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라마 대장금
K -드라마로 전 세계에 알려진 대장금은 중종조가 시대배경이다.
조선시대 궁녀'서장금'이 의녀가 되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장금의 사랑과 성장을 그린 드라마이다.
11대 왕 중종의 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는 12대 왕이 되는 인종 이호(1515~1545)를 낳고 엿새 만에 승하한다.
장금은 의녀로서 원자의 출산을 돕고 왕비 장경왕후를 마지막까지 돌보았지만 왕후는 운명한다.
내의원과 의녀들의 처벌이 불가피했다. 이때 장금을 구해준 이가 중종이다.
'의녀 장금은 원자 출산에 공이 크니 마땅히 큰 상을 받아야 하는데,
왕비의 죽음으로 인해 아직 드러나게 상을 받지 못했다.
상을 베풀지는 못할망정 형벌을 가할 수는 없으니 장형을 재물로 대신하게 함이 옳다.
이것은 앞뒤 사정을 모두 참작하여 죄를 정하는 뜻이다.'(중종실록)
대장금역의 배우 이영애씨
임금의 은혜를 입은 장금은 1544년 중종이 죽는 순간까지 함께 했다.
1524년 장금은 급료를 받는 체아직을 받았으며, 중종의 간병을 전담했다.
장경왕후의 최후는 의녀 장금 뿐만이 아니라 궁의 여인들을 대거 역사무대로 불러냈다.
경빈 박씨, 희빈 홍씨 같은 후궁들은 이때부터 자신의 소생이 권좌에 오르는 야망을 드러낸다.
왕비가 세상을 떠난 이상 젖먹이 원자의 운명은 예측하기 어려워졌다.
후궁들은 각각 자기 자식을 다음 보위에 앉히기 위해 조정의 권신들과 결탁 궁중암투가 본격화되었다.
이 여인천하를 평정한 이가 장경왕후에 이어 왕비가 된 문정왕후다.
- 문정왕후 윤씨(1501 ~ 1565)와 을사사화(1545년)
중종은 첫 번째 왕비인 단경왕후 신씨를 폐출한 뒤, 이어서 왕비에 간택된 이가 반정을 주도했던 윤임의
여동생 장경왕후 윤씨다.
그러나 왕후는 1511년(중종 6년)중종의 맏딸인 효혜공주를, 1515년(중종 10년)에는 대군인 이호를 낳았으나
산후병으로 대군 생산 엿새 만인 25세에 숨을 거두었다.
윤임은 중종의 세 번째 부인으로 인종을 보살펴 줄 계비를 자신의 가문인 몰락한 양반 윤지임의 딸을 추천한다.
1517년 중전으로 간택된 문정왕후다.
문정왕후는 중종의 제2계비이자 인종의 계모, 명종의 모후다.
당시 중종은 후궁들로부터 많은 서통 왕자들을 얻은 상태였으나 적통은 장경왕후가 낳은 원자 이호가 유일했다.
든든한 친정 배경에 왕자들까지 생산한 후궁들보다도 기반이 미약했던 문정왕후의 간절한 바램과는 달리 연달아
의혜.효순.경현.인순공주 등 딸만 내리 넷을 낳았다.
문정왕후가 아들을 낳지 못하자 경빈박씨는 자신의 아들인 복성군을 세자에 책봉하려 했다.
이에 원자의 친위 세력인 누나 효혜공주의 시아버지 김안로는 '작서의 변'을 조작하여 경빈박씨와 그녀의 아들
복성군을 찍어내고 윤임과 조정의 가장 큰 세력으로 성장했다.
문정왕후는 장경왕후 소생인 원자를 키우며 자신의 보호막으로 삼았지만,
간택 20년만인 34살의 늦은 나이에 아들 경원대군을 낳으면서 정국은 소용돌이 치기 시작했다.
중전으로서 그녀에겐 장경왕후 소생인 원자 이호를 돌봐야 할 책무가 있었지만,
고대하던 아들을 낳자 문정왕후는 세자를 적대시한다.
심지어 중종 말년에는 세자가 있는 동궁처소인 자선당 화재의 배후 인물로 지목받기도 했다.
이 때부터 문정왕후는 남동생인 윤형로와 윤원형 불러들인다.이들이 바로 소윤의 축이다.
자신의 소생을 왕위 계승자로 삼기 위해 동생 윤원형과 손잡고 윤임 집안의 사람들과 목숨을 걸고 정쟁을 하였다.
세자편에 있는 장경왕후의 오빠 윤임을 둘러싼 대윤과 경원대군편에 있는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을 둘러싼
소윤의 대립이다.
드라마속의 윤원형과 문정왕후
- '대윤'과 '소윤'을 칭할 때 세자편에 있는 대윤의 영수 윤임은 세자의 외숙이자 장경왕후의 친오빠다.
