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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장 놀라운 진실(眞實)
예상했던 대로 야숙진은 이미 농가를 떠난 듯했다. 그녀가 떠났는지는 확인하지
않았다.
사흘이면 혈도가 풀린다. 이미 닷새가 지난 다음이니 그녀가 남아 있을 리 없다.
그가 굳이 그 농가로 간 것은 그녀가 떠났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를 돌봐주던 노부부가 무사한가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만에 하나라도 혈도가 풀린 그녀가 노부부에게 분풀이라도 한다면 책임은 그에게
있었다. 그리고 그가 그녀를 잘못보았음이 증명되는 것이다. 다행히 노부부는
무사했다.
먼 발치에서 노부부가 무사함을 본 왕승고는 미련없이 발길을 돌려 황하를
따라가고 있는 중이었다.
떠나온 지 너무 오래되었다.
잠시면 될 줄 알았는데 의외에도 시간이 많이 걸리고 너무 많은 사건에
휩쓸렸다.
그가 해야 할 일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없어 보이는 그런 일들로 인해서 그가
해야 할 일이 너무 지체된 것이다.
그런데 그때 왕승고의 눈에 묘한 빛이 드러났다.
둥실둥실 황하의 물결을 차면서 배 한척이 그의 앞으로 다가서고 있었던 것이다.
강을 건너는 도선(渡船)도 어선도 아닌 쾌선(快船). 항해를 하기 위한 배였다.
그리고 그 위에는 왕승고가 잘 아는 사람이 서 있었다. 신력대도 정규. 그가
굳은 얼굴로 강바람에 옷자락을 펄럭이면서 우뚝 서 있었다.
그는 쾌선이 미처 강안에 정박하기도 전에 몸을 날려 사오 장의 거리를 날아
왕승고의 앞에 내려섰다.
『공자!』
『오랜만이군』
『대부인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고생이 많았군. 가지』
왕승고는 고개를 끄덕이곤 가볍게 몸을 날려 배위로 올라갔다.
그것을 보자 정규의 얼굴에 묘한 빛이 떠올랐다.
이런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근황을 묻거나 아니면 뭔가 적당한 말을 하게
된다. 하지만 왕승고는 그러지 않았다. 그저 당연한 곳에 돌아온 것, 어제
나갔다 정해진 시간에 돌아 온 것만 같았다.
『역시…』
그는 암중에 머리를 흔들고는 몸을 날려 선창으로 올랐다.
처얼썩….
정규의 손짓에 따라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삼십명 이상이 탈 수 있는 쾌속선이었으므로 배는 순식간에 강물을 타고서
멀어져갔다.
그 광경을 왕승고가 있던 강변 갈대밭에서 칠팔 장가량 떨어진 곳에서 한 사람이
지켜보고 있음은 정규로서야 미처 알지 못하는 일이었다.
차갑고 날카로운 눈빛.
그 눈의 주인은 바로 야숙진이었다.
그녀는 깊게 미간을 찡그리고 있었다.
『하필이면 배라니…』
그녀는 내심 발을 구르고 있었다. 왕승고는 그녀에게 있어서 매우 특별한
사람이었다. 절대로 놓칠 수 있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수중에 넣어야 할 사람. 그래서 그녀는 혈도가 풀렸음에도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
과연 그녀의 예측대로 그가 나타났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를 맞이하는 배가 나타난 것이다.
『쫓아라. 어디로 가는지 알아내』
그녀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 말과 함께 서너명이 몸을 날려 달리기 시작했다. 바람 같은 신법을 지닌
사람들이지만 과연 쾌속선을 따라갈 수 있을는지는 알 수 없다. 왕승고가 배로
이곳을 벗어날 것임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까닭이다.
『차라리 공격했어야 했는데…』
발을 구른 그녀도 달리기 시작했다.
완벽한 기회를 보고 있었던 것이 잘못이었는지 아닌지는 아무도 알지 못할
일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배는 하류로 흘러내려가고 있었고 그것은 상류로
올라가는 것보다 더 빠르다는 것을 의미했다. 더구나 그 배는 특별히 제작된
쾌속선이었다.
배는 빠르게 멀어져갔고 야숙진의 모습도 사라졌다.
남은 것은 수천 수만년을 묵묵히 흘렀고 앞으로도 그렇게 흘러갈 황하의
굼실거리는 누런 물결뿐….
년(年) 육십오(六十五).
태조 주원장을 따라 공을 세워 태조삼년에 장흥후(長興候)로 봉함을 받고
천오백석(千五百石)의 녹을 받게 되었다.
수많은 공신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갈 때도 그는 무사했다.
태조의 사후, 연왕이 발호하여 정난(靖難)이라 이름하여 군을 일으키자 조정에서
그를 정노대장군으로 삼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정노대장군 경병문.
호호탕탕(浩浩蕩蕩), 삼십만 대군을 휘몰고 북상했지만 급거 출발하여 정작
싸움터에 당도한 것은 십삼만의 병력. 그 병력만으로도 연군(燕軍)에 비해서는
압도적이다.
팔월에 진정(眞定)에 도달한 군은 호타하에 이르러 남북으로 진지를 구축했다.
도독(都督) 서개(徐凱)의 군대는 하간(河間)에 자리하고 반충(潘忠),
양송(楊松)은 막주. 선봉에 선 구천(九千)은 웅현(雄縣)에 자리를 잡고 결전에
대비하였다.
하지만 마침 때는 보름.
팔월 보름이면 바로 중추절(仲秋節)이다.
제대로 싸움을 한 적이 없던 군대는 중추절이라는 것에 해이하여 긴장을 늦추고
진지구축마저 소홀히 했다.
그것을 놓칠 연왕이 아니었다.
그 밤으로 연왕의 군대는 경병문의 선봉군을 급습(急襲)하였고 결과는 선봉
구천이 몰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충등이 그 소식을 듣고 허겁지겁 구원을 하기 위해서 달려왔지만 월양교를
건너다가 물속에 매복한 연군에 의해 대패, 반충과 양송은 사로잡히고 말았다.
한 순간에 막주가 연왕에게 떨어졌다.
정신을 차릴 여가가 없었다.
마치 질풍을 휘모는 듯 연왕의 군대는 신출귀몰 경병문의 군대를 쫓았다.
불과 몇만의 군세로서 몇배가 되는 군대를 가지고 놀아 허둥대는 군대는 오히려
쫓기기에 급급했다. 급해진 경병문의 부장(部將) 장보(張保)등이 연군에
항복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대오를 정돈하지 못한 경병문의 군대는
지리멸렬하여 수없는 시체를 남기고 진정성 안으로 숨어들고 말았다.
정로대장군 경병문의 좌우장군인 이견(李堅)과 녕충등이 그 싸움 한번에 모조리
연군에 사로잡힌바 되었다. 좌우군세가 무너짐은 날개가 꺾인 것과 다름없다.
토벌군인 경병문은 적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성 안으로 숨어들어 농성에
들어가야 하였다.
달이 밝았다.
하지만 문을 닫아걸고 있는 경병문의 마음이 여유로울 수는 없었다. 나이 예순이
넘도록 전장을 넘나들었지만 이토록 허무하게 패퇴한 적은 없었다.
일세의 영명(英名)은 이미 무너졌다.
벌써 나이가 들었는가.
노장(老將)은 쓸쓸히 문루에 서서 자신의 나이를 떠올렸다. 스스로 늙었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지만 이젠 달랐다. 이렇게 무력하게 패퇴하고 말다니….
이젠 느낄 수 있었다.
연왕이 무섭다는 것을 피부로.
그는 앞으로의 싸움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예감할 수 있었지만 이미 싸움의
향방은 그의 손을 떠난 상태였다.
패전의 급보를 접한 조정은 아연실색, 그 후임으로 조국공(曺國公)
이경륭(李景隆)을 임명하였던 까닭이다.
싸움은 그렇게 진행되고 있었다.
* * *
제남.
만금전장의 총호가 있는 곳.
왕승고가 거기에 들어선 것은 화산을 떠난 지 닷새가 흐른 다음이었다.
구대부인은 만금전장의 총호가 아닌 예의 제남외곽에 자리한 장원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린다는 것이 옳지 않을는지도 몰랐다.
그녀는 대청 창가에서 정원을 바라본 채로 등을 보이고 있었으니까. 왕승고가
왔음을 알렸을 것임에도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다녀왔습니다』
왕승고가 그녀를 향해 머리를 숙였다.
조용한 침묵.
『너는 누구냐?』
한참만에 입을 연 구대부인의 물음이다.
누구나 당황할 물음이었다.
그러나 왕승고는 조용히 그녀의 뒤에 서 있을 따름이었다.
『묻지 않느냐? 네가 누구냐고?』
구대부인이 신형을 돌리면서 외쳐 물었다.
안색이 얼음장처럼 굳어 있었다.
『죄송합니다』
왕승고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죄송?』
구대부인이 냉소를 터뜨렸다.
『한낱 계집에게 미쳐서 대사를 버려두고 일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서 죄송?
무엇이? 무엇이 죄송하단 말이냐? 어디 들어보자!』
구대부인이 날카롭게 따져물었다.
왕승고는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누가 무릎을 꿇으라고 했더냐? 넌 대 고려의 왕자다! 선조의 한을 풀고
잃어버린 나라를 찾아야 할 막중한 책임을 진 자가 아무렇게나 무릎을 꿇는단
말이냐? 누가 널 그렇게 가르쳤더냐? 너는…』
구대부인이 격하게 소리쳤다.
『다른 사람이 아닌 어머님의 앞이기 때문입니다』
왕승고가 무릎을 꿇은 채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
『어떤 사람이건간에 어머님 앞에 서면 자식일 뿐입니다』
『…』
구대부인은 일순간에 말이 막혔다.
….
침묵이 두 사람의 사이를 천천히 흘러갔다.
분명히 좁지 않은 대청이다. 하지만 침묵의 무게는 질식할 것처럼 무거웠다.
『일어나거라』
먼저 입을 연 것은 구대부인이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왕승고를 보면서 구대부인은 머리를 저었다. 영롱한
패옥소리가 일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이냐? 너는 세상에 그렇게 알려져선 안될 사람이다. 설마
그걸 모른단 말이냐? 그런데도…』
『본의가 아니었습니다』
왕승고는 나직이 탄식하곤 입을 열었다.
『의선은 제 생명의 은인이셨습니다. 그분이 계시지 않았다면 오늘의 저는 있을
수 없습니다. 의(義)와 신(信)을 알지 못하고 지키지 못한다면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은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구대부인은 머리를 저었다.
『이상과 현실은 다른 것이다. 큰 일을 하는 사람은 때로는 작은 일을 버려야
하는 법도 있다. 작은 것 하나하나를 다 챙기려 한다면 큰일은 하지 못하게
된다. 대범해야 한다! 은혜는 사사로운 것이고 복국의 대업은 모든 것에
우선해야 하는 법이거늘, 설마 너는 일의 경중(輕重)조차 구분하지 못한단
말이더냐?』
『…』
왕승고는 대답하지 않았다.
기실 이러한 일은 생각에 따라 많은 차이가 벌어질 수 있었다.
한쌍의 연인을 두고 말할 때,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일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가치기준이다. 사랑을 앞에놓고 보자면 이 세상에서
사랑보다 더 중한 것은 없으니 나라 또한 그 다음이다. 하지만 나라를 기준으로
놓고 본다면 사랑이야 다음에 또 하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구대부인으로 보자면 이 세상에서 복국보다 우선할 것은 아무것도 없을터였다.
왕승고 또한 복국을 가볍게 보지 않았다.
다만, 그 일이 이렇게 시간을 길게 끌게 될 것은 신이 아닌 그로서도 알지
못했었던 것이니 무슨 할말이 있을까.
더구나 그 일로 인해서 어떤 결과가 파생되었는지는 아직 그는 짐작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정도로 해두는 것이 좋겠소』
문득 조용한 음성이 들려왔다.
『노야?』
구대부인의 얼굴에 놀람이 드러났다.
대청의 문으로 한 사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바로 금곡노야였다.
『여기까지 어떻게?』
『허허허… 내가 만나려 들지 않는다면 이번에도 또 만나지 못할는지도 모를까
봐서…』
가볍게 웃음을 보인 금곡노야는 왕승고를 보았다.
『네가 승고냐?』
『인사드리거라. 전에 말한바 있었던 노야이시다』
『처음 뵙습니다』
『됐다. 공연한 인사치례야 무슨 필요가 있겠느냐? 자자, 우리 앉아서 이야기를
함이 좋을 것 같군』 금곡노야가 왕승고를 보면서 웃었다.
왕승고는 놀란 표정으로 금곡노야를 보았다.
『뜻밖인가?』
금곡노야가 물었다.
『그렇습니다. 노야께서 고려인이실 줄은…』
왕승고의 말은 참으로 놀라운 의미를 담고 있었다.
『같은 민족이지. 조선이나 고려나… 내게는. 하지만 나는 대부인과는 달리
고려나 조선을 구분하고픈 생각은 없다네. 그렇다면 저 멀리 고구려나 신라,
백제인까지 다 다른 민족으로 갈라놓아야 할 것이 아닌가. 같은 피를 이은
대한(大桓)의 후예가 우리 민족이니 작게 보지 말고 크게 봄이 옳다는 것이 내
생각이지』
『그러시면서 왜 저를 도와주셨습니까?』
옆에서 구대부인이 말했다.
『허허… 갑자기 무슨 새삼스러운…』
가볍게 웃은 금곡노야는 정색을 했다.
『왕조(王朝)는 늘 바뀌는 법이지. 다만 그 왕조가 과연 그 민족에게 필요한
왕조인지 아닌지가 다를 뿐이야.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조선은 출발이
잘못되었지. 사대사상(事大思想)을 뿌리로 하였음을 물론이거니와, 왕권을
노리고 형제간에 골육상잔으로 피를 튀기며 그도 모자라 아들이 아버지를
왕위에서 내모는 형국이 아니던가. 건국초기, 나라가 안정화되지 않았다
해도…』
그해 9월, 태조 이성계는 방과에게 전위하고 상왕(上王)으로 물러났다. 그것이야
표면적인 것이고 실제로 전권을 쥔 것은 방원임을 당연한 일이었다.
『이러한 나라를 그대로 두고 볼 수는 없겠지. 천하의 주인이었던 대한의 후예가
광활한 만주벌과 중원을 잃고 한쪽 구석으로 쫓겨가 있는 것도 보기 안타까운
일인데 그나마… 자주성마저 잃어버린다면 그 나라 국민들이 후일 어떻게
변해가겠나? 스스로 자랑스럽기를 포기하는 것은 욕됨을 자처하는 일이야.
그것이 고려를 다시 세우고자 하는 이유라네』
조용히 말을 하는 금곡노야.
그가 중원인이 아니라 고려인이라는, 아니 같은 민족이라는 것은 뜻밖이지만
막상 그를 만나보자 그가 정말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간단치 않은 뜻을 품고 있는 듯하였다. 어머니
구대부인이 그를 존경하고 있음은 어쩌면 당연한 일로 보였다.
『다시… 고려가 설 수 있다고 보십니까?』
왕승고의 물음에 금곡노야가 웃었다.
『물론이지. 고려가 다시 섬은 필연!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일이야. 다만… 그
중요한 축(軸)을 네가 끊어버림으로 인해서 차질이 발생하긴 했지만』
『축을… 끊어버리다니요?』
『아직 말하지 않았던가?』
『말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구대부인의 대답에 금곡노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날 만났더라면 모든 것을 다 알게 되었을 것이고 그런 일도 없었을
터인데, 이것도 다 운명이 아니겠나』
왕승고는 그와 어머니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금곡노야가 입을 열었다.
『이번 화산 무림대회의 이면(裏面)에는 우리 두 사람이 있었다』
왕승고는 그 말을 듣고도 일시지간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알아듣기는 하되, 의미전달이 안되는 것이다.
『북원의 홀가적이 백련교를 수중에 넣고, 또한 그 힘을 이용하여
천하무림대회를 석권하여 강호무림을 지배하고자 하였던 것은 노야께서
계획하셨던 일이다』
옆에서 구대부인이 보충했다.
『…?』
왕승고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듣고도 믿을 수 없는 일이 그의 앞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세상은 참으로 오묘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한 복잡하기 이를데 없었다. 최소한 인간이라 이름하는 동물 아닌
동물의 시각으로 본다면 정말 세상은 복잡한 곳이었다.
과연 보이는 것중 얼마가 진실(眞實)일까.
『뜻밖이겠지만 사실이다. 홀가적은 나의 뜻에 따라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원의 왕족입니다』
왕승고가 금곡노야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 말의 뜻은 자명하다.
원의 왕족이, 대원(大元)의 복국을 꿈꾸는 일대효웅이랄 수 있는 홀가적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하더라도 일개 상인의 뜻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는 것은
정말 믿기 힘든 말인 것이다.
그 말을 믿으라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명이 분열되었듯이 북원도 분열되어 있다. 귀력적(鬼力赤)이 스스로를
달단가한이라 부르며 대한(大汗)의 위를 찬탈하면서 대한의 혈통도 무너졌으니…
그는 교활한 자인지라 암중에 연왕 태를 응원하고 있다. 아마 연왕이 우세하다고
판단된다면 출병(出兵)이라도 해서 그를 도와줄 것이다』
금곡노야는 조용한 가운데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 당세의 비밀을 아주 간단히
설파(說破)해냈다.
