비를 했다고 한다.
나. 인천 경찰서 학살 사건
이 사건은 인천상륙작전이 진행되고 상황에서 북한군이 인천경찰서 유치장에 가둬놓은 우익인사 약 100명을 무참히 학살하고 후퇴한 사건이다.
다. 인천 영흥도 학살 사건
'50. 8. 19일부터 9월 12일 사이에 영흥도 현 영흥중학교 우측 250m 지점의 골짜기에서 다수의 민간인이 대한청년방위대와 해군들에 의해 인민군 부역자등 다수의 민간인이 학살되었다고 주장하는바 지역 주민들 이야기는 주로 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피난와서 죽었다고 한다.
'50. 9. 17일 인천상륙작전 기간에는 서해지역을로 몰렸던 인민군과 내무서원들이 영흥도에 접어들었다가 곧 국군이 섬에 진입하여 이들을 학살했는데 이때 민간인도 학살당했는데 일부는 뗏목에 태워져 바다로ㅗ 실려가 발에 돌이 매달린 채 수장되었다고 한다.
사실 나는 영흥도와 덕적도 등 서해 도서지역을 탐사 및 탐문을 거의 해왔다. 그러나 명확히 이것이다하는 단서는 얻지 못했다. 특히 위 사실과 같은 미확인 피해사실에 대한 지역주민의 진술도 다소 차이가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힘을 받고 있는 이유는 그 반대편의 사람이나 후손들은 시간이란 공간속에 잊어지거나 현장을 벗어나 누가 나사서 대변할 사람이 없는 반면에 피해를 보았다고 하는 측은 정말 목숨을 걸고 대대손손 그 응어리를 안고 있기에 적극적 일 수 밖에 없다.
나 또한 여기에 옳고 그름을 말 할 위치가 되지 못함이 안타깝지만 그래도 나는 현장에서 양쪽의 이야기를 누구보다 중립적인 위치에서 들을 수 있었다고 자부한다. 허니 이제 그런 이야기조차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
라. 인천 월미도 학살
1950년 10월 중순에 우익무장 유격대, 강화향위특공대, 교동해군특별공격대 등이 강화도, 교동도, 김포 등지의 부역혐의자와 그 가족, 월북혐의자 가족 등 200여 명을 월미도 앞 선상에서 학살한 사건이다.
1950. 7. 22일 대통령으로 "비상시향토방위령"이 발표되고 9월 16일 발표된 개정법률에 읳해 조직된 것이 각 지역의 향토방위대가 만들어졌다.
일명 위의 자위대 혹은 향토방위대는 공비, 인민군, 부역혐의자들을 손가락 하나로 신고할 수 있었고 이심되는 자는 48시간 동안 마음대로 취조할 수 있었다.이들은 경찰의 통제를 받고 별도의 무기와 건물을 소유했다. 이 법이 부역자를 처리할 수 있는 근거가 돼 교동, 강화, 김포 등지에서 부역자를 선상에서 재판하고 처형하는데 남용됐다.
당시 학살 현장에서 살아난 생존자의 증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한현우(학살현장 생존자) : 교동에서 배를 타고 강화에 들려 또 사람을 태웠다. 김포에서도 사람이 타서 200명이 넘었다. 그리고 선상에서 날치기 재판(1인당 10-15초 소요)이 이뤄졌는데 나는 다행히 사형이 아니고 10년인가 그랬다. 배에서 하루를 보내고 마산까지 갔는데 배에서 내릴 때는 그 많던 사람이 다 없어지고 15명인가 스무명도 안 됐다. 어디 사람들이 내린 적이 없는데 사람들이 없어져버렸다. 발에 돌을 묶어 수장했다는 소리가 있었다."
마. 강화 하점면 인애성(강령뫼) 학살
1950. 9. 18~10. 2일 어간에 강화 하점면 창후리 강령뫼에서 좌익세력들이 반공인사 등 100명 이상을 총과 창 등으로 학살했다는 내용으로 '강화사'에 보면 공산당원에게 체포된 수많은 사람들이 9월 28일 강화읍 옛 산업조합 창고에 투옥좼다가 그들 중 73명이 공산당원 6명에게 강령뫼 산기슭 해변가로 끌려가 구덩이에 쓸어 넣고 총과 창으로 반공애국지사를 학살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한다.
사. 강화 송해면 학살
1950. 12월 20일/ '51. 1. 7,/'51. 1. 12일경 송해면 숭천포, 돌미루, 양오리 뒷산에서 양사면/하점면 향토방위 특공대, 서북청년단 등이 월북 후 귀환하던 민간인.부역혐의자 등 수백명 학살했다는 내용이다.
'강화사(1994)'에는 양사면 철산리 해안지대 사람중 신체검사를 하여 80명으로 조직된 특공대가 12개 초소에서 경계근무중 '51.. 1. 7일 철산리 돌머리 해안으로 상륙하려던 80여 명의 내무서원 및 300여 명의 월북후 복귀하늕자 들과 5분간 교전으로 289명을 생포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어 철산리 초소로 침투해 오는 적군과 교전하여 28명을 사살하고 향후 20여차례 걸쳐 450여 명을 생포 또는 사살해 강화를 적의 만행으로부터 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51. 1. 12일 양오리 뒤산에서 근무중 그 곳해안에 스며들어 점적해 있던 41명을 체포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피해자측 유족들은 대다수가 대부분 부역자의 가족등 민간인이며 인민군은 소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51. 2. 28일 이곳 특공대 지휘자로 온 당시 5816부대장 출신 안일채(일시적 중위 게급을 달고 지역일 통제한 적이 있음: 생전에 몇번 대면했고, 이런 사건때문에 특별대책을 강구하여 전체적인 활동세력을 통합하여 통제하게 되었음)는 이북 각 지역에서 온 치안대들이 운집했는데 이들이 양민들의 재산탈취, 살해 등을 일삼았으며 관할 제1사단의 작전지휘도 받지않고 무법행위를 자행했다고 증언을 했다.
아. 강화 길상면 온수리 학살
1950년 10월~12월, '51년 1월 4일~8일 어간에 경찰, 강화 치안대, 강화 향토방위특공대 등이 온수리 건너편 공설운동장 인근, 사슬재 교통호, 신사터 에서 1천 2백명을 부역자로 검거해 경찰에 넘겼고 일부는 인천으로 호송해 재판을 받게 했으며 일부는 재판도 없이 학살했다는 내용이다.
사슬재에는 150여 명이 죽어 있었는데 일부는 수습되었고 일부는 마을에서 가래질로 가매장을 하였다 한다.
자. 강화 옥계갯벌과 갑곶나루터 학살
'51. 1.6~8일 어간에 이루어진 사건으로 '50. 12. 18일 우익청년이 모여 강화향토방위특공대를 결성하게 되는데 주로 서울수복 이후에 부역자를 색출한다는 명복으로 부역혐의자, 좌익, 월북자의 가족들을 고문하고 학살을 하게 된다.
이 사건도 '51. 1. 4후퇴 직후인 1.6~8일, 3일에 걸쳐 상기 장소에서 학살이 자행되는데 옥림리 옥계갯벌에서만 300여 명이 학살되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주도적 역활을 하는 강화향토방위대는 결성된 이후 경찰이 치안을 넘기고 떠나자 경찰서를 본부로 ㅗ할용하고 1.4후퇴 당시에도 강화에 남아서 16일과 19일 사이에 시가전도 벌였다. '51. 2월 말경에는 다른 우익청년단처럼 을지 제2여단 특공연댈로 보충 개편되고 7월 경 자진해산한다.
이 비공식 활동단체들의 활동에 참고가 되도록 당시 특공대장을 했던 최중석님의 증언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 트공대는 '51. 1. 5일 범선을 타고 해안에 접근해 오는 내무서원 및 인민위 요원 75명으 ㄹ생포했고 1월 6일에는 역시 월곶으로 상륙해 오는 22명으 ㄹ생포했다. 또한 1월 7일에는 인천형무소에서 석방돼 철곶으로 건너오는 지방공산당원 105명 전원을 생포하여 그 중 악질 당원 60명을 식량난 문제도 있고 해서 처치해 버렸다"
차. 외포리 / 교동 / 석모도 학살
외포리(황청리)는 1951. 1. 17일 강화향토방위특공대는 부역혐의를 받은 이들의가족을 좌익으로 몰아 학살했다는 곳으로 민간인들을 배에 태워 황청ㄹ로 끌고 간 후 흔적을 없애기 위하여 대부분 바닷가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당시 그곳에서 살아난 서영선(당시 12세)님의 증언은 부역자집안이란 이유로 어머니 할머니 등이 모두 끌려가 죽었고 보인도 외포리 장포 앞바다에 30여 명과 잡혀갔는데 배표 파는 아저씨가 알아보고 몰래 숨겨주어 살아났고 모든 사람들이 후미진 곳으로 끌려가 모두 죽임을 당했다 한다.
교동지역은 '50. 12월 말부터 '51. 1월말 전후에 강하향토방위대와 교동해군특별공격대, 무장유격대 등이 1.4후퇴를 전후하여 교동일대 주로 여자와 어린이, 노인들을 대상으로 주민 수백명이 인민군 치하에서 부역과 월북자 집안이라는 이유로 학살 되는데 특히 교동 인사리에는 남로당 계열의 거물이 있었던 곳으로 많은 사람이 피해를 입었다 한다. 읍내리에서는 해군함정 위와 동진포 해안가에서 월북자 가족등이 학살되었다고 한다.
강화 석모도 학살은 '51. 1. 16일부터 1월 말까지 석모도 어류정 해안과 매음리 해안에서 강화 본섬에서 후퇴한 강화향토방위특공대와 무장유격대가 석모도의 월북했다는 주민 40~50명을 1월 16일 어류정해안에서 학살하고, 그 이후에는 인민군이 강화에 재상륙 후 석모도로후토한 우익단체들이 매음리 해안에서 학살을 자행했다는 곳으로 100여 명이 된다고 한다.
당시 부대장 출신의 홍종택은 증언에서 모두가 강화출신 월북자들로 한때는 호형호제하던 사이인데 석모도에 후퇴하여 내려가니 이미 남녀노소 40여 명이 총살돼 숨져 있었다고 한다.
타. 강화 서도 학살(주문도, 볼음도, 아차도, 말도)
이 지역은 '51년 1월 말에 강화향토특공대와 무장 유격대에의해서 주로 월북자 가족들을 대상으로 학살한 곳을로 숫자는 다수이다. 이곳은 1.4후퇴 당시에 강화에서 섬지방으로 후퇴한 특공대원들이 어떤 절차없이 자행한 사건들이란다.
지금까지 언급된 내용은 모두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실태보고서에 있는 내용들이다. 그러니 그 진위여부는 내가 판단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다만 모든 지역을 다 찾아다니며 나는 사실을 내나름대로 규명하려 노력은 했다.
하지만 이미 그 당시의 당사자들은 대부분 유명을 달리했고 주로 피해가족들이 증언한 내용들인데 내가 섬에 들어가 만난 분들은 정반대로 주로 특공대나 유격대, 아니면 차후에 타이거여단에 몸담았던 분들이라 정반대의 증언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섬지역에는 알게 모르게 좌익이 많았고 또한 적의 편의대가 피난민행세로 들어와 바다에서의 해군의 동향을 보고하는 등의 행위를 했기에 사살하게 되었다는 것이 주 내용이었다.
