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쌀 구하려 1년에 100번씩 출장심청이가 공양미를 모으듯 일 년 내내 쌀을 사러 다니는 남자가 있다. 한해 구매하는 쌀은 6만t. 지난해 우리나라 쌀 생산량이 350만t이니까, 전체 쌀의 1.7%가 이 남자 손에 들어간다. CJ제일제당의 식품구매 담당인 정준기(38) 과장이 그 주인공이다.
정 과장은 ‘대한민국 자취생의 아빠’로 불린다. CJ제일제당의 즉석밥 ‘햇반’은 그가 산 쌀로 만들어진다. 햇반은 지난해 5억개(210g 기준) 가까이 팔렸다. 국민 1인당 10개씩 먹은 셈이다. 26일 그는 “좋은 품질의 쌀을 좋은 가격에 사는 게 제 업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가 햇반용 쌀 구매업무를 맡은 건 올해로 딱 10년째다. 정 과장은 “대학 때부터 자취하면서 햇반을 자주 먹던 터”였다.
매년 100번씩 출장을 가는데 가장 바쁜 건 매년 9~10월이다. 한해 한 번 수확하는 쌀의 특성상 수확기에 품질과 가격 등이 정해지기 때문이다. 이때를 위해 지속해서 지방을 돌며 필요한 정보를 얻는다. 구매 협상과 계약을 위한 밑 작업이다. 그는 미곡종합처리장(RPC)을 가진 업체들과 거래한다. 농협 조합장 선거도 꼼꼼히 챙긴다. 누가 조합장에 당선되는지에 따라 쌀값에도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한해 6만t의 쌀을 사는 남자. CJ제일제당 정준기 과장. [사진 CJ제일제당]
전문성을 쌓기 위한 노력도 부지런히 했다. 2017년엔 일본에서 밥 소믈리에 자격증을 땄다. 국내엔 없는 자격증이다. 그는 ”쌀의 종자부터 재배, 수확, 도정, 그리고 밥 짓기까지 밥이 완성되기까지 전체 과정에 대하여 공부하고 답변하게 돼 있다”며 “업무를 통해 식재료로서 쌀은 잘 알았지만, 밥이 되는 과정까지 숙달하게 됐다”고 했다.
밥 소믈리에이긴 하지만, 햇반보다 맛있는 밥을 지을 자신은 없다고 했다. 정 과장은 “맛있게 밥 짓기 위해 좋은 쌀을 골라내고, 잘 씻고, 어떤 밥솥이나 어떤 도구로, 어떤 물로 밥을 만드느냐에 따라 밥맛이 다 다르게 변하기 때문”이라며 “그런 점에서 고민 없이 햇반을 먹는 게 가장 합리적”이라고 주장했다.
햇반 연도별 매출.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버릇도 생겼다. 밥을 먹기 전 밥알을 유심히 본다. 좋은 쌀인지 나쁜 쌀인지, 쌀눈이 있나 없나 하고 보는 식이다. 오래 묵은 밥은 잘 먹지 않는다. 햇반은 당일 도정한 쌀로 만드는 게 원칙이기 때문이다. CJ제일제당은 부산의 자체 시설에서 하루 200t의 쌀을 도정한다. 365일 쉼 없이 공정이 이뤄진다.
쌀 떨어져 위기도
위기도 있었다. 그는 2018년 가을이 가장 힘들었다고 했다. 정 과장은 “2018년 8월부터 석 달 동안은 마치 ‘보릿고개’처럼 돈이 있어도 좋은 품질의 쌀을 구하기가 어려웠다”고 했다. 쌀 수확까지는 두 달 정도 시간이 남았는데 햇반이 잘 팔리다 보니, 10월까지 써야 하는 쌀이 8월에 이미 소진된 것이다. 원료가 없어 공장은 멈출 위기에 놓였다.
정 과장은 “그해만 4000t가량의 쌀이 부족했다”며 “거의 두 달을 매일 ‘심청이가 공양미를 얻는 심정’으로 거래업체에 전화를 돌렸다”고 했다. 오랜 세월 의리를 지켜온 탓에 10여 곳의 협력업체가 어렵사리 쌀을 모아줘 필요한 쌀을 확보했다. 그는 “일부 협력업체는 시장가보다 낮은 값에 쌀을 공급했다”며 “당시의 고마운 마음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즉석밥 시장 점유율.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지속해서 줄던 쌀 소비량이 최근 하락세가 주춤한 점에선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햇반 같은 가정간편식(HMR) 제품 소비가 늘어난 덕이다. 정 과장은 “수년간 정부도 잡지 못했던 소비자의 식습관 변화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자부심을 느낀다”고 했다.
꿈은 곡물류의 세계적인 구매 전문가가 되는 일이다. 정 과장은 “쌀 뿐 아니라 대두·옥수수·밀 등 다양한 곡물에 대한 구매 전문가로 성장하고 싶다”며 “국경을 넘어 해외 소비자에게도 더 맛있는 밥을 드리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