『그의 그러한 기회주의적인 움직임을 싫어하는 사람은 당연히 있게 마련이고,
또한 대한의 혈통(血統)을 다시 받들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겠느냐?
홀가적은 바로 그러한 사람들 중 하나이다. 나는 그를 이(利)로서 설득하여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였지. 그것이 또한 그에게 이득이었으니까』
금곡노야의 음성은 조용조용했다.
그러나 그의 크지 않은 음성에서는 정말 대단한 사실들이 거대한 의미로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를 움직여 백련교를 장악하고 그 다음, 무림을 손에 넣고 그 힘으로 현
조정을 뒤엎기라도 하실 의향이셨습니까? 홀가적은 그것을 원했을텐데요』
『그것이 내가 원하는 바이기도 했다』
금곡노야의 말에 왕승고는 잠시 말을 잃었다.
『북원이 다시 서기를 바라십니까? 대 몽고로서?』
희미한 웃음이 금곡노야의 얼굴에 떠올랐다.
『내가 바라는 것은 대한(大桓)의 중원수복(中原收復)이지, 몽고의 다시 섦이
아니다』
『대한의 중원수복…?』
부지중에 그 말을 따라할 수밖에 없었다.
돌아온 그는 너무도 뜻밖의 사실을 듣고 있는 것이다.
금곡노야는 뒷짐을 진 채로 열린 문앞에서 후정(後庭)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뒷모습은 그리 큰 체구가 아님에도 거대해보였다.
『중원은 우리의 땅이지. 그 옛날부터… 아득한 선사(先史)시대에서부터 세상을
조명한다면 천하의 중심은 배달민족(倍達民族). 바로 우리 민족이었다.
천해(天海)에서 비롯한 우리 민족은 천하문명(天下文明)의 개조(開祖)이며
세상의 중심이었다. 알고 있는가?』
그는 물었다.
천하문명의 개조, 세상의 중심.
이제 한쪽 구석에 처박혀 사대주의를 신봉하는 작은 나라가 그 옛날 세상의
중심이었다는건가. 천하문명의 개조라고?
왕승고도 물론 알고 있었다.
선조들이 위대했었음을, 그들이 중국문명의 개조라 일컫는 황제(黃帝)
헌원(軒轅) 이전에 이땅의 주인이었음을 그도 안다.
동서 2만리, 남북 5만리의 광대한 대지 위에서 12개 제후국을 거느린 채
시베리아에 존재했던 한(桓;하느님의 나라)의 대국은 천제(天帝)로 존칭되는
한님(桓因;한인)에 의해 다스려졌으며, 그후 한님의 후손 한웅(桓雄)이
태백산(太白山)에서 신시(神市)를 개설하고 나라를 여니, 그 이름을
배달(倍達)이라 하여 중국에서 삼황(三皇)이라 높이 받들어지는 복희 신농
황제가 모두 그 배달에서 비롯되었으며 요순시대의 뒤를 이어 중국을 지배한
은상(殷商)을 세웠던 것을 그도 아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천하문명의 개조라고 할 수 있을까. 더구나 은상 이전의 일은
어쩌면 아득한 고대(古代)의 전설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그 부분을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
그것을 살펴보자면 전설(傳說)을 더듬어볼 수밖에 없다. 아득한 먼일은
길가메쉬의 전설이, 호머의 이야기가 사실로 증명되었듯이 그렇게 전설속에서
진실은 숨을 쉬고 있기 때문이다.
서양의 역사는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서구학자들은 유럽문화의 모체인 히브리문화(文化)에 영향을 끼친 고대
근동문명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전대미문의 경이(驚異)와 필설(筆舌)로
형용할 수 없는 위대한 업적」이라 칭송한 헤로도투스의 말처럼 세계
최고(最古)의 통일적 고대국가임을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그처럼 감탄해마지 않았던 바빌론의 지혜가 바빌로니아인들보다
훨씬 오래 되었고, 이집트보다 더 오래된 신비의 한 종족으로부터 유래한 것임을
알게 되자 고고학자들은 그들을 수메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그러나 서구문명의 뿌리로 새로이 밝혀낸 수메르민족의 기원(起源)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그들이 마치 땅에서 솟아나오듯 불쑥, 그들의 역사속으로
뛰쳐들어왔기 때문이다.
최초의 법전을 저술하고, 최초의 교육기관을 가졌으며, 최초의 농사 월력을
작성하고, 최초의 서사시를 지어낸 민족, 수십가지의 세계 최초의 기록을 가진
민족. 하늘을 향해 제사를 지내기 위해 최초의 피라미드인 지구랏(Ziggurat)을
건설한 자- 수메르.
그들은 어디에서 왔을까.
「서기전 3,000~4,000년께 거의 동시에 나타난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도,
중국문명과 그후에 나타난 마야와 잉카 문명은 많은 것에서 서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서로 거의 같은 주제와 소재의 신화와 전설을 남겼으며,
그들의 신앙과 민속이 상통하고 있음을 많은 학자들은 시인하고 있다. 특히
메소포타미아와 고대 이집트, 인도문화가 서로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제
와서 부인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졌다. 황하의 채도와 흑도는 터키 아나우의
채도와 타이 반치엔의 흑도와 관계가 있으며 영국의 스톤헨지와 프랑스
카르나크의 열석이 한국의 지석묘와 참성단, 열석(列石). 방형계단식
고구려고분이나 인도네시아의 지석묘, 이스터섬의 거석,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랏과 멕시코와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서로 어떤 하나의 사상(思想)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구대륙과 신대륙의 피라미드는 기능과
양식에 있어서 동일한 것이며 빗살무늬 토기와 세소석기는 동과 서를 한 곳에
묶어 놓고 있다」 라는 후세의 연구를 보라.
세계 4대 문명의 하나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바로 그들, 수메르에게서
유래되었다.
수메르족은 중앙아시아의 어느 고원지대에서 내려온 고산족의 특징을 상당히
많이 지니고 있으며 그들이 높은 산꼭대기에서 신에게 예배(祭天儀式)한 것으로
보아 산악 고원지대에서 내려온 것 같다고 학자들은 추정한다.
피라미드나 지구랏이나 그로부터 비롯한 숱한 문화가 의미하는 것은 하나이다.
하늘에 가까워지고자 하는….
그리고 그들이 고산(高山)에서 평지로 내려왔으므로 지난날처럼 높은 곳에서
하늘에 제사하고자 하는 의미로서 피라미드의 원형인 지구랏이 만들어졌다.
「파나류산(波奈留山) 밑에 한님의 나라가 있으니 천해(天海) 동쪽의 땅이다.
파나류의 나라라고도 하는데 남북이 5만리요, 동서가 2만여리이니 통틀어 말하면
한국(桓國)이요, 갈라서 말하면 비리국(卑離國), 양운국(養雲國),
구막한국(寇莫汗國), 구다천국(句茶川國), 일군국(一群國), 우루국(虞婁國),
객현한국(客賢汗國), 구모액국(句牟額國), 매구여국(賣句餘國),
사납아국(斯納阿國), 선비국(鮮稗國), 수밀이국(須密爾國)이니 합해서 12국이다.
천해는 지금의 북해라 한다…」
한단고기의 삼성기전(三聖記全)의 하편에 있는 위의 구절에서 우리는 수밀이라는
이름을 보게 된다.
수밀이, 수메르… 과연 우연일까.
수메르라는 말의 의미가 하늘나라이며, 그것이 한국(桓國)을 뜻함을
강변(强辯)이라고만 할 수 있는 것일까.
『그렇게 세상을 지배하던 위대한 한국에 변화가 생긴 것은 천하를 휩쓴
대홍수로 인해서였다. 각처의 제후국과의 연락이 끊기고 한웅천왕이 남하하여
신시를 연 것도 그때… 믿기 힘든가?』
거침없이 말을 하던 금곡노야가 문득 물었다.
『위대한 선조들이라는 것은 배웠습니다』
왕승고의 대답은 묘한 여운을 담고 있다.
아는지 모르는지 금곡노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桓)이라는 말이 빛나다, 우두머리라는 뜻을 가지고 있음을 잘 알터… 그
말이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도 알고 있느냐?』
우두머리라는 말은 수메르지방에서는 우루(虞婁;우르)라는 말이 되었으며 우르는
소를 의미한다. 우두머리가 소머리라는 뜻임은 이미 알려져 있거니와, 그
우두머리(으뜸)는 간(干)이 되어 신라대에서는 이서간, 마립간등으로 하여 왕의
뜻이 되었고, 몽고족 여진족등에게서는 칸(汗)이라고 일컬어진다. 어떻게 불리던
의미는 같다는 뜻이다.
북아메리카 인디언이 어머니를 엄마라고 부르며, 남방의 묘족(苗族)이라 불렸던
오늘날 인도지나(印度支那;인도차이나) 지역의 원주민에게 우리와 같은
생활습속이 다수 남아 있음은 또 무엇을 말하는가.
바이칼호에서 비롯한 우리 민족이 자연의 변동, 예컨대 홍수-요순의
치수(治水)와 노아의 방주, 수메르신화에 나오는 노방의 원형과 같은 니시루산의
노방 같은 사건들이 거의 같은 형태로 나타남은 그 당시에 전세계적으로 홍수가
범람했었음을 의미한다-에 따라 길을 나뉘어 흩어져 나라를 이루었고, 그
중심세력은 동아시아에 남아 한국(桓國)을 유지하였으며, 그 지파(支派)가
세계로 흩어져 메소포타미아문명을 이루고 인더스문명을 이루며 황하문명을
이루었다는 것을 그저 우스개소리로 치부하고 말 것인가.
그렇게 넓혀가는 것에 거부감이 든다면 오늘날 중화(中華)라고
자존자대(自尊自大)하는 중국인들의 땅이라는 중원을 예로 들어보자.
산해경(山海經)을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황제(헌원)가 염제(신농)와 싸울 때 염제의 후손인 치우와 과보가 군사를
일으켰다가 죽임을 당했다』
사기(史記) 오제본기에는 황제가 응룡을 시켜서 흉려곡에서 치우를 죽이게
했다고 적고 있다.
한단고기에서는 그 상황을 조금 다르게 기술(記述)한다.
『치우천왕은 구리머리에 쇠이마, 100가지 재주를 가진 인물로서 칼, 창, 활등
여러 병기를 만들었다. 탁록의 괴수인 황제 헌원과 전쟁이 벌어졌을 때
소호금천(少昊金天)을 보내어 헌원을 물리치고 기주(오늘날 熱河와 河北省),
연주 회대의 땅을 다 차지하였다』
규원사화(揆園史話)에서는 「치우천왕이 회대 땅을 지키시다가 불행하게도
돌아가시니 산동성 동평군에 70자나 되는 높은 묘를 쓰고 진한시대까지 10월
묘사를 드렸다」고 되어 있다.
한단고기에는 또 황제헌원이 죽였다고 하는 것이 치우천왕이 아니라, 그 일족인
치우비(蚩尤飛)라고 적고 있다.
어느 쪽의 기록이 맞는가를 굳이 따질 필요는 없다.
훗날 한고조 유방(劉邦)이 출사하면서 사황제(祠黃帝) 제치우(祭蚩尤)라고 하여
황제와 치우를 함께 제사한 것이 무슨 이유에서일까.
사기에서 치우라는 이름이 옛날의 천자(古天子)라고 한 까닭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왜 그토록 오랜 세월이 흐르도록 치우는 중국인들에게 군신(軍神)으로
기림을 받았을까.
치우가 단순히 변방에서 준동하던 그들 말대로의 변방 오랑캐의 군주중
하나였다면, 그들의 소위 춘추필법(春秋筆法)이 그러한 표현들을 남겨둘 수
있었을까?
더구나 천자라니!
근세에 이르러, 서량지(徐亮之)는 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에서
「세석기시대의 문화 부족이 맨 처음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 근방에 살았는데,
그것은 중국의 전설에 있는 염제 신농의 본족(本族)이다」라고 하였음은 또 무슨
의미일까.
백보를 양보하여 누가 이기고 지고를 굳이 따질 필요없이 추론하여 본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기록들이 곳곳에 남아있음은 당시에 우리의 선조가 서방
서장족(西藏族)의 시조라고 하는 황제와 그 지역의 패권을 놓고 격돌했었음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는가.
역사는 이긴 자의 편이다.
후세의 승리자는 중국이다. 그들이 자신들에게 유리하지 않은 기록을 남겨두지
않는 것은 철저하다. 당 태종은 고구려를 공격하였다가 결국 그로 인해 죽게
되었다.
『천하의 힘을 가지고도 작은 고구려군에게 굴복했으니 어찌 된 인가』라고
구당서(舊唐書)와 정관정요(貞觀政要)에서는 적고 있다.
그러나 후일 개찬(改撰)된 신당서에는 「당군이 고구려성 10여개를 빼앗고 4만여
군사를 사살한 반면 당군의 피해는 2,000명의 불과했다」라고 사실을 변조하고
있음을 보면 그들이 어떻게 역사를 기록하는가를 알고도 남음이 있을 터이다.
문득 세찬 돌풍이 정원을 휘감는다.
가을이다. 춥다고는 할 수 없지만 세찬 바람은 나뭇잎들을 온통 뒤흔들며 낙엽을
흩뿌린다. 바람소리가 세차게 정원을 감돌았다.
금곡노야의 눈은 빛나고 있었다.
『위대한 하늘의 민족, 우리 민족의 힘은 단군조선을 거쳐 고구려에
이르기까지는 영락(零落)했다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이 문득 무섭게 빛을 뿜는다.
전혀 노인답지 않은 모습.
『고려를 거쳐 이성계의 조선으로 들어서면서 가히 패망이라고 해도 좋은 길을
걷고 있다. 이대로 둔다면 내 무슨 낯을 들고 지하에 계신 선조를 뵐 수
있겠는가…. 내 한몸 이 목숨이 남아있는 순간까지 그렇게 둘 수는 없는 일…』
금곡노야는 왕승고를 보았다.
『그래서 노부는 자당(慈堂)을 도와 고려를 다시 일으키고자 한다』
『제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면 좀 전에 말씀하신 것은 단순한 고려의 복국이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왕승고의 되물음에 문득 금곡노야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과연 칭찬을 들을 만하군』
그는 구대부인을 돌아보면서 웃었다.
『자신의 아들을 칭찬함은 이 세상의 어떤 어미라도 마찬가지이지만, 대부인마저
그런가 하였더니 명민(明敏)하기 이를데 없어 오히려 칭찬이 부족했던 것 같소』
『과찬의 말씀입니다』
구대부인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금곡노야는 정색을 했다.
『무림이 혼란해지고 연왕과 현 황제가 충돌하게 되면 세상이 어지러워지게
될게야. 북원으로서는 놓칠 수 없는 기회. 그들이 준동하면 명으로서는
북고(北顧)의 괴로움을 당하게 될테지만, 당장은 여력이 없으니 어찌할 것인가.
이제 경병문이 연왕에 패퇴하고 이경륭이 그 뒤를 이었지만 그는 병법을 모르는
자… 요동에서 새 고려가 서도 누구도 간섭할 수가 없는 상황이 초래될 것은
명약관화한 일! 거기에다 다시 불을 붙이게 된다면 이제야말로 사태는 누구도
수습할 수 없는 난국으로 치닫게 될 것이다. 그러면 주원장의 강력한 탄압에
숨을 죽였던 지방 호족(豪族)들도 사방에서 일어나게 될 것이고… 아니, 그렇게
되겠지!』
그는 단정을 했다.
『그렇게 되면 천하는 새 주인을 찾게 될게야. 새 고려는 그 주역이고…』
『노야께서 계획하신 일은 아직까지 어긋난 적이 없었다』
문득 옆에서 구대부인이 말을 받았다.
금곡노야가 웃음을 보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연달아 좌절을 당하고 있지 않소?』
『죄송합니다』
그 말의 뜻을 깨달은 구대부인의 안색이 무거워졌다.
『마음에 둘 필요없소. 책하고자 하는 말이 아니니까. 하지만, 백련교가 무림을
장악하여 그 힘을 바탕으로 천하를 혼란에 빠뜨리고 그 틈에 북원이 밀고 내려와
중원을 축록(逐鹿)의 장으로 만드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 중 하나였는데 참으로
뜻밖의 사태로 인해서 무산되고 말았으니 이는 간단한 일이 아니오. 자칫하면
계획 전체를 변경해야 될는지도 모르게 되었소』
『대안이 있으십니까?』
구대부인이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대안은 승고 본인이 가지고 있소. 그거야말로 결자해지(結者解之)라고나
할까』
『무슨 뜻이신지?』
금곡노야가 왕승고를 보았다.
『노부의 평생은 대한의 위대함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자칫 내 생전에 그 일이 힘들어질지도 모르게 되었다』
『죄송합니다』
그 말의 뜻을 깨달은 왕승고가 고개를 숙였다.
