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전례
성 비오 10세 교황은 1835년 이탈리아 베네토 지방 리에세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1858년 사제품을 받고 20년 가까이 본당 사목자로 활동하다가 만토바의 주교와 베네치아의 총대주교를 거쳐 1903년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재정립하고자 노력하였으며, 특히 광대한 교회법을 현대화하여 새 법전을 편찬하고, 성무일도서도 개정하였다. 또한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해치며 교회를 위협하는 오류들에 맞서 싸웠다. 1914년 선종한 그를 1954년 비오 12세 교황이 시성하였다.
본기도
하느님,
복된 비오 교황이 그리스도 안에서
가톨릭 신앙을 지키고 모든 것을 새롭게 하도록
천상 지혜와 사도의 용기를 주셨으니
저희에게도 자비를 베푸시어
저희가 그의 가르침과 모범을 따르고
영원한 생명의 상급을 받게 하소서.
제1독서
<나는 내 양 떼를 그들의 입에서 구해 내어 다시는 그들의 먹이가 되지 않게 하겠다.>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34,1-11
1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2 “사람의 아들아,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거슬러 예언하여라.
예언하여라. 그 목자들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불행하여라, 자기들만 먹는 이스라엘의 목자들!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목자가 아니냐?
3 그런데 너희는 젖을 짜 먹고 양털로 옷을 해 입으며
살진 놈을 잡아먹으면서, 양 떼는 먹이지 않는다.
4 너희는 약한 양들에게 원기를 북돋아 주지 않고
아픈 양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
부러진 양을 싸매 주지 않고 흩어진 양을 도로 데려오지도,
잃어버린 양을 찾아오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폭력과 강압으로 다스렸다.
5 그들은 목자가 없어서 흩어져야 했다.
흩어진 채 온갖 들짐승의 먹이가 되었다.
6 산마다, 높은 언덕마다 내 양 떼가 길을 잃고 헤매었다.
내 양 떼가 온 세상에 흩어졌는데, 찾아보는 자도 없고 찾아오는 자도 없다.
7 그러므로 목자들아, 주님의 말을 들어라.
8 내 생명을 걸고 말한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나의 양 떼는 목자가 없어서 약탈당하고,
나의 양 떼는 온갖 들짐승의 먹이가 되었는데,
나의 목자들은 내 양 떼를 찾아보지도 않았다.
목자들은 내 양 떼를 먹이지 않고 자기들만 먹은 것이다.
9 그러니 목자들아, 주님의 말을 들어라.
10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그 목자들을 대적하겠다.
그들에게 내 양 떼를 내놓으라 요구하고,
더 이상 내 양 떼를 먹이지 못하게 하리니,
다시는 그 목자들이 양 떼를 자기들의 먹이로 삼지 못할 것이다.
나는 내 양 떼를 그들의 입에서 구해 내어,
다시는 그들의 먹이가 되지 않게 하겠다.
11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내 양 떼를 찾아서 보살펴 주겠다.’”
복음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0,1-1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1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
2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그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다.
3 그가 또 아홉 시쯤에 나가 보니
다른 이들이 하는 일 없이 장터에 서 있었다.
4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 하고 말하자, 5 그들이 갔다.
그는 다시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 나가서 그와 같이 하였다.
6 그리고 오후 다섯 시쯤에도 나가 보니
또 다른 이들이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은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 서 있소?’ 하고 물으니,
7 그들이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하고 말하였다.
8 저녁때가 되자 포도밭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말하였다.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이들에게까지 품삯을 내주시오.’
9 그리하여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이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10 그래서 맨 먼저 온 이들은 차례가 되자
자기들은 더 받으려니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만 받았다.
11 그것을 받아 들고 그들은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면서,
12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하고 말하였다.
13 그러자 그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14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15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16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심판 이후에 받게 될 영광에 대한 기대가 지금 행복을 좌우한다.
존 뉴턴은 반항적이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대서양 횡단 노예무역에 참여하며 노예들을 가혹하게 다루었고 고난과 도덕적 타락으로 가득 찬 소란스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1748년 3월, 그의 배 그레이하운드(Greyhound)는 북대서양에서 격렬한 폭풍에 휘말렸습니다. 배는 심하게 손상되어 침몰할 것이 확실해 보였습니다. 배의 키잡이였던 뉴턴은 폭풍 속에서 배를 조종할 때 배 밖으로 떠내려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키에 몸을 묶어놓아야 했습니다.
생명을 위협하는 이 시련 동안 뉴턴은 심오한 영적 각성을 경험했습니다. 배가 파도에 부서지자 뉴턴은 어렸을 때 돌아가신 어머니의 종교적 가르침을 떠올렸다. 배의 운명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보였을 때 뉴턴은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며 절박한 기도를 드립니다.
“주님,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기적적으로 그레이하운드는 폭풍에서 살아남았습니다. 뉴턴은 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신과 같은 사람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 것입니다. 지금은 그런 기대를 할 수 없었고 정말 지옥에 갈 사람처럼 살아왔습니다. 그는 점차 이전 삶의 방식을 버렸고, 1754년에는 노예무역에서 완전히 벗어났고, 성공회 신부가 되어 노예 폐지 운동에 영향력 있는 목소리가 되었습니다. 그가 쓴 찬송 “놀라운 은혜”(Amazing Grace)에 그의 마음이 잘 나타납니다.
“놀라운 은혜, 감당할 수 없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잃었던 나를 찾았고, 눈먼 날 보게 하셨네. 놀라운 하느님의 은혜….”
