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선정전(宣政殿)
- 선정문
선정문은 창덕궁의 편전인 선정전으로 들어가는 남쪽문이다.
‘선정(宣政)’은 정치와 가르침[政敎]을 널리 떨친다[宣揚]는 뜻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1층 목조문 맞배지붕 홑처마로,
모로단청과 서까래와 구조들이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이다.
선정전의 정문인 선정문
좌, 우 협문은 신하들이 다니고, 가운데는 왕이 다니는 어칸(御間)으로 좌, 우 칸과 단차를 두었다.
솟을대문으로 높이 역시 좌, 우 신하들이 다니는 칸보다 높여 그 위에 홍살을 놓았다.
현판은 어칸의 외부에 걸려있다.
1405년(태종5년) 창덕쿵 창건 때 편전 조계청(朝啓廳)을 세우면서 건립되었다.
1461년(세조7년) 12월에 세조가 조계청을 선정전으로 바꾸면서 조계청 정문의 이름 역시 선정문으로 개칭했다.
임진왜때 불탄 것을 1608년(광해 원년)에 복구했으나,
인조반정 때 다시 화재를 입어 1647년(인조 25년)에 재건했다.
선정문 뒤의 선정전
- 선정전 (宣政殿, 보물 제814호)
선정전(宣政殿)은 임금의 일상적인 집무 공간인 편전으로 인정전과 동편으로 나란히 붙어있다.
선정전은 우리나라 궁궐 중에서 유일한 청기와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다포계(多包系) 양식의 팔작지붕이다.
밖으로 뻗친 부재끝이 날카로운 조선 후기 지붕의 특징을 보여준다.
건물 안은 탁 트였고 천장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단청과,
용마루에는 금동으로 만든 대한제국 황실 문양인 오얏꽃을 장식했다.
선정전의 청기와
-선정전 지붕에 잡상이 없다 ?
선정전은,
조선 후기 건축의 특징인 지붕이 밖으로 뻗쳐 부재끝이 날카롭다
선정전 어좌와 일월오봉
건물 안이 탁 트이고 붉은 배흘림 기둥과 천장의 단청이 화려하다
인정전과 같이 왕실 의식을 위한 공간을 '정전'이라 하고,
선정전처럼 임금의 공식 업무를 위한 집무실을 편전(便殿)이라 한다.
왕은 평복차림으로 이곳에서 국사를 돌봤다.
신하들과 나랏일을 의논하고 학문을 토론하며, 신하나 유생, 종친을 불러 시험을 치르고,
중국과 일본의 사신을 만났다.
또한 왕비나 왕족들과 크고 작은 연회를 열었다.
이곳에서 임금과 신하들이 정치를 논하는 것을 ‘상참(常參)’이라고 하는데,
상참에 참여할 수 있는 신하는 3품의 당상관 이상이다.
선정전에서 임금과 신하가 국사를 논할 때에는 사관이 왕의 좌우에서 회의내용을 기록했는데,
이를 사초(史草)라고 한다.
사초를 토대로 선왕이 죽은 뒤 새로운 왕이 실록을 편찬하는데 이것이 현재의 조선왕조실록이며,
473년간의 분량이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어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선정전은 인정전과 천랑(행각)으로 연결된다
선정전 천랑(복도)
창덕궁을 비롯 조선왕조의 많은 궁궐이 일제 강점기 전각이 헐리고 그 모습을 잃었다.
예전 동궐도에는 선정전에 천랑이 있다.
왕이 비를 맞지 않고 편전에 들 수 있도록 복도를 만들었다.
그러나 일제는 선정전과 선정문을 잇는 천랑을 없애고 마당에 잔디를 깔고, 문을 유리로 바꿨다.
해방 이후에도 이 상태로 있다가 1997년부터 시작된 복원으로 마당에 잔디를 걷어내고,
선정문에서 선정전에 이르는 길에 천랑(복도)을 복원하였다.
선정전은 상참 등 그 용도가 중요해서인지 창덕궁에 유일하게 현존하는 청기와 지붕으로,
조선 중기 건축재료의 모습을 남기고 있어 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문화재이다.
화재로 여러차례 불에 타 인왕산 아래에 세웠던 인경궁(仁慶宮)의 광정전을 헐어다 중건한
조선중기의 대표적인 아름다운 목조건물이다.
아름다운 선정전과 천랑, 건물과 마당의 규모가 매우 작다
선정전 내부의 화려한 단청 천장
선정전은 그러나 중종의 계비이자 명종의 모후인 문정왕후의 수렴청정(垂簾聽政)으로
조선 중기 역사의 질곡을 함께했다.
수렴청정 8년과 명종 재위 20년 내내 문정왕후와 그녀 소생의 세딸,
그리고 친정 측근인 소윤이 휘두르는 무소불휘한 권력으로 조선왕조는 몰락의 길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