제 4 절 서울탈환작전
1. 경인가도 진격
가. 부평지구 전투
부평 대정리
46 적 적 적
미 해병5-3대대 서울
적
89 적 미 해병5-2대대 마분리
원통이 고개
132
186
미해병5-1대대
인천
1950년 9월 16일 오후 맥아더 장군은 미 제1해병사단장 스미스 소장에게 김포비행장을 조기에 탈취하라고 당부하였다. 이 무렵 북한군은 제107연대와 제18사단 분산 병력을 4개 대대로 재편성하여 김포-부평 일대에 방어선을 편성하고 있었다.
서울을 향해 해안교두보선을 넘어서는 한미 해병부대들은 미 제5연대가 김포비행장, 미 제1연대에 영등포 지역이 각각 목표로 설정 되었다. 16일 밤에 양개 연대는 부평을 내려다 볼 수 있는고지까지 진출하여 부평지역의 서방 경인가도를 통제하게 된다.
다음날 17일 새벽, 경인가도(46번도로상)의 오른쪽 186고지 상에서 제5-2대대 전초부대가 도로상에 북한군 T-34 전차 6대와 200여 명이 서쪽으로 접근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원통이 고개에 사살된 북한군이 안보인다"
이에 대대 전 화력이 원통이 고개(46번도로 상 만월산 북동쪽)일대에서 적을 섬멸하였고 한국 해병 제3대대는 17일 06:00시경 부평역 서남고지에 진출하여 미 해병대대를 지원하였다.
이날 적은 육상에서뿐만 아니라 인천 앞 해상에도 야크(Yak)기 2대를 출격시켜 순양함 등에 공격을 가했으나 1대는 격추되고 1대는 도주하였으며 맥아더 장군이 전선 시찰을 위해 마운트 매킨리호를 떠나 9월 17일 이른 아침에 미 제1해병연대 지휘소까지 방문하였다.
나. 김포비행장 전투
미 제5해병연대는 9월 17일 09:00시에 김포비행장 탈환 위해 진출을 재개하였다. 김포공항에는 북한군 제877항공대 소속 공항경비대, 제226연대 및 제107연대 병력 등 약 400명이 방어하고 있었다.
제1대대가 18:00시에 비행장으로 돌격하여 방어하던 북한군 대부분이 사살되는 과정에 107연대장 한치한 대좌는 이미 한강을 넘어 도주하였다.
김포비행장 전투(9.18)
한
21 전호리 행주 개성
김포읍 덕양산 125
강 서울
개화산 131
한
정곡리 79
가양리 난지도
적공격
김포비행장 적도주 둔촌리 강
E중대 적공격 내발산리 99
D중대 적도주 적도주
F중대 미 제5-2대대
외오쇠리 화곡리 118 85
80
적공격
71 신월리
미5-1대대
"비행장 주변 고지군에서 사살된 북한군은 활주로에 묻혔다?"
한편 국군 제1대대는 19:00시에 저항없이 목표인 남쪽의 71고지일대로 진입하여 김포-소사 간선도로를 감제하고 남쪽으로 진출하는 미 제1해병연대와 연결하는 역활을 했다.
9월 18일 03:00시에 미 제1대대는 비행장 북동 개화산에서 전차 1대를 앞세워 진출하는 중대규모 적을 격퇴하고 날이 샐 무렵 비행장 남동쪽에서 비행장으로 침투하려는 적 200여 명을 격퇴하였다.
이로서 1950. 9. 18일 08:00시에 김포비행장을 완전히 장악하여 최초로 미 해병 제6비행관측대대의 헬리콥터 1대가 6월 이후 처음으로 비행장에 착륙하였다.
다. 김포 부근 전투
미 제5해병연대가 김포비행장으로 진격 중이던 9월 17일, 연대장은 사단 좌측방의 경계책임을 사단에서 맡아달라 건의하여 당일 17:-00시에 국군 해병 제1대대가 인천치안을 맡고 제3대대가 좌측 임무를 전담케 하였다.
이에 따라 국군 제3대대는 9월 18일 독립적으로 김포와 부평간의 모든 지역을 경비하고 잔적을 소탕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9월 19일 오후 국군 해병대사령부 소속 정보대가 김포로 진출하여 적정을 수집중 야간에 한강 하류의 나루터로 김포반도에 들어온 적으로부터 기습을 받아 4명의 전사자와 수명이 부상을 당하게 된다. 김포지역에 약 3개 대대의 병력이 부평지구에서 퇴각하여 온 잔적들과 합류하여 다시 반격을 시도할 것으로 판단 되었다.
이에 국군 해병대사령부는 20일 제3대대가 김포반도의 적을 섬멸하기에 앞서 정보 수집차 첩보부대 70명을 부평과 강화도 지역에 출동시켰다. 첩보부대는 이날 새벽 김포읍에서 정찰하던 중 약 150명의 적으로부터 기습을 받아 부대장을 비롯 4명이 전사한다.
"김포일대에 국군 전사자를 목격한 분을 찾습니다!"
이에 국군 제3대대는 첩보부대를 구출하기 위해 김포읍 남쪽 157고지군을 진출하고 주민제보로 적이 신니에 집결해 있으며 김포비행장에 약 1개 대대병력이 기습을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대대는 즉시 신리일대를 기습하여 적 120명을 포획하고 김포시가지를 수색하여 18여 명을 포획하였다. 이과정에서 적 107연대장 한치한 대좌를 심문하던 중에 소흘히 한 틈을 이용, 한치한이 카빈총을 빼앗아 심문하던 중대장이 희생되는 사건도 발생했다.
국군 해병대는 9월 21일까지 김포반도의 적 주력을 거의 소탕하였고 제3대대는 강화도까지 소탕하였다. 문주산까지 소탕작전에 미주리호를 비롯한 다수의 미 해군함정들이 김포 일대의 적 집결지를 강타하여 한국 해병을 지원하였다.
김포 부근 전투
장기리 개화산
적방어진지
395 계양산 박촌리 김포비행장 적방어진지
효성리 미 해병5-3대대
적방어진지 계산동 국해병3대대
적방어진지
적방어진지
국해병 3대대
137 대정리
부평
원통이고개 미5해병연
ㅐ
미1해병연 소사
인천 서울
라. 영등포 부근으로 진출
미 제10군단장 알몬드 소장은 적의 저항이 강력해지자 20일로 예정되었던 미 제7사단의 상륙을 앞당기도록 하여 18일까지 미제32연대를 포함한 25,606명의 인원과 4,547대의 차량 등을 상륙하였다. 이에 따라 먼저 17일 저녁 상륙한 미 제32연대는 상륙군 우익인 미 제1해병연대 제1대대 진지를 인수하였다.
한편 적은 제18사단의 1개 연대로 영등포를 끝까지 사수하려고 하였으며, 미 제1해병연대는 김포방면으로 진출한 제5연대와 한국 해병대보다 고전하였다.
"오류 IC 일대(궁동, 오류동, 천왕동 일대 고지군, 하안동 구룸산-도덕산군)에도 적군을 못찾았다"
미 제1연대는 지금의 안양천변 서쪽 지역에서 적의 저항과 도로에 설치된 지뢰지대 극복에 진출이 지연되고 연대의 우측으로 들어오게 되어 있는 미 제7-32연대가 진출하지 않아 우측방이 노출 되어 있었다. 이 일대 전투에서 적은 300여 명이 사살되면서 미 제32연대가 우측으로 진격하여 영등포 남쪽 도덕산(182m, 지금의 광명시 하안동)을 확보하게 된다.
이어서 국군 제17연대와 미 제7사단 잔여부대들이 18일 상륙하여 19일 전선에 참가하였다. 마지막으로 상륙한 미 제7-31연대는 수원을 향해 진격하였다.
영등포 부근 전투
개화산 한
강 난지도
미해5연-C중
한
김포비행장 미해5연A중 미해5연B중 118
적진지
적진지 강
원정리 미해5연1대대 영등포
미해1연1대대 적진지
미해1연2대대 소사 적진지 적진지
미해5연2대대
72 미1해병연
ㅐ
미7사
미7-32연
2. 한강 도하와 영등포 부근 전투
가. 한강 도하 작전
한강 도하작전(9.20)
경의선
장흥
능곡
51
한강 미해5연G중 미해병5연2대대
강매리 95 미5해병D중대 179 망월산
한강 행주 미해5연H중
행주나루
미해5연3대대 125 덕양산
127 대덕산 수색역
김포 미해5연 2대대
개화산
정곡리
김포비행장
미 제10군단장 알몬드 소장은 9월 18일 오후 미 제1해병사단에게 한강을 도하하여 서울 북쪽고지를 점령하라 명령하였다. 이에 사단장 스미스 소장은 미 제5해병연대의 도하지점을 행주나루로 선정했다고 보고 하고 도하 작전 부대는 미 제1 및 제5해병연대, 그리고 한국군 해병대, 미7-32연대 뿐이었다.
도하작전을 지원하기 위해서 제1수륙양용차(LVT)대대도 비행장 부근으로 이동하였으며 실제 행주 도하작전 부대는 미 제5해병연대와 한국 해병 제2대대, 미 해병사단 수색중대, 미 해병 제1전차 대대 A중대 등이다.
"행주산성 일대와 행주나루터의 애환"
도하작전을 위해 사단수색대 도하정찰반 14명이 19일 20:00시에 도하를 감행하여 도하지점 부근과 125고지 경사면을 정찰했으나 특이점을 발견하지 못하고 곧 수색중대에 도하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21:00시경 LVT 8대에 분승하여 도하하기 시작했으나 곧바로 적의 강력한 사격으로 상륙에 실패하게 된다.
도하작전이 실패한 원인은 정찰부대가 정찰한 곳이 125고지 덕양산 일대가 아니라 125고지 서쪽 1,000m나 떨어진 곳이였다.
따라서 미 제5해병연대장은 기습 도하계획이 좌절되자 아군의 도하기도가 폭로된 이상 시간을 끌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9월 20일 04:00시에 도하공격을 개시하였다.
당시 지금의 방화동 위 연대 지휘소 개화산에는 미 해병사령관을 포함하여 알몬드 제10군단장, 스미스 사단장 등 많은 기자들이 운집해 있었다. 06:45분경 도하 선두부대는 적의 공격으로 많은 피해를 입고 있었고 함재기들이 날아와 맹폭을 하였다. 이 일대의 적은 제45사단 예하 제76연대와 제513포병연대 일부 병력이었다.
드디어 09:40분에 200여 명의 적을 사살하고 125고지를 점령하여 교두보를 구축하였다. 이날 08:30분에 미 해병 제2대대가 도하하고 한국 해병 제2대대가 수륙양용차를 이용하여 도하하여 제5연대의 측방과 후방을 엄호하는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국사봉, 대덕산, 망월산 등 전사에 나오는 사살된 북한군을 목격한 사람이 없다"
목격자 한국군 제2대대는 지금의 고양시 덕양구 화정동 북방 국사봉(성리산, 국조봉?)일대에 적 1개 대대병력이 야간에 공격을 해와 제5중대가 사격을 집중하고 대대의 모든 화력이 불을뿜어 적은 몇차례 공격에서 전멸되었다.
9월 20일 오후에 화전리로 진출하면서 공병대가 도하지점에 교량을 가설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미 제5연대의 진출은 북한군 약 2개 연대의 저항으로 고전하고 있었으며 9월 21일 08:00시에 한국군 제1대대가 미 제5연대 제1대대와 전방을 담당하게 되었다. 최초계획은 국군 해병 제1대대와 미 제5해병연대가 한강 북쪽의 적의 강력한 저항을 무리치고 영등포의 미 제1해병연대의 도하지점을 타개해 준다는 것이었다.