오늘 복음에서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고 하십니다.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아침에 만난 이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습니다. 아홉 시에도, 열두 시와 오후 세 시, 그리고 다섯 시쯤에도 나가 그렇게 하였습니다.
주인은 다섯 시부터 온 이들에게 먼저 한 데나리온씩 주며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세 시에 온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와서 일한 이들은 조금 더 받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그들에게도 한 데나리온밖에 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불평합니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그러자 주인은 그들을 꾸중합니다.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일해놓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적게 받았다고 불평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바로 첫째였다가 꼴찌가 되는 이들입니다. 한 데나리온으로 그들을 포도밭에서 일하게 한 이유는 그들을 행복하게 하려는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반면 존 뉴턴과 같은 사람은 어떨까요? 지옥에 갈 줄 알았고 또 지옥의 사람처럼 살았던 뉴턴은 늦었을 때 주님께 돌아왔고 자신과 같은 죄인을 살리신 놀라운 하느님의 은혜를 노래하였습니다. 그가 나중에 성공회 사제로 살았지만, 그의 봉사는 자신이 받은 은혜에 비해 너무 작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힘이 들 수 없었습니다.
지금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 하늘 나라에서 높은 자리에 앉습니다. 그러려면 더 높은 영광을 기대해야 합니다. 저 같은 경우도 ‘비르짓다의 7기도’를 바치면서 연옥에 가지 않고 순교자의 지위에 오른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달랑 그 기도를 한다고 피를 흘리며 순교하신 분들의 영광이 주어진다는 것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때문에 지금 내가 하는 봉사는 그 은혜에 비하면 너무나 작은 것이 됩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 때문에 진짜 하늘 나라에서 그런 지위에 오를 것을 압니다.
지금부터 행복하려면 한 데나리온의 값을 무한히 큰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자신이 갔어야 할 지옥을 보고 체험하면서 자신에게 주어지는 구원이라는 한 데나리온의 값이 얼마나 큰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평생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이 결코 힘들게 느껴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크리스마스 캐롤의 ‘스크루지 영감’은 자신이 죽고 난 후의 무덤과 비석에 사람들이 침을 뱉는 미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젠 자신의 무덤에 많은 이들이 꽃을 놓아주는 상상을 합니다. 그리고 그 기대만큼 삶을 변화시켰습니다. 이전 수전노의 지옥의 삶이 아닌 천국의 삶을 살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늘 나라의 더 큰 영광을 기대합시다. 그리고 하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한 데나리온의 값이 하느님 아드님의 피 값임을 믿읍시다. 그러면 그분 안에 머물기 위해 그분 뜻을 따르는 삶이 전혀 고생스럽게 느껴지지 않고 항상 부족하게 여겨질 것입니다. 이 행복이 진짜 영원한 행복을 보증합니다.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먼저 주는 것이 맞을까요? 아니면 내가 먼저 원하는 것을 받아야 할까요? 이것도 아니라면 동시에 서로 원하는 것을 주고받아야 할까요?
많은 사람이 자기 받을 것을 먼저 생각하고 있으며, 받아야 줄 수 있는 것처럼 여깁니다. 그래야 각박하고 불합리한 세상에서 손해보지 않고 지혜롭게 사는 것이라면서 미소 지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계산적으로 사는 것이 올바른 것일까요? 실제로 사람들은 계산적인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영어에서도 ‘take and give’라고 하지 않고, ‘give and take’라고 하지 않습니까? 물론 내가 먼저 많은 것을 베풀었는데도 전혀 자기에게 되돌아오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돌아오지 않는다고 억울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점에 대해 하늘 나라에 보화를 쌓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순간의 만족보다 영원한 만족을 위해 힘쓰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동창 신부 중에 항상 앞서서 무엇인가를 하는 신부가 있습니다. 지난 일본 성지순례 때도 다른 동창의 불편을 생각하면서 약국도 다녀오고 편의점도 다녀오면서 동창의 불편을 해소해 주었습니다. 날도 더워서 귀찮을 법도 한데, 자기 돈까지 쓰고 땀도 뻘뻘 흘리면서 앞서서 행동합니다. 또 아픈 동창을 챙겨주다가 코로나 확진까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는 억울해하거나 힘들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돕는 일을 무척이나 기뻐합니다.
‘주는 것이 손해’라는 어리석은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의 구차한 변명이 아닐까요?
포도밭 일꾼의 품삯에 대한 비유 말씀을 봅니다. 이른 아침부터 일한 사람이나, 아홉 시부터 일한 사람, 열두 시와 오후 세 시, 그리고 무엇보다 오후 다섯 시부터 일한 사람이 모두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는 포도밭 주인의 처사가 불합리해 보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분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많이 하건, 적게 하건 그 누구도 차별하지 않고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무조건 주시는 데에 있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있습니다.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받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봉사에 대한 대가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봉사했으니 이 세상 안에서 더 많은 것을 누려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 사람은 성당도 나오지 않는데도 많은 것을 누리냐며 불공평하다고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충분한 보상을 주십니다. 단지 세상의 기준이 아닌, 주님의 기준에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은 보상을 알아채지 못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얼마나 큰 보상이었는지를 발견합니다. 참고 견디면서 주님의 뜻인 ‘주는 사랑’에 집중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부탁을 하는 사람은 5분 동안 잠시 바보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부탁 못하는 사람은 평생 바보가 된다(중국 속담).
사진설명: 성 비오10세 교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