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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사천 봉명산(407m)
o 가는 길 : 광주→곤양나들목→다솔사→정상→ 봉암산(서봉암)→양촌마을→다솔사
※ 산행시간 : 4시간 20분(5Km)
o 참석자(6명) : 경문, 기주, 동은, 동진, 순태, 환기
o 운전 : 기주, 환기
사천 봉명산에 가려면 광주에서 호남, 남해고속도로를 타고 진주방향으로 가다가 곤양나들목으로 들어선 다음 다솔사(절)를 찾으면 된다. 광주에서 08시에 출발하여 사천 다솔사에 09시 50분에 도착하였다. 사천 봉명산(407m)은 ‘봉황이 우는 산’으로 ‘이명산’이라고도 하고, 낮은 산이지만 울창한 숲과 경치가 수려하여 삼림욕장으로 각광받고 있다.
산에는 신라 지증왕 때 창건한 다솔사와, 보안암 석굴, 이맹굴, 서봉암이 있고, 봉암산, 천왕산 등을 연결하는 산책로가 있다. 정상에 서면 한려해상 국립공원인 다도해를 관망할 수 있어 시야가 탁 트인다.
산행 기점은 다솔사다. 다솔사는 응진전, 극락전과 함께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샘물은 맛이 좋다. 다솔사에서 약수 한 사발을 마시고 곧장 산으로 향했다. 절은 하산 할 때 들르기로 했다.
다솔사에서 정상까지는 짧은 거리지만 오르막길이어서 먼 길을 달려온 우리들은 금방 지쳐 잠시 탁자에 앉아 쉬었다. 조금 걷다가 다시 휴식을 취하고 나서야 정상을 밟았다.
봉명산(407m) 정상에는 ‘봉명정(鳳鳴亭)’이라고 쓰여진 지붕 없는 정자가 있는 데, 이곳에 오르니 남해안 해안가를 볼 수 있었다. 마침 이 곳에서 쉬고 있던 이곳 출신 산행객들은 ‘서봉암은 석구봉 도사가 주석했던 곳이고, 맛집으로는 해안가에 ‘술상’이 있다고 친절하게 알려 주었다.
산행길에는 군데군데 탁자나 의자가 있어 참 편안하게 쉴 수 있다. 봉명정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포도, 사과, 복숭아는 제 철 과일이요. 맥주, 복분자술, 매실주는 혈액 순환에 으뜸이요. 새우깡, 소고기 육포는 안주로 안성마춤이고, 모시잎떡과 또다른 떡도 요긴하게 영양을 보충해주고, 광어회는 언제 먹어도 맛있도다.
다솔사→봉명산→봉암산으로 이어지는 산길은 야트막한 산인지라 산보코스에 알맞은 곳이다. 이 곳은 당국에서 숲가꾸기를 해 놓아 소나무들이 쭉쭉 자라는 모습이 든든했다. 아름드리 소나무도 가끔 만났는데 정겨웠다. 봉명산, 봉암산은 소나무가 대부분이다. 마이산에 있는 돌탑도 이 곳에 있다. 누구의 간절한 바램이 이 돌탑을 쌓게 했을까?
봉암산 가는 길 옆에는 봉긋한 봉분이 세월에 씻겨 평평하게 된 고총(古冢)이 있었다. 혼유석과 망부석이 제대로 갖추어졌으나 돌보는 이 없어 방치된 것이리라. 고총의 주인은 살아서 고독했을까?
살아서 고독했던 사람
그 빈자리가 차갑다.
아무리 동백꽃이 불을 피워도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그 빈자리가 차갑다
-그리운 바다 성산포중에서, 이생진-
봉암산 정상을 700m 앞두고, 서봉암 가는 길이 나타났다. 환기와 나는 서봉암을 가기로 했고, 경문, 기주, 동은, 순태는 봉암산을 다녀오기로 했다. 그리고 되돌아 와서 갈림길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다.
서봉암(棲鳳菴)은 ‘봉황이 깃드는 곳’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앞 산은 문필봉이요. 뒷산은 봉암산이니 예사롭지는 않았다. 산세가 낮지만. 그리고 옛날 석구봉스님이 주석했던 암자다. ‘설사서사나무 다하사 다불’이라는 주문(呪文)으로 날려 알려진 그는 1970년 중반 언론에 대서특필할 정도로 선세이션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환기와 나는 보현보살을 모신 서봉암에 들어가 3배를 마치고 나왔다. 환기가 3배를 하는 모양이 지극정성이어서 셔터를 눌러 인증을 남겨 놓았다. 환기는 관세음보살을 모신 관음전에도 들러 3배를 하더군.
사람에게는 눈, 코, 귀, 혀, 뇌 등 5가지 의식작용을 하는 곳이 머리에 집중되어 있으므로 머리에 항상 열이 나는 데, 머리의 열을 내려주는 것으로는 차(茶), 절(拜), 잠(宿)이 묘약이다.
