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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25일(사순절 두 번째 주일)
마가복음 4:1~20
결실하는 신앙인이 되려면
하늘사랑교회 주일예배 설교문
본문 접맥 적 주제 설교
*설교 주제: 시험을 이기고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는 자는 풍성한 결실을 보게 된다.
*설교 목적: 우리가 결실하는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 시험을 이기고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야 한다.
why?
기독교에 관한 소설도 썼지만, 정작 본인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않고 세상을 떠난 원로 소설가가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이분 생전에 함께 식사하며 “기독교에 대한 글도 쓰시고, 성경도 많이 아시면서 왜 믿지는 않으십니까?”라고 여쭈어보았다고 합니다.
그분 대답은 “왜 예수가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야 하지? 결혼한 여인에게서 태어나 구세주가 되었다고 해도 될 텐데 굳이 처녀가 예수를 낳았다고 억지를 부리니,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였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에 대한 완강한 자기 틀을 갖고 있었고, 끝까지 그 틀을 버리지 못해 믿음의 사람이 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내가 만든 틀 속에 갇히시지 않습니다. 자신의 사고 틀을 깨 버리면, 무에서 유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처녀의 몸에서 아이가 태어나게 하셨다는 것을 왜 못 믿겠습니까?
자신의 틀을 깨려면 하나님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합니다. 말씀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기도 하고, 우물에 빠지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고 있습니까?
-출처: 이재철, 「성숙자반」 (홍성사, 2014); 「생명의 삶」 (두란노, 2017년 2월호), 37에서 재인용.
예수께서는 바닷가에서 여러 가지 비유로 큰 무리를 가르치셨습니다. 마가복음 4장에는 예수께서 사용하신 몇 가지 비유가 등장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에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등장합니다. 이어서 21절 이하에서는 ‘등불의 비유’가, 26절 이하에서는 ‘스스로 자라나는 씨 비유’가, 30절 이하에서는 ‘겨자씨 비유’가 등장합니다. 마가복음 4장에 등장하는 4개의 비유는 모두 하나님 나라의 속성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씨 뿌리는 비유’는 다른 모든 비유를 해석하는 첫걸음이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13절에서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냐?”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이렇습니다.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 때, 어떤 씨는 길가에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새들이 와서 그 씨를 먹어 버렸습니다.
또 어떤 씨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졌습니다. 흙이 얕아서 그곳에는 곧 싹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해가 뜨자 그 싹은 말라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뿌리가 없어서 결국 시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또 어떤 씨는 가시 떨기나무에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가시가 자라 그 기운을 막아버려서 결실하지 못했습니다. 또 다른 씨는 좋은 땅에 떨어져 싹이 나고 잘 자라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들었던 제자들은 그 비유의 참뜻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혼자 계실 때, 열두 제자들과 그 곁에 있던 사람들은 그 비유의 참뜻이 무엇인지를 예수님께 물어보았습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11~12절)”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이 비유의 참뜻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너희”는 예수님의 해석을 듣기 위해 모인 소수의 사람과 열두 제자를 가리킵니다. 또 “외인”은 예수님의 비유를 들었지만, 그 참뜻을 알지 못했던 많은 무리를 가리킵니다.
예수께서는 많은 무리가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고 이 말씀을 비유로 하셨습니다. 심지어 예수께서는 많은 무리가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이 이상하게 들리지 않습니까? 왜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게 하셨을까요? 오히려 더 많은 사람이 보고 깨달아서 돌이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요?
우리가 이러한 궁금증을 갖게 된 것은 매우 합당합니다. 우리가 평상시 알던 예수님의 모습과는 다른 모습을 이 말씀 속에서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12절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학자들 간에 두 가지 견해가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번역된 모든 한글 성경에서는 12절을 목적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무리가 알지 못하게 하고, 깨닫지 못하게 해서 돌이키지 못하게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고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신학자들은 12절을 목적이 아닌 결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12절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기도 합니다.
“예수가 모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신 결과, 그들은 완악하게 되고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된다(권영주,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리스-로마 전기 장르로 다시 읽는 마가복음」, 감은사, 2023, 134~145).”
12절을 결과적으로 해석하면, 외인들이 심판을 받는 이유는 그들이 비유의 말씀에 제대로 반응하지도 않았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권영주, 134~135).
12절 말씀은 예수께서 이사야 6장 9절과 10절을 인용하신 말씀입니다.