『모르고 한 일을 어찌하겠나? 하지만 대안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야. 홀가적이
하려했던 것을 네가 하면 될테니까 말이야』
『…?』
왕승고와 구대부인이 약속이나 한 듯이 금곡노야를 바라보았다.
『홀가적대신 네가 무림맹주가 되면 된다!』
금곡노야가 잘라 말했다.
금곡노야.
그는 위대한 사람이었다.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구대부인이 입에 침이 마르게
그를 칭찬함은 결코 지나친 것이 아니었다.
일개 상인, 돈만 아는 늙은 부호가 아니었다.
천하를 눈 아래에 두고 오랜 세월을 오로지 위대한 나라의 재건을 위해 살아온,
그야말로 살아있는 전설과 같은 사람이었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모두 깊은 의미가 담겨 있었고, 듣는 사람을 놀라게
하기에 족한 고심한 도리가 숨어 있었다.
『무림맹주라고 하셨습니까?』
『그렇다!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왕승고의 되물음에 금곡노야가 힘있게 답했다.
『무림맹주라면 경륜과 덕망, 무공이 겸비되어야 할 것입니다. 승고가…』
『가능하오』
구대부인이 당황해서 입을 열자, 금곡노야가 그 말을 잘랐다.
『이번 화산대회에서 가장 뛰어난 존재로 부각된 사람은 바로 승고요. 그는
구대문파의 비전절기를 되돌려주었고, 백척간두에 처한 무림을 구하고도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심지어는 자신의 이름조차 알리기를 거부하고 홀연히
떠나버렸소. 그의 이름 포의신검협은 이미 천하무림인들의 우상이며 영웅이 된지
오래요. 더구나 백련교의 위기를 구하여 주면서 교주의 위를 초개(草芥)와 같이
버려 인심을 얻었고 당대 무림의 실력자로 떠오른 개방의 신임방주 협개
사공관과 호형호제하는 사이. 무림맹주감으로서 더이상 무엇을 바랄 수
있겠소?』
장구한 연설(演說).
하지만 숨 쉴 사이 없이 쏟아낸 그의 말에는 실로 놀라운 안목이 숨쉬고 있었다.
그는 왕승고가 화산에 가서 행한 모든 일을 그야말로 실오라기 하나 놓치지 않고
다 꿰뚫어보고 있는 것이다. 옆에서 보았다 해도 그렇게 자세히 알 수 있을까.
상황에는, 정보라는 것에는 정리(整理)라고 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한 법이다.
정리되지 않은 정보는 헝클어진 실타래와 같아서 의미가 없다.
그러나 금곡노야의 말은 논리정연했다.
그것은 그가 왕승고에 대해서 단순히 알고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암중에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니,
실로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고도 모자라는 것이 있다면, 내가 보충해줄터이니 아무런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오』
모자란 것을 보충해서라도 무림맹주를 시켜주겠다. 해야 한다….
일개 상인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관부(官府)에서조차 상호 불간섭이라는 명제하에서 웬만하면 버려두는 곳이
무림이다. 그런데, 그 무림의 맹주를 일개 은퇴한 상인이 간단히 거론하고 있는
것이다.
『한가지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왕승고가 입을 열었다.
『얼마든지!』
『홀가적의 일은, 노야께서 지시하신 일입니까? 아니면 협조하신
일이셨습니까?』
말은 간단하고 질문의 요지도 명료했다.
하지만 그 말을 되새김해본 금곡노야의 안색은 조금 달라졌다. 생각하기에 따라
정말 놀라운 의미가 그 질문속에 숨어 있음을 단숨에 간파해냈기 때문인 것이다.
『이(利)로서 그를 움직였다고 이미 말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는 평범한 말로 그 말을 받았다.
『새로 나라를 건설하실 생각이십니까?』
왕승고가 다시 물었다.
『새로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잊혀졌던 나라의 위대함을 다시 세우는 것일
뿐이다』
『고려가 아님은 분명하군요』
『고려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고려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나라가 설 것인지가 중요하겠지』
『어떤 나라입니까?』
『승고야! 무례하구나!』
구대부인이 나지막이 꾸짖었다.
『괜찮소. 궁금한 것이 있다면 알아야 할테니까』
금곡노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참으로 뜻밖의 상황이다.
중요한 순간에 어쩔 수 없이 몸을 뺐었다. 만약 이렇게 시간이 걸릴 것을
알았다면 아무리 그일지라도 그리 쉽사리 떠나지는 못했을 터였다.
그것을 알기에 돌아오면서도 그 점이 마음에 걸렸었고, 어머니에게 면목이
없었다. 이미 그의 어머니가 어떤 한(恨)을 품고 세상을 살아왔으며, 고려의
복국이라는 대명제를 위해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는 그였던
까닭이다.
하지만, 돌아와서 바로 보게된 금곡노야.
단순히 어머니 구대부인의 후견인이라고 알고있던 그가 설마하니 이런
거물(巨物)일 줄이야!
단순히 거물이라는 말로도 형용하기 어려운 느낌을 그는 가지고 있었다. 아니
느껴진다고 할까? 분명히 큰 체구는 아니지만 60대 후반의 노인답지 않은 체구의
뒤에는 산악(山嶽)과 같이 크고 거대한 그림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대한(大桓)?』
『그렇다』
왕승고의 물음에 금곡노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민족의 위대함을 잇기 위한 나라. 크고 밝은 나라. 하늘의 자손이
다스리는 나라. 더이상 핍박받지 않고 우리 민족이 천하의 주인이 되는… 바로
그러한 나라이니 그 이름은 대한이라고 함이 마땅할 것이다』
그의 음성은 크지 않았지만 그 가운데에는 사람의 심혼(心魂)을 잡아끄는 힘이
있었다. 그것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느낄 수 없는, 그 앞에 서 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그러한 힘이었다.
『아직 의문이 있느냐?』
그가 물었다.
『그 주인은 누굽니까?』
왕승고가 물었다.
『주인?』
『나라가 생긴다면 주인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거야 당연히 노야이시지! 노야말고 누가 또 그러한 자격이 있겠느냐?』
구대부인이 옆에서 미간을 굳힌 채 말했다.
『…』
왕승고와 금곡노야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문득 희미한 웃음이 금곡노야의 얼굴에 떠올랐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
왕승고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있을 따름이었다.
그의 그러함을 보고 금곡노야의 눈에 감탄의 빛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것은
찰나지간, 그는 웃으며 입을 열고 있었다.
『내가 새로운 나라의 주인이 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것은 제가 말할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저로서는 노야가 어떤 분인지 처음
뵙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천하의 주인은 어차피 하늘이 정하는 것… 과연
지금이 때인지, 또 노야께서 그러한 분인지는 시간이 증명하게 되겠지요』
『핫하하하…』
왕승고의 거침없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금곡노야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축하하오! 승고는 정말 대단한 재목이 되어 돌아왔소이다 그려. 정말
대단해…』
한참을 웃은 그는 웃음을 거두자 구대부인을 보면서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직 미거하여…』
『아니오. 농담이 아니외다. 승고는 이미 그 나이를 벗어났소』
정색을 한 그는 왕승고를 보았다.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많은 일들이 일어나지. 하지만 정말
세상의 많은 일들은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서 움직이는 법이다. 그 많은 다수는
그 상층부의 소수 몇에 의해서 움직일 뿐이지. 지금도 연왕과 건문제측의
핵심측근 몇이 이 상황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게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중에는 중심인물로서 세상에 드러나는 사람도 있고 간혹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사람도 있는 법이지. 나는 그러한 사람중 하나로서 족하다. 위대한 나라,
대한을 건설하는 산파(産婆)로서의 소임을 다하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그
주인이 누가 되느냐는… 차후의 일이 되겠지!』
장구한, 어쩌면 세상의 이치를 꿰뚫는 도도한 말. 그러나 그 말에는 해석하기에
따라 많은 여지가 담겨 있음이 또한 사실이었다.
바람이 불고 하늘이 어두웠다.
새털구름이 검게 하늘을 가리고 있다가 세찬 바람에 놀라 이리저리 흩어졌다.
달빛이 구름 사이로 이따금 그 존재를 확인한다.
제남 교외.
예의 장원 후원에 왕승고와 구대부인은 서 있었다.
『정말 대단한 분 아니냐?』
구대부인이 말했다.
그들은 막 금곡노야를 전송한 참이었다.
『그렇군요』
『저 분이 계시는 한 고려는 반드시 다시 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반역자들을 잡아 주리를 틀 수 있게 되겠지!』
그녀의 얼굴에 서리가 맺혔다.
그녀가 말하는 반역자가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는 자명한 일이다.
반역자….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세운 이성계. 바로 그를 말하는 것이다.
『언제 저 분을 만나셨습니까?』
왕승고가 물었다.
『언제? 네게 말해주지 않았더냐? 지난날, 은공이 떠난 다음에 노야를 만나
오늘날의 기업을 이루게 되었었다고…』
『그랬었지요. 하지만 그 시기가 정확히 언제였던지가 궁금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
잠시 묘한 표정으로 왕승고를 보던 구대부인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을
떼었다.
『은공이 떠난 다음,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너를 낳고 새생활에
적응을 하지 못해서… 그때가 가장 어려웠을 때였다. 만약 노야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오늘날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어떻게 만나게 되셨습니까?』
『우연이었다』
우연이었다.
은공 한호국의 주선으로 생전 해보지 않았던 장사를 시작한 다음이다. 그가 있을
때는 당당했지만 그의 소식이 끊어지자 여기저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경험
부족이고 아는 사람도 없는데다가 힘도 없었다.
그런 와중에 심각한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갓 시작한 무역에서 사기를 당해 곤경에 처한 것이다. 모든 것이 일순간에
허망하게 시작도 하지 못하고 무너질 순간이었다.
구대부인은 당시 상계의 대부와 같은 존재인 금곡노야를 찾아가 지원을
요청했었다.
금곡노야는 단신으로 찾아와 담판을 시도하는 구대부인의 담력에 감탄하여
그녀를 도와주었다. 그렇다고 무조건 도와준 것은 아니고 당시 북방과의
교역에서 문제가 되었던 비단을 그녀에게 맡겼었는데 그녀는 그것을 훌륭히
처리하여 그를 놀라게 했다.
금곡노야와의 관계는 그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분과 정말 가까워진 것은 그분이 우리 민족임을 알게 된 다음이었다. 그분도
내가 고려의 왕족임을 알고는 적극적으로 도와주기 시작했지. 그 뒤로 그분은
나를 정말 친딸과 같이 보살펴주었다』
구대부인이 말했다.
왕승고는 그녀가 정말 그를 존경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걱정을 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는 말을 돌렸다.
말을 하는 그의 얼굴은 조용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무거워보였다.
하지만 구대부인은 그의 얼굴빛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저 갓 돌아왔으니
그러려니 할 뿐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느냐. 이미 지난 일이니 이젠 그런 일을 하지 않도록
하려무나. 그로 인해서 얼마나 많은 차질이 발생했느냐?』
『죄송합니다』
왕승고는 수척해진 어머님의 얼굴을 보고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
품에 안겨 자라지 못해서 애틋하달까, 그렇게 진한 정을 느낄 수는 없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그녀를 존경했다. 그녀의 삶은 존경받아 마땅한
것이었다. 그녀를 힘들게 만든 것은 정말 죄스러운 일이었다.
『들어가자, 그간 네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나하나 이 어미에게 이야기해
주려무나』
구대부인이 그의 등을 두드렸다.
며칠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 며칠은 쉬는 며칠이 아니었다.
그간 벌어진 일들을 수렴하고 대책을 듣고 하는 숨가쁘게 바쁜 나날이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늘 물처럼 조용한 왕승고의 얼굴도 조금씩 굳어졌다. 상황은
그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매우 심각한 수준이었던 것이다.
인삼무역을 하던 선단이 난파된 것은 이미 어느 정도 수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돌아온 다음 날 도달한 연락 하나.
그것은 서역과 대상무역을 하던 박서가 보내온 것으로 연락을 받자 구대부인은
마시던 찻잔을 떨어뜨릴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습격(襲擊).
무사히 교역을 마치고 돌아오던 박서가 옥문관(玉門關)에 도달하기 전에
도적떼의 습격을 받아 물품은 물론 운반하던 사람들마저 거의 다 죽고 책임자인
박서와 측근 몇만이 겨우 돌아오고 있다는 연락.
왕승고는 어머니 구대부인의 입술이 새파랗게 질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박서 일행이 당도했다.
참혹하였다.
그간 대강 치료는 하고 옷도 갈아입고 한 모양이지만 조금 비대한 체구인 그는
한쪽 팔이 없어졌고 얼굴도 반쯤은 흰천으로 친친 동여맨 상태였다.
그는 말도 타지 못하고 마차에 실려서 왔다. 하지만 그는 마차에서 구르듯 내려
구대부인의 앞에 부복했다.
『죽여주십시오!』
그의 첫마디였다.
『천랑단(天狼團)이라고?』
『그렇습니다. 악귀와 같은 놈들입니다. 놈들은 우리 일행이 대규모 상거래를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기다렸던 것 같습니다.
호위무사들에서부터 짐을 나르던 짐꾼들까지 모두 다 죽었습니다. 저만
신변호위들이 목숨을 바쳐 호위해준 덕에 이렇게 욕된 목숨을 부지하여…』
박서가 꿇어앉은 채 머리를 숙였다.
출발할 때의 인원은 마흔일곱. 그리고 현지에서 조달한 인원이 여든명. 모두
백스물일곱이라는 대규모의 인원이었다. 낙타만도 이백마리가 줄을 서는 근래에
들어 가장 큰 규모의 교역이었다.
그런데 돌아온 것은 박서를 비롯한 일곱명뿐이고 그나마 성한 사람은
둘뿐이었다.
『천랑단이라면 대과벽(大戈壁;타클라마칸사막)에서 일어나 기승을 떨치고
있다는 바로 그 도적떼냐?』
『그렇습니다』
『아무리 그렇기로 우리 호위들이 그렇게 무참히 당했더란 말이냐?』
『매복을 하고 있어서 기선을 제압당했고…』
말을 하던 박서가 문득 몸을 떨었다. 당시의 상황이 생각나는 듯했다.
『놈들의 숫자가 엄청났습니다. 야밤에 기습을 당해서 정확히 알지는
못하겠습니다만… 느끼기로 천명쯤은 되는 것 같았습니다』
『천…』
구대부인이 아연해서 말끝을 흐린다.
중과부적(衆寡不敵)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몰살을 한단 말인가?
그녀가 딸려보낸 호위무사들은 오로순행조의 고수들이었다. 결코 일개 도적떼가
만만히 볼 수 있는 실력은 아니었고 만에 하나라도 자신의 몸은 지킬 수 있는
사람들이었었다.
그런데….
『천랑단은 예사 도적떼가 아닙니다. 그들은 사막의 제왕으로 군림하고 있으며
천랑단의 단주인 천랑왕(天狼王) 구아특(鳩亞特)은 서역까지 그 이름이 알려진
일대고수라고 합니다』
『으음…』
구대부인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들의 본거지가 어딘지 아시오?』
그때 왕승고가 입을 열었다.
『천랑단의 본거지는 비밀입니다. 그들은 사막의 늑대와 같이 신출귀몰하여
누구도 사막에서는 그들을 건드리지 못합니다』
박서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무릎을 꿇고서 대답하는 것마저 힘든지 친친 동여맨 이마의 천에서 피고름이
진땀과 함께 흘러내렸다.
『돌아가 쉬도록 하시오』
왕승고가 말했다.
그 말을 듣고도 박서는 움직이지 않았다.
구대부인의 말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왕승고는 박서를 쉬도록 조치하고는 망연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어머니
구대부인을 보며 물었다.
정말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개성을 떠난 선단이 침몰한 것은 어렵더라도 견딜 수 있는 타격이었다. 그만한
타격은 견딜만한 힘이 만금전장에는 있었다.
하지만 전쟁이 시작되면서 엄청난 자금이 성난 고래가 물을 빨아 들이듯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것은 자금의 운용이 아주 빡빡한 것을 의미했다. 그런데
그 와중에다 다시 대상(隊商)이 약탈을 당했다는 것은 심각한 상황이 도래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에 다름이 아니었다.
『현재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다. 사천의 강표두에게 소금거래를 지시해두었지만
단시일 내에는 이번 손실을 만회할 수가 없을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구대부인이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손실만회가 아니라, 당장 필요한 자금을 어떻게 조달하느냐이다. 지난번
인삼건은 노야께 기대어 일단 막았지만… 또 다시 이런 일을…』
『이번 교역으로 입은 손실이 얼마쯤 됩니까?』
구대부인은 왕승고의 질문에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인삼무역에서의 손해가 은자 5백만, 이번 일에서의 손해가 대충 잡아도 은자
2천만은 넘을 것 같다』
어지간한 왕승고의 눈에서도 놀람이 차올랐다.
은자 2천만냥?
은 한냥에 쌀이 대략 두가마이던 시절이다.
상상도 할 수 없는 거금(巨金)이었다.
『한번의 교역에서 그런 엄청난 금액을 거래할 수 있습니까?』
『이런 규모의 교역은 흔치 않다. 이번에는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서 특별히
움직였었다』
구대부인은 말을 맺지 못하고 입술을 물었다.
