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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장 기연(奇緣)
경사를 떠나온 지 일년여….
각오는 했다.
하지만 산사(山寺)의 생활은 사가(私家)에서 생각했던 것만큼 쉽지가 않았다. 더구나
그녀가 있는 곳은 아미본산(峨嵋本山), 그 어디보다 계율(戒律)이 엄했다. 해가 지기
전에 저녁을 먹어야 했고 그 저녁을 먹은 6개시진(時辰;12시간)이 지난
첫새벽[寅時]에는 일어나 좌선(坐禪)에 들어야 하였다.
인시라면 오경(五更).
여름철이라도 해가 뜨지 않을 시간이다.
게다가 해다주는 밥, 그것도 요리사가 정성을 다해 만든 요리가 아니면 먹어본 적이
없던 그녀가 바리때에다가 밥을 받아다 먹고는 그것을 다시 씻어서 그 물을 남김없이
마셔야 하는 생활은 생각보다 그리 간단하기만 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한 것은 가슴에 사무치는 그리움이었다.
사부의 원한을 갚겠다.
주고후에 당한 치욕을 씻겠다.
그러한 다짐보다 시간이 지날수록 가슴에 스며드는 것은 곽승고에 대한 그리움. 그가
죽었다고 체념했을 때에는 그래도 나았다. 하지만 그가 죽지 않았다고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저몄다.
그 참혹했던 모습.
그러니 무공수련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내공연마를 위해 눈을 감고 있지만 뇌리에 떠도는 것은 구결(口訣)보다 곽승고의
웃음소리와 그의 몸짓뿐.
그로 인해서 운공중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들 뻔하기도 하였다.
달빛 아래에서 미친 듯 검을 휘둘러 그의 얼굴을 베어버리기도 숱하게 했다.
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번뇌마(煩惱魔).
불가(佛家)에서 이야기 하는 번뇌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임을 그제서야 절감할 수
있었다.
고승대덕(高僧大德)의 설법(說法)을 들어도 가슴으로 느껴지지가 않았다. 총명한
그녀인지라 머리로는 당연히 이해를 하지만 그것이 실제로는 이행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거기에 전기가 일어난 것은 그녀가 산에 들어와 석달쯤 되던 날 밤이었다.
그날도 그녀는 홀로 산정(山頂)에 올라 금정신니에게서 전수받았던
관음선공(觀音禪功)을 연습하고 있었다.
사방에서 야수(夜獸)들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달밤이었다. 처음 산에 들어와서는 그
소리가 무서워 밖에 나갈 생각은 하지도 못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것도
익숙해졌다.
바위 위에 결가부좌를 하고 앉아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눈을 감자 여전히 가슴에
저며드는 그 얼굴.
그녀의 그 고뇌하는 모습을 어둠 속에서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다.
그녀를 아미산으로 데려온 정혜사태였다.
그녀는 어린 사매가 안쓰러워서 자신의 제자처럼 그녀를 돌봐주고 있었던 터라 지금도
그녀가 몰래 밖으로 나감을 보고 따라와 살펴보고 있었던 것이다.
암중에 그녀를 지켜보고 있던 정혜사태는 그녀가 그런대로 마음을 가다듬고 수련에
임하는 것 같음을 보고 암암리에 길게 한숨을 쉬고는 자리를 떴다.
그녀가 자리를 뜬 후에, 방약란은 눈을 떴다. 그녀는 정혜사태가 자신을 지켜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회의(懷疑)하고 있었다.
과연 자신이 정말 잘 온 것인가.
그러한 회의는 오래가지 않았다.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그녀는 믿기지 않는 일을 목격하게 되었던 것이다.
흰빛이 밤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본 그녀는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저렇게 거대한 새가 있다니?』
과아아….
찰나간에 산봉너머로 사라진 흰빛. 그러나 그녀를 잡아끈 것은 그 산봉너머에서
들려온 긴 울음소리였다.
어떤게 된 셈인가를 채 알기도 전에 흰빛이 다시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이번에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것이 정말로 거대한 한 마리의 학이라는 것을. 그것은 집채만한 백학(白鶴)이었다.
그녀가 지켜보는 사이에 그 백학은 허공에서 곤두박질치듯이 다시 아래로 사라져갔다.
거대한 외침을 길게 끌면서….
필유곡절(必有曲折)이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방약란은 호기심을 참지못하고 몸을 일으켜 그 산봉을 향해서
몸을 날렸다.
비록 번뇌에 시달리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산에 들어와 논 것만은 아닌지라 그녀의
신형은 바람처럼 계곡을 가로지를 수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이 일대의 지리를 어느
정도 알고 있어서 백학이 사라진 곳이 산세가 험악하기 이를데 없는 곳임을 알고
있었다.
산봉을 가로지르자 눈앞에 계곡이 드러났다.
계곡은 밤안개가 자욱히 깔려서 채 일 장 앞을 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뭔지 모르게 음습(陰濕)한 느낌.
공연히 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돌아갈까, 망설이던 그녀를 붙든 것은 안쪽에서 요란하게 들려오는 굉음. 산곡(山谷)이
쩡쩡 울리고 바위가 부서지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그리고 과아아 하는 백학의 외침이 뒤를 이었다.
『뭔가 다급한 것 같은데?』
그 외침을 듣자 방약란은 참지 못하고서 밤안개가 가득한 계곡 안으로 들어갔다.
『앗?!』
하지만 그녀는 계곡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놀란 외침을 토해내야했다.
조심스럽게 밤안개속을 헤치고 전진하다가 다시금 들려온 백학의 외침소리에
발걸음을 빨리 한다는 것이 그대로 허공을 밟고 만 것이다.
누가 잡아당기기라도 한 듯이 그녀의 신형이 무섭게 추락했다.
원래 이 계곡은 깊고 험악하여 아미제자들도 비조절적애(飛鳥絶迹崖)라 하여
접근하지 않는 곳이었다. 방약란은 말만 들었지, 이곳까지 와 본 적이 없으니 이 계곡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 리가 없었다. 몸을 바로 세우고자 하나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그녀가 추락하는 곳이 깎아지른 절벽이 아니라 그녀가 이리저리
부딪히기는 하지만 비탈을 굴러 내려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시야를 가린 안개만 아니었다면 어떻게든 몸을 일으켜 세우거나 신형을 멈출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속도가 너무 빠른 까닭이다.