서울탈환의 선두부대를 한국군으로 한 것은 정치적 고려와 심리적 측면에서 한국군과 한국민의 사기를 앙양시키기 위한 것이였다. 이날 미 제1해병연대는 영등포에서 고전하고, 미 제5해병연대는 215고지(백련산지역, 홍은동)와 마포 성산동의 68고지일대로, 한국군 해병대는 연희동의 104고지까지 진출한다.
나. 영등포 전투와 서울 남측방 진출
(1) 영등포 탈환
행주나루에서는 미 해병사단 수색중대가, 김포에서는 한국군 해병대가 한차례씩 고전을 겪던 9월 20일 영등포 방면의 제1해병연대는 북한군 제9사단 제87연대와 제18사단 예하부대의 저항에 진출이 더디고 있었다.
"지금 강서구청을 중심으로 그 주변 고지군과 논밭에 널려있던 북한군"
미 제1해병연대는 경인국도를 중심으로로 좌측방에 제1대대(지금의 우장산 일대로 판단됨) 우측방에 제2대대(지금의 오류 IC 부근)에 진출중 제2대대가 덕고개 일대에서 적 전차 5대와 1개 대대 병력과 조우하여 적 300여 명을 사살하였으며 안양천을 사이에 두고 적과 대치하게 된다.
미 제1해병연대는 21일 06:30분에 우측의 제2대대를 주공으로 경인가도를 따라 영등포의 서북쪽과 서남쪽으로부터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때 연대 우측 미 제7-32연대도 동시에 공세를 취했다. 조공인 제1대대는 지금의 양화교일대에서 적의 저항을 받으면서 전진하였다.
한편 우측의 주공 제2대대는 당일에 전사 11명, 부상 24명이 발생하였으며, D일 이후 총 28명 전사에 226명 부상으로 21일 15:00시를 기해 제3대대와 임무를 교대하였다. 한편 미 제7-32연대는 경미한 적의 저항을 무리치며 안양부근으로 진출하여 서울-수원간 도로를 차단 하였다.
※개미구멍이 소구멍 되다
공격을 시작한 좌측의 제1대대 A중대는 21일 아침에 영등포 시가지로 진입하여 경인가도를 따라 진출하려는 적의 대열을 발견하여 격멸시키고 깊숙이 진입하였으며 22일 아침에 225명의 적 시체와 장비가 흩어진 것을 확인하였다. 결국 22일 08:00시에 미 제1대대 A중대는 시내을 포위공격하여 지리멸렬 되어 분산 퇴각하는 북한군을 구축하고 23일 노량진을 경유하여 한강 인도교까지 진출하였다.
북한군은 제9사단이 낙동강으로 남진시 인천에 잔류하고 있다 9월 15일 김천으로 이동했다가 다시 열차를 이용하여 20일 영등포에 도착한 부대였다.
미 해병사단은 21일 명령을 하달하여 한강을 도하한 미 제5해병연대와 한국군 해병대 제1,2대대는 서울 서북쪽에서 공격하고 있었다.
23일 작전에 참여한 미 제7해병연대는 사단 좌측방을 엄호하면서 북방에서 서울에 이르는 적의 진로를 차단하고, 미 해병1연대가 사단 우측방에서 영등포방면에서 한강을 도하하여 압박하도록 하였다. 미 제1해병연대는 영등포를 완전히 장악하였고 제3대대가 노량진으로 진출하여 한강교량 감제고지를 확보하였다.
(2) 서울 남측방 진출
미 제7사단은 9월 20일 새벽에야 인천-안양간 도로를 중심으로 작전에 돌입하였다. 사단은 미 해병 제1연대가 영등포로 진출하고 있을 때에 그 우측을 방어하면서 한편 수원비행장을 조기 확보토록 임무를 받았다.
먼저 진출하고 있던 제32연대가 적의 지뢰매설로 진출 속도가 지연되고 있었으며 공병부대가 투입되어 150여 발의 지뢰를 제거하는 등의 노력에 힘입어 9월 20일 저녁 무렵 지금의 광명시 하안동 도덕산 부근에 진출한다. 미 제32연대는 미 해병1연대의 영등포공격과 보조를 맞추어 21일 안양 북방 2km의 300고지(안양 비산동 삼성사 위로 판단됨)를 제1대대가 점령하고 제2대대는 영등포 남쪽고지를 점령한다.
한편 미 제7사단장 바르 소장은 정찰중대에 전차소대를 배속시켜 수원비행장을 확보토록하여 21일 16:00시경 수원비행장 부근에서 북한군 소좌 이하 37명을 포획하고 그 남쪽 능선에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그러나 이들과 연락이 끊긴 사령부는 21일 "핸넘 특수임무부대"를 수원비행장으로 투입하는 과정에 안양에서 적 전차를 아군으로 잘못 판단하여 적의 공격으로 핸넘 중령 이하 23명이 전사 또는 부상당하였다. 결국 부대는 22일 새벽에 정찰중대와 합류하고 제31연대 주력도 수원비행장에 도착 하였다.
미 제7-32연대는 제1대대가 안양 동북방 14km지점에서 적을 격퇴하고 한강철교와 한강 인도교 남쪽 2~4km 지점까지 진출하여 목표고지 290고지(서초동 우면산 아니면 내곡동 대모산으로 추정)를 점령하였다.
3. 서울 탈환전
가. 104고지 전투
연희고지 부근 전투
미해병5연대
불광천
수색역 165 미해5연-3대대
미해5연-2대대
북가좌동
남가좌동 적 296 안산
96 모래내
미해병5연-1대대 국해병1대대 적 104 신촌
성산동 56 적 105
68 터널고지
한강 적
적
105 와우산 105 노고산
수도탈환의 제일선 부대인 국군 해병 제1대대는 9월 21일 오후 미 제5해병연대와 함께 서울 북서쪽 외곾에 진출 하였다. 이 일대의 북한군은 1개 보병연대와 서울 치안연대가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미 제5해병연대는 중앙에 국군 제1해병대대로 104고지에서 56고지로 해서 안산(296m)방향으로, 그리고 미 제1대대가 우측에서 성산 68고지에서 와우산 105고지 방향으로, 좌측에서는 제3대대가 화전에서 백련산 방향으로 공격을 계획하였다.
"104고지에는 유해가 없었다", 56고지는 사라졌다. 연세대 안쪽 언더우드박사 기념관동쪽에 흔적은 무엇인가?"
9월 21일 미 제5해병연대는 공격을 개시하였고 국군 제1해병 대대는 지금 연희동의 104고지(해병대 전적비가 있는 산)를 공격하였다. 고지 앞에는 하천과 개활지로 공격에는 불리하였으나 8명의 전사와 20명의 부상자를 내며 점령하였고 이곳에서 물러난 북한군은 22일 04:00시에 대대 병력이 120밀리 박격포등 기타화기의 지원을 받으며 공격을 해왔으나 진내전까지 치르며 적을 격퇴하였다.
나. 연희고지 전투
연희고지 주변의 지형은 서울 북쪽 인왕산(338m) 남서로 296고지(안산)가 위치해 있으며, 고지 남동쪽에 3개의 105고지와 연세대학을 중심으로 한 좌우 전후에 나지막한 능선이 있다.
적은 이미 9월 18일부터 안산선과 와우산을 연하는 방어선에 총력을 집중하여 보강하고 있었다. 이 곳의 적은 제18사단 예하부대와 인천에서 후퇴한 부대들이었으며, 제25교육여단은 보병대대 외에 포병, 공병, 중화기 대대 등 지원부대를 갗추고 있었다. 또한 북한군 제25여단은 철원 북방에서 낙동강 전선에 참가하기 위해 교육중에 서울 방어를 위해 17~21일 어간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104고지를 탈환한 한국 해병대의 제1대대는 계속 105고지(터널고지)를, 좌측 미 제5해병연대 제3대대는 296고지(안산)를 목표로, 그리고 우측의 미 해병 제1대대는 철로를 횡단하여 서교동의 105고지(와우고지)를 목표로 하여 각각 공격을 감행하였다. 22일 07:20분 한국 해병 제1대대가 중앙에서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연희고지를 향해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개활지를 건너는 동안 적의 사격에 노출되어 반복 공격에도 선두가 100m도 전진하지 못했다. 좌측의 미 제3대대가 안산을 점령하여 지원 사격을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북한군은 이날 새벽 방어력을 보강하기 위해 제25여단 2개 대대와 제45사단 전차연대 전차 9대를 투입하고 있었다.
한국군 제1대대의 공격은 다음날 23일까지 계속 되었으나3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이날 오후 예비인 미 제2대대와 임무교대를 했다.
한국 해병 제1대대가 연희고지를 2일간이나 공격하고 있을 무렵, 서울 서측방 우일선에서 공격중이던 미 제1해병연대 제1대대는 적의 강력한 저항을 물리치고 17:30분에 와우산을 점령했다.
한편 영등포의 미 제1해병연대는 한강도하를 준비하고 있었고 , 미 제7-32연대는 한강교 남쪽고지를 탈취하고 제1대대는 290고지와 동쪽의 고지를 탈취한 끝에 남쪽으로의 도로를 차단하고, 제2대대는 한강 남안 서빙고의 대안인 신사리를 공격하였다.
"56고지는 지금 흔적도 없고 104고지만 남았다. 안산에서 뻗어내린 능선은 지금도 존재하지만 그 흔적은 미미하다"
한국군 해병 제1대대와 임무 교대한 미 제5해병연대 제2대대는 역시 반복적인 공격에도 적의 저항에 진출이 이루어지지 못하다가 24일 드디어 D중대가 병력이 44명 밖에 남지않은 혈전 끝에 고지를 점령하게 된다. 그러나 이과정에서 중대장 스미스 대위가 전사하는 등 병력 중에 26명만이 생존하였다. 후일 이 능선을 "스미스 능선"이라 붙여진 안산에서 56고지에 이어지는 능선이 확보 됨으로써 서울 서측방 적의 주진지를 돌파하게 되었다.
미 해병 제2대대가 거둔 전과는 능선상의 호 속에서 적군 시체 1,500구가 뒹굴고 있었다.
다. 서울 외곾 포위
(1) 계획의 변경
맥아더 장군은 알몬드 제10군단장에게 9월 25일까지 서울을 탈환하도록 당부하고 있었다. 최초 미 제10군단의 계획은 미 해병대와 한국 해병대를 기간으로 서울을 탈환토록 하였다.
그러나 9월23일 현재, 서울 서측방에서 미 제5해병연대와 국군 제1대대가 4일째 적에게 맹공을 퍼부어도 물러나지 않고 있다. 여기에 해병 사단장 스미스 소장은 해병사단 단독으로 서측방을 강타한 후 서울로 돌입하는 것이고, 그러나 알몬드 제10군단장은 해병 제1연대를 주력방향으로 하는 것보다 서울 동남쪽에서 공격하는 안을 갔고 있었다.
결국 알몬드 소장은 해병사단은 전력을 다해 측방에서 공격을 하되 24일 진전이 없을 경우 미 제32연대와 국군 제17연대를 서빙고로 도하시키는 안을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9월 24일 아침 미 해병 제1연대는 09:45분부터 도하를 개시하였다.
한편 전날 연희고지에서 일단 후퇴한 국군 해병 제1대대는 재편성을 마치고 제2대대와 수색일대에 대한 정찰할동으로 적 사살 57명, 포로 30명을 확보하였다.
