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도에 기독교윤리실천운동(기윤실)이 한국 교회의 사회적 신뢰도를 높일 방안을 찾기 위해 글로벌리서치에 의뢰해 전국 남녀 1천명을 대상으로 전화설문조사를 한 결과 한국 교회를 신뢰한다는 응답자는 18.4%인 반면 불신한다는 비중은 48.3%였다.
한국 교회의 신뢰도 제고를 위해 바뀌어야 하는 것을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42%가 ‘교인과 교회지도자들이 언행일치 면에서 나아져야 한다.’고 응답했다. 뿐만 아니라 날이 갈수록 기독교에 대한 안티가 많아지며 이전보다도 더 거세게 기독교를 공격함으로써 기독교인들은 볼멘소리를 내고 있다.
일각에서는 신뢰도가 떨어지고, 안티가 증가하는 원인으로 ‘적극적인 홍보가 부족하다’ ‘교회가 세상 문화와 너무 동떨어져 있다.’ 등의 원인을 들고 있다. 그래서 그 대안으로 ‘적극적으로 홍보를 해야 한다.’ ‘교회도 문화의 옷을 입어야 한다.’ 등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 원인과 대안이 일리가 있다. 적극적으로 강구할 필요도 있다.
혹자는 ‘기독교는 진리의 종교이기 때문에 지금껏 그래왔다.’고 애써 자위하기도 한다. 그 말도 일리가 있다. 타종교는 인간의 본성을 부정하지 않고 본성을 조금 나아지게 하는 종교이다. 하지만 기독교는 본성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며 사람을 죄인 취급을 하며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새롭게 되지 않으면 멸망 받을 수밖에 없다고 하는 종교이다. 그러기에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은 이해를 못하여 불만을 가지는 면도 없지 않다.
혹자는 매스컴 등에서의 부정적인 보도 탓 때문인 점도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사람은 귀가 얇은 면이 있어 사실 확인도 없이 들은 대로 그냥 믿어버리게 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그 말도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다. 그렇다하더라도 그러한 것들이 주된 원인일까. 성경은 무어라고 말씀할까? 예레미아애가 1장은 이렇게 말씀한다. “시온의 영광이 다 떠나버렸다....환란과 시련을 당한 예루살렘이 옛날의 즐거웠던 일들을 회상하는구나. 그 백성이 원수의 손아귀에 들어가도 그를 돕는 자가 없으니 그의 대적들이 그를 보고 그가 멸망당한 것을 비웃고 있네. 예루살렘이 크게 범죄하여 더렵혀지고 말았다. 전에 그를 높이던 자가 그의 벌거벗은 수치를 보고 그를 멸시하니 그가 탄식하며 자기 얼굴을 가리는구나.”(6-8)
구약성도들인 유다가 주변국가(세상)의 포로가 되어 환란과 시련과 수치를 당하고 그들로부터 멸시를 당하게 된 원인은 성도들이 범죄하여 더렵혀졌기 때문이라고 말씀한다. 요컨대 하나님의 백성들이 포로가 되는 수치를 당한 원인은 백성으로서 거룩하게 살지 못하고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삶을 살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기독교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조롱과 수치 그리고 공격을 받는 주된 원인은 우리가 거룩하게 살지 못함이다. 하늘의 백성들이 하늘의 백성답게 구별되게 살아가지 못할 때 하나님께서는 대적자들을 보내어 고통을 받게 하시고 조롱과 멸시를 받게 하신 것을 사사기, 예레미아, 이사야, 느헤미아, 사무엘상, 룻기 등의 성경의 곳곳을 통해서 볼 수 있다.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 우리를 대적(징계)하시는 것이다. 그 목적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수치를 당하게 함으로써 회개하고 원래의 자리인 거룩한 삶으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기독교 전체나 개교회 혹은 가정과 개인을 포함한다.
삼손은 이스라엘 최고의 지도자인 사사였음에도 나실인으로서 거룩하게 살지 못하고 들릴라 여인(세상의 유혹)에 빠져 삶으로 인해서 두 눈이 뽑혀 블레셋(세상)사람들 앞에서 재주를 부려야하는 수모와 수치를 당했지 않았던가. 하지만 회개에 이르러 다시 거룩해졌을 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또 다시 나타나 이전에 행한 일보다 더 큰 일을 행했지 않는가.
그렇다면 거룩한 삶은 어떤 삶을 말하는 것일까? 세상 사람들이 흔히 사용하는 세상방식의 삶이 아닌 하나님 방식의 삶, 창조질서에 맞는 삶, 인간 본연의 삶이 아니겠는가. 세상나라의 사람들은 할 수만 있으면 ‘더 많이’, ‘더 높이’를 추구하는 삶이다. 뿐만 아니라 일도 손쉽게 처리하려 한다. 그렇다보니 탐욕의 삶, 비진리의 삶, 부정한 방식의 삶이 예사다. 아니, 그렇게 할 수 없어서 그렇지, 할 수만 있으면 대부분 그렇게 한다. 오히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을 능력으로 여기고 자랑으로 생각한다. 그렇게 하지 못할 때 스스로를 능력 없는 사람으로 여기고 자책까지 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스도인 중에도 그와 똑같은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상당하지 않을까 싶다.