쿵! 둔중한 충격이 옆구리를 쳤다.
『아…』
나직한 신음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처럼 지독히 굴렀으니 바닥에 떨어졌다면 분신쇄골이 되었어야 했으리라. 그런데
의외로 충격은 그리 강하지 않았다.
주위를 살펴본 그녀는 천행임을 알 수 있었다.
비탈에 엉겨있는 칡덩굴이 그녀를 받아준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앗?』
방약란이 놀라 소리쳤다.
눈앞으로 거대한 바위가 날아들고 있었던 것이다.
쾅!
바위가 절벽에 부딪히면서 산산조각, 불똥을 튀면서 부서져 사방으로 흩어졌다.
과아아….
쉬이잇!
괴기무비(怪奇無比)한, 고막이 찢어지는 듯한 굉량(宏量)한 외침과 동시에 시야를
가리고 있는 밤안개가 거세게 일렁이며 흩어졌다.
『세상에!』
부지중에 그쪽을 바라본 방약란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참으로 대단한 광경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검은빛이 전신을 덮은 거대한 무엇인가가 계곡 안쪽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때마다
방금 방약란을 혼비백산케 한 바위가 날아올라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서 예의 백학이 올랐다내렸다 하면서 그 검은 것을 공격하고 있었다.
영금괴수(靈禽怪獸)의 가공할 대결!
『저게 대체 뭐지?』
방약란이 신음했다.
정말 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거대하기 이를데없는 그 검은 것의 꼬리는 뱀과 같다. 하지만 몸체는 산악과 같고
물통처럼 거대한 머리에서 빛나는 눈은 전광(電光)과도 같았다.
쒸아악!
방약란이 괴수를 발견한 순간에 그 괴수는 날아든 백학을 향해 거대한 입을 딱 벌려
독기(毒氣)를 뿜어냈다. 독기가 운무처럼 쏟아지면서 백학을 덮쳤다.
백학은 길게 울면서 날개를 저었다.
그러자 그 운무와 같은 독기는 삽시에 사방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욱!』
방약란은 입을 틀어막았다.
지독한 비린내, 역겨움.
한순간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녀는 허겁지겁 숨을 멈춘 채 관음선공을 운기하며 뒤로 물러서려 했다. 하지만
물러설 곳이 없었다.
바로 그 순간, 촤아아…. 물소리와 함께 그녀는 찬물을 흠뻑 뒤집어쓰고 말았다.
마치 소나기가 쏟아진 것 같았다.
이제 보니 이 계곡의 아래쪽, 그녀의 앞에는 깊이를 모를 한담(寒潭)이 하나
자리하는데, 그 거대한 괴수의 몸통 절반은 거기에 잠겨있었다.
그 상태에서 몸부림을 치고 있으니 물이 사방으로 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연못의 뒤쪽에는 깎아지른 절벽이 까마득히 솟아있는데, 안개가 스멀거리는 가운데 그
절벽 밑에 검은 동굴 하나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음이 하늘에 뜬 보름달 아래 드러나
있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방약란은 괴수가 그 동굴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고 있고 공중의
백학이 그것을 막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뭘 지키려는 것인가?』
넋을 잃고 그 광경을 보던 방약란이 중얼거렸다.
괴수는 자신의 시도가 번번이 백학에 의해 무산당하자 정말 노한 듯이 머리를
치켜들고서 괴이한 소리와 함께 독기를 마구 뿜어내며 동굴을 향해서 돌진하기
시작했다.
촤촤…. 물보라가 사방으로 튀었다.
그러자 거대한 괴수의 몸체가 드러났다.
칠흑같이 검은 몸통의 길이는 십여장에 이르는 듯 했고 머리에는 거대한 뿔이 하나
우뚝 날카롭다. 생긴 것은 분명히 뱀인데, 몸체에는 묘하게 생긴 발이 있어 뱀은 아닌
것 같이 보였다.
그것이 세상에 드문 일종의 독각룡(獨角龍)임을 방약란이 알리없다.
독각룡이 돌진해옴을 보자 백학도 마지막을 각오한 듯이 날개를 접고 무섭게 독각룡을
향해 날아들었다.
가히 천지개벽을 할 대결이었다.
방약란이 떨어져 내린 곳은 그 동굴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감히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아이야, 이리 들어오너라』
온화하기 이를데 없는 음성이 들려왔다.
정말 믿기지 않는 일.
이런 험지에서 사람 소리라니?
방약란은 사방을 두리번거렸으나 사람의 종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잘못 들었나, 그녀가 의아해하고 있는 순간.
『이곳이다. 네 옆에 있는 동굴…』
다시 예의 음성이 들려왔다.
놀랍게도 그 음성은 독각룡이 죽을 힘을 다해 들어가고자 하는, 백학이 젖먹던 힘을
다해서 막고 있는 그 동굴 안에서 들려오고 있는 것이다.
『…?』
방약란은 그야말로 눈이 동그래서 동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콰아아!
쉿! 쉬이이….
백학과 독각룡의 싸움은 점입가경(漸入佳境)이라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을 형편이었다.
쾅!
방약란이 있던 곳에 거대한 바위 하나가 날아들어 산산조각이 났다.
방약란은 동굴입구에서 창백한 얼굴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분신쇄골(粉身碎骨), 그야말로 흔적도 찾지 못할 뻔했다.
동굴은 어두웠다.
말 그대로 손가락을 내밀어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이 동굴을 잔뜩 메우고
있었다.
잠시 망설이던 방약란은 동굴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현재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뿐더러, 과연 누가 이 동굴 안에서 자신을 부르고 있는지 궁금했던 까닭이다.
짙은 어둠. 동굴의 안은 칠흑 같은 어둠인지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귀신이 호곡을 하면서 뛰쳐나올 것만 같다. 바깥에서는 여전히 천지개벽을 하는 듯한
괴수들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으니 가슴 떨림이 당연하다.
그녀가 동굴 입구에서 주춤거리고 있자, 다시 예의 창노한 음성이 들려왔다.
『걱정말고 이리 오너라. 시간이 별로 많지 않구나』
이런 분위기, 이런 곳에서 들려온 음성임에도 어딘지 모르게 넉넉하고도 자애(慈愛)한
느낌이 두려운 마음을 가라앉혀주는 것 같았다.