흔들리고 있다….
왕승고는 어머니 구대부인, 그 철의 여인이 흔들리고 있음을 알아볼 수 있었다.
『견뎌낼 수 있습니까?』
『평상시라면… 하지만 지금은 장담할 수 없구나. 사천에서의 소금거래로 잠시
버틸 수야 있겠지만 그걸로는 급한 불을 끄는 것일 뿐, 파국(破局)을 막으려면
모든 지출을 중단하고 전장의 업무마저 대폭 줄여야만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구대부인은 다시 입술을 물었다.
『봉황비상의 계를 중단해야만 한다』
탕!
갑자기 그녀가 탁자를 치면서 일어났다.
『그럴 수는 없다! 어떻게해서 지금까지 왔는데, 어떻게 온 기회인데…』
그녀가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패옥소리가 비명처럼 요란하게 울렸다.
『노야께 도움을 청할 순 없습니까?』
『아무리 노야라 할지라도… 힘들다. 이미 지난번에 도움을 받았고 아마 그분도
지금은 그럴만한 여력이 없을 것이다』
『억지로라도 버틸 수는 있겠습니까?』
『…?』
문득 묘한 눈길로 구대부인은 왕승고를 보았다.
『무슨 의미냐?』
그녀의 물음에는 의미가 있었다.
영민(英敏)한 아들임을 안다.
이런 일이 버틸 수 있는데까지 버틴다고 해서 해결될 것이 아님을 알터이다.
그럼에도 그런 질문을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다른 뜻이 있을터.
『두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왕승고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두가지?』
『예, 하나는 천랑단을 찾아가서 가져간 것을 되찾아 오는 것입니다』
『천랑단을 찾아간단 말이냐?』
일순, 어이없다는 듯이 구대부인이 반문했다.
『그렇습니다. 잃어버린 것을 찾아올 수 있다면 모든 것이 해결되겠지요』
『음…』
구대부인은 나직이 신음한다.
말은 옳다.
하지만 이런 일이 말로만 해결될 것이 아님을 그녀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상대는 정말 너무도 먼 곳에 있다.
게다가 막강했다.
오로순행조중의 서로(西路)의 고수들이 거의 다 출동했음에도 그러한 타격을
받았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누가 가서 그것을 찾아온단 말이냐?』
『제가 가겠습니다』
『네가?』
구대부인이 놀란 얼굴로 왕승고를 보았다.
『봉황비상의 계를 연기할 수 없다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안된다!』
구대부인은 말을 잘랐다.
『상대는 천이나 된다. 박서의 말을 종합해보면, 그들은 평범한 도적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쪽에서도 그 숫자에 상응한 인원이 가야만 하는데 지금은 그럴
여력이 없다. 더구나 너는 천금의 몸. 만약 그런 곳으로 갔다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천추지한(千秋之恨)이 될 것이다』
왕승고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이미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는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그는 말을 하려는 구대부인의 말을 막으려는 듯이 정색을 했다.
『군주가 되려는 자가, 나라를 되찾으려는 자가 스스로의 보신(保身)만을
생각하고 안전한 곳에 웅크리고 있기만 한다면 누가 그를 따르겠습니까?
창업(創業)을 한 군주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다 뒤로 물러나 있지 않았었습니다.
왕건 태조께서도 당연히 그러셨습니다』
『그건 그렇지만…』
도도한 그의 말에 구대부인은 말끝을 흐렸다.
그러던 그녀의 눈이 빛났다.
『좀전에 너는 두 가지가 있다고 했었는데, 다른 하나는 무엇이냐?』
『조금 다른 문제입니다만, 보물찾기를 하는 것입니다』
『보물찾기?』
의아한 구대부인과는 대조적으로 왕승고의 얼굴에는 미미한 웃음이 감돌았다.
『말씀드렸었지요, 북원의 공주라는 야숙진이 뭘 원했던 것인지…』
『그 무덤의 기록 말이냐?』
갑자기 구대부인의 안색이 달라졌다.
「홀필열의 장보(藏寶)를 찾을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대업을 이루는 데 있어 결정적인 힘을 얻을 수 있으리라!」
그녀가 그러한 결론을 도출해내는 데에는 찰나지간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 쉽기만 한 것일까.
『홀필열의 장보를 얻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닐 것이다. 많은 준비를 해야 할
것이고 발굴에 필요한 인원도 상당히 많이 필요할 것이다. 더구나…』
『번거로운 절차는 필요 없습니다』
왕승고가 잘라 말했다.
『발굴이란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할 때 필요한 일입니다. 다행히 저는
그 내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이 많으면 남의 눈을 끌어서 오히려 좋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내부를 확인하고 장보를 운반할 인원만 있으면 됩니다』
그의 눈빛이 싸늘히 빛을 뿜었다.
『그리고 그곳이 의외로 대막(大漠)과 멀지 않으니, 기회가 닿는다면 천랑왕을
만나볼 수도 있겠지요』
『무, 무슨 소리를 하는게냐?』
구대부인의 안색이 돌변했다.
『장보를 찾는 것이 아니라 천랑단을 찾아가겠다는 것이냐?』
『기회가 닿는다면 만나볼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불가(不可)하다!』
구대부인이 강하게 말을 잘랐다.
『모험을 할 수는 없다. 너는 막중한 책임을 진 몸, 네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고려복국의 대업은 만사휴의(萬事休矣)가 되고 만다는 것을 아직도 모른단
말이냐?』
『이미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만약 제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것도 하늘의
뜻이겠지요. 위험이 두려워서 웅크리고만 있으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왕승고는 구대부인의 손을 잡았다.
『…』
구대부인은 물끄러미 왕승고를 보았다.
컸구나.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장군부에서 엄마를 찾다가 잠든 꼬마도, 중독되어 참혹했던 모습의 그도
아니었다. 잇단 환난(患難)을 겪으면서 그는 이미 달라져 있었던 것이다.
미미한 주름살이 그녀의 얼굴에 나타났다. 눈가에서 입가로, 얼굴 전체로
번져가는 그 주름은 웃음이란 의미로 환하게 자리했다.
『내일?』
경악한 표정이 구대부인의 얼굴에 떠올랐다.
『결정을 한 이상, 지체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도 그렇지, 준비도 해야하고… 인원을 모으자면 어떻게 그런…』
『이미 준비는 다 되어 있습니다』
『준비가 되다니?』
구대부인이 놀라 물었다.
『지난 며칠간 쉬면서 필요한 인원은 준비해두었습니다. 나머지 인원은 발굴이
끝난 다음에 연락을 하면 그때 운반을 하기 위해서 지원하면 됩니다』
『…』
구대부인은 어이없는 빛으로 왕승고를 보았다.
철이 없다고 생각했다가, 사라지면 또 걱정이 되어 무릎이 닳도록 부처님
전(前)에 꿇고 절을 하면서 무사귀환을 빌었었다. 그리고 돌아온 그를 보자
안도하여 야단을 치면서도 컸다고 생각을 하긴 했다.
하지만 대체 언제 그런 일을 했단 말인가.
그가 없는 사이에 벌어진 일을 스스로 수습하기에도 바쁜 시간이었었다.
『정위장과 필요한 인원 몇과 함께 출발하겠습니다』
『…』
문득, 구대부인은 가슴 한쪽이 그윽이 차오는 것을 느낀다.
사고무친(四顧無親).
일국의 왕비로서 영화를 누리던 몸이 나라잃고 남편마저 잃었다. 그로부터 홀로
서야했고 밤마다 한(恨)을 곱씹어야만 하였었다.
그렇게 보낸 긴긴 세월동안 한번도 이런 느낌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든든하다고 해야할까?
자식이 있으므로 해서, 그 자식이 미덥다는 느낌이 이렇게 벅찬 것으로 다가올
줄이야.
달빛이 밝다.
어디선가 풀벌레의 울음소리가 고즈넉이 들려온다. 저 소리를 정겹게 들어본
것이 얼마전일까.
구대부인은 발밑에서 조용히 즈려지는 풀잎이 눕는 감촉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조심해야 한다』
『이번에는 염려하시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래다오』
구대부인은 옆에 선 왕승고를 보았다.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충분히 컸다. 아버지인 우왕보다 더 큰 체구. 언제 이렇게
컸을까.
그녀의 상념을 깬 것은 왕승고의 물음이다.
『요동에서의 일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여진, 말갈 등의 부족을 움직이고 있는 중이다. 명이나 조선놈들이 눈치를
채지 못하게 해야 하니까. 일단 양쪽 다 발등에 불이 떨어져서 그곳까지는
돌아볼 여가가 없긴 하다만…』
『조선에서의 실권자는 이방원이 되었더군요?』
『바보들이 실기(失機)하여 결국 방원이란 백정놈이 그렇게 올라섰구나』
그녀의 눈빛에 싸늘히 서리가 맺혔다.
『하지만 결코 쉽게 자리를 잡게 두지 않겠다. 제놈들이 스스로 싸우다 지쳐
망하게 하고야 말테니까』
그녀의 붉은 입술에서는 한이 토해지는 듯했다.
후일 조선조의 태종이 된 이방원, 그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아마도 잠을 이루기
쉽지 않았으리라.
….
잠시 침묵이 두 사람의 주변을 감돌아 흘렀다.
『내일 떠나려면 일찍 자야 하지 않겠느냐? 노야께 인사도 드려야 할테고…』
『예』
답을 하지만 뭔가 미심한 구석이 있다. 『내게 물어볼 것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무공?』
얼떨떨한 빛이 구대부인의 얼굴에 떠올랐다.
『갑자기 그건 왜?』 『문득 궁금해서입니다. 언제부터 무공을 배우셨길래
그처럼 높은 무공을 지니고 계시는 것인지…』
『필요해서 호신무공(護身武功)을 좀 배웠을 따름이다. 무슨 높은 무공…』
그녀가 웃으며 머리를 저었다.
『무공도 노야에게서 배우셨습니까?』
흠칫, 그녀가 왕승고를 보았다.
『노야가 무공을 지니고 있다고 누가 그러더냐?』
『아닙니까?』
왕승고가 물었다.
『아니, 글쎄 그러고 보니 모르겠구나. 워낙 못하는 일이 없으신 분이니… 내가
몸이 약해 허덕이는걸 보고 사람을 보내 무공을 가르쳐주시긴 했는데. 그것이
노야의 무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교두(敎頭)의 무공이라고만
생각했었지』
『그 무공이…!』
문득, 왕승고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리고 그는 한걸음을 움직여 구대부인의 앞을 막아서며 앞을 보았다.
『무슨 일이냐?』
『누가 있습니다』
왕승고가 낮게 말하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누군지 나서라』
그가 앞으로 한걸음 나서면서 낮게 소리쳤다.
화원, 어둠 속에서 흑의에 복면을 하여 어둠과 동화된 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왕승고의 전신에서 소리없이 무형의 기운이 일어났다.
그를 본 구대부인이 말했다.
『적이 아니다』
『부인을 뵙습니다』
흑의복면인이 구대부인의 앞에 와서 공수(拱手)해 보였다.
『무슨 일이지요? 사명존자(司命尊者)?』
『노야께서 부인을 뵙기 원하십니다』
『지금… 말인가요?』
『내일 아침이라도 좋지만 빠를수록 좋다고 하셨습니다』
흑의복면인이 가벼이 고개를 숙여보였다.
『…』
왕승고와 구대부인이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무슨 일이지?
두사람의 얼굴에 의혹이 떠올랐다.
* * * 이경(二更).
어둠이 짙고 평온했던 하늘에는 구름이 이리저리 움직인다. 세찬 바람에
흩어지는 구름은 새아침을 예고하지만 저렇게 뭉치는 구름은 궂은 날씨를
의미한다.
마차가 달려 금곡노야가 거처하는 별장(別莊)에 왕승고와 구대부인이 당도한
것은 이경 중순 무렵이었다. 경사에 있는 금곡별서까지 가야 한다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지만 금곡노야는 아직 태원에 머물고 있었다.
『어서 오시게』
난을 치고 있던 금곡노야가 환하게 웃으며 두 사람을 맞았다.
대청, 탁자 위에 펼쳐진 화선지는 일견해도 견면(繭綿)으로 만들어진
고려지(高麗紙)다. 고려지는 빛이 희고 비단 같으며 단단하고 질기기가 또한
비단과 여일(如一)하여 글씨를 쓰면 먹빛이 살아나는 종이중의 진품이다.
그 위에 쳐진 난을 본 왕승고의 눈에 은은히 놀람이 스쳐갔다.
보통의 솜씨가 아니었다.
난은 문인들이 즐겨 그리는 사군자(四君子)의 하나이긴 하지만 매화나 국화,
대나무와는 또 다르다. 봄에 피는 것을 난(蘭)이라 하고 가을에 피는 것을
혜(蕙)라 한다. 꽃에 싱그런 향이 있고 풍류(風流)와 운치(韻致)가 살아있다.
품(品)과 격(格)을 갖추어 그리는 사람의 품격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바로
난이다.
그 의미는 쉽게 그릴 수는 있지만 정말 제대로 그리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하지만 금곡노야의 붓끝에서 피어난 난은 정말 살아서 숨을 쉬고 있었다.
왕승고도 난을 배웠다.
그러나 저렇게 그릴 수는 없었다.
『생각을 정리할 것이 좀 있어서…』
왕승고의 눈길을 느꼈는지 아닌지, 금곡노야는 난을 치고 있던 것을 설명하듯
말하면서 두 사람에게 자리를 권했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찻잔이 놓였다.
은은한 향이 찻잔에서 스며나오고 어디선가 향이 흘러 대청을 감싸고 있는 듯도
하였다.
금곡노야가 문득 입을 열었다.
『그간 너무 경사의 별서에만 있었더니 화원(花園)의 향이 탁하고
잡스러워졌군… 여기도 조금 가꿔야겠어』
뜬금없는 소리.
『향이 좋기만 한데요. 왜 잡스럽다고 생각하십니까?』
구대부인이 코끝을 스치는 화향(花香)을 느끼며 물었다.
정말이었다.
대청에서 바라보이는 화원에는 추국(秋菊)이 가득 피어 있었고, 무늬를 놓듯이
혜란(蕙蘭)도 구색을 같이 했다. 그외 갖가지 가을꽃이란 꽃은 다 피어 있는
듯했고 그 어울림은 분명히 꽃을 아는 사람이 정성껏 손질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구대부인은 무식한 여자가 아니었다.
그 아름다운 화원에서 흐르는 꽃향기는 참으로 싱그럽고 그윽한 것에 분명했다.
그런데….
『꽃에는 제각기 색깔이라는 것이 있는 법이네. 그리고 그 색깔은 제각기 나름의
향을 가지지. 이렇게 흐르는 향도 제각기 자리가 있는 법…. 그 향이 어울려
서로를 도와줄 수 있다면 비로소 어느정도 꽃을 안다고 할 수 있을테지. 하지만
이 화원을 가꾼 원정(園丁)은 배색에만 신경을 써 향기가 어울리게 하지를
못했어. 겉만 화려하지 실상은 꽃향기가 뒤섞여서 뭐가 뭔지 알 수가 없게
만들어 버린게지』
말은 이해가 된다.
하지만 금곡노야의 말을 듣고 코를 벌름거려 보지만 무슨 의미인지 가슴에
와닿지를 않는다.
『알겠느냐?』
금곡노야가 웃음을 띤 얼굴로 왕승고를 보면서 물었다.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아마도 꽃향기가 서로 섞이더라도 상조(相助)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핫하하… 과연, 과연…』
금곡노야가 무릎을 치면서 흔쾌히 웃음을 터뜨렸다.
『…』
졸지에 구대부인은 몽롱한 표정이 되어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한번도 스스로를
둔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건 좀 달랐다.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한 참으로 묘한 말들.
『그것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꽃이 피는 시기가 틀리고 또 같이 피더라도 지는
시기가 틀리는데 어떻게 그 향을 조절할 수 있겠습니까? 강제로 꽃을
잘라버리거나 핀 꽃을 가져다 심는다면 몰라도…』
잠시 곤혹스러운 표정이었던 구대부인이 입을 열어 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만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을 납득할 수가 없는 듯하였다.
희미한 웃음이 금곡노야의 얼굴에 떠올랐다.
『그것이 바로 꽃을 가꾸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이지. 상인이 돈을 벌기 위해서
일을 하는 것처럼… 원정은 그렇게 꽃이 피는 시기마저 조절해서 그 향기까지
제어 할 수 있어야 비로소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인게지』
『…』
구대부인은 입을 다물었다.
이제보니 그는 말속에 무엇인가를 담아서 전하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꽃을 말함이 아니었다. 그것을 알아내기 위해서 그녀는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조절이란 그렇듯 중요한 것이지. 누구에게나… 때가 있고 장소가 있어
천시지리(天時地理)라 하지 않던가』
그녀의 표정을 보곤 고개를 끄덕인 금곡노야는 왕승고를 보았다.
『내가 너를 오라고 한 것은, 복안(腹案)이 섰기 때문이다』
『복안?』
『홀가적대신 너를 무림맹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놀란 빛으로 왕승고는 그를 보았다.
불과 며칠이 지났다고….