김포반도에서 잔적을 소탕중이던 제3대대는 세교동으로부터 도하하여 마포로 향하고 있었다. 다음날 25일 08:00시에 계획이 변경으로 다시 한강을 건너 김포비행장으로 향했다. 또한 이날 통영의 김성은 부대(제5대대)가 인천에 상륙하여 수색의 해병대사령부에 도착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군 해병대는 제1대대가 미 제5해병연대에, 제2대대가 미 제1해병연대에, 제5대대가 미 제7해병연대에 배속되어 서울 돌입을 준비하게 된다.
9월 24일 아침 알몬드 소장은 미 제7사단을 방문하여 서울 남동쪽 도하계획을 알려주었고 미 제7사단은 수원비행장에 전개했던 제31연대가 수원-오산간 도로 차단임무를 수행 중이었고, 제32연대는 과천과 우면산을 점령하여 당일 한강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알몬드 소장은 국군 백인엽 대령에게 제17연대는 다음날 도하 할 미 제32연대에 배속시킬 예정을 알려 주었고 이에 국군 제17연대는 인천에 상륙하자 곧장 열차로 영등포 지역으로 이동하여 다음날 새벽 전부대가 신사리 부근에 집결 완료하였다.
(2) 서울 남동쪽 도하작전
알몬드 소장은 해병의 공격이 계속 지연되자 24일 남쪽으로부터 서울을 포위하기 위해 미 제32연대에 한국군 제17연대를 배속시켜 한강을 도하하여 남산을 점령토록 하였다.
이에 따라 9월 25일 06:00시에 미 제32연대와 국군 제17연대는 서빙고로 도하공격을 감행하여 LVT를 이용하여 도하한 후 매봉(121고지) 뚝섬의 348고지를 연이어 점령하였다.
다음날, 26일 새벽에 적의 역습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아군의 화력전투에 384명의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
한편 국군 제17연대는 25일 신사리에서 미군의 뒤를 이어 서빙고로 도하 하였다. 남산 방면으로 진출하여 이미 미군이 점령중인 남산 동쪽능선과 보광동 일대, 매봉(174고지)과 강변을 끼고 있는 고지군으로 진출했다. 제17연대는 적을 포위하기 위해 중랑천 우측 일대로 진출하기 시작, 망우리, 광장리, 면목동 일대로 진출하여 서울 남동쪽의 외곾선을 포위 차단하였다.
이날 밤, 한국 해병대는 삼각지쪽으로 서울에 돌입하였다.
라. 서울 시가지 전투
서울 시가지 전투
미해병7연대 미7해병연
국해병5대대 ㅐ
국해병1대대 미5해병연대 미1해병사=미7사 망우산
망우리고개 국17-3대대
인왕산 338 미아리고개 국17-1대대
미32연=국17연
안산 296 중앙청 미1해병사=미7사 왕십리 용마산 348
연희고지 미해5연
장충단
미1해병사=미7사
와우산 105 노고산 105 서울역 남산 262
화양리
미1해병연
한강 국해병2대대
서빙고 신사리 청담동 뚝섬
흑석동 미7-32연, 국17연
동작동
(1) 미 제1해병사단의 서울 진출
9월 25일 서울 서측방의 미 제1해병사단은 서울 진공작전을 재개하였다. 우측방 제1연대(국군 제2대대 배속)는 서울 서측에서 동쪽으로 도심을 지나 미아리. 고려대 방면으로, 제5연대(국군 제1대대 배속)는 북서쪽에서 중앙청을 포함한 지역을, 제7연대(국군 제5대대 배속)는 좌측방 개성~서울간 국도를 장악하여 서오릉 동쪽고지 일대로 진출토록 했다.
하지만 제10군단장 알몬드 소장은북한군이 속속 북쪽으로 퇴각하고 있다는 정보를입수하자 바로 해병사단에 공격을 명하여 사단은 각 연대에 26일 22:00시에 계속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미 제5연대(국군 제1대대 배속)는 서대문형무소 방향에서 역습을 감행한 적 200여 명을 제압하는 등 제5연대 전투지대에서 적 1,750명을 살상시켰다.
미 제1연대는 제5연대가 적을 물리치는 동안 더 규모가 크고 필사적인 적의 역습을 받았다. 제1연대(국군 제2대대 배속)는 마포 전차길을 따라 공격하면서 적의 증강된 대대와 14대의 전차, 자주포 등을 앞세운 적의 역습을 받아 75밀리와 3.5인치 로켓포 등으로 적 전차 7대를 파괴하고 500여 명을 사살했으며 83명의 포로를 획득하였다.
미 제7-32연대는 9월 26일 04:30분 거의 1천여 명의 적으로부터 역습을 받았으나 남산을 지켜냈으며 284명을 사살하고 174명위 포로를 획득하였다.
당시의 포병 지휘관들은 최대발사속도로 화력지원을 하다보니 포신이 모두 녹아버린다고 불평할 정도였다 한다.
적의 사령부는 서울 서측과 남산 일대의 방어력이 약해진 것을 감지하고 일부부대로 아군의 전진을 지연시키면서 주력부대를 철수하기 시작했다. 적의 주력은 영등포 지역을 방어하던 제18사단이었는데 일부만 남겨놓고 25일 저녁 5,000명을 의정부로 철수 시켰다. 적은 서울-의정부간의 방어에 제31서울여단을 사단으로 증편하여 투입하였고 제17기계화사단 제33연대를 서울로 투입하고 있었다.
9월 26일 12:30분, 미 제1해병사단은 공격을 재개하여 제1연대는 마포에서 시내방향으로 하루종일 공격하고 아현동 삼거리 전방에서 적으로부터 강력한 저항을 받았다.
이날 연희고지 일대에서 시내로 돌입한 미 제5연대는 미 제1연대보다 더 강력한 저항을 받고 있었고 서울 북쪽 포위 명령을 받은 미 제7연대는 개성~서울 국도를 따라 남진하여 제5연대와 연결하고 북악산을 거쳐 미아리 고개로 향했다. 그러나 제5연대와 연결을 위해 독립문을 향해 전진할 때 서대문형무소 부근에서 적의 집중적인 사격을 받아 40명의 전상자가 발생한다.
맥아더 사령부는 9월 26일 14:10분에 서울을 탈환했다는 성명을 발표한다. 하지만 이런 발표에도 불구하고 27일 서울 시내는 여전히 "바리게이트를 둘러싼 공방전"이 계속 되었다
도심부의 바리게이트는 300~350m간격으로 포대 속에 흙을 넣어 가슴높이까지 쌓여 있었고 그 전면에는 대전차 지뢰가 매설되어 있으면서 건물은 요새화 되어 측후면에 대전차포와 기관총이 설치되어 있었다. 다라서 어느 바리게이트는 1개 대대가 1시간 이상 지체하는 경우도 있었다.
미 제1연대 제2대대는 마포에서 서울 중심부로 들어와 27일 15:37분에 미 대사관에 성조기를 게양하였다.
서북쪽에서 공격하던 제5연대는 제2대대가 서대문형무소를 점령하고 , 제3대대가 광화문사거리 바리게이트를 제거하며 국군 제2대대와 중앙청을 점령하고 성조기를 올렸다.
미 해병 좌일선인 제7연대는 북악산의 적을 공격하면서 9월 23일부터 27일까지 적 사살 775명, 포로 34명의 전과를 올리며 북동쪽의 서울 ~의정부간 국도를 장악하였다.
(2) 한국 해병대의 시가지 전투
한국 해병대는 미 해병과 함께 9월 25일 서울 서북 및 남서쪽에서 서울 시가지에 돌입하고 있었다. 제1대대는 미 제5연대와 연희고지를 지나 북아현동으로 돌입하고, 제2대대는 능곡과 수색 등지의 작전으을 마치고 미 제1해병연대와 서강 당인리 발전소를 경유하여 마포로 진격하였다. 조로 퇴각하는 적을 추격하는 공격명령을 따라 행동을 개시하였다.
제1대대는 주로 시가전에서 건물 내에 숨어있는 적을 소탕하는 임무를 , 제2대대는 한강 연안을 거쳐 청파동, 원효로로 진출하였으며 용산 경찰서를 점령했을 때에 그 지하실에 애국지사들이 손발에 철사가 묶인 채 무참히 학살된 모습을 목격하였다.
9월 26일 제2대대 각 중대들이 원효로와 삼각지를 소탕하고 대대는 남영동과 후암동 그리고 동작동 일대를 수색하면서 미 제1해병연대와 연계하여 서울역가지 진출하는데 이때 길 가에는 적의 시체들 썩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 지금의 남대문 경찰서 뒤, 힐튼호텔(구 세브란스벼원 지하)지하에 터널이 있고 수없이 죽어 있었다. 경찰서 뒤에 교통부장관인지 체산부 장관 공관이 있는 곳에 우물이 있었는데 그속에도 많이 죽었다"
제2대대는 서울역 구내를 소탕하고 있을 때에 맞은편 세브란스 병원 주변 일대의 건물안에서 저항하는 적을 화염방사기로 소탕하였다. 대대는 미 해병과 임무교대를 해가며 서울역으로 공지합동의 입체공격으로 전진하며 잔적을 소탕한다.
제1대대는 서대문 방면으로 공격하며 하루 종일 적을 소탕하고 야간에는 북아현동 구세군 본부 뒷산에서 미 제5해병연대 제3대대와 합동하여 부대정비를 하였다.
북쪽에서 공격한 제5대대는 미 제7해병연대와 협동하여 서울-문산가도를 서에서 동으로 공격하며 인왕산과 북악산 일대를 장악하였다.
한편 증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것은 원래 중심부로 진격하는 미 제5해병연대에 배속된 국군 제1대대에 역활이 주어졌다. 하지만 진출과장에 서대문일대에서 적의 저항이 거세지면서, 미 제1해병연대에 배속된 국군 제2대대 제6중대 제1소대가 9월 27일 미명에 태극기를 지참하고 03:00시에 중앙청을 향해 들어가 별 저항없이 진출하여 06:10분에 태극기를 게양하였다. 이로써 적의 방화로 화염에 휘싸인 채 90일 만에 다시 태극기가 휘날리게 되었다.
국군 해병 제1대대는 27일 12:00시에 중앙청을 목표로 공격하여 15:07분에 미 제7해병연대 제3대대와 중앙청 안으로 일시에 돌입하였다. 이로써 미 제1해병사단과 국군 해병은 9얼 21일 서북쪽에서 공격을 개시한 후 1주일 만에 서울 중심부를 장악하였다. 국군 제1대대는 종로와 그 북쪽 지역을, 제2대대는 남산서쪽, 청량리까지 진출하고 ,제5대대는 서울 북쪽의 산악지대를 점령하면서 북악산을 장악하였다. 이나 해병대 사령부가 한성중학교로 이동하였다.
9월 28일 국군 해병대는 국군 제17연대에게 중앙청 및 경무대 경비업무를 인계했다. 이 작전에서 25일 이후 적 1,000여 명 사살, 500여 명 포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렇게 유엔군과 국군의 서울 탈환은 계획보다 1주일이 지연되었다
(3) 미 제7사단과 국군 제17연대의 진출
미 제7사단의 전투는 서울 동쪽 외곾도로를 따라 퇴각하는 적과 조우하는 형태로 전개되었다. 미 제32연대는 9월 26일 새벽 남산 일대에서 장충동 일대까지 진출하고 왕십리 방면으로 패주하는 적의 대열을 발견하여 공중지원을 요청하여 적을 분산시키며 동대문 방향으로 진격하였다. 미 제32연대는 이날 전투에서 적 500여 명을 사살하고 전차 5대와 차량 45대 등을 파괴하였다.