사실 하나님의 거룩한 방식으로 살아가자면 일이 더딜 수도 있고, 일을 성사시킬 수도 없어 손해가 날 수도 있고, 이익을 덜 볼 수도 있다. 그러기에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자면 필연적으로 고난의 삶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의 삶이란 거룩한 삶이고, 고난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역설적이게도 세상 사람은 그렇지 않는데,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처럼 세상방식의 삶을 살아가면 결국엔 조롱과 수치의 삶으로 바뀐다. 반면 하나님의 약속과 능력을 믿음으로 고난을 견디며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되면 결국엔 영광스러움이 임하게 된다.
“의(하나님의 요구, 하나님의 뜻)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이요.”(마5:10). “주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4:17).
교회에서 이런 설교를 할 때면 80이 다 된 어느 여 집사님은 늘 이렇게 말하곤 한다. “그렇게 하긴 해야 한데요....”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막상 부딪히면 잘 안 된다는 이야기이다. 솔직한 말이다. 믿음이란, 지적으로 혹은 입술로 고백하기는 쉬운데 행동하는 믿음을 갖기란 정말 어렵다. 나 역시도 그렇다. 직장생활을 할 때 집사 시절에는 거룩과 투쟁해본 적이 없이 세상정신, 세상죄악 속에서 살았다. 사실 주일날 교회 출석만 하면 되는 줄로 알았다. 그것조차도 제대로 못했지만. 지금은 늘 투쟁하는 삶을 산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실패와 승리를 반복하고 있다. 몇 년 전에 있었던 우리 가족 치부 하나 드러내야겠다.
내 딸은 교사를 하다 전도사와 결혼을 하였다. 그러다 사위가 강도사가 되어 어느 교회의 부교역자가 되었다. 그런데 고민거리가 생겼다. 사위가 부교역자가 되었으므로 새벽기도도 그 교회로 참석을 해야 하는데 결혼 당시 딸이 근무하는 학교 근처에 집을 얻어 집에서 교회까지 가자면 차로 한 시간 정도가 걸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딸이 교회 가까운 지역으로 내신신청을 내고 먼저 이사를 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발령신청을 내고 보니 경쟁률이 무려 6대 1이라는 것이다. 근무 연수가 얼마 되지 않아 발령이 나지 않을 가능성이 100%라는 것이다. 이제 자칫 딸이 매일 왕복 2시간 이상의 가량의 차를 타고 출퇴근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딸이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차마 말은 하지 않지만 친척이 그 분야에 아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발령부탁을 좀 하면 어떻겠느냐는 것이다.
아내와 나는 서로 죄짓지 않으려고 눈치를 보며 ‘글쎄...’만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다 내가 아내에게 말했다. “내가 딸 때문에 죄 지어야겠네.” 아내에게 전화를 건네받아 딸에게 말했다. “전화해보든지 해라.” 나 역시 차마 전화를 하라고는 못하고 ‘전화해보던지 해라’고 반은 딸에게 책임을 지우면서 말이다.
발령 나는 날, 나는 발령 명단에서 딸 이름을 찾아보았다. 딸 이름은 없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하나님을 찬송했다. 그리고 회개했다. 또한 정의롭게 일한 담당자에게도 멀리서나마 존경을 표했다. 전도사 시절, 서울에서 섬으로 목회하러 내려가면서 살던 아파트를 팔려고 복덕방에 내 놓았다. 며칠 후 연락이 왔다. 그런데 잠시 후 또 다시 전화가 왔다. 아파트 매매 가격을 매매계약서에 줄여서 기입하자는 것이었다. 이유를 묻자 그렇게 해야만 세금을 덜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하고 있으니 그냥 그렇게 하면 된다고 했다. 나는 두 번도 생각하지 않고 말했다. “그냥 그대로 해주십시오. 제가 교회를 다녀서요. 죄송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조금씩 요령이 생긴다. 요령이 무엇인가. 좋은 의미로는 ‘융통성이 있다.’ 등의 의미도 있지만 다른 의미로는 세상방식으로 적당하게 타협하며 살아가는 삶이 아니던가. 사실 목회연륜이 쌓이면 쌓일수록 다른 사람과의 관계 때문에 부득불 요령을 부려야할 일들이 많아진다. 그래도 어떡하겠는가. 우리는 하늘나라 백성으로 살아야 하는 운명인걸. 내 생애에 전도사 시절 때가 가장 믿음의 삶, 거룩한 삶을 산 것 같다.
딸이 중학교 때인가 내가 무슨 일을 처리하면서 믿음으로 하지 않고 세상방식으로 처리하자 그가 이렇게 말했다. “아빠, 믿음이 빵꾸난 것 아니에요?” 아닌 게 아니라 지금도 가끔 빵구가 난다. 가끔만 난다면 그나마 다행이겠지. 그러고 보니 내 딸도 세상 물을 먹더니 실빵꾸가 난 것 같다. 언제 기회 되면 비록 실빵꾸일망정 빨리 떼워라고 말해야겠다. 돈 아깝다고 떼우지 않으면 결국 다 해어져 그 타이어는 사용 받지 못하고 버림받게 되니까.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