『이 일은 네게도 좋은 일이다. 복수를 겸할 수 있으니까』
『복수라니요?』
구대부인이 물었다.
『근일 중에 귀왕혈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공동파와
종남파, 양대문파의 장문인을 살해할 것이다』
『그런…?』
놀란 빛이 구대부인은 물론, 왕승고의 눈에까지 피어났다.
『귀왕혈의 발호가 다시 시작되면 무림이 흔들린다. 이미 무림에는 무게중심이
사라진 상태, 거기에 혜성 같이 나타난 영웅이 귀왕혈을 척살하고 정의를
세운다면 상황은 의외로 간단해질 수 있겠지』
….
조용하다고 할까?
침묵 한줄기가 흘러갔다.
『그들이… 귀왕혈이 그러한 짓을 벌일 것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한참만에 왕승고가 입을 열어 물었다.
『내가 모를 리가 없지 않겠느냐? 그들을 살해하라고 청부한 것이 나이니까』
일순, 경악이 왕승고와 구대부인의 얼굴을 쓸었다.
『귀왕의 몸값을 크게 하려면 그가 더 크게 설쳐야겠지. 그래서 청부를 한
것이다. 구대문파에 크게 당해서 숨어있던 귀왕으로서는 돈도 벌고 복수도
하겠다는 계산을 할 수 있었을테지. 이 한건으로 그는 더 이상 자객행을 하지
않아도 좋을 돈을 받게 될거니까』
금곡노야가 간단히 대답했다.
하지만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귀왕혈은 이미 암중에 숨어 청부를 받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지금 상황에서 청부를 받으면서 스스로의 행적을 노출시킬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를 찾으셨습니까?』
왕승고의 물음에 금곡노야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돌았다.
『중원을 수복하고자 하면서 그 정도를 알아내지 못한다면 문제가 되겠지』
『지금이라도 그를 찾을 수 있으십니까?』
『물론, 그것을 모른다면 어떻게 그를 잡을 수 있겠느냐?』
왕승고는 다시 한번 그를 보았다.
그처럼 애를 써도 행방이 묘연했던 귀왕이다. 구대문파를 비롯한 천하가 나서서
찾아도 찾지 못했던 귀왕혈의 신비지주(神秘之主)!
그러한 그를 마치 손아귀에 넣고 있는 듯 그렇게 간단히 말한단 말인가.
『승고가 강호에 나가 귀왕혈을 처리하는 동안, 나는 암중에 손을 써 승고에
대한 여론을 조성하겠소. 그럼 승고가 무림맹주의 위에 오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오』
『노야께서 추진하신다면 그렇게 되겠지요…』
고개를 끄덕이던 구대부인은 문득 말끝을 흐렸다.
『무슨 다른 일이 있소?』
금곡노야가 그녀의 기색을 보고 물었다.
『예, 원래 승고는 내일…』
잠시 머뭇거리던 구대부인이 입을 열었다.
『서역에서 좋지 못한 소식이 왔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그처럼 심각하다니
문제로군. 내일 장보를 찾아 떠나려 한다는 겐가?』
『그렇습니다』
『음…』
금곡노야의 미간이 조금 찌푸려졌다.
『홀필열의 장보라면 분명히 이번 일이 아니라도 찾아볼만한 가치가 있겠지!
마침 공교롭게도 내가 청부한 자들이 바로 공동과 종남파의 장문들이니까 그
일을 해결하고 장보를 찾아 떠나는 것으로 하면 어떨까?』
종남파가 있는 종남산은 산서성에 위치하고 공동파는 감숙(甘肅)에 있어서
왕승고가 가자고 하는 곳의 도중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장보를 찾을 수 있다면, 내가 어떻게든 승고가 돌아올 때까지 구멍난 부분을
메워보도록 하지. 전 같으면 내가 그냥 메워줄 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나도
여력이 없어서…』
금곡노야가 답답한 듯이 고개를 저었다.
『승고가 돌아오기만 하면 모든 것이 풀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시 폐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문득, 금곡노야의 얼굴이 싸늘히 굳어졌다.
『천랑왕이란 자가 감히 우리 물건을 건드리다니, 그냥 둘 수는 없는 일! 승고의
이번 강호행에는 내가 사람을 동행시키겠소. 어차피 일처리를 하고 장보를 찾은
다음에 그 자를 정벌하는 일까지 승고의 강호행에 포함시키면 되겠소』
『거기까지 말입니까?』
『그 여론도 내가 형성시키도록 하겠소. 천랑단을 징치(懲治)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도록』
그의 말은 거침이 없다.
『네 생각은 어떠하냐?
금곡노야가 왕승고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동행은 사양하겠습니다』
왕승고는 전혀 망설임없이 입을 열었다.
빨래판에다 물을 쏟아 붓는다고나 할까.
아니면 폭포수가 거꾸로 쏟아진다고 할까. 그렇게 거침없이 말을 쏟아내는
금곡노야의 조용한 태도 가운데에는 보통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어떤
기도(氣度)가 분명히 있었다.
고함을 치지 않아도 사람을 압도하는 기백.
그는 그러한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그의 말에 반기를 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말 자체가 다 옳은
것이고 또 그의 말에 반박을 하거나 이의를 달 사람은 아직까지 없었다.
그러나 왕승고의 말은 바로 그러한 금곡노야의 의중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승고야!』
구대부인이 놀라 외쳤다.
『그게 무슨 소리냐? 노야께서…』
『말씀은 감사하지만 저 혼자로서 충분합니다. 제 나름으로 이미 계획을
세워두었으니, 노야께서 의도하신 것만 제게 확실히 알려주시면 거기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왕승고가 말했다.
『…』
잠시 왕승고를 바라보고 있던 금곡노야의 얼굴에 희미하게 웃음이 머금어졌다.
『홀로 하겠다는 것인가? 도움이 필요없다?』
『그런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의존하기만 한다면 너무 노야께 부담을
드리는 염치없는 짓이 되겠지요』
말은 정중하지만 뜻은 명명백백(明明白白)했다.
『하하하… 좋아, 좋아. 정말 훌륭하군』
금곡노야는 왕승고의 말에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 * *
관도.
달빛을 받으며 사두마차 한 대가 바쁘게 길을 가고 있었다.
그 마차에는 왕승고 모자가 자리했다.
『노야의 말씀은 아직까지 한번도 잘못된 적이 없었다. 그 분의 호의를 거절한
것은 잘못인 것 같구나. 분명히 힘이 될텐데』
『필요하면 그때 요청하지요』
왕승고가 조용히 말했다.
『과연 어떨지 모르겠구나』
구대부인은 말끝을 흐렸다.
언제인가부터 이 아들은 믿음직해졌다. 그것도 너무 믿음직해서 함부로 어쩌라고
할 수가 없어졌다.
결국 끙끙거리면서 하회를 볼 수밖에.
잠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마차는 이내 그들의 거처에 당도했다. 성문 안이라면
문이 닫혀 들어갈 수 없었을테지만 그들의 거처는 교외인지라 그 점은 편리하다
할 수 있었다.
자신의 거처에 돌아온 왕승고는 잠시 자리에 누워 생각을 정리했다.
금곡노야.
생각하면 할수록 대단한 사람이다.
누구라도 그것을 부인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더 대단한 것은 그러한 힘을 가진 사람을 무림중에는 물론, 조정에서조차
주목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주목할 수가 없는 것이 그런 사람이 과연
존재하는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왕승고는 아직 그의 실체를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의 힘도 본 것이 없었다.
모든 것이 피상적일 뿐이다.
『…』
왕승고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가 번쩍 눈을 떴다.
불 밝히지 않은 실내가 달빛에 어스름히 밝다.
그는 뭔가를 결심한 듯 빠르게 옷을 갈아입었다.
자리를 다듬어 사람이 누워있는 듯이 만들어 놓은 그는 소리도 없이 창문을 열고
자신의 방을 빠져나왔다.
눈을 들어 보자, 구대부인의 방에는 아직도 불이 밝혀져 있었다. 하긴 벌써 잠을
이룰 수는 없으리라. 생각할 것이 한두가지이겠는가.
잠시 어머니의 방을 보던 그는 발을 굴러 소리도 없이 별원을 빠져나와 밤길을
달리기 시작하였다.
그의 경공은 이미 강호상에서 보기 힘들 정도로 훌륭하여 그야말로 바람이
스치는 것 같았다. 세찬 바람이 그의 귓전을 스치고 지나가는 가운데 왕승고의
신형은 사경무렵에 이르자 한 곳에 당도하게 되었다.
그곳은 뜻밖에도 금곡노야가 거처하고 있는, 바로 얼마전에 그가 떠나온 바로 그
장원이었다.
장원은 어둠 속에서 조용히 웅크리고 있었다.
그윽한 화향(花香) 가운데 자리한 장원은 그리 크지 않았다. 전체는
전원(前院)과 후원(後院)으로 나뉘어 있었고 후원으로 들자면 전원을 통과해야만
했다. 원래 후원이란 안사람들이 거처하는 곳이라 여자들이 있어야 하지만,
금곡노야는 아직까지 혼자 몸인지라 후원은 그가 쉬는 곳이었다.
장원에 도달한 왕승고는 잠시 숨을 죽여야 했다.
좀 전에 다녀가면서도 느꼈던 것이지만 장원의 요소요소에서 감시하는 눈길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의 무공은 이미 강호상에서 적수를 찾기 힘들 정도로 대단한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그의 무공으로도 간단하게 볼 수 없을 정도의 고수들이
이 장원을 지키고 있었다.
그가 돌아온 것은 당연히 그들에게 그가 돌아왔음을 알리고 싶어서가 아니다.
그러니 그들의 눈을 피해야 했고, 그가 장원의 후원으로 스며든 것은 그가
장원에 도착한지 일각(一刻;15분)이나 지나서야 가능하였다.
후원에는 아직 불이 밝혀져 있었다.
그리고 열린 대청문을 통해서 얼마전까지 그와 어머니 구대부인이 있던 자리에
회의를 입은 중년인 한 사람이 서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왕승고가 숨어 있는 곳은 화원의 커다란 정원석에서 조금 떨어진 노송의 뒤였다.
대청까지는 칠장 가량. 거리가 제법 멀긴 하지만 지금 그의 무공으로 본다면
그렇게 멀기만 한 거리도 아니었다.
중년인은 옆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좀 전에 왕승고 모자가 왔을 때는 보지 못한
자였다. 나이는 마흔이 좀 넘어 보이는데 강퍅한 인상에 눈빛이 가라앉아 있어
심기가 깊어 보인다.
『한심한… 군세(軍勢)를 믿고 달려가자마자 대뜸 북평성을 에워쌌다는군 그래』
회의중년인의 앞 태사의에 깊숙이 앉아 손에 든 서신을 읽고 있던 금곡노야가
문득 나직이 중얼거렸다. 앞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들을 수 없는 낮은
음성이었지만 왕승고는 이미 절정(絶頂)의 내력을 운기하여 정신을 모으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현 상황이라면 연왕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워낙
군세(軍勢)에서 차이가 납니다』
그의 앞에 선 회의중년인이 말했다.
차이가 클 수밖에 없었다.
선봉 13만의 경병문군이 패퇴하자, 그 후임으로 나선 이경륭은 각지의 군대를
북평에 집결시켜 일거에 연왕을 무찌르고자 시도하였으며, 그 수는 무려
50만이나 되었다.
『이경륭의 군세가 크다 하나 병법을 모르는 자. 머릿수만 믿고 무턱대고
몰려가서 북평을 포위하는 그따위 짓거리를 가지고 연왕을 어렵게 할 수 있을 것
같은가? 어림도 없지… 곧 뜨거운 맛을 보게 될게다』
회의중년인의 앞에 앉아있는 금곡노야의 웃음소리가 낮게 들려왔다.
『그렇긴 하더라도 조금 손을 써두는게 좋긴 하겠지. 전황이 급격히 한쪽으로
기울면 좋을 일이 없다. 전쟁은 이제 시작이니까』
『그렇게 하겠습니다』
『좋아, 나머지는 다음에 듣자』
회의중년인이 멈칫, 하는 듯 하다가 알겠다는 듯이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그가 물러나자 금곡노야는 몸을 일으켜 화원으로 나왔다.
그가 잡스럽다던 화향은 참으로 싱그럽다. 그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는… 달도
별도 맑고 밝다.
화원으로 나온 그는 혼자말 하듯이 입을 열었다.
『돌아가라고 했었는데, 왜 온 것이오?』
그의 말은 참으로 의아했다.
그의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누구에게 한 말이란 말인가?
왕승고는 주춤 망설여야 했다. 설마 자신이 이곳에 온 것을 알고 하는 말일까?
나서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러나 그의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금곡노야가 한 말의 여운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한 사람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흑의에 등에는 보검 한자루를 멨다. 긴 수실이 흔들리는 그 보검을 맨 흑의인은
복면을 해서 그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흡사 자객과도 같은 날렵한 모습.
하지만 금곡노야는 그가 누군지 이미 아는 듯, 태연한 표정이었다.
『돌아가 할 일이 많을 텐데, 무엇 때문에 이곳까지 찾아 왔소?』
금곡노야가 말했다.
평탄한 어조이지만 그의 미간에는 한가닥 싸늘한 기운이 어려 있었다.
흑의복면인은 가벼이 손을 잡아보였다.
『말씀대로 돌아가던 중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음성이 싸늘히 굳어졌다.
『뜻하지 아니한 말을 듣게 되어서 돌아오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뜻하지 않은 말?』
『저 대신 그 자를 무림맹주로 결정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그의 말에 금곡노야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누가 그런 소리를 했소?』
『사실입니까?』
『지금 나에게 추궁을 하자는 것인가?』
금곡노야의 안색이 싸늘히 굳어졌다.
늘 웃음을 머금고 있던 그의 얼굴이 굳어지자 주변의 공기가 그대로 경색되는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
격렬한 분노를 억누르고서 따져묻고 있던 흑의복면인의 어조가 주춤해졌다.
그러한 그를 왕승고는 굳은 얼굴로 살펴보고 있었다.
분명히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왕자가 내 결정에 참견하게 되었는지 모르겠구료. 그간 왕자가 이룬
것들이 모두 스스로의 힘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이오?』
금곡노야가 가볍게 혀를 차면서 말했다.
어조는 평온하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듣는 흑의복면인의 기색이 크게 위축됨을 왕승고는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그의 심중에 있는 금곡노야의 비중이 대단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에 다름이 아니었다.
「왕자(王子)?」
왕자라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다만…』
『기회는 이미 왕자에게 주어졌었소! 그런데 그 기회를 잡지못한 것은 스스로의
잘못이니 누굴 원망하겠소?』
『놈이 아니었다면 왜 파탄이 일어났겠습니까? 놈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저는
그날 무림맹주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것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대세였습니다!』
갑자기 복면인이 격하게 소리쳤다.
그 말에 왕승고의 전신에 가늘게 진동이 번졌다.
그제서야 그는 상대가 누군지를 알게 된 것이다.
백무결!
아니, 북원의 왕자 홀가적.
참으로 뜻밖에도 무림대회에서 왕승고에 패해 사라졌던 그가 여기에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그 놈을 무림맹주를 시킨단 말입니까?』
말을 끌어내자 참을 수 없는지 복면인, 홀가적이 다시 소리쳤다.
『한가지만 물어보겠소』
금곡노야가 조용히 말했다.
그 말은 크지 않았지만 참으로 간단하게 홀가적의 말을 끊어버리는 힘이 있었다.
『말씀하십시오』
『왕자에게 관심이 있는 것은 북원의 발흥(發興)이오? 아니면 무림의 맹주요?』
일순 어이없다는 빛이 홀가적에게 일어났다.
『무림의 맹주야 당연히 대업을 수행하기 위한 과정이지 않겠습…!』
말을 하던 그는 문득 뭔가를 느낀 듯 입을 다물었다.
『그렇소. 맹주의 자리라는 것은 무인들에게는 참으로 영광된 자리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거대한 일을 도모하는 사람으로서는 수단이고 과정일 뿐,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소? 그런 것에 연연한다면 나는 참으로 왕자에게 실망이오…』
『…』
일시지간, 홀가적은 말문이 막힌 듯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다.
쨍, 쨍…!
느닷없이 화원 외곽에서 날카로운 음향이 터지는가 싶더니, 비명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홀가적이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꼬리를 달고 오다니, 왕자답지 않군…』
금곡노야의 중얼거림에 홀가적의 얼굴이 창백히 변했다.
『그럴 리가?』
홀가적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비명소리와 싸움소리는 더욱 커졌다.
뒤이어 십여명의 검은 그림자가 화원에서 뛰쳐나왔다. 그들중 서넛은 홀가적을
목표로 한 듯이 그대로 그를 공격했다.
『흥!』
홀가적이 냉소를 터뜨렸다.
하지만 그가 채 검을 뽑기도 전에 좌우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바람처럼
날아들면서 검을 휘둘렀다.
『으악!』
비명소리.
피보라.
거의 찰나간에 검광도기가 충천하면서 장내의 상황이 마무리되었다.