장경왕후의 친정은 대대로 왕비를 배출한 당대의 최고 가문이었던 파평윤씨로 외삼촌이 중종반정의
1등 공신인 박원종이었으며 세조의 아들 월산대군에게는 처조카가 된다.-
대.소윤 대립속에 중종이 승하하자 세자인 이호가 (인종) 즉위했다.
이로써 대윤인 윤임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문정왕후는 대비가 되었다.
인종은 사림파를 중용하며 정치에 열정을 보였지만 병약하여 재위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인종이 후사가 없어 왕위는 이복동생인 경원대군(명종)이 12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다.
이에 어머니 문정왕후가 나이 어린 왕을 대신하여 수렴청정하며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였다.
문정왕후의 수렴정치로 권력은 그녀를 둘러싼 소윤 세력으로 급격히 옮겨갔다.
명종이 즉위하자 윤임에게 보복할 기회를 얻은 윤원형은 문정왕후의 밀지를 받고 대윤 일파가 종묘사직을
위태롭게 하려고 모의했다며 대거 피바람을 일으켰다.
대윤인 윤임을 비롯한 장경왕후의 친정 가족들은 문정왕후와 소윤 세력에게 역모죄로 몰려 대거 숙청당했다.
을사사화다.
을사사화는 명종의 왕위를 확고히 한다는 명분을 표방하였지만, 실제로는 소윤과 문정왕후의 정치적 입지를
확고히 하고 나아가 훈구세력이 사림을 견제하고 정권을 잡는 기회가 되었다.
여인천하 문정왕후역의 전인화씨
- 을사사화의 여파, 1547년(명종 2)양재역 벽서사건, 대윤. 소윤의 피 튀는 싸움
그로부터 2년 뒤 '양재역 벽서사건'이 일어나자 문정왕후와 측근 형제들인 윤원형, 윤원로는
또 다시 자신의 반대파를 유배 보내거나 죽이는 등 대대적인 숙청을 감행하여 또 다시 피바람이 불었다.
1547년(명종 2) 9월 경기도 과천 양재역에 '문정왕후가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등이 권세를 농락하고
있다'는 내용의 벽서를, 부제학 정언각이 발견한 양재역 벽서에 이기 등은 이러한 벽서를 붙인 것은
을사사화의 잔당이 행한 짓이라며 그들의 처벌을 주장하였다.
문정왕후는 을사사화의 죄인을 처벌할 때 주동자만 처벌하고 추종자를 처벌하지 않은 것이 양재역 벽서사건의
원인으로 파악한다.
영특하기로 소문이 자자한 중종의 후궁 희빈홍씨 소생 봉성군 이완을 양재역 벽서사건의 화근으로 지목하여,
희빈을 비롯 봉성군 이완을 제거하고 송인수, 이약수 등은 사형, 권발, 이언적, 정자, 노수신, 유희춘, 백인걸 등
20여 명을 유배하였다. 양재역 벽서사건은 '정미사화'라고도 한다.
이처럼 소윤을 중심으로 한 집권세력은 반대세력을 철저하게 제거하면서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이 과정에서 타격을 입은 사림은 정권의 핵심에서 벗어났다.
대윤 윤원로가 소윤 윤원형과의 세력다툼에서 밀려나 사사되자,
소윤계는 윤원형과 정난정을 중심으로 움직였다.
문정왕후는 윤원형의 정실부인을 내치고 관노비 소생의 정난정을 정경부인으로 올려주었다.
정경부인이 된 정난정역의 강수연씨
1553년 8여년의 수렴청정을 형식상 끝내고 명종이 친정하였으나, 실질적인 권력은 문정왕후에게 있었다.
명종 즉위 후 20년간 계속된 문정왕후의 절대 권력은,
1565년(명종 20) 창덕궁 소덕당에서 65세로 세상을 떠나면서 외척 윤원형의 시대도 막을 내렸다.
문정왕후 사후 척신 윤원형과 정난정은 사림파의 탄핵을 받고 황해도 강음으로 유배되었다가 정난정은 자살하고,
윤원형은 화병으로 죽음을 맞았다.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죽자 병약했던 명종은 친정 2년 만인 1567년 6월 28일(음) 34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떴다.
재위 22년 만이었다.
명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명종의 비 인순왕후는 시아버지인 중종의 후궁 창빈안씨가 낳은 중종의 일곱째 아들
덕흥군(훗날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 하성군을 명종과 자신의 양자로 들여 왕위를 계승하니 이가 바로 선조다.
이로써 조선개국 이래 왕통이 방계(서통계열)로 넘어가, 이후 조선은 선조부터 마지막 순종까지게 이어진다.
선조가 16세에 즉위하자 인순왕후가 8개월간 수렴청정을 한 후 물러났다.
인순왕후는 1575년(선조 8)에 44세로 세상을 떠났다.