그 중에서 절은 겸손과 평정심을 주는 것이기에 이를 세상에 회향 할 수 있다면 그것이 참살이 아니겠나? 그래서 나는 절에 와서 절을 넙죽 올리는 것이다. 종교가 다르다고해서 절에 가서 절을 하지 않은 것은 ‘한없이 겸손해야 하는 하심(下心)’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산중의 도인들은 절을 많이 하게 된다. 그게 불법(佛法)인지, 일상사인지 모르지만 실제로 많은 절을 하고 있고, 절은 수행의 한 방편이기도 하다. 어느 도인은 ‘하루 300번씩 절을 하라. 잔병이 없어지고, 성품도 겸손해진다.’고 할 정도다.
내가 어느 책에서 읽기를 북한산 도선사에 청담스님이 주석하고 계실 때, 국내 최고의 대학 병원에서 암 수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시한부 6월’의 진단을 받은 중년 여인이 도선사에 찾아와 청담스님보고 무작정 ‘살려 주세요!’라고 하였단다.
이에 스님은 설명도 없이 ‘그럼 매일 3천배를 하거라’고 하셨는 데, 몸도 가눌 수도 없는 환자는 처음에 부축을 받아가며 절을 하기 시작하여 수 주일을 걸려 마침내 하루에 3천배를 하기 시작하였고, 3천배를 하는 동안 서서이 건강이 좋아져 바라는 대로 암을 완전히 치료한 일이 있었다. 암을 수술했던 의사가 ‘이것은 기적이다’라고 했을 정도다. 암을 치료한 게 ‘절(拜)’이니 신통방통한 일 아닌가?
절이란 ‘자신을 낮추는 일’이지만 전신운동이기에 어려운 질병마저 치료하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3천배가 어려우면 3백배를, 그것도 어려우면 3십배를, 이것도 힘든다면 3배라도 해야 할 것 아닌가?
우리가 서봉암에서 3배를 마치고 나오는 데 그 인기척에 젊은 여스님 한 분이 우리에게 다가와 ‘어디에서 오셨어요?’하고 묻길래 나는 ‘전남 광주에서요.’ 라고 말하니 염화미소로 답해 준다. 작으마한 체구에 얼굴이 한없이 맑디 맑은 모습이었고, 파르라니 깍은 머리는 반짝이고 있었고, 먹빛 옷은 수행자답게 단정했다. 23~24살쯤 되어 보였다. 그럼에도 순수성은 서너살 어린이만큼 맑고 고운 자태였다.
어쩌면 저리 고울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순수한 모습 그 자체였다. 티하나 없는 청정무구한 모습이었다. 반대편에 서 있는 나는 세파에 시달려 때가 덕지덕지 묻어 있지는 않은 지 모르겠다.
내가 비구니에게 ‘옛날 이 곳은 석구봉 스님이 주석했다는 데 아시나요?’ 라고 물으니 ‘그 때의 암자는 없어졌으나 흔적은 남아 있다’며 서봉암 뒤쪽을 가르켜 주었다. 그 자리에 지금은 커다란 수조가 버티고 있다.
비구니는 우리에게 ‘커피 하실래요?’ 묻더니 하얀 종이컵에 커피 4잔을 가지고 와 건네 주었다. 두 잔은 우리에게, 두 잔은 다른 산행객에게. 비록 인스탄트 커피고, 평소 마시지 않지만 비구니의 정성이려니 하고 마셨다.
커피를 마시면서 작은 마당에 피어 있는 길다란 꽃을 가르키며 비구니에게 ‘이 꽃은 무슨 꽃입니까?’라고 물으니 ‘엔젤이랍니다.’ 하길래 ‘아! 천사 말입니까?’ 하니 ‘그렇다’며 ‘낮에는 향기가 별로인 데 밤에는 향기가 아주 강합니다’고 했다. 하여 나는 엔젤꽃 향기를 맡아 보았는 데 낮이어서 거의 향기가 나지 않았다.
*석구봉도사는 누구인가? 1970년대 중반 이야기다. 지리산 자락의 암자에 수도하던 석도사가 지리산 뒤편의 비구니 암자로 가서 비구니를 살인한 사건이다. 비구가 비구니를 살인한 희대의 사건으로 세상을 발깍 뒤집어 놓은 것이다. 그런데 석도사는 살인사건이 일어나기 50분전에 멀리 떨어진 자신의 암자에서 신도 100명에게 법회를 했다는 것이고, 이 사실은 명백했다. 당시 지리산에는 도로가 없던 시절이어서 한 나절에도 가기 힘든 그 시간을 50분도 않되는 시간에 비구니 암자에 가서 사건을 일으킨 것은 불가능하였다. 오늘날 자동차를 타고 1시간이 더 걸리는 길인 것이다. 한편, 반대편 중인은 비구니 한 사람이 유일했다. 비구니의 말을 진실로 믿어야 하느냐가 과제였다. 석구봉도사는 다른 사건으로 재판을 받고 있었는 데 재판과정에서 판사들은 석구봉 도사가 여러 가지 도술을 부리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결국 진주지방법원 담당 판사는 도술을 부릴 정도라면 석구봉도사가 축지법을 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고 명백한 알리바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죄로 기소한 사건이다. 증거없이 피의자를 기소한 사건으로 오늘날에는 있을 수 없는 판결이었다.
