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군 의장대와 군악대가 행사에 참여했습니다(윤흥신공이 다대포첨사로 순절) 그러나 부산작전사령관은 대리를 보내고 참배하지 않았네요-_-;; 공의 순절비 앞에서 제례를 지내고 있습니다. 공은 임진왜란 첫날 왜적을 어렵게 물리치고 이틀째 (음력4.14) 피하자고 건의하는 부하 장졸에게 "죽음이 있을뿐"이라고 꾸짖고 순절하셨습니다. 향년 52세였습니다. 윤흥신공의 순절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다가 조엄(일본에서 고구마 도입하신 분)이 통신사정사로 다녀온 후 사적을 정리하고 그의 아들 조진관이 비문을 쓰고 그이 손자 조인영의 노력으로 순절비를 세웠습니다(1841년, 순국 후 248년). 향사는 엄숙하기만 해야 할까요? 어른 뿐만 아니라 애들의 떠들썩한 분위기도 있으면 이상할까요? 임진왜란의 의미를 되새긴 하루였습니다...
윤공단 경내에 규모가 꽤 큰 당집이 있는데 그 의미는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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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훌륭한 모습에 후손 으로서 감서를 드릴 뿐일쎄 !~
열선조의 나라사랑 자랑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