화원에서 불쑥 나타난 자들의 무공은 분명히 간단하지 않아 강호 일류의
수준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좌우에서 공격해온 복면인들의 손에 채 몇합을
넘기지 못하고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복면인들의 수단은 잔인하고도 깨끗하여 다섯명의 침입자들을 단 한사람도
살려두지 않았다. 검빛이 번뜩일 때마다 피가 뿌려졌다.
그리고 그들은 쓰러진 침입자들을 들고 사라져버렸다.
남아있는 것은 핏자국뿐.
전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 같았다.
….
홀가적은 굳어져 그 광경을 보고 서 있었다.
그는 장원을 경계하고 있는 자들의 이목을 피해 소리도 없이 이곳으로 숨어들어
왔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이 알고 있던 호위들의 위치에서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를 놀라게 하고 남음이 있었다.
『백련교도로군』
문득 금곡노야가 중얼거렸다.
『백련교… 그럼 저들이 정말 저를 따라온 것이란 말입니까?』
『내 말을 의심하는가?』
갑자기, 금곡노야의 어조가 달라졌다.
『그, 그건…』
『돌아가라!』
금곡노야가 냉엄히 꾸짖었다.
『차후 다음과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난다면 나는 왕자와의 모든 관계를 정리할
것인즉, 명심하도록!』
그의 눈에서 전광(電光)과도 같이 빛이 흘렀다.
그리고 그는 등을 돌렸다.
『…』
그의 완강한 등을 보면서 홀가적은 입술을 물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암암리에 길게 숨을 쉬면서 손을 마주잡아 포권하였다.
『돌아가겠습니다』
짧게 말한 그는 발을 굴러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
다시금 정적이 흘렀다.
『백련교가 그의 뒤를 밟았으니 아마 그들의 후속주력이 곧 도달하게 되겠지만
그들이 당도하기까지 조금 시간이 있을 게야. 할 말이 있으면 지금 하는 게
좋겠네』
문득 금곡노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암중에 숨어있던 왕승고는 미간을 굳혔다.
지금 장내에는 그가 말을 건넬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그가 헛소리를 할 리는 없다.
그렇다면….
잠시 생각하던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금곡노야의 앞에 나타났다.
『기다리고 있었네』
금곡노야는 그가 나타남을 보고는 당연한 듯 입을 열었다.
『제가 돌아올 줄 아셨습니까?』
『궁금한 게 있을 것 같아서… 그렇지 않았다면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지.
다만…』
그는 미간을 찡그렸다.
『뜻밖의 일이 일어나는 바람에 길게 이야기를 할 수는 없을 것 같군. 그래,
뭐가 궁금한가?』
그가 물었다.
『환(桓)자, 호(護)자, 국(國)자를 쓰시는 분을 아십니까?』
왕승고가 물었다.
격한, 놀람의 빛이 금곡노야의 전신에 일어났다.
그는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강렬한 눈빛으로 왕승고를 바라보았다.
파라락….
나뭇잎이 바닥을 굴러간다.
바람에 몸부림을 치다 그도 못이겨 훌쩍 허공으로 날아올라 침묵을 깨는 나뭇잎들.
먼지가 화향에 감추어져 흩어진다.
거기에 두 사람이 마주 서 있었다.
『그 이름을 어떻게 아나?』
한참만에 먼저 입을 연 것은 금곡노야.
우뚝 선 그의 얼굴은 한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그러한 모습으로 굳어져 있었다.
『노야의 함자가 한(桓)자, 호(護)자, 민(民)자를 쓰는 것도 맞습니까?』
『…』
금곡노야는 입을 열지 않았다.
다만 뚫어질 듯이 왕승고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군요…』
왕승고가 중얼거렸다.
대답을 들을 필요는 없었다.
듣지 않아도 이미 금곡노야는 몸으로 그 대답을 한 다음인 것이다.
『그가 아직 살아있단 말이냐?』
금곡노야가 입을 열었다.
『…』
이번에는 왕승고가 대답하지 않았다.
참으로 상상키 어려운, 믿기 힘든 일이 그의 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한호국, 그의 사부가 말했던 사형!
위대한 천재라고 이야기했던 그 사형이 바로 금곡노야라니….
….
침묵이 소리높여 두 사람의 사이를 흘러갔다.
『그렇구나. 어쩐지 네 기품이 다르다 했다. 하긴 수호신문의 위대함이 아니고서야
어찌 지금의 너와 같은 걸물(傑物)을 만들어 낼 수 있겠느냐. 어느 누구도 불가능하지.
그와같은 단시간내에는…』
중얼거림이 금곡노야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어머니에게서 이야기를 들으면서 느끼기 시작했었다. 그리고 그를 만나서 위대한
나라의 건설에 대해서 대한(大桓)의 중원수복에 대한 구상을 들으면서 그는 단정할 수
있었다.
그런 일을 할 사람은,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이 세상에 단 한 사람 뿐일
것이었으므로.
그럼에도 그의 신분을 그 자리에서 바로 묻지 않은 것은 어머니 구대부인 때문이었다.
그녀의 우상은 바로 은공인 사부 한호국이었고, 그 다음 그녀의 살아있는 우상은
금곡노야였다.
그러한 우상이 지난날의 우상을 죽인 것을 알게된다면 과연 그의 어머니는
어떠할까….
하지만 생각한다면 굳이 그러한 저어 때문에 그 자리에서 그의 신분을 묻지 않았음도
아니었다. 과연 그가 정말 사부의 사형인지 확실하지도 않으면서 그러한 일을
어머니의 앞에서 밝혀 물을 필요가 없었기에 그는 이 밤에 여기 있는 것이다.
『살아있느냐?』
금곡노야가 다시 물었다.
『그분이 살아계실 것이 걱정되십니까?』
대답대신 왕승고가 물었다.
『…』
금곡노야는 대답대신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가 입을 열었다.
『무상』
『예!』
예의 대답이 들려왔다.
『아무도 이곳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해라』
대답은 없다.
하지만 기척 하나가 떠나감은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말이 가지는 의미는 달랐다. 이제부터 이 장원으로 접근하는 자가 있다면
모두 살려두지 말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것은 지금부터 그들이 나눌 말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이기도 하였다.
달이 구름 속에서 스물거린다.
금곡노야는 뒷짐을 진채로 그 달을 올려다 본다.
『세상은 늘 바뀌는 법이다. 처음에는 옳았던 일도 나중에는 옳지 않게 바뀔 수도 있다.
위대했던 선조들이 이제와서 오랑캐로 매도당하고 그 위대한 역사마져 날조되어
쓰레기처럼 처박혔다. 역사 뿐이던가? 중원을 쟁패(爭覇)하던 민족이 이제는 한쪽
구석에 처박혀서 스스로 신하됨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니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더냐?』
휙!
금곡노야는 왕승고를 바라보았다.
그 눈에서 불꽃이 일고 있었다.
볼致=탁?守護神門)이 무엇을 하는 곳이냐?』
금곡노야가 물었다.
『대한(大桓) 수호신문… 그 의미를 아느냐?』
그가 다시 물었다.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대한의, 그 위대한 민족을 지키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바로 대한 수호신문이다.
하지만 수호신문은 겉으로 나타날 수 없으며, 직접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그저 옆에서
보면서 잘못됨이 있는가 잘못되지 않는가, 바라보기만 해야 한다. 그래서 뭐가
달라졌느냐?』
그의 어조가 격렬해졌다.
그가 이렇게, 이런 어조로 말할 수 있음을 아마도 구대부인은 상상치도 못하리라.
『천하를 지배하던 민족은 속락(續落)하여 만주벌에서조차 쫓겨나 벽지(僻地)의
구석에 처박혀서 전전긍긍하고 있지 않느냐? 그나마 이젠 그 정신마저 피폐하여
스스로 욕됨을 자처하며 그에 만족하고 있다…』
금곡노야가 말끝을 흐렸다.
말을 멈춘 그는 길게 한숨 쉬었다.
『정신이 썩은 민족은, 스스로를 비하하는 자는 결코 남의 위에 설 수 없으며 발전할
수도 없는 법이다. 그렇게 민족이 썩고 위대함이 좀먹고 있음에도 역사가라는 자가 그
위대함을 일컬어 분수에 넘친다 하니 후세 그것을 역사라고 보는 후손들이 있다면
그들이 과연 무엇을 배울 수 있겠느냐?』
김부식은 그의 저서 「삼국사」에서 고구려가 망한 것을 일러 『분수에 넘치는 명예와
가히 송구스러운 지위를 차지하였으니…(운운)』 등으로 평하고 백제의 멸망을 일러
『대국에 죄를 지었으니 망한 것은 마땅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금곡노야가 왕승고를 직시한다.
휙휙- 그의 전신 옷자락이 절로 펄럭인다. 강한 기세가 그의 전신에서 무럭무럭
일어나고 있었다.
『그럼에도 수호신문이 무엇을 하였느냐? 위대한 민족의 위대함을 지키기 위해서
존재하는 그 수호신문이 무엇을 하였더냐? 나무밑에서 익은 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듯, 그저 그렇게 팔짱만 끼고 바라보고 있지 않았더냐? 그래서 무엇이
달라졌더냐? 언제까지, 얼마나 더 이 민족이, 이 위대한 역사가 망가지는 것을 더 두고
봐야 하겠느냐?』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사부님으로부터 우리 민족의 위대함을 오늘에 되살리라는 임무를 부여받고 이
땅에 왔다. 그리고 나는 그 사명(師命)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 것이다. 시대가 바뀌면
법도 바뀐다. 바뀌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것을 사제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분을 그렇게 참혹하게 죽이셨습니까?』
『죽었느냐?』
문득 금곡노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죽었구나…』
그의 얼굴이 무거워졌다.
『아까운 사람이었다. 그는 젊은 날의 나를 보는 것 같았지. 당당하고 의기늠연하여
하늘을 우러러 한점의 부끄러움도 없는 사내였다. 그런 사람들은 타협을 모르지.
분명히 옳은 길임을 알면서도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다르면 그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그것이 젊음이기도 하지만 또한 한계이기도 하지…』
그때, 장원 바깥쪽에서 나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금곡노야는 그쪽으로 시선도 돌리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를 스승으로 모셨느냐?』
『그렇습니다』
묘한 표정이 금곡노야의 얼굴에 떠올랐다.
『그런가, 좋다. 이제부터 네가 어떻게 할 것인지 한번 들어보자』
쨍쨍!
고막을 울리는 금속성과 신음소리가 뒤섞여 밖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
왕승고가 입을 다물고 있음을 보자 금곡노야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나를 적으로 두겠느냐?』
『그렇다면 어쩌시겠습니까?』
『왜 그래야 하느냐?』
왕승고의 되물음에 금곡노야는 다시 되물었다.
『사제와 나는 생각이 달랐다. 나는 그와의 생각을 좁혀보고자 했으나 실패했다. 그
과정에서 불미한 일이 생겼지만… 그는 내 사제였다』
문득 그의 얼굴이 엄숙히 굳어졌다.
『나는 지금도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내 나라, 내 민족을 위해서라면 나는 지금 어떠한
일이라도 할 수 있음을!』
그윽한 화향.
싱그러운 바람, 하지만 그 고즈넉한 달빛 아래의 아름다운 경치는 긴장으로 숨을 죽인
지 오래다.
쨍! 쨍!
날카로운 음향이 인다.
화원 밖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달빛 아래 칼부림을 하고 있지만 마주보고 있는
금곡노야와 왕승고의 모습에서는 미동조차 없다.
-내 나라, 내 민족을 위해서라면 나는 어떠한 일이라도 할 수 있다!
금곡노야의 얼굴은 강인한 천년암(千年巖)과도 같이 굳다.
크지 않은 체구의 그.
하지만 그를 보고 왜소하다고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터였다. 그 말을 하는
그의 모습은 그만큼 당당했고, 신념으로서 사람을 압도하는 힘이 있었다.
화원 바깥에서 구슬픈 비명소리가 끊임없이 일어났다. 그렇듯 싸움이 격렬한데도
싸움의 흔적이 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것 같지는 않다. 그 의미는 방어하는 쪽이
상대보다 더 강하다는 뜻이다.
마치 싸움소리를 듣기라도 하듯이 묵묵히 있던 왕승고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은 어떻게 해도 좋다는 말씀이십니까?』
『목적과 수단이라는 것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 어떤 것이 선(善)이며, 어떤 것이
악(惡)인지는 절대적일 수 없음이 진실이다. 세월이 바뀌면 그 해석도 달라져야만 하는
법이다. 그래야만 한다!』
금곡노야의 말에 힘이 깃들이기 시작했다.
『네 눈앞에서 목욕하던 여인이 물에 빠져 죽어간다면 구하는 것이 옳겠느냐? 아니면
남녀칠세부동석의 계율을 지키기 위해서 그냥 죽도록 버려두어야 하겠느냐?』
『그것과 이것과는…』
『다르다고? 뭐가 다른지 어디 한번 들어보자』
금곡노야가 코웃음쳤다.
『이 나라, 이 민족을 위해서 한쪽 구석에 처박혀서 수백, 수천년이란 기나긴 세월을
탄압속에서 기를 펴지 못하고 전전긍긍 세월을 보내고 있는 그 불쌍한 내 민족을
위해서 중원을, 이 천하를 되찾겠다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냐? 무엇이 목적을 위해서
변질된 수단이냐? 선(善)이란 좋다는 의미다. 너는 과연 천하를 되찾겠다는 나의 이
행보가 잘못이라고, 나쁘다고 말할 수 있느냐? 만약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나는
지금이라도 이 일을 그만 둘 수 있다. 어디 나를 설득시켜 보아라!』
금곡노야가 도도하게 말을 뿌렸다.
황하가 범람하고 장강이 출렁거리듯 그는 그렇게 도도한 어조로 말을 했다. 누구라도
그의 앞에 서면 압도되고 말 터였다.
『…』
왕승고 또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대한(大桓)!
하늘의 자손이라는 이 민족이 중원을 잃고나서 발해가 무너지면서는 만주대륙까지
잃었다. 이제 남은 것은 좁은 땅덩이 한쪽뿐.
그나마도 그냥 살 수가 있었던가.
삼국시대가 끝나고 그 마무리를 한 고려가 그 땅에 들어선 이래, 거란이 강성하면서
세차례에 걸쳐서 침입을 하였고 그 뒤를 이어 다시 몽고가 일어서면서 두차례에 걸쳐
대대적인 침입을 강행했다. 그렇게 거의 100년에 이르는 세월을 이민족의 침입에
시달려야 했고, 그것을 이기지 못해서 말발굽이 닿을 수 없는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고
숨어사는 치욕을 당해야 했다.
최충헌의 무신정권 60년의 치하도 바로 그때였으며, 몽고의 복속국이 되어 멀쩡하던
왕비가 하루 아침에 쫓겨나고 몽고의 공주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도 그때였다.
원의 마음에 들지 않는 고려의 왕은 사신의 한마디가 떨어지면 그날로 왕의 자리에서
굴러떨어져 귀양을 가야 했다. 일거일동을 감시받는 원의 괴뢰(傀儡)가 바로 고려의
왕이었다.
왕은 왕이되 왕이 아니고, 백성은 백성이되 나라있는 백성이 아니었다.
그 와중에 죽어난 것이 힘없는 백성임을 누가 모를까.
그런 나라를, 그러한 백성들을 다시금 중원의 주인, 천하의 주인으로 만들겠다고 한다.
그 앞에서 과연 어떤 말로 그를 설득할 것인가.
과연 무엇이 절대선(絶對善)이며, 무엇이 절대악(絶對惡)일까.
바람이 세차게 얼굴에 부딪쳐온다.
밤 바람이다.
싱그러운 느낌, 하지만 그렇게 찬바람이 시원하게 전신을 훑고 지나감에도 왕승고는
답답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금곡노야가 있던 그 장원을 벗어난 후, 그는 전력을 다해서 질주하기 시작했다.
역기충혈대법으로 인해 황폐화되었던 공력을 회복한 후, 그의 무공은 나날이 달라지고
있었다. 그 공력을 모두 끌어올려 전력질주하자 그의 신형은 밤안개 속에서 마치
한줄기 바람과 같이 그렇게 어둠을 뚫었다.
얼마 달리지 않았음에도 저멀리 거처인 장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불이 꺼져 있었다. 모두 잠이 들었으리라.
경비무사들이 있지만 그를 발견할 수는 없었다.
왕승고는 길게 한숨쉬고 자신의 거처에 들었다.
그가 거처하는 곳에도 화원이 있었다.
가을 꽃들이 흐드러진.
달빛은 거기에도 내려앉았다.
그윽한 정경이지만 거기 선 왕승고의 내심은 편안할 수가 없었다.
사부 한호국의 참혹한 처경을 보면서, 그의 주검을 그의 손으로 묻으면서 그는
맹세했었다.
반드시 그 사형을 찾아 자신의 손으로 처단하여 사부의 원수를 갚겠노라고, 그
한(恨)을 자신이 풀어주겠노라고….
그런데 그를 만나고도, 그를 눈앞에 두고서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다.
검을 휘두르지도, 그의 잘못을 꾸짖어 눌러버릴 수도 없었다.
조용히 그의 말만을 듣다가 이렇게 물러난 것이다.
팍!
정원석의 한귀퉁이가 그의 손아귀에서 부스러졌다.