한편 국군 제17연대는 미 제32연대와 병행 진격하면서 26일 면목동 일대를 확보하고 망우리-면목동 일대에서 경춘가도를 따라 퇴각하는적 전차 10대를 노획하였다. 연대는 지내내 잔적을 소탕하였는데 적 포로들은 17~18세 연소자들로 서울에서 강제로 끌려갔던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28일 아침 연대는 왕십리로부터 중심부로 들어가 12:00시경 해병대로부터 중앙청 및 경무대 경비업무를 인계받았다.
(4) 서울 수복과 환도식
9월 29일 10:00시에 맥아더 사령관과 일행이 동경에서 김포비행장에 도착하였으며 이승만 대통령도 도착하여 맥아더 원수와 함께 서울로 향했다.
마침내 역사적인 서울 환도식이 9월 29일 12:00시에 중앙청에서 거행되었다.
한편 서울이 탈환되자 헌병대사령부는 치안유지를 위해 헌병 1개 대대를 편성하여 해군 함정 편으로 인천을 거쳐 10월 1일 서울에 들어와 치안확보를 담당하였다.
4. 미 제8군과 연결 작전
인천상륙작전은 최초 계획에서 상륙부대로 원주까지 탈환하여 북한군의 후방을 차단하려 했으나, 최종적으로 서울과 수원 지구를 탈환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제10군단 주력이 서울을 공략하기 시작한 22일 국도를 따라 영등포지역에서 남진하고 있던 미 제7-31연대는 24일 수원비행장 남쪽 118고지 일대에서 북한군 전차 등 일부 병력과 전투를 벌려 25일 에는 완전히 118고지를 점령하였으며 적은 100여 명의 시체를 남기고 분산 퇴각하였다.
이 작전의 성공으로 25일 22:26분 오산 북쪽으로 북상한 미 제1기병사단 제7기병연대 "린치 특수임무부대"와의 연결을 이루었다.
5.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결과
가. 김종석 음악선생님(작고)의 증언 : "중앙청의 태극기는 우리가 올렸다"
전사의 기록은 미 제1해병연대에 배속된 국군 제2대대 제6중대 제1소대가 9월 27일 미명에 태극기를 지참하고 03:00시에 중앙청을 향해 들어가 별 저항없이 진출하여 06:10분에 태극기를 게양하였다. 이로써 적의 방화로 화염에 휘싸인 채 90일 만에 다시 태극기가 휘날리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다닌 서울 대방동의 성남고등학교 음악 선생님이시던 김종석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다르다. 선생님은 해병첩보부대 요원으로 활동했고 태극무공훈장도 두번이나 받았으나 몇가지 일이 있어 반납하고 말았다고 한다. 그 당시에 내가 뭘로 증명할 방법이 없었지만 실제 매우 용감한 해병대 장교출신이신 점은 명확하다. 우리들 학생들 중에 껄렁껄렁 하는 애들도 김선생님이 교단에 오르면 기가 죽어 고개숙였다.
선생님의 이야기는 본인이 직접 통제하여 태극기를 올렸는데 나중에 들으니 엉뚱한 인원이 다시 또 올렸는지 미군으로부터 훈장을 받았다는 사실을 전해들었지만 그게 뭐 대단한 것도 아닌데 하고 지나쳐 버렸더니 아예 기정 사실화 되었다면서 세상 참 웃긴다고 했다. 실제 태극기를 달고 있는 사진속에 본인이 있다고 했다.
무엇이 진실인지는 나는 모른다. 이제 남은 것은 하늘에 올라가 물어보는 방법 밖에는 없다. 분명한 사실 중에 하나는 전쟁 중에 많은 전투공과에 대한 잘못된 점이 있었다는 것은 지난 20년간 이 업무를 수행하면서 알았다는 것이다.
나. "원통이 고개에 사살된 북한군이 안보인다" "그들 기록에 있는 아군 500명 전사 사실도 모른다"
우리는 인천상륙작에서부터 서울에 진입하는 과정에 미군이나 국군 그리고 북한군의 전투사실에 따라 주요지역은 다 가보았다. 하지만 나는 미군이나 국군도 찾자 못했고 그렇게 엄청나게 죽었다는 북한군의 시신도 못찾았다.
주변의 주민들을 만나 사실을 확인하려 해도 지금 생존해 계신 분들은 대부분 소문만 들었지 잘 모른다. 그런데 그 소문도 소탕작전하는 국군이나 미군의 못된 짓(부녀자 몸수색, 또는 일부의 못된 짓)은 잘 말하는데 어찌된 일인지 죽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이일대에 별로 없다.
우리는 주변의 화장터골이나 약수터 등 구릉지대는 다 탐사했고 철마산능선은 남북으로 연하여 계양산까지 다 탐사했으나 찾지를 못했다.
소련 군사고문단장 라주바예프의 6.25전쟁 보고서에 보면 그들의 제109땅크연대가 1950. 7월 4일부터 한강을 도하하여 인천으로 진출하면서 부평지역에서 우리 병력을 500명 사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제2권 19P)
하지만 우리전사에는 그런 기록이 없다. 도대체 무엇이 진실인지 의아하다. 더욱이 지역 주민들도 보지못했다고 하니 그 당시에 죽은 군인들은 쌍방간에 다 수습하여 처리하였다는 것인지 말이다.
초기 전투시에는 우리는 김포비행장을 확보하기 위한 전투로 소사와 오류동 주변의 춘의산, 원미산일대에서 벌어지고 축차적으로 남으로 후퇴하게 되는데, 그렇다고 그들 기록은 다 거짓이라고 하기에도 그렇고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나-1 : 계양산(395M)은 알고 있다?
지내내에서 가장 높은 고지군이 계양산이다. 나는 앞에서도 언급 했듯이 인천지역 주민이 계양산을 언급하였기에 이곳에 대한 현장 탐사와 탐문을 실시하였다.
이미 지역 고지군은 '00년부터 몇차례 실시했지만 지역주민의 제보를 얻기위해 국궁장을 찾았다.
"서춘득(70세, '12)외 다수 : 서춘득 어르신의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가 모두 인민군에게 총살당했다.
본인이 국민학교에 막 들어갔는데 전쟁이 났고 피난을 못가고 있었는데 집안이 망했다. 계산 1동 사무소 앞에 유해가 10여구가 뒹굴고 있었긴 했는데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는 모르고 어린 나이에 그 썩는 냄새와 벌레들이 들끓는 모습이 기억하기도 싫다고 한다.(다수 인원이 긍정)
과거 월미도 앞바다 매몰간 많은 유해가 매장되었다는 이야기 들었다. 철마산 계곡에도 있었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없다.
용종동 일대도 많은 유해가 있었으나 아파트를 건축하면서 다 훼손되어버렸다.
"박수홍(50세, '12) : 일산 고봉산디 성석동에 전투화 등 군인 유해를 목격햇다. 형이 허벅지뼈를 들고 다니며 징을 치곤했다.
계양산성 북원간 일부 유품과 유해가 나왔다는 이야기가 있다(다수 긍정)
그 당시에 계양산 남쪽 공동묘지 일대에 무연고 묘에 대한 개장공고가 붙어있었다. 그리고 어느 용역기관에서 시굴도 있었는데 실제 묘지에서 탄피와 파편이 일부나온 것이 사실로 확인 되었다.
그렇다면 혹시 이 부평일대에 전사한 신원미상의 군인들이 이곳으로 옮겨져 묻혀있다고 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전쟁터 인근에 공동묘지에는 많은 유해가 묻혀졌다는 것을 우린 확인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심증은 명확한데 물증, 다시 말해 이곳이다라는 확증이 없이는 그 많은 묘를 다 발굴해 볼 수는 없는 상황이다.
다. 비행장 주변 고지군에서 사살된 북한군은 활주로에 묻혔다?"
인천상륙작전 성공에 이어 유엔군이 가장 빨리 찾고 싶은 것이 김포비행장과 수원비행장이었다. 이곳을 이용하여 병력과 전투장비를 신속히 투입할 수 있기 대문이다.
따라서 초기 전투시에도 공항에서 전투가 치열했고 우리가 반격작전간에도 치열했다. 거의 대대병력이 숨져간 곳인데 우리는유해를 찾지 못했다.
그러나 평창 방아다리골 할머니 한 분이 결정적 제보를 해왔다. 수도사단에 입대하여 전사한 "고 이춘풍 일병"이 남편이시다. 서울 화곡동이 집이였고 시집와서 얼마안돼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평생을 홀로 사신 분이다
"내가 18살에 시집와서 바로 전쟁이 났고 지금의 강서구청 주변 야산과 공황에 시신이 많아서 직접 부역에 가서 묻었어요"
"그럼 혹시 언제쯤 묻으셨는지 기억나시나요?"
"전쟁 나던 해에 7~8월는 북한군이 와 있는데 부역을 나오라고 하는데 집집마다 몇명씩 나오라고 해요. 완장차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인솛해서 갔는데 지금 공황이야. 거기 갔더니 다른 동네에서도 사람들이 왔는데 많이도 모였어요"
"공항에는 콘크리트나 아스팔트인데 시신이 그 위에 있었나요?"
"아냐, 그때는 비행장이 지금보다 좁았어요. 남쪽으로는 논이 상당히 크게 있는데 주로 그곳 일대에 다 있었는데 죽은지 좀 되어서 시꺼멓게 보이는데 다 깜둥인줄 알았어요. 그걸 들것같은 곳으로 담아서 들어다 논고랑속에 밀어넣고 흙을 덮는거야"
"얼마나 그렇게 묻었나요?"
"우리 일행이 묻은 것만 해도 상당해요. 북한군은 대충묻고 국군은 잘 묻어주었어요"
"북한군인지 국군인지 어떻게 아셨어요?"
"복장을 보면 바로 알아요"
그런가 하면 국군이 반격으로 올라왔을 때에도 경찰의 통제를 받아 시신을 묻으러 다녔다고 하셨다. 공황에 가니 북한군이 너부러져 있고 지금 강서구청 앞산에도 올라가니 군데군데 죽은 시신이 많아서 여기저기 포탄구덩이에 다 밀어넣고 덮어버렸다고 한다.
이런 제보에 따라 공항에 가서 확인결과 지금의 4개의 활주로는 당시는 2개였다고 한다. 지금 남쪽으로 있는 2개 활주로가 전쟁이후에 만들어진 것이고 당시에 다 논이나 밭이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논이 그대로 일부 남아 있다.
그러나 지금 어디에서도 유해를 발굴하기란 쉽지가 않다.
라. 김포일대에 국군 전사자를 목격한 분을 찾습니다!"
고촌지역이나 장기지구 온유산 일대, 마송지역, 월곶 오리정 일대에 웬만한 구릉성 고지들은 다 올라 다니며 전투흔적을 ㅏㅈ으려 했으나 대부분 지역개발에 훼손되어 찾기가 힘들었다.
"갑짝스레 사라진 북한군과 완장찬 사람들"
고촌 일대는 옥녀봉부터 부왕산, 보름산, 전호산 등을 탐사결과 미군이 들어온 것은 알고 있는 분들이 있으나 어디서 전투가 있었는지는 잘 모르고 있었다. 그 당시는 북한군이 갑작스레 한밤중에 다 사라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국군을 보았다는 분들도 별로 없다. 도대체 전사에는 이런저런 내용이 있는데 어이하여 목격자가 없을까?