서봉암을 나오면서 내가 환기에게 ‘비구니는 참 맑고, 곱기도 하구나’라고 말했더니 그도 ‘천사같다’고 했다. 마당의 '엔젤‘꽃이 그냥 있는 것이 아니었다. 천사는 ’천사‘를 알아보는 걸까?
갈림길로 되돌아 가 봉암산에 갔던 친구들을 만났는 데, 이 친구들은뜬금없이 서봉암쪽으로 내려가자고 했다. 원래 왔던 숲 길을 다시 되돌아가야 하는 데 어인 일인지 계획을 바꾸어 밀어 부치는 것이다. 하여 내가 ‘이 곳은 숲 길이 아니니 원점회귀형으로 돌아가자’고 했더니 막무가내다. 때로는 얼토당토 않은 생각이 합리성을 눌러 버리는 경우도 있다.
별수 없이 ‘길 없는 길’을 따라 내려가는 데 대숲속에 3개의 부도탑이 서 있다. 환기는 부도 앞에 양초를 꺼내 불을 켜 놓고 3배를 하고, 나는 부도탑을 읽어보니 중앙에 ‘풍암당’, 왼쪽에 ‘효월당, 오른쪽은 희미하게 ’강염당‘이라고 새겨 있다. 대선지식만 부도 탑을 남길 수 있다는 데 역시 서봉암은 역사도 길고, 선지식을 배출했음을 알 수가 있다.
대숲을 지나니 다랭이 논이 나타나고 농로가 이어진다. 나무숲을 걸어야 할 산행객들은 시멘트길과 아스팔트 길을 걷는 신세가 되었다. 시멘트 길과 아스팔트길은 후덥지근하였다. 점심시간이 지났는 데 순태는 배는 고프고, 피곤한 지 ‘뭐라도 먹고 가자’고 했는 데 첩첩산중에 밥집이 있을 턱이 없고, 근사한 집이 있어 살펴보니 ‘찻집’이었다. 한 사발 녹차가 배부를 일이 없어 그냥 가자고 했다.
거리에는 ‘정00 손자 정00 입법고시 합격’이라는 프랑카드가 걸려 있다. 이 산골에서도 5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였다니 그것도 조손가정(祖孫家庭)에서 젊은이가 열심히 하면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어 흐뭇했다.
모두들 지쳐 투덜투덜대며 걷고 걸으니 마침내 다솔사 입구의 용산마을에 도착하였다. 14시 10분이었다. 산행은 4시간 20분이 소요되었다. 다솔사는 이 곳에서도 1.5km 더 올라가야 한다. 지친 우리들은 다솔사 구경은 언감생시였다. 우리들은 여기에 남고 운전자(기주, 환기)만 절에 가서 차량을 가져오기로 했다. 마침 다솔사 방향으로 가는 승합차가 오길래 이들은 무임승차하여 편하게 차량을 가지고 올 수 있었다.
점심은 곤양 해안가 ‘술상’으로 가기로 했지만 친구들은 광주 가는 길에 광양으로 가자고 했다. 광양읍 ‘모은정식당’으로 갔다. 이 곳은 ‘서대회, 재첩회’로 알려진 곳이다. 량(量)은 많지 않지만 시장이 반찬이라고 게 눈 감추 듯 맛있게 먹었다. 반주도 곁들여가며. 식사를 마치고 광주로 향했다. 광주에 도착하여 친구들은 ‘술’이 땡기는 지 금호지구로 가서 술 한 잔 한다는 데 나는 ‘식도염’을 앓고 있기에 ‘그림의 떡’일 수 밖에. 2011.8.21.
첫댓글 친구들 재밋게살아가는 모습이 그려지네.건강한모습 오래오래 만들어 가세나~
친구 재미있게 다녀왔구나 다솔사! 광양에 살 때 솔향기가 생각나면 산책로가 좋아서 부담없이 찾을 만큼 편안한 산인데..광양읍에 있는 '모은정 식당' 서대회를 먹어본 기억도 있고 그래도 때묻지 않는 비구니와 잠깐의 만남, 엔젤이라는 꽃의 만남, 기억속에 좋은 추억이 될 거라 생각하네. 글 고맙네. 시도 참 좋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