이사야는 유다의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웃시야 왕이 죽기 몇 해 전에, 디글랏 빌레셀은 앗시리아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서진 정책을 펴서 팔레스타인 지역을 위협하였습니다.
웃시야 왕은 탁월한 군사적 지도력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웃시야 왕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유다의 왕이 된 요담은 존재감이 약한 사람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당시 유대 백성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만홀히 여겼으며, 하나님을 멀리했습니다(사 1:4). 고관들은 패역하였고(사 1:23), 백성들은 우상을 섬겼으며(사 2:8), 교만하였습니다(사 3:16).
무엇보다 그들은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멸시하였습니다(사 5:24).
이러한 이유로, 하나님은 이사야를 선지자로 보내 그들에게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장차 이사야 선지자가 유다 백성을 향해 예언해야 했던 메시지는 심판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심판의 메시지를 듣는 유다 백성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셔서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유다 백성이 심판의 메시지를 듣고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염려하셨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문제의 원인은 유다 백성의 죄였고, 하나님은 그 죄에 대해서 심판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심은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 다음과 같이 질문했습니다. “주여 어느 때까지입니까?”
이에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습니다.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사 6:11~12).”
하나님의 심판은 분명하지만, 정한 때까지만 진행될 것입니다. 심판의 때가 지나가면, 그 후에는 유다 백성에게 회복의 때가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망 중에서도 희망을 말씀하십니다.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13절).”
하나님의 강조점은 “때”였습니다. 지금은 비록 여호와께서 유다 백성을 징계하실 때입니다. 그러나 그 징계의 때가 끝나면 여호와께서 약속하신 회복의 때가 임할 것입니다.
비유의 목적은 감추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비유는 감추인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사용됩니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그릇 아래에 두거나 침대 밑에 숨겨 두기 위함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21절).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그것을 높은 등잔대 위에 두어 어두운 방 전체를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께서는 비유를 통해 숨겨진 것을 드러내고, 감추인 것을 나타내려 하셨습니다(22절).
비록 예수님의 비유를 들었던 많은 사람이 곧바로 그 비유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그들 중에도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했던 비유의 참뜻을 깨닫는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 성도 중에도 이와 비슷한 영적인 상태가 있지 않겠습니까? 지금 당장은 하나님 말씀의 참뜻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하더라도, 언젠가는 영적인 귀가 열려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깨닫고 돌아와 죄 사함을 얻게 되지 않겠습니까?
what?
그렇다면 과연 예수님께서 오늘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참뜻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해서 네 가지 다양한 마음 밭을 우리에게 소개해 주고 계십니다. 길가 밭, 돌밭, 가시떨기 밭, 좋은 땅이 그것입니다. 씨를 뿌리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씨를 뿌리러 오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뿌리시는 씨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인 말씀을 이 세상에 뿌리심으로 결실의 기쁨을 누리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 모두가 풍성한 결실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말씀을 들었던 사람 중에 대부분 사람은 풍성한 결실을 볼 수 없었습니다. 적어도 확률적으로만 보면 75%의 사람들은 결실을 볼 수 없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결실하는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로, 우리가 결실하는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는 시험을 이겨야 합니다.
과연 말씀이 길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혹 어떤 이는 말씀을 들었을 때 사탄이 즉시 와서 그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아 가기도 합니다. 여기서 사탄은 영적인 대적을 의미합니다.
훗날 베드로는 우리에게 영적인 대적이 있음을 상기시켜 주면서 우리에게 근신할 것을 권면하였습니다. 그는 우리를 대적하는 사탄을 가리켜 “마치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 우는 사자”와 같다고 묘사하였습니다(벧전 5:8).
사탄이 누군가의 마음에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은 영적인 시험을 의미합니다. 분명 우리가 결실하는 신앙인이 되지 못하도록 영적인 방해가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영적인 시험을 이겨야 합니다.
과연 말씀이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혹 어떤 이는 말씀을 들었을 때 즉시 기쁨으로 받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고 맙니다.
돌밭에서 강조되고 있는 점은 환난이나 박해와 같은 외부적인 시험입니다. 우리도 말씀으로 인해 환난이나 박해와 같은 외부적인 시험을 당하게 되면 곧 기쁨을 잊어버리고, 곧 넘어지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외부적인 시험을 이겨야 합니다.
과연 말씀이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을 무엇을 의미합니까? 혹 어떤 이는 말씀을 듣기는 하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마가복음 10장에 나타난 한 부자 청년입니다.