한가지 가늠할 수 있는 것은 이곳 일대가 대부분 개발붐이 벌어져 아파트가 세워져 땅값이 천정부지로 뛰어오르고 있다는 지역들이다.
초기 전투에서는 월곶과 오리정 일대에서 많은 전투 또는 군인이 이동하는 모습을 보았다는 제보를 상당수 만났었다. 그러나 반격 작전간에는 보았다는 주민이 솔직히 별로 없다. 이유는 뭘까?
조심스레 접근하는 나의 셈법은 맞다 틀리다를 떠나 무척이나 아픈 마음이 들었다. 그건 처음에는 놀라움에서 그리고 마지막부에서는 살아야했기에 그럴 수 밖에 없다는 안타까움이 들었다. 다름이 아니라 분명 적군이 있었고 많은 피해를 받았음에도 받았다고 말하지 못하는 세상이 아쉽다는 뜻이다.
물론 동네에 오래동안 사신 분이 별로 안계신다는 것도 이유가 된다. 그러나 이야기를 하다보면 괜히 말하여 무슨 피해를 볼까봐하는 의구심이 더많다. 그것은 그때에 손가락질 문화에 당했고 또 당하게 했던 기억들이 남아있어서다.
마. "오류 IC 일대(궁동, 오류동, 천왕동 일대 고지군, 하안동 구름산-도덕산군)에도 적군을 못찾았다"
지금 궁동에서 올라사면 능선이 나오는데 이 능선을 타면 김포공항까지 간다. 이곳이 초기 전투시에 아군이 후퇴하고 때로는 역습을 하면서 사용한 능선이다. 이 곳에 올라서면 개인호도 있고 다수의 유품도 있었다.
원각사란 절에서 올라서 와룡산 능선에서 1구의 유해도 찾았다. '07년도의 일이다. 탐문과정에 이곳에 오신 지역주민 한 분이 제보를 해서 이루어졌다.
"제보자 권회원(76세, '07)" : 처음 전쟁 때는 15살인가 되었는데 피난을 못가서 집에 있었다. 그래서 북한군이 왔는데 지금 온수역부근에 논에 국군 시체가 즐비했다. 그걸 동네 어른들이 부역으로 다 처리했는데 논골에 집어넣기도 하고 뭐 동네 개들이 물어뜯어서 물고 다니기도 하고 그랬다. 그러다 국군이 왔는데 그해 10월인가 나무하러 이곳에 올랐다가 주어서 썩어가는 시체를 보았는데 거의 뼈만 남아가더라. 그래서 나무하러 온 사람끼리 묻었다, 여기쯤 될거다
우리는 제보지역에서 1구를 발굴했고 M1탄 등 여러점의 유품도 발굴했다. 동네 사람들 이야기가 18연대라 한다. 전사에서도 실제 제18연대가 김포공항 방어작전에 참여를 한다.
"어떻게 18연대라는 것을 알고 계세요?"
"아이고 그때에 군인들이 뿔뿔이 흩어져 철수하는지 도망가는지 모르겠지만 여기저기서 서로 "18연대, 18연대"라 부르기도 하고 북한군이 쫒아오는데 정신없이 산을 따라 가더라"
나는 원각사에 어느날 찾아가 동네분들을 절에서 만났다. 연세드신 몇분도 찾아오셨다. 아침에 도착하여 나는 산에 올라서 북으로 걸어서 작동터널과 능고개를 지나 김포공항이 바라보이는 곳까지 탐사했다. 개인호가 100개 남아 있는데 그리 깊게 파이지 않았다.
"거꾸로 철수하는 국군, 그리고 최복수(?) 중령을 보았다"
간단한 음료수를 준비하여 오신분들께 들이고 찾아온 이유를 설명들였다. 여기서 꼭 강조하는 사실은 절대로 피해가 없고 오히려 유해발굴에 도움이 되는 제보는 제보비도 들인다고 안심시키는 일이다.
"혹시 이곳에서 전투하는 장면을 보신 분이 있나요?"
"내가 산에 올라가 보았지요. 푱푱 총알이 날아다니는데 재미 있어서 저 공항이 보이는 곳까지 가서 구경했어요"
"죄송하지만 혹시 그때 나이가 얼마나 되셨는데 무서웠을텐데 혼자 가셨습니까?"
"그때 내나이 14살인데 뭐 다 컷지. 사실 그당시에 이곳은 산골이요. 이미 전쟁도 안났는데 몇몇 동네형들이 돌아다니며 해방군이 온다며 선전도 했어요. 우린 따라다니기도 했지."
"그때는 어떻게 보면 정부조직이 정상적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을 때이니 그럴수도 있습니다. 다른 것은 없으세요?"
"거 사령관인지 뭔지 하는 사람이 죽은 것을 보았어요"
"네? 아니 당시에 공항경비 책임자이신 분이 공항이 피탈되자 자결했다고 전사에 있어요. 그걸 정말 보셨습니까?"
"내가 그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는데 우리가 산 위에 올라가 있을 때에 군인도 3명인가 같이 있었어요. 그런데 밑에서 부르는 소리가 나는데 대답을 안해요. 아마 북한군이 부르는 것으로 생각했는지 고개를 숙이라하여 숙였는데 조용해져요. 그래서 얼마 있다 보니까 군인들이 골짜기로 몰려드는데 도망치는 모습도 보이고. 우리도 돌아서 나와 다시 여기 절있는데까지 왔는데 저 밑에 보니까 무슨 군인들이 쌔까맣게 몰려있는 것이 보여요. 도망갈 곳이 없어요. 군인들이 다시 돌아서 왔던 길로 능선을 따라 올라가는데 우리도 몇몇이 따라갔어요. 지금 생각하면 포위가 되어 어쩔수 없었다고 봅니다. 다시 처음 자리까지 왔는데 갑짝스레 바로 밑에서 총소리가 팡팡하고 나는 겁니다. 이제 우리도 죽었다고 엎드려 있는데 조용해요. 군인들이 살살기어서 조금내려가는데 나도 얼마간 따라가 봤어요. 누가 죽어 있어요. 들으니까 대장이 죽었데요."
"그다음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조금 있으니까 전쟁이 언제났는지 모를 정도로 조용해졌고 그래서 군인은 군인끼리 산속으로 떠나가고 우린 능선을 따라 집으로 왔어요. 겁도 없었어요."
지금 오류동의 평강제일교회가 있는 산을 올라서면 전망이 좋다. 그러기에 옛날에 이곳에 공군 특수부대가 있었고 여기서 실미도 탈출 인원에 대한 형집행이 있었던 장소다. 여기서 시작하여 천왕동 뒷산, 광명의 구름산이나 도덕산에 올라가면 개인호가 요소요소에 굴토되어 있는데 특히 도덕산에 올라가면 굉장히 크게 굴토되어 있다. 바로 미군이 점령하였기에 그렇다.
광명 노온사동 방향 밤일 지역으로 들어가 그래도 북한군과 미군을 보았다는 분을 만났다.
"혹시 전쟁당시에 이곳에 사셨으면 군인들이 전사한 것을 본적이 없으신지요?"
"이곳에 미군 탱크가 왔는데 산속에 숨어있던 북한군이 포를 쏘아 탱크가 논바닥에 주저앉고 말았어요. 미군이 탱크에서 나오는데 북한군이 총을 쏴서 2명인가 죽고 몇은 도망쳤는데 나중에 바로 미군이 다시 들어와 시체는 가져갔어요"
하지만 사살되었다는 북한군은 없다. 전사한 국군도 미군도 없다. 미군은 다 거둬갔다고 한다. 도대체 왜 이럴까?
오정구 작동 마을회관에서 20여명의 주민들로부터 제보를 받아보기로 하고 '07년도에 이어 '12년도에 다시 찾아가 보았다.
"소련군을 보았다"
"민은기(80세) : 내가 나이가 좀 어리고 작아서 군대에 안끌려갔어요. 나중에 갔다왔지.
그런데 북한군이라고 왔는데 소련군이 있더라고. 북한군이 막 욕을 하고 그러는데 소련군이 못알아들으니까 함부로해도 몰라. 우리는 신기하니 옆에서 바로보고 있는데 북한군은 신나서 놀리더라고. 그래도 소련군은 히죽히죽 웃더라니까.
여기는 사실 큰전투도 없었다. 국군이 싸우기는 뭘 싸워. 그냥 지나갔고 북한군도 요란스럽게 오지도 않았어요. 북한군이 왔는지도 모르는데 아침에 보니 옆 담장밑에 모여서 웅성거리던데. 나중에 보니까 작동에서 능고개로 올라서 보면 능선이 있는데 지향산 방향으로 북쪽으로 올라가니 개인호가 있고 군인이 몇 죽어 있긴 했는데 열명도 안되는 숫자야.
문제는 전쟁에서는 별로 안죽었는데 지역 빨갱이들이 날치며 툭하면 민간인을 잡아다 죽이고, 특히 이동네에 피난민이 일부 산골짜기에 있었는데 그 사람들 많이 죽였어요. 그냥 야산골짜기에 죽어서 연고자도 없는 사람 시체는 썩어가면서 여우들이 물어뜯고 동네 개들이 산속에 몰려 다니면서 주둥이가 벌겋개 피묻은 상태로 미친개 되어 돌아다니는 때가 그때요."
"김성구(82세) : 나는 전쟁이 나서 대구로 내려갔다가 수도사단으로 들어가 전쟁을 했어요. 오대산에서 중공군을 보았다.
처음에는 김석원 장군이라고 카이져 수염이 멋진 장군이 있는 사단이라 당시에 학생들이 모여들었어요. 나도 친구들하고 그렇게 입대해서 청송어딘가에서 전투를 하다 안강.기계로 가서 전투를 했는데 잘 기억이 안나요. 강원도 어딘지 향로봉이 있는 곳인데 그때는 고성이라 했어요. 그곳에서 전투하다 공비토벌 작전에 참가하여 지리산 일대에 작전을 했고 시체는 오대산에서 중공군 시체를 목격했어요"
"아니 오대산에는 중공군이 안갔는데 혹시 그 누더기같은 옷을 보고 중공군이라 하시는거 아니신지요?"
"우리가 뭘 알아요. 중대장하고 선임자들이 발로 굴리면서 "니가 왜 여기서 죽었냐"고 중얼거리니 알았지"
사. 행주산성 일대와 행주나루터(국사봉, 대덕산, 망월산 등)의 애환
이곳은 초기전투시는 국군의 주 도하장소로 사용되었다. 그런가하면 반격작전간에는 서울을 탈환하기 위한 선발대인 미 제5해병연대가 국군 제1해병대대와 수륙양용차를 이용하여 도하작전을 감행한 곳이다.
지금도 이곳에 가면 행주나루터 푯말이 있는데 1950년도에 주로 이곳에서 바로 앞의 개화산을 보고 건너다 수많은 국군과 민간인이 희생된 곳이다. 어느 제1사단 참전용사는 '50. 6. 26~28일 어간에 2,000여 명이 헤엄을 칠 수도 없고 뒤에서는 북한군이 총을 쏘고 하니 일부는 바로 물로 뛰어들어 죽기도 하고 일부는 탈출을 하다 죽기도 하고 대부분이 머뭇거리다 북한군의 무차별 사격에 다 죽어 모래바닥에 뒹굴러 다니다 강물에 다 떠내려 갔다 한다.