『누, 누구… 어디 계십니까?』
『안으로 들어오면 나를 볼 수 있다』
다시 음성이 들려왔다.
기왕 이렇게 된 바에야!
방약란은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의외에도 동굴의 안쪽은 건조하고도 맑은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나마 그
어둠마저도 그녀가 십여걸음을 옮기고나자 흩어지기 시작했다. 희미한 빛이 안에서
스며나오고 있었다.
단순한 빛이라기보다는 어딘지 모르게 신비한 느낌이 드는 상화(祥和)로운 기운.
동굴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작은 것도 아니었다. 동굴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더 넓어졌다. 처음에는 높이가 채 일장이 되지 않는 것 같더니 그 높이와 넓이는
급격히 넓어져 드넓은 광장과 같아졌다. 환하고 상화로운 빛은 그 광장에서 비롯되고
있었다.
『아!』
부지불식간에 그녀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한 사람. 낡은 승복을 입었다. 그나마도 거의 형체만 갖추고 있어 어깨에 걸려 매달린
승복은 겨우 상체의 절반을 가릴 뿐이다. 긴수염은 배까지 드리웠고, 눈썹마저 길어
어깨까지 늘어져 있었다. 머리에 드러난 선명한 계인(戒印)은 그가 승려임을 의미했다.
작달막한 몸체의 그 노승은 지하동굴의 광장 중앙에 위치한 석단(石壇)에 타좌(打坐)한
채로 앉아 있었다.
방약란이 탄성을 토한 것은 바로 그 노승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이 지하광장의 윗부분은 뚫려 있었다.
하늘이 보인다는 이야기다.
둥근 달이, 그 달빛이 동굴광장으로 내려앉고 있었다. 그러니 어두울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달빛 때문에 탄성을 토할 리는 없다. 그녀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
것은, 그 노승의 전신에서 상화로운 빛이 은은히 뿜어져 나와 동굴광장을 물들이고
하늘로 솟구치고 있기 때문이었다.
노승의 머리 뒤를 둥글게 물들이고 있는 후광(後光)을 보라.
『이리, 이리 가까이 오너라』
노승이 그녀를 보면서 말했다.
『대사(大師)님…』
방약란은 노승의 앞으로 가서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무릎을 꿇었다.
절로 존경의 염(念)이 일게 하는 힘이 그 노승에게는 있었다. 하긴 지금 이 상황 앞에서
누가 무릎을 뻣뻣이 세울 수 있을까.
『세속의 연(緣)이 다하지 않아 해탈(解脫)을 미루고 있었더니, 그것이 너와의
인연이었던 모양이구나. 장상사(長相思)… 애끓는 정(情)은 다함이 없건만 연이 닿지
않으니, 어찌 괴롭지 않으랴.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다 덧없으니 모든 것은 후일
스스로 이루어지리라. 조급히 생각지 말거라』
노승이 조용히 말했다.
『저, 저는…』
『이리 오너라. 시간이 없으니 너에게 연(緣)을 이어주리라』
노승은 앙상한 손을 내밀었다.
『이제 네게 전수할 것은 아미의 비전(秘傳)인 대정신공(大靜神功)이다. 아미의
대정신공은 선천지류 (先天之流)이지만 이미 그 본체(本諦)가 유실되어 제대로 아는
자가 없다. 이제 네게 그것을 일러주리니, 차후 아미에 전하도록 하거라』
노승의 말에 방약란이 눈을 크게 떴다.
『아, 아미파의 어른이십니까?』
담담한 웃음이 노승의 얼굴에 번져갔다.
『아미산에 있으니 아미의 사람이겠지. 가서 물어보거라. 공료(空了)가 누구인지 혹
기억하는 사람이 있는지…』
별? 공료? 저, 정말 공료사백조이십니까?』
노승의 말에 방약란이 눈을 크게 떴다.
참으로 놀라운 사람이 그녀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공료는 바로 당대 아미파의 장문인 무진대사의 사백(師伯)이다. 사백이란 사부의
사형을 의미하니, 금정사태의 제자인 그녀에게 있어 공료상인은 사백조(師伯祖)에
해당하는 까마득한 존재였다.
그는 당대 장문인인 무진대사의 사부인 공공상인(空空上人)의 사형이다. 배분상으로
보자면 당연히 아미파의 장문직을 승계하여야 했지만 번거로운 것이 싫다고 훌훌
아미산을 벗어난 걸물(傑物)이었다. 그것이 이미 오십년인가, 육십년 전이라 하였다.
방약란 또한 사부인 금정사태가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사백이신 공료상인께서 아미에 계셨더라면 오늘날의 아미는 달라졌으리라고….
그 안타까움은 당연했다.
공료상인이야 말로 지난 백여년 이래 아미파 제일이라 불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으므로.
그러나 방약란은 직접 보면서도 자신의 기우(奇遇)를 참으로 믿기 힘들었다.
공료상인이라면 이미 백세는 한참 넘었을 터였다. 당대 장문인 무진대사가 세수
일흔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의 나이는 최소한 무진대사보다 사오십세는 더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전설 속의 인물을 여기에서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전신에 옷을 하나도 걸치지 않고 따사로운 양광(陽光)에 몸을 내맡긴 기분이 이러할까.
『눈으로 보지 않으며[眼不視], 귀로 듣지 말고[耳不聞], 혀로 소리내지 말며[舌不聲],
코로 냄새맡지 아니하고[鼻不悸], 사지를 움직이지 않으니[四肢不動], 이를 일러
오기조원(五 朝元)이라 하니라. 다섯이 하나가 되니 오행(五行)이 거기에 깃들인다.
바로 혼(魂)이 목(木)이며, 백(魄)이 금(金)이며, 신(神)이 화(火)이다. 정(精)이
수(水)이고 의(意)가 토(土)이니 일컬어 오합일(五合一)이라 한다. 정이 기로
화하며[精化氣], 기가 신으로 되고[氣化神], 신이 태허에 노닐어 자재하니[神化虛]…
그렇게 됨을 일러 다시 삼화취정(三華聚頂)이라 한다…』
방약란은 귓전에 마치 심산계류(深山溪流)와 같이 흐르는 공료상인의 음성을
들으면서 진기를 운행하고 있었다. 한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느낌.
사지백해(四肢百骸)로 진기가 창통한다.
우르릉….
거대한 뇌성이 그녀의 전신을 휩쓸고 뇌리에서 크게 울고 있었다.