사람의 키만한 그 정원석을 짚고서 왕승고는 눈을 감았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사제는 타협을 알지 못했다. 그는 문중의 규약만을 생각했지, 사부께서
일맥단전하는 대한 수호신문의 제자를 둘을 둔 이유를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너는 달라야 한다. 너를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아니다. 이 나라 이 민족을 위해서…』
금곡노야, 그의 말소리가 지금도 귀에 쟁쟁했다.
이 나라, 이 민족을 위해서….
『나라를 세우는 건 기반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장사를 한다고 해도 점포가 없다면
기반을 잡을 수가 없는 법, 그런데 나라를 세우는데 실체가 없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왕승고의 물음에 금곡노야는 웃었다.
『왜 실체가 없다고 생각하느냐?』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금곡노야가 다시 말했다.
『그것을 위해서 고려가 필요하다. 만주에서 일어나는 고려… 조선을 싸잡고, 중원을
노릴 대고려. 그것이야말로 네 선조인 왕건시조가 고려를 건설한 참된 뜻이
아니겠느냐?』
왕승고는 미간을 찡그렸다.
하늘을 보는 그의 눈살이 찌푸려져 있었다.
『하지만 미진하다…』
겉으로 드러난 것, 금곡노야의 말은 참으로 원대하고 그의 포부 또한 정말 거대하였다.
그러나 미진했다.
이해할 수 없는 일….
나라를 세운다는 것은 정말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배후에서 조종만 하면서
나라를 세운다는 것인가?
『언제라도 오너라』
돌아서는 왕승고를 향해서 금곡노야가 한 말이었다.
언제라도 오너라….
복수를 하고 싶다면 언제라도….
『…』
왕승고는 입술을 물었다.
천부신공을 연습한 다음, 그의 심경은 이미 젊은이의 그것이 아닐 정도로 안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 일만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과연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러한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을 그는 예측하지 못하였었다.
누구라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상대는 사부의 사형, 사백(師伯)이다.
문중을 배반한 사형이라고 하지만 그 배반을 어떻게 봐야 할는지 지금 당장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를 막아야 한다… 대한수호신문은 민족정기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곳이지,
사욕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사부 한호국의 마지막 말이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사백인 금곡노야는 대범하고 큰 그릇이지만 그는 협소한 사람일까?
과연 그럴까?
『백두산으로 가거라』
사부의 마지막 말이 다시 떠올랐다.
백두산, 민족의 성산.
그곳에 사조(師祖)가 계시다.
대한수호신문의 계승자. 그분이라면 잘잘못을 명확하게 판단할 수 있으리라.
그를 떠올리자 왕승고는 마음이 조금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는 아직 수호신문의
제자일 수 없었다. 수호신문의 제자는 세상사에 간섭할 수 없다. 그가 만약 수호신문의
제자가 된다면 그는 고려의 복국을 포기해야만 한다.
「포기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까?
왕승고는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물었다.
저 멀리 어머님의 거처가 보인다. 무엇을 하시는 것인지 아직도 불이 꺼지지 않았다.
나라를 잃고 남편을 잃고 오직 복수만을 위해, 새로운 나라의 건설만을 위해 밤을 잊고
살아오신 분.
그 가슴에 못을 박고서 복국을 포기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었다.
왕승고는 천천히 머리를 저었다.
새로운 나라의 건설!
고통받고 오욕의 구렁텅이에 처박힌 민족을 영광의 자리에 되새김 할 수 있는 거대한
포석!! 사내라면, 대장부라면 누구라도 한번쯤은 승부를 걸어볼만한 정말 피끓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천부신공을 익히면서 마음의 평정을 얻은 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예 젊은이의
웅심(雄心)마져 사라진 득도(得道)의 경지에 이른 선인이 된 것은 아니었다.
덮어둔다.
그는 그렇게 정리했다.
당장 급한 것은 위기에 처한 만금전장을 살리는 길이다.
원의 세조 홀필열의 장보를 찾을 수 있다면 일단 당장 코앞에 닥친 위기를 벗어날 수
있다.
그 다음, 그는 고려를 건설키 위해서 요동으로 가야 했다. 그때 백두산으로 가서 사조를
만나보리라. 그 분을 만나보면 결론을 내릴 수 있으리라. 일단은 그렇게 결론을 내린
것이다.
『하지만…』
왕승고는 나직이 탄식했다.
그렇게 작정을 하였음에도 답답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내 나라, 내 민족을 위해… 라는 금곡노야의 말이 너무 강렬했던 까닭이다.
* * *
무려 50만의 대군을 휘몰고 달려온 이경륭의 거대한 군세는 산야를 가득 메우면서
북평성을 포위하였다. 말 그대로 개미새끼 한 마리 제대로 스며들 수 없는 포위망이
구축된 것이다.
일단 군세에서 상대가 되지 않는 연병(燕兵).
경병문의 패퇴를 이경륭은 단숨에 만회할 작정이었다. 성문만 깨친다면 그걸로 모든
것은 끝이었다.
자신을 보고 병법을 모른다고 비웃는 자들을 이경륭은 속으로 비웃었다.
그렇게 보여주고서 그는 북평성을 고립무원으로 만들어 버릴 작정이었다.
허허실실(虛虛實實)!
겉으로는 성을 공격하는 것처럼 하면서 뒤로는 병력을 돌려서 사방의 적을
소탕해버리면 하나 남은 북평성이야….
그것이 그의 복안이었다.
달밤.
이경륭은 팔짱을 낀채로 북평성을 바라보았다.
원의 수도였던 연경이다. 당연히 일반 성과는 달리 튼튼하고 거대하다. 쉽사리 함락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하지만 고립무원이 되면 끝이다!」
이경륭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오고(吳高)와 양문(楊文) 등이 요동에 있던 병을 이끌고 영평(永平)으로 향하고 있었다.
영평은 산해관(山海關)을 마주보는 전략요충이다. 그곳이 떨어진다면 북평은
그야말로 망망대해에 뜬 일엽편주(一葉片舟)의 신세가 되고 만다.
그저 포위하는 것만으로도 끝이 나리라.
힘들여 공격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상대가 먼저 공격해온다면 그거야 말로 그가 바라는 바였다.
각 성문에는 정예군을 대기시켜놓고 있었다.
문이 열리기만 하면 쏟아져 들어갈 태세를 언제 어느 때라도 갖추고 있는
일급군사들이었다. 그들이 앞장서 적들과 싸우는 사이에 포위한 군세가 노도와 같이
몰아친다.
연왕의 군대는 그 군세에 묻혀서 보이지도 않으리라.
그럼 끝이다.
생각에 잠겨 있던 이경륭은 하하 웃으며 곁에 가져다 놓았던 송화주(松花酒) 한잔을
들이켰다.
딱 한잔이었다.
언제나 더이상 하지 않았다. 특히 전장에 나와서는, 그가 그 한잔을 할 때는 승리를
자신할 때였다.
달빛은 북평성벽에서도 휘황했다.
벌써 한달이 되었다.
경병문의 군대를 기습하여 팔월 보름에 수많은 원귀를 만들어낸 그 날이.
연왕 주체는 성벽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가히 인산인해(人山人海).
50만의 대군이 몰려 있으니 어디를 보아도 군대의 진지였다. 기치창검이 달빛에
삼엄하게 빛나 지난날 경병문의 군세와는 매우 달라보이는 모습이다. 하긴 병력면에서
이미 5배나 차이가 나긴 했다.
『단속은 잘 하고 있나?』
연왕이 입을 열어 물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철저히 순번을 돌고 있습니다. 쥐새끼 한 마리 스며들지 못할
겁니다』
옆에 서 있던 장옥이 복명했다.
『좋아, 그런데…』
연왕은 말끝을 흐리며 옆을 보았다.
거기에는 도연이 묵묵히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이경륭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 것 같소?』
『생각을 하고말고가 없지 않겠습니까? 전하와 제가 이미 의논했듯이 우리의 손발을
잘라 고립무원으로 만들 시간을 벌고자 하는 것이겠지요』
바람이 불어 먼지를 날리며 세차게 깃발을 펄럭인다. 자욱한 황사에 저 거대한 군세는
몸을 뉘인채 북평성을 노려보고 있는 듯했다.
『잠시… 그 시간을 만들어줘야겠군?』
연왕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럼 이경륭이 좋아하겠지요』
도연이 얼굴 가득 주름을 지어보였다. 웃음이었다. 병든 호랑이(病虎)라는 별명에
걸맞은 묘한 웃음이었지만 그 웃음의 대상에게는 아마 웃음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터였다.
거기에 죽음이 깃들여 있으니까.
그때였다.
『이경륭을 한번 만나보시겠습니까?』
우렁찬 음성이 옆에서 들려왔다.
말썽꾼 주고후였다.
갑주를 갖추고 붉은 전포(戰袍)를 걸친 그의 모습은 체구와 어울려 당당했다. 하긴
누구보다도 용맹스러운 그였다.
『어떻게 말이냐? 소리라도 칠테냐?』
『하하하… 소자에게 맡겨주십시오』
주고후는 껄껄 웃더니 등에 메고 있던 강궁(强弓)을 꺼내 다른 사람의 화살보다 배는
커보이는 화살을 거기에 먹였다.
활이 만월처럼 휘었다.
쒸이이….
그리고 그 활이 현을 퉁겨내면서 세차게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화살은
그야말로 살처럼 어둠을 가르며 적의 진지로 날아갔다.
뚝!
바람에 당당하게 위용을 뽐내고 있던 대장기(大將旗)가 반동강으로 꺾어졌다.
느닷없이 날아든 거대한 강전(鋼箭)이 그 대장기의 깃대를 관통하자,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대장기가 부러지고 만 것이다.
일순, 정적이 감도는가 싶더니 이내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과연 둘째 저하의 신력은 대단합니다』
그의 무공이 과인(過人)함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들의 눈앞에서 그러한 광경을 보게
되자 도연등은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하하… 그게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대장기라고 하는 것은 이경륭을 의미하는 것과
같으니 어찌 이경륭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잠시 기다려보시지요』
주고후가 다시 웃었다.
호방한 웃음.
이럴 때의 그는 무용(武勇)이 과인한 참으로 걸출한 무장(武將)에 다름이 아니었다.
주고후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경륭의 진지에는 이경륭이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성벽 위에 있는 연왕을 발견하자 그에게 가볍게 포권을 해보였다.
『이경륭! 황숙(皇叔)께 그런 식으로 예를 하다니, 죽어 시체도 찾지 못하고 싶으냐?』
노한 주고후가 금방이라도 성벽에서 뛰어내릴 듯이 고함을 쳤다.
황족의 위세는 가히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였으니, 누구라도 황족을 본다면 한쪽
무릎을 꿇어 궁신(弓身)의 예를 갖추어야만 했던 것이 당시의 예절이니 이경륭의 지금
태도는 불경하기 이를데 없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 정노대장군(征虜大將軍)으로서 이 자리에 있는 것이오! 나의 임무는 감히
황상을 반하고 반역을 일으킨 반역자를 잡아들이는 것이니, 어찌 황상의 명을 거역할
수 있으리오? 지금이라도 죄를 뉘우치고 스스로 투항을 한다면 영혜(英慧)하신
황상께서 어찌 숙부를 모질게 대하시겠소?』
그의 외침에 연왕은 침중히 대꾸했다.
『나의 이 행동은 부득이한 것! 당금 황제의 옆에는 간신들이 붙어서 황제의 총기를
흐리고 있으니, 내 황실의 윗사람으로서 어찌 그들을 두고 볼 수 있겠느냐? 그
간신들만 사라진다면 본왕은 언제라도 이 일을 사과하고 군세를 돌릴 수 있다』
『말도 아니되오! 제태와 황자징 등의 대신들은 황상을 곁에서 모시는 충신들이며,
태조께서 인정하신 분들이오. 그런 분들을 필요에 따라 간신이라고 몰아버린다면 누가
충신이 될 수 있겠으며, 간신 아닌 사람이 또 어디 있겠소이까?』
이경륭은 눈을 부릅뜨고서 소리를 질렀다.
거리가 멀어서 밤이라고는 하지만 소리를 지르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 까닭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소! 당장 창을 버리고 투항한다면…』
소리치던 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성벽 위에서 주고후가 예의 강궁을 들어 자신을 향해서 시위를 당기고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쒸아앙….
고막을 찢는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놀라운 속도로 이경륭을 향해서 날아들었다.
『맙소사!』
『위험합니다!』
탄성과 놀람에 찬 외침들이 엇갈려 터져나왔다.
팡! 푸르르르….
어린아이 팔뚝만한 강전이 방금까지 이경륭이 있던 곳을 통과하여 그의 거처인 장막을
꿰뚫고 내부의 나무기둥에 박혀 남은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전신을 벌벌 떨었다.
떨기는 혼비백산하여 땅바닥에 엎드린 이경륭도 마찬가지였다.
그 광경을 보고 주고후가 홍소(哄笑)를 터뜨렸다.
『좋아, 좋아! 이제야 좀 보기가 좋아졌구나. 머리 나쁜 인간들은 꼭 가르쳐줘야만
된다니까. 으핫하하…』
그의 웃음소리가 어둠을 뚫고 메아리치자 다른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일제히
터져나왔다. 북평성이 흔들릴 정도였다.
황망하게 땅바닥에 엎드려 화살을 피한 이경륭은 치욕감에 이를 갈았다.
하지만 다시 화살이 날아들까봐 감히 더 이상 그 자리에서 얼쩡거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는 부장(部將)들의 호위를 받으며 거처를 한참 뒤로 물려야 했다.
생각할수록 이가 갈렸다.
밤이 깊어가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수하들의 앞에서 그런 수모를 당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잠시 눈을 붙이고자 새로
마련한 거처에 누웠지만 가슴이 벌렁거려서 누워있을 수가 없었다.
옛날부터 개차반이라는 소리를 듣긴 했지만 저토록 무지막지한 놈일 줄이야.
이경륭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게 아무도 없느냐?』
『예, 장군!』
장막을 걷고 호위군졸이 나타났다.
『하소(河紹)를 들라 일러라!』
잠시후에, 그의 부장중 하나인 하소가 나타났다. 옛날부터 그를 따른 그는 그의
오른팔과 같은 존재일 뿐 아니라, 늘 그의 곁에서 조언을 아끼지 않는 존재였었다.
『당장 성을 공략할 방도가 없겠느냐?』
그의 물음에 하소의 얼굴이 굳어졌다.
『생각을 바꾸시렵니까?』
『그대로 두고본다면 사병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전장에 나선 장수는
병졸들의 사기도 고려해야 하는 법이니 뭔가 움직임을 보여줘야 되지 않겠느냐?』
『그건…』
하소가 난색을 떠올렸다.
『역시 하지 않는 것이 옳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이대로 있다면 내꼴이 뭐가 되겠느냐?』
이경륭이 노해 탁자를 두드렸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정히 그러시면 특공대를 투입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특공대?』
『그렇습니다. 몸이 날랜 군졸 십여명을 골라서 은밀히 북평성으로 투입, 연왕의 목을
치는 것이지요』
일순, 어이없다는 빛이 이경륭의 얼굴에 떠올랐다.
『그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느냐?』
『당연히 불가능하겠지요. 하지만 뭔가 해야 한다면 현재로서는…』
『음…』
이경륭이 신음했다.
『쓸데없는 짓이야. 겨우 들어갔다고 할지라도 잡혀서 성문에 효수(梟首)된 목이라도
걸리게 되면 그야말로 모양같지 않은 일이 되고 말 것이다』
그가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 * *
『오고가 산해관에서 나왔단 말인가?』
연왕이 중얼거렸다.
강음후(江陰候) 오고라면 요동의 병력을 이끌고 있는 자다. 요동의 병단은 외적을 막기
위한 병력인 만큼 예로부터 강병(强兵)이었다. 그들과 함께 누차 북원을 정벌한 적이
있던 연왕은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그가 이끄는 병력들이 이미 영평에 도달해서 공격을 시작한 것
같습니다』
도연의 말에 연왕의 안색이 굳어졌다.
영평이 떨어지면 그야말로 북평성은 고립무원이 될 터였다.
『이경륭이 머리를 썼군…』
연왕이 다시 중얼거렸다.
『제가 가겠습니다! 가서 당장 놈들을 쫓아내고 영평을 구하지요!』
주고후가 가슴을 두드렸다.
『만약 잘못된다면 자칫 헤어날 수 없는 구렁텅이에 빠질 가능성도 있는 일이다. 쉽게
말할 일이 아니다. 신중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일이다』
옆에서 주고치가 침착한 어조로 참견했다.
『내가 가서 안된다면 형님이 가면…!』
발끈하여 눈을 부릅뜨던 주고후는 연왕의 눈길을 의식하고는 슬그머니 말꼬리를
흐렸다.
제아무리 무서운 것이 없는 주고후일지라도 감히 아버지 앞에서 뭐라고 할 수야 없는
일인 까닭이다.
『…?』
연왕은 도연을 건너다 보았다.
그의 눈길을 느낀 도연이 입을 열었다.
『뜻대로 하십시오. 이곳은 세자 전하께 맡기셔도 잘 하실 수 있을 겁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뜻밖의 말에 주고후가 눈을 끔벅거렸다.