그런가 하면 반격작전간 미 해병대 선발대가 이곳에서 북한군의 기습을로 지금 행주IC 부근 행주외동 방향에서 많은 피해를 입지만 유해는 대부분 수습된 된다.
"그리 많은 북한군 유해는 또 어디로~"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도 미군의 무제한적 항공기 폭격과 포병의 포탄 사격, 특히 네이팜탄이 작열하여 산과 주변에 거의 풀 한포기 없을 정도로 무력화 되면서 그리 많이 죽은 북한군시체는 어디로 갔느냐의 문제이다. 여기서는 수습할 엄두도 못낸 곳인데 행주내동과 외동을 다 돌며 탐문했으나 찾지를 못했다.
외동 노인정에서 10여 명의 어르신들을 만나 중요한 제보를 받았다. 여기저기 있는 시신을 전부 거둬어 여러 곳으로 묻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현장에 갔으나 무슨 창고부지로 변하여 땅을 밀어서 건물을 짓고 있다. 그래서 공사관계자를 만나 물어보니 뭐 나온게 없다고 한다. 여기서 죽은 많은 시신을 당시 동네분들이 들것으로 날라서 한군데 매장했다는 제보는 힘을 잃었다.
"귀신이 출몰한다는 곳이 있다"
그러던중에 누군가 전쟁후에 들어왔는데 귀신이 나온다는 집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 당시는 모두 불타버렸으니 아무것도 없었고 지금 집들은 그 후에 들어온 사람들이 지었는데 아직도 그 집 옆 밭에는 유해가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조심스레 우리는 접근하여 주변을 살피는데 집안에서 누군가 나와 뭐하느냐고 물어서 6.25 전쟁 때에 전사한 군인이나 미군 등을 찾는다고 하니 본인은 잘 모르고 요 집이 지어질 때에 거의 5m는 파내어 그 당시 흔적은 없을 거라고 한다.
나는 명함을 남기고 떠나야 했다
아. 지금 강서구청을 중심으로 그 주변 고지군과 논밭에 널려있던 북한군"
강서구청을 중심으로 동서로 우장산, 봉제산 등 구릉성 야산이 펼쳐진다. 미 해병대가 영등포로 진출하기 위해 반격작전간 '50년 9월에 북한군과 전투를 벌인 곳이다. 6월 전투시에는 김포지구사령부가 후퇴하면서 일시적 전투가 있었지 큰 전투는 없었다. 그러나 9월 전투시는 한강교두보를 주지않으려는 북한군이 축차적으로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하며 최대한 미군의 진출을 둔화시키려 함으로써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곳이다.
지금이야 완전 도시화 되었지만 그 당시는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로 일대가 모두 논이나 밭이였다. 이곳이 미군과 북한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곳으로 실제 산에 올라서면 그렇게 호가 많이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미 앞에서 언급한 적이 있듯이 과거에는 모두 이곳이 화정동일대로 지금 강원 평창 방아다리쉼터에 살고 있는 할머니가 실제 김포공항처럼 시신을 묻은 곳이다. 산에 보면 일반인 묘보다 훨씬 작아보이는 것들이 당시에 묻었던 곳으로 추정이 된다. 그러나 무연고묘라도 확인이 없으면 곤란하다. 개장공고도 해야되는데 이게 많은 예산뿐만 아니라 일정 기간이 지나야 하는데 사실 이곳 일대는 민가에서 근접한 곳으로 그 이후에 다른 연유(예를 들면 어린아이 등무덤)로 생긴 것들이 상당수 있다는 주변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러니 이제 이런 상태에서는 찾기가 어려워졌다. 혹시나 개발이 이루어진다면 몰라도. 그러니 이러한 실태조사를 하여 지도를 만들어 지방자치단체에 배부하고 통제하는 업무가 요구된다고 본다.
자. 연희고지에 유해는 없었다(안산-104고지-56고지), "연세대 안쪽 언더우드박사 기념관동쪽에 흔적은 무엇인가?"
나는 서울의 상징인 연희고지에서 유해를 찾으려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왓다. 신촌 봉원사에서 안산에 오르고 안산에서 다시 서쪽으로 내려서 104고지로 연결되는 능선을 탐사하기도 했다. 또한 연세대에 들어가 좌우측 산의 실태도 조사를 했다. 발굴도 안산 밑에서 2회에 걸쳐 시굴도 했으나 발굴하지 못했다.
여기에는 참전용사로써 타이거여단 유격대 출신인 장기락(94세 '21)님이 살고 계신 곳이기에 실제 증언을 받아 발굴작전을 했다. 용사님은 황해도가 고향인데 전쟁전에 제1사단 소속이었다가 후퇴하면서 낙오처리되었다가 결국 강화도로 탈출하여 유겯대원이 되었다. 나이가 어려서 군에 입대했으나 군적도 없이 군인생할을 했던 분이다.
"장기락님의 증언 : 내가 연백에서 국군이 철수할 때에 낙오가 되어 낙동강 전선으로 밀리고 있던시기에 강화도로 탈출하여 다시 영등포를 거쳐 서울 남대문근처에 왔다. 그런데 군인과 일반사람을 죽이어 지금 힐튼호텔 밑에, 그 당시에 세브란스 병원 밑으로 땅굴같은 방공호가 크게 남산 밑으로 있었는데 가득 차있었다.
지금 남대문 경찰서. 대우빌딩 뒤로 무슨 장관 사택인지 공관인지 괜찮은 집이 있었는데 그 당시는 그렇게 건물이 없었는데 여기도 군인들이 죽어 있었던 것을 본 적이 있다.
전쟁이 끝나고 제대하여 갈 곳이 없어서 지금 봉원사 뒷쪽으로 피난민들이 오두막 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는데 나도 갈 곳이 없으니 여기에 집을 짓고 살게 된 것이 오늘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바로 위가 안산이라 올라가다 보니 시신이 철모, 탄피, 군화 등과 같이 여러군데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우린 유해를 찾지 못하고 금하터널 위로부터 이화여대 안으로 연결되는 능선도 전부 탐사를 해봤다. 여러 동네분들도 만나보았지만 전쟁 직후에는 주변 밭고랑같은 곳이나 야산에 유해가 있었으나 경찰의 통제를 받아 사람들이 들것으로 들어날라 한곳으로 가져갔다고 한다.
"유해발굴은 군인만 하시나요?"
당시에 서울은 사람이 사는 도시가 아니라 유령의 도시로 아무데나 시체가 썩고 있고 죽어있는 사람이 군인인지 민간인지 그것이 어떤 연유로 죽어있는지 조차 누가 관심을 갖는 것은 사치였다고 한다. 당장 먹고 살 것이 부족하고 여기에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을 때는 인민재판을 한답시고 무고한 사람을 죽이더니 수복이 되어서는 한강이남으로 피난가지 안했다고 북한군에 동조자라며 또 이런저런 구실로 사람을 잡아다 못마땅하면 그냥 죽여버리는 아비규환의 시대였다.
"저기 교회 보이죠? 그곳에 군인이 천막을 치고 주변에서 부역자들이라며 잡아다 총을 쏘아 죽여버리면 그걸 끌고 나가 한 곳에 그냥 밀어놓고 묻어버렸어요"
어느해 8월에 서울 서부역에서 우리는 서울역 역사 개관 100주년 기념행사에 유해발굴 사진 및 유품 전시를 한적이 있다. 그런데 한 관람객이 들어와 이곳 저곳을 다 들여다 보고선 나보고 좀 개인적으로 보자고 한다.
"어떤일로 보자고 하셨는지요?"
"유해발굴은 군인만 하시나요?"
"꼭 군인만이 아니더라도 경찰이나 학도병, 미군도 다 포함하여 전쟁에서 전사한... ."
"그래요, 그런데 저기 길 건너 윗쪽에 교회탑이 보이시나요?"
"네 저기 언덕은 아니지만 조금 높은 지대에 교회 말인가요?"
"맞아요, 그곳이 전쟁때는 방공호처럼 크게 파여 있었고 9.28서울 수복시에 군인이 그곳에 천막을 치고 있었어요. 그러면서 어디서 잡아오는지는 모르지만 하나 둘씩 사람을 잡아오면 뭐라고 물어보고 대부분이 총맞고 죽었는데 많이 죽었어요. 내가 당시에 8살이라 밥 얻어 먹으며 다 구경했는데 그 일대에 끌어다 묻었는데 그런 것은 발굴하지 않나요?"
나는 명쾌한 답을 못드리고 말았다. 지금도 그분에게 미안하다... .
"서울 모든 야산에는 피난민 우막이 개딱지처럼 생겨지면서 있던 모든 유해는 훼손 되었다"
하지만 가장 변화가 심했던 것은 서울의 모든 야산에 피난민 촌락이 만들어져 60년대초반까지만 해도 모든 곳을 다 파헤쳐서 움막을짓고 살아야 했기에 보였던 유해들은 모두 훼손처리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 서울의 중지도도 그런 곳의 하나라 한다.
힐튼호텔 서쪽 회현동 노인정에 찾아갔다. 물론 2~3회는 된다. 찾아갈 때마다 새로운 분이 오고 새로운 제보를 구하기도 한다. 나느 여기서 이 경찰서 뒤의 우물이나 그 세브란스 병원 지하땅굴에 얽힌 사연을 들으려 노력했다.
"부상당한 군인을 실고온 트럭이 병원에 들어서는데 북한군이 따라와 그냥 차놓고 도망가 버렸다"
그런데 정말 슬픈 제보를 들었다. 부상당한 군인들이 병원앞에 가득하고 신음소리가 가득한데 또다른 트럭이 부상자를 실고 들어오는데 북한군이 바로 뒤따라 오면서 그대로 놓고 사라져 버렸다 한다. 그럼 그 부상당한 군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바로 서울대병원에서처럼 모두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그 유해는 어지 처리되었는지는 모른단다.
그런가 하면 연세대안의 언더우드박사 기념관 바로 위의 능선에 많은 전투흔적, 개인호가 살아있다. 56고지가 사실 이곳에서 얼마 되지않는 소총유효사거리(300m)안에 있다. 56고지는 사실 흔적도 없다. 개발이 되어버린 것이다. 104고지-56고지-연세대 언더우드박사 기념관 뒤 능선으로 이어진다.
이것은 북한군만이 죽은 것(시체 1,500구 확인된 숫자임)이 아니고우리 해병대이 돌격을 감행해 결국 실패한 곳으로 만흔 희생이 발생했다. 물론 유해를 모두 수습했는지는 확인이 제한된다. 따라서 언젠가는 시굴을 해서 검토해봐야 할 곳이다.
그러다 다행스럽게 2018년도 참전용사 증언록 제작과정에, 당시에 소년병으로 참가한 한 분이 연세대 학생으로서 중요한 증언을 해 왔다.
김정수('37, 소년병) : 전쟁 중에 14살로 소변병에 지원하였다. 당시 증랑교에서 태평양제약회사까지 도로상에 피아 시체가 즐비하게 널부로져 있었다. 종전 후에 '58년도 연세대 재학시절 광복관(정법대학) 뒷산 주변에 국군 시신으로 판단되는 유해를 다수 발견하였으며 일부 노출된 유해는 직접 재매장해 주었다(건물로부터 30~50m이애에 위치)
차. 개미구멍이 소구멍되다(영등포 탈환의 비화 : 일본군 전사 4권 188p)
미 제5해병연대가 한강 도하작전을 준비하던 9월 19일 밤, 우익의 제1해병연대는 영등포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제1해병연대장 풀러는 미 제7-32연대와 교대한 호긴즈 중령의 제1대대로 영등포 서쪽 고지를 점령하고 있는 제5해병연대의 뉴우튼 대대정면으로 이동시키고 다음날 20일 호긴즈 대대로 한강 제방을 따라 공격토록 하였으며, 셔터대대로 하여금 경인국도를 따라 공격케하여 영등포를 협공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제5-뉴우튼 대대는 제1-호긴즈 대대가 나타나지 않아 등촌동 117고지는 교대하고 그 앞 목동교 일원의 안양천 서쪽 제방을 감제하는 80.85고지등을 포기한 상태로 비워둬 버렸다.
