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씨앗을 파종했다. 오랜만에 오순도순 좋은 시간이었다. 앉아서 쉬시라 해도 ‘내 몸뚱아리는 내가 알아서 할랑께 신경쓰지 말라’는 아부지와 또 한 번 실갱이가 붙었다. ㅋ
평생 젊은이로 살 줄 알았던 아버지가 기력도 예전 같지 않고 매사 불안 불안하다. 그냥 감독만 하시라 해도 소용없다.
밥상머리에서 떡국에 넣어 먹는 김 이야기가 나왔다. “대량생산이 어려웠는지 우리 어렸을 적에는 김이 귀했던 것 같다”라고 동생이 운을 떼자, 어머니는 “뭔! 그까짓 김이 귀했것냐? 돈이 귀했제”
어머니는 궁한 형편에 온 식구 떡국에 들어갈 김을 딱 10장만 구입하셨었단다. 차례상에 떡국도 간신히 올리면서 김가루까지 챙기는 것은 사치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나는 실제 그랬는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일까? 생각해보면 어릴 적 소풍이나 운동회 때 김밥을 싸간 기억이 없다. 도시락도 못 챙기는 형편에 김밥은 언감생심 꿈이라도 꿔볼까마는 어쩌다 친구네 놀러 갔을 때 그 고소한 김을 쟁반에 싸아두고 먹거나 반찬이 아닌 맨입으로 물고 다니던 녀석들을 보고선 그게 가능한일인가 싶었다.
아부지 왈! “지금이사 묵을 것이 넘처난디, 그때는 궁한 시대라서 그랑가 밥 한 덩이 내 줄람서 더럽게 지랄하고 그랬제! 없는 집 아덜이 빼꼴(위)이 크다고”....... 필경, 없는 집 애들이라 함은 우리 4남매를 지칭하는 말이였을테고.. ㅜ
봄이 오기 전 보리, 조, 수수 등을 담아둔 뒤주가 바닥나면 우리 4남매는 품앗으러 나간 아부지 엄니 따라가 세것(세참)으로 끼니를 때웠다. 다음 끼니를 기약할 수 없으니 ‘허천나게’ 먹었나 보다.
여간 눈치 보이는 게 아니지만 눈두렁에 엉덩이 붙이고 먹었던 그 맛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우리 형제 밥 먹는 모습을 보고 한마디씩 거들었다. “오메! 우째야 쓰까? 우째야 쓰까? 허천났는가부다 아그들이 허천나게 묵네!”
잘할 자신 있응께 더 큰데(광주) 가서 공부하고 싶다던 동네에서 영특하다 소문난 아들래미, 세상물정 모르고 쓰잘데기 없는 소리 한다고 매질하던 우리 아부지도 속에 있는 말을 꺼내 놓으시는 걸 보면 이제 정말 많이 늙으셨나보다. 그 깐깐한 자존심에 미안하다 말 한마디 못하시던 양반이?
‘너는 사주팔자에 쇠를 만져야 돈을 번께 세상이 어쩌고 저쩌고 어먼데 머리 돌리지 말고 기술 배우라’며 자식의 꿈을 이해하려 하지 않던 아부지, 성질머리 괴팍해 자식들한테 원망 꾀나 받던 우리 아부지, 올해는 부디 더 건강하시길 바란다.
아부지 맘을 더 많이 이해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듯 싶은데, 아부지와 함께 할 시간이 그닥 길게 남지 않은 것 같은 생각에 맘 한구석이 허하다. 그럼에도 아부지의 한마디로 인해 지난날 우리 가족을 지독하게 옥죄던 상처들로부터 한발 나아간 것 같아 어느 때보다 따스한 설 명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