이 부자 청년은 예수님께 달려 나올 정도로 열정이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를 만큼 예수님께 관심도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지켰던 사람이었습니다.
이처럼 경건하고,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 자신이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의 한 가지 부족한 것을 지적해 주셨는데, 그것은 바로 재물에 대한 욕심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10:2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부자 청년은 재물이 많은 이유로 이 말씀으로 인해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결국, 이 부자 청년은 재물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해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우리 안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내부적인 시험을 이겨야 합니다.
우리가 결실하는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는 이 모든 시험을 이겨야 합니다. 우리는 사탄의 영적인 시험을 이겨야 하고, 환난과 핍박이라고 하는 외부적인 시험을 이겨야 하며, 염려와 유혹과 욕심이라고 하는 내부적인 시험도 이겨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가 결실하는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는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과연 말씀이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을 무엇을 의미합니까? 혹 어떤 이는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게 됩니다. 이는 말씀을 듣는 자세와 수용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제2차 전도 여행 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전도를 마치고, 베뢰아 지역으로 옮겨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때 바울은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이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의 말씀을 듣는 자세가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더 좋았던 것입니다.
게다가 베뢰아 사람들은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받아들이는 수용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뢰아 사람 중에 믿는 사람이 많이 생겨났고, 그중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도 적지 않았습니다.
데살로니가에 있던 유대인들은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베뢰아에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바울이 베뢰아에서 더는 말씀을 전할 수 없게 되자, 바울을 아꼈던 형제들이 바울을 아덴으로 보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결실하는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는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풍성한 결실을 맺게 될 것입니다.
how?
서서평 선교사는 1880년 독일 비스바덴에서 태어났습니다. 세 살 때 엄마는 미국에 혼자 이민을 가고, 그녀는 조부모의 손에서 컸습니다. 아홉 살 때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주소가 적힌 쪽지 하나를 들고 엄마를 찾아 미국으로 떠납니다.
그녀는 미국에서 간호학교를 졸업하고, 성경학교를 거쳐 선교사가 됩니다. 서서평 선교사는 1912년 미국 남 장로교의 파송을 받아 우리나라에 간호선교사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녀의 나이가 서른두 살이었습니다.
그녀는 22년간 전라남도 광주에 있는 제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며 병원과 주일학교를 섬겼습니다. 14명의 양자와 양녀를 입양해서 키웠습니다. 38명의 과부를 자립시켰습니다. 소외당한 사람들, 특히 결핵 환자들과 한센병 환자들을 도왔습니다.
그렇게 22년간 헌신하다가 쉰네 살에 풍토병과 과로와 영양실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가 남긴 유품으로는 담요 한 장과 동전 몇 개, 강냉이 두 홉이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시신마저 의학 연구용으로 기증하도록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녀가 죽은 후, 사람들은 그녀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서서평 선교사는 조선 땅에 와서 조선 사람의 친구로 산 것이 아니다. 그녀는 조선 사람으로 살았다.”
서서평 선교사가 죽었을 때, 광주에서는 최초로 ‘광주시민장’을 치러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장례식이 있던 날, 광주 시민과 특별히 한센병 환자들이 장례 행렬을 따르며, “어머니, 어머니”하고 오열을 했습니다. 이것을 한 일간지에서 이렇게 다뤘습니다. “서서평 선교사는 생전에 다시 태어난 예수로 불리던 사람이다.”
그녀가 이렇게 살 수 있었던 이유는 복음 때문이었습니다. 복음이 그녀를 불러내어 이역만리 타국에서 복음의 삶, 십자가의 삶을 살게 했습니다.
-출처: 오경석, 「복음이란 무엇인가?」 (좋은 씨앗, 2023); 「생명의 삶 플러스」 (두란노, 2024년 1월호), 213에서 재인용.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결실하는 신앙인이 되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결실하는 신앙인이 되려면 먼저 시험을 이겨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인 시험, 외부적인 시험, 내부적인 시험을 이겨야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가 결실하는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는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즉, 말씀을 듣는 자세와 그것을 받아들이는 수용성이 중요한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마음 밭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이겨내야 할 시험은 무엇입니까? 또 여러분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세는 어떻습니까?
저는 여러분이 좋은 땅에 뿌려진 씨처럼,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풍성한 결실을 맺는 신앙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더욱 많은 사람에게 전해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