다음날 20일, 영등포를 방어하고 있던 북한군 제18사단은 각각 1개 대대로 한강 제방과 경인국도를 따라 맹렬히 진전 역습을 감행해 왔다.
경인국도를 따라 역습을 감행한 북한군 대대는 셔터대대의 포위망 속으로 들어와 결국 300여 명의 시체를 도로상이나 배수로, 진지 전사면등 여기저기 버리고 후퇴해 갔다.
한편 등촌동 117고지 방향으로 공격하던 북한군 대대는 바로 진전의 80. 85고지 등에 미군이 없는 것을 확인하게 되고 오히려 이곳을 점령하여 미군이 공격해 오기를 기다리는 형국이 되어 호긴즈 대대는 이 두 고지를 탈환하는데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뜻밖의 피해를 입게 되었다.
20일 10시경 , 미1해병연대는 안양천의 서쪽 고지로부터 80. 85고지로 진출하여 영등포의 공격 준비를 완료한다. 그런데 우익의 셔터 대대가 경인가도선변에서 때때로 우측 후방에서 사격을 받았다.
원래 이 우측에는 미 제7-32연대 제2대대가 진출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실제 이 대대는 그 보다 더 밑의 지금 광명시 하안동 일대 도덕산 일원에 진출하고 있었고 이 사이에 북한군이 들어온 것이다.무려 그 공간이 4km나 되었다.
이러한 일로 실제 제10군단장 알몬드 장군이 현장에 나타나 안양천 제방의 북한군 방어실태를 확인후에 미 제7사단이 도덕산일대를 확보한 후에 21일 06:30분에 다시 공격토록 하였다.
9월 21일 06:30분, 무려 천팔백발을 퍼붓는 공격준비사격에 이어 좌익인 호긴즈 대대는 안양천 제방을 넘지 못하고 우익인 셔터 대대는 안양천을 도하했으나 강력한 북한군의 저항으로 85명의 피해를 내고 돈좌 되었다.
그러자 좌익의 호깆즈 중령은 적진지를 상세히 관찰결과 영등포 시가 중앙부에는 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예비인 A중대로 텅빈 중앙을 공격토록 하였다. A중대장은 고지 선단의 제방에 3개 소대를 병렬로 세워놓고 일제히 제방을 넘어 물이 허리까지 차는 논을 통과해서 안양천을 단번에 건너 영등포 중앙지대로 진격했다. 이 사이에 중대는 한발의 사격도 받지않았고 영등포 시가지는 죽음의 거리처럼 조용하고 음산했다.
바로우중대는 시가 중심부를 향해 600m 정도 전진하여 중심부인 네거리에 도달한다. 그런데 좌측으로 오기로 되어 있던 B중대이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바로우 대위는 대대장에게 "영등포 시내로 600m진입, 그러나 적도 아군도 보이지않는다"고 보고하자 대대장은 "개의치 말고 계속 전진하라"는 것이였다.
이때서야 바로우 대위는 상황을 판단해 보았다. 그 결과 자기 부대는 북한군의 부대배치 틈 사이로 침투한 것이며, 지금 적의 한가운데에 와 있었다. 일부 장교들이 적의 유인책에 빠졌다고 우려도 하였으나 계속 전진하려는 중대장의 결심은 변함이 없었다. 중대는 매복하고 있다가 서울 방향에서 급히 증원해 오는 수십명의 북한군을 발견하여 격퇴하고, 정오경에는 시내 동쪽 끝에 도달하였다.
이곳에는 10m나 되는 제방이 있고 그 위에 경부국도가 동서로 달리고 있었다. 중대는 이 제방을 점령했다. 길이가 150m가 되고 제방 측면에는 많은 2인용 호가 연결되어 있었다. 주변에는 북한군의 탄약고도 있고 구청,약품창고같은 건물들이 늘어져 있고 여의도 비행장도 내려다 보였다.
중대는 진지를 구축하면서 북한군이 오기를 기다렸으나 좀처럼 나타나지 않고 있다 오후 늦게부터 간간히 공격를 해와 격퇴하고 탄약고를 폭파하여 원자운같은 구름운으로 중대의 위치를 대대에 알리려 노력햇다. 저녁때가 되자 5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공격해 왔다. 하지만 로켓트포 사수들의 분전으로 2대가 파괴되고 적은 도주하고 말았다.
그러나 야간이 오면서 항공지원을 요청했으나 어둠으로 곤란하다는 상황에서 북한군이 네번이나 공격을 감행했으나 모두 물리쳣고 이제 탄약이 고갈되어 있는 마당에 북한군의 마지막 5번째 공격이 진행되려는 찰라 북한군 장교가 "이번이 최후의 공격이다"라고 목청을 높이는 순간 중대의 웨브 하사가 용감하게 숨어들어가 훈시중인 적 지휘관을 저격했다. 그리고 적의 공격은 함성으로 끝났다.
날이 밝고 진전을 확인 결과 북한군은 철수했고 275구의 시체가 버려져 있고 50정 이상의 화기가 흩어져 있었다. 미 제1해병연대는 22일 아침, 영등포를 소탕하고 한강변에 진출햇다.
영등포에서 저항한 북한군은 제18사단의 일부와 제9사단 87연대였다. 북한군의 영등포 방어는 "바로우 중대의 시내 중심 잠입으로, 개미구멍 하나로 제방이 무너지듯 붕괴되었다. 하지만 북한군의 저항은 강렬했다.
- 그러나 우린 한 한구의 미군 유해나 북한군 시신을 찾지 못했다 -
6. 소련 군사고문단장 라주바예프의 보고서
보고서에는 한강 도하와 영등포 부근전투 직전의 상황에 대해,적은 서울치안연대와 제78보병연대 예하 2개 대대가 한강선 방어에 나섰으며 안산선 전면을 따라서는 제18보병사단이 방어선을 구축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서울방어선 전투를 하기전의 안양천 서안에서의 기록이 미흡하다. 우리 전사에 300명의 적을 사살 했다는 미 제1해병연대가 진출하고 있는 오류IC 일대의 기록은 없다.
9월 18일 전차를 앞세워 서울 방면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다고 하면서 행주나루에서의 미군의 도하작전은 언급이 없다.(제1권 382~383P).
보고서에는 서울에서 가장 치열한 격전이 있었던 연희고지, 아니면 안산(연대뒤산)일대의 전투에 대해서는 대략 우리 전사와 내용은 일치하는데 공산군이 받은 피해(우리 전사에는 1,500구 시체가 뒹굴고 있다고 기록)나 우리에게 입힌 피해현황은 없이 계속적으로 공격에 실패한 아군이 도시에 네이팜탄 공격을 시작했고, 서울에 대한 대규모 공중공격을 시작했다고 기록하고 서울 방어를 하던 제18사단이 산악을 이용하여 철수 하면서 아군이 23일 한강을 도하하였다고 한다.
또한 보고서에는 서울에서 격렬한 전투가 9월 28일까지 계속되었고 9월 28일 밤이 되어서야 서울을 방어하던 조선 인민군이 서울을 포기하고 동북쪽으로 후퇴하였다고 한다.
인천상륙작전에 관하여는 월미도에서는 섬의 수비대가 전원 전멸되었다고 기록하고 인천시가지에서도 9월 16일 독립육전연대 예하 대대와 2개 포병중대 병력이 전원 전사하였다고 기록한다.)제1권 381~382P) 그런데 이 일대에서 그런 제보를 받지도 못했고 유해를 찾지도 못했다. 모두 피난으로 그 순간 현장을 보지못했다 하더라도 9.28 서울수복후에 들어와서 분명 목격했을거라 본다. 방아다리 할머니가 그걸 증명하고 있다.
7. 민간인 피해 실태(한울 출판, 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실태보고서 인용)
가. 서울 서빙고 사건
1950년 6월 전쟁 발발 직후에 당시 서울에는 일반범을 수감하는 서대문형무소와 군인을 수감하는 마포형무소가 있었다. 6월 28일 인민군이 서울에 진주하여 서대문형무소 수감인원은 모도 석방되었다. 그러나 ㅏ포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인원은 약 200명이 정부가 대전으로 내려가기 직전에 서빙고 뒷산에서 기관총으로 처형하고 시신을 한 줄씩 묶은 뒤 무거운 돌을 매달아 서빙고 앞 강물에 수장했다고 한다.
인민군이 진주하여 이후에 약 40명은 수습해서 가매장을 했다는 것이다.
나. 서대문 형무소 피해 사건
1950. 12. 18일 주한 미국대사관이 작성해 일본 도쿄 주재 미극동군사령부에보낸 기밀문서에 다르면 , '50. 12. 16일 경찰이 서대문 형무소 수감자 34명을 트럭에 태워 영국군 제29연대 관할지역에 들어와 구덩이를 파고 무릎을 꿇게하여 총으로 사살했다는 것이다. 차후에 구덩이를 파헤쳤을 때에 34명만이 아니라 수백명의 시체가 있었다 한다.
당시 '50. 12. 19일 미 국무부가 주한 미국대사에게 보낸 문서에는 한국정부가 수용시설의 부족을 이유로 사형선고를 받은 391명중에 242명을 처형했다는 내용이 잇었다 한다.
다. 서울 마포구 미군폭격
190 9. 6일 오후 4시경, 7일 새벽 4시경에 미군 폭격기가 민가, 병원, 학교, 극장 등 무차별 폭격으로 주민 100여 명이 사상당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 보고서에 대해 지적할 문제점은 주로 모두가 가해자는 국군이나 경찰, 아니면 미군으로 되어있다. 하지만 간과해서는 안되는 상황이 북한군이 들어와 무고한 양민들을 인민재판 형식으로 때려죽이고 대창으로 찔러 죽인 내용은 없다.
특히 북한군이 유엔군의 반격으로 다시 38선 이북으로 밀려 올라갈 때에 저지른, 예를 들어 구례경찰서 유치장에 기름을 붓고 불질러 생사람이 타죽는 사실 등 전혀 언급이 없다는 것이다.
서울에서도 우익인사를 발가벗겨 트럭 뒤에 매달고 질질 끌고 다니며 피가 터져서 죽게 하던(내가 격은 6.25젅쟁하의 서울 90일, 이현희 저) 그런 내용은 없다. 물론 서울이 수복되면서 군경도 북한군에 동조한 소위 부역자와 빨개이들을 남녀 가릴 것 없이 홀딱 벗겨 트럭에 매달아 끌고 간다던지, 아니면 줄로 엮어서 산으로 데려가 즉결처형 해버린 경우가 많았다는 것도 솔직히 나 개인으로서는 사실이다 본다.
지금 신촌의 여러 대학들이 많은데 북한군에 들어간 의용군 중에는 여기 출신들이 많았고 여자도 마찬가지며 중학생도 한0고등 그 주변 일대가 많았다는 것이 참 그렇다. 이건 지역 주민들이 들려준 제보에 특히 연0전문과 이0여대가 대다수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