공료상인이 평생을 통해 수련한 힘으로 그녀의 전신을 씻어주고 있는 것이다.
『함안광(含眼光)하고 응이운(凝耳韻)하며 조비식(調鼻息)하고 함설기(緘舌氣)함을
일러 화합사상(和合四象)이라… 진기의 흐름은 억제하여 인도함이 아니며, 몸을
다스림에서 스스로 움직임을 명심하여야 하리라』
노승의 손에서는 부드러운 빛이 형체를 이루며 뻗어나가 그녀를 어루만지고 있는
듯하였다.
참으로 엄청난 일.
아니, 정말로 위대하고도 장엄한 광경을 방약란은 목도하고 있었다.
이 동굴은 거대한 호리병과 같은 생김을 했다.
하늘에 뜬 달빛이 그윽한 가운데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찬연하고도 부드러운 광채가
그녀가 무릎을 꿇고 있는 이 동굴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것은 공료상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비로운 광채였다.
『이제 세속의 연을 다함으로써 과(果)를 얻었으니 마지막 남은 연은 네게
맡기겠다…』
눈을 감은 공료상인의 전신은 이제 빛의 덩어리와 같았다. 방약란은 감히 그를 볼 수
없어 오체투지하여 그 일대의 신승을 경배(敬拜)하였다. 문득, 그녀는 그처럼 찬란하던
동굴의 빛이 그윽하게 변함을 느끼게 되었다.
고개를 든다.
공료상인이 그녀의 앞에서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결가부좌를 한 모습 그대로였다.
그처럼 빛나는 빛줄기는, 광채는 이제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저 담담한 빛이 그의
법체(法體)에 어려 있을 따름이었다.
과아아!
쉬쉬쉿-!
산천을 떨어울리는 굉량한 외침.
거목이 뿌리째 뽑히고 혹은 거역할 수 없는 힘에 밑동이 수수깡처럼 부러져나간다.
날아올랐던 바위가 절벽에 부딪혀 산산조각으로 부서져나간다.
싸움은 이제 막바지에 이르러 있었다.
독각룡은 눈앞에 보이는 동굴에서 신비로운 빛이 스며나오는 것을 보자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그 광란(狂亂)에 가까운 몸짓은 동굴이 자리한 그 산봉의 꼭대기[山頂]
위로 찬란한 빛이 하늘로 솟아오름을 보자 거의 절정에 달했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 거대한 백학도 하늘로 날아올랐다 곤두박질치기를 거듭하고 있어
그 싸움은 실로 일대장관이었다.
독각룡의 꼬리가 바람을 일으키면서 거대한 바위를 날려보내면 백학이 부챗살처럼
날개를 펴 그것을 되받아쳐 버린다. 절벽에 부딪혀 거대한 폭음과 함께 부서지는 바위.
그 싸움은 이제 육박전이었다.
독각룡의 몸체는 검은 철갑과 같은 비늘로 덮여 있었다. 도검으로도 상해할 수 없다는
그 몸체였지만 백학의 날카로운 부리는 그 비늘을 뚫고 독각룡을 쪼아대고 있었다.
그 신검(神劒)과 같은 부리가 아니었다면 독각룡이 백학을 꺼릴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독각룡의 힘과 덩치, 거기에 오랜 세월을 두고 쌓아온 독기(毒氣)가 더해지자
백학이 밀리는 기색은 이제 역력했다.
지상에서의 싸움은 아무래도 백학이 불리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독각룡을 막기 위해서는 지상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으니 백학이 밀리는 것은
필연이었다. 그것은 독각룡이 스스로의 원정(元精)으로 만들어진 내단(內丹)을
토해내어 백학을 공격하면서 자명해졌다.
푸른 빛덩이와 같은 내단이 백학을 향해 어둠을 뚫고서 쏘아졌다.
과아아…. 백학이 길게 울음을 터뜨렸다.
놀랍게도 백학의 입에서도 둥근 사발과 같은 기운이 형체를 이루며 토해져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그 독각룡의 내단을 막아갔다.
구아앙!
굉음이되, 굉음이 아닌 듯 묘한 폭음이 터지며 흰 깃털이 사방으로 날아 흩어졌다.
백학이 날카로운 부르짖음과 함께 뒤로 물러섰다.
크아아….
그것을 보자 독각룡이 눈을 흉포하게 휘번득이면서 미친 듯이 밀고 들어왔다.
발아래서 바위가 바스러져 퉁겨 오르고 지축을 울리는 발걸음 소리가 무섭게 바람을
가른다.
이 상태라면 백학은 더이상 버틸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묘한, 가슴에 스며드는 낭랑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 것은.
들릴듯 말듯 하던 그 소리는 언제인가부터 두 거대동물의 외침을 누르면서 계곡을
메아리치기 시작하였다. 분명히 크지 않은 소리임에도 낭랑한 그 소리는 맑고도
깨끗하여 선명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정말 믿어지지 않게 그 소리가 들리면서 그처럼 사생결단, 생사결을 할 듯이
싸우던 백학과 독각룡이 천천히 싸움을 멈추는 것이 아닌가.
독각룡의 눈이 동굴로 향했다.
백학도 한걸음 물러나 동굴을 보고 있었다.
소리는 점점 가까워오고 있었다.
그 소리는 동굴에서 울려나오고 있었고, 점점 가까워지더니 마침내 그 소리의 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방약란이었다.
그녀가 손에 든 목탁을 두드리면서 맑은 음성으로 기이한 범창(梵唱)을 읊조리면서
동굴을 나서고 있었다.
백학과 독각룡의 눈빛이 변했다.
그것은, 그녀가 그들이 기대한 사람이 아님을 뜻한다. 그들이 아는 이 범창,
보현제도범음(普賢濟度梵音)은 저렇게 젖비린내 나는 꼬마 계집애가 낼 소리가 아닌
것이다.
그때, 방약란이 입을 열었다.
『상인께서는 이미 열반하셨다』
끄아아….
그 말을 듣자, 독각룡은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는 듯이 입을 쩍 벌리고서 격렬하게
굉음을 터뜨렸다. 금방이라도 동굴을 향해서 덮쳐갈 듯한 모습이다.
방약란은 목탁을 길게 두드렸다.
땅! 따아아앙….
맑은 음향이 심신을 두드리듯이 계곡을 메아리치면서 퍼져나갔다.