도연의 말이 무슨 뜻인지 장내에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둠에 잠긴 북평성.
수많은 사람들의 물결에 묻힌, 어떻게 보면 망망대해에 뜬 한조각 조각배와 같은
형상이 되어버린 북평성이지만 다문 조개입을 벌리는 것처럼 그 성을 파(破)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곳에서 연왕은 제장(諸將)들을 모아놓고 말하고 있었다. 이번 싸움이 앞으로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인가를 잘 알기 때문이다.
『이경륭의 작전은 미련한 듯하면서도 실상, 쓸모가 있는 것이기도 하다. 고립무원이
되면 끊임없이 후방지원을 받을 수 있는 그들과 우리의 싸움은 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까닭이다. 하지만…』
연왕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다. 그것은 오고가 나를 잘 알고 있다는 것이지』
연왕의 얼굴에 미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는 나를 잘 알기 때문에 만약 내가 북평을 떠나 영평으로 달려오고 있음을 듣게
되면 겁을 집어먹고서 눈치를 볼 것이고 내가 정말 거기에 도달하면 그대로 도주할
것이 분명하다』
『그가 그렇게 겁이 많습니까?』
잠시 머뭇거리던 장신이 물었다. 아무리 연왕이 무섭다고 하더라도 그의 이름만 듣고
그처럼 용맹한 요동군단을 거느린 장수가 그냥 군사를 되돌린다는 것은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겁이 많은 것이 아니라, 아바마마의 용맹(勇猛)을 옆에서 봐왔기 때문이오. 잘
안다는 뜻입니다』 옆에서 주고치가 설명하자 장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를
옆에서 본 사람이라면 그럴 수도 있으리라.
『언제 출발하시겠습니까?』
도연이 물었다.
『지금!』
연왕이 말했다.
….
묘한 술렁임이 좌중에 일어났다.
옆에서 듣는 사람에게는 요령부득인 소리였다.
겹겹이 포위된 북평성에서 어떻게 나갈 것이며, 설혹 그 인산인해를 뚫고 나간다고
한들, 뒤를 쫓는 50만의 군세와 싸우기 바쁠텐데 언제 영평까지 간다는 말인가?
이경륭이 아무리 바보라도 그렇지, 그걸 그냥 내버려두고 갔다오시오 하기를 바란다는
말일까?
『국사(國師)께서 좀 설명해주시오!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주고후가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희미한 웃음이 도연의 얼굴에 떠올랐다.
『우리 군세는 이미 외부에 집결해 있습니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성밖에 있는
거지요. 전하를 비롯한 여러분들이 나가서 합류하기만 하면 됩니다』
『어, 언제 나갔단 말이오?』
주고후가 눈을 크게 떴다.
『이경륭군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서 조치했던 일입니다』
『그, 그런…』
주고후가 신음했다.
『이경륭의 군대는 우리가 성문을 열고 나와서 그들과 싸우기를 바라고 포위망을
느슨하게 하고 있습니다. 여지를 주고 있는 거지요. 그틈을 타서 야밤에 북평을
빠져나가면 됩니다』
『만약 그것을 알고 성을 공격하면 어떻게 됩니까? 아바마마께서 안계신 것을 알게
되면 이경륭이 절대로 그냥 있지 않을텐데?』
『그 책임은 세자저하께서 지셔야 합니다』
도연이 말을 잘랐다.
전시(戰時)다.
모든 것을 다 돌아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경륭이 그것을 알게 된 것은 그날 저녁무렵이 되어서였다.
뭔가 이상하다 하고 있었지만, 설마 그밤으로 성을 빠져나갔을 것은 생각지 못했다.
더구나 군대를 몰고 영평을 향해가고 있다니…. 그러나 그 군대가 어떻게 성안을
빠져나왔을까는 현재로서는 별 의미가 없었다.
지금은 그 뒤를 추격할 것인가, 아니면 북평성을 공격하여 함락할 것인가. 그중 하나를
택일해야 할 순간이었다.
『공격한다!』
묵묵히 눈을 감고 있던 이경륭이 눈을 뜨면서 명령했다.
북평성이 떨어지면 모든 것은 끝이다.
그런 의미에서 연왕은 최악의 선택을 했다! 그것이 그가 내린 판단이었다.
강음후 오고는 강병, 요동의 군단을 이끌고 영평을 공격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과연 연왕의 판단대로 연왕이 군대를 몰고 눈썹이 휘날리도록 달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정말 군대를 철수하고 말았다.
최소한 그곳에서 갑론을박하여 연왕과 싸우면서 시간을 끌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이경륭의 생각을 뒤집는 일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 뒤에 연왕이 군대를 물리면 또 내려올 수도 있는 일이라, 연왕은 더 급히
말을 몰아 오고의 군대를 쫓아 그를 격파해버렸다.
그런 상황이 된 것을 모르는 이경륭은 연일 북평성을 공격하고 있었다.
연왕이 없는 이상, 북평성의 함락은 시간문제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세자인 주고치는 평소답게 침착하게 대응하고 있을 뿐, 아무리 욕을 하고
유인을 해도 절대로 문을 열고 응전하지 않았다. 그저 문을 닫아건 채로 굳건히
지키고만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자 상황은 교착상태.
북평성은 이미 여러번 이야기했듯이 원의 대도였으니, 그 견고함이야 두말할 나위가
없어서 일시지간 성을 함락할 재간이 없었다.
북방의 날씨는 그새 10월로 들어서 추워지기 시작하였다.
날씨가 추워지기를 내심 기다렸던 연왕은 그가 쉽사리 돌아가지 않자 이경륭이
방심하고 있음을 탐지하고는 회주(會州)에서 군을 오로(五路)로 나누어서
장옥(張玉)을 중군(中軍)으로 하고 주능(朱能)을 좌군, 이빈(李彬)을 우군, 서충(徐忠)을
전군(前軍), 방관(房寬)을 후군으로 해서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전황이 교착상태에 빠져서 내심 초조해하고 있던 이경륭은 연왕이 돌아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정촌패에 군대를 물려 그를 상대하려 하였다.
하지만 연왕이 다짜고짜 정예기병을 몰고 공격해 들어와서 그들의 진지를
휘저어버리자 이경륭의 전군에는 큰 혼란이 일어났다.
거기에다 그처럼 싸움을 걸어도 전혀 반응이 없던 북평성문이 활짝 열리고는 주고치가
군사를 휘몰아 뒤를 치니, 앞에는 호랑이요, 뒤에는 늑대를 만난 꼴이라 이경륭의
군대는 일패도지(一敗塗地)하여 사방으로 도주하고 말았다.
앙앙불락, 이경륭은 덕주(德州)로 돌아가서 다음해 봄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 싸움에서 잃은 군사가 무려 10만여.
그것은 이제부터의 싸움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극명히 드러내주는 참패였지만 후임이
마땅치 않은 조정은 전전긍긍할 뿐,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 상태에서 연왕은 건문제에게 상소를 올린다.
『나의 이 거병은 오로지 천자의 주위에 있는 간신들을 몰아내기 위한…』 예의
정난(靖難)의 변(辯)이다.
심약한 건문제는 고민 끝에 결국 제태와 황자징을 관직에서 파하고 마니,
기세싸움에서 이미 황제의 패배는 드러나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건문원년 11월의 일이다.
* * *
북방에서의 격렬한 전투는 남의 일 같다.
섬서에 자리한 장안(長安)은 그 옛날 당나라 때의 번영을 기리면서 여전히 활발했다.
중국의 육대고도(六大古都)중의 하나인 이곳은 옛 왕조의 도읍이라는 점에서 현재의
북평과 비슷한 곳이다. 넓은 길과 잘 정돈된 거리등이 그러하고 수많은 고적들이 또한
그러했다.
『악!』
비명소리.
장안성 내의 동대로(東大路).
넓은 길이 의미하듯이 길의 좌우로는 언제부터인가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상점을
이루었고 그 옆으로는 상점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좌판을 벌여 장터를
이루었다.
거기서 조금 떨어진 곳은 고관대작이나 부호들이 살고 있는 곳이고, 또 전면으로는
표국이나 큰 상점들이 들어서 있으니 그야말로 장안성의 중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기에서 한 사내가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지고 있었다.
『아이고오, 여보! 이 놈들아, 이 나쁜 놈들아! 내 아들이 무슨 잘못이 있다고 이런…』
뒤이어 통곡소리가 들려왔다.
한무리의 사람들이 둘러선 가운데, 쓰러진 사내를 붙들고 노파가 통곡을 하고 있었다.
노파가 부둥켜안은 사내는 이십대 후반쯤 되었을까? 섬약해보이는 체질이다. 하지만
나름으로 기품이 서려 글줄이나 읽은 선비의 느낌. 그러나 그 얼굴은, 낡은
유삼(儒衫)은 흙투성이에다가 피투성이로 범벅이다. 그 앞에 우뚝 선 것은 화복의
중년인과 그를 호위하듯이 늘어선 장한들. 덩치도 덩치지만 각기 검도를
패용(佩用)하여 한가락 하는 자들이 분명했다.
『한번만 더 지랄떨면 아예 목을 비틀어버릴 게다! 대야(大爺)께서 그만큼 해줬으면
되었지, 어딜 발광이야? 때려죽일 놈 같으니…』
피투성이가 된 유생의 앞에서 삼십대의 장한이 탈탈 손을 턴다. 안쓰러운 빛이
주위에서 힐끔거리는 사람들의 얼굴을 훑고 지나간다.
『그만해두고 가자』
차가운 눈빛으로 쓰러진 유생을 바라보던 화복중년인이 등을 돌렸다.
『계산은 이미 다 했어. 한번만 더 대야의 나들이에 시비를 걸면 그날로 날받는 줄
알아!』
말로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장한이 발로 툭, 유생을 한번 차고는 몸을 돌렸다.
『아이고, 이 천하에 나쁜 놈들아… 우리 아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이 천벌을 받을
놈…!』
통곡을 하던 노파가 문득 입을 다물었다.
아들인 듯한 유생을 부축하고 있던 그녀가 갑자기 목을 치켜들고서 하늘로 훌쩍
떠올랐다.
등을 돌렸던 장한이 어느새 몸을 돌려 그녀의 멱살을 잡아올린 것이다.
노파의 얼굴이 단숨에 창백해졌다.
『한번만 더 아가리를 함부로 놀린다면, 알지?』
그가 무섭게 눈을 부라렸다.
『네년은 물론이고 네 아들놈까지 다 작살이야. 그까짓 계집이야 또 얻으면 그만이지
그 일로 다 뒈지면 누가 손해겠어? 안그래?』
장한이 흉악하게 웃는 것을 본 노파가 공포에 하얗게 질려서 부지중에 고개를
끄덕였다. 켁켁, 숨이 막혀서 버둥거리자 장한은 만족한 표정으로 그녀를 유생의
위에다 굴려버렸다. 그리고 몸을 돌리던 그는 안색이 조금 달라졌다.
그의 앞에 한 사람이 우뚝 서 있었다.
베옷을 입었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은 뒤에서 질끈 한번에 묶었다. 그리고
옆구리에는 싸구려로 보이는 청강장검(靑鋼長劒) 한 자루가 달려 모양을 잡는다.
『뭐야?』
장한이 눈을 험악하게 부라렸다.
대충 이 정도면 마무리가 된다.
하지만 베옷의 청년은 미간을 미미하게 찡그린 채 그의 뒤에서 아들을 끌어안고
끅끅… 울음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있는 노파와 꿈틀거리고 있는 유생을 보고
있었다.
아예 신경도 쓰지 않는 듯한 모습에 장한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뭐 이런게 다 있어? 너…!』
툭!
손을 내밀어 청년의 어깨에다 손을 얹으며 뭐라고 말을 하려던 장한은 갑자기
천지개벽을 하여 하늘과 땅이 거꾸로 뒤집어지는 것을 경험해야 했다.
쾅!
별이 번쩍이고 지독한 통증이 엄습하는 것을 채 느끼지도 못하고 그는 혀를 빼물고 그
자리에 늘어지고 말았다.
눈깜박할 사이에 장한을 거꾸로 처박아버린 청년은 놀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있는
노파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에게 안긴 청년을 보았다.
『제가 잠시… 아드님을 봐도 되겠습니까?』
『그, 그건…』
노파가 대답을 하기 전에 청년은 유생의 맥을 잠시 짚어보더니, 가슴께를 슬쩍 손으로
훑었다.
우두둑!
끔찍한 소리가 나면서 유생이 괴로운 신음을 토해냈다.
『무, 무슨 짓이오?』
노파가 놀라 그를 밀어내려고 했다.
『기혈이 상하고 가슴의 늑골이 두개나 부러졌습니다. 잠시 뼈를 맞춘 것뿐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말을 믿어야 할지 아닌지, 노파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일시지간 입을 열지 못했다.
『가, 감사하오…』
입을 연 것은 거의 정신을 잃었다가 그 고통으로 정신을 차린 피투성이 유생이었다.
영락한 벼슬아치의 집안, 몸이 약한 유가정(劉可正)은 다시 집안을 일으키고자 공부를
거듭했지만 거인(擧人)에 올랐을 뿐이다.
영락한 집안에서 돈 들어오는 곳 없이 공부만 하니, 자연 살림살이는 여인네의 것이 될
수밖에 없고 부인은 그의 뒷바라지를 위해서 온갖 일을 다함에도 싫은 얼굴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런 그녀를 위해서라도….
유가정은 이를 악물고 공부를 했지만, 장안성 내에서도 손꼽히는 세도가인
사공탁(司空鐸)이 그의 부인을 보고는 첫눈에 반하면서 불행은 시작되었다.
그는 유가정이 말을 듣지 않자, 수하들을 시켜서 그 부인을 납치해갔다.
그리곤 부인을 찾아온 유가정을 개패듯 패 내쫓으면서 내가 언제 네 마누라를
데려갔느냐고 호통을 쳤다. 그렇게 피투성이로 널부러진 그의 앞에다 사공탁은 수하를
시켜 은자 열냥을 던져주었다.
인생이 불쌍해서….
그렇게 웃는 그들에게 달려들었다가 운신도 할 수 없이 맞기를 몇차례.
오늘도 출타했다가 돌아오는 사공탁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서 아내를 돌려달라고
애원하다가 이 지경을 당한 것이다.
사정을 들은 베옷의 청년은 굳은 얼굴로 잠시 생각에 잠긴 얼굴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 자가 정말 부인을 납치해간 것이 분명합니까?』
『장안성에 사는 사람이면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힘이 없어서 말을 못하고
있을 뿐이지!』
유가정의 홀어머니가 치를 떨면서 소리쳤다.
베옷의 청년은 주위에 몰려선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
누구도 부정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서는 사람도 없었다. 그 의미는 좀 전에 이곳을 떠난 화복의
사공탁이 정말 이 거리에서 힘을 가지고 있으므로 후환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왜 관아에 호소하지 않았습니까?』
『지부까지 그자의 친구인데…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증거도 없는 일을
무고했다고 열흘이나 관아에서 죽다 나왔습니다』
유가정이 이를 악물었다.
베옷의 청년은 어이가 없는 표정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나를 사공탁의 집으로 안내해주겠습니까?』
『어, 어쩌시려구요?』
놀란 눈으로 노파와 유가정이 그를 올려다 보았다.
『정말 부인이 그곳에 있다면 찾아드리겠습니다』
『!』
그 말에 유가정은 입을 딱 벌렸다.
사공탁의 저택은 정말 컸다.
문앞에 떠억하니 버티고선 한쌍의 돌사자만 해도 위풍이 당당하여 고관대작의 저택
못지 않아 그가 누리는 위세를 짐작할만 했다.
『저, 정말 괜찮겠습니까?』
그 앞에서 가슴을 움켜쥔 유가정이 주춤거리며 다시 물었다.
베옷의 청년은 그를 보면서 희미하게 미소했다.
『유형께선 욕된 삶에 아직도 미련이 남아 있습니까? 돌아가고 싶습니까?』
찰나간, 강한 불꽃이 망설임없이 유가정의 눈에서 피어올랐다.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공탁의 수하들은 수가 많습니다. 형장의 무공이
높다해도 중과부적. 놈들에게 당하게 된다면 공연히…』
『만부막적(萬夫莫敵)이라는 말의 뜻을 아십니까?』
베옷의 청년이 되묻는 말에 유가정은 말을 잇지 못했다.
『이제 그 말의 뜻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될겁니다』
청년은 그 말을 끝으로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유가정과 홀어머니는 기대와 걱정 등의 복잡한 감정이 한데 어울린 눈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곳까지 안내를 하긴 했지만 기대를 한 것은 아니었다. 정말
사공탁은 만만한 자가 아닌 것이다. 흥미로운 구경거리가 생길 것 같다는 소문이 벌써
퍼진 것인지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모여들어 담장 귀퉁이에서 고개를 빼밀고 있는
모습들이 보였다.
베옷의 청년은 거대한 사공탁의 저택 문앞에 섰다.
첫댓글 즐감~~
잘~감상~~고맙습니다~~~
ㅈㄷㄳ
즐~감 하고 갑니다.
감사...
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