『서라! 너의 용골(龍骨)을 제압한 금룡삭(禁龍索)을 풀어줄 제도검(濟度劒)이 여기
있다!』
방약란이 손을 쳐들었다.
그 손에는 일곱치 가량의 검신을 가진 단검(短劍)이 한자루 들려 있었다.
서리서리 찬 빛을 뿜어내는 단검.
그 단검을 보자 동굴로 덮쳐오려던 독각룡은 주춤, 그 자리에 섰다.
『상인께서는 나에게 이 검을 맡기시면서 차후, 너의 공덕(功德)을 보아 너의 용골을
풀어줄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라고 하셨다. 네가 악룡의 탈을 벗고 스스로의
수도에 정진한다면 당연히 나는 상인의 뜻대로 너의 금제(禁制)를 해제해주겠다』
크아악!
독각룡이 어림없다는 듯 그 거대한 입을 쩍 벌리면서 굉음을 터뜨렸다.
방약란을 얕보고 있음이 분명했다.
『흥! 하지만 네가 만약 다른 마음을 먹고 나를 공격한다든지 다른 나쁜 짓을 한다면
이 제도검을 없애버리고 말겠다! 알겠느냐?』
땅….
방약란은 수중에 든 목탁을 제도검의 검신으로 두드렸다.
긴 검명(劒鳴)이 일대를 휘감았다.
독각룡은 흉흉한 빛이 감도는 눈으로 방약란을 노려보았다.
좀 전만 같아도 감히 서있지도 못할 방약란은 마치 관음보살의 현신이라도 된 듯이
서서 조용히 독각룡을 마주보고 서 있었다.
원래 공료상인은 이곳에서 악룡이 될 독각룡을 발견하고 일주일의 노력 끝에 독각룡의
용골을 금제하였다.
용골이란 뱀류가 용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니 그로부터 수십 년.
이미 영통(靈通)한 독각룡은 공료상인이 곧 해탈비승할 것임을 알고 자신의
용골금제를 풀어달라고 하기 위해서 그처럼 동굴로 들어가려고 애를 썼던 것이다.
백학은 공료상인을 모시던 영금(靈禽).
자연히 공료상인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 독각룡을 막을 수밖에 없었다.
바람이 불었다.
옷자락이 미묘하게 펄럭였다.
그 옷자락에 감춰진 그녀의 매끈한 다리가 실제로 얼마나 후들거리고 있는지 그녀는
거의 느끼지 못했다.
조금만 시간을 내면 되었을 터인데, 상인은 왜 이렇게 어려운 일을 남겨둔 것일까.
나에게…. 겁이 났다.
그러나 그녀가 어찌 공료상인의 깊은 뜻을 알 수 있었을까.
이것은 아미의 비전 대정신공(大靜神功)을 수련하기 위한 일종의 관문이었다.
평정심(平靜心)이란 불가의 무공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었고, 대정신공은 더더욱
그러했다.
크그그그….
천천히 독각룡의 흉한 눈빛이 누그러졌다.
금방이라도 공격을 시작할 듯하던 그 몸짓이 천천히 가라앉고 있음을 그녀는 알아볼
수 있었다.
『좋아. 상인께서 너를 금제하심은 너를 위한 것… 그 오랜 기간의 수도가 헛되이 한낱
악룡으로 끝나게 하지 말도록 함은 바로 너 자신을 위한 것일 거야. 네가 정말 용이라면
지상의 못에 잠겨 자맥질치는 것보다 하늘에 올라 구름을 타고 날아야 하지 않겠니?』
그녀가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어떻게 들으면 치기(稚氣)어린 음성.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독각룡에게 다가서기 시작하였다.
과아아….
백학이 길게 울면서 날개를 펼쳐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위험하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는다.
『괜찮아, 백아(白兒)! 흑룡도 이젠 우리의 친구가 될 수 있을 거야』
방약란은 백학의 날개를 가볍게 손으로 치면서 말했다.
….
독각룡, 그 희대의 괴수는 불길이 이는 듯한 눈으로 감히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으러
오는 대책없는 계집애를 바라보고 있었다.
쏴아아… 쏴!
세찬 비바람.
갑자기 몰아치기 시작한 돌풍.
그 비바람을 맞으면서 방약란은 관음(觀音)과도 같은 모습으로 단정히 손가락과 같은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앞에는 자애한 빛이 얼굴에 서린 노승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무성대사(無性大師).
아미파의 당대장문인 무진대사의 사제이며 아미의 장경각(藏經閣)을 맡고 있는
사람이다. 아미 제일의 무공을 지닌 사람은 아니지만, 아미 제일의 학문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것은 가장 훌륭한 스승을 의미했다.
그녀가 신승 공료를 만난 것은 아미파의 일대기밀이 되었고,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장문인을 비롯한 몇 사람 장로만으로 한정되었다.
그리고 격론 끝에 그녀에게 아미의 본산절기를 모두 전수하기로 결론이 나고 그녀의
새 사부로서 이 무성대사가 결정되었다.
그로부터 일년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그녀의 무공은 이미 지난날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원래 좋은 근골에 총명한 머리, 거기에 본신의 기초를 공료상인이 닦아주었으며
비전의 절학을 한몸에 전해받았다.
명사(名師)에 좋은 제자.
거기다가 운까지 따라주었다.
원래 대정신공은 너른 바다와 같은 무공이라 여자에게는 별로 잘 맞지 않았다. 하지만
공료상인이 닦아준 기초로 인해서 그녀의 대정신공은 이미 그 나이로서는 보기드문
경지에 이르고 있는 중이었다.
『이제 나로서도 네게 더 가르칠 것이 없다』
그녀의 앞에 선 무성대사가 입을 열었다.
『무슨 그런 송구한 말씀을, 제자가 뭘 안다고…』
방약란이 가볍게 다리를 펴는 사이에 한덩이 구름처럼 날아올랐다 땅에 내려섬을 보자
무성대사의 얼굴에 웃음이 스쳐갔다.
『아미타불… 연대부운(蓮臺浮雲)의 일식이 무리없이 펼쳐지니, 그새 다시 공력이
늘었구나』
그는 언제 비바람이 불었느냐고 하듯이 구름이 흩어지면서 찬란한 햇살이 구름을
보검으로 갈라내듯 그렇게 쏟아져 오르는 앞에서 말을 계속했다.
『무공은, 내공에는 어떤 일정 수준이라는 것이 있는 법이다. 일개인이 그 일정 수준에
오르고나면 그때부터의 길은 스스로 헤쳐나가게 되는 법. 사부는 그저 옆에서 너를
도와줄 수 있을 뿐이다』
『다 사부님의 덕분입니다』
『너의 노력이 없었다면 어찌 가능한 일이겠느냐? 아미타불…』
노승은 길게 불호를 외웠다.
노승이 금정을 내려간 다음, 방약란은 거대한 그림자가 햇살을 덮는 것을 느낀다.
하늘을 바라본다.
거대한 그림자 하나가 무서운 속도로 그녀를 향해 내려꽂히고 있었다.
일대가 온통 광풍으로 휩싸이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그녀의 얼굴에는 전혀 놀람의 빛이 없었다.
이윽고 산정(山頂)을 온통 흙바람으로 휘몰고 그 자리에 내려선 것은 바로 거대한
백학. 그녀가 백아라고 부르고 있는 공료상인이 남긴 영물이었다.
이미 천년을 산 그 영금(靈禽)으로 인해 그녀가 강호에 출도했을 때 사람들이 그녀를
백학선자(白鶴仙子)라고 부르게 된 것은 후일의 일이다.
『무슨 일이지? 부르지도 않았는데 날 찾아오고?』
방약란은 백아의 부리를 반갑게 쓰다듬다가 물었다.
과아아….
백아가 날개를 펴면서 그녀를 보았다.
『타라고?』
과아아….
백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딜 가려는 거야?』
과아아….
이래서는 대화가 되지 않았다. 지난 일년 사이에 웬만한 건 알아듣겠지만 이런
경우에는 대책이 없다. 그저 요구하는 대로 타고서 날아가보면 알 일이었다.
그때마다 손해난 적이 없었으니까.
백학의 등에 오르면 구름바다다.
이런 아침에 백학의 등에서 보는 아미산은 아미산을 일러 왜 천하수(天下秀)라고
하였는지를 알고 남음이 있게 하는 절경이다.
속세가 아닌 듯, 그렇게 솟아오른 산봉들을 휘감고 깔린 구름바다. 그 구름바다 사이로
울울창창(鬱鬱蒼蒼) 상록교목들이 거창한 산을 덮는다. 이른바
고목삼천(古木參天)이지만 하늘에서 바라보는 아미산의 형용을 하늘에 오르지 않은
사람들이 어찌 짐작이라도 할 수 있을까.
힘차게 날개짓하며 구름 위로 두둥실 떠오른 백학은 금정봉 일대를 한바퀴 돌고는
방약란을 태운 채 길게 울음을 터뜨리면서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한다.
세찬 바람이 폭풍과 같이 인다.
안개가 흩어지면서 계곡이 드러났다.
비조절적애.
나는 새의 흔적도 끊어졌다는 그 험악한 계곡.
과아아….
백학이 길게 울음을 터뜨리면서 날아내렸다.
끄아아….
화답(和答)이라도 하는 것일까, 계곡 아래에서 굉량한 용소(龍嘯)가 터져나온다.
쏴쏴아아!
거대한 물보라가 일면서 독각룡이 한담에서 치솟아 올랐다. 마치 날개라도 달린 듯 그
거대한 몸체가 십여 장이나 날아오르는 것이다.
과아아….
백학이 길게 울면서 강철과 같은 발톱을 세워 독각룡을 마주 잡아갔다.
독각룡이 몸을 뒤틀면서 긴꼬리를 휘둘렀다.
공중에 떠오르던 몸을 뒤집으면서 꼬리를 휘두르자 그 위세는 불문가지, 귀청을 찢는
무서운 바람소리가 계곡을 뒤흔든다. 가히 천신(天神)이 휘둘러대는 채찍과 같은
위세라고나 할까?
백학조차 감히 맞서지 못하고 날개를 저어 다시 위로 날아오른다.
바로 그 순간이다.
그 등위에서 방약란이 날아내린 것은.
마치 선녀가 하강하는 듯한 자태로 훌훌 그 가공할 위세로 휘둘러진 독각룡의 꼬리가
스쳐간 자리로 날아내린 그녀는 아래로 내려가는 독각룡을 향했다.
끄아아….
독각룡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리고 날아올랐던 독각룡의 그 거대한 몸체가 한담으로 떨어졌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물보라가 하늘을 가릴 듯이 피어올랐다. 계곡을 덮은 안개가 놀라
사방으로 흩어질 정도의 장관(壯觀)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 벌어진 일은 그보다 더 놀라운 장관이라 할 수 있을까.
촤아아….
거대하게 일어나는 물보라.
그 가운데 독각룡은 빳빳이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그런 그 독각룡의 앞쪽 한담가에
자리한 집채만한 바위 위에 방약란이 옷자락을 날리면서 표표히 서 있다.
그녀를 발견하자 독각룡은 단숨에 그녀를 향해 머리를 내밀었다.
놀랄 일은 바로 그때에 일어났다.
금방이라도 그녀를 잡아먹고 말듯한 독각룡.
그런데 방약란은 피할 생각도 없이 손을 내밀어 독각룡의 머리를 쓰다듬는게 아닌가.
게다가 독각룡은 그녀의 손길을 마다하지 않고 터억하니 바위에다 머리를 올려놓고서
그녀를 보고 있는데,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의 그 흉악함은 간곳이 없고 그녀를 보는
독각룡의 눈빛은 부드럽기 이를데 없었다. 마치 친구를 보고 있는 듯하다고 할까.
『무슨 일이야? 왜 백아가 날 여기에…』
말을 하던 그녀의 눈빛이 변했다.
독각룡의 눈빛이 금방 눈물이라도 흘릴 듯 그렁그렁한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왜 그래?』
구구욱!
옆에서 백학이 낮게 웅얼거렸다.
『뭐라고?』
방약란은 얼떨떨한 눈빛으로 독각룡의 목을 보았다. 거기에는 맺힌 것이 있었다. 바로
공료상인이 금제한 용골이다. 허물이 벗겨지다 거기서 걸려 있었다.
『탈피(脫皮)?』
그제서야 방약란은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원래 그녀와 백학, 그리고 독각룡은 지난 일년여의 시간동안 매우 친해질 수 있었다.
독각룡과는 사귀기가 쉽지 않았지만 몇 달간의 노력 끝에 독각룡도 그녀를 친구로
인정한 듯했다.
그녀가 「너라고 수백년을 혼자 살아왔으면 외롭지, 안 외롭겠니?」 생각했던 것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일단 마음을 열자, 그녀가 며칠 찾아가지 않으면
비조절적애에서는 길게 그녀를 찾는 독각룡의 용소(龍嘯)가 들리곤 할 지경이었다.
특히 백학과 독각룡은 처음에는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아 방약란을 사이에 두고
으르렁거렸었지만 그녀가 가운데 들어 화해를 시켜 셋은 묘한 친구가 된 셈이었다.
오늘 백학이 그녀를 이곳에 데려온 것은 간단치 않은 이유가 있는 듯했다.
원래 파충류는 허물을 벗어야만 한다.
그것은 아직 용이 되지 못한 독각룡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용골을 금제당한 이 독각룡은 허물을 마음대로 벗을 수가 없다. 벗고자 해도
용골로 인해서 허물을 벗을 수가 없으니, 그 의미는 영원히 용이 될 수 없다는 것과
같다.
그것을 깨닫게 된 방약란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간 독각룡과 정이 들었다.
그렇기에 방금처럼 장난도 치고 독각룡 때문에 물벼락을 맞기도 했다. 독각룡은
그녀를 목에다 태우고 한담 안에까지 들어가기도 했고 주변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친구가 된 독각룡이 울고 있는 것이다.
그 눈빛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자명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그녀는 고민에 빠졌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용골을 해제해주고 싶다. 그러나 만에 하나라도 용골을
해제한 다음, 독각룡이 안면몰수를 하는 일이 생긴다면 지금의 그녀로서는 독각룡을
다시 제압할 능력이 없다. 그런 일이 생겨서 그로 인해 다른 사람이 피해라도 보게
된다면 그 책임을 어떻게 질 것인가.
갈등은 깊었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그녀의 눈앞에 독각룡의 그 처연한 눈빛이 있었기 때문이다.
『친구를 믿지 않으면 누굴 믿겠니? 너를 믿을 수밖에!』
공료상인께서 자신에게 독각룡의 처치를 맡기셨다면 그 결과도 자신이 책임지라고
하신 것일 터이다.
그녀가 품속에서 제도검을 꺼내는 것을 보자 독각룡의 눈에 흥분의 빛이 일었다.
『너를 풀어줄게. 하지만 약속해야 한다! 용골이 해제되었다고 해서 절대로
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치거나 나쁜 짓을 해서는 안돼? 알겠지?』
독각룡은 그녀의 말을 알아들었다는 듯이 그 큰 머리를 주억거렸다.
그녀는 제도검을 들었다.
제도검은 공료상인이 천하를 주유하면서 천축(天竺;인도)에 이르렀을 때, 석가세존이
열반했다는 보리수(菩提樹) 아래에서 한조각의 철편(鐵片)을 발견하고 그것을 자신의
삼매진화(三昧眞火)로 단련해낸 것이 바로 이 제도검이다. 검신의 길이가 일곱치에
불과하지만 그 날카로움은 극에 이르러 금석(金石)을 두부처럼 베어내고 온갖 사(邪)를
물리치는 탁월한 신효가 있는 신검(神劒)이었다.
지난 세월, 독각룡을 옭아매고 있던 그 업(業)의 사슬과도 같은 금룡삭이 썩은
새끼줄처럼 제도검에 의해 잘라졌다.
크워어…!
돌연 독각룡이 크게 고함쳤다.
그리고는 갑자기 미친 듯이 발광을 하는 독각룡.
일대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거대한 꼬리에 부딪힌 바위가 다시 깨어진다. 물보라가 튀고 안개가 소용돌이쳤다.
『료, 룡아! 무슨 짓이야?』
방약란이 당황해서 뒤로 물러나며 소리쳤다.
하지만 그녀의 외침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독각룡의 광란은 더욱 심해졌다.
가슴을 치도록 후회스럽지만 이젠 어쩔 수가 없다. 방약란은 안색을 바위처럼 굳힌
채로 수중에 든 제도검에다 공력을 모았다.
사력을 다해 볼 생각인 것이다.
그로부터 한참 시간이 흐른 다음, 천천히 독각룡의 광란이 멎었다.
『아!』
너무도 심한 몸부림.
거의 광란(狂亂)이라 불러야 할 그 몸부림을 견딜 수가 없어서 십여 장 밖, 절벽에
자리한 바위 위에 몸을 피했던 방약란은 천천히 가라앉는 흙먼지 속에 드러난 광경을
보고 탄성을 토했다.
믿기 힘든 광경이 눈앞에 있었다.
독각룡.
원래 이 독각룡은 뱀이 수도를 하면서 변화된 것이 아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뱀이
수도를 함에 따라 귀가 생기고 발이 생기며 수염[龍鬚] 등의 털이 나면서 머리에는
관(冠)과 같은 뿔이 생겨난다고 하지만, 이 독각룡은 공룡(恐龍)의 일종인지라 원래
발이 있어 그 힘은 가공할 만하지만 실제로는 둔한 몸이었다.
그런데 그 한바탕의 난리가 벌어진 다음.
그 엄청난 허물이 그대로 훌렁 벗겨져 한담에 둥둥 떠 있고 방약란의 눈앞에는 전혀
다른 존재 하나가 늠연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늘씬한 몸매.
굼실거리는 거대한 몸을 덮고 있는 검은빛 비늘이 달랐다. 모습이 달랐다. 긴 목 이하로
그처럼 거대했던 몸체가 늘씬하게 꿈틀거리고 있다. 반쯤 한담에 잠긴 그 몸체….
그 흉흉했던 독각룡의 머리까지 달라져 있었다. 소뿔과 같이 날카롭게 그저 불쑥
솟아있던 그 뿔이 묘하게 달라져 막 벌어지려는 관(冠)과 같이 변해 있었다.
전혀 다른 존재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과아아…』
독각룡이 크게 울었다.
원래 뱀류는 크게 소리를 내지 못한다.
내더라도 듣기 힘든 날카로운 괴성일 뿐이다. 그런데 이젠 그 소리도 달랐다.
창공(蒼空)을 찌르는 굉량(宏量)한 외침!
그것은 바로 용소(龍嘯)라 불리는 외침이다.
『맙소사! 용이 되는거야?』
방약란이 다시 탄성을 토했다.
어린 용, 앞으로 용이 되려는 용을 일러 규룡이라 한다. 독각룡은 한낱 이무기와 같은
존재에서 이제 규룡이 된 듯하였다.
『그그그…』
독각룡은 나직한 울음과 함께 화등잔과 같은 눈으로 방약란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윽한 눈빛이었다. 넓어보이는….
방금 전의 그 흉포한 모습은 찾아보기조차 어렵다.
그 모습에 방약란은 가슴을 쓸었다.
이마에 식은땀이 맺힌 것을 소매로 쓸어내며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너 때문에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난 또…』
긴장했던 것이 풀리자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녀가 바위에 주저앉자 독각룡은 머리를 내밀어 그녀에게 머리를 부볐다.
대체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귀엽다고는 절대로 할 수 없고….
방약란은 그 거대한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쓴 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알지 못했다.
이 일 또한 공료상인의 안배에서 벗어난 일이 아님을. 남을 의심하고 믿지 못한다면
깨끗한 마음일 수 없다. 그런 사람이라면 의심이 많아 잡념이 끊이지 않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결코 불가(佛家)의 대승신공(大乘神功)인 대정신공을 체득할 수 없으니 이렇게
해서 그녀는 다시 한 고비를 넘기게 되었다.
그러하기에 불가에서 일러, 참선에는 반드시 세 가지 요긴한 것이 있어야 한다 하며 그
첫째로 믿음[有大信根]을 들었고 부처님께서도 성불하는 데에는 믿음이 근본이 된다
한 것이다.
독각룡, 이제 규룡이 된 그 독각룡의 금제를 풀어주는 것으로 공료상인이 세상에 남긴
연(緣)은 종결이 된 셈이었다.
쿠쿠쿠궁….
거대하게 지축을 울리는 소리.
흰 빛줄기가 세차게 무리지어 아래를 향해 곤두박질하고 있다. 아래라면 귀청이
터져나갈 듯 먹먹하겠지만 폭포의 맞은편에서 보는 물줄기는 거대한 울림에 세찬
물소리가 더욱 크다.
과아아….
백학이 길게 울면서 그 폭포위를 날고 있다.
방약란은 바위에 기대앉아 묵묵히 곤두박질치는 폭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늘진 얼굴이 무겁다.
아직도 번뇌는, 상사(相思)는 그녀를 잡고서 놓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어려운 일.
세상에서 가장 지난(至難)한 일이 바로 사람을 그리워하는 그 마음을 끊는 일인
듯하였다.
그 수많은 법문(法文)이 다 무소용.
하긴 선사(先師)들이 남긴 그 숱한 법문, 공안(公案)들을 보고서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무슨 걱정이 있을까. 알되,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음이 문제였다.
단번뇌(斷煩惱) 명이승(名二乘)이며, 번뇌불생(煩惱不生) 명대열반(名大涅槃)이라.
-번뇌를 끊는 것은 이승(二乘)이고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 큰 열반이라….
이승(二乘)이란 소승(小乘)을 의미한다.
소승이란 크게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구하고자 하는 소극적인 자세.
스스로를 구하지 아니하고 어찌 중생을 구할 수 있으랴, 하여 소승을 발판으로 삼는
것을 불우법(不愚法)이라 하지만 그러한 것들을 알면 무엇할까.
마음이 가지 아니하는 것을.
하지만 그녀가 전과 같은 것은 아니었다.
공료상인을 만난 그 기연(奇緣)이 있은 다음, 대정신공을 연습하면서 마음이 깊은 못과
같이 가라앉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한 평정(平靜)이 그녀의 마음에 자리하지 못했다면 결코 지금의 성취는
이루어내지 못하였으리라. 비록 아직 많이 모자란다고 스스로 생각하고는 있지만….
구구국….
허공을 맴돌던 백학이 절벽에 자리한 노송의 세월로 구부러진 가지에 내려앉아 깃털을
다듬고 있다. 언제라도 그녀가 부르면 백학은 달려온다.
그것이 가끔 그녀의 욕망을 부추긴다.
천리만리 먼 고향.
금릉 응천부까지 한달음이면 달려가 할머니를 볼 수 있다. 자신을 친딸처럼 아껴주던
그 삼촌도 만날 수 있으리라.
그렇게 이따금 치미는 친인(親人)에 관한 그리움들이 그녀를 못내 흔들어 놓는다.
백학이 그녀의 곁에 있음으로 인해서 그녀는 더욱 심한 갈등을 느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가슴에 저며드는 것은 사랑임을 부정할 수 없다.
과연 그는 살아있는 것일까.
방약란은 갑자기 머리를 세차게 저었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이 폭포수처럼 흩어졌다.
『야아-앗!』
그리고 그녀는 일성 기합과 함께 바위를 박차고 날아올랐다. 그녀의 전신을 휘감은
승의(僧衣)가 세차게 휘날린다.
경대 앞에 앉아 침선(針線)에 여념이 없던 아름다운 손에 목검이 들린 지 이미
일년여다. 그 보드랍던 손바닥에 못이 박히기 시작한 것은 언제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신형은 폭포와 함께 아래로 곤두박질쳐 내려가고 있었다.
대체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
쿠쿠쿠쿠….
폭포의 거대한 고함소리가 천둥처럼 커졌다.
거대한 물줄기가 부서져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음이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순간, 방약란은 손에 들었던 목검을 휘두르기 시작하였다.
폭포를 향하여.
놀라운 춤사위였다.
폭포와 함께 아래로 떨어져 가면서 폭포의 물을 가르며 그 가른 물살을 다시 검으로
쳐내고 있어 그 형상은 가히 신기(神技)였다.
아미가 세상에 자랑하던 난피풍검범(亂披風劒法)!
물 한방울 스며들 수 없다는 그 절세의 검식이 공료상인의 진전(眞傳)을 이은 방약란의
손에 의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과아아….
백학이 길게 울면서 나래를 펴고 날아올랐다.
그리곤 곧장 아래로 내려꽂힌 백학은 폭포수 바로 아래에서 방약란을 받아냈다.
그 익숙한 모양은 이미 이러한 일이 한두번이 아님을 의미하는 듯하였다.
첫댓글 즐감~~
잘~감상~~고맙습니다~~~
ㅈㄷㄳ
즐~감 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